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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22
    인간이해와 상담
    목동
  2. 2007/06/21
    믿음의 시련
    목동
  3. 2007/06/19
    고난의 유익
    목동
  4. 2007/06/16
    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인가?
    목동
  5. 2007/06/15
    걱정을 극복하려면
    목동
  6. 2007/06/15
    영적인 족보
    목동
  7. 2007/06/14
    용서(3)
    목동
  8. 2007/06/13
    인생찬가
    목동
  9. 2007/06/13
    크리스챤의 생활이란?
    목동
  10. 2007/06/11
    믿음의 기도와 응답
    목동

인간이해와 상담

인생을 카운셀링을 하는데는 4가지 측면으로 사람을 볼 필요가 있다.
제일 먼저, 그 사람의 생물학적인 측면을 보는 것이다.
그의 두뇌기능과, 그것으로 인한 몸의 변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사고를 당하고 난뒤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람의 두뇌에 충격을 받아,
그 두뇌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때문에,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원래 홀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태어날때부터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고 태어나,
일정기간의 양육기간을 거쳐야 건강한 인생으로 자라게 된다.
아기가 태어나, 초기 1,2년 사이에 갖는 인간관계는
그아이의 인생의 앞으로 관계를 맺고 사는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게 된다.
아기가 부모의 돌봄을 받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안에서 자신이 형성되어지면,
그는 나중에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수 있지만,
그 기간에 다른 사람과 혹은 소홀히하는 사람과의 교제안에 있을때에,
그 아이는 자라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이 힘이든다.

사람은 사회적인 유기체로 다른 이와의 만남, 관계형성,
그리고 교제를 통해서 사람이 영향을 받고,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사람을 상담할때에, 이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가?
사람과 사이에 관계는 일정한 규범을 가지고 있어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사람을 대할때에,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기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어느 사람이 타인의 물건이나,
소유물을 훔쳤다고 했을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을 전혀 죄의식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일반사회에서 통념되는 상식적인 기준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죄의식으로 여겨 지는 것은 윤리적인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바라보고 조언을 해 줄때에, 이부분을 또한 간과 할수가 없는 것이다.
항상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사람의 다른 사람과의 일정거리의 사회적인 거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으로 인하여,
짐을 지거나, 혹은 다라른 사람과의 마찰에 의해, 원치않는 억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억압이나, 스트레스나, 문제의 발생은
인간속에 늘 가지고 있는 자기 상실감에서 온다고 할수 있겟다.

인간의 자기 상실감은 자기 정체에 대한 바른 인식이나 관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자기가 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만과 불안의 인간존재의 탄식안에 늘 있게 되는 것이다.

불안은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그 불안은 인간이 자기의 안정된 위치에서 탈선하여 있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안과 비정상을 가리켜 인간의 타락된 본연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살피고 그를 도와주려고 할때에,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 불안, 그 죄등은 바로 인간을 있게 한
창조주와의 관계가 빗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는 누구도 이런 인간의 실존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는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문제가 생겨나고,
자신안에 뒤틀려진 삶의 그림자가 드리워 져 있을때에,
이 면을 살펴보고, 그 사람으로 그것을 벗어나는 해결의 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면이라 할수 있는 영적인 측면인것이다.

그 영적인 면은 인간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인간이 제한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거기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바로 자신을 있게 한 근본적인 관계를 재설정하며,
그관계안에 있을때에, 참된 인생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대한
우리의 카운셀링은 여기에 귀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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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련

베드로전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살 희망을 갖게 하셨으며
4. 썩지 않고 더럽혀 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하늘에 간직한 축복을 여러분이
    받도록 하셨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때에 나타나도록 예비된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가지 시련으로 잠시 근심할수 밖에 없으나 그래도
     여러분은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7. 시련을 겪은 순순한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됩니다.
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나 사랑하고 있으며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고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9.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당하는 시련과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의 삶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속에서 역사하신다.
인간의 시련가운데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사람의 고통받는 현장에 하나님의 귀가 열려 있다.

인생의 시련은 인간을 나약하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찾게 한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게 한다.
시련은 사람에게 소망을 주며, 좌절하지 않는 하늘의 끈을 잡게 한다.
시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단련하여
더 강한 신뢰심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람들이 겪는 시련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사람으로 만드는 재료로 제공된다.
시련을 통해 사람은 어떤 일을 맡겨도 힘든 일들을 감당할수 있는 자질과 성품을 키워준다.
삶에서 겪는 시련은 사람을 만드는 필연의 도구이며,
인생훈련의 기회의 장으로 쓰여진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므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는 시련을 경험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모든 인류의 희망을 잃게 하고 두려워 하게하는 죽음의 길을 통과하셨다.
그의 시련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으므로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의 절망의 세계를 벗어나 부활의 희망을 갖고 살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의 예수를 보면서 죽음의 현실을 알게 하고,
그의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의 역사를 통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거듭남의 삶의 길로 인도하신다.

사람들에게 주는 살 희망이란 무엇인가?
어떤 죽음의 현실에서도 살아갈 희망을 얻고,
죽음너머에 있는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련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단련하고 값지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이 당하는 시련은 그 시련을 통해 새로운 기회의 시간을 살게 하며,
새로운 성품의 사람으로 살게하는 단련됨을 제공한다.

시련은 당장에는 힘들고, 괴로움을 주지만,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강하게 인간속에 있는
악한 성품들을 정제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
제련소에 들어가는 불순물이 더덕 더덕 붙어 있는 쇠덩이가 불같은 제련으로 정화되듯이,
시련은 사람들을 정화시킨다.

천국을 들어가려면, 시련을 많이 겪어야 한다는 것은
시련을 통해 정화된 인격을 만들어 천국시민이 되게 한다.
고난은 사람을 연단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고난속에서 인내를 배우며, 인내를 통해 연단된 성품을 갖게 되어
살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세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사람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꿈과 비전을 심어준다
천국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들로 차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존귀와 영광에 대한 축복이다.

천국은 썩지 않는 생명의 씨로 거듭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곳에 쌓아가는 보화는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갖고 있다.
그곳에는 죄와 악이 있는 더러움을 갖고서는 들어갈수 없다.
죄와 악을 벗어던지고, 정결된 심령이 들어가는 곳이다.
천국에서 보장되는 새로운 삶의 축복은
이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
인간의 영혼을 만족케하는 생명의 강에서 나오는 생명수와 함께
그곳에서 사람들은 영원히 누릴 자기조화와 자기 완성을 맛보는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죄와 그 영향으로 인하여 모든 만물이 더러워 져 있으며,
만물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신음하며 새로움을 더 입으려고 한다.
그가운데에 더렵혀 지지 않은 것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바라고 있는 하늘나라에서 살 영원한 삶의 기업이다.
그 기업은 하늘나라에서 얻을 영광된 인간의 삶을 보장한다.
그곳에서 생명의 은총과 영광을 받으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완벽한 조화와 이상적인 곳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말세에 나타나는 구원을 받기위해 믿음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인간의 상태와 필요를 채워주는 축복을 가지고 있다.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벌거벗긴채
온몸으로 그러한 죄와 죽음의 절망을 안고
탄식과 한숨과 허무의 늪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절망과 저주와 파멸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희망과 축복과 새로운 삶의 건축을 세우며 살게 한다.

세상 말세에 나타나는 여러 환난과 시련에서의
보호받는 하나님의 도움심이나,
혹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종말의 시기에
겪는 절망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내일에 대한 확신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갈수 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에게
보이지않는 하나님과 그의 능력이 실질적으로 역사하여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보호와 도움을 받게 된다.

신앙안에서 시련을 당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유익이 된다.
시련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 과정을 통해 더 강한 신앙인이 될수 있다.
시련이나 고난이나 고통은 때로는 사람들을 약하게 하고 절망케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것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여
자신이 더 강해지며, 더 유익한 존재가 되고,
사물이나 사건을 생각하는 자신의 견해나 인생을 보는 관점을 더 깊이있게 해준다.

고난의 시련을 통과하는 자에게는
자기성장과 자기성숙의 열매가 있으며,
고난과 시련속에서 땀과 눈물과 피흘림을 가질만한 노력을 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나 인생에 대해서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신앙안에서 겪는 시련은
신앙인이 갖기 쉬운 거추장스런 형식주의와
무가치한 종교의식의 불순물을 벗겨버리는 일을 한다.
신앙인들은 신앙때문에 겪는 삶의 시련을 겪으면서
순수한 신앙외에 갖기쉬운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것(인본주의위주의 공로사상,
인간의 진실한 것을 덮어버리는 외형지상주의내지는
하나님앞에서의 비인간적인 태도, 등등) 들을 버리고,
하나님앞에서 진솔한 사람들이 순수하고 정제된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신앙의 핍박받는 지역에서 목숨을 내걸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순전한 황금같은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당하는 신앙의 시련은
이후에 하나님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결과를 가져온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것(성품, 약속, 섭리, 역사 등등)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었으나,
2000년 전후 즈음에 이스라엘 이라는 조그만 지역에서 33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보내셨다.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보내심에 의해 오셔서
몇몇 사람들에게(수백만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 자신을 알리셨다.
역사속에서 그분을 구주로 믿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그분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으나,
그분의 삶과 그가 하신 사역에 대한 사실의 소식에 접하였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모시고 믿음의 선배들은 살아왔고,
지금의 신앙인들은 살고 있다.

신앙인들은 그분을 보지 못했으나,
그분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그분의 베푸시는 개인적인 사랑하심과 은총을 베풀어 주심에 응답하며
개인적인 관계와 친분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
그분과의 개인적인 친밀함 속에서
약속하신 영적인 축복과 그 축복안에서 맛보는 영생의 기쁨을 맛보며
그 기쁨안에서 영혼의 만족과 더불어 마음의 평안과
그분을 믿는 신앙생활의 가치와 의미안에서 즐거워 하며 생활한다.

인내를 통해 좋은 결과를 기대하듯, 믿음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그 하나님의 선물은 그의 약속하신 구원이 있으며,
그 구원안에는 사람을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하여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총과 축복이 담겨 있다.

사람에게는 만물보다 귀한 것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영혼이다.
만일 사람이 온천하를 얻고도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면,
그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항상(시간과 영원의 차원속에서)
누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임을 의미한다.
고로 믿음은 자신의 영혼이 고귀한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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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유익

고난은 인생을 강하게 한다.
고난은 평범한 삶에 도전을 주는 시련이며, 인간을 힘들게 훈련받게 한다.
고난은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참사람의 되어가는 과정을 모르는 사람의 삶과 같다.
그것은 인생의 질곡을 거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세월속에서 무의미와 무가치함으로 지나게 한다.

그런데 고난이나 시련은 평범하고 안일한 삶에 도전을 주어,
인생을 긴박하게 하며, 자신안에 있는 능력을 이끌어 내어
그도전을 극복하고저 노력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련이나 고난의 때를 지나고 난후에
사람은 자신에 대해 강해지며,
인생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자신감을 강화시켜준다.

강한 군인은 험한 전투에서 살아남아,
더 강인한 군인이 되며,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새의 왕이라 할수 있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강하게 키우는 비결은
계속적인 강한 독수리로 자라도록 험악하고 고된 시련의 훈련을 받게 한다.

고난은 인생에 역경을 가져다 준다.
고난당하는 것은 때로는 삶을 불편하게 하고 지치게 한다.
인생은 고난으로 인하여, 힘들어지고,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난이 오면 인생이 움추려들며,
시련의 계절에 사람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노력을 배가하게 한다.

역경의 세찬바람앞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여행을 고되게 하고 있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 도전에 대해 반응을 강화시키므로
자신을 강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고난은 인생을 겸손하게 한다.
고난은 사람으로 겸허하게 신을 의지하게 한다.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에 의해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신을 찾고, 그의 도움을 구한다.
오만하고 안일하게 살던 사람도 고난이 닥치면 겸손하게 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위해 주변을 돌아보며,
그리고 자신의 근본을 생각하게 되며,
그 인생의 밑바닥에서 신을 찾는 영혼의 울부짖음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이상의 힘든 상태로 발전되지 않게 하기위해
겸허하게 신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로 나서게 된다.

반면에 어느 경우에는 고난과 시련속에 자기포기에 빠져 헤매이며,
자신에 대해 저주하며,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자세로 일관하다가,
자신의 인생의 절망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 상태에서 사람은 절망을 느끼며 점점 죽어가는 자신으로 인하여 자신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련의 세파에 떠밀려 세상을 원망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나약한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여 간다.
이럴때에는 자신의 반응하는 자세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원망이나 포기하는 자세에서
그 역경의 때를 벗고저 하는 생존에 대한 강한 애착심과 더불어
자신을 쇄신할 만한 요인(성품의 변화, 생각의 변화, 반응의 변화)이나
사람(자신에게 상담이나 조언을 줄 사람)이나,
사건(자신의 환경이나 처지를 변화시킬 새로운 일)들을 찾아나선다.

고난은 인생을 살만하게 한다.
자신의 삶에서 늘 상 평탄함만을 맛보며 살아간다면
자신의 인생을 안일하게 한다. 그리고 권태로움을 준다.
여행중에 있는 나그네가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지나가는 여행길에 대해 무심히 지나치듯
무료한 인생의 날들은 사람들을 무가치하게 하거나
혹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시련이나 고난은 인생을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그문제의 도전을 받아, 그것을 헤쳐나가는 동안에 인생의 깊은 것을 맛보게 한다.
시련은 사람의 깊이를 더하게 한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나,
혹은 타인을 이해하는 면에서 탁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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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인가?

말라기 4:1-6

1.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용광로의 불과 같은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처럼 타서 없어 질 것이다.
    그들 중에는 하나도 살아 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2.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며
    너희는 나가 외양간에서 풀려나온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3.내가 이것을 행하는 날에 너희가 악인을 짓밟을 것이며 그들은 너희 발밑에 있는 재와
    같을 것이다.
4.“너희는 내가 시내산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내 종 모세에게 준 법과 규정을 기억하라.”
5. 보라! 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겠다.
6.그는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들에게 돌아서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이 아버지에게 돌아서게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그들의 땅을 저주로 치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선포하신다.
그의 날이 심판을 행하는 날로 임하리라는 것을…그리고 심판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또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는 것을 알수 있다.

만일 불순물이 끼어있는 쇠덩어리가 용광로에 들어가면
그속에 타오르는 불이 모든 더러운 것을 사르고,
모든 찌꺼기들을 불로 태워 버리며, 하나도 건지지 못하게 된다.
용광로의 제련되는 쇠덩어리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불같은 역사가
사람들 속에 붙어있는 죄와 악과 같은 불순물들이 다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용광로의 불로 비유한 것은
그의 심판이 인간의 모든 더러운 요소들을
불로 태워 없애버리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죄악을 행하는 인생들은 거기에서 살아남을 길이 없이
다 타서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에 예언한 대로 주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들은
지옥불의 감옥에 들어가,
그들은 시련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지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하는 장소로
하나님에게 대적하며,
그의 심판을 받을 것을 자초하는 인생들은 모두가 다 거기에 가게 될 것이다.

주님의 심판은 악을 행하는 자, 그리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에게 임한다.
그의 심판은 엄격하고 정확하게 시행될 것이다.
주님이 돌리시는 심판의 멧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처럼 움직이지만,
반드시 모든 악의 요소들을 다 갈아버리는 심판을 행하신다.
콩을 넣어 멧돌을 돌리면 콩이 다 바스러져서 콩물이 흘러내리게 된다.
그것처럼 인간의 죄악도 그의 심판의 멧돌에 모두가 갈아버리게 된다.

주님의 심판이 선포되고 시행되는 것과 같이
또한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의 심판을 피하고 면하는 길은 그가 행하신 그의 구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구원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을 살리는 역사로 나타나,
상한 영혼들을 치료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며, 병든 영혼들을 고친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의 태양이 나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사람들이 그빛에 쬐이면 치료받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으셨기에 그는 인간의 문제와 질병을 치료하실수 있다.
그의 손길은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데 촛점이 모아지고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온전하게 창조되었으나,
불순종과 범죄이후에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신성의 좋은 성품이 변질되어,
그들속에 죄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육체의 본성으로
저주와 절망적인 상황하에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는
사람들의 죄로 인한 절망적인 상태를 새롭게 하여
소망적인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가능하게 한다.
저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그들을 주님이 주시는 은혜안에서 축복의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
고통받는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와 죽음의 상태를 벗어난 평안과 상쾌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치료는 영혼과 육체의 치료로 사람들의 몸의 질병을 치유하며,
그리고 마음의 병과 정신적인 질환에 대해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치료는 그의 보편적인 방편으로서의 은혜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모든 의료기술과 인간적인 치유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며,
특별하신 은총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질병에 대해,
치유의 기적과 혹은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부으심과 만져주심으로 치료하신다.

모든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하나님의 치료의 광선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치료를 의미하며,
그의 은혜의 빛은 해가 비치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듯
비쳐주는 생명의 빛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어두운 부분들을 밝히신다.
그리고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환희의 은총의 능력안에서 살게 하신다.

어린 송아지가 자유롭게 뛰어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그 송아지가 어딘가에 매여있으면 그얽매임에 의해 억압이 되어있다.
송아지가 억압되었다 풀려나 마음 껏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사람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하나님의 품안을 떠난 인생들은
그의 품을 떠나는 때부터 모든 것에 억매여지낼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리를 풀어 죄의 사슬에 매인 인생은
모든 죄의 영향력의 속박에 매이게 된다.
질병, 상처, 고통, 저주, 불행, 좌절, 절망, 멸망당함등
인간을 억압하고 죽이는 모든 것에서 매여 지내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고 죽이지 않는 법을 주셨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법을 지키지 못하여
법에서 정한 규정을 어겨서,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죄로 인한 저주와 고통이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모든 삶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결과로 인한 원인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태어나면서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그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신의 죄도 아니었다라고 하셨지만,
사람이 그렇게 태어날수도 있는 것자체가
인간현실의 모순과 고통의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고통받는 인간의 현실을 외면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문제에 대해 깊이 관여하시고,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면서 까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신다.
인간에게 고통이 있은 즉 하나님의 위로와 나음이 있고,
상처가 있은 즉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통해 그것을 아물게 하신다.
시련과 역경속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이 있는 인생의 눈물을 씻기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때에
그의 백성들이 다시 회복되어 자신들을 괴롭혔던 악인들을 대적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과 허물을 심판하고
그들을 벌하기 위해 주변의 강대국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 백성들을 괴롭히고 상하게 하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죄와 허물이 그런 일들을 자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허물을 사면하며, 그들을 다시 축복하게 될때에
그들은 주변에 있는 원수인 나라들을 대적하여 싸우고,
그리고 그것을 정복하고 지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반복되는 역사였다.

사람의 일생도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반복된다고 할수가 있다.
인생이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이 있는 가하면 기쁘고 형통한 날들이 있다.
상하고 병들고 힘들어 질때가 있으면 치료하고 회복하고 나아지는 날들이 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일생을 통해
자기들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간다.

하나님의 예언자이며 메시야의 선구자인 엘리야의 사명은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를 다시 회복케하는 데 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기전에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준비인 사람들의 죄와
회개의 촉구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그 선구자는 회개하고 메시야를 맞이할수 있도록
즉 마음을 고쳐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하는 일을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날, 축복의 날은 사람들에게 화합과 일치를 가져와
가족이나 사회를 새롭게 하여 회복케 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은 특별히 가족간의 문제에 개입하여,
사람들의 망가진 관계들을 치료하신다.
가정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의 역사는 가족들이 하나가 되는 때이다.

가정안에 가장 연약하고 취약한 인간관계는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고로 보통 가정마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마음이 갈라지기 쉽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가 상하기쉬운 관계이다.
부모중에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빠, 자녀들의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기 쉽다.
가정의 문제에서 아버지의 역활의 중요성의 강조와
그 아버지와 가족간의 관계의 회복을 통해
가정문제의 많은 경우에 해결되는 일들이 필요하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몸으로 낳아서
자녀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돌봄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해 애뜻한 애정이나 관심의 돌봄을 주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역활을 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모든 사회의 문제의 발단은 통치자 혹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억압 할때에 일어난다.
지도자혹은 지배자는 남을 돕는 위치에 있을때에 제 역활을 할수 있다.
그러나 남을 지배하려고만 하는 자세는 남을 상하게 하기 쉽다.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주기 쉽다.

사람이 사는 땅이 저주받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악한 것들 때문이다.
그들이 죄인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죄악을 자행하고 있어서
특히 사람들이 자신들이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의 삶에 저주스러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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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극복하려면

일상적인 걱정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이다. 그런데 이 걱정에서 벗어나 일정한 자세에서 살아갈수 있는 길이 없을까? 인간이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한 걱정이 쉬일 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걱정이란 우리가 살아온 과거의 삶의 패턴에서 터득한 하나의 두뇌에서 활동하는 감정적인 부분이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여러가지문제에 부딪치며 살아오면서, 자연히 걱정하는 패턴이 하나의 관념으로 형성되어진다. 그리고 걱정이 심하게 되면, 패닉이 일어나는 공항을 경험하게 된다.

 

걱정의 종류에도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데, 먼저 걱정에 짐지며 살아가는 상태가 있는가 하면, 일반적인 걱정에 대한 비정상적인 태도, 걱정이 심하게 되어 발전되는 패닉되어지는 공황이 지속되면,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현실적인 것들에 정상적인 반응을 할수가 없게 된다.

 

걱정은 사실 현실적인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 할수 있다. 건강한 정신을 갖고 살면, 사실에서 오는 도전을 잘 극복하며 살수 있다. 자기관리를 잘 하는 사람은 건강한 정신을 소유하며 살아갈수 있다. 먼저 스트레스가 일어날때에 그 걱정을 잘 처리하는 기본적인 테크닉만 알아도 훨씬 우리의 생활을 건강하게 살아갈수 있다.

 

자기의 영혼을 잘 돌보고, 자기안에 웰빙이 되는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면, 걱정에서 오는 마음의 흩트러진 상태를 회복할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려분별을 상실하게 되며, 그 걱정을 떨어버리려고, 먹는 습관에 이상이 생겨, 술로 해결한다든지, 과식등을 통해 자신의 걱정하는 상태를 해소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몸에 이상을 가져다 줄 뿐이다.

 

요즘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현대인들이 이런 걱정하는 습관이나 태도에 의해 생겨난 과식내지는 정상적이지 않는 식생활때문이다. 나의 이웃에 어느 미국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부인이 남편과의 관계에서오는 스트레스가 쌓여, 그것이 일반적인 걱정하는 태도에 의해 그녀의 과식하는 식생활습관으로 점점 그녀의 몸이 비대해 지는 것을 볼수 있었다.

 

걱정하는 습간을 떨어버린 방법 중에 쉽게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우리몸을 그 정신적인부담으로 부터 우리의 관심을 몸의 활동으로 돌리면 된다. 그것이 운동을 통해, 많은 부분의 정신적인 부담감을 줄일수 있고, 우리의 정신적인 상태를 건강하게 회복할수 있다.

 

우리의 영혼(마음)과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두 실체의 조화를 꾀하며 살아갈때 가능하다. 마음과 육체의 조화는 건강한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게 한다. 이런 것을 갖추는데, 좋은 길은 일관된 세계관내지는 인생관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갖는 지름길은 종교에 귀이하거나, 신앙심을 갖고 살아가면, 일상적인 걱정에 벗어나 휠씬 건강한 생활을 할수 있다. 이런 신앙심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한 일반적인 큰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때에, 건강한 자신을 형성할수 있다.

 

그 위에 우리가 걱정을 벗어나는 구체적인 습관들을 형성하게 되면, 휠씬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갈수 있다. 먼저는 하나의 일관된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걱정하는 일이 있을때에 우리몸의 긴장을 풀게 하는 가벼운 운동이나,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걱정스런 일들이 발생할때에, 그 걱정을 가져다 주는 현실적인 사실이나, 정체를 잘분석하여, 그 걱정을 조정하는 자세를 가지면 그 걱정하는 태도를 해소할수 있다. 그리고 그 걱정이 어떤 것인지 명료화하여, 걱정을 주는 근거를 해소할수 있는 것이면, 그것을 처리하고 나면, 휠씬 마음이 가벼운 상태에서 살아갈수 있다.

 

혹은 또한 예를 들면 “지금 이 세상이 망하게 되면,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등을 생각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떨쳐버리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더나아가서, 그 걱정에 대한 반응하는 나의 몸의 느낌이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걱정하는 감정에 휩쌓이지 않도록, 감정순화내지는 감정변화를 줄수 있는 여행이나, 그 걱정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취미활동을 하면 가능하다. 그리고 걱정하는 감정을 대처하며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게 하는 마음의 평안이나 고요를 유지하는 음악듣기등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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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족보

2007/06/15 오전 12:01 | 메시지

에베소서 1:1-6

1.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자기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3. 이것은 우리가 그분이 사랑하시는 아들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신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5.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시기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6.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알려지는 가계나 가문의 족보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핏줄과
그에 따른 후손들의 내력이 있는 역사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속해있는 가계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속한 가계의 조상들의 과거에 대한 기록은
현재의 자신의 소속에 대한 정체감에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그 족보나 가계를 통해
자기가 어디에 속해있는 가 하는 자신의 소속감에 의해
자신의 정체감을 아는 자기 이해를 갖추게 된다.

자신의 영적인 족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족보있는 신앙은
조상적부터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가치있는 자산이 된다.
족보있는 사람은 좋은 가문에서 효력있는 가훈과
부모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훌륭한 모범을 보인 부모들의 삶이 그들의 지침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속해있는 가정을 통해 자신들의 삶의 고귀함과
자존감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의 가문이나 가계혈통과는 전혀 다른 가족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형제자매사이와 부모자녀간의 혈통이나 민족을 넘어가며,
인간적인 관계를 벗어나는 영적인 나라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하심에 의해 이루어진 영적인 족보이다.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 가운데에 나타난다.
그의 계획아래에 모든 인류들중에서
여러 인생들을 그의 자녀이며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해본다면 그에게 속한 무리의 반열에 드는 것은
그의 전적인 택하심이며 그의 선하신 은혜이다.

성도들 자신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은 그가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의 뜻에는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다.
영원불변하는 그의 속성과 더불어
그가 정하신 뜻은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시간과 역사를 통해
영원하신 그의 계획하심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 져 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그의 뜻은 시간과 역사속에서 상대적인 인간의 생각과
다른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유동적인 변화에 대처해가는 유연한 그의 뜻이 있다.
각자의 인생에게 주님은 그의 정하신 뜻이 있다.
그는 사람들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대원칙아래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명제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다.
인생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근본적인 인생의 죽음의 상황이나 위치에서 생명을 얻는 길,
혹은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등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자의 인생들을 구체적으로
그의 뜻하심(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안에서 그들을 인도하신다.

성도들은 영적인 족보의식을 통해
자신이 속한 그 가문에서 오는 자신의 정체감을 갖는 것은
자기신분의 근본적인 요소로 자신의 신앙생활에 중요하다.

내가 누구이며, 당신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이 사도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성도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이 그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의해 이루어 진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며,
그의 뜻에 구별된 사람, 혹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이다.

사도는 여기서 성도와 신자들을 구분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정체감을 두가지로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신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며
자신들의 믿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의 특징은 한마디로 믿음으로 이루어 진 인생이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보시는 관점안에서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자신의 주어진 삶의 여건이나 생활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다스리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그의 품안에서 만족해 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기뻐한다.
그리고 장차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누릴 영원한 기업의 기약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성도이며 신앙인 그들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으로 부터 여러가지 복을 받는 다.
그중에 그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은
그들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복을 받는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은혜와 평안의 복을 받는다.

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특별한 혜택이다.
세상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중에 인간이 쓸수 있는 자원은
거의 유한 할수 밖에 없고 제한이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그 자원이 무한한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는 무한하신 자원에서 나오는 그의 축복이며,
사람들에게 주시는 값지고 멋진 선물이다.
그의 은혜안에는 사람들을 살리고, 치료하고, 회복케하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사람의 마음의 고향에서 얻을수 있는 평화가 깃들인다.
사람들의 불안과 방황은 그들의 마음의 고향(죄의 상태와 영향력)에서
얻은 그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그 상태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잃어버린 인간의 마음의 평안을 되돌려
그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온 세상에 있는 인간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이땅에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아버지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찬양드리며,
그분은 마땅히 영광을 받으실 분이다.
하나님아버지는 모든 은총을 그의 아들을 통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가 베푸시는 축복, 특히 하늘에 속한 복들을 부어주신다.
그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받는다.
그의 영적인 복들은 자녀들을 삼아주심을 통해,
장차 얻을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과 더불어,
영적인 상속인에게 주시는 영적인 기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예정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무리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것은 그의 선하신 뜻안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고귀하신 계획을 통해 세워진 무리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의 근본, 자신의 위치, 자신의 장래는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또한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사람들로 택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축복의 은혜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이다.
이제 선택받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안에서
그의 자녀의 반열에 세워졌으며,
그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그의 크신 능력과 축복안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는 그의 권세와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특권이자 그의 영광에 대한 자녀의 참여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와 구원을 받으며,
절망과 허무로부터의 소망과 가치의 삶을 살며,
그의 자녀로서 그분을 즐거워하며 높이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녀의 책임적인 삶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 주님은 높임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의 평생의 헌신과 충성을 통해 주님은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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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3)

하나님의 용서와 건강한 자아

사람이 자아에 대해 건강하게 되려면
자신안에 있는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내면 생활에서 자신에 대한 용서는
자신이 죄로부터 갖게 되는 죄책감과
자신의 본성안에 있는 수치심을 극복하는 근거가 된다.

먼저, 자신안에 있는 죄책감은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범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며,
수치심은 자신의 자아 전체의 경향으로 타인에 의해 보는 관점이 수치심으로 작용한다.
용서하는 자신에 대해서 이두가지를 행해야 한다.
우리 자신(자아본성)을 위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수치심과 죄책감을 아울러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병적인 수치심은 자신에게 독소로 작용한다.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여, 무엇에 대해서든지 자신을 멸시하려 든다.
우리의 자아안에 있는 수치심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자아상을 훼손하며 더 깊은 병적인 상태의 센티멘탈리즘에 빠지게 하여,
쓸데없는 정신적인 부담감을 안고 살게 한다.

우리의 수치심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몸의 상태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무화과나뭇잎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우려 했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수치심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을 죽여 피를 흘리고 난후에
그 양의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므로 인간의 수치심을 가리우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성의 상태가
죄로 인하여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을 바라볼 때에 누구나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자아를 해결하는 것으로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회복케하는 은혜로
죄를 해결하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창조된인간으로 선언하시고 수치심을 극복할수 있도록 하셨다.

죄책감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정죄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죄를 지은 인간이 그죄의 여파로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해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의 유혹을 걸어 죄를 짓도록 유도한 사단은
사람속에서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는 할수 만 있으면 우리를 죄에 계속매여 있도록
죄를 해결할수 있는 죄의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미 고백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도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한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복음(용서와 구원의 메시지)안에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므로써
그들을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케 하고 소원케 했던 죄의 문제는
하나님편에서 해결의 길을 열어주셨다.
사람들은 그 해결의 차원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의 은혜안에서 얻게되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편에서 하나님에게 어떻게
그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따라,
인간에게 있는 죄의 영향력인 수치심과 죄책감을 극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용서받은 사람의 의인의 행동보다는
그들의 상태를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신다.
그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사람들의 상태와
그들의 전부를 용납해 주시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단절시키며,
서로를 원수시 하는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을 벗어나도록 인도하시므로,
그들을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으면
자신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부담감에서 벗어나며,
비로소 자신안에 있는 자아는 건강한 상태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그런 자아의 상태의 모습은 자기표현이나 자아실현하는 과정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여, 자신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며,
자신의 내면의 삶을 안정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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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찬가

갖난아기가 태어날때에, 손을 움켜 지면서 앙앙하고, 일성을 가한다.
이땅에 난 것을 기념하는 자기 표현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 시작한다.
내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느 가문에 태어나는지, 부자집인지, 가난한 자의 집인지,
그리고 선한 사람인지, 악한 자인지를 모르고
다만 태어난 가정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세상에서 태어나 사는 것이,
신의 혜택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인할수 없다.
생명을 갖고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 고사리같은 손이 자라, 어른이 되어 무엇인가를 이루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무엇이든지 달라질수 있으니,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에게는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신은 공평하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을 주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든 우리에게는 한정된 시간이 있다.
이시간에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할수 있으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자, 한계임을 알아야 하겠다.

밥을 먹고, 하루를 살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행복이다.
각병원마다 중환자실에 가보며, 자신의 병으로 인하여, 시간의 제한에 있음을 느끼며,
제한된 시간안에 무엇인가를 보람있는 일을 하겠노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의 길이를 늘여보겠다고 아둥바둥대는 이도 있으며,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한탄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어쨋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감사하고, 우리에게는 기쁨이다.

인생이 항상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그리고 내게 넉넉한 것만이 있고,
부족함이나, 또한 살면서, 어려움이 없든지,
문제에 쌓이지 않든지 하거나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이 없다면,
인생은 게을러지고,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나, 자신을 낭비하고,
우리 육체가 썩을 몸둥아리만 생각하다,
안일하게 지내다, 끝내지 않을까?

나는 살아있는 연어고기의 헤엄치는 모습를 좋아한다.
살아있는 생명을 갖고,
자기에게 내리 달려오는 물살을 가르고, 계속움직이며,
힘을 써서 달음질하여, 상류로 가고자 하는 자기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얼마나 무수한 인생이 이지구상에 살고 있는가?
그 많은 입들을 누가 다 먹이며, 그 많은 생명들이 다함께 살고 있으며,
가끔 전쟁과, 불합리와, 악이 있지만,
누구나 주어진 환경안에서 자기나름대로 살고 있는 것,
이것은 인간을 위한 신의 배려가 아닌가?

제한된 자원안에서 인생들이 살지만,
동시에, 무한한 자원을 가진 신의 돌봄을 받고 있지 않는가?
누가 이모든 만상을 계획하여, 설계하고, 이루어 놓았는가?
인간이었는가? 저절로 되었는가?
저 넓은 우주에 퍼져있는 행성들을 생명체들의 존재가
우리같은 인생들이 살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지 못했다.

누가 이곳을 사람들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는가? 그는 신이 아니었던가?
신이 인간을 자연안에서 살게 하여,
신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며, 비록 지금은 곳곳이 공해나,
인생들의 폐해로 지구의 환경이 훼손되어가지만,
그래도 이지구를 붙들고 있는 이가 있어, 우리가 편안히 살고 있지 않는가?

그는 우리 인생안에 소우주를 만들고,
우리안에 있는 내면세계에도, 그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고자 한다.
신의 만든 세계나 역사를 보고, 우리가 이것을 이루어 놓았는가?
그러나 신의 도움이 없다면, 결코 아니다.
그가 있으므로 우리가 있게 되었다.
그가 붙들므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
그가 인도하므로 우리가 따르고저 한다.
왜냐하면 그의 지시하는 길이 바른길이고, 인간의 생명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기에,
사실 우리 모두는 고백해야 만한다.
우리의 미래와 운명이 그의 손에 있다고, 그리고 그에게 나가야만 할 것이라고.

우주여행을 했었던 우주인들로 인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한편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우연인가? 아니다.
신이 그 것을 아름답게 해놓았기에, 그렇다.
우주를 아름답게 이룬 신이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도 그의 만드는 솜씨를 아름답게 나타내고저 한다.
인생이 갖고 있는 자신만이 간직하는 내면의 소우주에 대해
과연 내가 마음대로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을 것인가?

인생들이 가끔, 하루에도 열두번씩 내 마음이 변화하는 것을 경험한다.
오늘은 시내에 나가, 친구를 만날것인가?
아니면 집에 앉아 휴식을 즐길 것인가?
마음대로 결정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실행못하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나,

신은 인간에게 그 소우주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생존권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 소우주에 대한 소유권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변함없는 마음의 편안함,
그 소우주의 질서 내지는 행복감은 저절로 내가 이룰 수 있을까?
언제부터 인가 두려움이 자리잡고, 불안함이 있으며,
미혹됨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어둠이 깃들지 않았는가?

신은 인간에게 삶의 기회를 부여했다는 것과
인생이 지금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인간에게 더 많은 것을 준비해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푸른 꿈이 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상관없이 아주 필요한 것이다.
내일 자신의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에게도 살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시간의 제한으로 들어가는 죽음의 때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행한 결과에 의해 그렇게 된 것뿐이다.
이런 제한에서도 신은 인간에 살 만한 인생들의 미래에 대한 생존권을 보장해 주었다.
늙어갈수록 그 생존권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것이,
늙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생은 질고, 실패, 병고, 죽음, 절망, 파멸등에 매달려 살지 않고
살수 있기를 늘 희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신은 이런 모든 부정적인 인간경험까지도 유익한 것을 창출해 내고 있으니,
그는 과연 신이 아닌가?
아픔뒤에 회복이 있으며, 갈등이 지나 화해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고,
전쟁뒤에 평화에 대한 간절함이 있고,
죽음뒤에 평화로움과 인생의 완성감을 맛본다.

신은 지금 인간이 누리고 있는
보다 큰 영광과 행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인생처럼 바보인 인생은 없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볼수가 없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가시권을 가질수 없으니,
다만 신에 대한 신뢰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세계에 대한 신의 배려에 대해 조금 깨달음 바가 있다면,
다가올 신의 주는 혜택에 대해,
깊이 마음으로 부터 환영할 만 하질 않을까?
인생은 신이 제안한 살만한 가치의 세계안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지금 거기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다가올 미래는 휠씬 뛰어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지금은 내게 주어지는 삶은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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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의 생활이란?

빌립보서 1:-27-30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는 사람답게 생활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함께 있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마음 한뜻으로 기쁜 소식의 신앙을
     위해서 함께 싸운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28. 무슨 일에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구원의 표가 되며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의 표가
       됩니다.
29. 그리스도를 위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분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30. 여러분도 내가 싸우는 것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전에 보았고 지금도 듣고 있는 싸움입니다.

크리스챤의 생활은 그들의 정체감을 통해 나타난다.
그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자신들의 삶의 스타일을 만들어 간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것은 자신들의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크리스챤이어서 세상에 붙어서 사는 것인가?
세상에 살아 남기위해 사는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사명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시대에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무엇이 그들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일까?
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여하고 성도로서의 의무를 실천하고,
헌금을 내며 봉사에 참여하여 사는 것인가?
단지 외형적인 종교활동에 참여하는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안에서
이루어지는 마음과 영혼의 내면의 풍성하고 흡족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내면의 풍요와 만족이 자신의 생활과 삶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솟아나는 진리에의 사랑의 헌신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수고가 나타나는 것을 행하며
세상에 보내어지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자신만의 유일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자기연출의 전형적인 상태는
그들의 내면이 세상에 그 어떤 이들보다
마음의 평안과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내면의 솟는 만족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일 것이다.
자신이 신앙인이라서 기쁜 가?
아니면? 다른무엇으로 인하여 기쁜가?

자동차를 산 사람은 그 차를 운전하는 처음시기에 탈때마다
차에 대한 유쾌한 감정으로 탈것이다.
새 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그 집에서 지내는 수년동안을
만족해 하는 마음에 여유있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결혼을 한 새가정에는 신혼의 단꿈의 시절에는 웃음이 나오며, 깨가 솟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들은 사람들이 인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인하여
그것에 만족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들은 우리의 육체와 시간이 쇠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만 일시적인 현상이며 지나가는 형체에 불과 할 뿐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기쁨과 만족은 그런 외형적인 것들과는 달리,
죄와 그로 인한 모든 짐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가는
그들의 마음과 영혼속에서 솟아나는 영혼의 환희와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얻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건강한 이해와
마음의 자족에서 오는 지속적인 기쁨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 그들이 누릴 미래와
영원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영생의 기쁨과 영광의 만족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방향성(미래지향, 완전지향, 영원지향)을 향하는
신앙인의 만족과 기쁨은 그들의 생활속에서 자기표현을 통해 나타난다.
신앙인들은 그들의 그런 건강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자기를 표현하게 될것이다.
세상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자신의 주변과 이웃에대한 관심,
그리고 형제들과의 연합과 함께 하는 활동을 통해
세상을 향한 봉사와 전도와 선교를 감당할 것이다.

좋은 일을 하려할 때에는 어려운 일이 닥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주변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이나 주의 주장들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자신의 신앙에 대한 것이나 자신의 삶의 철학을 위해
지켜가는 자세에 대해 흔들리지 말고 살아야
자기의 믿은 바를 통해 열매와 선한결과를기대할수 있다.

선인과 악인의 삶은 그들의 행동과 생활의 열매로 나타난다.
선한 일을 위해 힘쓰며 사는 사람은 그들의 평소에 갖고 있는
선한 생각과 태도를 통해 선한열매를 맺고,
악인들은 평소의 악을 좋아하는 성향과 죄에 물들은 상태에서
악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행한다.
하나님은 인생의 각자에게 행한대로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갚으시는 분이다.
의를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영광과 상급을 주며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형벌과 댓가를 치르게 하신다.

사람들각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은혜안에서의부르심이다.
그의 은혜는 성도의 온전과 영광을위한 주님의 선물이며,
성도안에 있는 능력의 자산이다.
성도가 구원얻은 것은 하나님의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은혜이며,
성도들이 받는모든 축복은 그의 베푸시는 축복의 은혜이며,
그의 은혜에는 사람을 고치고(회개), 새롭게하고(개종),
의롭게하며(칭의) 회복케하며(치유), 성장보존하며(성화와 견인),
영화롭게(영화)하는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 성도는 하나님에게나아가며,
은혜안에서 자신을완성해나간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
성도들은 성령의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통해
사역을 하기도하며, 그들은 그 은혜를 통해 봉사와 헌신을 하며 자기를 표현한다.
그리고 자기완성을 이루어 간다.
이런 사역과 자기완성의 과정안에서
성도들은 자기의 신앙과 그들의 삶의 신조를 따라 살아간다.
고로 생활속에서 성도들의 신앙은 고난과 영광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한 삶에 있어서는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어야 영광을 차지할 수 있다.
작은 고난은 작은영광을 얻으며, 큰 고난은 큰 영광을 얻는다.
고난속에서 댓가를 많이 치른 사람들은
장차얻을 영광속에서 더 많은 유익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성도를 훈련하게하며,
성장하게 한다.
성도가 예수의 고난인 십자가를 짊어짐은
생활속에서 예수의 책임과 사명을 함께 감당하는것이다.
성도가 예수의 십자가를 짐은 동시에 그의 부활의영광을 향한 발걸음이며,
예수의 부활은 성도들의 의의 근거이며,
죄와죽음의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영적으로 그와 더불어 살아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인으로서 영광으로 나가는 순례에의 길에 참여하며,
장차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과 권세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앙을 위한 전쟁은 진리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그 진리의 투쟁의 선상에서 복음을 위한 투쟁을 위해
거짓 복음이나 사이비신앙의 난무에 대해
분명한 신앙인의 순결의식과 진리사랑의 정신이 필요하다.

신앙인은 자신의 전생애를 걸쳐 몇가지 방향에서 영적싸움을 싸워 가는것인데,
그 싸움은 자신안에 있는 선한기질(영의 정신, 믿음의 성품)과
악한 성향(죄악을 범하는,육체의 욕심만을 따르는)과의싸움,
세상의 불의와 악에대한 싸움(악인과 교만한 죄인들의 대적),
영적인 대적의 존재들(유혹과 핍박를 통한 방해공작)과의싸움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 영적전쟁에서의 싸움에는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과
그리고 사랑의수고 더 나아가 피흘리기 까지 싸우는 진취적인 불굴의 정신이 요구된다.
영적전쟁에서는 승리가 목표이며, 승리에 따른 좋은 결과를기대할수 있다.
성도들의 승리는 주님의 승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며,
승리를 챙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단지 그의 승리를 통해 가져온 결과로
이미 승리를 보장받은 성도들은 승리의 고지에서
자신의 인생안에서 얻을 전쟁 수획물(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죄와 절망과
죽음으로부터의 얻은 영광의 자유)을 얻기 위한 영적인 자기순례의 싸움이며,
주님의 의와 진리를 위한 수고이다.

지금 자신은 어떤 문제로 고민하며,
어떤 이슈로 자신의 영적전쟁에 관건이 되고 있는 가?
그것들 중에는 성품의 문제,유혹의 문제,물질과 생활의 염려,
영적인 훈련과 생활의 이슈등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신앙인들에게 다가오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자기의 영적인 투쟁을 향한 수고가 없다면
그는 아직도 세상에 머물러 있는 어두움의 상태에 있는 자신이며,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회색지대에서 방황하는 영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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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도와 응답

요일 5:14-15
14.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구한 것을 받은 것도 알게 됩니다.

 

기도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무슨 일이든지 기도를 하고 하는 것과 기도를 하지 않고 하는 것의 차이는 확연히 구별이 되며,
일의 과정이나 결과에서도 다르고, 일을 추진하는 능률이나,
일이 이루어지는 역사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식물의 성장의 실험에서 두화분에 식물을 심고 가꿀 때에 기도를 하고 돌보는 것과
기도를 하지 않고 그저 돌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장의 차이와 열매의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바램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람이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자신이 살고 있다는 생활의 의미나 생활에서 겪는
자신앞에 있는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잃고 방황한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 시스템에서 바라는 생각대로
그 이메지 (상)에 따라 삶을 이루어 간다.
어린 시절의 꿈을 가진대로 장년이 되어 자신을 그 꿈대로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가?

 

사람은 바라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에 대해 바라고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간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이면서 하나님과 기도자의 쌍방간의 소통이나 교류에의해 연결된다. 고로 기도는 독백이기보다는 대화이다. 인격적인 대화이다.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인간이 그분을 다 이해하지 못하나,
그분의 속성을 이해하고, 그분의 섭리를 이해하면 기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에게 이르는 소통의 과정을 겪어서 응답을 가져온다.

믿음이 기도를 통해 일을 하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그의 일의 일을 이루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그에 대한 믿음으로 기도함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그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믿음이 세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다. 원래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다.
믿음은 그 세상의 창조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이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저절로 생겨나거나, 발전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주가 만물을 그의 뜻안에서 그의 행하시는 방법으로
무에서 유를 있게 만드신대로 이루어 진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나, 혹은 세상을 움직이는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데는
그를 향한 태도에서 알게 된다.

세상을 창조한 신은 인간이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가는 분이시다.
고로 그를 이해하고 그를 알기 위해
그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알려지신 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있어 신뢰의 관계가 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한가지 고민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가 제때에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신앙의 낙심의 원인이 되기도하며, 영적인 생활에 혼돈을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영혼의 기도의 맛을 잃게 하기도 하며,
그리고 기도에 전념하지 못하게 한다.
더 나아가 영적인 방황이나 슬럼프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신앙인에게 자신의 믿음생활에 안정적인 확신과
지속적이고 건강한 영적인 진보를 갖게 하며,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을 강화시켜준다.

 

기도의 응답에는 여러가지의 응답이 있다.
먼저는 하나님으로 부터 기도에 대한 무응답으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있으며,
또한 자신이 원하는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대체하시는 것으로의 응답이 있으며,
더나아가 때와 시기를 필요로하는 응답이 있다.
그리고 정한기간에 응하시는 응답이 있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는 기도자의 믿음을 요구하기도 하며
믿음을 키우는 도구로 기도가 활용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기위해 지속적인 관계안에서
인내와 명분을 갖추게 하며 응답받은 성숙한 인격으로 기도자를 인도하신다.

 

기도자는 하나님으로부터기도응답에 대한 확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런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자신이 하는 기도에 대해 먼저 하나님에게 여쭈어야 하며,
자신의 필요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기도자의 필요의 정도에 따라 반응하시고,
기도자의 기도의 타당성에 응하신다.
그 말의 의미는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긴급한 것인가를 통해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의 반응을 기대하게 한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는 것은 자신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여,
열심있고 믿음있는 기도를 계속적으로 하게 하며,
그 기도의 습관은 나중에 자신의 삶에 좋은 열매의 결과도 가져온다.

 

기도응답에 대한 신앙인의 믿음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믿음의 근거가 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부부는 자녀생산에 대한 기대를 갖고서 기도를 드렸을 것이나,
그들의 자녀를 위한 기도는 신앙인생의 긴 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84세에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16년이 지난 100세가 되어 아브라함자신과
그의 정실 부인 사라자신의 몸을 통하여 약속의 자녀를 받았다.
그 때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만한 성숙한 신앙의 단계가 되었던 것이다.
그 약속을 받기 까지 도중에 그들의 시행착오
( 신실한 종을 후계자로 생각한 적이 있음)와 인간적인 방법
(후실를 통한 낳은 아들: 이스마엘), 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기도응답을 생각할 때에, 신앙인들은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기도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뛰어나며,
그의 뜻이 사람의 뜻보다 높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고로 기도자는 그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향하여 나가는 기도를
그가 들으신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예언자의 사명을 했던 사람이며,
그 시기는 가장 악한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로서
그런 때에 그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항상 기도에 의존하는 사람이었으며,
기도로 사역을 하였던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이며
그는 그의 기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어
당시 우상을 섬기던 850인의 우상예언자들과의 기도대결에서 승리하였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의 응답으로 우상의 예언자들과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셨으며, 하나님이 참신이심을 나타내셨으며,
그의 기도로 온나라에 우상의 열풍을 잠재우는 일을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그의 기도로 인하여
온천지에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의 현상을 일으켰으며,
또한 그의 기도로 하나님은 하늘에서 단비와 축복의 폭우를 쏟아 붓는 응답으로 역사하셨다.

 

기도응답과 믿음은 정비례한다. 강한 믿음의 소유자는
많은 기도의 응답의 경험을 가져오며, 기도의 응답은 건장한 믿음을 불러온다.
역사상 많은 기도의 사람이 나타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기도를 역사하셨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가져온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며, 자신의 인생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손길을 맛보고 싶은 이들은 기도를 사랑하며 기도에 몰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고질적인 문제안에 있는 자신도 변화되고,
자신의 인생도 좋은 방향으로 달라지며,
하나님의 응답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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