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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05
    목회자의 실수
    목동
  2. 2007/10/29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때
    목동
  3. 2007/10/22
    성령으로 사는 사람
    목동
  4. 2007/10/18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크리스천의 삶
    목동
  5. 2007/10/16
    인간의 선택과 신의 섭리
    목동
  6. 2007/10/16
    하나님의 창조명령
    목동
  7. 2007/10/12
    크리스천의 사회생활
    목동
  8. 2007/10/07
    아름다운 여인 룻의 비장한 선택
    목동
  9. 2007/10/03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 가?
    목동
  10. 2007/09/28
    영원토록 있는 말씀
    목동

목회자의 실수

주일 새벽에 일어나 시간을 보니, 오전5시55분쯤이 되었다.
새벽기도 갈 시간이 지나서였다.
새벽기도를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요즘 나의 마음에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도 캄캄하곤하여,
섬머타임이 해제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혹시 섬머타임을 해제하는 때가 아닌가 생각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아침에 컴퓨터를 켜서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이 늦게 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오늘부터 섬머타임이 해제되는 가보다 생각을 하고,
한 시간을 벌었다고 착각하고서,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였다.
아직도 밖은 캄캄하며, 섬머타임 해제시간으로 적당한 시간이 조정되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느긋하게 교회 갈 준비를 하고,
시간을 늦게 맞추어 놓았다.
집사람과 아이들에게도 섬머타임이 해제되었다고 하면서
시계들을 한 시간을 늦게 가도록 맞추어 놓았다.
그런데 10시 15분(11시 15분)이 넘어가는 시각에,
심전도사님이 전화를 하셨다.
다급하게 “목사님, 성도님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간인데, 어떻게 안오시는지?” 나는 전도사님께 여쭈었다.
오늘 섬머타임 해제하는 날이 아닌가요?
전도사님 대답하기를, “다음주일부터입니다” 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식구들과 함께, 교회를 오게 되었다.

하나님께도 죄송하게 예배 시간을 지키지 못했으며,
만나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나 집사님들에게
"아이쿠 늦어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연발하면서
황당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3주전부터 예배 시간을 정시에 드리자고 주보에 광고하며,
교역자분들과도 서로 다짐을 하였는데 내가 오히려 늦어버렸다.
기다리시는 분들 모두에게 죄송할 뿐이다.

교회의 리더인 목회자가 실수하면,
그 피해는 성도님들이 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목회하면서 시행 착오하는 일이 없었으면 바라지만,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사실이다.
목양을 하는 일은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인간의 할 일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고,
그들의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하는 일이란,
쉽지 않지만, 보람 있으며, 영광된 일이다.

목회자와 성도간의 관계는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사라질 일들이 아닌
영혼의 고향을 함께 향해가는
영원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사역하는 일이다.
고로 참으로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소중한 만남이며,
목양의 일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을 다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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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때

전도서 11:9-12:8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짐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 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 것이라
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 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 깨어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청년의 날은 혈기 왕성한 인생의 날들이다.
마음껏 자신을 펼 수 있는 젊음이 있고, 힘이 있다. 시간도 있으며, 명석한 두뇌도 있다.
그리고 장래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젊은 날을 즐기며, 그 날들을 만끽하는 것은 젊은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젊은 날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그것을 기뻐하며,
그 날들에 하고 싶은 것들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된다.
그리고는 젊음의 자유가 주는 기회를 마음껏 누린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즉흥적이며, 찰나적인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며,
그것에 온통 자신이 빠져버린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절 감각을 잃어버리면,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감각적이고 유희적인 일에 몰두하게 되어
자신을 방종으로 혹은 방탕으로 몰아간다.
그러다가 결국 슬쩍 곁길로 빠져나가는 어둠의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며, 퇴보하기도 한다.
그런 일에 반복하다 보면 자신을 패인으로 만들기가 십상이다.
그리고 그 후에 삶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가치 구조에 자신을 내 맡기게 된다.
결국 그러다가 후회하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인생의 일에 대해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결산을 하며, 셈을 하여, 평가하고 심판하신다.

방종과 방탕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면, 자신 안에 깊은 근심과
절망감을 뿌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기 염려나 혹은 방종이나 방탕 하는 일에 대한 근심이 사람을 사로 잡을 때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결국 마음과 몸이 모두가 병이 든다.
그리고는 인생의 절망에 이르는 병에 걸려 버린다.
방종이나 방탕은 인생의 삶을 악으로 치닫게 하여,
그 어둠의 영향 아래에 머물러 버리고, 선한 모습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악한 인생의 길에서 자신을 마구 더럽히며 악인의 냄새를 품기며
헛된 일에 지절대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이나 젊은이 때를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깨끗한 그릇에 더러운 것을 담기도 쉬우며,
백지와 같은 자신의 속에 마구 주변의 좋지 않은 영향들에 쉽게 노출되어
자기 조절이나 자기 방어 없이 다가가다가는
여지없이 더럽고 악한 일에 물들고 마는 것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신을 세우며, 자신을 조절하며,
자기를 발전시킬 것 인가를 늘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단도리 할 수 있는 뜻있는 일에 자신을 몰입하여 지내는 것이 좋다.
뜻있는 일이란 어떤 일이겠는가?
자신을 바로 세워 줄 수 있는 원칙이나 가치관을 좇아가는 일이나.
혹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올바르게 제시하여
가르쳐주는 삶의 원리들을 따르는 것일 것이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런 일들에 하게 하는 것인가?
인생에 대해 가르쳐 주고 인생을 배울 수 있는 진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진리를 찾아가는 철학의 여행을 나서는 가 아니면,
인생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스승을 찾아가는 것인가?

청년의 때란 방종하기 쉬운 때이며 방황하기 좋은 시절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이 곤고하다는 느낌이나
체험을 경험하는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곤고한 일들이 무엇인가?
인생이 곤란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당하면 황당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미혼모가 아이를 낳는 다든지,
애송이 청년이 문란한 성적인 유혹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 되는 일이라든지,
그리고 주변의 어둠의 유혹에 어리석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자신의 몸도 감당할 수 없는 마약에 빠지는 일이라든지 등등
자신을 망치게 하는 일들이 바로 인생이 곤고해지는 것들을 겪는 것이다.
그래서 활기찬 젊은 날의 아름답고 살만한 인생이 겨우 지탱하며
허우적대는 삼류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도 결국 먼저 걸어간 후회하는 인생들의 발자취를 밟게 되어
정처 없이 이리저리 쓰러지며 겨우 생존하는 삶을 연명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오도록 젊은 인생들이 아무것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면
너무 안타깝고 허무하며, 불행한 젊은 인생의 후회막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을 있게 한 나의 인생의 주인에게로 가야 하겠다.
나를 흙으로 빗었으며, 그의 신으로 조성한 몸 안에 있는
그 고구한 영혼의 절규가 자신의 영혼의 고향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 까?

해가 지고 달도 빛을 잃을 날들이 다가온다. 인생도 종말을 향해 달려가며,
역사도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다.
모든 인생들이 다만 같은 방향으로만 달려갈 뿐이다.
시작과 더불어 종착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닌가?
비가 온 뒤에 그 비를 몰고 온 구름이 더 자신의 삶의 주변을 덮기 전에,
구름이 모이면 비가 내리듯, 인생의 모든 일들이 다 자기가 뿌리대로 거두며,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해 움직여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에 겪는 일로 인하여 과거의 인생의 업보를 탓하기 전에,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의 날들을 바라보는
인생의 혜한을 열고 종말을 향해 줄달음하는
인생의 시간이나 역사의 경주의 도상에서, 이 헛된(빨리 지나가기에)
시간의 찰나에 있는 자신을 건져줄 구원주를 만나기를 힘쓰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곤고한 날에는 자신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으며,
자신을 지탱하는 것들이 힘을 잃게 된다.
평소에 힘을 자랑하며 지혜를 내세우며,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재능이나 명예, 권력, 혹은 소유물) 의지하였는데,
그런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는 곤고한 날들이 자신의 삶에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지탱하는 힘있는 것들이 다 무너져 자신을 받쳐주지 못한다.
인생이 경험하는 일들 중에 맷돌질하듯
자신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들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갈고 으깨어 부수어 뜨려 자신의 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언제나 좋은 것만을 담는 것이 아니다.

언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
자기 인생의 허망하다고 느낌이 올 때인데,
그 때는 무엇을 해도 허전하고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겪을 때 일 것이다.
전능자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 자기 한계에 깊이 느낄 때에,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주변에 가까이 계시다고 느낄 때에
그리고 인생의 헛됨을 알기 전 젊은 날에
그리고 나이 들어서 기력이 쇠할 때에
힘의 근원을 잃을 때에 인생의 힘의 원천이신 그분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인생의 삶이 다하는 죽는 순간에 그분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것은 행복한 인생의 종말이다. 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 그분이 나의 창조주이시니,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 창조주이시다.
그분을 만나야 인생의 길이 보인다. 그분을 만나면, 인생 자기를 구원하게 된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가 그분이 영이 신고로 기도하면서 그분을 만나고 경험한다.
그리고 인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그분과의 만남 안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그분의 도움을 구하므로 자연스럽게 그분을 만난다.
그리고 답답한 일을 만났을 때에 영혼의 창을 열고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젊은 날의 추억은? 인생이 즐겁다, 살만하다, 힘이 있다, 젊음이 아름답다.
그리고 마음껏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을 명심할 것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자신에게
시간과 젊음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평가와 판단을 받으며,
나중에는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이다.
성경 이야기 중에 경솔한 젊은이 이야기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다.
그는 자유와 독립심을 좋아하는 성격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 나가 살아도 될만한 인물의 준비도 되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청구하여,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 외국에 가서 살았으나,
결국 자신의 소유물을 다 허비하고,
결국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을 처지인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되었다.
그는 실패하는 젊은이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성경은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며,
인생의 쓴 교훈들을 언급하고 있다.
인생이 헛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는 인생이 짧다는 것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은 많으나 그것을 다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 있어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직 나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다 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게 하는 주어진 제한된 자기 시간이
마구 흘러가기에 흐르는 물처럼 빨리 지나간다.
고로 인생은 가치 있는 일을 하기가 쉽지 않으며,
결국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기에,
흙만 바라보고 살아서는 헛된 삶을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인생의 헛됨 에서 구원받을 길은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러면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1. 그가 창조주이시다.
2. 그가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다. 3. 그분에게 다가가 그분을 찾고 구하라.
그리고 그분을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

성경의 이야기 중에 젊음에 대해 예수님의 복음이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먼저 영원한 젊은이 이신 예수님의 사역은 젊은 날에 이루어 졌다.
33세에 다 이루었다. 그 사역 중에 십자가와 죽으심 외에
예수님의 사역 중에 죽은 자를 살리신 사역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셨다.
그것은 고귀한 젊은이들을 죽음에서 살리신 사역을 하셨다.
먼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 그 죽은 아들은 독자였다.
그 과부이야기는 누가복음 7:12-16에 있다.
또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
그 딸도 무남독녀로 아버지에게는 귀한 딸이었는데, 죽음 일보 직후까지 갖다.
예수님의 가까운 이웃이었던 나사로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3남매의 가정에 가장인데 그도 젊은 날에 죽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싱싱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과부의 아들은 독자이다.
야이로의 무남독녀이다. 나사로는 가장이다.
젊은이는 보배이다. 이슬 같은 청년들, 주님의 은혜를 머금은 젊은이들이다.
당시에 주님은 이런 젊은이들을 살리셨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젊은이들을 살리신다.

때를 아는 지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현재만이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 그것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필요하다.
시간의 헛됨의 찰나에서 그래도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생의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다.
시간을 쓰는 인생 자신이 아니다. 고로 인생을 사는 자기 시간은
하나님과의 정해진 약속의 선상에 있다. 몇 년 몇 일 몇시 까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런 면에서 시간은 내게 제한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 가는 나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때가 다가온다.
또한 그 시간은 인생에게는 계속해서 흘러가는 손에 잡히지 않는 특성이 있다.
내 주위를 흘러 지나가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고로 시간 속에 있는 나는 항상 젊은이로 있지 않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자신을 어느 덧 젊은이에서
인생이 시들어가는 노년의 삶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도서는 인생의 헛됨을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 없는 인생의 가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인생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지속했으면, 행복도 즐김도, 기쁨도, 좋아하는 것에 안주하고 싶지만
인생은 지속적으로 그렇지를 못한다.

전도서에서 37번이나 헛되다라는 말이 나온다.
전도서는 인생 철학서로 인생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부귀와 광명과 명예와 지식을 가져보았던 솔로몬이 노년에 쓴
인생 경륜에 대한 입문서이다.
전도서는 한마디로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인간의 모든 추구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인생사는 것이 헛되다라고 하는 데는 세상의 이런 면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1. 세상이 불의하다, 2. 세상이 불합리하다. 3. 세상은 모순이 있다.
4. 시간을 살아가는 나는 세상과 나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도서에서 전도자가 자신이 가져보았던 여러 가지 세상의 욕구들을 생각해보면,
즉 옷을 잘 입는 것, 명예를 갖는 것, 소유를 갖는 것, 애정을 나누어보는 것,
권력을 갖는 것 등 여러 가지 경험해 보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을 다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젊은 이들이 밤새 게임을 하는 것도 그렇다.
게임을 해도 해도 그 게임에 대한 갈증이 더 생긴다.
내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자기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한다.
연예를 하고 싶어도, 끝없이 사랑추구에 목매달게 되며,
지나친 성욕 추구는 만족보다는 더 진한 애정행각에 목마르게 되며,
또한 그런 욕구 발산도 어느 하나를 지속적으로 계속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그런 일을 한가지만 하다 보면,
거기에 탐닉이 되어 자신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젊은이 상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젊은이는 우선 그 때가 약속의 때라고 할 수 있다.
젊은 날의 인생은 앞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기회를 기다리는
즉 가능성에 대한 많은 보장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젊음은 힘이 있고,
지혜가 뛰어나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의 보장이 있고, 가능성의 기회들이 있다.

미국의 두 사람의 젊은이들이 어느 날 교회 앞을 지나다가,
한 젊은이는 교회로 들어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여 그는 나중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친구는 그 제안을 뿌리치고,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감옥에 드나들기를 제집 드나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자기 친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때는 그 친구는 감옥에 있었다.

청년의 시기는 실수를 자주하는 때이다. 또한 그 세대는 죄에 빠지기 쉬운 세대이다.
경험이 없고, 미숙하고, 판단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수치스러운 일,
불명예, 추잡한 음란한 일에 빠지기 쉽다. 포르노에 빠지는 일, 죄에 탐닉하는 일등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젊은 동생, 판단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해서, 타국에 가서 살았으나, 망해버렸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더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도 자기 독립심과 자유의 방종에 맡긴다.
그러나 그런 자유나 독립에는 반드시 책임 의식이 따른다.
청년의 시기는 아직 인생이 견고해지지 않은 약한 때이다.
그래서 자신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는 시기인 것이다.
앞으로 어른이 되어서 할 일을 준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기간이다.
그 때에는 인생의 기초를 닦는 시절이다.
젊을 때에, 결혼식장에 가기보다는 장례식에 가서 인생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전도서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인생을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고로 젊은이 시절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다.
그 에게만 시간이 과거,현재, 미래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손안에 있을 때에만
시간이 우리 것이며, 금방 지나가는 것이다.
젊은이 시절이 엇그제 같은 데, 벌써 반백이 되며, 백발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 에게 딤후 2:22, 젊은이의 헛된 열정에 빠지지 말고,
의, 믿음, 소망, 평안을 추구하라, 젊은 시절에 경건에 훈련을 거듭하라,

젊은이의 상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으로 힘과 약속이 있다.
반면에 부정적인 면에는 젊은이는 인생 경험이 적어, 어리석게 되기 쉬우며,
미숙하여, 판단을 잘 하지 못해, 원치 않는 죄에 빠지기도 쉽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젊은이여, 시간 관리를 잘하자, 현재하는 일에 충실하기,
그리고 나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계획 있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잘 섬기자,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에 힘쓰며,
그분을 어떻게 섬기는 가를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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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사는 사람

로마서 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 뿐 아니라
    할 수 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크리스천의 생활은 무질서와 혼돈 가운데에 있는 이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의 조화와 질서 가운데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의 영의 인도를 받는 생활이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의 영을 통해 그분의 구주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그분의 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되며, 그분을 나의 마음에 다스리시는 주인으로 그리고 나의 삶의 중심에 주님으로 영접하게 된다.

그분의 영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 하실 때에, 만물의 조성자로 만물 가운데에 생명력으로 역사하셨다. 이제 그 영은 생명의 영으로 믿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새 성품을 심는 재창조의 사역을 행하신다. 그 영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크리스천의 삶을 이끌어 가며,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한다. 그의 영이 계신 곳에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굴레를 벗겨 버리고 진정한 자유의 혜택을 누리며 살게 한다.

과거에 그리스도밖에 있는 인생들은 자신 안에 있는 번민과 갈등의 현상 속에서 원하지 않는 죄악의 늪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죄와 심판의 사슬에서 풀어 내어 자신을 정죄하지 않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평안 가운데에 살게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원죄의 굴레에서 왜곡된 인간 본성의 이탈에서 오는 부조화의 갈등에 있어서, 늘 죄의 영향력 아래에 머물며, 자기 왜곡과 불안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그분을 통해 참 평안을 맛보며 자기 안에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여 그 분의 인도와 영향력으로 비참한 인간의 모순된 상태에서 벗어나, 참 인간이 되어가는 길을 발견한다. 과거에 받은 잘못된 조상의 유전이나 가족등 주변의 사람들의 좋지 않은 영향과 환경에서 오는 알 수 없는 몰이해에서 그분의 섭리를 발견하여 구원받은 인생의 새로운 길을 살아간다.

그 분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 모순이나 거짓된 자아의 현상에 시달리지 않으며, 참 자신을 찾아가는 길을 발견하며, 그 분이 제시한 올바른 인간 자신의 자기 변화와 개선과 완성의 길을 향하여 줄달음하게 된다. 과거에는 자기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삶을 살다 보니 항상 부정적인 시각과 제한된 자원 속에서 자기 한계와 불만을 가지며 살았지만, 이제는 자신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우리 자신을 보시는 관점을 갖고 살게 되어 모든 일에 가능성을 보며, 믿음 안에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간다.

예수님 안에 있음은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모든 혜택을 받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한 삶의 저주를 담당하여 우리 삶의 그림자와 같이 따라 다니는 죽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생명은 그분의 영이 인생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들어오신 이후에 오게 되며, 그 생명이 주는 구원의 기쁨과 삶의 풍성함의 혜택을 누리며 산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살면서 죄의 영향 아래에서 살며, 그 죄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단절과 죽음의 형벌을 받으며 살게 된다. 그래서 늘 죄와 죽음 사이에 있는 불안과 절망과 고통의 연속선 상에서 살아간다. 손을 움켜지고 울며 태어난 어린 생명은 평생을 사는 동안 죄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인생의 부조화와 불합리의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어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죄가 품어대는 악의 불안함 속에서 번민하며 살아간다. 누가 그런 인간의 상태를 벗어나게 하겠는가? 사람이 스스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노력들 중에서, 세상의 고상한 도덕이나 혹은 비상한 철학적인 가르침으로도 할 수 없으며, 더욱이 갖은 고난의 수양을 쌓아도 자기 안에 있는 모순이나 불안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그 죄의 사슬의 영향을 풀어내는 것만이 살 길이다. 그 죄와 그 죄의 영향력에서 해방되고, 인간 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길은 그 인간의 죄를 담당한 존재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생노 병사의 길에서 백팔번뇌와 같이 무수한 인간 문제의 현장에서 고민하며 때로는 곤란을 당하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고로 인간은 그 깊은 근저에서부터 참으로 행복 하고저 하는 바램이 있으며, 늘 변화무쌍한 일시적인 인생의 삶에서 변치 않는 영원의 지속을 갈구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법을 지키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적인 구속력을 따라 살아간다. 만가지 법을 지켜도 하나의 법에 저촉된 행동에 대해서는 다시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법적인 구속을 받는다. 법을 어기면 법이 집행하는 대로 형벌이 따른다. 인간의 육신적인 삶은 인간의 육체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육체의 제한 안에서 육체가 바라는 대로 추구하며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육체란 흙에서 온 것으로 육체란 언제 가는 다시 육체의 근본인 흙으로 돌아간다.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흙으로 사라질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육체를 따라 사는 길은 그 육체가 욕구하는 것에 충실히 따라야 생존한다. 그렇지만 그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낡아지고, 상해지며, 퇴락해가는 것이다. 그 육체로는 사람을 다시 살리는 길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그 인간 예수를 통해, 죄 있는 인간의 문제를 안고 그가 입은 죄의 육체성를 통해 죄와 그 대가의 형벌인 죽음을 당하시므로, 인간의 육체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거기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인간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셨다. 피 흘리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사죄를 받아,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새로운 인간을 이루어 갈수 있는 길이 열려 졌다. 주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육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또한 열렸다. 그리고 그가 보내신 영이 사람들 속에 와서, 죽은 인간의 영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고로 그분의 영을 모신 이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며 서로 교제하며, 소통할 수 있는 영적인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영적인 인간의 육체 속에 있는 인간의 영을 움직이게 하는 영적인 영향력이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린다. 고로 그 영적인 영향력이 인간 속에 오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비록 흙으로 지음 받은 육체를 안고 사는 인생일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다시 살리시는 생명력이신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들은 자기 속에서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우신 법의 요구들을 그 영의 영향력과 주도권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된 존재로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살아가며, 그 영의 도움과 인도를 통해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갈수 있게 된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흙에서 만들어진 육체성의 요구대로 육체의 본능을 중시하며, 그 본능이 욕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 육체성은 하나님께로 오신 영적인 영향력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결국에는 육체의 본능의 욕심에 좇아가기 마련이다. 그 욕심은 끝없는 인간의 욕구 충족을 따라가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가운데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나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을 받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영의 추구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하나님의 영혼 만족의 추구를 따라 살며 생명 살림의 그 영의 인도를 받아,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로 나아가게 한다.

육신은 흙으로 왔기에 언제 가는 사라지는 즉 끝나가는 존재의 형질로 이루어 진다. 그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길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이며, 죽음의 길에서 얻는 불안과 불만과 절망의 나락에 점점 빠져들어 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다시 살게 된 영인 인간의 영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계속되는 교제 안에서 그분을 통해 받는 모든 생명의 혜택을 받으며, 인간의 영혼의 자리인 마음속에 조화와 질서의 세계에서 맛보는 평안을 얻는 다.

인간의 마음이나 두뇌에서 나오는 인간의 생각은 그 방향성에 의해 나뉘어 진다. 크게 두 방향성은 영의 방향과 육의 방향이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영이신 하나님의 영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며, 그것을 통해 그분의 의도를 따르게 된다. 그렇지만, 육신을 좇아가는 육신적인 사람은 자기 속에 모신 하나님의 영의 생명력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생명의 법을 따르지도 못하며,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세우신 법 조차에도 순종하지 않는다. 육체의 본능의 추구에 따라 자기 욕구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 영의 의도를 감지하지도 못한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이신 하나님의 영의 의도를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자신의 육체의 좋아하는 것 즉 그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영적인 일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육체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육체의 본성이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와 죽음의 법 아래에서 삶의 저주 아래에 놓여있다. 예수님은 이세상에 오셔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위해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마련하셨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갈 수 있으며,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적인 일을 할 수 도 없으며,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그분의 영을 모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시며,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시므로 육체의 한계성을 극복하여, 육체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위해 영적인 삶을 제공하신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비록 육체 안에 살고 있지만,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이다. 육체의 몸은 죄의 본성으로 인하여 죄의 영향력을 받지만, 영으로 살게 되면 영이 육체의 몸을 이끌어 가는 생활을 하게 되어, 하나님과 옳은 관계안에서 살며 그분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그분의 영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의 영으로 임하셔서, 우리를 살리시며,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길을 살아가게 하신다. 그의 영은 죽은 사람들을 살리며, 죽어가는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즉 영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 영의 사람으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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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크리스천의 삶

베드로전서 2: 18-25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종으로 살 것을 권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도 인내할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이 자신의 삶을 섬기는 자의 삶으로 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고난 속에서 그는 자신이 좋은 모델이 되어주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하셨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종이라고 하는 말은 일반적인 노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봉사하는 청지기로서의 봉사자를 의미한다. 이들에게 주는 권면은 자기가 섬기는 상관이나 주인이 좋은 사람에게뿐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잘하라는 것이다. 직장에서 동료나 상관에게 인정을 받는 길은 다른 이를 섬기는 태도를 통해 자신의 진가를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는 사회에 남을 돕고 섬기려는 이웃은 누구나가 인정을 하며, 환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 사회나 단체에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당함을 당하는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부당한 일에 대해 잘못된 행동으로 반응하면, 자신의 의로움이나 자신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 앞에서 덕이 되지를 못한다. 부당한 고난을 당하거나 힘 드는 일을 만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기억할 만한 일로서,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입히실 것이다. 인생을 살 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이 된다.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낙심하거나 불평해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좋은 일과 형통함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범적인 삶을 살 것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성품이나, 태도나 행위에 있어서, 그는 크리스천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특히 그는 누구보다도 고난을 깊이 겪으셨고, 부당한 삶의 환경이나 주변인들의 무시와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델을 보여주셨다.

주님의 본은 그가 죄가 없으심에도 그는 죄인 취급을 받는 중에도 자신의 고난이나 고통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맞서서 항변하거나, 혹은 말로 사람들에게 욕을 하거나 그리고 거짓으로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으셨다. 또한 타인에게 위협적인 태도로 악을 범하지 않으시고, 그는 자신에게 당하는 고통이나 형벌이나 십자가의 죽으심에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침묵으로 담당하셨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셔서, 죄인들인 인간들을 위해 친히 자신이 죄인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죄와 악을 범하는 모든 현상에 대해 결코 인간은 거기에 대해 자유 할 수 없으며,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간이 죄에 대해 더 이상 죄의 영향력에서 살지 않고, 죄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죄와 악의 소멸의 길을 보여 주셨다.

주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나 십자가의 고난은 고난 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인생 자신에게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제공하신다. 그의 고통과 아픔은 우리들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치료하신다. 그의 좌절과 실패와 같은 십자가의 고난은 실패와 좌절에서 우는 우리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제공한다. 특히 병중에라도 그의 채찍에 맞으신 그의 상하고 찟기신 육체는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당하는 죄로부터 오는 모든 삶의 저주와 고통에 종지부를 찍으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우리 삶의 고통과 좌절과 실패와 절망의 나락에서 회복되어 잘 살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인생의 리더가 되시며, 영혼과 생명의 감독이 되시는 그분에게 나아가서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지도와 도움을 바라며, 그분과의 지척에 가까운(생명을 나눈, 그리고 그분과 삶과 생명을 공유한 관계이므로) 관계로서 늘 그분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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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택과 신의 섭리

룻기 1:15-22

이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이다.
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이다.
룻기는 “우정”이라는 뜻이며,
룻기의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려운 사사 시대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당시는 배교와 전쟁과 몰락과 강포와 도덕적 부패와 반란의 시대임을 보여준다.

나오미는 이제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처지에서 며느리들에게
자기의 고국이나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것을 권면한다.
나오미의 며느리들은 모압 여인들이었다.
그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동족이나 신에게로 돌아가라는 시모의 권면에 따라야 할 것인데,
오르바는 시모의 권유를 받아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새로운 남편이나 새 삶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룻은 자신의 선택을 시모인 나오미를 택하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1 모험과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을 선택이다. 룻은 시모가 사는 곳에 자신도 살며,
시모가 죽는 곳에 자신도 그 곳에 죽겠다고 한다.
현실적이지 않고 희망이 없는 시모를 선책한다.
인생에 있어서, 투자를 하거나 선택하는 일에, 신중하게 지혜가 필요하다.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선택도 필요하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선택은
현실적이고 보이는 것에 대한 선택하는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룻은 자기 동족에게로 가면, 순탄할 것이다.
그러나 시모를 선택하는 일에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보장이 없다.
이스라엘에 수혼법이 있다. 그 법은 형제가 아내를 두고 죽었을 때에
그 밑에 형제가 대를 잇는 법으로 자녀를 생산하기도 한다.
여인에 대한 자비의 법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대를 이어가려는
이스라엘의 지혜에서 나온 법이다.
그러나 나오미의 며느리들에게는 이런 기대도 가질 수 없다.
다만 시모를 모셔야 하는 수고만 있을 뿐이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곳을 선택하는 모험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봉사와 희생의 선택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효성으로 시모를 보호하려는 봉사하려는 생각이며,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따르는 선택이다.
며느리로서 시모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순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며느리 전성시대라는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도 우리네, 삶에는 인간의 윤리가 중요하다.

룻의 선택은 그녀의 신앙을 나타내는 선택이 었다.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는 것과 또 다시 우상숭배의 죄로 가기 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신앙의 동기가 선택의 중심이 었다.
이방인이 개종하려면, 안식일이나, 절삭일들을 지켜야 하며,
113가지의 율레들을 지켜야 하는 수고가 따라야 한다.
이방인에게는 때로는 이스라엘의 법은 엄하며 지키기가 용이하지 않다.
더 나아가 간음한 여인에게는 돌로 쳐 죽인다든지
중한 죄에 대해 목을 매어 사형하는,
엄격한 윤리가 적용되며, 시행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윤리는 세상 사람들의 도덕보다는 높으며,
자신을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룻의 선택이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선택은 1. 남을 도우려는 선택이며,
2. 순리를 따르는 선택이며, 희생과 모험이 따르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이방인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좇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6번씩이나 어머니라고 부르는
룻은 시어머니에 대한 효정이나 애정이 지극한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려는 의지는 믿음에서 나왔다.
시모와 오랫동안을 살은 며느리는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믿음의 마음이 있었다.

오르바는 결국 우상숭배하는 자기의 동족으로 돌아갔다.
오르바의 선택은 때로는 인간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모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남편을 구하고자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룻은 자기 가족 친척을 버리고,
민족성을 버리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다.
고로 그녀의 선택은 비장한 선택이 었다.
끝가지 시모를 좇아가려는 아름다운 효의 선택이 었다.
앞으로 남편이나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도 있는 선택이 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삶을 한 단계를 높이는 귀한 선택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일취월장하게 하는 고결한 선택이었다.

그녀에게는 다만 희생과 봉사만이 요구되는 모험의 선택이었고,
희망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결과를 졸 때에 그녀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신의 섭리는 시모를 모시려는 그녀에게는 덤으로 잘사고 유력한 남편과
또한 자녀를 낳는 복을 주었으며,
자기 동족과 우상을 버리는 그녀의 결단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으로서 택함을 입었다.
그 뿐아니라 다윗의 증조 할머니로서 왕족의 가문에 들어가며,
장차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위대한 은총과 영광을 얻었다.

룻의 선택의 이면에는 이렇듯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느끼는 섭리가 있었다.
반면에 이방 땅인 모압지방으로 이민 생활을 선택하고 고국을 떠난 나오미는
그의 이민생활에서 얻은 것은 오직 실패하는 인생뿐인 것이었다.

나오미의 실패는 고통과 우울을 주는 삶이 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쓰디쓴 인생의 맛을 맛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분명한 이스라엘인의 신앙도
그녀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을 가졌을 것이다.
신앙인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다운되는 그런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괴로와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이나
다가오는 미래를 제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실패와 고통에서 괴로워하는 그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에 넘어있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의 의도와 계획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섭리신앙에 대한 인간의 한계이며,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순종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오미는 마치 한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이민의 삶을 살려고 왔지만,
다 잃어버리고, 실망과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쓰디쓴 나날들을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나, 그분에 대한 신앙이나 존경보다는
주님에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 그리고 한탄스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울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실패와 자절에서 겪는 상실에서 오는 고통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넘어뜨릴수 있으나,
신의 섭리아래에 있는 인생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 상실을 넘어서는 때에,
자신은 더욱 강한 자로 세움을 입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실패를 딛고 진행된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형제들에게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가,
주인 보디발집에서도 의롭게 충실하게 실력있게, 청지기직을 잘하였으나,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통해 억울하게 모합을 받아,
국가 범죄인들이 들어가는 지하감옥 같은 곳에 들어가서 수년을 보내었다.
그는 그곳에서 더 힘들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훈련의 때를 보내야만 했다.

거기에서 그는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의 기도는 즉시 응답을 받지 못하고, 다만 기다리고 체념하며,
그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이 있고,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로 그자리에 머물어 있어야 함 했다.
거기에서 생활은 실망과 한숨이 섞인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곡이 깊은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 처럼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의롭고 불쌍한 요셉을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 가장 높은 자리인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신다.

우리는 늘 인간의 생각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며,
그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좌절하거나 포기하기에 이르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그분에게 맡기는 믿음을 따라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분이 움직이시는 때와 방법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고로 신앙인들은 단순히 자신의 현재의 일시적인 현장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으로
인간의 역사를 두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장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의미를 되새겨 주며,
신앙의 선택이 주는 이유와 인생의 삶의 실패와 성공을 보게 하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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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명령

창세기 1:24-31

창조된 자연 속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신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상식적인 관점에서, 일반적인 계시로 부분적으로 말씀하신다. 예를 들면 천둥과 번개는 사람들 속에 미지의 세계나, 혹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신의 세계의 위엄을 드러낸다. 그리고 신의 창조된 자연의 세계는 신의 솜씨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창조는 전능하신 창조 사역이다. 창조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
1.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내셨다. 그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심이며, 동시적이며, 일시적인 창조이다.

2.그의 창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전능하심, 전지하심, 무소부재 하심,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나 다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말씀의 창조 사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창조사역은 그의 영원성, 전능성, 인격성, 진리성등을 나타내신다.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창조의 목적이나 동역의 사역을 통해 중간 역할을 하신다.

4.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삼위일체의 사역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심, 성령은 창조하신 말씀을 직접 이루어 지게 하심, 수면에 운행하심, 말씀 창조 사역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 모든 만물이 이루어 지심
5.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순서대로 하심이다. 질서데로 창조하셔서 잘 조직하셨다.
6.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심, 창조와 보존과 섭리의 사역이 있으심,
7.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육의 창조 사역이 있고, 영의 창조 사역이 있으심, 영물들을 창조하심, 재창조의 사역의 시발점은 창조 사역에 있다. 인간 구원의 사역은 재창조의 사역이다.
8. 창조와 타락은 연결되어 있음, 창조는 세상의 존재의 모든 원인의 해답, 타락은 인간 문제의 원인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창조는 창조 명령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 된다.
1.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직접 창조 즉, 직접 인간을 빗으심, 대화와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2.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의 창조,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사람 속에 있는 이성의 역할, 지성의 역할, 영성의 역할 등으로 나뉘어 있다. 고로 인간은 신의 거룩성이나 신성을 닮았다. 에베소서4:24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의 속성을 따라 재창조의 사역으로서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3. 하나님의 창조 사역 중에 직접적으로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어 사람들은 창조 사역 중에 하나님의 창조의 복을 받았다. 고로, 인간들은 신의 축복 안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명예와 은총이 있다.
4.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장이며, 동시에 창조의 파트너이다. 고로 창조세계의 관리인으로 혹은 통치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고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창조의 명령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1.생육하고 번성하라/ 자기 생존이나, 자기 성장 이나 자기 발전하라, 건강하게 생존하고, 자기를 잘 가꾸어야 할 일이다. 고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육적인 사람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좋은 인격의 사람이 되라, 또한 항상 건강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가꾸라, 더 나아가 영적으로 복음으로 거듭나는 일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땅에 충만 하라/ 자기 표현이나 역할을, 자기에 대해 자기 인생에 대해 완성하라, 자기를 극대화하라, 자기 성장이나, 발전하라, 자기고유의 재능 개발을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영적인 탈랜트 개발을 하여, 자신안에서 기술적이나 기능적인 것을 잘 하도록 개발하라, 고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기를 성장시키는 일을 잘하라

3.땅을 정복하라/ 영향력을 주라, 자신의 리더쉽을 키우라, 좋은 사회인으로 살라, 크리스천(특별한 부름을 받은 군인)의 전투적인 입장을 따라, 이 땅의 어두움을 정복하라,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과 사랑으로 정복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28:19-20 18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자신에게 있음을 언급하시며, 믿는 이들에게 다시금 복음 선포를 통해서 재창조의 명령을 주셨다. 19절에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으로 어둠을 정복하라 1. 제자를 삼으라 2.세례를 베풀라20절에,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

4.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즉 창조세계의 관리인이 되라는 것이다. 주님의 통치의 모든 영역에서 청지기가 되라, 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한을 통해 통치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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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사회생활

벧전 2:11-17

크리스천에게는 사회생활에 모범을 보이는 삶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에게 죄에 대해 대적하며, 법적인 권위에 순응하며,
주인이나 상관들에게 인내로 참으라고 권면한다.
이렇게 하면 다른 불신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며,
어리석은 사람들의 비방을 막으며,
하나님께 칭찬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친애하는 사람들이라며,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형제들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세상에서 외국인처럼 그리고 나그네처럼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신자들을 외국인이라 여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은 천국의 시민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외인처럼 살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말은 언제나 자기의 자의식이나 세계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함을 명하며,
세상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이 크리스천의 가치나 믿음을 부정하므로,
세상에 속한 것은 비도덕적이며,
죄 짓는 욕망으로 유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나그네처럼 죄악적인 세상의 추구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음을 명하고 있다.
마치 그것은 전쟁을 치르는 사람처럼
즉 영적인 전쟁을 매일 싸우며 천국을 향한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세상에서 공중 권세 잡은 악한 마귀가
세상을 통해 크리스천들을 유혹하거나,
혹은 도전을 걸어 믿음의 가치나 삶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이런 죄의 욕망에서부터 절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들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 앞에서 효과적인 증인으로서 살기 위한 것이다.
적극적인 크리스천은 죄악 세상에 대해 능력 있게 빛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선한 행위나 선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거짓말로 크리스천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즉 그 어둠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 어두움을 밝혀줄 빛을 발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 선한 행위나 삶의 스타일을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새롭게 받을 불신의 형제들에게 주님이 방문을 하실 때에,
그 좋은 선행이 효과적인 인도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들은 기독교 역사에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과거 일본 식민지 시대에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를 통해
민족에 희망을 주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대표적인 경우의 예를 보면,

민족의 기운이 불운할 때에,
매일 저가에서 술만 퍼 마시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강패였던 김익두같은 사람에게
어느 날 외국인 여 선교사가 전해준 전도지를 코를 풀고는,
그 선교사를 위협하였던 것에 대해 선하게 반응한 일로 인하여,
그 깡패 김익두는 마음에 찔림과 진한 감동의 도전을 받아,
급기야는 당시의 유명한 폭력배인 그를 거꾸로 뜨려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크리스천들은 천국의 시민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가 속한 조국이나 사회에 소속된 일원으로
자기 책임을 감당해야 할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에게 모든 권위에 순응할 것을 명하는데,
그 순응의 동기는 위반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보다는 주님을 위하여,
즉 그것은 모든 세상의 권위가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에 대한 영향력이 그의 권한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 권위를 세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에 세운 법적인 권위의 목적은 악한 자에게 징벌을 가하고
선한 행위를 격려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
고로 그 권위에 순응하는 일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을 비방하며 악의적으로 거짓 증거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려주게 되므로,
그들의 비방이나 중상 모략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빛이 크리스천들을 통해
더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 권면의 역사적이나 지리적인 배경은
당시 로마 시대의 전 제국의 조직적인 핍박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에게 주는 권면이다.
즉 우리 시대에 우리나라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같은 문제에 봉착하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다.
그 문제란 말로나 언론의 힘으로 크리스천이나
그 사회의 모습들에 대해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것일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하나의 흔한 현상으로 문제 있는 것이나
혹은 그렇지 않는 것일지라도,
많은 크리스천들의 행위에 대해
사회적인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같은 비방 스런 중상 모략같은 공격적인 일들에 대해
최선의 방패는 크리스천들의 선한 행위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일 것이다.

사회의 법적인 구속이나 제도에 대해 순응하는 것은
크리스천들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그 사회의 법이나 제도에 기꺼이 순응하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일 것이다.
크리스천들의 자유는 언제나 책임 의식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그 자유는 악을 마음껏 행하도록 하는 만용적인 자유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즐기며,
그 사회에 속한 한 일원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갖고 사는
하나님의 종처럼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크리스천들의 시민 의식은
먼저는 누구에게나 존경을 표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을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큰 가족 의식을 갖고 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단이나 교파가 다른 믿는 이들 사이에도 더불어 함께 이해하며,
생각하는 동지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행위에 대해
먼저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제도적인 권위나 법적인 구속에 대해
질서를 무너뜨리는 역할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권위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허락이나 허용이 있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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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 룻의 비장한 선택

룻기 1:15-22
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러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신앙은 선택으로 표출된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순간 순간들이 넘실댄다. 금성 냉장고나 텔레비전에 대한 한번의 선택은 제품의 품질 보증의10년을 좌우 합니다 라는 광고를 접한 적이 있었다. 항상 인생 앞에는 여러가지 선택의 기로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인생의 길에는 천안 삼거리와 같은 길들이 많이 놓여 있다. 그 천안 삼거리에서 한 길을 선택하여 가면 그 길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다른 도로 가는 세 갈랫길로 나뉜다. 하나는 전라도로 가는 길이며, 하나는 경상도로 가는 것이며, 그리고 충청도로 가는 길이다.

오랜만에 즉 7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났다. 민족의 앞날에 중요한 결정을 하며, 다가오는 미래를 함께 맞이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북한은 특히 개방이냐 아니면, 폐쇄냐 하는 기로에서 생존의 갈림길에 달려 있다. 남북은 이제 따로 설수 없는 민족 공영 공존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남은 북을 품지 않으면 번영으로 더 나갈 수 없으며, 북은 남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남북 민족의 공동의 운명의 갈림길에 있는 것이다.

롯의 선택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삼촌 아브라함 앞에서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대로 장차 망할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의 에덴동산 같은 곳을 선택하여 나중에는 그곳에서 의인으로서 심한 영적이며 도덕적인 우울에 걸려, 끌려 다니다 시피하는 타락된 사회에서 맛 잃은 소금처럼 이리 저리 치이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그 땅의 사람들과 같은 운명 안에서 자신의 삶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롯 유다는 몊 푼에 스승을 파는 후회막급의 선택을 하여, 결국 자살로 자신의 생애를 끝냈다. 지옥의 자리에 떨어졌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의 통일 왕국의 통일 치세의 길을 제시하는 노인들의 지혜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분단으로 이끄는 자기 동무들의 어리석음의 과욕의 분단의 길을 선택하여, 결국 통일 왕국인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는 안타까운 민족적인 손해의 행보를 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영생을 위한 선택을 통해 그는 주님의 제자들 중에 수제자로 그의 사역을 이어받아, 초대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는 역할을 하였으며, 쿠오바디스라는 영화에도 나오듯이 그는 십자가의 죽음의 선택의 기로에서 도망가듯 로마에서 빠져 나오다, 그는 다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가시는 주님의 환상을 보고 그는 결국 주님을 위해 죽기로 하는 십자가의 순교의 선택을 하였다.

사업에도 투자 하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투자한다. 공부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선택한다. 연애도 결혼도 선택하는 것이다. 누구를 선택하는 가는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늦은 막이나 혹은 갖 결혼하자마자 이혼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쏘아져 나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의 실수로 인하여, 잘못된 선택을 돌이키려는 경향들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삶의 이야기 가운데에 이 이야기는 지극히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전의 이야기이다. 어려운 일에 있을 달콤한 축복의 세월을 교훈하는 고진감래라는 말이나, 역전의 삶의 통용어인 기사회생의 말이라 든 지를 생각나게 하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진한 감동을 주는 드라마에 매료되어, 그것이 한류가 되어 외국에 까지 타민족의 사회에 영향을 주는 감동의 이야기로 알려 주고 있다.
한류의 원조인 겨울 연가를 저는 감명 있게 본 적이 있다.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특히 주인공의 죽음과 그 죽음 후에 있는 꿈 같은 재회의 기회로서 죽은 이에 대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는 그 드라마에서 주님에 대한 저의 첫사랑의 애끓는 듯한 과거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기억나게 하여, 영적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주인공은 죽은 첫 애인에 대한 첫사랑의 향수를 그녀를 자주 괴롭혔지만, 그녀는 그 첫사랑의 분신으로 그녀 앞에 다가온 새로운 인연의 만남을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연결로 끝나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인생의 삶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유산을 남겨주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민족의 이야기를 말로 전수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녀들 세대에 전달하며 자기들만의 민족적이며, 신앙적인 희망의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원래 성경은 기록된 문자라기보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말로 전달되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의 당시에도 신약은 없었고 다만 그들에게는 주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만 전달되며, 그 이야기나 간증은 생명력이 되어 사람들의 삶에 파고 들어 죽어가는 인생들을 변화시키는 부활과 생명의 메시지로 널리 로마 세계에 살고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 것 없이 전파되었다. 나중에는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나오미는 고향 땅을 떠나 객지 생활 10년 만에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어버린 인생의 쓰라린 상실의 계절을 맞이했다. 모압이라는 땅에 들어가는 그녀에게는 이민의 삶이 기회의 땅이 아니고, 그녀에게는 상실과 방황의 쓰디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민 생활에서 맞이한 이방 여인이었던 두 며느리는 모압의 여인들로 이방 풍습에 젖어있던 그 며느리들은 남편이 죽자 그들에게는 희망이 사라지고, 자식도 없는 처지에서 당연히 그들을 보낸 친정 집이며, 같은 동족인 모압 족속에게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나오미는 그 자부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삶의 시련과 황량함으로 남은 자신의 삶의 부담을 안겨줄 뿐이다. 룻은 아무것도 없는 희망이라고 볼 수 없는 그녀의 시어머니의 황량한 고통의 삶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겉으로는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두 여인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다.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의 삶을 보지 않고, 그녀의 배후에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자신이 돌보아 주리라는 일념으로 시어머니를 세상 끝까지 따르려는 아름다운 선택을 하였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하는 것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할 때가 많다. 룻 그녀는 황량한 시어머니의 삶을 끌어안으며, 그 험악한 삶의 세월들을 헤쳐나가리라는 비장한 각오의 선택을 하고 있다.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와 함께 하는 공동 운명체로 이방 여인이었던 자신의 삶을 시어머니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기로에서 그녀는 보이는 처량한 시어머니의 삶을 보지 않고 그녀의 배후에서 새롭게 역사하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룻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녀의 시어머니의 삶과 묶는 결단의 말을 하고 있다. 살아도 그녀와 함께 죽어도 그녀의 곁에서 죽을 것이라는 일사각오와 같은 희생적인 결단은 그녀의 선택을 나약하지만, 훌륭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비장한 선택의 말을 내뱉고 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 시어머니의 인생의 삶의 삭막하고 실패한 자처럼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서 거기에 계시는 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오히려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와 함께 하고자 하는 자신의 선택이 당연한 귀결임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룻의 부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활 신앙은 인생의 실패와 좌절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나오미는 감동적인 며느리의 결단과 그녀의 확고한 마음을 보고는 그녀에 대하여 시어머니로서 그녀의 기특함을 보고, 그녀의 선택을 받아 용납하였다. 이제는 한 여인의 황량한 삶이 아니라, 두 여인의 아름다운 삶의 미래가 전개되는 것이다. 인생은 좌절과 실의 속에서도 함께하는 두 마음의 결합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부부가 함께 마음으로 한다면, 그 일은 쉬이 물러가며, 그 어려운 때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어려움이 극할 때에 주변에 있는 우인이나 친우들의 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격려나 충고는 자신에게 엄청난 힘을 얻는 계기가 된다.

나오미는 며느리인 룻과 함께 고향 땅을 다시 밟았을 때에, 온 동리가 그들을 보러 나왔다. 그 두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고향 사람들은 옛날 같은 동네 이웃이었던 나오미를 보며,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처럼 기쁨의 여인 같은 모습이 아니고 쓸쓸한 노인의 황량함과 희망을 바라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한 그녀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고향을 떠 날 때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희망찬 이민의 삶을 살 것을 바라보면서 나갔지만, 이제는 타향에서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아픔을 고백하는 쓰디쓴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며 기쁨의 여인이 아니라, 괴로운 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인생은 언젠가는 우리에게 행복의 파랑새를 좇아가는 젊은 시절에 가고 있던 꿈을 향해 나가던 시절이 어느 덧, 지난 날들을 회고하며, 회한에 빠져 슬픔과 실의에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게 한다. 젊은 시절의 강인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생기 있고 발랄한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몸도 스스로 가눌 수 없는 무능하고 연약한 자신을 깊이 느끼는 시간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생은 결코 우리의 삶을 그렇게 결산하도록 해서는 안되는 삶의 진지함이나, 인생의 숭고한 발자취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자신의 꿈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생명이야말로, 자신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후회하고 쓸쓸한 노후를 맞이하는 그때에야 말로 인생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들의 처하는 위치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노인이었던 나오미의 삶의 처량하고 처참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황량한 그녀의 노후에 더 너머에 있는 그녀의 말년의 세월은 인생 행복 귀결이라는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다복한 여인의 말년을 보내며, 지난 쓰라린 세월들을 되갚아 그렇게 찾기를 힘썼던 그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왜 인생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일을 신의 조화라고 여기는 가 여기 나오미도 자신의 고되고 고통스런 삶을 겪으면서, 자신의 삶이 이렇게 황량 스럽게 된 것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 화복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삶의 이야기 중심에서 도외시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분의 손안에 나의 삶이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지으셨고, 나를 이끌어 이 땅에 살게 하였으며, 그리고 나를 따라 내가 살아온 길에 서 계셨으며, 장차 나의 미래를 이끄실 분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이나 불행이나, 죽고 사는 일들은 그 분안에 있는 우리 인생들이 겪은 일들이며, 그리고 장차 맛보야 할 일들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던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룻의 하나님 선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녀는 과연 지혜로운 선택을 하였으며, 자신의 인생의 운명을 넘어가는 크나큰 인생 선택의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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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과연 존재하는 가?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이 주제는 기독교 역사에 전통적인 가르침에 의해 옹호를 받고 있다.
지옥은 성경에서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지옥의 현실과 그곳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가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영원한 심판의 현장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관용(용서의 기간을 넘긴 경우)이 없는
그의 엄중한 심판을 받는 곳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적인 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 존재의 엄연한 현실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지옥의 심판에 대해 그 엄연한 심판의 현장의 사실성을 왜곡하여,
그곳에 대한 상상적인 비유로 영혼의 영원 소멸이라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하며,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의 강조로,
그의 복음을 거부한 인생들에 대해 유여 하는 정도의 심판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의 존재와 그의 알려주신 복음의 진정성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인생들은 가야 할 엄연한 심판의 현장인 것이다.

이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심판이 문자 그대로 사실대로 이루어 지는 영원한 감옥이며,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한 타락한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어둠의 영들이 가는 곳이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인생들이 가야 할 곳임을 증거하고 있다.

지옥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어지는 곳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죽음의 영원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곳은 영영히 불이 타는 곳으로,
악한 존재들에 대한 심판의 현장으로
그곳의 생생한 감옥의 역할을 하는 곳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는 앞으로 인간 사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대 파노라마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들 중에 지옥이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곳으로,
동시에 그 심판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 계시록 20:10 에 사단은 불타는 연못과 유황불에 던져질 것이며,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이 던져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시록 14:11에, 지옥에서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올라가며,
밤낮 쉬지 않고 고통을 당하는 현장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단과 그의 짐승들에게 경배하는 자들도 그 연못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

영원한 고통을 받는 다는 교리는 복음주의자들과
비 복음주의자들 사이를 구분하는 분수령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옥의 교리를 수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신학의 근본적인 시스템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죽음 안에서 인간들은 죽음의 테두리 안에서 생명의 희망을 희구한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생명과 연결되는 영생으로 나가지만,
악인은 하나님과의 단절의 죽음이라 할 수 있는 영벌로 나간다.
지옥의 고통은 다가오며, 영원히 끝이 없는 것이다.
고통 받는 곳과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곳으로
지옥에 대한 교리는 신약의 한결 같은 주제이다.

지옥에 대한 세가지 그림은 천국에 대한 성경적인 묘사와 대조된다.
지옥은 천국을 상급이나 상속으로서 여기는 것과 같이 지옥은 처벌로 나타난다.
심판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지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전능하게 구원 얻을 자를 선택하시며,
그들의 죄 때문에 처벌받을 자들을 심판 받도록 허락하신다.

지옥에 대한 사실이나 지옥 형벌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는 만인구원론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으로 지옥형벌을 받을 사람이 없다라는 논리이다.
그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심판의 현실성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만인구원론(universalism)은 성경적인 가르침에 맞지 않다.
그것의 낙관적인 견해는 위로를 주지만, 인간의 죄의 비극성을 무시하는 것이며,
인간의 불신적인 것들을 통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무시한다.

또 하나는 영원 소멸론(annihilationism)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데서 사람들이 떨어져나가,
그저 단지 영혼이 영원히 죽는 것을 믿는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갖게하지만,
그 논리는 인간은 영혼불멸의 존재로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의인은 영생의 부활로, 혹은 악인은 영벌의 부활로 존재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대치되는 논리이다. .

마지막으로는 조건주의론(conditionalism)이 있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인간이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영혼의 상태가 불멸하는 존재로 육체는 죽으나,
다시 영혼의 상태는 지속되는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함으로 신자들은 신의 성품과 불멸성을 받는다.
그러나 불신의 상태로 남아있을 시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고로,
그 자신이 지은 죄에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공존은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받은 자의 행복을 감하지 않는다.
비 기독교인들의 처벌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엄위성을 증거하며,
그의 능력을 과시하며, 그의 공의를 높이며,
그의 은혜를 간접적으로 극대화한다.

지옥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의 효과를 기대하는 인간들에게도
엄연히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 속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인생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는 자비의 은혜를 바라보게 한다.

Morgan, Christopher’s Hell Under Fir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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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토록 있는 말씀

베드로 전서 1: 22-2: 3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을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크리스천의 생활은 날마다 새로 와 지며, 거룩해가며, 정결함을 유지하는 삶이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가는 삶이며, 주님을 닮아가는 길에서 자신의 구원받음을 유지하는 삶이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삶에,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였던 주님의 말씀이 있다.

진리를 순종함은 인생의 참됨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마음의 부패를 가져왔다. 인간의 영혼은 마음의 부패와 연결되어 있어, 밝아야 할 인간의 양심이나, 영혼의 상태는 어둠에 휩싸여 있다. 거기에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와서 밝혀야, 어둠이 걷히고, 마비되고 찌들인 양심의 기능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생령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과 교류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진리의 말씀은 어두운 인간의 영혼을 밝혀,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며, 말씀 속에 계신 주님의 정화시키는 능력에 접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므로, 자신 안에 순결함으로 회복하게 한다. 어둠에 처해 있을 때에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지 못하며, 왜곡되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바로 보지 못한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비쳐주면, 자신의 거짓됨과 부패함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뉘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둠에 숨어 있는 죄의 그림자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인간 영혼의 재창조에 가까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나는 것이며,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인 새 생명의 출생을 의미한다. 그 생명을 탄생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세상에 있는 썩어지는 모든 것(육체에 속한 것)과는 다른 본질의 것으로 그 말씀은 원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지만, 다시금, 그 말씀은 영혼의 재창조의 능력으로 죽었던 인간의 영적 생명(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생명)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성과 현존성을 드러낸다.
그 인간에게 전달 되어진 기록된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인 영원한 말씀(영생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두고 있는 말씀으로 그분의 영원한 존재성과 더불어 그 말씀은 살아있다.

모든 인생이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없어지게 된다. 이지상에 한 일들은 인간의 기억에 남지만, 그러나 다 사라지는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세운 업적이나 공로나, 일들은 결국 마지막에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들이 얻은 영광도 세상의 사라짐과 더불어 없어진다. 그러니 아침에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는 꽃이라도 저녁에 시들어지는 때에는 힘을 잃고, 생기를 잃어, 아름다움의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그렇듯이 인생의 날들은 젊은 때에 활기찬 것들이 노년에 시들해지면서, 결국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의 몸이 흙으로 돌아가듯, 인간이 세운 모든 일들이 다 사라진다. 거기에 안주하려다가는 실망을 하며, 또 거기에 자신(미래와 생명 등)을 거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오직 세상을 창조한 창조의 말씀은 세상의 존재의 유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세상을 있게 한 창조의 근원으로 그것의 존재의 근원은 영원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 가운데에 존재했던 말씀은 생명 존재의 근원으로 그 말씀은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거의 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낡아지나, 인간이 기대하며, 바라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에 의해 세세토록 존재하며, 이 지상의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에 상존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남아있어, 인간의 가야 할 영원한 본향에 머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 말씀 안에 지금 세상의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나, 미래에 숙제로 남아있는 일들이 풀어질 날이 다가오는 때에, 그 말씀의 미리 알려주신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 그 곳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때가 되어 나타나며 현실로 다가 올 것이다. 그 것에 대한 정보가 인간에게 전하여 진 아름다운 소식으로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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