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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06
    미국인의 고민: 가정과 자녀교육의 문제
    목동
  2. 2007/05/05
    말씀의 치유와 내면의 변화
    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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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론의 원인과 극복
    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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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퓨리탄 목회자의 생애와 목회
    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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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개혁에 대한 마틴루터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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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5/01
    퓨리탄들의 경건과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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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4/30
    사람을 죽게하는 것과 살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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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4/28
    영적성장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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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4/27
    우울증(4)
    목동
  10. 2007/04/25
    박스터의 목양신학(5)
    목동

미국인의 고민: 가정과 자녀교육의 문제

이혼이라는 가정의 문제는
미국인들사이에서는 50년대 이후 부터
베이비부머시대의 사람들이 자라면서
그들의 부모세대가 이혼을 하기 시작하는 가정으로 나타난다.
그전까지 즉 미국은 2차세계대전을 치루기전까지
건전한 가정이라는 국가적인 축복의 자산을 갖고서
세계를 리더하는 국가로서 선진국가혹은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기독교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공립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의 장의 상실,
즉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여,
공립학교 교육은 악화일로로 교육을 받는 자녀들이나
교육을 하는 부모세대는 함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그 배후에는 미국의 실용주의 교육의 영향을
준 죤 듀우이같은 이들의 무신론적인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것이다.

공립학교의 교육적인 도덕(기독교교육의 훌륭한 전통)성이 무너지며,
교육의 세속화는 사회적인 가치기준의 역활에서
기독교의 가치나 윤리범주를 벗어나,
그 세대에서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전세대의 무신론적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그 세대에서 이혼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여
보통 가정에서 이혼이라는
가족문제의 현상이 폭넓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철학은 현재의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철학적인 풍조의 영향과
맛물려, 현재의 탈근대적인 가치(절대주의 가치기준의 상실)로
발전하여 왔다.
그런 교육적 결과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가치기준에 혼선이나타나며,

그 여파로 건전한 많은 미국인의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잃게 되며,
오히려 가정의 이혼하는 현상은 보통가정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혼은 미국인 가정의 보통현상의 하나로
모든 가족관계의 표시란이나,
개인의 가정란에는
이혼을 통한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비정상적이고 역기능적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포괄적인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 현상은 결혼하는 가정의 반이 이혼에 이르며,
이혼하는 부모세대는 이혼하는 자녀세대로
역기능적이고 부도덕한 가정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이제 이혼하는 가정의 현상은 사회적인 정착단계를 거쳐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의 인간관계의 비윤리적인 상태로 빠뜨려,
그런 상태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건전치 못한 복잡한 구조의 가정안에서 자라난다.

이혼한 아버지가 이혼한 어머니와 사는 경우에
양쪽의 가정의 자녀들이 서로 형제간으로 연결되어
서로 얽히는 가운데에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된다.
스텝파더(의붓아버지)는 부인의 전남편의 자녀들을 돌보며,
그 자녀들은 전혀 생소한
엄마의 사람인 새로운 법적인 아버지를 두게 된다.
정상적인 부모와의 관계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과 더불어 싱글어머니나
혹은 부모가 아닌 제삼자(조부모의 슬하에서)에 의해
자라나게 된다.

자녀들과 스텝파더의 사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더 힘들고 복잡한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
부모와 자식간에 법적인 관계안에서의 가족관계가 성립이 된다.
자연적이고 혈통적인 관계가 아니라,
법적으로 단지 하나건너 엄마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관계는 소원하기만 하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의 부모, 즉 결혼한지
보통 10년을 전후한 부부가 서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이혼은 아이들의 상태를 아주 힘든 상태를 만든다.
그 나이에 벌써 남녀관계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배우고,
자녀들을 보호해야 할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무너지며,
고유한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관계가 무너지며,
아이들은 허물어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복잡하고 힘든 사회라는 곳으로 방치되어,
아이들은 방황하면서, 반항아로 사회에 대해 울분
혹은 스트레스에 의한 불량적인 자녀로 만들어지기가 쉬워진다.

이제 미국사회에 이혼은 악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다.
부부관계가 극단적인 경우를 넘어서는 것으로
서로의 인간관계의 끝을 보았기에 이혼의 가정은
사회적인 문제의 기본단위로 자리잡아,
자녀의 문제, 혹은 사회적인 범죄의 기본적인 제공처로
역기능적인 가정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앞으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의 가치가 무너지면
건전한 방향의 사회나 국가 건설은 지장을 받기 마련이며,
그것이 또한 사회나 국가 발전에 큰 장애요인으로
전반적인 사회의 이탈문화적인
(사회발전을 역행시키는) 현상이 될 것이다.

(이글은 필자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에 의해 쓴 사견임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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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치유와 내면의 변화

누가 24:13-35(21후-28 빠짐)

13. 바로 그날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면서.
14.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동행하였다.
16.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17. 예수님이 그들에게 “너희가 길을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멈춰섰다.
18. 그때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모르고 계십니까?”하였다.
19. 그래서 예수님이 “무슨 일이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앞에서 행동이나 말씀에 능력있는 예언자였습니다.”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해 주실 분이라고 잔뜩 기대했었는데 말입니다.
29. 그들이 강력하게 권하며 “저녁 때가 되어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묵었다가 가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묵으려고 따라 들어갔다.
30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자
31.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으셨다.
32.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말씀을 설명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속에서 뜨겁지 않더냐?”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날은 주님이 부활하신날,
그 두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마 주님을 따라 나섰던 이들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처형당하시자,
실의와 좌절속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최근에 일어난 일, 소문이나 뉴스는 사람들사이에 퍼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일은 그들에게 주된 관심이며,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이다.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이 었을 것이다.
십자가 죽음의 처형의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일,
십자가에서 처형받는 일등,
예수님의 처형소식을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사건에 대한 문제들을 토론하며, 열띤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가?
혹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

사람들의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먹고 사는 문제인가 아니면, 자녀들 문제는
혹은 부부간의 문제등, 가족들의 이야기인가?
사업의 문제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어느 일에 흥미를 느끼는 가?
저마다 이야기의 주제는 다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일에 있어 중심이다.
그는 모든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며,
그는 모든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주님이다.
그는 모든 삶의 문제에 있어 중심에서
그 문제들을 바라보며, 해결하신다.
자녀의 학업문제에 있어서도
그가 문제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부활예수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부활예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는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부활은 보통사람의 육체를 입음으로
그의 몸은 정상적인 육체를 갖고 있으셨다.
동시에 그의 몸은 영광을 입은 몸체이다.

예수님은 오직 그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주님으로 나타나신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한낮 스승정도로 생각하기도 하고,
그는 위대한 철학가나 도덕의 교훈가로 생각하지만,
그는 믿는 이에게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능력의 주이시다.
생명과 죽음그리고 사람들의 화와 복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문제의 핵심으로 인도한다.
질문법은 답변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그 질문에서 대답을 얻는 것을 전제하고,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관심사가 지금 무엇인가?

관심사는 자신의 인생의 중심에 무엇을 두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 두제자는 자신들의 관심이 온통 십자가의 예수와 그의 부활이야기에 있다.
자신들이 섬기고 따랐던 스승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삶이 온통, 그분에게 맞추어 져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구심점을 잃고, 방황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관심의 타겟이 사라지자
그들은 절망스러운 인생의 기로에 서있다.
슬픔이 그들의 마음을 누르고 있다.

글로바는 누구일까? 그의 이름이 거명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중에서,
제자들 다음으로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인 것 같다.
글로바는 예수님에게 최근에 소문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문제와 그것의 소문에 대한 답답함으로 질문을 하며 의아해 하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하는 일로 인해 그들의 삶을 볼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세상뉴스에 관심이 많다.
세상의 뉴스는 인생들을 세상으로 관심을 끌게 하여,
그안에서 분주하게 하며, 그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심을 갖게 한다.
슬픔이나, 혹은 안타까움이나, 범죄의 일이나, 고통의 소식들이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뉴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흥미는 그의 나라의 전달이나 실현에 있다.
하늘뉴스은 소망과 기쁨이 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다.
상담가의 질문은 피상담자로 하여금 그이슈에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상담의 재료로 삼게 된다.
그리고 함께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감정이입의 능력으로)
피상담자의 문제를 해결해간다.
많은 경우에 피상담자 자신에게 문제의 해결이 있다.

그들이 보는 예수관은 그들은 스승 예수를
아직은 사람의 지도자나, 선생으로 생각한다.
세상사람들도 예수를 보는 관점에 있어 예언자나,
애국의 지도자로 본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그들의 신앙, 세계관, 처세술이 달라져야 한다.

동족들에 의해 팔려가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모략이나 질투로 인하여
로마의 총독에게 사형판결을 받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다.
이런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인간들의 의도나,
반응이 악의적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악이었다.

이스라엘 인들은 당시에 나라잃은 슬픔과 고난의 세월에서 나라의 독립이나
과거에 나라와 민족의 영광을 얻었던 날들을 그리워하며,
그런 날들이 다시 오기를 고대한다.
메시야를 기다림은 그런 나라의 복을 기대하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민족의 해방이나 독립에 목말라 하였다.
예수께서 유대나라에 나타나셨을때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나라의 장래의 희망을 보고 크나큰 기대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 예수는 오히려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들앞에서 죽어갔으니.
그들의 실망이나 좌절은 큰 것이었다.
특히 그를 따라 나섰던 따르는 무리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두제자도 그 일로 인하여 깊은 상심과 좌절속에 방황하며,
미래에 대한 암담한 마음을 가눌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일로 인하여 평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고 전하셨던
부활의 기대는 전혀 갖지를 않았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그 두제자는 예수님을 함께 동행하기로 생각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의 요청은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져,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묵으려고 따라 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영접하고 모시는 인생들에게 오셔서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지상의 예수는 이제 부활하셔서 생명예수가 되어
온 지구에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의 생애속으로 들어 가시며,
그들과 동행하는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누구나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 시민으로 살기위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애 한복판으로 그를 초청하여 그를 모시고 동행하며 살아간다.

예수님은 부활이후에,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빵을 떼시며,
상징적으로 그의 몸을 생각하는 애찬을 나누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우리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그 구원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그분의 몸의 희생을 기념하는 주님의 성찬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성찬은 예수님의 몸을 기념하면서
그분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들 두사람과 함께 어느 하숙하는 집
식당에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게 되었다.
타인과의 음식을 나눔은 대화를
한결 부드럽게 하며 깊은 교제가운데로 인도한다.

그들의 식탁에서의 대화와 교제는 예수님의 성찬의 은총으로 나가게 하였다.
예수님이 빵을 들고 과거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앞으로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희생제물로 드리는 때를 기다리며, 성찬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죄의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어,
죽음을 맛보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님으로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눈다.
이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성찬의 식탁은 단순한 애찬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나누는 기념을 통한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하나됨을 경험하며 비로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안에서 주 예수에게 붙은 자들로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한 운명의 공동체가 되어
장차 주님이 누릴영광의 축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주님의 성찬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몸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세계, 그분이 영원히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그나라에서 얻는 영생과 영광의 축복을 맛보게 되었다.
성찬을 대할 때 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다.
주님의 성찬을 맞이할 때 마다 자신안에 있는 주님의 몸을 경험한다.
주님의 몸은 자신의 몸안에서 녹아들어
예수를 믿는 자신이 그 분의 영생의 공동체의 일부분임을 알게 하며,
그분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를 경험한다.

왜 빵을 받아 먹었는데, 그들의 눈이 열렸을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음식을 먹으면 몸이 힘을 얻는 다.
배고프면 눈이 감긴다.
주님의 몸은 썩어질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생의 양식이며,
생명의 음식이다. 그들이 주님이 주는 빵을 받아 먹을 때에,
그들은 옛날 주님이 자신들에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늘의 식탁을 맛보았을때에
감격을 되살리며, 그분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그분이 바로 자신들이
애타게 사모하는 주 예수의 얼굴의 모습이 아닌가?
그제야 그들은 주 예수,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던 예수가 이제는 부활하여,
제자들과 어디에서나 함께하는 생명예수가 되셨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세상 끝날까지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대로
그는 지금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에 살아계시며, 그들과 동행하신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그들의 시야에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 사라지셨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생명이 되신 예수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하였다.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 계신 그분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경험을 하게 하였다.

이미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세히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세히 풀어 설명하실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예수의 영의 역사가 나타나,
그들의 마음이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차디차있는 실망과 좌절의 마음이 따스한 생명의 입김으로 인하여
그들 속에서 희망과 용기와 그리고 열정의 마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듣거나 할때에
그 말씀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의 차이는 내면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사람의 두뇌를 번뜩이는 놀랍고 영향력이 있는 정보가
자신의 의식속에 뿌리를 내리면,
몸안에 있는 마음의 세계는 요동치며 감격해하는
인간의 마음을 팽창케하고 감격으로 벅차오르게 하는 감성의 시스템이 있다.
그 놀라운 정보의 영향력은 마음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의식과 감각의 종합적인 영향으로
마음을 지배하여, 그 마음 전체에
강력한 천둥이나 번개의 충격과 같이 전달되어진다.

그 제자들은 마음이 뜨겁다라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의 마음이 벅차오르는,
감격적인 깨달음으로 인한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경험 하였다.
그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부흥은 자신의 심령과
삶의 현장안에서의 충격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자신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
( 예: 어거스틴의 회개하는 마음의 경험이나 존 웨슬리의 새로운 마음의 영적체험).

이렇듯 말씀을 풀어 강해로 설명하였을때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들은 사경회의 부흥을 경험하였다.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말씀의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말씀의 선포는 말씀을 풀어내어
그말씀이 스스로 외치는 바를 드러내는 강해설교의 힘에서 나타난다.

마음이 속에서 뜨겁다라는 경험은
여러 단계의 마음의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가?
말씀이 마음밭에 뿌려져 마음이 변해되어가는 과정은
마치 예수님의 네가지 밭의 비유에서 사람의 마음이
사람들이 많이 다녀 땅이 굳어 있는 길가와 같은상태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관심, 냉담, 저항감)에서
그것을 깨뜨려, 말씀의 씨앗이 내려 꼳히는 상태로 변화되어,
더나아가 마음의 돌짝밭에 있는 거친돌들(교만,고집 부정적
시각)이나 씨들의 뿌리내림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걸러 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밭안에 있는 가시떨기와 같은 자신을
유혹하는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나
혹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걱정이나,
자신의 본성 에서 끝임없이 나오는 근심이나, 의심,
그리고 집중력을 방해하는 온갖 찌꺼기
(이중적인 마음의 상태, 정신적인 불안등을 일시에 갈아 엎어,
말씀의 씨앗들이 떨어져 심겨지기 좋은 마음의 옥토로 변하여 가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져 있다.
자연그대로, 혹은 자신의 본성이 가는 대로 가는
인간의 마음에는 그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 두제자에게 말씀이 열려 졌다는 강해설교자이신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그분의 생명있는 강해설교를 통해,
그들은 말씀이 열려지는 감격의 경험을 하였다.

그가 말씀을 풀어주니, 그들의 마음에 말씀이 착상되었으며,
말씀이 그들의 의식속에서 역사를 일으켜,
그들의 마음이 새로와 지며, 실망에서 희망으로 답답함에서 시원함으로,
냉냉한 그들의 마음이 뜨거운 생명의 열을 받아,
열정적인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렇듯 사람의 심령속에 일어나는 영적부흥은 마음에 말씀의 적용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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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원인과 극복

신에 대한 존재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배경에 대해서 몇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볼수 있다.

먼저 신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는 무신론이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신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야 편하게 죄를 짓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규범을 따르지 않고, 규율을 벗어버리는 습성이 몸에 배어서,
질서를 무시하는 자유분방한 태도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그러다보면 무신론의 영향을 받기가 쉬워진다.

또한 사람은 여러가지 동기로 무신론의 철학을 갖게 된다.
부모들의 무신론적인 배경을 통해서,
혹은 조상들의 범죄에 연루되어 자신도 모르게 불의한 삶을 추구하다보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정적인 인간관계(지독한 상처받은 경험이나 비운이나 재난에 가까운 역한 경험)를 통해,
혹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어느 시기에 특정의 사람
(주변에 유독하는 인생관이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심어진 부정적인 세계관을 통해,
신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무신론적인 철학을 습득을 통해 무신론을 익혀가기도 한다.
세계적인 철학자들중에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에 빠진다.
복잡한 사상이나 이상한 가르침을 통해 무신론의 세력이 강화된다.
주변에 무신론에 빠진 사람을 보면
반드시 그 배후에는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준 무신론적인 가르침이나 사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어둠의 영들의 미혹에 의해 사람들이 무신론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영적인 존재들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진리이신 신(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며,
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

무신론의 영향에는 다음과 같다고 할수 있다.
먼저 무신론적인 태도는 사람을 어리석게 한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태도는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양심적인 기능의 한부분이 마비되는 것이나
혹은 인간속에 있는 인간의 영적인 기능(신과의 접촉을 가능케하는)이 정지된 것처럼
그 의식이 그 마음안에 자리잡고 있어,
자신의 사고시스템에 이상현상이 나타난다.
그런 마음이 사고하는 형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데 대해서도
신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게된다.
그런 어리석은 태도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여 밝게 사물을 보거나,
사람을 대하지 않게 만들고 자신을 부정적인 시각에 잡히게 한다.

무신론은 사람을 교만(방자)하게 한다.
무신론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속에 고집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의 사고나 태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의견을 절대화하여,
자신을 어리석에 과장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자기를 절대시하게 되면,
자기가 자기인생에 대해 절대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신론은 사람을 어둡게 한다.
무신론은 마치 따사롭게 비쳐주는 태양빛의 존재앞에
그 태양을 등지고 지내는 것 처럼 자신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상태로
그 그늘속에서 자신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
해를 등지고 따스한 햇살이 주는 혜택을 받기가 곤란한 것은
그 해살의 비쳐주는 강인한 따사로움이 사람들을 거동하게 하며,
빛이 주는 능력으로 사람의 몸의 온 구석을 두루 비쳐주어
몸의 세포가 다시 생성되고,
몸의 요소들이 마치 식물이 해빛의 영향으로 광합성 작용을 하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듯,
사람도 햇빛의 주는 광선으로 생동있게 존재한다.
그러나 무신론에 빠진 사람은 이런 혜택을 스스로 거부한다.

무신론은 절망하는 인생을 더욱 불안한 모습에 푹 눌려 지내게 하며,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숙명인양,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불안이 주는 마음의 공허나
혹은 공항을 겪으며 살게 되며,
늘 불안한 자신속에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한다.

무신론을 극복하려면, 먼저 유신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신의 존재와 개입을 인정해야 한다.
신의 존재는 불가지론자의 경우처럼 신을 알수 없다고 가정하지 말고,
신은 언제나 찾는 사람들에게 만나주는 존재이며
다만 신을 구하는 채널이나 창구가 잘못이 되어
다만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신은 언제나 누구에든지 골고루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의도를 노출시키고 있는데,
그런경우는 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혹은 개인의 특별한 사건이나, 기이한 순간에 신은 자신을 나타내신다.
때로는 신은 가장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살았던 인물들에 의해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무신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볼테르는
자신의 생전에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태도를 갖고 살았는데,
신은 그의 집을 성서(신의 말씀)를 발행하는 집으로 활용하였다.

신의 노출로 인하여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을 믿고 따르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렇게 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갔다.
구약의 아브라함, 그는 무신론적인 고대의 세계에서 믿음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믿는 이의 조상이 되었으며,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었다.
그가 발견한 믿음은 그가 믿는 신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다.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인격신에 대한 믿음, 유일신에 대한 믿음,
자연신에 대한 믿음, 거짓 신에대한 믿음등이 다 다르다.
아브라함이 신의 부름을 깨닫고 자신의 응답을 통해 경험한 신은
바로 인격신에 대한 경험이며,
개인의 역사속에 개입해 들어오는 신의 인도를 따라 가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유신론적인 사고의 시스템안에서 무신론적인 태도는
얼마든지, 외형적인 신앙적인 형태의 생활에서
전혀 신을 의식하지 않고,
그를 기만하는 태도로 사는 경우도 있다.
외형적인 종교적 지식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의 일을
다 헤아리는 신의 의도를 다 알수 없다.
오히려 외형적인 종교적인 지식이
더 큰 무신론적인 사고의 형태로 종교인들에게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덜 종교적인 사람이 오히려 신에게 가까이 이를 수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신에 대한 가장 충실한 인간의 자기표현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낳고 자라게 하며,
젊은 시절의 여러 인생의 노정에서,
베풀어준 부모의 보살핌이나 보호가 있다.
자녀들을 돌봐주는 부모의 마음은 늘 자식에게 있다.
그 부모의 태도는 자녀들이 자신을 믿어주고 신뢰하며,
자라고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처럼 사람과 신과의 관계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의 유형으로 볼수 있다.

그렇지만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부모와의 관계가 건강하고, 올바르게 형성된 사람은
자기와의 관계나 타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신과의 관계에서 좋은 태도와
인생관을 가질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많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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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퓨리탄 목회자의 생애와 목회

플레블
(한달전 저의 블로그에 플레블의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를 올렸었다).

1527년에 퓨리탄 목회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공부하기 위해 옥스포드대학에 갔다.
1650년 4월에 영국의 드본에서 보조목회자가 되었다.
6개월후에 지역 장노회에서 목회자로 안수를 받았다.
1656년에 그는 다스모스에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고,
6년후에 2000명의 퓨리탄 목회자들처럼 주거제한의 압박을 받았으나,
그는 할수 있는대로 목양에 힘썼다.
그의 부모들이 런던에 있을 무렵에 그는 잡혀서 뉴게이트 감옥에 갇혔다.
거기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그의 부모들은 죽었다.

퓨리탄에 대한 핍박은 1672년의 자유의 선언으로 누그러졌다.
그는 다스마우스로 돌아와 목양을 했으나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로 부터 격리를 당했다.
그는 1687년에 다시 목회자로 1691년 죽을때까지 목양에 힘썼다.
그는 4번의 결혼을 하였지만, 3사람의 부인을 사별하는 고통을 받았다.
그중의 첫째부인은 아이를 놓다가 죽었다.

퓨리탄 목회
플레블이 이해하는 퓨리탄 목회는
경건한 목회자와 신실한 설교자로
교회를 영적으로 목양하는 것으로
그는 설교모델을 웨스트민스터의 신앙선언
(퓨리탄시대에 성경적인 신앙강령으로 내세움)에서 채택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모델들은 다음과 같다.
1.성경본문으로 안내하기
2. 가르치려는 주된 요소들을 분석하기

3. 이 진리들을 강해설교로 발전시키기:
특이한 본문으로 부터 진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본문안에서 바른 교리에 대해 설명을 하며,
선택된 본문을 통해, 할수 있는대로 그 진리들을 확증하기,
본문을 돕는 예화를 활용하는 원리,
청취자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어려운 교리들을 센스있게 다루기.

4. 적용하기: 지적인 잘못을 다루는 것,
가르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
본문에서 알려진 죄의 문제들을 보여주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들을 제안하기.
본문이 어떻게 고통을 당하고, 두려워하거나
혹은 의심하는 크리스챤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여주기,
이 본문이 어떻게 설교자 자신에게 혹은 설교자를 위해
가르쳤는지를 알고있는지를 보여주기,
평이한 문장으로 듣는 청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설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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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에 대한 마틴루터의 단상

마틴루터는 종교개혁의 아버지라할수 있는데,
그는 중세의 종교개혁당시에 부패한 교회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독교의 개혁적인 면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인 경험과 자신이 성경이해를 바탕으로
당시에 문제점있는 교황무오주의와 왜곡된 교회의 전통과
그것의 지나친 교권의 권위에 대해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회의 개혁드라이브를 걸었다.

 

마틴루터가 주장하는 교회 개혁에 대한 기본방향은 다음과 같다.
개혁의 필요성은 교회의 외부로 향하는 형태와 생활에 있어서
교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복음과 반대적인 성향을 나타낼때에 나타난다. 
개혁의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활성화된 영적갱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개혁은  목양적인 입장에서 교회의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데 힘쓰는 것이다. 

 

좋은 교회의 질서는 그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서
교회의 친교, 교화, 그리고 거룩성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개혁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이 말씀의 설교나
가르침의 탁월함에 두어야 한다. 

 

루터가 강조하는 부분은 그의 설교, 저서,학문성에 있어서
살아 역동하는 개혁적인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인내는 개혁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며,
개혁정신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
먼저 개혁을 추구하는
우리자신들의 변화에 두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교회의 개혁의 사역을 기다리며 나가야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교회를 하나님의 시온성으로 세상에 세울수 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교회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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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탄들의 경건과 특성

퓨리탄들은 영적인 개인저널(영적일기, 혹은 자기고백적 신앙일기등)을 쓰며,
그리고 개인적인 자기고백을 통해 자기지식(자아인식)에 대한 마음의 사역이나
자기조사(영성실험, 테스트), 매일의 자기부족에 대한 매일의 회개,
체계적인 찬양과 기도의 생활등을 통해
그들 자신들의 영성이나 활력있는신앙을 유지한다.

경건(하나님을 닮아 세상에서 거룩한(구별된) 성품으로 살아가는 자질)은
퓨리탄들의 중심개념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경건개념에는 4가지 자질적인 측면이 있다.
1.그들의 겸손함이다. 항상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앞에서
살아가는 죄인된 인간의 개발되어진 낮아짐을 의미한다.
주님앞에 지속적인 용서받음을 구하며, 살아갈수 있다.
2. 그들의 수용성(열린태도)이다.
성경속에 발견되어진 진리들을 가르침이나 자신을 고침이나,
인도됨에 대해 열려있는 영적인 센스안에서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불만족한 어둠(신앙생활에 자신의 뜻대로 안되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챤들은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흔들려서는 안될 것이다)과
내면의 버림받음(신앙의 암흑기를 맞이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의 상태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 됨/
사단을 이런 상태를 조장하고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이간하는 것으로 이용하기도함)에 의해
훈련받음에 대한 자발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며,
행복한 섭리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장래의 영광을 위해 열매맺도록 하시며,
그들 모두(크리스챤)들을 손질하고 다듬은 단계(징계와 단련받음)에서
하나님은 때로는 부드러움보다는 거칠게 다루는 신실하시며,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선한손길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 분을 믿는 신속함(용이함)을 나타낸다.
3. 찬양하는 태도이다.
자신의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해 예배드리는 열정을 내포하며,
자신의 말과 행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일에 노력한다.
4. 에너지이다. 참된 퓨리탄을 이루는 영적인 에너지를 통해,
모든 세계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바라며,
모든 윤리적인 삶에 있어서, 불신앙적이지 않으며,
게으름이나 수동적이지 않게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것들은 퓨리탄들의 가진 신앙적인 태도들로
지속적으로 그들의 마음과 의식체계안에서 상호 작용하여,
자신들의 영성을 높이는 생활을 하였다.
그것들은 퓨리탄의 굴하지 않고, 지칠줄 모르는 내면의 비밀이다.

퓨리탄들의 특성들
1. 퓨리탄들은 위대한 사상가들이다.
그들은 주로 목사들로, 대학에서 공부하였던 뛰어난 박식가들이 많았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당시에 최고의 학문이었다.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며 언급할때에,
그들은 강렬한 사고적인(자신을 반영하여 변화케하는) 연구와
깊은 기도에서 나오는 크리스챤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과
교회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통해 신학적인 연구를 추진하였다.

2. 그들은 위대한 예배자들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위대함과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감격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태도는
넘쳐나는 예배에 대한 영성으로 발전되어,
보통 그들은 3시간이나 4시간씩을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 그들은 위대한 소망가들이다.
그들시대에 신앙적인 핍박이나 어려움등을 그들의 신앙적인 저술이나
혹은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박스터의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 존 번연의 천로역정등

4. 그들은 위대한 영적인 군인들이다.
그들은 세상, 육체, 마귀에 대해 쉬임없는 불굴의 전쟁을 치루는
뛰어난 영적으로 무장한 전사들이다.
그들은 영적인 긴박감을 늦추지 않았으며,
세속의 물결을 거슬려,
당대에 있는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주는 신앙의 유산을 계승발전시켜
후대에 귀한 영적인 자산들을 남겨준 하늘나라의 군인들이다.

Packer의 "A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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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게하는 것과 살게하는 것

에스겔18:26-32

26. 만일 의로운 자가 그 의를 떠나 죄를 범하고 죽으면 그는 자기가 범한 죄때문에 죽는 것이며
27. 만일 악한 자가 그 악에서 떠나 법을 지키고 옳은 일을 행하면
그는 자기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28.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켰으므로 분명히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29. 그런데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고 말한다.
이스라엘백성들아, 어째서 내가 공정하지 않느냐? 오히려 너희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30.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이스라엘백성들아, 너희가 행한대로
내가 너희 각 사람을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모든 죄에서 떠나라.
그러면 너희가 죄때문에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31. 너희는 지금까지 범한 모든 죄를 버리고 마음과 심령을 새롭게 하라. 이스라엘백성들아,
너희가 어째서 죽으려고 하느냐?
32.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나는 그 누구도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유다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릇된 길에서 자신들의 살길을 찾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사람이 망해가는 법을 좇아, 살길을 찾는 길은 어리석은 현상이다.
인생이 성공하는 소원이 가득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방법이나, 처세를 가지고 살아가면,
성공보다는 실패하는 예가 더 많이 자신의 주변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나 유다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지키며,
주변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을 할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앙에 근거한 옳은 삶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신신앙의 순결에서
이방나라들의 풍습이나 삶의 흔적을 좇아가서,
어리석은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를 중시하고,
현재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살피신다.
사람의 삶도 현재가 중요하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자신이 과거에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였다 하더라도
지금자신이 하는일이 옳지 않다면,
그 일이 자신을 더럽히고, 그일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며,
자신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자신이 결코 소홀히 대할수 없는 사람이며,
현재 자신의 모습이 어떠 한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사람은 과거에 살지를 않는다. 다만 현재 주어진 시간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잘한 사람은 그 잘한 일에 도취되어
현재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등한히 하기 쉽다.

악한 자가 과거에 지은 죄로 괴로워 하겠지만,
그러나 과거에 범한 허물이나 죄가 더이상 영향을 주지 않도록,
현재에 개관천선하여,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를 선용하여
바르게 살기로 다짐하고 현재를 바르게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상처나, 지나친 과거지향주의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은 자신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악인이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슬퍼만하지 말고,
현재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현재를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일을 잘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하늘에 대해 불평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이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분복이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부를 받아, 부한 가운데에서 살고,
어느 경우는 건강하게 사는 경우도 있으며,
어느 경우는 불행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어느 사람은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을 살다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생애를 살아간다.

공정하게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받고 살아가도록 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 각자에게 공정한 심판을 행하신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만났을때에 자신의 처지나
문제해결에 대한 하소연이 들어지지 않을 때에,
그사회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쉬워진다.

이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한에서는 공정한 인생을 살아간다.
인생의 후반에 가서는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는 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단하며,
그의 공정한 저울로 사람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판단은 항시 현세와 내세의 삶의 판단의 저울로 사람들을 평가하신다.

하나님의 공정성의 판단에 대한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든다면,
현세에서 의로왔지만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들은
내세에 마련한 영생과 영광의 복으로 살게 하신다.
그리고 현세에서 악하게 살며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그러나 편안하게 살았던 인생들은 나름대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현장(형벌)을 통해 평가하신다.

사람은 자신이 행한대로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도록 되어있는 원리안에서 살아간다.
자연의 원칙안에 있는 세상은 무엇이든지 심은 것을 거두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이 원칙위에 다스리신다.
그가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그들이 행한대로 갚으시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대한 합당한 결과를 얻게 한다.

개과천선이라는 말은 지난 일들의 잘못된 인생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지난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혀 새로운 방향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항상 현재의 기회를 바로 사용하려면 구태의연한 태도를 버리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항구에 정박에 있는 배가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하려면,
정박해있는 부두에 붙들어 매둔 밧줄(자신을 댕기는 과거의 끈)을 끈고
항해에 나서야 할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는 지은 죄에 대한 청산하려는 결단의 태도와
또하나는 자신안에 죄를 지으려는 성향들을 고치는 태도이다.
이것은 사람의 회개를 통해서 가능하다.
회개는 죄의 결과에 대한 준엄한 자신의 평가에 따르는 통한의 태도이며,
그리고 자신의 그릇된 죄질의 성향의 방향전환의 결단을 포함한다.

인생이 죄에 대해서 왜 생각해야 할 것인가?
죄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은 그 위반한 행위에 대한 댓가를 치른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들은 그 범법한 행위에 대한 법적인 구속을 받는다.
그것을 벗기전에는 모든 일에서 자유할수 가 없다.
그 위반이 자신의 활동하는 몸이나 생활을 영향을 주는 구속을 주기 때문이다.
(경범과 중범의 차이는 있지만, 법위반에 대한 것은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죄의 시작은 인류의 시조인
처음인간(아담, 하와)의 범죄에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대표적인 사람들로
그들의 허물과 범죄가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 속에 영향을 주어,
그들과 같은 성향의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난다.
그들의 피가 온인류의 몸안에 흐르고 있는
죄를 짓게하는유전인자와 악한 성향등으로 나타난다.

고로 인간의 죄는 먼저는 원죄이다.
그리고 그들속에 있는 그 악한성향이 나타나
자신이 짓는 자범죄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모든 종류의 죄악이다.

인간의 법은 행위와 영향력에 대한 죄를 묻고,
드러난 죄의 결과를 판시하여, 죄에 대한 형벌의 대가를 치른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외형의 죄뿐 아니라,
내면의 죄와 타고난 인류의 원죄와
그죄의 영향력까지 사람을 살피시고 있는 그의 심판의 잣대가 있다.
고로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이 죄에 대해 자유로우려면,
자신을 만드시고 존재케하신 하나님앞에 가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실 죄의 시작이나 근본은 외형적인 죄의 행위에 있지않고,
죄를 짓게하는 내면의 태도나 성향이 더 문제인 것이다.
어느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기질이 있다면,
언제가는 타인의 물건을 도둑질할 것이다.
또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신의 성향이 거짓되고, 오만하고,
악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면,
언제가는 그런 것들이 외부로, 혹은 자신의 주변로 분출되어 나타날 것이다.
고로 인간을 고치려면, 즉 사람이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와 지려면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곳은 인간의 의지와 감성과 이성이 함께 어울러져,
자신이 어느 성향의 사람의 자아이든 그 자신의 자아의 지배를 받는 곳이다.
그 마음안에 두 주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 두주인은 인간의 옛자아와 새로운 자아이다.

먼저는 옛자아(타락한 이후에 갖고 태어난 인간의 죄의 성향과
그영향력의 지배를 받는 자아성)의 세력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지배를 받는다.
또한 새로운 자아(주 예수를 초청함으로 즉그가 영으로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심으로
그 소우주의 혼돈과 무질서를 새롭게 변화시켜,
진정한 인간의 온전성을 세워가는 자아)이다.

마음의 끝(가장자리혹은 연결고리)은 인간내면의 두방향성에 의해 연결이 되어 있다.
그 방향성이란 육으로 가는 길과 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육신으로 가는 길에는 인간의 몸에서 요구하는 육의 본성과
그 본성의 욕구충족의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서는 본능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욕구충족이 지배하는 세계로,
자주 혼돈과 고뇌에 사람을 빠지게 한다.
영으로 가는 길에는 인간의 고귀한 성품이 맞닿는 곳으로
그 끝에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과 연결되는 연결고리의 체계가 있어,
영적세계로 나가는 길이다.

그 영적세계에는 하나님의 인간속에 심은 인간성(종교성)이
비록 타락으로 변질되었지만,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영성)과 자질(하나님을 닮아가는 기질)이 있어,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이 되며,
관계가 성립이 되고, 교제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질서를 통해,
내면과 마음의 혼돈과 공허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으로 사람의 상태는
점점 질서와 창조의 채움으로 이어지게 되어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며,
건전한 자신의 소우주를 만들어 간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르는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 죄에 따르는 결과는 인간에게 죽음의 현실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죽음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이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번민과 고통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었던
그리고 짓는 죄의 결과로 사람들은 죽어가는 것이다.

그렇듯 인간의 죄는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타락한 인간세계의 필연의 악이다.
그 필연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죄악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죄에 대한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채무를 이행하면 될 것이다.

인간이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은 이미 인간의 대표로 나타나신 인간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서 사람으로 살았던
오직 한가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었다.
그가 해결하신 인간의 죄는 그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들이 짓는 죄의 성향이나 모든 행위에 대해
형벌의 댓가를 치르심으로 해결될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죄있는 사람들은 그앞에 나아가 그의 형벌치름을 의존하여,
죄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할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짓는 성향이나 악으로 빠지기 쉬운 혼돈된 내면을 새롭게 할수 있다.

살기 위해 살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당연한 사람사는 도리이다.
누구도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르는 죽음의 형벌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오직 그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그 길은 자신을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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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성장에 대한 도전

베드로후서 1:3-8

3.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광과 선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분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4. 이것으로 그리스도는 아주 소중하고 중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이 약속을 통해 여러분이 세상의 파괴적인 정욕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선을, 선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7.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8. 이런 것들은 넉넉히 갖춘다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욱 풍부해 질것입니다.
9. 그러나 이런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앞 못보는 소경이며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해진 것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에게는 하나의 주어진 사명이 있다.
그것은 거듭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주님앞에 설때까지
자신이 영적성장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살아있는 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계속하여 자라고 성장한다.
어른은 성장이 멈춘 상태라고 할수 있으나,
육체적인 성장은 멈추었어도,
정신적인 성장이나 영적인 성장은 계속적으로 자라가야 한다.

성장은 인간생활의 자연적인 활동이다.
성장발육이 되지 않는 것은 성장저해 증후군에 빠지며 성장하지 않고 나이만 먹어간다.
아이어른은 성장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이는 어른인데 자라지를 않아 아이의 상태의 몸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성장저해증후군은 비단 육체의 일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현상에도 같은 현상들이 일어난다.
영적인 성장에도 제대로 성장하지 않으면, 영적저능아의 증후군에 시달린다.
영적인 아이의 상태에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늘 기대어 살아가는 영적인 지체아들이 있다.
특히,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가는 신앙생활에는
영적인 지체아의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이 I.Q, E.Q, S.Q. 등 인간의 자체능력의 기능의 지수들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야 비로소 어른으로서 성숙한 사회적인 존재로 생활 할수 있다.
아이큐는 지능적인 활동으로 이성적인 기능이 자라게 된다.
이성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고능력이나, 문제해결의 능력을 개발한다.

이큐는 인간의 감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개발하며,
인간과 인간사이에 전자파와 같이 흐르는 감정적인 흐름을 파악하여,
그 감성의 영향력을 배워가는 능력이다.
에스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파악하여,
사람들과의 교제나, 사회생활에 적응해가는 능력을 개발한다.

사실 가장 인간에게 중요한 능력은 Spirituality Quotient (S.Q.: 영성지수)이다.
그것은 영적인 기능의 자질로, 영적인 센스나, 영감있는 능력을 개발하며,
영적인 능력도 인간의 영적인 세계의 감지하는 능력이나,
영적인 세계와 교류하며, 현상세계에 영향을 주는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이나 교제하는 능력의 자질을 개발한다.
이 자질은 그 방향성이 중요하다(영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데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세계가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판단의 경지를 넘어가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의해 택함을 입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신의 능력안에 참여하는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는다.
크리스챤들은 그들의 성품이 인간의 성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권리를
예수, 신의 아들, 즉 하나님을 통해 얻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인간의
신의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부름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살리는
생명을(운명적인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하는 생명을 얻는,
불안의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좌절과 절망의 상태에서 회복시켜주는) 가지고 있다.
그안에서 사람들은 생명을 발견하고 얻고,
생명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간의 가장 최고의 고상한 성품이다.
경건에의 순례는 하나님의 거룩의 속성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간이 도달할수 있는 신의 경지에 나가는 길의 과정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잃었던 인간의 온전한
것들(이상적이고 성장하는 자아에서 오는 믿음, 소망, 사랑등 )을 회복하는
자기 성품 개선내지는 자기 완성 개발의 지속적인 일생의 과정이다.

이렇게 사람이 자신을 개선하고 개발하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 결국 자신의 자신됨의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는 인생의 일생의 과정의 결과로,
자기가 가야할 영원한 미래의 상태나 위치를 결졍해준다.
그것은 인간에게 더없는 영광이며,
자신이 도달해가는 미래에 갖추어야 하는 진정한 선한 자신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이세상에 썩어질 육신의 것에서
썩지 아니할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늘의 권한을 허락하시며,
잃어버힌 사람들의 명예와 영광을 회복시키신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죄의 후손으로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운명에서 벗어날길이 없다.
아무리 도의 철학이나 지식의 방법으로 혹은 도덕이나 수양의 능력으로
그러한 인간의 굴레(죄와 죽음의 속박)를 벗어나게 할수는 없다.

다만 그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점점 죽이며,
파괴케하는 세상의 영에 의해,
절망스런 상태에서 연명하며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런 인생은 소망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자신안에 갇혀
절망과 탄식의 자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인간의 굴레들을 벗을 길을 마련하여 놓으셨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생들의 속박을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늘에의 영광에 동참하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부여받아,
그안에 있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하늘의 영광에 오르게 된다.

이길은 하나님의 생명을 품고 그것을 가꾸고 성장시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라고 성장하듯,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인 생명이 자라간다.
성장의 엔진을 달고, 지속적으로 자기변화와
자기 성장을 그분(예수)의 도달한 상태에 까지 목표를 향하여 부단히 진행한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생명의 날의 풍성을 위해 열심히 주어진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 분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는 것의 목적이 분명하고,
자신이 해야 할일에 대한 자기사명이 투철하여,
그들은 무엇이든지, 그들 자신을 통하여,
자신들을 영광스러운 자리로 초정하여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을 원한다.

고로 그들 자신이 할일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분명하고,
그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게 된다.
하나님의 길은 차선이 아니라, 항상 최선의 길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것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하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도 당연히 최선을 향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믿음은 잃어버린 인생의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안에 있는 인생들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고, 그를 따르고 신뢰하게하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살리고,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과의 연결고리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졌으며,
그분이 약속하신 것들을(인간의 회복과 영광의 자리,
그리고 영생과 축복의 권한등) 바라보며,
그것들을 우리 손안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모든 일들과 경험들을 합력하여,
가장 좋은 상태의 선을 이루어 내는 것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때에,그것을 기대하시며,
각 사람을 인도하신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선은
원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으셨을때에 보시기에 좋았던
온전하고 완벽한 상태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사람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의 모습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선의 상태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이상적인 선을 바라보고,
자기가 하는 일에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가려고 한다.
선을 이루어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궁구하는 여러가지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가게 된다.
그 길을 바로 가려면, 정확한 안내를 받아야 하며,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올바른 지식이 요구된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영생의 생활은 그를 알고
경험하는 지식의 성장에 따라 그분이 부여하신 생명의 풍성을 얻을 수 있다.
그 지식은 계시로 알려진 내용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그 계시의 말씀의 의미와 능력를 깨닫고 체험케 하도록 사람들에게
그 지식의 빛으로 조명해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다 유용한 것이 아니다.
개중에는 우리를 그릇되게 인도하는 거짓된 지식도 있으며,
사람들을 허왕되게 하는 어리석은 지식도 있으며,
지식은 지식을 추구하는 방향성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며, 어리석게도 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따라 행하는 일에는 질서가 있으며,
조절된 태도에 의해 좌우되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원자폭탄의 힘을 만들고 생산하는 과학적지식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종교성에의 인도와 안내를 받아야
파괴적이지 않고 유용하게 쓰여질수 있다.

영적생활에도 무모한 영적인 세계의 지식추구는
때로는 위험할수 도 있다 (이상한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경우나
사람의 생명에 도움이 안되고 해로움만을 주는 헛된 영적인 정보).
지식을 얻고 지혜로와 지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는
원래 선악과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절제는 질서를 따라 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지식추구에는 절제를 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들 주변은 요즘 많은 지식이나 정보의 홍수에서 지내고 있다.
우리가 접한 지식들은 우리의 두뇌에 각인도 되기전에
새로운 지식에 의해 우리의 두뇌의 수천억의 두뇌세포에 저장되곤한다.
지식도 정제된 그리고 절제된 지식이 필요하다.
무분별한 지식추구는 사람을 혼란케하고, 피곤하게 한다.
지식이 다 좋은 아닌 것은 우리 모두가 안다.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더럽게 하는 지식도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보면, 자주 인내하기 힘든 일을 만난다.
함부로 운전하다든지, 새치기를 하는 경우, 혹은 신호위반,
그리고 다른 차량이 진로를 방해했을때에
바로 우리의 성질을 표현하여, 상대방에게 불쾌한 감정을 표하곤 한다.
그런 경우에 절제와 인내가 필요할 때가 많다.

사람을 절제하게 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은
인내를 가져야 할 일에도 잘 적응하게 한다.
인내는 절제된 사람을 통해, 모든 일에 인내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나, 일을 추진하는 것에나,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사람이 자신을 통해 이루려는 업적은
인내를 갖지 않고서는 성취할수 없다.

꾸준히 착실하게 무슨일이든 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질수 있다 .
왜냐하면 힘들고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의 활용을 통해 인내를 갖고서 일을 대하기 때문이다.
인내할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인생안에서 인내의 법을 배우고,
모든 일에 그 열매를 거둘수 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경건의 생활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믿음을 이끌어주는 지식도 가져야 하며,
선을 이루고저 하는 향한 열정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조절할줄하는 절제와 인내하며,
일을 성취할수 있을때에 참 경건에 이를수 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신앙인의 성품속에는 이런 여러요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사람다와 질수 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때에,
사람의 생명과 인격의 존귀함을 알고
한 사람 한사람의 가치성을 알고, 사람들을 정중히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누구나
자신안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간의 속성은
가장 인간을 고상하게 하며, 가치있고 품위있게 한다.

이런 영적인 성품들을 사람들 속에 충분히 개발하면,
그 성품들은 더 자신을 성장하고 성숙시키는 길로 나가게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자기 이상이 있으며, 자기 목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신앙인의 믿음의 주이며,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그는 온 세상인들의 흠모의 대상이다.

요즘은 세상에서는 신문지상을 통해 접하는 뉴스를 통해,
윤리나 도덕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옳은 사람이 되라는 도덕군자들의 철학이나
인생의 가르침의 지식에 대한 능력을 상실해 가는 세태에 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이 되신 예수를 항상 생각하고 바라보면,
그는 자기 자신을 참 인간됨을 만들어 갈수 있으며,
그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의 참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에 많은 지식중에 자신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지식은
예수를 알아가는 지식이다.
예수는 만물의 주인이며, 만물의 중심이며, 모든 인생들의 중심에 존재하신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오며,
우리의 가치를 높이며, 나중에는
결국 우리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할 놀라운 정보인 것이다.

인생의 방향성을(빛으로 나아갈것인지, 아니면,
어둠안에 그대로 주저 앉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회색지대에 머물러 살고 싶은지, 즉 대략 3가지 갈랫길이
인생들 앞에 놓여있는 것같다) 아직 설정하지 못하고,
인생의 시작과 끝과 과정을 모르고,
돌고 돌아가는 지구처럼, 계속하여 방향도 없도 진행도 없이 살아간다면,
아직 그들은 자신의 위치와 방향성 설정에 고심을 해야 할 것 같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들이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도록 의지할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 비치는 밝은 세계로 나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둠을 그리워하며, 회색지대에 빛과 어둠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경우는
자신의 영적인 현주소(하늘에 속했는지 아니면 땅에 속했는지)가
어디에 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에 영적인 성장동력엔진(회개나 자기결단등의 충격요법)을 발동하여,
자신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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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4)

우울증의 원인들(1)
우울증에는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나타난다.
어떤 경우는 단순한 원인이 강화되어 일어나기도하고
어떤 경우는 복합적인 원인들이 서로 어울러져 나타난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을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수 있다.
첫째는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
또 하나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
우울증은 자주 육체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나곤 한다.
수면부족이나, 부족한 운동이나 마약의 부작용이나,
육체적질병이나 혹은 부적합한 다이어트등은 우울증을 일으킬수 있다.

대개 많은 경우에 여자들은 매월 월경증후군으로 우울을 경험하기도하며,
아이출산이후에 오는 산후증후군으로 우울을 겪기도 한다.
다른 육체적인 원인들은 두뇌의 종양이나,
두뇌신경세포의 역기능이나, 몸의 엉끌어진 분비샘등은
보다 복잡한 우울의 증상을 일으킨다.

어떤 우울증은 가계에서 혹은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생겨한다.
이런 우울의 요인에 대한 연구들은 결론을 내기가 쉽지않으며,
어떤 연구들은 정반대의 이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항우울증의 약물로 변형된 우울의 현상도 있다.

아치발드 하트는 엘리야의 우울에 대해 우상선지자들과의 영적인 싸움의 대결로
극한 격정의감정대립을 겪은 엘리야는
후 아드레날린(격한 감정을 겪을 때 나오는 호르몬)증후군의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에 높은 아드레날린의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데는
긴급한 사태의 일들, 여러사람앞에서 연설하는 경우,
정해진 시간에 가져야 하는 긴박한 모임등을 할때이다.

아드레날린의 호르몬이 소모되다가, 폭풍이 지나고 난후, 고요를 겪는 것처럼,
감정의 흐름이 정지된 현상의 경험들을 겪고난후에 후유증으로 우울증이 온다.
사람들은 대부분, 우울증을 경험한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휴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관심적인 일들에 소모된 우리의 에너지가
회복의 기간동안 을 거치면서,원기를 회복한다.
우리의 몸이 에너지를 쓰고 관심을 갖는 일에 몰입하는 기간이 길면,
회복하는 기간도 길어야 한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아드레날린의 시스템의 기능이 덜 활력적이어서,
높은 아드레날린의 경험을 하고난후에, 우울을 겪기가 쉬운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몸에 원기를 회복할때까지휴식을 취하며 잠을 잤었다.
하나님도 높은 아드레날린의 경험을 한 엘리야를 쉬도록 하셨다.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우울증이 생겨난다.
보통 인구의 4-10%정도는 정신건강의 문제가 있다.
특히 젊은 이들사이에서 빠르게 우울증현상들이 나타난다.
대학생들의 25%가 우울증으로 고생하며,
그중에 우울증으로 인하여 학교를 떠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미국의 경우).
이런 현상들이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심리적인 문제에서, 인간관계의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에서,
그리고 다른 육체적인 영향들이 우울을 일으키는 기초가 된다.

게린 콜린스의 크리스챤카운셀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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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5)

현대 목회상담과 박스터의 목회상담의 비교

현대의 목회상담은 심리학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박스터는 당시 퓨리탄의 인간의 영성이해의 근거에서
목회상담으로 접근하고 있다.

당시 퓨리탄들은 사람들의 심령변화와 영혼의 치료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하며,
그들은 사람들의 진정한 개종이나 거듭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설교는 대개 깊이있는 말씀의 증거나
사람들의 영혼을 접촉하는 영적인 가르침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 배경에서 박스터의 목회상담은
체계적인 지속적인 교리문답공부와 설교를 뒤받침하는
폭넓은 영성강의로 당시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의 심령의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렇지만 박스터의 인간영혼의 문제에의 접근을 하는
또 다른 그의 심리학적인 이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간이해와
목회상담의 심리적인 측면들을 다루었다.

그의 인간이해는 심리적인 접근에서
현대의 상담의 원조라 할수 있는 심리적인 묘사나,
슬픔이나 걱정에 대한 진단적인 개념은 사람을 영적으로만 보지 않고
심리적인 문제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의 원인이 인간의 죄로 기인되어졌으며,
그죄의 영향력은 사단의 세력으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복잡한 상태로 발전시켜,
정신적인 문제에 빠지게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고로 목회상담은 인간의 죄와 영적인 영향력의 문제에서
해결될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을 존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역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개종이나
신앙의 유뮤가 관건이며,
신앙의 성장과 영혼의 건강은 서로 연결된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드러난 정신적인 (심리적인) 문제를
영적인 문제의 원인을 통해 생겼다고 이해하므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신앙의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신앙의 성장과
개종과 영적인 성장이 자신들의 영혼의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퓨리탄의 인간이해에 대한 이원론적인 접근법은
사람들을 통합적으로 보는 현대의 상담과는 다른 접근법을 갖고 있다.
그접근범은 인간을 단순히 영과 몸을 분리하여 보는
성과 속에 지나친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는 신앙의 이분법적인 행태를 가져오는 약점도 있다.

다른 일반 현대의 일반 심리상담과는 달리,
박스터의 목회상담은 성경적인 영혼사역의 기반으로
성령의 조명과 말씀을 통한 치료와 심리의 문제를
신앙적인 문제의 해결을 통해 사역하려는 성경적인 목회상담의 특징을 갖고 있다.

박스터의 상담신학의 상담목회의 적용
박스터의 상담신학과 사역은 현대의 목회상담에 적용하는데,
경험적이며, 영성의 기본이해를 통해
목회상담학적인 입장에서 인간해결과 영적인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의 영성적인 목회 상담은 상담자의 영성강화와
목회의 영성적인 부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의 영성이해와 인간이해는 목회상담으로 하여금,
영적인부분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여,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기독교의 건전한 영혼돌봄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박스터는 건전한 신학자이며, 영혼사역에 눈을 뜨고 있는 목회자이며,
심리학적인 문제를 보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탁얼한 목회상담자이다.
그의 영성학은 자신의 영성이해와 더불어
자신의 영성의 개발을 통해
그의 영성목회의 뿌리가 되었다.

그의 목회학은 퓨리탄의 목회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인 적인 목양의 돌보을 실천하게 하는 영혼사역의 도전을 주고 있다.

현대의 심리학의 지나친 심리적인 문제로만 여겨
사람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심리적으로만 다루는 현대심리학이나
목회상담자들의 영적인 치료에만 의존하는 문제점을 보완 하며,
그것들의 한계를 배우게 하고,
상호보완을 통해 그것들을 극복하게 하는 영혼치료의
목회자의 목회상담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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