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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인생을 망하게 한다

2007/04/11 오후 11:50 | 메시지

예레미야13:15-18
15. 너희는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 교만하지 말아라
16.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어두운 산에서 너희가 비틀거리기 전,
너희가 바라던 빛을 그가 캄캄한 흑암으로 바꾸시기 전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17. 그러나 너희가 듣지 않으면 너희 교만때문에 나의 심령이
외롭게 흐느낄 것이며 여호와의 양떼가 사로 잡힌 것 때문에
내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것이다.
18.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왕과 그의 어머니에게
‘너희는 높은 자리에서 물러나 앉아라.
너희 영광의 면류관이 떨어졌다’하고 말하라.

교만은 인간실패의 지름길이다.
인간이 자신을 실패하는 자로 여기려는 데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가를 알게 되며,
그 일로 나중에 자신의 망하게 되는 요인를 발견하게 된다.
교만한 그 사람은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얼마 안있다가,
자신의 삶이 실패하게 되든지 혹은 곁길로 빠져 망하게 된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선줄로 생각하는 자에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듯,
인간에게 교만은 쉽게 가지게 되는 인간의 성향이다.
조금 높여주면 교만이 하늘높이 솟아 올라,
사람들의 마음의 어리석음을 자신만의
바벨탑(성경의 고대에 있는 사람들이 인류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자기들만의 세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탑을 쌓았다가 그 탑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져 내린 탑)
의 세계를 쌓아놓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가만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교만은 인간자신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위치에서 인간 자신들을 망하는 쪽으로 향하는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귀에 달콤한 말을 주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말에 솔깃하여 그말에 속아간다.
그렇지만 바른 소리를 하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 마음이 정직하여,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올바르게 만드는
그 정직한 말에 귀를 기울인다.

지혜로운 자녀들은 부모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으며,
그 부모의 교정하는 가르침에 순종한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
그리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도 자신들의 잘못된 것을 깨닫지 못한다.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지혜로우며, 또한 겸손함 사람들이다.

어리석은 인생이 갑작스런 자기위치변화나
소유변화가 있을 때에 빠지기 쉬운 교만의 함정이 있다.
그들은 일시적인 자기의 교만의 태도로 인하여,
오히려 자신의 삶에는 안좋은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런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지 않았었으면 좋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나중에 서야 자신의 가지고 있는 그 교만의 태도나 자세가
자신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경험이 없고 젊은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울때에나,
못사는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는 그런 경우에 그런 교만에 빠지기 쉽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경우나,
잘못된 부모의 교육으로 자신을 교만하게 여기며 지내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지나치게 자녀들을 그들 중심의 인생관을 갖도록 유도하게 될때에,
자녀들이 쉽게 자기 도취에 빠지거나,
혹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 즉 자기가 속해있는 모든 환경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며,
모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들을 자기의 욕구를 달성하는데 이용만 하는 경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 교만한 인생으로 비쳐 줄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없었던 사람이나,
혹은 낮은 자리에 있을때에는 겸손하던 사람이
갑자기 많은 소유물을 갖게 되었을때에나,
혹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쉽게 자기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경우도 잇다.

유명인들중에 자신의 인생이 특별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교만한 사람으로 보여지기 쉽다.
어느 일에 업적을 남기거나, 혹은 어느 단계에서 훈련의 효과를 본 사람들이
자기가 이룬 것을 보고 자기 도취에 빠져, 자기 교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신다.
그 교만이 아름다운 영적인 영물들(천사들)이 자기의 위치에서 떨어져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귀신들) 변화되어,
결국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더러운 존재들이 되었다.
그 교만은 이상적인 인간(창조주가 창조후에 보기에 좋았던 인생들)을 타락시켰으며,
그들을 복잡한 문제에 휩싸인 존재로 전락하게 하였다.

교만한 인생의 앞길에는 망하게 하는 요소들만 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 잘 나가는 인생도 그의 손길 앞에서 무너져 내리게 한다.
교만한 사람이 자신의 형통한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누리다가 언제인부터인가 그의 밝던 인생의 현장에 어둠이 깃들일때에,
자신의 삶이 비틀거리는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그 인간의 교만은 사람들을 고집스럽게 하며, 의를 추구하지 않게 한다.
더 나아가 그런 교만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인간사회에서 악을 조장하며,
악의 세력으로 횡횡하게되어,
사회가 어두워지며, 어렵게 되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상황으로 나가게 한다.

자신의 교만에 대해 지적해주는 충정어린 사람들의 충고를 외면하고,
주변사람들의 권면을 무시하게 되면,
그 교만한 사람은 더 나쁜 사람으로 나가게 되며,
그 주변사람들은 마음이 아프고,
그들의 심령에 안타까운 심정이 들어 그 교만한 사람의 삶을 탄식하게 된다.

교만한 사람들이 그들의 교만의 고집스러움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이미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이나 상황을 더 나쁜 쪽으로 만들어 버리며,
자기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더 괴롭히게 된다.
교만한 사람으로 인하여 자신도 힘들어 지게 괴롭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 어리석은 교만으로 일을 저지른 결과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그 고통에 참여하며 그것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인생들을 거부하신다.
그들의 오만과 거드름을 피우는 것을 미워 하신다.
그 자리가 아무리 높고, 그사람들의 위치가 아무리 견고해도
결국에는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삶이 버림받은 자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에 온유한 사람이
결국 자기가 원하는 땅(자리, 소유)을 차지하며,
겸손한 사람들이 사람들사이에서 환영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겸손, 겸손, 겸손은 인생을 잘사게 하는 자신의 좋은 자산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높여주고 가치있게 해주는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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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속에서 희망을 걸고


예레미야 애가 3:22-27
22. 여호와의 크신 사랑때문에 우리가 소멸되지 않았으니
그의 자비가 영원하구나.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는 정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24 내 심령이 말하는구나 ‘여호와는 나의 전체이시므로 내 희망을 그에게 두리라.’
25 여호와 께서는 자기에게 희망을 걸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26. 여호와의 구원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고
27. 사람이 젊었을때 인내를 배우며 훈련하는 것이 좋다.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며 슬픈노래를 부르는 예레미야는
그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며,
그에게 희망을 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유다나라는 자신들의 범죄와 허물로 심은대로 멸망을 거두고 있다.
절망가운데에 있으면서 희망을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절망에 빠지게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힘을 잃는 것은 어쩔수 없는 처지이지만,
그 상황은 언제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곧 잠시 있으면 다시 새로운 희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꽃피울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는 것이다.

고난가운데에 있으면서 그 고난을 참고 견디며,
교훈을 되새기며, 자신을 가다듬는 기회를 삼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꿋꿋히 서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며,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며,
주어진 환경들을 통해 없는 것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와 유익을 찾으며,
그것을 통해 그 시절들을 극복하는 재료를 삼아,
이후에는 그들은 더 강한자, 그리고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 지게 된다.

실패를 당하면서도 성공할 것을 생각하며,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여 새로운 시도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반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패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게 하며, 자신의 하는 일을 돌아보게 한다.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실패를 많이 거쳐 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실패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교훈삼아 성공하는 자신을 가꾸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유다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범죄로 온나라가 멸망을 당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종교와 인생의 교훈을 배웠으며,
이후에 유다는 세계에 흩어지며,
고난 당하는 민족으로 호된 시련의 세월을 겪지만,
그 고난가운데에 세계에서 적응하는 것을 배우며,
자신들의 생존이나 번영을 생각하며,
후손들에게 좋은 인생의 지침과 올바른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에 대해 분명히 판단하며,
그들의 죄를 심판하지만, 결코 인간자체를 파멸로 이끌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항상 살길을 열어주시고, 멸망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다만 사람이 망해가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어리석음,
혹은 파멸하게 되는 원인이 오만한 모습이나 고집스런 악한 태도때문이다.

인간이 범죄하여 그들의 잘못으로 댓가를 치르는 중에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수 있는 크신 분이다.
그는 온우주와 그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는 만물의 모든 것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신다.
비록 인간들이 잘못하여, 범죄해 빠져 있어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며, 자비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통해 사람은 죽어간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소멸되어간다.
그렇지만 육체를 떠난 인간의 영은 영원한 세계로 향하여 나아간다.
다만 그길이 두 갈래길에서 갈라지만
그영혼들은 영생을 얻는 미래와 영벌을 당하는 미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자비는 죽음을 맞이할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안타가워 하신다.
그의 사랑은 그들을 향해,
항상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가진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다가온다.
모든인생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사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잊을수 가 없다.
그가 한사람의 영혼을 향한 열정은 유일한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한 그 사랑에 있다.
그 사랑은 항상 망해가는 사람들을 향해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새롭게 삶의 호흡을 시작하는 아침마다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저녁에 사람들의 낮에 분주한 활동으로 고된 육체을 쉬게 하고,
잠을 통해 다시 자신들의 육체가 힘을 얻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나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된다.
밝게 빛나는 아침의 햇살을 맞으며, 새롭게 다가오는 신선한 공기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자비와 헤택을 누리며 살게 한다. 아침마다 우리는 희망을 품고 하루를 시작할수 있다.

인생의 많은 날들주에 자신들이 젊은 날에나, 혹은 무엇이나 시작하는 순간에
모두가 새로운 소망에 마음을 푸근하게 할수 있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을 시작할수 있다.
그것은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베푸시는 혜택으로 인함이다.
그는 우리들 자신의 구원과 영광의 하루의 날을 이루기 위해
천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신실한 분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비로우며 신실하다는 이사실을 명심하여,
자신들의 영혼을 향해 항상 내가 그의 자비하신 손길에
나의 희망을 걸리라는 다짐을 통해,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모든 것이 그의 손길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희망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
사람이 신에게서 그것을 찾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을 삼아,
인생을 힘있게 그리고 가치있게 그리고 의미있게 살아간다.

인생의 좌절이나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나설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의 부르는 초청의 음성에 불러냄을 받아
이미 하나님의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보다,
아직도 그의 부르는 음성을 외면하며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마음을 쓰신다.
그들도 마찬가지 신의 품안에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때로는 어떤 인생들은 좌절과 번민과 고통속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로 나온다.
어느 사람들은 진리를 구하고,
변치않는 삶의 원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의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을 살게한 신을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어떤 여유에서든지 신을 찾아 발견하고 그에게 나아와
자비와 사랑을 기대하며, 인생의 축복을 기대하며,
절망속에서 희망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은혜를 주신다.

사람이 일이 안되고 인생이 힘들때에는 잠시 삶을 살아가는 손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에 계신 분을 생각하는 것은
지치고 나약해진 자신들을 돌보고 힘있게 하는 신의 손길을 기대할수 있다.
때로는 세상은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고 정신없게
만들어 쓸모없는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을 값있게 살아야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잠시 조용히 자신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은 날이나 좋은 일을 만날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에게는 나의 많은 인생의 날들중에
가장 감격스럽고 기뻤고, 의미있었던 날은 나에게 그분이 찾아온 날이다.

사람이 젊을때에 힘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정력을 쓸데없는 일에 소모하지 않고 살면
인생을 사는 지혜를 얻으며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젊음은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며,
왕성한 의욕이 자신을 휘둘러 마치 오래살고
기회가 많다고 여기고 사는 사람처럼 만들어 버린다.
때로는 젊은 날에 일들의 실패와
힘든 인생관계의 상처와 인생의 아픔과 삶의 좌절감을 맛보는 것이
그가운데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며,
이후의 자신의 삶에 값진 교훈이나
유익하고 힘있는 인생을 살게 하는 저력이 될수 잇다.
절망속에 희망을 걸고 이 삶의 원칙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를 찾는 자신에게도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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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사실에 대한 단상

빈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대변한다.
모든 인류는 이땅에 육체를 입고 와서 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이룬 육체가 육체의 죽음을 통해, 땅의 먼지로 변하게 된다.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육체의 껍테기를 이지상에 남기고,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몸의 DNA의 흔적들을 남기고 이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지상에서 사라진 에녹과 엘리야(성경구약에 나타난 두 인물: 에녹은 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엘리야는 하늘로 올리움을 받았다)를 제외하고 모두가 육체의 죽음을 통해, 그들은 무덤을 남겼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는 무덤에 들어가 시체가 되어 3일간을 그곳에 있었다.
그의 몸에는 상처투성이와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신 상처의 흔적(이것은 인간의 두뇌가 항상 생각하는 것에 죄의 영향하에 있었음에 예수그리스도의 죄의 댓가를 치름)과
두손(손을 짓는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댓가를 치름)과
두발(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는 일로 분주했던 인간의 발걸음의 댓가를 치름)에 못을 박히고,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
그 십자가의 예수를 향해 로마의 병사가 옆구리를 찌르니
그곳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내렸다
(예수의 옆구리 상처는 인간의 심장 어딘가에 있을
인간의 마음에 죄를 담았던 흔적들에 대한 댓가를 치름).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일을 다 마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는 죽었다. 그의 육체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이라는 세력에 휩싸여 버렸다.

그러나 떠오르는 동녁하늘에 환히 비쳐주는 빛처럼, 죽어있던 그의 육체는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는 생명의 영의 역사로 십자가의 예수는 다시 살아났다.
그의 몸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생명의 영이 임하므로,
그의 죽은 몸이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죽었던 예수, 즉 그 십자가의 예수가 부활예수로 변화된 것이다.
예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인류를 언제나 무겁게 짓누르고,
억압하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다.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등 3여인은 죽은 예수의 몸에 바를 향료를 구하여,
그 무덤에 갔으나, 예수님을 찾지 못하여 있을때에, 그녀들은 어리둥절해 있었다.
갑자기 빛나는 옷을 입은 두사람이 나타나 그들 곁에 섰다.
여자들이 무서워서 얼굴을 땅에 대자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왜 살아 계시는 분을 죽은 사람가운데서 찾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전에 갈릴리에 계실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놀람과 경이로움과 큰 기쁨으로
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통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모든 인류는 죽음앞에 두려워 하며,
항상 죽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댓가로 누구에게난 죽음이 찾아 온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그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을 믿고
그가 약속하신 바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기간이 끝나 죽음에 이르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믿음으로 언제가는 예수님처럼
그들의 죽어 썩어 흙이 되어 버린 그들의 몸이 다시 살아,
예수님처럼 영광의 몸체를 입을 날이 다가 올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생명의 하나님의 영은
예수를 믿는 이들마다의 마음속에 그생명의 약속을 보장하심으로
그들속에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그 영은 믿는 이들속에서 함께 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안고 살게 한다.
그 영은 때로 믿는 이들속에 믿음을 심어 주기도하며,
그들가운데에서 모든 분야에서 그들을 돕는 분으로 함께 하신다.
그 생명의 영은 사람들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혜택안에서 살도록 하며,
죄와 죽음의 권세의 세력으로부터 그들을 풀어주고 자유하게 하며,
비록 육체안에 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복(평안, 목적있는 삶, 영생에 대한 보증을 통한 영혼의 안식등)을 누리며
살게한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그녀의 증거를 믿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인 집에 오셨다.
그의 부활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그 제자들중에 도마라는 제자가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만났다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며,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의 마음에 가득 의심이 쌓여 있었다.

인간이 소유하는 믿음은 그 믿음을 갖게해 주는 사실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고로 믿음의 대상이나 확실한 사실에 의해 사람에게 믿음이 생성이 되며,
의심을 이기고 자신안에 믿음의 확신에 이르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나 그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로 부터 나타난 증거는
그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엄연한 사실로 이해되며,
그 사실에 대한 자기확신의 경험에 이르게 된다.

8일이 지난후에 다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거기에는 의심하는 도마도 있었다.
예수님이 의심하는 도마를 향해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바닥에 넣어보고 네손을 내밀어 내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활을 의심하였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그에게는 충격적이고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도마는 평소에 사실확인을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누가 자기에게 이야기 해준다고 그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신앙의 신비에는 사실이나 이성의 이해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있다.
사람의 두뇌의 이성을 통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인간 삶의 현장에 일어나는 일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식을 통해
그 사실을 납득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 상식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는 이성활동(감각에서 얻은 정보에 대한 이해)을 통한 지식습득이나 혹은 자기 이해관점안에서의 경험에서
얻은 견해를 자기의 세계관이나 인식관(자기판단)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런데 인생의 일어나는 일들중에는 그 상식이해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신앙에는 많은 요소들이 그 경계들을 넘은 부분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증명해 보이지 않는 영혼의 존재, 육체의 감각의 눈으로 인지 하기가 쉽지 않는 신의 손길,
죽음넘어의 사후세계, 영원한 차원의 세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의 영향과 현상, 원인을 알수 없는 일어난 현상들,
인간 자신의 두뇌의 활동이나, 자기 내면의 영역안에서의 이해와 활동들(마음, 정신, 영혼)등 많은 것들이 인간의 이해나 경험의 경계들을 넘어서 일어날수 있는 일들이 있다.

무엇이든지 자기경험을 통한 이해방식을 통해, 자기이해에 이르게 된다.
현대인의 세계관이나 이해방식은 증거나 증명에 의해,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 사실에 대한 자기경험의 과정을 통해 확신에 이르게 된다.
더우기 현대적인 사고방식안에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원칙이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기의 판단이나 경험이외의 일들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기를 싫어한다.
그렇지만, 상대적인 사람들의 판단이나 기준에 의해
엄연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하신 일들과
그가 인류에게 약속하신 사실이나 내용들은 변치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지구를 비롯한 모든 우주의 질서에 관여하시고 보존하고,
시간의 길이를 정해놓아, 그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인생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삶의 길을 살아가고 있으며,
언제가는 정해진 시간에 그들의 삶을 결산하기를 정해놓았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인간 구원을 위해 보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은 변함이 없이 받아들여야 할 사실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고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의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그 부활의 사실은 죽음을 향해 가는 모든 인류에게 확실한 소망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시는 영생과 구원에 대한 약속을 보장하고 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부활한 예수는 지금은 영원한차원(하나님의 세계)의 존재안에서 우주를 다스리고 있으며,
정해진 시간에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하였다.
(누가복음24: 1-6, 요한복음20: 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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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역의 우선순위

행전1:1-8
4.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전에 말한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얼마 안가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그후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우실 때가 지금입니까?” 하고 묻자
7.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것이 아니다.
8. 그러나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은 날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중에
무엇을 가장 우선시하고 살며,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안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할때에,
그 날들의 하루하루가 충실히 모아질때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리라.

사람은 어릴때에 하는 일과 청소년이 되어 하는 일과,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 각기 일이 달라진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는 기술이나 방법도 점점 성숙해지고 능력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인생의 각 단계마다 성장이나 성숙에는 변화나 전이로 인한
새로운 도전이나 거기에 응하는 자기 변화내지는 개선되는 자기정체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 모인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라는 역사적인 신적인 존재인
그분에게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에게 속해있는 모든 것을 내어 던지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르쳐왔던 바람직한 인생의 가르침과 하늘나라의 도리를 따르며,
그가 세울 이상적인 나라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따라왔다.

그런데 스승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가졌던 목표나 그들의 기대는
그들의 삶의 모델이었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다 날려가버린 허탈감에 있었으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게 되었다.

사람이 자기가 세운 목표나, 방향이 갑자기 사라지면 당황하고,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과 더불어,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오늘여기에 나타난 제자들은 바로 그런 인생의 딜레마에서,
자기들의 세우고 따랐던 인생의 삶의 목표수정이나
혹은 궤도이탈로 인한 방황을 통해
앞으로 자신들앞에 전개될 새로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부활하신 스승 예수를 만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과 다른 차원의 삶인 생명의 부활로 살아나셔서 나타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그가 지상에 있을시에 가르쳤던 하늘나라의 가르침과
인생을 살릴 좋은 뉴스에 대해 그의 자상한 교육을 통해
제자들이 온전히 이해하여, 확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그들과 함께 할수 없지만,
그가 약속하신 그의 분신이신 그의 영을 보내심으로
그 제자들을 새롭게 하며, 강하게 하며,
새로운 예수의 제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는 중에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하신다.
주님이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셨을까?
그렇지만, 제자들이 생각할때에, 예루살렘은 끔직한 곳이다.
자신들의 스승이자, 지도자인 예수님을 잃은 곳이다.
모든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모든 직업과 재산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라 갔는데,
그가 갑자기 죽음과 함께 자신들과 함께 할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제는 제자들은 고아들처럼, 방황하며,
애써, 공허하고 실망한 마음을 참으며, 그나마,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른 차원의 생명이신
자신들의 스승을 만나, 그 분으로 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을 삼고 지내고 있었다.

예수님도 죽으셨고, 그들의 따르는 사역도
모두 물거품으로 공중에 붕뜬 느낌을 가지고 사는 요즘의 제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겪는 변화무쌍한 현실에 안주를 못하고 지내고 있었다.
어디서 새로운 희망이 생길까?
하는 기대감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따라 나섰다.

제자들은 차라리 요한을 따라 나설걸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미 세례요한도 민중들속에 순교한 예언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제는 어디서 하늘의 메시지를 들을 것인가?
(이후에는 그들이 하늘의 메신저들이 되어야 할 사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와서 외쳤던 회개하라 주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외친 메시지의 메아리가 아직도 그들의 귓가에 맴돈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요단강가에 모여들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죄씻는 표를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들고오셔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부어주신다.
예수님의 보내신 성령은 만물을 소성케하며,
멸망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살리는 생명의 영이시며,
그분을 받으들여,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된다.

아직도 자기민족에 대한 희망을 품고, 망국의 한을 살아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아가, 주님에게 간청한다.
언제쯤이면,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시나요.

아직도 예수님이 전하신 하늘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에 골몰하여,
이스라엘 자기 민족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 까하며,
그리고 어떻게 성공하며 출세를 할까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 사람들 자신의 영혼에 있다.
사람들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은 자주 인간이 사는 삶에 일어나는 딜레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입히는데 관심이 있고
자기를 먹는 일에 관심있고, 자신이 소유하는 일에 관심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의 생명에 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소생인 사람들 자신이다.
사람들이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안에서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 하는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촛점이 모아져 있다.
로마의 압정하에 자기민족이 해방을 얻는 일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죽음과 멸망으로 향하는 인류구원에 있으며,
예수자신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복음이 다 증거되면, 그제야 인류역사의 끝이 오면
모든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때와 다르며, 사람의 기준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당시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국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걱정을 하고
하루 속히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관심을 넘어서는 더 큰 계획의 전개를 바라보신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시각은 인간들의 역사속에서 항상 가장 최선의 시기에,
이룰 그의 역사의 때와 기한을 주장하신다.
주님이 다시오시는 시간도 주님만이 아신다.

그의 때와 시간은 완벽하게 준비하신다.
인생도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은 자신의 때를 아는 지혜인데,
자신의 지혜는 자신의 인생안에 있는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준 기한내에 자신의 때를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오직 인생의 때와 기한은 그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인류의 시간표도 그의 권한안에 있다
그의 권한에 의해 모든 때가 시작이 되며 과정이 되며 완성이 되어진다.

그의 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의 분신이신 영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그의 약속에 따라 예수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이 제자들에게로 오신다.
인간속으로 생명과 능력의 영으로 오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속에 그의 영으로 임하신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살리는 영이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다.
그 하나님의 영은 인류창조와 재창조의 영이며, 능력과 지혜의 영이다.
그의 영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

성령의 역활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여 새로운 일들을 추구하여 이루어 낸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에서 오히려 성령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하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며,
그리고 인간속에 있는 나약함이나 부정함이나 불가능함을 극복하고,
인간갱신이나 생명변화를 통한 인간구원의 보증자가 되셔서
인간속에서 인간들과 함께 하며 주님의 때까지
인간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인간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생명의 전도에는
그 전도의 시작과 진행 역사의 사이클이 있다. 그 시작과 끝이 있다.

인간들속에 들어와 생명의 시작을 이루어 가는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부정함의 딜레마를 딛고
그가운데에 인간속에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심어,
그것을 가꾸고, 성장케 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과 권한을 회복케 하는 결론을 이루어 내신다.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살리는 주님의 복음의 전파는
성령이신 그의 영으로 시작이 되며 앞으로 그 끝의 완성을 이룰을 것이다.
이말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성령을 받아들인 각자 인생의 인생구원의 시작이며,
또하나는 죽음이라는 운명안에 처해있는 온인류에 대한 인간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두 명제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인류나 그 인류에 속해 있는 인생 각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분의 영을 통해 지금은 그분의 구원의 은혜받을 때요,
그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할때이다.
지금은 그의 복음을 전하며, 혹은 듣고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을때이다.
그일이 각 개인이나 인류전체가 해야 할 일중에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가지 일들이 항상 놓여 있다.
일상적인 일들, 필요한 일들, 정해진 생활의 규칙을 따라 해야 할 일등,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나 교제를 위해 해야 할일,
가정의 대소사등 일을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항상우리 앞에 널려 있다.
그런중에도 사람이 자신의 생명이나 영원한 미래에 대한 투자를 위한 영적인 일들은
항상 자신의 일중에서 최우선의 일인 것을 알고 거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생을 바람직하게 살아가는 비결중에 하나는 우선순위의 결정에서 지혜를 얻어야 하며,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과 일의 순서등을 자신의 사역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므로, 인생의 자신의 중요한 사역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자로서 질서있는 인생사역의 주인공이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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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대상; 하나님과 사람의차이

예레미야 17:5-8
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을 의지하고 나 여호와를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6. 그는 사막의 가시덤불 같을 것이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의 메마르고 염분이 많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7.그러나 나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8.그는 물가에 심겨져서 그 뿌리를 시내로 뻗어 더위가 와도 두려워 하지 않고,
그 잎이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며, 가뭄이 심한 해에도 걱정이 없고,
항상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은 자이다.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는 가에 자신이 믿는 바의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며,
그 의지하는 경우에 따라 인생의 삶의 차이가 있다.
무엇을 의지하는 가는 그 사람의 삶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준다.
물질(돈)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소유물로(돈이나 소유품) 모든 것을 판단한다.
세상의 것을(명예, 부귀, 권력, 권한) 의지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모든 것을 좌우하려고 한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인간이상의 존재에 대해 무시하며,
자신안에 갇혀서 사람의 한계에 부딪쳐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람이 볼수 없고,
이해할수 없고 가질수 없는 부분에 까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면서,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분을 의지하며, 무한한 그분의 자원을 활용하며 살아간다.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될이유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제한이 되어있고,
사람의 지혜나 모략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한치 앞을 예견할수 없는 인간의 자기한계는
인간자신을 의지하기에는 연약한 실체라는 것을 부인할 수없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다.
사람에게서는 도움을 기대하기 보다는 도움을 주는 대상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대하면 사람사는지혜를 얻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사람을 의지하다가
자신을 맡길만한 신뢰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되어,
그것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한계이며,
좌절을 안겨다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세력이나 권한은 인생의 자신의 호흡이 끝나면
주변인생의 도움을 의지하는사람을 돕는 그들의 삶도 끝이 나고만다.
그런경우에 사막에 심겨진 풀처럼, 갈급한 상태와
위급한 상태가 연속되는 경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일시적인 안락이나, 희망을 기대할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인생들이 자신을 기댈만한 힘이나, 세력이 되지를 못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왜 하나님을 떠나는 가? 바른 길이 싫어서, 의로운 생을 미워해서,
자신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그렇게 살게 된다.
그러면, 자기조절을 잃고, 방황하며, 결국 방탕의 길로 접어 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삶의 모든 과정이나 결과을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며
그 사람 자신스스로가 모든 것에
(인생의 자기한계를 넘어가는 것 까지/ 예: 미래, 죽음등)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는 인생은 사람의 자기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는 사람의 지혜나 능력을 신뢰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신의 호흡조차 마음대로 조절할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사막에서 가시덤불은 쓸모없는 가치를 나타낸다.
사막에는 물이 없는 곳이라, 사람들이 마실수 있는 물이 있는 오아시스여야 하는데,
그 신기루가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절망스런 환경이란 물 한방울 없는 삭막한 사막에 있는 가시덤불같은 경우일것이다.

인생의 종착역에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절망을 가져다 주며,
더이상의 소망을 기대할수 없게 한다. 죽음만이 기다리는 곳에 소망이 없다.
죽음뒤에 있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소망이라야 그 죽음을 이길수 있다.
사막에는 사람이 살수 없다. 사람이 살수 있는 곳은 물이 있는 곳이라야만 합니다.
물이 없는 사막은 사람이 살수 없다.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만 하나? 그는 창조주이며 만물의 주관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태어나 사는 것은 전적으로 보내어진 존재로 인생은 살아간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사는 삶이 많이 있다.
자신의 근원이 어디서 왔다는 것을 모르고 지내므로,
창조주를 모르고 살기에 그의 길을 찾을수 없으며,
그의 길을 거스리다가, 결국 나락의 길을 가게 된다.

고로 인생들은 자신들의 주인(창조주)의 지시에 따라야 행복하게 살수 있다.
그는 인생의 발걸음을 주장하시며, 인생의 미래를 인도하신다.
그는 인간의 쌓아놓은 업적을 허물기도 하시고,
분토에 앉은 인생을 높이 올리기도 하신다.
인생의 높고 낮은 자들의 자기위치를 세우며, 내려 앉으며, 인생의 자리를 인도하신다.

나무가 물이 많은 곳에 심겨지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수액을 빨아들여,
나무의 근력이나 세력을 펼쳐나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물이 없어 말라 비틀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무가 자라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나무가 푸르청청할수 있는 수자원이 풍부해야
나무가 건강하게 자랄수 있다. 사람도 마치 나무와같이
자신의 삶의 뿌리를 내릴만한 근본적인 인생의 철학이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이 살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길을 터득하게 된다.
사람들의 삶에 더위가 오는 경우는 물을 고갈시키는 일들이
사람들의 주변의 삶에서 무수히 일어난다.

정상적인 생활의 상태에서도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
건강한 생활의 원리나, 방법들, 인간관계에서 오는 사랑과 소망, 믿음에 관한 것들일 것이다.

이런 여러 필요한 요소들이 인간의 평범한 생활에서 고갈되는 요인들이 일어난다.
자기상실이나, 좌절케하는 인간관계(자신을 남용이나오용하거나,
자신에게 배신이나 상처를 주는, 마땅히 받아야 대상
(부모나 부부의 가족이나 혹은 친구, 우인등)으로부터 자신의 기대치에 못미치는,
쓸데없는 것에 소모케하는 낭비를 통한 자원의 고갈(시간, 건강, 열정, 상식적 자세의 상실등),

잎이 언제난 푸른 청정한 것은 나무에서 뻗어간 가지에서 자라는 잎들이
충분한 영양이나 수분을 공급받으면 무성하게 자라는 과정을 겪으며,
그 잎이 항상 푸르청정하게 된다.
사람도 올바른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면,
자신의 삶의 철학이 일관성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며 갖게되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철학에 성공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나, 원리들을 제공한다.

그래서 사람은 그 원칙이나 원리에 따르다 보면,
그 사람 자신이나 그의 삶의 모든 부분들은 잎이 항상 싱싱한 것처럼
항상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 말은 사람이 자기에게 맞으며, 충분하며,
만족할만한 상태의 자신이나 그의삶을 유지하게 된다.

가뭄이 심한 해에도 걱정이 없다.
즉 인생을 살아갈때에 위기를 경험할때에,
거기에 휩싸여 빠지지 않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된다.
인간관계의 위기, 소유물의 상실, 자기 표현이나 성취의 과정에서의 실패나
그로인한 절망스런 상황,
자기 기대나 소원의 무산이나 목표도달에 미달되는 경우등,
그런 위기에서 다시 재기할수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와 능력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여 더 강하고, 성숙하고, 보다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게 된다.

나무나 잎을 잘 돌보아 주면, 정해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 잎을 통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항상 열매를 맺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건강한 나무나 잎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듯이
좋은 사람, 혹은 건강한 사람, 더 나아가 자신있고
충실한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사람이 맺는 열매에는 시간과 노력과 기회가 합쳐질때에, 나타나게 된다.
이 세가지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창조주의 도움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창조주께서 사람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그 주어진 시간안에 노력하는 일은 사람 자신의 몫이다.
그렇지만, 노력하는 과정에도 그의 도움없이는 진행할수 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삶의 모든 경우에 적당하게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그 기회는 준비한 사람혹은 기회를 잡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렇지만 평소에 늘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기회,
즉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삶을 통해 열매는 따라 오게 되어 있다.
그말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창조주의 세계안에 있는 자연과 인생의 이치인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을 받는 다. 그 말은 창조주를 바라보며,
그분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마련한 삶의 형통한 원리나 이치를 통해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 자신을 찾고, 그분에게 와서
상(축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으로 부터 풍성, 충만하고,
넉넉하고, 넘치도록 있고, 그의 열심히 담겨있는 인생의 복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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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운데에서 구원받음

예레미야 35:18-19

18. 그때 나는 레갑집안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일러 주었다. “너희는 너희 조상 요나답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모든 지시에 따르고 그가 명령한 것을 다 행하였다.
19. 그러므로 전능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 나를 섬길 후손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위기를 당할때에, 그 위기를 잘극복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취직시험이나 입시를 앞둔 수험생은 다가올 시험이라는 위기를 보고,
그것을 자신을 업그레이드할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아,
힘들게 자신을 극복하므로, 그 준비하는 시기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거나,
혹은 보다나은 직장에 들어갈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남왕국 유다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든 국민이 나라의 패망을 눈앞에 보며,
파멸해가는 조국의 운명과 함께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온 나라가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그 심판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가족을 구원하고 있으니,
심판이 있는 곳에 동시에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본다.
그 가족은 대대로 조상이 섬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온 후손들이 가훈으로 그 명령을 잘 지켜오고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길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조상의 명령에 순종했던 레갑집안 사람들,
그들은 조상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졌다.
35:6절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집도 짓지않고,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를 재배하지 말고 항상 천막에서 살아라.
그러면 이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다.” 라는 조상의 지침을 받았다.

조상의 지침을 지켜왔던 그들은 생활의 불편이나,
삶의 고됨도 극복하고 그 명령에 따르는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한 가족이 이렇게 명령을 지키고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은 그 명령을 지켰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시켜서, 성전으로 그들을 불러,
한 방에 모이게 하여, 포도주와 잔을 내어 놓고,
그것을 마시라고 하자, 그들은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켰던 것이다.

사람의 신실함은 자신들이 받은 명령이나,
일관된 철학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하겠다.
신실한 사람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며,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법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나 사회가 건강하며,
사람이 살기좋은 곳를 이루게 된다.

신앙은 자신의 신실함을 지켜가는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그가 명하신 바를 충실히 따르는 것,
그것이 자신의 신앙의 발판이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의 근거가 된다.
신실함을 지켜가는 길은 결국 자신의 신앙의 신실함을 세우는 길이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신실함을 지키므로
자신의 믿음이 신실함을 보여주게 된다.

이스라엘은 온나라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그들은 범죄한 백성으로 살고 있다.
그런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거기에 살고 있는 레갑집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켜오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의 집안의 축복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축복하셨다.
그 멸망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신실한 백성들을 돌보시는 분이다.

위기나 어려움이 있을때에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잘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런 어려움들을 이길수 있다.
어려움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 신실하게 사는 것이 힘들다.
허지만 그런 신실한 가운데에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결국 자신앞에 놓인 그 어려운 과정을 넘어가는 때가 다가올것이다.
또한 우리의 힘에 한계에 도달할때에 좌절하기 쉽지만,
그때에도 다시한번 자신에 대해 원칙을 살펴보고,
자신이 세운 그 규칙을 향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약점이나 부족함에 스스로 한하지 말고
자신의 인간됨의 불성실함에 대해 스스로 포기하지 말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신실하심을 바라는 것은 그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며,
또한 신실하신 분으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실천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신실함에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자신에 대한 신실함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인간의 의로움은 제한이 있으며,
자기 자신의 의로서는 한계에 부딪친다.
고로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살펴보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르며
그분의 의에 의존하는 신앙을 지켜가야 하지 않을 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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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묵상하는 이유는

자신이 죽은 사건,
자신이 죄와 죽음에 대해 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묵상하는 것이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분은
이제는 죄와 죽음안에서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새생명의 부활하신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내면의 문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여,
그분과 함께 하는 영혼의 밀월의 여행을 떠나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멸당당해야 할 자신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부활을 전제하는 사건으로
자신의 옛자아와 옛신분의 사람이 죽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인류의 모두가 참여하여야 할 사건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인류의 죄의 문제를 청산하고 해결할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구원얻은 사람으로 날마다
그 곳에 가야만 하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안에 있는 무수한 허물과 옛사람의 죄성을 바라본다.
십자가에 못박힌 손을 보며, 그 손에 못을 박는 것을 상상하며,
자신의 허물과 죄악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힌 손과 발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성들을 박는다.
이러한 신앙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효력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우리의 상상은 하나님이 우리의 두뇌에 새긴 또 다른 영혼의 세계의 창문의 역활을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자신안에 있는 새로운 이정표의 역활을 한다.
옛자아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안에서 자신의 내면의 쓴뿌리흔적들을 들추어 내어,
십자가의 도에서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통해 우리들 자신안에서
새롭게 하는 그런 모습들을 전혀 다른 새로운 자아의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십자가앞에서 자신안에 있는 연약함을 본다.
자신안에 있는 죄의 나약한 자신의 상태를 보며, 죄의 깊은 영향력을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기억하며,
죄의 영향아래에 있는 죄인의 처참한 죽음을 통해,
자신이 거듭나야 하는 절실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본다.

하나님안에 있는 저주받은 모습을 본다.
자신안에 있는 죽음의 절망을 당하여 고통하는 예수님의 좌절의 모습안에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모습을 본다.
처참하게 찟기신 그분의 몸에서 나의 저주를 대신하여
그분이 그 저주를 지고 저주안에 있는 인간자신들의 죄와
죽음의 찌꺼기들을 불태우며,
절망한 자신들의 내면에 붙어있는 불안의 자아까지도 새로와 지게하는 그분을 본다.

자신안에 형벌받은 모습을 본다.
나 자신이 죄의 몸덩어리로 정과 욕심에 찌들려 있는 상태로 십자가에 나아가,
나대신에 못박히신 그분에게 나의 몸을 위탁한다.
고로 나는 그분을 통하여 자신의 영원한 형벌받음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깊은 안도감과 그분의 형벌받음의 깊이를 느낀다.
그래서 형벌받아야 할 나의 죄성이 전혀 새로운 구원얻은 영성으로 바꾸어져,
나의 옛자아가 그분안에서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
그 분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구원의 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의 십자가안에서 그분의 처절한 사랑과
하나님아버지의 가슴아픈 인간사랑을 생각한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아버지도 울고 아들도 우는
온 우주가 함께 고통하며 슬퍼하는 인간구원에 대한 신의 절규의 구원의 사건이다.
인간들은 그 십자가를 바라볼때마다
그 신의 탄식을 들어야 하며,
그 탄식뒤에 있는 신의 애절한 사랑을 통해,
아무리 절망스런 인간들의 고통이나 절망에서도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영원한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소망을 본다.
그분이 그렇게 인류를 사랑하고, 당신(너)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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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미가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앞에 나아가 높이 계시는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불에 태워 바칠 번제물로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내가 수천마리의 수양이나 강물처럼 많은 감람기름을 가지고 간다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실까?
내 허물과 영혼의 죄를 위해 내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바칠까?
8.사람들아 여호와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보이셨다.
그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며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너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다.

종교심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앞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 종교심은 하나님을 찾는 심정이며,
상대적인 존재인 사람이 절대자 하나님을 바라는 경배의 태도이다.
그 종교심은 자신의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 믿음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이는 것처럼여기며,
그분의 존재하심과 그분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배는 무엇일까?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때에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참 예배는 하나님앞에서 사람의 진실한 자세를 통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제사나 희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제사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시작이 되었다.
인간의 저지른 죄가 하나님앞에 그냥 나갈수 없어,
그에게 희생의 제사를 통해 나가게 된다.
구약의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예표로
그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동물들을 죽이므로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에 참여 하였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가?
구약은 전체가 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해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이 오심을 바라보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제사로 규정하고
그 제사를 통해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앞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섬김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사와 예배를 드리므로 섬겼다.
신약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잃어버린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해마다 3번은 꼭 하나님앞에 나가야 한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등의 절기에
하나님앞에 나가 자신을 신고한다.
그 백성들이 해마다 여호와앞에 나아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사명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앞에 나아갈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 없는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며 섬겼다.
그분의 초월성과 거룩성을 감히 가까이 할수 없는 분으로 여기고,
죄인들이 주님앞에 나아갔다.

그렇지만, 그분을 섬기려면 그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 내가 만난 하나님은 각자의 신앙고백에 근거가 된다.

무엇으로 그분을 알수 있을까? 그분이 알려주시는 계시를 통해서이다.
성경계시와 성령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성경계시의 주인공도 성령계시의 주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알아야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 분은 높이 계신분이다. 초월자이시다.
무엇이 그분의 계시를 알려주는 가?
기록된 메시지를 통해서 주님을 잘 알수 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계시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 계시된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수 있다.
그 기록된 말씀이 가까와 바로 나의 손에 있다.
그렇지만 기록된 메시지는 성령의 조명으로 읽혀져야 이해되며 믿어진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때에
온 이스라엘국민과 더불어 수만마리의 양과 수천마리의 소를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실상은 솔로몬이 왕이 되어 수천의 수양을 국가적으로 드린 제물보다
왕이 될 무렵에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볼 정치가로서의 겸손하게 엎드려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태도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사람이 내 허물과 내 영혼의 죄를 위해 가장 애써야 할 일이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물론 자신속에 늘 머물러 있는 죄책과
자신의 죄로인한 인간본성의 타락을 통한 자신의 왜곡된 상태를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것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허물은 자책과 자범죄에 근거를 두고있으며,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자기가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허물은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약점이나, 혹은 숨은 죄악일수 있다.
일상생활에 자기의 성향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경향으로 나가서,
그 에게 허물을 범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실수나,
혹은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서 오는 잘못 일수도 있다.
세상에 이런 잘못이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혼의 죄는 신앙인에게 더 영향을 준다.
그의 죄들은 마음의 태도이며, 하나님께 향한 자신의 방향성이다.
영혼의 죄는 내면을 살피는 것이며,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면의 죄가 무엇인가? 자신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은 죄이다.

신앙인의 맹점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실수나,
자기의 책임성을 무마하려는 경향이나,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가 아니라, 불평섞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죄는 자신의 깊은 심층에 있는 자신의 자아에서
나오는 자신의 그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잘못에서 나오는 죄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의 죄이다.
그 영혼의 죄는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지는 자신의 그릇된 편견이나, 태도이다.

사단은 우리안에 부정적인 생각을 심고,
그리고 또한 불의한 생각을 심고,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이간하는 일을 일삼는다.

그 사단은 또한 사람들에게 불안을 심는 일과 의심을 일으키는 일을 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부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을 갖게 한다.
그래서 우리안에 의심이 들어오게 한다.
불신이나, 의심이나 부정은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데 방해가 된다.
더 나아가 그 사단은 인간에에 교만을 심는 일을 또한 한다.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마치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갈수 있다고 착각으로 생각하게하며,
그속에 자신에 대한 과대한 생각을 갖게 하며,
그 생각에 자신의 교만한 마음으로 굳어지게 한다.

더나아가 사단이 우리안에 심은 어리석은 생각이나,
허망한 마음으로 우리를 미혹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생각중에 하나이며,
그런 생각은 또한 우리의 마음을 좌절하고 절망적인 생각으로 인도한다.

하나님과 욥과사이에 있는 욥의 잘못은
하나님앞에서 의로웠던 욥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욥과 하나님사이에 있었다.
모든 면에서 의로웠고 완벽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욥도 그 불안에서 벗어날수는 없다.
오직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평안의 은혜뿐이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가 기적으로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의 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백성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였는데,
어느 날 물없는 광야에서 돌반석을 보고
그것을 명하여 물을 내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지팡이로 두드렸다.
사소한 행동같아 보였으나,
그 일은 모세가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자신의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의외로 자신의 인생을 막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할수 있다.
사람이 생각할 때에,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숨은 죄악의 흔적도 그런 역활을 할수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겸허하게 인간세계안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지략과 힘으로는 알수 없는 변화무쌍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길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줄 알면, 자신은 영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영적인 사람은 영의 사람으로,
영의 욕구를 들어주고, 채워 줄줄아는 사람이다.
영혼의 욕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영의 하소연이다.
영적인 호흡이나, 영적인 활동이나, 영적인 양식의 채움을 주어야 한다.

성경을 먹는 일은 자신의 영혼을 먹이는 일이며,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을 그 말씀 안에서 영양분을 캐내어 먹어야 한다.
말씀의 분별(이해, 순종)을 통해 말씀의 비밀을 깨달은자가 된다.
믿음의 비밀을 깨달으려면, 말씀의 세계를 파고 들어야 한다.
말씀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이다.
루터는 영혼의 공허를 말씀의 연구가운데에서 찾았으며,
칼밭트의 신학도 말씀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로마서연구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발견하고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경에 대한 책들을 연구하기보다는 성경을 알도록,
성경을 먹도록 힘쓰는 일이 자신의 영혼에 필요하다.
성경은 먹어야 알아지는 말씀의 책이다.
성경을 먹어야 믿음이 온다.

성경을 분석하거나 연구하는 것에는 문자에 혹은 문학적이나 철학적인 논리에 빠지기 쉽다.
문자만 보이고 영이 보이지 않는다.
도덕률이나 율법이 보이고 성령의 법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데는 기도를 하는 일이 또한 중요하다.
기도의 비결을 배우기보다는 기도를 자주 하는 것이 기도에 정통하는 지름길이다.
기도는 기도하므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이다.
기도를 하는 만큼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경험한다.
자신의 기도의 세계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 만큼,
실질적인 신앙의 힘이 된다.
기도의 세계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기도에는 많은 단계의 기도의 단계가 있다.
묵상의 기도, 능력의 기도, 인생의 삶을 묶고 푸는 기도,
영적인 싸움의 기도, 축복과 저주를 다스리는 기도,
치유와 능력의 기도, 믿음을 키우는 기도, 금식기도등 능력의 기도도 있다.

예수는 영혼의 양식이다. 그를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산다.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일을 쉬임없이 해야 한다.
살은 그의 몸을 의미하며,
그의 몸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구세주가 우리안에 오셔서
그는 우리와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와 우리와의 관계는 생명의 몸인
그 의 몸안에서의 영적인 연결로 영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몸은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우리의 사는 일상의 근거가 된다.
즉 그는 우리를 위해 살았듯이
우리의 삶은 우리가 그의 몸의 일부인고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선함)을 지키는 것이다.
자신의 선함은 그분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그분앞에서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의를 좋아하며, 선한 일을 좋아하신다.
의로움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계속적으로 도를 닦듯이 쌓아놓는 영적인 성장과 인격성숙의 과정을 통해,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수 있듯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농부가 씨를 심어놓고, 가을의 추수를 기대하며
끊임없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한다.

그 열매를 통해 기독인의 사회적 정의와 상식적인 덕을 유지해야
기독교의 사회적인 가치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필요한 곳이 되도록
우리의 신앙의 가치와 의미를 높이는 것은
신앙의 역사성과 사회적인 고도의 덕목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변치않는 사랑을 원하신다.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변함이 없는 신실함을 보이는 것이다.
한결함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며,
심지가 견고한 자가 가질수 있는 평강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세는 자신이 믿은 바에 대한 확신하는 것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철학이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는 태도이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겸손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겸손한 덕은 그리스도인이 가질수 있는 가장 큰 덕목이다.
겸손함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태도이다.
겸손은 모든 주님의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덕이다.
겸손은 천국백성의 특징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고,
그분의 섭리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은 365년의 생애에서 매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힘쓰며 살았다.
그는 고대의 시대에 의의 복음을 전파하며, 동행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당시에 악이 횡횡하고 어둠의 세력들이 있는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의를 지키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신앙의 관계를 지키며 살아가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서
이제 복음을 듣고 믿고자 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3가지 덕목을 즉 의 와 사랑과 겸손을 지키며 하나님앞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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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기변화


인생은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도달해야 할 인생의 상태를 발견하려고 되어가는 존재이다.
날때부터 다 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하여 자라며, 변화하며, 자신을 키워가는 존재이다.
이 자람이나, 성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변화를 스스로 인식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변화를 적절히 수용하여 자신을 탈바꿈하여,
자신의 살아가는 인생의 현실에 맞는 자신을 만들어 간다.

사람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먼저 자신이 누구인가하는 신분에 대한 자기개념을 갖고 있게 된다.
자신의 신분은 자아본분을 나타내며,
자신을 표출하는 자기이름이다.
신분에 대한 개념은 자기속에 있는 자아에 영향을 주어,
그자아에 대한 의식으로 나타난다.

신분이 달라지면, 사람은 자신의 의식속에 있는 자신에 대한 의식개념이 바뀌어진다.
의식화가 이루어지면, 그의식화에 따르는 사고 개념을 갖게 되며,
그 사고화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곤 한다.
자기의식속에 있는 자아는 자기에게 자신이 만든 자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처럼,
내면의 의식속에 보여지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사고방식이 달라지면,
그 사람의 습관을 주장하는 자신의 습성이나 체질이 달라진다.
한국에 살던 사람이 미국에 가서 살던지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살게 되면,
그들의 의식이나 체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체질이나 의식등 사고방식이 적응해가는 지속적인 습관에 의해 서서히 달라진다.
사고방식의 변화는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 적응해가는 생활의 변화를 초래한다.

신분에 대한 변화의식/신분에 대한 자아의식의 전환은
자신에게 중요한 인간변화의 근본적인 상태를 말하며,
자신의 정체감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자신을 자유인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과 자신이 노예로 생각하며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한다.
자신이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변화를 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자기발견이며,
자기 정체감의 근본적인 의식변화이다.

크리스챤의 신분이 하늘나라의 왕자로 혹은
왕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신분의 차이는
봉건시대에서는 절대적인 차이를 말한다.
인간의 신분은 자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신분에 대한 자기정체감을 갖게된다.
신분의 변화는 권한에 대한 변화이며,
자신의 신분을 통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분에 대한 정체감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자신이 아직도 죄의 노예로 살고 있으며,
죄와 사망의 법아래 살고 있는 세상사람들의 신분에 대한 차이와
별로 다르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럴때에는 자신의 신분에서 오는 권한이나 유익을 활용하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에 갇혀서 진정한 자유인의 신분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죄의 노예로 사단의 영향권아래에서,
옛자아의 저주와 죄악의 세력아래에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로 하늘나라의 자녀의 신분변화를 가져왔다.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자아로 변화를 받아,
그 자아의 신분변화를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되며,
그 신분성품변화안에서 자기자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받게 된다.
더나아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하늘나라의 시민이며,
예수와 함께 하는 만국의 통치자가 된다는 상속자의 신분의 의식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세계의 능력과 권한에 동참하게 된다.

크리스챤은 두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다.
그 두나라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이다.
하늘나라는 지금은 영의 나라로 자신안에 있는 영적인 생활과
하나님의 약속안에 있는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참여에 대한 기대감을 대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지상의 나라는 지구상에 많은 나라들중에 자신의 땅의 조국을 갖고 살며,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책임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크리스챤의 두 나라의 시민의 활동을 정상적으로 산다면,
정비례적인 활동으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와
두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자기역활을 하며 살게 된다.

왕자와 거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하루 아침에 왕자와 거지는 서로 각기 서로의 삶을 살기로 하고,
자신들의 신분을 바꾸는 일을 한다. 왕자는 거지옷을 입고, 거지의생활을 하는데,
영, 거지행세가 어색하기만 한다.
거지는 하루아침에 왕자의 옷을 입고, 왕자행세를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을 경험한다.
서로 비슷한 아이들이 신분을 바꾸어 생활하는 일이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알수 있다.
신분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그 사람의 상태나
근본에 대한 자신이 갖고 있는 삶의 자세에 영향을 준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확인에서
자신안에 있는 노예나 거지근성에서
하늘나라의 왕자의 신분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자아의식들중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자의식이 있고,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아 형성된 자신속에 있는 초자아의식이 있다.
그 두 자아의식들이 서로 어울려져 생각하고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자기관점를 연출한다.
그런 자아의식은 생각하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으로
모든 일들을 자기자신이 갖고 있는 관점(눈)을 통해 해석하고 표현한다.

의식변화는 그 자아의식에 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의식의 변화는 자신의 삶에 대한 전망의 변화와 비전의 변화를 가져온다.
또한 의식변화는 생각의 변화와 정신의 변화와 그리고 영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런 변화들은 지속적인 의식의 시스템의 변화추구
(예를들면 성경의 가르침들의 집중적인 연구로 자신의 의식시스템을 구축함)를 통해
각각의 영역안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 의식개념의 예를 든다면, 가령 역사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역사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 사회나 문화에 대한 모든 활동에 대해 해석하며,
자기의 해석에 따라 그 활동들의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성을 갖고 있는 크리스챤의 의식이라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나 문화적인 활동들에 대해
사회적인 참여의식(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짐/예:세계화와 환경오염의 문제등 )과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나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
(예: 국가를 위한 기도에 대한 책임)을 갖고 살아간다.

체질변화는 자신의 체질, 혹은 기질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호 불호의 경향을 바꾸는 것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습성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새로운 체질로 체질화한다.
사람의 체질은 자기몸에 붙어 있는 자신의 기질을 말한다.
자신에 맞는 기질은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우울질등 기본적인 여러 체형의 기질들이 있다.
이런 체질들은 자신의 성격에 의해 만들어 진다.
또한 성격의 표현유형에 따라 외유형이 있으며,
내성적인 성격도 있고, 변형특이성격형도 있다.

그런데, 크리스챤의 신앙체질은 자신안에 있는 내면의 기질보다는
외형적인 경험이나 환경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자신의 신앙의 형성이 별로 어렵지 않은 환경이나
또한 신앙때문에 겪는 인생의 굴곡이 없는 온상에서 자란 경우는
나중에 작은 시련이나 고통에도 쉽게 좌절하고 낙망하기 쉬운 약한 체질의 신앙을 갖기 쉽다.
또한 어느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신앙을 통해
무엇이든 형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어려움앞에
스스로 신앙을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다.
모태신앙으로 신앙을 갖은 사람은 부모들의 배려와 도움으로 신앙을
자연습득하여 전반적으로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수 있지만,
어려운 시련을 만나면 홀로 서기에 힘이 들때가 있다.
물론 오랫동안 몸에 배인 신앙의 저력으로 극복할수 있지만 말이다.

고로 크리스챤들은 오히려 시련이나 역경을 통해,
더 강한 체질형의 신앙인으로 살아간다.
평소에 시련을 겪은 신앙인들은 자신앞에 다가오는
삶의 시련이나 고통을 잘 견디며, 신앙으로 극복한다.
특히 신앙의 고백이나 표현때문에 핍박받는 지역에
살고 있는 크리스챤들은 가장 강한 체질의 신앙의 소유자들이다.
저들은 웬만한 시련이나 고통에 대해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다.

끝으로 크리스챤의 생활변화는 자신의 체질변화를 통해
자신의 습관이나 행동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생활의 변화를 생각해본다.
고로 크리스챤의 자기신분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 의식의 변화는 체질변화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체질변화는 습관의 변화를 가져오며, 또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행동의 변화는 자신만의 특유의 그리스도인 다운 생활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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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잠언 1:1-7
1.이것은 다윗의 아들인 이스라엘왕 솔로몬의 금언이다.
2.이것을 쓴 목적은 지혜와 교훈을 얻게하고 깊은 뜻을 지닌 말을 깨닫게 하며
3.모든 일을 지혜롭고 의롭게, 공정하고 정직하게 행하게 하고
4.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를 주며 젊은 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함이다.
5.이미 지혜있는 자라도 들으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분별력이 있는 자도 좋은 교훈을 얻어
6.금언과 비유와 지혜있는 사람들의 말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의 참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이 얻는 지식이나 지혜는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주시는 교훈과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는 교훈으로 부터 온다.
인생은 삶의 경험을 통해 지식를 얻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받는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지혜를 구한 사람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역대왕들중에 가장 국가가 융성할때에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리더가 되기 위해, 하늘이 베풀어준 지혜가 필요하였다.

솔로몬은 지혜를 얻기 위한 정성어린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그 지혜를 얻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뿐 아니라, 부귀와 영화까지 얻혀 주셨다.
인생이 지혜를 얻으면, 그의 인생의 삶이 보이며, 성공하는 인생을 사는 비결을 배운다.

지혜를 얻은 솔로몬은 많은 지식을 논할줄 알았다.
그 지혜의 힘이 그로 하여금 지식을 습득하는 법을 깨닫고,
지식을 축적하는 법을 알기 시작하였다.
지혜는 인간이 지식의 축적으로 얻어지는 것이아니라,
인간의 두뇌와 그 모든 지능은 천문학적인 숫자인1000억개의 신경두뇌세포와
100조개의 신경회로네트워크(시냅스)에 의해 개발되어지는 두뇌의 활용은
신의 영역에 속하여, 그길을 열어보여주어야만, 그 능력을 십분발휘할수 있다.

솔로몬이 지혜를 논하고, 지식을 습득하여, 당대에 가장 뛰어난 현자가 되었다.
그의 소문은 멀리 남방에 살고 있는 여왕의 귀에 까지 전하여 졌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배우고 싶어 그 먼 여행길을 마다않고,
많은 금은 보화의 선물을 가지고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왔다.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 지혜의 선생이 되었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지혜를 활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으로 부터 왔으나,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보다 자신이 받은 지혜에 몰입하다,
자신의 지혜의 한계에 다다르게 된 것이어서,
가장 지혜로운 자의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그 지혜를 소유하고 활용하기에는
인생의 타락함과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지혜가 아무리 출중하여도,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서는 지혜를 바르게 사용할수 없다.

선각자는 먼저 깨달은 자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하는 세계너머에 있는 것이나,
현재의 것을 넘어가는 미래의 세계에 대한 사건이나 개념들을 깨달아 알아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므로 유익을 준다.
또한 어려운 이치나, 복잡한 원리들을 이해하는 자는 지혜가 뛰어난 자이다.
항상 인간이 속해있는 사회나 문화는
그들 선각자들이나 지혜자들에 의해 움직여 지며, 인도되어진다.
고로 지혜에 대해 앞선 사람들이 일반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리더한다.

당대의 석학의 지혜는 학문을 통해 인생의 이치를 터득한 사람의 지혜이다.
학문의 습득을 통해, 인생의 진리에 이르는 자는 많지 않으나,
그것 또 하나님의 지혜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석학은 자신의 연구분야에서 자신의 알수 있는 지식의 체계에서
얻을 수 있는 전반적인 지식의 보고안에서
인생에게 유익을 줄수 있는 지혜를 캐내어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을 한다.

창조적아이디어는 인간에게 필요한 생각을 주며
인간사회에 유용하고 발전적인 생각을 가져다 준다.
그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평소에 논리나 지혜에 대해 궁구하며,
자신의 생각하는 영역가운데에, 떠오르는 새로운 생각이나, 독특한 아이디어로 생겨난다.

인간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비판적인 정신이 필요하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위한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현재의 이론에 대해 비판하여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여 나간다.

발명의 왕, 천재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발견하여
여러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다.
그들의 그 지혜는 그들의 열정과 함께 빛을 발한다.
모든 발명의 천재들은 연구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로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가꾸어진다.

하나님은 태초에 지혜의 천사를 만들어 세웠다.
그런데 그 지혜의 천사가 스스로 높아져 교만이 극치에 달해
결국 가장 수치스러운 사단이 되었다.
그 사단은 거짓 지혜로 인간들을 오도하며, 그릇된 길로 빠뜨린다.
어둠안에 어둠의 모략이 있다.
그 어둠의 지혜는 사람을 악하게 하며, 타락시키는 데 사용이 된다.
그 지혜에는 교활함이 있어 사람들을 오만과 교만함과 멸망함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지혜이다.
또한 그 지혜는 인간을 그릇되게 하는 사기, 속임, 술수, 거짓등은 어둠의 지혜이다.
그 지혜는 인간의 눈을 흐리게 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을 혼란케하여 옳고 그릇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반면에 지혜는 빛의 지혜가 있다. 그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 지혜는 의의 지혜이며, 생명을 얻게하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겸손함에서 배울수 있으며,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을 얻게하는 생명의 지혜이다.
그는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그는 죄없으신 분이나, 죄있는 자들의 죄값을 담당하여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분 안에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지혜가 있다.
그분이 인간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십자가안에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지혜가 있다.
그것이 또한 사람을 옳고 바르게 하는 의의 지혜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데 능하게 하는 것은 지혜와 의의 특성외에 공정성과 정직성이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그 말은 하나님은 의에대해 공정하시고, 죄에 대하여 엄하게 정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이 세운 의는 영원하다. 그의 의는 그의 원칙을 지켜가신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놓으심으로 인간의 불의를 해결하고
자신의 의를 지키신 분이다.
따라서 그의 심판 또한 공정하게 모든 인류에게 적용이 되어질 것이다.
이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모두가 공정하게 그의 판단을 받을 것이다.
의롭고 바르신 하나님의 지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인도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자녀들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며, 시련과 역경가운데에 있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성품이 강직하시고 정직하시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정직하게 창조하셨으나,
인생들은 사단의 유혹으로 그에게 범죄하므로,
인간의 문제는 복잡하게 되었고, 모든 하나님의 질서안에서 사람들 자신들이 왜곡되게 되었다.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 정직은 마음을 바르게 하며,
그마음의 힘을 강하게 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여,
결국 어느 때에도 떳떳이 자신이 하는 일을 내세우게 한다.
마음의 정직은 태도의 당당함을 제공한다.
정직의 태도는 바른 자세의 확고한 인생철학을 갖게 하여,
결국 그 자세로 자신이 하는 일을 강화시켜준다.

어리석어지는 것등은 어린자들이 가지기 쉬운 자질이다.
왜냐하면 인생이 어린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순수무구할지라도 인생이 타락한 인류의 후손이기에
태어난 인생들은 끊임없이 교육의 힘으로 깨우침을 받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지혜의 길을 얻고, 지혜로와지는 것이다.
지혜의 시작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인생에 이르게 된다.

젊은이들은 학문이 필요하며, 지식의 습득을 통해,
판단력이나 분별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잠언의 지혜는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으며,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삶의 적용과 지혜의 원리들을 제공한다.
젊은이들이 잠언속에 있는 지혜를 배우므로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수 있다.
거기에는 대신과 대인관계의 처세와 부와 영화와 물질사용의 올바른 태도와
인간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인생철학과
그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일정한 바른 자세와
그 안에서 자신이 행복하게 되는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지혜있는 자에게 지식의 힘으로 그 지혜를 빛나게 하여,
그가 가진 지식을 현명한 것으로 바꾸어 활용한다.
학문이 있는 자가 학문을 하는 것을 알고,
그 학문을 연마하므로 더 높은 지식에 이르며,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지혜로와 질수도 있다.
인생은 배우는 것 만큼 성장하며, 성숙해진다.
평생을 배우는 자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있는 인생의 태도이다.
지혜로운 자가 옳고 그릇 것을 판단하고,
일의 가치나, 우선순위의 가치기준을 바로 정해, 옳은 일을 해나간다.
좋은 교훈은 지혜자에게서 나온다.

금언은 금과 같이 인생들에게 귀중한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런 금언은 역사와 과거의 사람들로부터 배울수 있다.
그 가치는 그들의 살아온 과거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유는 감추어진 것으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의 세계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교훈들을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생활의 이야기의 비유로 풀어 설명하셨다.

지혜있는 사람들의 말은 지혜있는 자가 알아 듣는다.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그분의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서는
그분으로부터 지혜의 영을 받아야 그 말씀의 뜻을 깨달을수 있다.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데
그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통해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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