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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24
    유익한 사람과 쓸모없는 물건
    목동
  2. 2007/04/23
    박스터의 목양신학(4)
    목동
  3. 2007/04/23
    하나님의 계시와 독생자의 영광
    목동
  4. 2007/04/22
    박스터의 목양신학(3)
    목동
  5. 200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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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동
  6. 2007/04/21
    박스터의 목양신학(2)
    목동
  7. 2007/04/16
    메신저들과 청중들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목동
  8. 2007/04/15
    목적이 있는 삶
    목동
  9. 2007/04/13
    낙심을 극복하려면
    목동
  10. 2007/04/13
    감정이입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목동

유익한 사람과 쓸모없는 물건

예레미야13:1-9
1.여호와께서 나에게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두르고
그것이 물에 닿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2. 그래서 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베띠를 사서 허리에 둘렸다.
3.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4. “너는 그 베띠를 가지고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것을 그 곳 바위 틈에 숨겨 두어라.”
5.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가서 그것을 유프라테스 강가에 감추어 두었다.
6.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너는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 베띠를 끄집어내 보아라”하고 말씀하셨다.
7. 그래서 내가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것을 감추어 둔 곳을 파고 띠를 꺼내 보니
썩어서 못쓰게 되어 있었다.
8. 그 때 여호와께서 나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9. 이와같이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쓸모없는 것이 되게 하겠다.

사람이 쓰는 물건에는 어디나 쓸모있는 것이 있고 쓸모없는 것이 있다.
물건을 샀을때에는 유용하다 싶어 샀는데,
사서 놓고 보니 쓸모없게 된 경험을 많이 가졌을 것이다.
물건은 비싼 것이나 싼 것이등,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제일일 것이다.

명품은 대부분 유행을 통해 혹은 인간의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이 된다.
명품보다는 그래도 물건이 소비자에게 가치있는 제품은
쓸만하고 소비자가 쓰기에 흡족하면
그 물건이 명품다운 제품이 된다.
아무리 유행이나 사람들의 평가로 유명한 제품이라도
자기가 쓰기에 불편하면 그것은 명품이 아니다.

쓸만한 물건을 가게에서나 쇼핑센타에서 보았을때에,
그것이 아무리 비싸도 사고 싶은 것은
그 물건이 유용하다고 생각이 들어 그물건을 구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새물건을 사는 것도 좋지만 중고품의 유익함을 가져보는 것도
그물건을 쓰는데 유용하다면, 그물건을 잘 산 것이다.
물건의 새것인지 혹은 중고의 것인지 하는 것만 가지고
제품의 품질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물건의 쓰임새가 있으면, 그물건은 유용한 것이다.

미국에는 자동차 중고시장은 거대한 시장으로 활발하게 매매가 형성이 된다.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집에 쓰는 모든 가정용품에 대해
그들은 가라지(창고)세일이나, 야드(뒷뜰)세일로 자기들이 쓰던 물건을
잘 손질하여 내다 팔고 그것을 사서 쓰고 있다.

사람들 중에도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유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으나 마나한 무익한 사람도 있으며,
더 나아가 남에게 해를 끼치는 해로운 사람도 있다.

사람은 자리보다 높이 평가된 사람은
보다 귀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그자리를 빞낼수 있다.
그런데 자리값을 하지못하는 제능력에 버거워 하는 경우는
자칫 그자리에서 제대로 자기역활을 하지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적법한 시기에 적당한 사람으로 적합(유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유익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상징적인 행동을 하게 하여, 이스라엘에 교훈을 주신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옷을 입을 때에 사용하던 허리띠를 가지고,
그 허리띠의 유용성이나 혹은 허리띠가 썩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
무용하게 되어 버리는 교훈을 주고 있다.

물건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그 물건을 잘 보관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도 쓸모있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대개 사람을 버리는 것은 자기주변의 안좋은 환경이나
나쁜 사람들 혹은 잘못된 가르침이나 지식이다.
사람을 버리지 않도록 하려면 좋은 환경이나
좋은 사람이 많이 있는 곳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변의 사람이나 환경에 쉽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교육하는 데 모방교육이
가장 큰 교육의 효과가 있으며 영향력이 있다.
사람은 따라하면서 배우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므로 어른들을 닮아간다.

그 모방교육은 교육적 환경에 좌우 될때가 많다.
백노야 까마귀 놓는데 가지마라.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은
좋은 것, 옳은 것, 유익한 것들을 많이 보게 하고,듣게 하고,
느끼게 하고,체험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맹모삼천지교의 교훈등은
인간의 교육에 현장의 중요성과 모방교육의 영향이나
효과등을 알려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쓸모있는 경우는 자신이 쓰기에 합당한 물건이 되었다.
쓰는 동안 유익하며, 쓸모있으면, 좋은 물건이다.
사람도 언제나 어디에서나 쓸만한 사람은 유익한 사람이다.

물건을 보관하게 하는 것은 물건의 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건을 상하게 만들어버리는 곳에 물건을 보관하면
물건이 썩어서 못쓰게 되거나, 망가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도 자신의 자질을 높이고 그 질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좋고 명품의 물건인줄 알고, 아끼고 두어다 놓다가
나중에는 그물건을 쓸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자랄때에 배우는 시기에 공부를 하지 않거나,
하다가 나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오랜 세월의 반복의 과정의 결과에서 생겨난다.

지금이라도 유익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가꾸고 배우게 하는 일에
투자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배우는 시기를 놓쳐서 공부하려면 많은 노력과 희생이 따른다.

물건을 쓰지 않고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그냥 놔두면,
그 물건을 못쓰게 상하게 되었다.

사람도 상하거나 버림받은 상태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거나,
혹은 게으름이나 무책임에 방치하면,
사람은 아무리 과거에 뛰어나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항상 관리하지 않으면
쓸모없게 되고 망가지는 것은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주 손쉽게 할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거나
무익한 일에 매달리다보면
나중에는 자신에게 남는 것은 없고 후회스러움만 남아 무익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좋은 환경에 있어서도 자신을 가꾸고 교육하지 않으면
좋은 인물을 만들수 없으며,
아무리 좋은 자리에 있거나 여건이 좋아도
자기노력이나 애씀이 없다면 가치있는 일들을 남길수 없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유용한 교훈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재차 언급하실때에
그 말씀의 이면에 뜻하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에 단순하게 생각하여 이해할수 없는 말이다.

교육의 효과도 반복할때에 나타난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교육혹은 수학테스트나 언어교육은
반복연습을 해야만 교육적인 효과가 나타나 점점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진다.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을 반복하여 연습하면,
두뇌에 강인하게 입력이 되어,
닦고 닦은 익힌 기술을 자동적으로 나타낼수 있을 것이다.

쓸모없는 것과 쓸모있는 것의 차이는 쓰는 사람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사람이 못쓰게 되는 경우는
대개 지나쳐서 쓸모가 없고 유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배워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자기지식에 대한 지나친 절대화하는 태도가
자신을 교만하게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다른사람에게 유익하게 나누지를 못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교만하면,
자리에서 오는 유익만을 취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거나 버림을 받는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교만으로 나가면,
그 힘이 사람들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고 압박하는 도구로 변해버린다.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것과
자신에 대해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모있는 사람이 있고 쓸모없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명시하였으며,
그것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갈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쓸모있는 것이 좋다.
시장에 가서 그 물건이 좋아보여 사놓고,
그것을 실지로 써보면 쓸모가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하찮게 여기고 산 물건이 이외로 쓸모있게 쓰는 경험도 가졌을 것이다.

사람은 좋아보이나, 사람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을 그 자리에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느 사람은 보기에는 쓸모없어 보이다가
막상 자기 자리에 있게되면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판단하신다.
사람은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수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속뿐 아니라 전체를 다 볼수 있으니,
그가 옳은 판단을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과 그의 어떠함을 평가한 하나님의 판단을 담은 글이다.

사람은 겪어봐야 알수 있고,
겸허하게 자신을 가꾸는 일에 충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나중에는 유익하고 가치있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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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4)

박스터의 영혼의 치료

묵상을 통한 영성사역
묵상으로 가장 완벽한 대상 즉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또한 말씀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통해 오는 영혼의 치료와
그로인한 영혼의 휴식을 갖게하므로써
사람들의 영혼의 모든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영혼을 건강한 상태의 모습으로 우고
엄숙하게 하는 목적을 행하게 한다.

사람들의 감성들을 북돋우기위해 이성의 이해를 사용하며,
두뇌의 기능의 효율적인 도움을 의지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영혼에 대한 강한 영향력의 불을 질러
그 마음에 성령의 빛이 비추어 지도록 한다.

묵상을 제대로 하면 감성의 이해가 발전하며,
이성과 마음을 연결하는 영성에 좋은 영향을 준다.
상상력을 통한 묵상은 이성과 감성의 연결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강화시켜준다.

은혜의 사역
회개는 사람들의 만족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과거의 죄를 짓는 우상의 상태에서 돌아서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하는 데로 회복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사람들은 온전하게 하나님에게 맞추어지는 사람들이 된다.

사람의 구속과 회복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적인 속성의 충분한 나타냄이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더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분석에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이유있는 행하심이다.

영혼들의 알림(자신의 영혼에 구원의 진리를 습득하여 구원에 이름)과
재알림(계속하여 구원얻은 심령이 말씀 교육을 통하여 성화를 이루어 가는 방법)은
필요한 과정이다.
구원얻은 영혼들에게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재교육하는 과정은 필요한 것임을 의미한다.
진실한 영적인 재생산을 경험한 인격은
보다 깊이 있게 죄의 생각이나 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며 경험하게 한다.

영혼의 돌봄과 성장
자신들의 영혼들에게 철저하게 사역하는 구원의 은혜의 사역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충분한 하나님의 목양사역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들을 치료하며,
회복하며, 돌보며, 성장시키는 사역을 하신다.

목회적인 감독의 궁극적인 도달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들과 연관이 되어 있다.
즉 목회자들의 영적인 돌봄과 목양을 통해 회중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며,
그들의 인생을 개발시키고, 보다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게 한다.

목회적인 돌봄은 모든 회중에게 있으며,
연합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영혼들을 돌보아야 한다.
즉 목회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영적으로 돌보기와
개인상담을 통해 개인의 영혼들을 돌보는 일들을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목양의 두 수레바퀴와 같이
목회자의 교회의 목회를 움직여 가는 두가지의 영혼의 돌봄이다.

박스터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언급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신뢰와 영혼의 휴식 문제를 그리스도에게 약속된 것을 통해
실질적인 신뢰라고 이야기 한다.
새로운 생명의 역동성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믿음안에서
확립이 되며 표현되어진다고 여기고 있다.
믿음을 통한 영혼의 문제를 접근하며,
영성을 이루는 근거를 하나님을 믿는 신뢰에 두며,
그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박스터는 말씀치료에 대해 설교로 찌르기를 통한 종합적인 강의와
기도의 모임을 통해 회중들의 거룩하게 교화하는 일에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을 해부하며,
그리고 성경이해의 종합적인 강의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영혼들을 돌보고, 치료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며,
그들의 영혼들을 강화시키는 기도모임을 선도해야 할 것이다 .

박스터는 주장한다. 회중들은 자신들의 들음에 통해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 일과 근본적인 진리들즉 죄, 자비, 구속, 개종의 성격과
방법등에 대한 자기들의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회중들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 자기이해와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수용을 통한 경험신앙으로 발전되도록
목양은 그들의 영혼들을 돌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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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시와 독생자의 영광

히1:1-6
1.옛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없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또 아들을 통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3.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4.그래서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받으시고
그들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위대한 분이 되셨습니다.
5.하나님께서는 어느 천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거나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6.그러나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계시를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
하나님의 자기알림은 역사를 통해 발전되어 왔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사람들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자신을 알려오신 분이다.
감추어진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린 문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계시의 의미이다.
비밀의 뜻을 푸는 것은 그것을 푸는 해결(이해의 안목)의 열쇠를 얻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계시를 점진적으로 알리신 것처럼
각 개인에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도 또한 일생의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알려진다.
이성의 세계에서 즉 기록된 말씀안에 알려지신 지식의 내용을 아는 단계에서
알려진 그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인생의 삶의 경험을 통해
인생의 경험의 세계에서 그분의 감추어진 부분들을 계시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메신저들을 보내셔서
자신의 성품과 사역을 알리셨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알리셨는데,
그 방법들 중에는 하늘의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개입의 기적적인 현상으로,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사람을 선택하셔서, 사람과 동행하심으로,
국가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고 지도자들을, 사사들을, 예언자들을 통하여,
개인적인 관계와 교제를 통하여등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셨다.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다.
그분의 의로움에 대해,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해,
그분의 정확한 약속성취를 통해,
그리고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알리셨다.

그분의 알린 계신 중에 단연 가장 큰 계시의 중심에는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는 것이었다.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가장 긴 역사의 단일한 주제로
끊임없이 하나님은 인간사회에 말씀하셨다.
인류의 세초에서 부터,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으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이 었다.
하나님이 역사의 중심에 오시는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계시의 정점은 독생자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는 사역으로
그 계시의 완성을 이루신다.
그가 이루시는 계시는 그분의 아들 독생자를 통해
다시 인류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계시로 알려지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그의 통치아래에 두시고,
모든 것의 주인으로 세우시고,
모든 만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자로 그의 이름을 높이신다.
모든만물이 다 독생자 예수의 발아래에 있으며, 그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진 독생자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 지배권, 통치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행사하신다.

이제는 독생자가 이땅에 오셔서 알려주신 종말계시의
단계적인 성취실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으로 인류역사속에서,
그 통치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
그 독생자의 통치하심이 온전하게 완성되는
어느 정점을 향하여 인류의 역사는 진행이 되고 있다.

만물의 주인이 인류역사속에 계시의 주체자로 사역하심과 같이
각개인의 인생의 삶의 현장안에서도 그분의 통치의 영역이며,
그분은 모든 그를 구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인생가운데에 그분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영접한 인간들 속에서 온전하게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드러나기를 기대하신다.

인간들안에 알려진 독생자의 계시는 하나님자신의 모든 것을
그 독생자의 중보의 역활을 통해 알려지고 알게 되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은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분은 인간속에 오신 알려지신 하나님으로 인간들의 인생을 친히 경험하여,
그 인생들과 동화된 그분의 성품과 사역을 통한 아들의 계시의 역사는
각개인에게 지금도 재창조(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듯
지금은 인류각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성품을 만들어가시는 사역)의 사역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중심이며, 그 독생자는 인류에게 알려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통해 인간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그분안에는 하나님이신 본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본성중에 가장 분명한 계시된 성품은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분은 온몸으로 인류를 사랑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여,
인생들에게 생명과 인간본연의 영광된 위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분은 영원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그분은 만물의 원리의 중심에서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지금도 보존하시며 통치하신다.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와 사역을 이해하려면 그분의 통치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알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차적인(육체의 감각으로 이해하는) 혹은
이차적인 차원(생각이나 명상)이 아니라 삼차원(영적인 세계: 영물들의 사역하는 차원)을 지나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의 영역안(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와
교제안에서의 믿음과 창조의 차원)에서 이해와 경험을 할수 있게 된다.

오늘도 독생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그의 만물의 통치의 주인으로 다스리신다.
그리고 인생들을 새롭게 하시는 일에 관여하며,
그분이 이땅에서 흘리신 피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류를 깨끗이 죄에서 씻어내는 일을 하신다.
그분의 보혈은 인류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자유하게 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죄를 속하는 속죄의 방법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앞에서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는 역사의 시초에 범한 죄로 인하여 변질된 상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독생자는 유일한 하나님의 광채이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그분은 하나님안에서 나온 분으로 다른 하나님의 창조물인 영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영물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들로 지음받고 세움을 입었으나.
그분 독생자는 모든 영물들의 사역의 봉사를 받으시는 분이다.
그분은 모든 만물들이 돌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 영광중에 찬미를 받으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 독생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생들이 믿고 따르는 독생자는 하나님이기에 인생의 존재는
모든 만물의 존재들중에 뛰어난 존재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타락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떨어졌으나.
인생들은 그분안에서 얻을 영광을 바라보는 존재로 다가올
그분의 때에 그분의 영광받으신 것처럼
그분안에 있는 인생들은 영광을 함께 누린다.

하나님은 그분 독생자와 더불어 영광과 존귀와 찬양받으심을 공유하며,
만물의 통치에서 공유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세계의 영역안에서 주님으로서 공유하신다.
그리고 그 독생자의 피의 공로로 구원얻은 각개인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받으심을 공유하신다.
구원얻은 인생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아들로 모실 한분의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다.

독생자의 세상에 오실때에 수만만의 천군과 천사들이 함께 하늘에서 영광이며,
땅에서는 하나님과의 인류의 화해를 나타내는 평화의 사도로 독생자가 임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영물들은 그분의 탄생을 기쁨으로 찬양하며,
그분에게 돌아갈 영광을 돌리며,
그영물들의 영광돌림과 찬양속에 독생자는 이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사역은 하늘에는 영광이며,
이땅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의 은총을 가지고 오셨다.

그분안에서 인류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수 있으며,
인류는 하나님을 자상한 어머니(자녀사랑의 화신)같은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다시 자신들의 잃어버린 명예와 영광을 회복한다.
그 독생자의 영광안에 인류의 영광과 축복이 담겨있다.
그분의 영광의 통치안에서 인류는 평안과 안식과
그리고 썩지 아니할 영광의 축복을 얻는다.

고로 독생자 예수님은 만물중에 으뜸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통해 여러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 독생자 아들로 말씀하셨다.
그 아들은 알려지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조성이 되었고 인류가 구원과 영광의 길을 찾았고,
그분 독생자를 모신 인생들이 그분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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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3)

박스터의 상담의 진단과 치료방법

그의 상담진단해석은 심령의 문제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과 인간의 영성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와같이 박스터는 전문가들은 이성적이고
심리적인 치료에만 만족하지말아야 할 것은
왜냐하면, 좋은 설교나 위로의 메시지를 통해,
사람들의 병적인 상태에서 혹은 상한 심령들이
자신들의 정신적인 병적인 상태를 치료하는데,
다른 육체의 질병처럼 영적인 변화가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질병이 영적인 문제라고 여긴다면,
거기에는 사단의 공격이나, 혹은 고백하지 죄,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일시적인 영적인 유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단에 의해 미혹(사단은 사람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거짓것을 믿게 하거나, 기만전술로 다가온다)에 걸리면,
나중에 그의 소유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마음의 걱정과 불안은 사람의 살아가는 정해진 습관(대개 어릴때의 부모의 부정적인 사고습관:
죽고 싶다. 혹은 어떻게 해, 걱정이야등)에 의해 이루어 진다.
두려움이나, 걱정의 말등은 마음의 지속적인 기질을 좌절케 한다.
걱정이 많으면 마음의 병이나, 약함그리고 몸의 질병을 일으키며,
어떤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영혼의 상태가 된다.

인간의 걱정에 대해서 생각할때에
사람을 죄있는 상태에서만 그렇다고 여기지 말고,
생활에서 얻은 영향들로 인해,
그런 사고습관은 좋든 나쁜든 마음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마음의 걱정은 어떤 크고 자은 고질적인 죄의 죄책감을 일으킨다.
걱정에 휩싸인 인간의 양심은 다만 지각하는 것에 머물고
그런 상태를 벗어나지 않을때에
어떤 외부의 변화의 도전에 대해 반응을 잘하지 못해
(복음을 듣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씨뿌리는 비유중에
세상의 염려에 대한 언급을 한 가시떨기가 있는 마음의 밭)
자신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며,
죄를 사랑하고 아직도 두려움에 빠져 있게 되는 것이다.

박스터의 마음과 영혼의 병에 대한 이해
굳어진 마음의 재앙은 죄로 인하여 우리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하며
혹은 우리의 죄책의 영혼은
위대하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위험하고, 불행하게 한다.
굳어진 마음은 멜랑코니(일종의 우울증)와
불신자의 불행을 가져오며,
부드럽고 순전한 마음은 복음을 받아들여,그리스도의 새로운 성품을 닮게 한다.
멜랑코니의 병은 사람의 몸안에 있는 마음에 자연적(심리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며,
어느 것은 예외일수 있지만, 그것을 다룰수 있고 고칠수 있다고 말한다.

개종(마음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마음의 진정한 신앙고백을 통한 자기변화)
의 사역하에서 영혼들을 일깨움을 받으며,
그들이 슬픔에 결코 빠지지 않으며,
마음의 굳어짐의 위험에 놓이지도 않으며, 지나친 슬픔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비록 죄의 영향이 있지만, 두려움이나 슬픔에 대한 위험도 없으며,
크나큰 실수라 할수 있는 불안한 불만을 토로하는 일도 없다.

슬픔(이 슬픔은 일반적인 의미의 슬픔보다는 병적인 슬픔의 상태)
이 지나치면, 상처를 입기쉽고, 마음이 극도로 나약해져,
몸의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해를 끼치게 된다.

슬픔과 마음의 걱정은 건강한 이성의 활동을 억압한다.
그리고 마음의 판단을 왜곡시켜 사람을 타락되게 하고 ,
신뢰할 만한 하지 못하게 하며,
결국 들끓는 분노에 마음의 더 큰 걱정에 싸이게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마치 자신의 일에 대해
과장된 열정을 가진 것으로 나타내게 한다.

과도한 슬픔에 빠지게 하는 사람의 생각들이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생각들은 사람을 죄스럽고,
걱정적인 상태(병적인 불안감)로 만들어 버리며,
믿음을 방해하고 삼킬정도로 엄습한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슬픔은
믿음을 방해하여 복음의 은혜와 약속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고로 필요한 평안을 통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슬퍼하는 상태를 거부하고
슬픔, 분노를 누그러뜨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

세가지 질병들이 지나친 슬픔을 일으킨다.
이세가지는 자연적인 힘으로 참을수 없는 격렬한 고통과
본성적인 나역함, 무기력하게 하는 요인과,
그리고 두뇌의 생각의 능력과 상상력이 무너져 기능마비로 인하여,
멜랑코니의 상태의 병이 되어버린다.

이런 경우는 고치기가 쉽지않다.
지나친 걱정과 병적인 슬픔의 본성적인 기질은
사람을 항상 수치심과, 불안감과 두려움에 빠져,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나 슬픔을 지속하게 한다,
그런 상태가 결국에는 자신을 미쳐버린 상태와 멜라코리의 상태로 발전시켜,
결국 그 병적인 상태가 자신의 본성적인 기질화하여,
그 마음의 병은 그 사람에게 자신에게 생활의 재난을 키운다.

쉽게 안달하며 조급해하는 습관은 정신적인 질병에 원인이 되기 쉽다.
세상을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것을 이기기 위해
보다 자신을 신앙으로 절제하는 일에 부지런하도록 하여야 한다.
죄가 얼마나 지대한영향을 주는지를 연구하며,
자신안에 있는 인생의 지혜와 의지를 키우고,
하나님의 섭리대해에 거스리는 불만족스런 상태에서
올바른 자신의 의지와 바람(기대)들을 세우며,
우리가 하나님의 역활을 하는 대신에
우리의 의지를 내세우는 것(자신을 절대시하는 태도)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병적인 슬픔이나 죄를 짓는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당황하게 하며(혼란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
이런 상탠은 병적으로 바꾸어 지기가 쉽다),
종교에 대해 혹은 영혼의 상태에 대해 무관심하며,
과거에 지은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것이나,
자신의 신실함(신앙을 가진)이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일등은
자신을 망치는 재난을 가져올 만한 상태가 되어
자신에게 비난을 받을 만한 요인이 된다.

만족과 지복의 극치로서
하나님, 그리스도, 하늘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 대해 만족함이 없다면,
더 그것을 연구하며 그 진리에 대해
바른 이해와 깨달음을 가지면 자기확신에 이를 것이다.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축복의 구주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자신들의 인생의 의미에 대한 확신과 가치 추구임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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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1)

박스터의 신학의 개괄적인 이해에 대해

리차드 박스터는 대표적인 퓨리탄의 신학자였으며,
영혼의 치유와 영적인 돌봄을 행하였던 목회상담가였다.
박스터의 목회적인 돌봄은 영혼의 돌봄과
크리스챤 심리학의 목회상담적인 접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인 이해와 퓨리탄의 신학과 목회철학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의 인간이해와 영성신학을 통해 목회상담을 시행하고 있다.

박스터는 그의 목회를 영성관리와 심리학적접근에 위한
영성을 돌봄을 주된 목적으로 그의 사역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신학과 심리학적이해는 그의 목회사역의 철학적 근거가 되며,
그의 목회상담학적인 접근은 당시 퓨리탄니즘의 인간이해와
영성이해의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박스터는 탁월한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은 당시의 퓨리탄의 대표로 그는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전통과
퓨리탄의 영성중심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박스터는 또한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목양을 하는 목회자로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목회자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며, 그들의 영혼의 문제를 치료하며,
그들의 신앙생활을 성장시키는 영혼사역의 실천자이다.

박스터는 목회상담자이다.
그는 목회에 상담을 접목을 시도하였으며,
퓨리탄의 목회적인 유산을 대표할 만한 목회상담자이며,
그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영적인 사역과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병적인 상태를 진단하고,
그것을 치료하는 과정을 상담을 통해 영혼의 회복을 추구한다.

박스터의 인간이해와 영성이해는 근대 목회상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간이해와 영성신학은 그의 목회상담학의 근거가 되며,
그는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과
그리고 인간의 개종과 변화와 성장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목회상담가이다.

그의 목회상담학을 연구하는 것은 그의 영성학이나 인간학을 이해하며,
그리고 퓨리탄의 목회학을 살펴보며,
그의 목회론을 이해하면 퓨리탄의 목회학을 살펴볼수 있다.
그의 질병학을 통해, 그가 인간의 영혼을
마음과 몸의 관계를 통해 이해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을 통해 목양의 방법이나,영혼치료의 방법들을 사용한다.

그의 목회학의 영적인 유산들을 현대목회에 적용하여,
현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회중의 영혼들을 돌보는 의사로서,
영성과 치료의 목회를 통해 이상적인 목회상담을 실천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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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2)

퓨리탄의 신학은 하나님경험의 신학과
영성신학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스터는 이런 퓨리탄의 신학적인 바탕에
자신의 목회상담을 접근하고 있다.
그의 신학연구는 3가지 분야로 나누어 연구한다.
즉 박스터는 과학, 감성, 실천으로 신학적인 연구를 한다.

목양에 대한 접근은 과학적이며, 심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하며,
신학적인 진리들에 대해 감성과 이성에 대한 상관관계를 통해 이해하며, 그 진리들을 실천하는 실질적인 방법으로 신학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
박스터는 그의 저서에서 가장 첨예하고
센스티브한 치료의 방법들을 만족하게 강구하는 목회자이며
그는 17세기의 의 가장 뛰어난 작가중에 하나이다.
신학자체 다음으로 박스터는 심리학과 모든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물리학을 생각한다.

박스터의 인간학
박스터는 머리를 이해하는 지식과 마음을
이해하는 지식을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박스터는 인간을 두뇌와 마음의 연결을 통해 종합적인 이해를 알고 있다.
물질과 영에 대한 퓨리탄이중개념은
배교의 상태와 은혜의 상태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노력에 기여한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이원론에 입각하여 이해하지만,
성속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분명한 영성신학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으며,
퓨리탄들은 그런 관점에서 지속적인 자기표현을 통해
하나님 경험의 신앙을 갖게 되어진다.

박스터는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자신의 마음을 차겁게(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은 상태로 굳어지는 낳는 지식의 남용의 결과)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의 안좋은(교만이나 편견)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하며 새로운 지식(이론)을 받는 것에 거부나 두려움을 갖게 한다.

자기지식은 모든 자기경험이 자신의 삶의 패턴을
결정하는 걱정(관심)에의 표현이다.
퓨리탄들의 관심은 회중들에게 궁극적인 수준
(만족할 만한 영적인 신앙적인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지 못한 영혼들을 돌보는
지속적인 필요에 목양의 응답을 하기를 원한다.

박스터가 이해하는 육체의 자아(영적인 자아의 반대개념)는 무절제하며,
자기중심적인 모든 욕심과 성질의 총체로 유혹하는 의도의 시도를 잡고,
무질서하게 탐욕에 굶주리는 것과
죄로부터 소원된 감성의 마음을 통해 외부의 자기기만의 표현을 하면서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는 영적인 성향은 비이성적인 성향이 아니다 라고 이해한다.
그 성향은 오히려 우리의 이성을 더 밝게하며,
두뇌의 활동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그는 생각한다.

박스터는 또한 크리스챤 윤리는 마음의 일과 함께 한다고 이해하는데,
크리스챤의 생활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윤리적인 판단을
그리스도인들의 행동보다는 마음의 상태에 더 유념한다.
이것은 마음의 사역의 만족할 만한 주된 증거로서
박스터의 그리스도의 법의 개념이다.
그는 건전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 있는것이며,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수 있다고 본다.

그가 이해하는 인간이해는
사람의 몸(수동적인 연합의 실체)과영(능동적인 연합의 실체)의 주된 개념을
자기의식의 자료로 쓰임을 받는다고 이해한다. 즉 그뜻은 영의 능동적인 역활이 잘 이루어지므로, 그 영의 영향을 받는 몸의 수용성의 연합의 조화를 통해 자신의
즉 몸과영의 자기이해는 자기를 알고 인식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박스터는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를
사람이 가진 영혼의 목적은 사람속에 있는 자아를 만들어 가는
인간의 인상(자기표현)을 나타내고 자신을 이해하게하는
중요한 성향(종교성이나,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퓨리탄목회학
퓨리탄목회자들은 상담과 조언을 교인들에게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의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마음을 다루는 영적인 상담가로서
회중들에게 상담을 통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며,
그들의 크리스챤 생활에 필요한 권면을 주어,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간다.
퓨리탄 목회자들은 상한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영혼의 고통의 상태의 원인을 죄로 보고 다룬다.

퓨리탄의 그 일반적인 이해에 더나아가
박스터는 사람의 문제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며
정신적인 이상현상에 대해 사람이 깊은 디프레스(우울증)에 빠지는 것으로 본다.
그 상태를 메라코니상태로 말하고,
그 병적인 심리적인상태에 영적인 치료들을 적용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퓨리탄목회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이해는
퓨리탄 자신의 자기실현에 공헌하며 그 자기실현을 통해 목양에 기여하게 된다.
이 말은 목회자가 자신의 정체감을 바로 가지므로서,
목양을 통한 성취에 충실할수 가 있는 것이다.

퓨리탄에게 있어, 자기 시험(이말은 자기를 점점하는 과정, 즉 목회자들이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영혼의 문제나 정신적인 문제에 대한 자기 해결의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하는 것)은
목회자자신의 이전(과거)의 목적하는 바(소명시에 받은 목적)의
자질들을 발견하는 일에 유익하다.
즉 목회자가 자신을 점검하므로써 자신이 목회적인 목적이나,
목양에 대한 거룩한 목표들에 대한 전반적인 자기이해를 갖고
그 목적들을 실현할수 있다.

퓨리탄 목회자들을 확신하게 하는 지속적인 흐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점검의 기술이나,
그들 자신의 필요를 분별하고 처방해주는 역활을 해야 할 것이다.
퓨리탄목회자들은
오늘날 목회적인 심리학이란 불리우는 철저한 영혼의 돌봄이나
심리학적인 사역을 필요로 하는 목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박스터의 목양학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사역은 특별한 일들에 대한 것을 다룬다.
즉 확신하게 하는 것, 신앙에 진보를 가져오는 것,
신앙의 보존하는 것, 그리고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주력한다.
목회자는 성경적인 지식, 진단의 분별,
그리고 상담의 스킬등을 통해,
영적인 전문 의사로서 사람들의 영혼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영혼의 돌봄은 회중들의 영혼들의 신앙에 대한 목회적인 돌봄을 전제하고 있다
회중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도움을 받을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들이 건강하며,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온다.
목회자들은 회중들의 영적이고,
육체적인 건강등 전반적인 그들의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목양의 사역의 전반적인 과정은 회중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목양은 회중들,그들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의 최선의 것을 유지하도록 도우며,
그들의 상처들을 살펴주는 것이다.

박스터는 다양한 청중들과 개인적이며,
공식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시골에 있는 사람이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화에 많은 진전을 가진 사람이거나 혹은 아직 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목회자는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자신은 그런 모든 이들의 목회자로 사역을 담당하였다.

박스터의 교회론
박스터는 어거스틴의 교회적인 전통,
즉교회는 진정한 성화를 이루는 개종자들과 이름뿐인 개종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박스터는 교회를 교화함이 없는 혹은 개종에 대한 노력이 없는
어거스틴식의 교회이해에 대해서 망설여 생각한다.
그것은 교회는 계속적이 교회의 교화의 노력과
지속적인 회중들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박스터는 교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승리한 영적인 교회로 이해한다.
보이는 교회안에 속해 있는 회중들 중에 개종하지 않은 자들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받지 못한 자들이며,
오히려 아직도 사단의 노예로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인정한다.
고로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의 이상적인 상태를
목표로 하는 보이는 교회의 회중들로 하여금
진정한 개종과 거룩한 성화의 발전을 도움으로
그들의 보이지않는 교회에 개입하는 수가 늘어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교화(가르쳐서 깨우쳐주는 교육적인 과정)는
퓨리탄의 삶과 신앙에 대한 바울적인 개념이해이다.
설교를 섭취하여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고,
주요한 가르침들을 암송하고,
마음으로 진정으로 기도하는 모임에 참여함과
성도들의 친교에 의해 이상적인 퓨리탄의 회중들을 만들어 내는 일이 교회의 사명이다라고
박스터는 이해한다.

박스터는 또한 다음과 같이 교회적인 확신을 강조한다.
환자들이 육체적인 질병에서 회복되듯이
회중들이 자신들의 고질적인 영적인 병에서
목회상담적인 훈련을 통해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성도들로 하여금, 보다 깊고 성숙한 성도들의 교제를 즐길수 있도록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박스터는 교회의 진정한 변화는 구조적인 변화보다는
개종을 통한 개인들의 변화를 인정한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목회자들의 중요한 사역의 요소들로는
각 개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공공적으로 말씀진리 (교리문답)의 교육과
일관된 영적인 훈련
그리고 성도들간의 공동체의 일치를 주장한다.

박스터의 개종론
박스터는 개종(칭의의 소유와 성화의 시작의 상태:
진정한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인간변화의 상태)은
교회의 사역의 궁극적인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여긴다.
회중들을 진정으로 개종케 하여 자기변화를 이루어
거룩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임무이다.

그런 관점에서 박스터는 교리문답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한 목회적인 요소가 되며,
그는 그것이 영혼들의 개종을 도울수 잇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강조한다.
교리문답의 교육을 통해 개종한 사람들을 질서있게 세워주며,
이미 들은 설교를 통해 얻은 영적인 지식(단편적이고 부분적이기 쉬운 지식)에 대한
회중들의 습득에 대한 보다 더 깊고 나은 이해를 가질수 있도록 한다.

공동체의 개종한 무리들에 대한 목회의 또 다른 부분은
떨어진(신앙의 퇴보나 혹은 배교에 가까운 영적인 좌절을 경험하는 상태)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할수 있는 그들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다.
회중안에 있는 개종한(이미 믿은)사람들중에서 그들을 돌보는 목회의 사역은
특히 영적인 문제에 대해 불안한 자들에게 개선적이고 치료적인 지식의 위로를 주는 것이며,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평화를 주며,
그들에게 안전하고 지속적인 영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목양은 활력있는 영적이 돌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종의 사역은 두부분으로 이루어 진다.
먼저는 종교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필수적인 원리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며,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효용성을 통해
사람들의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타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성도들 자신들에게 많은 도전과
목양자들을 고무시키는 사역이다.

박스터의 성령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긴장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포용하시는 성령충만한 사랑의 표식이다.
영적인 고양된 상태를 긴장으로 유지하는 것과
죄에 대한 승리의 전쟁참여와
그리고 정신차린 상태의 확고한 신뢰와
하나님의 비전과 온전한 순수함에 대한 잘 조성된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성령충만한 상태의 사람이 가져야 할 요소들이다.

하나님의 영은 성화의 사역을 이루어가는데,
사람들속에서 사람들과의 연합을 격려함과 사람들의 노력을 자극하여
그 성화의 사역을 이루어간다.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을 유도하여 하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하며,
사람들속에서 죄의 행동들의 진행을 막으며
그것들을 대체하는 은혜들을 사람의 의식이나 마음에 접목하는 일을 하신다.

박스터는 성령이 하나님의 선택된 자에게
임재하시는 교리의 실질적인 중요성은
신자들을 지상에서 하늘의 것들을 맛보게 하는 역활을 한다.
성도들의 주관적인 경험은 성령의 영향을 통해
그 영의 의도적인 변형이 자신들에게 미치는 것으로 증거한다.
그와 같이 그는 성령을 통해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친교할수 있다고 믿으며,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성례전, 영혼의 말씀,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안에서
성도들이 믿은대로,
성령이 자신들안에 생명을 가지고 오는 삶을 살도록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개종은 사람의 마음과 의지의 의식적인 작용으로 복음에 순종하며,
그 궁극적인 원인은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안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성령의 개화(개종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일에 필요한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성령의 비쳐줌은 사람들의 심령을 밝히며,
사람들을 진리(예수)에게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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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들과 청중들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에스겔 3:16-21
16. 7일이 지난 다음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내 말로 그들을 경고하라
18.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말할 때에
네가 만일 그에게 경고하지 않거나 잘 타일러 그를 악한 길에서 돌이켜
그를 살게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로 죽겠지만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물을 것이다.
19. 그러나 네가 만일 그 악인을 경고하고 타일러도 그가 악한 행실과
죄를 버리지 못하면 그는 자기의 죄때문에 죽을 것이며,
너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을 것이다.
20. “또 의로운 자가 의를 저버리고 악을 행하면 내가 그 앞에 장애물을
놓을 것이다. 네가 만일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때문에 죽게 될 것이며 그가 전에 행한 일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21. 그러나 네가 만일 그 의로운 자를 깨우쳐 그가 네 경고를 듣고
범죄하지 않으면 그가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너도
네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다.”

메신저들(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은 청중(그 말씀을 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사명이 있다.
메신저들은 말씀을 먹음을 통해 자신이 먼저 말씀에 용해되어
그 말씀에 푹 젖어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이 말씀을 풀어 설명할수 없다.
말씀에 대한 경험은 그 말씀이 자신안에 육신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함께 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경험하는 단계는 몇가지 단계로 생각해보면,
먼저 말씀을 이해하고, 연구하고 그 이해와 연구의 과정을 통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다음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그 묵상을 통해 말씀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 말씀안에 들어가 자신을 변화시켜,
말씀의 지시하는바를 따라 말씀이 주문하는 명령이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단계로 나아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조절하며, 말씀의 인도에 순응하여,
그 말씀과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파숫꾼의 사명은 선견하는 일,
즉 먼저 앞서 시대의 미래를 볼줄 알아야 할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먼저 살펴보고,
그 일에 대한 대비를 하도록 전할 사명이 있다.
메신저들은 청중들의 길을 판단하고 그들의 삶을 평가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파수꾼이 하는 일은 백성(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일이다.
앞으로 일어날 재앙이나 위급한 일에 대해 경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갖고 대비하도록 할 것이다.
예언자(파숫꾼)는 백성들이 갈 방향(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을 지시하는 일이다.
고로 그들이 갈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일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여,
그것을 따르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예언자는 메신저와 청중들의 관계를 이해하고,
먼저 그들중에 악인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왜 인생이 악으로 달려가는 가? 그것은 자신들의 악한 성품때문에 그럴것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그 악은 사람들을 오염시켜,
그 악의 세력안에 이끌려 죄를 범하게 한다.
악의 근원은 악한 존재에게서 시작이 되었다.
세상에 악을 뿌리는 악한 존재는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악한 영들이다.

그들이 뿌린 악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는 데로 유인하여,
사람은 죄악을 순간적이든지 혹은 의도적이든지 행하는 허물을 범한다.
즉 사람이 악에 물들면, 의의 율법을 듣는 양심의 기능이 마미가 되어,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악인으로 변한다.
고로 자신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악의 흔적이나 찌꺼기등을 깨끗이 물리쳐야 한다.
이미 범한 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없애는 방법(회개, 용서, 그리고 정결)들을
실천해야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수 있다.

메신저(예언자)들은 의인에 대한 격려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의를 행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감도 필요하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한 확신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의인은 의인의 삶의 원칙을 따를때에 만들어진다.
성경은 의인을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의인은 그의 말씀을 따라 그가 명하시는 바를 순종하는 자이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그분이 명하는 믿음의 원리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이는것에만 의존하지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영적세계의 원리를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실때에,
그의 말씀은 인간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의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은 그 말씀이 명하는 바를 들을줄 알아야 하며,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은 그의 편에 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과 함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말씀하시며,
그 예언자의 자신의 정체감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 예언자가 활동하는 시기는 유다나라와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으며,
참담한 국가나 그사회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사명을 받아서,
그 가운데에서 심판과 아울러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어주는 의미가 있는 직명이다.

하나님은 그 예언자를 이스라엘민족의 파숫꾼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는 이스라엘민족은 망하고
다시 건설되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사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를 살고 있는 각 시대를 분석하고 진단하고
판단하는 경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각시대의 파숫꾼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다.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즉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 주변사람들에게 영적인 파숫꾼의 사명이 있다.
그들의 말과 언행을 통한 삶을 통해,
그 주변사람들에게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지게 하는 사명이 있다.

사람이 악에 빠지는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주위의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혹은 나쁜 가르침의 영향으로 인하여,
혹은 악인의 모델을 봄으로, 혹은 자신스스로 택한 악한 길에서 등일 것이다.
성경은 악에 대해 반드시 그악에 따르는 댓가를 치를 것이며,
불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원치 않게 악에 물들어,
옳고 의로웠던 과거의 행적과는
전혀 다르게 변질된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어제까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결단의 의지를 통해 새로운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의인은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옳음을 통해
법의 준수의 필요성과 선함을 좇아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므로써,
옳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수 있을 것이다.

각사회마다 법을 이행하는 사회적인 규범이 있는데,
법의 집행을 위해 경찰이나, 권위자들이 있다.
그리고 법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댓가를 치르게 하는 법원이나 교도소등이 있다.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법의 옳은 시행과
그 법을 따르고 준수하는 시민정신이 건전하면 그사회는 밝아질 것이다.
사회를 밝게하는 데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법을 어긴 사람에 대한 처벌로 법의 엄격성을 알려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유도하지만,
긍정적인 대안으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도덕이나 종교의 역활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시대의 양심이며,
건강한 사회의 척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의 역활을 하였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일에 대해서는
왕이나 평민이나 할것없이 모두가 예언자들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와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파하였다.
메신저들은 하나님의 의와 심판을 선포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와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옳은 길을 인도하는 사명이 있다.

신언(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종교인들, 사명자들)에게는
주변인들에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주고,
악인은 그악에서 돌이키도록 하며, 의인에게는 더 옳은 일에 대한 격려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통해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밝게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사회적인 책임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며,
그 잘못은 더 엄격하게 처리되며,
그 일에 대해 종교인들의 바른 전언을 통해
사회적인 지도자들이나 혹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보다 조심하며,
자신들의 위치에서 바른 길을 걸어 갈 것이다.

그런데 만일 종교인들이나 사회의 양심의 기능을
다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명에 소홀히 하게 되면,
그 영향은 사회 전체에 어두운 영향을 주게 된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인들 중에 하나가,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백성들사이에서,
각시대의 사회를 향해 도적적이고
영적인 파숫꾼(파숫꾼은 군대나 혹은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첨병혹은 보초병이다)
의 사명을 바로 하지 않아서 패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항상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들로 부터 시작이 된다.
종교인들 즉 사회적인 정신적인 지주역활을 하는 이들이
제 역활을 하지 못하면, 먼저 자신들이 경고를 받고 심판을 받는다.

파숫꾼이 자신이 해야 할일들은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의인에게는 그들이 행하는 의를 칭찬하며,
더 큰 선을 향하여 나갈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일이다.
메신저(설교자혹은 예언자 혹은 진리의 실천자)의 경고를 듣고도 그 경고를 무시하면,
악을 행하는 악인에게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빛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을때에 더 불빛이 필요하듯,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의인과 예언자)의 역활은
자신의 언행으로 자기에게 비쳐진 빛이 잘반사되어져 비치도록
자신을 가꾸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별수 없이 살다가 그만 악의 길로 물들어 살다가,
자신의 처지가 더 암담해지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는 경우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 그 악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악을 행하는 것이 어려워 지는 것도 자신에게는 고맙고 유익한 배려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악을 짓는 악인의 삶으로 향하여 나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나,
어느 인생에게는 그것이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저질러 지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 안타깝고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은
옳은 일을 행하던 사람이 갑자기 악을 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일이며,
선한 일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 그 일에 지쳐 자신의 의와 선을 포기하고,
악에 타협하는 일이다.
어제까지 옳은 일을 하고, 지금 자신이 주변의 악에 물들어 간다면,
어제의 선행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오늘의 변질된 자신을 고쳐 돌이키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포자기, 좌절, 변절, 배신, 타락등은 인간생활에 사람들이 경험해서는
안되는 안좋은 인간의 상태이다.
신앙생활에도 낙심, 변절, 배교, 퇴보등은
자신의 인생기록에 있어서는 안될 인간의 못된 자기변화이다.
그런 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파멸로 자기를 더 밀어넣는 어리석은 행동이며, 그릇된 경향이다.
그것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결과를 낳게 된다.

세상 살다보면, 사람들을 흥겹게하고 힘나게 하는 것은
인간자신들에 대한 소망적이며,
개선적이며, 발전적인 뱡향으로 나가는 것일 것이다.
그런 예를 구체적으로 든다면,
인생의 도(생명을 얻는 진리)을 구하는 구도자가 그 길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한 과거까지 악을 줄달음질하다가,
생명의 빛의 진리를 듣다가 깨달아,
자신의 어리석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뱡향으로 옮아가는 일이다.

사람들중에 강도가 변하여,
새삶을 살아가고, 인생의 쓸모없는 놈팽이라고 자신을 여기는 사람들이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타인에게
격려와 자극을 주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뉴스가 되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제까지 어리석게 고집스럽게
부모의 교훈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더럽게 악을 범하며,
살던 자식이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삶을 살기롤 결심하는 사건은 모든에게 청량제와 같은 시원함을 주는 소식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혹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부모된 입장의 신앞에서 자신의 변화에 대한 결심을 고백하며,
자신의 개선과 발전의 결과가 나타내도록 힘쓰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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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있는 삶

로마서 1:1-7
1.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된 나 바울은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2. 이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3. 그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인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가 그분을 통해 은혜와 사도의 직책을 받은 것은
모든 나라사람들이 믿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7.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도가 된 로마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그도의 은혜의 평안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인생 자신의 삶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며, 삶의 방향이다.
자기의 정체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사람을 자기 인생의 길안에서
자신의 해야 할 사명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다.
고로 자기가 해야 할 고유한 일과 그일에 대한
천직적인 소명감이 자신의 삶의 근거가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기 인생의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가는 과정들이 모여 목적있는 자신의 삶을 이루어 낸다.
그래서 자신의 성취목표가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여기에 나타난 바울은 자기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사명에 대해 분명한 자기정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그 사람은 정녕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일이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그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그일에 자신의 전생애를 투자하여 그일에 매진하고 있다.

힘들고 슬픈소식이 넘쳐나는 인생들의 삶의 현장에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통해
그는 바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 기쁨의 소식은 바울을 구원한 소식이며,
동시에 그는 이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그 기쁜 소식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예언자들은 핍박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고난과 역경가운데에 그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위해 끊임없이 역사속에서 전파하였다.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에 대한 뉴스이다.
그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민족안에 태어나셨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시다.
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나?
그는 다윗의 하나님과의 언약에 근거한 메시야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앞에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던 왕이다.
메시야는 이상적인 왕의 통치의 약속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세상의 것들과 구별되는 사람들에게 오시므로 그들을 구별된 존재들로 세운다.
그 영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므로
그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었다.
그 영은 생명의 영이며, 죽은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영이다.
그 영의 역사안에서 십자가의 예수가 부활의 예수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자신됨과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게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장차와 영원가운데에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를 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깨닫고, 그 신분의식에 의해 자신이 위치를 발견하고,
그위치에서 자신이 할일을 찾아, 그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은 먼저 자신이 되고 나서 자신이 할일을 하는 것이 순서이다.
자신이 되지 않고 직책이나, 사역을 하러 나선 경우는
일을 하면서 많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았고, 그분안에서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과거에는 종교적인 지식이나 관습에 의해
자신이 유대교의 선생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여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지냈으나,
이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변화된 그의 고귀한 성품이나 인격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를 좇아,
여러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사람들을 살려야 할 책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바로 만인에 대한 봉사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고 맡은 사람으로 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말씀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안에서 되어야 할 사람들로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갖고 전하는 사람으로
바울은 자신(바울자신이 먼저 변화된 사람)을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올바르게 되도록 하는 가르침은 그것을 사람들이 받을때에,
그 진리가 자신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진리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킨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진리의 자기경험를 통해 영향을 줄수 있다.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인생에 막강한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변치않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리가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 갈 뿐 아니라,
사람들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인생의 삶을 빛나게 하는 역활을 한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그분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는 사람들을 향한 그의 사역의 목적을 제시한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사람들로 세우는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사람들이 되어갈수 있는 길을 먼저 열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한 사람들이다.
성도란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이란 하나님에게 붙어있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함이다.
세상에서 따로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각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그것은 자신의 영원한 영적인 고향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그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다만 자신의 처지나 직업이나,환경안에서
거기에 있는 자신으로서 그의 부름을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농부는 농부로서, 기술인은 기술인으로서, 전문인은 전문인으로서,
혹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단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소명(하나님의 부름)을 이루어 가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음은 하나님나라의 초청을 받는 것이며,
그가 인간을 위해 마련한 모든 영광과 축복의 자리에 동참하는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부름에는 그의 깊은 예정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부름안에 있는 그의 예정은 만세전에 작정하신 뜻이며,
그가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무리들을 영원전에
이미 작정하신 계획의 일로 부름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섭리는 그의 부름을 각자의 인생들속에
그의 기이한 손길로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

사람들이 각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분명한 확신과 자기 사명에 투철하여,
평생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목적의식아래에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의 인생 앞에 놓인 과정들이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더라도
자기가 가는 길을 후회없이 그리고 나약하게 진행하지 않으며,
일관된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목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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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을 극복하려면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스스로 자신에 대해 낙심하는 것은 가져서는 안될 자신의 태도이다.
신앙인의 생활에도 낙심은 금물이다.
하늘나라를 향하여 전진만 하는 영적인 순례의 인생의 길에서
낙심은 신앙인들을 뒷걸음을 치게 하며,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위태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고로 신앙의 현상중에 가장 나쁜 것은 낙심이다.
믿음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신앙인의 낙심이다.
절망적인 태도가 낙심을 가져오며,
그 태도는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허물어 뜨려 놓는다.

그 낙심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며,
자신의 마음속에 절망감이 들어오면서,
낙심하여 자기스스로 힘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낙심을 잘하는 사람은 똑같은 환경이나 경험을 하여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거기에 부정적으로 쉽게 반응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그 일들을 보고 어려움을 감당하는데,
낙심하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에 짓눌려 더욱 절망감에 빠진다.

고로 낙심은 주변환경을 보고 체념하여 생기는 자신안에 있는 부정적인 관점이다.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지면,
누구나 마음이 낙담이 되어 절망감에 빠진다.
그렇지만 지금은 낙심하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지켜, 굳게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
그런 절망적인 상황들을 극복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낙심은 인간자신의 나약함을 강화한다.
자신감을 결여하게 여기게 하는 낙심하는 마음은
자신을 자신할수 없는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그녀는 쉽게 낙심에 빠져서,
자신을 그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여,
더욱 그런 좌절된 상태에 자신을 내던져서 거기에 머물러 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중에도 낙심을 경험한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는 구약의 엘리야예언자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하나님의 예언자로,
온나라가 우상을 섬기는 상황하에서
수백명이 더 되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영적인 대결을 하여 승리하며,
이스라엘백성들을 하나님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역활을 하였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나 왕비의 자신을 죽이려는음모에 자신이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자신에 대해 낙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개 자살하는 경우는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인생의 사명에 대해 스스로 낙심하여
자신과 자신의 생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가장 큰 낙심의 비애의 경우이다.
그 낙심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이나 인생의 삶에 대해 주관자로 나서는 것으로,
자신의 불행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어떤 연유로도 자신과 자신의 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극단적인 낙심의 경우인 생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믿다가 낙심하는 것은 안믿은 만 못하다.
하나님은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것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귀하게 여기시며, 그를 자신의 친구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자녀의 약속을 받았지만, 100세에 가서 자녀를 받았다. 그 사이에 수십년을 사는 동안 그는 낙심할수 있는 상황이나,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자녀를 갖는 일에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낙심하게 하는 자신의 상태나 환경을 극복하였다.
고로 아브라함의 가진 믿음은 불멸의 믿음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것을 바라보고,
자신에 대해 낙심하여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낙심을 극복하는 것은 낙심의 원인을 살펴보고,
낙심케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을 가져야 한다.
낙심의 원인이 외부의 환경이나 혹은 일등 자신의 밖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런 원인들을 잘 다루어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그 원인들이 지나가면,곧 낙심하는 데서 자신을 극복할수 있다.

그렇지만, 낙심의 원인이 자신안에서 나오는 것이면,
그것은 그 낙심을 유발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이나,
혹은 심적인 태도, 그리고 심령의 상태에 대해
전문인의 도움(두뇌의 이상기능의 영향 때문에 올수도 있으므로
약물로 치료가능할 수 있음 혹은 묵상이나 명상적인 훈련참여)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낙심이 들때에 항상 그 낙심하는 마음이면을 볼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이면은 낙심과 정반대의 요소인 자신감이 있다.
우리 마음의 상태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낙심을 이기는 길은 쉽게(마치 동전의 이면에서 저면으로 돌리듯)
자신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갖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갖기가 쉽지 않을때에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의 변화의 참여(여행이나 혹은 운동이나
혹은 자신을 격려시켜주는 독서나 취미할동)나,
혹은 주변인의 도움(조언이나 상담등 타인과의 필요적절한 대화)으로
자신의 낙심의 상태를 극복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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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영어로 empathy 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감정이입”이라는 말이다.
인간관계에서 이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을 영영사전에서 보면, 크게 두가지로 설명을 해준다.
하나는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 해석의 뜻을 좀더 풀어본다면 상대방과 대화나 교류를 할때에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 자신의 감정이해를 통해 동일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또하나는 동정심이나, 연민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사람의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이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의 대화를 많이 주고 받았다 할지라도
서로의 감정을 나누지 않는 대화에는 한계가 있다.
친한사람과의 서로의 정을 나누는 것은
이 감정이입을 잘소통이 되었을때에 가능하다.
이처럼, 사람과 사이의 관계나, 교제나 대화에 있어서,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는 일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상대방간에 두뇌의 이성으로 서로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어도
감정에 앙금이 남아 있으면,
상대방과 진정한 대화나 교제가 이루어졌다고 할수 없다.

최근에 나는 이 말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상기하는 경험을 하였다.
부부간에 진정한 감정교류나 배우자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서로에 대해 진정한 마음과 마음의
관계나 교제가 이루어 지지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부간에 대화에 있어서 서로의 감정이입이 잘되면
그 부부는 다정한 부부가 되며,
부부사이에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따스한 인간의 정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부부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힘든 때는
서로에 대해 상대방을 이해를 못하고,
상대방의 이해를 받아주지 못할때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혹은 가족대소사에 일어나는 힘든 일이나,
혹은 직장에서 퇴직하는 일등,
여러가지 부부나 가족의 생활을 힘들게 하는 게 있다.
그러나 부부생활에서 가장 힘들어지는 하는 것은
부부가 서로 마음과 마음을 주고 받지 못하고
즉 서로가 감정이입이 되지않아
감정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이다.
그때에는 서로 대화를 하여도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서로의 감정적인 상태를 무시하게 된다.

요즘은 E.Q(감성지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감정의 차원은
이성적인 차원의 영향보다도 더 깊이 영향을 주고 받는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안정된 감정생활을 하게 하는 교육은
어느 교육보다 더 중요하다.
보통 부모들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그일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으나,
건강하고 행복한 자녀들의 삶을 바라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감성교육이나 개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실질적으로 자기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더 나아가서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감성지능이나 풍부한 감성의 소유의 능력이나 활용은
더 중요한 인간의 가지는 자질이다.

감성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인간의 교류안에서 막힘이 없는 감성의 흐름은
모든 인간관계의 자연적인 조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평소에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면,
지인과의 대화를 할때에, 혹은주변사람들과의 교제를 할때에
단순히 소통의 차원에서 정보나, 인식적인 문제에만 생각하고 소통을 한다.
그런 경우에는 인간관계가 공식적이며 사무적이고,
더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를 못한다.
그렇지만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은
감정이입이라는 소통을 통해서
보다 깊고 영향력이 있는 인간관계나 교제가 이루어진다.

전문적으로 상담을 하는 일이나
혹은 청중들에게 영향을 주는 연설가등은
연사와 청중간에 서로의 감정을 주고 받지 못할때에도
진정한 상담이나 연설의 효과가 일어나지 않으며,
피상담자나 청중들에게 전혀 영향을 줄수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감성의 흐름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그 일에 관심을 갖고 자신을 개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나 대화의 교류에서 사람의 감정적인 부분을 파악하고,
감성의 흐름을 인지하고,
감정적인 영향력을 고려할때에,
보다 효과적이고 영향력있는 인간관계나 교제를 이루어 낼수 있다.

감정이입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경험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자신과 만나는 사람의 슬픔과 기쁨과
혹은 분노와 싦음에 대한 감정등에 대해 민감하게 잘 반응하며,
그런 감정적인 교류전달에 관심을 가져 메마르지 않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안에서 일어나는 감성의 상태등을 잘 파악하여 건강하게 대처하게 된다.
그리고 보다 나은 풍부하고 즐기는
인간관계나 교제의 대화를 이루어 낼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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