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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라나는 젊은 세대는 게임(놀이)을 주로 하는세대이다.
게임을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치는 세대이다.
그들은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그런 게임에 대한 태도에서 현실감각을 잃고,
그 게임의 세계를 통해 자기만의 영역의 세계를 만든다.
게임하는 세대는 인격대 인격의 인간적인 만남이나,
개인적 관계와 교제의 상태를 무시하며,
상호간의 기계적인 관계로만 유지한다.
게임은 이기고 지는 것이다.
게임에는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으며, 게임으로 스릴을 즐긴다.
그렇지만 일상의 생활은 게임이 아니라,
평범한 일들로 주로 이루어 졌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대한 괴리감이 생기고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며,
시간을 내어 차분히 생각하는 상상의 세계는
점차로 게임에서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로 채워져 간다.
과거에는 어릴때의 게임은 동네에서 할수 있는 것들이다.
딱지치기, 구술치기, 혹은 동네라는 지역에서
동네아이들이 놀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래서 장차 자기들의 삶의 영역이라는 것이
고작 동네에서 농사를 짓거나, 혹은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삶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요즘은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소우주를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자기 마음대로 세계여러곳들을 돌아다니며,
혹은 상상의 세계를 가상의 세계로 만든 인터넷의 세계에서 게임을 하곤 한다.
이런 게임을 통해 점점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국제적으로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쉽게 세계화로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혀간다.
과거의 게임은 인간관계와 개인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지만,
요즘은 기계와의 만남, 혹은 자기 공간안에서
가상공간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한다.
게임은 엔터테이트먼트의 재미를 주로 하는 동기로 한다.
게임에는 재미를 추구하고 반면에 지루함을 용인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은 차분히 자기를 돌아볼 시간을 가지 못하게 한다.
게임은 게임하는 대상에 빠지게 하여 자신을 잊게하며,
자신의 현재의 위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한다.
게임이 주는 유익이란 무료한 시간이나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며,
게임을 통해 인간의 두뇌작용에 도움이 줄수 있으나,
오히려 두뇌의 창조적인 기능을 무력화하는데 쓰인다.
그리고 반복되는 손의 기계적인 놀림을 통해
자칫 단순한 손 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을 통해
인간발달의 조화롭지 못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까하는 염려가 있다.
우리 주변에 게임문화가 널리 만연이 되어있다.
로또복권 당첨은 말할 것도 없이 뽑기 게임을 통해 당첨이 되며,
신규주택 청약도 추천뽑기 게임에 의해 선정이 된다.
학생들이 학교와 학과를 선택할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게임을 활용하여 결정한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 회사에서 신규채용하는 직원을 뽑을 때에는
경쟁률이 심할 때에도
결국 이력서사정 혹은 실력평가의 경쟁게임을 통해 사람을 뽑는다.
요즘은 애인도 인터넷에서 짝맞추기 게임을 통해 구하며,
결혼에 올인하는 것도 게임을 통해 선별하듯 무작위로 착출하여
사람들을 고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게임에서 선별하듯 사람을 찾아 골라 결혼하기 보다는
결혼과 함께 이루어지는 가정은
결코 짝맞추기게임하듯 하는 가벼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될때에 결혼과 가정생활의 실패를 가져올수 있다.
세월을 두고 함께 살아갈 반려자의 선택은
삶을 통해 경험해야 할 진지한 자기결정이나 판단에 의해 좌우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영원을 추구하는 인생도 게임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는가?
이쪽이냐 아니면 저쪽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인생의 길이 결정되는 것인가?
고로 생명을 선택하는 길과 죽음을 택하는 길을
놀이 게임에서 갈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여겨야 할일이 아닌 것같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심령들이 진지한 삶의 과정안에서
그 진리를 깨닫고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하고 있다.
모세는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나타난다.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은 참 중요한 지식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는지를 모르고 사는 것은 답답한 인생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길은
내가 누구이며, 자신의 인생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이다.
모세의 생애는 크게 3 단계의 삶을 살았다.
40년의 세월을 세상의 애굽의 왕자로 교육을 받으며,
애굽의 문화와 사회의 모든 문물을 습득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동족의 아픔을 보고, 그 아픔에 동참하여,
그것이 화가 되어 애굽에서 좇겨나
동족의 아픔의설음을 안고 광야에서 야인의 생활을 40년을 살았다.
그렇게 오랜세월을 살아가는 그가 어느 날에
갑자기 그의 인생을 완전전환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장인의 집에서는 처가살이로 양을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동물들을 기르고,
이끌면서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자의 삶을 터득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특별히 자신들의 삶의 주변에서 특이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현현을 만난다.
필자도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현현은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에게 그의 임재로 나타나
그 인생으로 하여금 신의존전앞에 있는 경험을 갖게 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명을 갔고 있는데,
모세는 그 천사를 본 것이다.
신의 현현을 담당하는 천사가 사람에게 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현존은 인간의 심령에 기이한 현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신의 존전이며,
상대적이며 질그릇같은 인생이 절대자인 존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현장이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신의 현존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이며,
그의 존재의 실존을 접하게 되는 인간에게는 더없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세는 기이한 경험을 하는 중에,
그는 타오르는 불꽃의 가시덤불을 바라보면서,
그의 눈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마음의 상에
강렬한 하나님의 기적과 더불어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에는 두가지를 통해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의 현상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통해서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일생에 몇번 인생은 하나님을 접하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적적인 일을 통해서 혹은불가사의한 일을 경험하면서,
이성으로 이해할수 없는 신의 손길을 맛본다.
사실, 만물가운데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안에
신의 솜씨로 인한 그의 존재에 대한 흔적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 일어나는 이상한 경험이나 혹은 신비로운 일들은
영적세계의 실제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물에 빠졌으나 구?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시고,
그분은 모든 만물가운데에 충만하게 임재하시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하나님이 인생을 부르시는 음성은 아담의 범죄이후에
인간이 하나님앞에 서야 할 자리에서 떨어졌기에,
계속하여 그는 인간들에게 그의 음성을 통해 부르신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가오는 인생들에게 그들을 한사람씩 부르셔서,
그들에게 자신의 실체를 계시하신다.
그분은 사람들 각자와 더불어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때에 인생들은 그의 부르시는 음성을 감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라는 매개체를 통해,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그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꺼지지 않고 계속하여 타오르는 불꽃가운데에
모세는 불멸의 하나님의 존재성과 그의 신비성을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분으로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는 것을 이해한다
(알기위해 믿는 것인가? 아니면 믿기 위해 이해하는 것인가?
고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위해 인간에게 스스로를 보여주시는
신의 계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그는 절대자이지만, 상대적인 존재인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분의 절대성을 통해, 인간의 일시성과 불멸치 못함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한다.
원래 인간은 그의 창조물로 그분의 속성을 닮아,
거룩성을 좇아 창조함을 받았다.
그의 계심과 함께 영원의 관계와
그의 성품의 내재를 통해 인간은 고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 어디인가?
인생들이 머물러 사는 곳에 신은 어디나 존재하신다.
그의 계신 거룩한 곳에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세상은
다만 차원의 차이일뿐이지,
모든 만상이 그의 존재의 크심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으며,
편만히 그의 임재와 손길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신은 신발을 통해 자신이 걸어가는 삶의 족적을 드러낸다.
그신은 자신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이 겪은 일들 혹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인간의 시간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되어 가는 것이다.
자기가 밟은 땅이 구별된 땅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은 자유로이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갈망속이나,
그들의 영혼속에 있는 빈공(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속에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지는 곳:
하나님의 영을 만나는 인간의 영의 심연)이 있다.
사람들을 개개인으로 찾으시는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들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는 유아독존자로 세상과 떨어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속에 오셔서 일일이 개개인의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을 개개인의 역사의 시간이 깃들어 있는 일생을 통해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아무개의 하나님으로 불리워 지기를 좋아하신다.
여기에 기록된 아브라함, 이삭, 야곱즉 믿음의 족장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생애속에 나타난 그들의 발자취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사람들은 불의한 자가 세상을 지배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줄때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 가고 탄식하며 부르짖는다.
세상에 이럴수가 있는가라고 탄식할 만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세상에 많은 권력자가 사람들을 괴롭히고, 강압적으로 핍박을 하여,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생명을 짓밟을 때에
하나님은 그 밑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의 탄식소리를 들으신다.
우리의 삶의 주변과 지구촌에서는 자주 인신매매, 종교인 탄압,
부당한 해고, 불평부당한 처사등 갖가지 불의한 일들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부르심은 인간의 억압과 노예의 상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자비의 손길로 나타난다.
구원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고통받는 곳에서 구출하여,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며 살길을 열어주신다.
지금 자신의 인생이 힘들고 지쳐있을 때에
주님은 각자 인생에게 오셔서
그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고통받는 각 사람을 힘있게 세우신다.
번민과 고통을 통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속에서 탄식하며 부르짖음에 대해
하늘에 계신 자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의 사정을 모르지 않으시고 그들의 상처나 고통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불공정과 부당함이 세상에 만연함은
인간의 죄로 인한 불의와 악행으로 인하여 나타난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말할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하여 살 희망을 무너뜨리는 일을 벌인다.
지금도 지구상에 곳곳에 인신매매, 불법적으로 사람들을 고용하여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사회안에서 권한을 가진자와 부요한자,
그리고 그 사회를 인도하는 리더들은
자신들이 사는 사회안에 있는 연약한 인생들을 도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책임은 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더 불쌍한 처치로 사람들을 내몰기도 한다.
그때에 사람들은 신에게 호소하며, 항의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 가 하며 자포자기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모든 불의와 부당함을 다 보시고
그들의 불의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주신다.
때로는 이지상에 다 댓가를 치루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의 문제가 이세대에서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반드시 이 세대와 오는 세대안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하신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고생하며 고난을 당하며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 대해 그 문제를 살피기를 원하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하신다.
하나님은 이집트땅에서 나그네로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해방과 구원을 주기 위하여 해방자 모세를 보내신다.
그에게 이스라엘민족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시기로 하시며,
그리고 그들을 자신의 선민으로 세우는 은총을 베푸신다.
특히 죄의 노예로 고통받는 인생들을
주님은 안타까워 하시며 그들을 구하시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무지와 교만과 불의함으로 자신들이
죄의 속박아래에 있는 것도 모르고 살며
알수 없는 번민과 길이 없는 인생길에서 방황하며,
불안과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연약함(질병)으로 신음하며 살아간다.
모든 인생들에게 죄는 폭군과 같이 압박을 하여,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지 못하며,
그죄의 그림자에 영향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의 모든 곳에서 암세포와 같이 어둠의 세력안에서 신음하며 살아간다.
그런 상태안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은 그 죄의 사슬에 매여 살면서
그 상태에서 신음하는 자신의 영혼의 소리도 외면한채 한탄과 절망의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하나님은 오늘도 모든 인생들에게 그 죄와
그세력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과 구원과 소망을 외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해방자를 보내신다. 그리고 그들을 구출하여 인도하신다.
히10: 35-39
35. 그러므로 여러분은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이것으로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36.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머지않아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입니다.
38.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다가 뒤로 물러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고 구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이란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믿는 바를 잡고,
그 원칙안에서 바르게, 용기있게,인내하며 살아갈 것이 아닌가?
믿는 사람이란 바로 소신있는 신앙인,
용기있는 신앙인, 확신하는 바를 좇아가는 신앙인일 것이다.
신앙인들의 간판은 무엇인가?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 혹은 자동차뒤에 붙이는 십자가의 스티카가 붙은 차의 주인공정도인가?
아무아무개 교회의 교인, 성경을 가지고 갖고 다니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하는 가?
아니면 점심시간에 많은 사람이 모인자리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이것이 신자들의 표지인가?
아니면 왕성한 종교활동을 하며,
외형적인 종교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므로
자신의 정체감이 거룩한 무리가운데에 머물러 있다는 인식을 통해 얻는 것인가?
그렇지만 신앙인 즉 믿는 이들은 그들의 신앙의 고백과 표현에 있어서,
자신들이 가져야 할 덕목의 표지는 진리에 대한 용기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끝까지 잡으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하는 것을 굳게 잡고 사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신앙인의 용기는 모든 것을 얻기위한 모험이며, 자기확신에서 가질수 있는 중요한 덕목이다.
사람이 확신하는 바에 따라 소신있게 처신한다.
그러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두려움에 대한 반대로, 두려움을 이길수 있는 자신감이며,
마음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용기가 있어야 모험을 무릎쓰고 일들을 감당하고
반대를 극복하고 자신의 확신하는 바를 추진한다.
이 용기가 신앙에서도 필요한 덕목이다.
용기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표시하며 연출한다
특히 신앙과 그에 따르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핍박하는 자들앞에서
자신의 믿는 바를 따라 행하는 것은 용기를 통해 가능하다.
이처럼 용기의 덕목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용기가 있을 때에,
의롭고 바른 일을 반대를 무릎쓰고 추진할수 잇다.
일을 시작하거나, 혹은 일의 장애를 넘어가고 극복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반대에 부딪쳤을 때에, 그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확신하는 바를 관철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힘들때에 중단하거나 혹은 포기하지 않고
일을 끝까지 추진하는 데에는 강인한 인내가 요구된다.
인내는 불굴의 정신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신앙인의 성품에 있어서 중요한 자질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인생들 누구에게나 그들에게 도전을 주는 내용이다.
세상과 인생이 끝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함부로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그것도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인생의 나그네의 삶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며,
우리의 곁은 스쳐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은
결코 우리손에 잡고 그것을 늘릴수 도 없으며 붙잡을수 도 없다.
그리고 돌이킬수도 없는 세월들이다.
그리고 세상과 인생은 종착역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목적지가 있는 것이다.
그 목적지가 하나님이 정해놓은 시간이며,
그가 다시오시는 것은 모든 인생들은
결국에는 하나님앞에 서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인생들은 두가지 정한 날에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구원의 자리든지 아니면 심판의 자리든지
자신이 결정한 대로 자기자리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난당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날들을 바라보며 힘을 얻는다.
어리석고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심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미래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미래에 다가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현재를 믿음으로 축복의 날,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들을 대망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키지 못하면
뒤로 넘어져 뒷걸음치는 패배자로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인내로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파멸의 길로 자신을 방치하여 멸망에 이른다.
인내는 고난가운데에 얻는 성도의 미덕으로 인내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품을 갖게 된다.
신의 성품은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자신안에 있는 신의 씨앗을 품어,
그것을 가꾸고 자라게 하여 주님을 닮아가
그의 영광된 위치와 자리에 이르게 한다.
자신은 누구인가 멸망받을 사람인가 아니면 구원의 자녀인가를 아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유익이 된다.
신자의 표지는 그들의 진취적인 신앙의 용기와 그들의 성실과
끈기에서 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지속적인 확신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인의 용기는 진리를 방어하려는 노력에서 반대세력에 대한 세력에 대해
두려울 때에 필요하며,
확신은 자신속에 일어나는 의심이나 자신의 영혼의 방황 할 때에 필요하며,
인내는 끝까지 믿는 바를 통한 자기실현에 의해 자신의 삶에서 열매를 맺게 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하는 성도들의 자질일 것이다.
다니엘 1:8-20
8.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궁중대신에게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9.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궁중 대신의 환심과 동정을 사게 하셨다.
10. 그러나 궁중 대신은 왕을 두려워 하여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왕이 너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지정하셨는데 만일 너희가 핼쑥하여 너희 얼굴이
다른 소년들보다 못하게 되면 왕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11. 그래서 다니엘은 궁중 대신이 자기와 자기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였다.
12. “우리를 10일 동안 시험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채소와 물만 주어 먹게하고
13. 그 후에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과 비교하여 우리의 얼굴 모습을 보고 우리를
처분하십시오.”
14. 그는 이 제의를 승낙하고 그들을 10일동안 시험하였다.
15. 그런데 10일 후에 그들은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혈색이 좋고
건강하게 보였다.
16.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왕이 지정한 포도주와 음식을 주지 않고 그들이 채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7. 하나님은 이 네 소년들에게 학문과 그 밖의 모든 것을 통달 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주셨으며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꿈과 환상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18. 왕이 정한 3년 동안의 수련과정이 끝나자 궁중 대신은 그들을 느부갓네살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19. 왕이 그들과 대면하여 이야기해보니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다른 소년들보다 우수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왕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는데
20. 왕은 그들에게 무슨 문제를 물어도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그 나라의 어떤
마술사나 점성가보다 열배나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을 특별하게 사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구별된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이다.
뜻을 정하고 사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혹은 뚜렷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자신이 정한 원칙을 따라 사는 길은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자신이 정해놓은 원칙을 따르면 오히려 나중에는 그길이 쉬워지며,
자신이 세운 계획을 따라 성취하는 기쁨과 자신이 성장하는 열매도 맺게 될 것이다.
뜻을 정하고 살아간 이들이 세계역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다니엘은 어려운 상황하에서 오히려 자신의 원칙을 세워 더 빛나는 인생을 살았다.
바벨론의 이방문화가운데에서 유대적인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그에게,
주님은 지혜와 은총을 더 하셨다.
다니엘은 바벨론(지금의 이락)에 포로로 잡혀가 신세이지만,
그가운데에서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으로
자신의 삶을 고귀하게 살아간다.
어느 환경에서나, 사람은 자신의 태도에 의해 삶을 살아간다.
주변환경보다 나은 자신의 소견이나 의지의 영향으로 소신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독특한 인간승리의 본이 된다.
다니엘은 자신을 이방, 우상의 관습으로 인한 방탕과 나태를 범하지 않으려고,
굳게 마음을 먹는다. 결심은 어떤가
사람의 결의는 사람의 정신력이나 의지력의 정도를 드러낸다.
사람의 됨됨이나 혹은 사람의 성취의 정도는
사람들 자신의 결심이나 결연한 의지의 정도에 정비례한다고 할수 있다.
뜻을 정하고 사는 다니엘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과 배려가운데에
이방땅인 바벨론에서 외롭지 않게 살게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만들기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기를 기대하신다.
사람의 삶은 자질변화나, 자기개선에 충실하다보면,
자기가 살고 있는 주변환경이나 주변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향기를 발하는 꽃에 나비나 벌이 달려들듯,
자신이 아름다운 성품이나, 혹은 뚜렷한 의식있는 생활을 하다보면,
자기주변인들은 자신을 주목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뜻을 정하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도울 주변인들을 붙여주신다.
다니엘은 바벨론 궁중에서 궁중대신의 배려를 받게 된다.
그의 관심어린 돌봄을 받은 다니엘은 자신의 뜻을 펴는 데 도움을 받는다.
자신의 일을 추진할때에. 자기와 자기의 뜻을 알아주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통해 수월히 진행할수 있다.
어떻게 우리는 주변사람들의 관심과 혹은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까?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충실히 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알아본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신의 일에 대해 소신과 성실로 임하게 될때에
그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을 주목하게 되며, 자신이 하는 일을 도와주게 된다.
물론 개중에는 자신의 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대개 옳은 일을 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좋은 취지에 대해 호응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돕는 일에는 반드시 주변인들의 희생이나 혹은 자기봉사가 있다.
더 나은 제안을 따르거나 혹은 보다 좋은 처방을 따라 가려면
그 제안에 대한 자신의 옳은 판단에서 오는 확신과
또한 그것을 추진하려는 신속한 응답과
그리고 그것을 순서있게 진행하는 현명한 처신이 필요할 것이다.
다니엘의 제안은 모험이 필요하다.
새로운 일을 하려는데 모험이나 혹은 위기가 있으며,
혹시 실패할 지도 모를 경우도 예상이 있다.
그렇지만 자기가 성공할수 있다고 믿고 확신하는
일을 추진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이 실행할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제안이 관철될수 있도록 주도면밀하게 일이 되도록 추진한다.
새로운 일을 하려 할때에 주변인들을 설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을 설득하지 못하거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면,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분명한 의지와 성공에 대한 소신이 있으면,
그일을 추진할 것이다.
새로운 일을 하려할때에 그일이 성공할 는지를 생각해보며,
그 일이 성공하는 가를 테스트하는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채식위주의 음식섭취를 추진할때에 거기에 대한 분명한 소신이 있었다.
그들의 실험결과는 성공적이어서 그들과
왕의 음식인 기름진 음식을 먹는 소년들보다
더 건강한 모습과 건전한 외모를 유지하게 되었다.
자신이 정한 것을 원칙대로 밀고 나가려면 모험이 필요하다.
정한 일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 확신은 자기결단을 뒷받침하며, 자기가 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게 한다.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타인과의 비교의식에서 오는 경쟁하는 경기에 연연하기 쉽다.
비교의식은 사람속에 있는 창조성과 개별성을 무시하게 되며
자기 자신의 유일성을 등한히하여 자기의 개성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지나친 경쟁의식과 그에 따르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한다.
자기의 창의에 의한 게획에 대해 제안한 것을 실천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 관한한 성공하기가 쉽다.
세상의 방법과 신앙의 방법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경우도 있다.
다니엘의 실험은 자기확신가운데에 그와 그의 또래 소년들은
왕의 진미를 거부하고 채식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꾸었다.
세상적인 방법은 겉으로는 유리한 것같고,
모든 조건이 좋아도 신앙적인 방법으로는 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언제나 안전하며 성공할수 있는 확률이 더 많아진다.
다니엘과 세소년은 채식으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혈색이 다른 소년들보다 더 건강하며
지헤로운 몸관리와 생활의 습성을 세워 나갔다.
음식의 차이는 몸에 유익을 주는 가를 통해
그 음식이 좋은가 아니면 나쁜가를 판단하게 된다.
입에만 맛을 주고 몸에는 해로운 음식이 많다.
아이스크림, 캔디같은 단음식, 육류같은 기름진 음식등 입에는 맛을 주지만
몸안에 들어가면 피를 탁하게 하며 몸의 기능들을 약화시키는 역활들을 한다.
그런데 식물성종류의 야채는 몸안에 있는 독소를 제거하고,
몸을 신선하게 하여 몸을 건강하게 하는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한다.
여기서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을 옹호하기보다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조건들이 결코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안좋은 조건이 자신을 더 강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 있다.
이것은 후천적으로 좋은 교육과 배우는 노력으로 얻을수 있다.
그렇지만 그 지식을 배우고, 배운 지식을 제대로 활용하는데는
인간에게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하나님을 통해서 오게 된다.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고 높이는 공경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지혜가 싹이 트며, 사람에게 총명이 다가온다.
이 네소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들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자 음식으로 자신들의 마음과 몸을 지켰다.
하나님앞에서 구별된 생활을 살고자
뜻을 정하고 살아가면, 모든 일에 절제하는 삶을 살아간다.
절제의 덕은 인간이 가지는 덕목중에 가장 품위있는 덕목중에 하나이다.
사람이 잘못되기 쉬운 것은 지나쳐서 문제가 발생한다.
물질적인 부요도 지나치면, 낭비와 사치의 죄를 범하고,
먹는 식물에 대한 지나친 과욕은 몸에 이상을 가져와 병을 얻게 된다.
지나친 명예욕이나 인간적인 성취에 대한지나친 자화자찬은
하나님앞에서 교만한 죄를 범하기 쉽다.
하나님께서 순천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특별한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신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필요한 지혜는
자기관리에 대한 지혜일 것이다.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지 자기관리에 실패하면 패배 망신당하기 쉬운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지혜중에 때를 아는 지혜와
자신을 바로 아는 지혜가 가장 중요한 지혜들일 것이다.
인생의 지혜를 논하는 전도서에서 사람에게는 각자가 행해야 할 시기와 때가 있다고 했으며,
젊은이나 노인이나 할 것없이 현재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속에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지혜라고 하였다.
지금이 공부할 때인지 아니면 돈을 벌어야 할 때인지
인생이라는 것이 제한된 시간안에 살기 때문에
때에 맞는 일을 하는 지혜는 필요한 지혜이다.
초상집에 가서 결혼식에 가는 하객처럼 가서는 안될 것이며,
축하하는 자리에서 슬픔을 이야기해도 실례가 될 것이다.
자신을 바로 아는 길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지식에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는
사람들의 위치와 상태를 알려주고 있다.
사람은 자신을 있게 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인생의 날들을 알때에 자신을 알고 자기처신을 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네소년들은 자기관리에 충실하였으며,
자기개발에도 노력을 정진하여 뛰어난 재인들이 되었다.
자기일에 충실한 사람들은 왕앞에 서게 되듯
이소년들은 왕을 보필하는 궁중의 중요한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드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다.
교육의 기간이 길수록 사람은 충실하게 자신에게 실력을 쌓게 된다.
사람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의 길이는
된 사람을 형성하는 교육적인 효과와 결과에 정비례한다.
다니엘과 세소년에게3년이라는 세월은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의 문물을 익히며,
자신들이 이민자로서 혹은 이방인으로
그 사회에서 자기 역활을 할수 있는 기술과 자질을 닦는 시기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의 세월을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의 교훈과 삶을 배우며, 그분 곁에서 제자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일정기간을 훈련을 받는 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남자들에게는 군대에서의 3년여간의 군복무하는 세월도 자신을 키우는 좋은 시간들이며,
그 기간가운데에서 자신이 여러 사람들이 사는 단체생활에서
자신의 적응력과 고된 군무생활에서 단련된 자신을 갖추게 되어
이 사회를 리더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한편 여성들에게는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갖는 시기라든지
혹은 자라는 아이들을 돌보는 기간을 통해서
훌륭한 어머니로서 성장하여 이사회에 건강한 역활을 하는 주요인이 되는 것이다.
바벨론의 왕은 그 네소년들을 대면하여 테스트하니
그들은 모든 일에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소년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쌓기 위해 부단한 자기노력을 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들의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르는 경건한 생활에 힘써,
모든 생활면에서 자질면에서 뛰어난 자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왕이 내준 문제들을 그 소년들은 누구보다도 명철과 지혜로 풀어가니
타인과의 비교에서 월등한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여러가지 일들중에서 일을 감당하는 실력의 차이는
그 일을 대하는 자신의 성격이나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소년들은 매사에 자기관리를 잘하여왔으며,
일을 할때에 충실한 자세로 임하니
그위에 자신들의 출중한 실력이 나오게 되어 왕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사람이 가꾸고 닦을 때에 더 빛이 나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나 총명은 배우고 닦는 실력에 의해 더 발휘된다.
천재라 할지라도 자기노력이나 자기발전에 대한 노력이나 뒷받침이 없으면
나중에 평범한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후천적인 노력이나 돌봄으로 인하여 좋은 인재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타고난 지도자보다는 만들어 지는 지도자가 많으며,
자기 성품으로 타고난 지혜인보다는
후천적으로 가꾸며 노력하는 성실인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더 있는 것이다.
왜 나는 버림받은 존재로 살아가야 만 하는가?
인간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동안 시종일관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누구든지 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는 것과
자기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기가 꼭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그리고 나서 자기 성취감을 갖고서 살아야 바람직한 삶을 사람답게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이런 욕구가 기본적인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려는 욕구나 태도보다
더 필요한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삶의 요구이며 자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왜 나는 거부당하며 살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이 들도록 한 요인들을 살아오면서, 부정적이고, 힘든 일들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때는 그런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왜 사회는 나에게 외면하는가?
항변하며, 사회악을 조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왜 주변사람들은 나를 무시하는가? 라고 좌절하며,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자기자신에 대한 생각에 대해, 자신은 버려진 존재로가 아니라,
받아들여진 존재로, 자신을 인정받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을 인정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때,
우리는 나는 받아들여진 존재라 여기는 옳은 인생철학을 가져야 하는데,
그 철학의 근저에는 신과의 관계로서의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신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큼 우리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릴때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은
누구나 신에 대한 개념을 갖고서 살게 되며,
그 신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어떠함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간다.
먼저, 자신의 생각하는 신개념은 모든 인생에 대한 자세와 철학의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이고 바람직하게, 신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모든 사건이나 일에 대해,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태도로 대하게 되며,
설사 고통스럽고, 힘든일들과 같은 외부적인 어려운 일들을 당해도,
그것들을 극복할 힘이 있으며,
결국에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반전시키는 전화위복이나,
그런 도전에 대한 자신의 긍적적인 자기 응전으로 새로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이나,
그런 종류의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관계이며, 신뢰하는 경우에 당하는 자기 거부나 자기 상실은
자신에게 많은 좌절과 불안으로 내면적인 고통을 겪게 하며,
그런 현상들은 자신이 조정할수 없는 정신적인 불안정으로 발전하고,
일생을 통해 자신의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한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해 자신을 인정하는 존재로 여기고,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의식을 갖아야 할 것이다.
그러러면, 자신이 자신에 대해 받아들여진 존재로 여기는 건강한 자아상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런 건전한 자아개념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있게 한
신에 대한 자세나 태도가 결정되어 진다고 생각한다.
신안에서 만 자기만족이나, 자아완성(구원)을 이룰수 있는 인간은
신을 떠나서는 자신을 바로 세울수 없다고 감히 단언하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의 근저가 바로 신 앞에 있을때에,
자신을 신의 혜택안에서, 용납된 자신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제이다. 누구나 사람이 태어나면서
신과의 단절가운데에 있는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그 신을 알지도, 찾지도, 그리고 발견하지도 못하므로,
신과의 바른 관계를 맺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 신을 알려주면, 그신에게 찾아가, 그를 알고,
그와 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가지고 있는 딜레마 중에 가장 큰 것이라 할수 있다.
스스로 그것을 이룰수 없으니,
다만 신만이 자신을 알려주는 신자신 혹은 신의 대리자를 통해 그 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
역사속에서, 극한 거부나 유기를 통해 인간의 당할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한 한 인생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가 그에게 찾아가, 상의하고,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알고 있다고 우리가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만일, 신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 그것을 몸소 경험으로 그런 일들을 겪었다면,
우리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경험을
그 신에게 다가가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그분의 상담과 조언을 구할 것이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좌절을 겪는 인생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때에,
나는 세상에 대해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버려진 존재로 여기는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세상을 붙드는 신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한,
인생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신이 결코 인간을 버려지도록 놔두지 않고,
무엇인가를 인간을 위해서 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신에게 당연히 도움을 구할수 있겠다
용서하지 않는 태도를 치료하기
내면치유와 용서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쓴뿌리와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에는 용서라는 큰 주제가 놓여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으로 회복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에 있다고 하겠다.
먼저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이나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하는 용서를 통해
자신의 내적인 측면에 대한 깊은 차원의 치유를 하여
자신에게 있는 쓴뿌리와 같은 부정적인 사고 시스템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사고시스템이나 감정조절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내면치유의 장애요인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앙갚음이나
혹은 섭섭함이나 혹은 괘씸한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들은 더 나아가 분노를 촉발하고,
자신도 원치않는 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용서하지 않은 마음을 계속유지하면,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큰 부담감을 가지고 살게 된다.
고로 자신안에서 마음의 평안과 사고하는 태도에 있어, 자유를 얻지 못한다.
용서하지 않는 상처들 그리고 상한 감정들은 자신속에 더 뿌리를 내려,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에 의한 원수 갚은 태도로
짓는 죄를 범하게 하며,
앙금된 마음에 고착이 되어,
그 상한 감정들이 자신속에 중한 부담감과
마음의 평안을 해치는 상시적인 불안을 가중케 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 죄의 성향들은 자신의 마음에 펴져있는 영적인 배설물이나
쓴 뿌리역활을 하는 자신의 고착된 부정적인 사고나 병든 성향의 흐름을 지배한다.
고로 그런 불안이나 내면의 병든 성향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전환하도록 자신의 상태를 살펴볼줄알아야한다.
용서는 인간관계를 푸는 열쇠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주요한 이슈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는 복음의 핵심으로
죄인인 우리들이 구원받는 근거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있다.
용서에 대한 메시지는 성경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마태5:22-24에서 형제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는 것도 죄이며,
주님앞에 나가기 전에 형제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만일 서로가 풀어야 할 인간관계의 악화나,
증오된 상태라면, 상처를 준 사람이나
상처을 입은 사람 모두가
서로 화해를 갖는 것이 그들의 신앙행위에 어떤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모델기도에 용서가 큰 주제이다.
마가복음11:25-26에 기도할때에,
어떤 사람에게 서로 마음상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용서하는 그사람도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한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 태도를 고치는 것은 먼저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죄를 고백하며( 마태복음 5:23, 요한일서 1:9)
그 마음의 약함이나 악함을 자인하며,
그안에서 벗어나기를 힘쓴다.
그러러면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배울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든 용서의 모델과 근거가 된다.
그는 자신을 저주하며 모함하며, 사형을 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도움을 의지하여, 자신이 받은 상처와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이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를 넘어가는 길은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축복을 비는 마음과
그 사람을 용서할수 있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는 자신이 받은 상처나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이 영향을 받은 마음의 상처를 발산하는 자기 나름의 감정표현방식도
상처난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배우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두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 길과
상한 감정을 다루는 것이나,
병든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내적치유의 과정들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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