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인간의 나약함과 회복

청교도의 시대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준 사람중에 하나인 리챠드 시브스는
상한갈대와 같은 인간의 글에서 영적인 회복과 영적인 격려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즉 그의 은혜의 사역안에서 연약한 자신들이 회복할수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1.갈대와 상함에 대해
구약 이사야예언자은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은혜의 사역을 할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사역은 상한갈대를 꺽지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이룰것을 알리고 있다.

예수님의 소명은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오신 사역을 통해,
고난을 겪는 사역이었지만, 그사역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의 사역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벌어진 관계를 화해케하는 사역이다.
성도들의 신앙과 구속받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체결된 조약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구주로서의 사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수님사역의 방법에서, 예수님은 화려하게 사역을 하지 않고
겸허하게 그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그의 사역이 마치 상한갈대를 꺽지않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도 끄지 않는 자비의 사역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약한 존재로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개종이후에 상한갈대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램은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상함의 의미에서, 인간의 상함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할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며,
인간의 죄로인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의 죄와 비참은 인간을 상함으로 이끌어 인간자신에게는 소망이 없다.
오직 가난한 심정으로 구주를 바라보고 자비와
약속된 은총을 갈급해 하고 사모하는 길밖에 없다.

상함의 선한효과에서, 인간이 겪는 상함은
인간자신이 개종하기전에 가지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앞에서 교만하고 높아진 생각들로부터 자신의 상태를 바로 보게하는 요인이 된다.
인간이 자신안에서 방황하며, 나그네로 살던 습성을 좋아하며,
탕자와 같은 상태에 빠진 채 살아간다.
이런모습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데 둔하고, 도피하고픈 심정을 나타낸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범죄자와 같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보다는 교묘히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이 인간의 상함은 예수님에게 인간을 향한 높은 댓가를 치르게 한다.
이것은 복음이 복음이 되며 왜 도덕성이 효력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로인한 상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받지 못하게하지만, 그죄와 같은
인간의 벌거벗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보다 감사하게 하며, 오히려 인생을 열매맺게 한다.

인간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행과 상함은
인간에게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인간의 타락이나 배교은 처음에 인간에 죄를 정하지 않으나,
개종이전에 인간의 오만한 생각에 대해 법의 채찍을 감당하지 못한다.

성령의 인간을 낮추게 하는 사역은 인간에게 어떤 고통과 함께 죄를 상기시키지만
그가 인간을 성화시킬때에 치유와 정화을 하게 한다.

개종이후에 인간은 자신의 상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인간자신이 강한 참나무가 아닌 나약한 갈대라는 것을 알게 하기때문이다.
비록 갈대같은 인간에게 상함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자신의 성품안에 있는 교만함을 상기시키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비를 통해 살아가도록 한다.

그런 상함은 강한 자들이 흔들리고 상하는 것을 볼때에,
나약한 크리스찬들을 좌절하지 않게 해준다.
베드로는 결코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한 자신의 강함보다,
더 큰 시련앞에 당한 비참함에 빠져 쓰디쓴 눈물을 흘렸다.
이런 예는 교회안에 일어나는 좌절이나 상함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이 위로받지 못하는 영웅적인 행위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상함에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인간을 상하게 하는
그의 심판이 행사되면 아무도 그심판을 견디어 낼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그런 심판을 겪으므로,
얼마나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불경겅한 영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모르는 불경건한 영들은 마음을 애통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참한 존재라 비난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한 사역으로 일을 하신다.
인간이 본성으로 은혜를 받고, 은혜를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불순종과 치유받기 싫어하는 속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Richard Sibbes's The Bruised Reed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험을 이기는 사람

누가복음 4:1-13 예수님의 시험받으심
1.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2.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는 몹시 시장하셨다.
3.바로 그때 마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
4.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사람이 빵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라고 쓰여있다.”
5.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 잠깐 사이에 셋상의 모든 나라를 보여주면서
6.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7.그러므로 네가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이 네 것이 될 것이다.”
8.그때 예수님이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쓰여있다.”
9.또 다시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 보아라.
10.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니
11.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라고 쓰여있다”
12.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성경에는 ‘주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하고
대답하셨다.
13.마귀는 이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적절한 시기가 올때까지 잠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인도를 따라,
선구자였던 요한에게 받으신 것이다.
인간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주님이셨지만,
그는 인간 요한에게 자신을 숙이고, 하나님의 계시적인 드러내심에 순응하셨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자 그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에게 충만하신 성령의 임재가 함께 하셨다.

그가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그가 자신에게 향하는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신에게로 집중하는 것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하나님에게로 촛점을 맞추게 된다.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자신안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하나님중심의 태도로 그의 인도를 따르는 상태이다.
성령충만은 자신에게 촛점이 맞추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촛점이 맞추어, 자신이 하나님의 채널에 맞추어 살아가는 상태이다.

사명을 감당하기전에 먼저 자신을 이길수 있는 단계를 거치는 것은
공적인 일을 하기전에 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상태에서
자신을 공적인 일에 맡길수 있는 단계로 나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받은 시험은 사사로운 일이나 자기중심적인 사고태도에서
타인들을 위하는 태도로 나가는 전단계로서
주님은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사명자이심을 보이셨다.

인생에는 여러가지 시험이 있다.
시간을 통해 오는 기다림의 시간들, 혹은 일정기간의 훈련을 거치는 과정들이 있다.
전문적인 일이나 기능을 습득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요하며,
보다 나은 단계에나, 상급의 상태로 옮아가기 위해 여러가지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인생의 삶의 현장에 곳곳에 자신을 훈련케 하는 역경이나, 고난의 기간이 있다.
지도자를 세울 때에도, 사람을 검증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시험을(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 이길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때로는 은혜가 충만한 곳에 여러가지 시험이나 시련이 놓여 있기도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는 편에서 사람들을 돕고, 세우고, 그리고 인도하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편에서 사람들을 훈련하는 과정을 통과하게 인도한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다. 금식은 자신을 이기는 지름길이다.
금식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이다.
인간이 금식을 통해 자신(육성)을 이기고 자기한계에 부딪치며,
그안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에 의존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선순위에 맞추어 자신안에 육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을 접촉하는 영성을 이루게 한다.

반면에 사단은 인간을 시험에 빠뜨리고, 시험에 지게 유도한다.
인간에게 다가와 여러 가지로 인간을 유혹하며 미혹한다.
때로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거나, 혹은 두려움을 주어,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어리석은 가르침이나,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미혹한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그의 아들의 신분이나 권위를 걸고 유혹을 한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걸고자 하는 시험제안에는 상당한 전략과 모략을 갖고 접근한다.
고로 사람들은 그런 유혹이나 시험을 이기기가 쉽지않다.
그러므로 시험에 임하는 태도나 자세는 시험의 의도를 잘파악하여,
그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시험에 드는 대부분은 자신속에 있는 걸림돌과 같은 편견이나
사로잡힌 생각때문에 그렇다.
예를들어 초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쉽게 세상으로 넘어지는 것은
그만큼 세상적인 유혹이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태도등이 강하게
그들자신에게 다가와 영형을 주므로,
쉽게 세상의 그릇된 습성에 빠져(자신이 알코올에 약한경우에
쉽게 알코올 중독에 돌이키게 되듯이말이다)세상에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금식하신 상태라, 가장 음식에 대한 굶주림이 있는 상태였기에,
빵은 그에게 절실한 육체적인 요구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예수님에게 그 자신을 위해서는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지 않는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앞에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여, 범죄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시험을 물리친다.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이나 시험의 도전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방어하시며,
시험을 물리치신다.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며, 하나님의 뜻의 선언이다.
그 말씀은 예언되고 약속된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의 사역이 나타난 하나님의 언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로고스로서의 말씀을
자신의 내면화를 통해(레마의 말씀:자신에게 주어진 말씀)
자신이 당하는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안에 있는 믿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내면화된 영이요 생명인 말씀)은
자신의 믿음을 받쳐주는 버팀목의 역활을 하며,
여러가지 시험(사단에게서 오는)을 물리치는 공격용무기로 활용이 된다.

마귀는 인간에게 자신의 허구한 것을 과장하여, 유혹하며,
세상의 여러가지 것으로 인간을 이끌어 허왕되게 살도록 유도한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 하루 아침에 출세하려는 이들,
과정없이 목표에 도달하려는 이들이 있다.
마치 그들은 세상의 것을 쉽게 얻을수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중에는 항상 3가지 시험을 조심해야 하는데,
세상의 물질세계를 세속의 눈으로 보는 안목의 정욕과
자신속에 있는 나약한 육체의 욕구에 쉽게 자신을 충동하게 하는 육신의 정욕과
자신을 허왕된 세상을 바람잡으려듯 자신의 세상영달에
뿌리를 둔 생각이나 태도에서 나오는 자신안에 있는 이생(이세상)의 자랑거리이다.
모두가 세상적인 유혹으로 허왕된 마음에 부딪쳐
자신을 옭아매는 시험의 수단으로 자신에게 다가온다.

헛된 꿈을 갖고 사는 이는 허왕을 좇아가다. 패가 망신한다.
사단은 자신이 교만하여, 저질른 죄의 대가로 그의 아름다운 지위가 박탈되어,
자신의 위치에서 탈선한 자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양 착각하며, 행세를 한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헛된 꿈에 부풀게 하여,
자기와 똑같이 망하게 하는대로 이끌어간다.

주님은 마귀가 거는 시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용하셔서 물리치셨다.
말씀은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통해 바르게 인용하며,
해석하며, 적용할때에 말씀의 본뜻이 살아나며,
그 말씀이 자신에게 적용이 되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살아있는 주님의 메시지로 자신에게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허왕된 꿈을 부추기는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삶의 목적의식이 있다.
성도들 자신의 삶의 목표는 부귀영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기성공에 도취되어 그것을(세상의 욕망들, 성공, 부귀영화)
좇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데,
그 목적은 자신의 생애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주님의 뜻하심을 이루며, 그안에서 자신의 도달할 자기완성과
자기가 해야할 자기사명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가장 쉬운 길(죄를 짓는 일이나
인생을 허비하는 일은 쉬운 일)로 빠지도록 이끌어 간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길은 모두에게 한번 주어진 인생이며,
결코 모두에게 쉬운 길은 아니다.

그리고 지름길보다는 길게 놓여진 마라톤의 경기코스와 같이
시간의 과정을 겪어야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도 시간이 필요하며, 일의 성취도, 노력의 투자가 필요하다.
시간과 노력이 투자함이 없이 성공이나 소득을 얻으려는 것은
헛된 것을 좇아가게하는 것이다.

때로는 마귀는 쉬운 길로 인생들을 인도하여, 망해가는 쪽으로 유도한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라는 것을 유혹한다.
사람들이 과대망상(지나친 자기능력과시)이나, 허왕된 꿈
(벼락부자, 헛된 명예와 뱌락출세만을 추구하는 태도)은 추구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건강하게 하며 사는 생활을 이다.
그렇지 않고 그런 헛된 것들을 추구하는 인생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의 손에서 자기가 추구하는 허왕된 것들은 쉽게사라지게 마련이다.

모든 인생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있으며,
각자 인생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구체적인 리가 있지만,
동시에 인생자신이 감당해야하는 일들이 있으며,
옳은 것을 선택하며, 결단하여 이루어가는 책임이 있다.

인생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은 당연히 인간이 갖추어야 할 순종과
겸손의 근본적인 태도와
하나님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를 요구한다.
또한 인생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책임지는 태도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실수는 자신이 편리하게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시도이다.
신앙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돕는 역활을 한다.
신앙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도움아래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두어야 할 것이다.
목적이 변하여 수단으로 전락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을 목적으로가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는
신앙인 에게 자신이 주님을 믿고 주님을 중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기가 주인노릇하는 것과 같다.

그런 태도는 자신의 신앙적인 활동이나 봉사를 조건부적인 신앙의 태도로 일관 하기 쉽다.
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쉽게 낙담하고,
더나아가 신앙의 깊은 단계로 나가지 못하는 얕은 신앙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기복적인 신앙의 맹점은 자신의 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신앙을 세우려는 것이며
그런 신앙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항상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이와 같은 유아기적인(자기에게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이나 타인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태도) 자아중심의 신앙에 머물게 한다

그외 잘못된 신앙의 폐해중에는
종교적인 오용이나 남용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며,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릇된 영적인 가르침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하게 하기도 한다.
편협적인 신앙관은 자기안에 갇힌 소아적인 이기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신앙형태가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형식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시에 살고 있었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신앙이나 종교적인 행태에 대해 많은 책망을 주셨다.
당시에 조상들로 부터 받은 하나님의 율법에 철두철미한 종교인들에게
오히려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책망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지 않고
자기가 우상으로 놓여있어,
모든 종교적인 관습이나 실천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며,
자기우상의 테두리안에서 외형적인 종교인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저주하셨다.

여기에 주어진 시험의 일을 통해, 첫사람 아담과 하와가 받은 사단의 유혹과 대비된다.
그들은 그 사단의 유혹과 시험에 걸려 자신들이 넘어지게 된 것을 생각케 하지만,
주 예수님의 시험은 그 시험을 통해 자신이 테스트를 넘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생애를 살기 시작하게 된다.

인간이 받는 시험은 인간의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
첫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선악의 열매를 따먹고 싶은 자신들속에 있는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욕심이 결국 자신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까지 올려놓는 결과가 되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그들의 욕망은
그들을 더 낮은 인간수준이하의 타락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이 세월에, 하나님을 의심과 불신으로 점철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힘들게 하였다.
결국 그들 출애굽을 한 해방세대는 광야에서 그들이 겪는 환경에서
오는 힘드는 삶의 조건과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는 조급함과
자기들의 우상들(이집트의 우상들,
그리고 자기안에 있는 불신이나 불순종의 우상들) 때문에
거의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자신이 받은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므로써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나 올바른신앙을 가지고저 하는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셨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주님과 같이 시험을 이기고 나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힘이나 권한을 추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을 향한 뜻에 있어서나,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으로 시험을 이기셨다.

시험을 통관하는 자만이 합격이나 혹은 일정수준의 자격을 갖춘 일꾼으로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된다.
시험받음은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가늠케하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실제 시험에 임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시험을 받아야 하는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공직자가 공직에 나가기전에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도
그 사람을 판단하고, 살펴보고, 됨됨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험을 받는 일중에 자신의 사람됨을 갖추는 시험이 어려운 시험이다.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이 진정한 시험의 합격자인것이다.
자신을 이긴 사람은 세상에 그어떤 것을 정복한 것이나,
무엇을 얻은 것보다도 더 강한 자긍심을 갖게 하며,
자신을 이긴 사람은 어느 일에도 적합하게 일을 추진 할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3 가지 단계의 구원의 삶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의 은총에 대해 살펴보고저 한다.
주님은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성도의 전인구원으로 인도하신다. 

성도들이 받은 구원은 3가지면에서  살펴볼수 있다. 


그것은 신앙고백과 더불어 시작되는 순간부터,
즉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생애적인 기간들을 통해,
구원의 시작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영적인 일생이 진행이 되어간다. 
그 과정을 통해 성도가 가진 믿음을 통해 영적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구원의 현재성과 진행형과 미래완성형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받고 믿은 즉시 성도들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은
즉시 현재나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이 담긴 축복이 시작된다. 
그 축복에는 죄의 정죄당함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며
(자신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사함받아,
자신이 비록 죄를 짓는 육체안에서 살지만, 이미 의인으로 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음),
죄의 형벌(죄의 속박과 그 결과에 의한 저주받음, 그리고 절망과 고통에서 사는 상태)
에서 벗어나, 의(주님의 의) 은총안에사는
자녀의 권리안(거지같은 죄인의 모습에서 왕같은 자녀의 신분변화)으로 살게 되며,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나라(위치이동: 자신의 영역이 옮겨져
신앙안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에게 인정을 받고
이후에 천국에서 영생과 상급으로 주어짐)로 옮겨지게 되었다. 

 

자신의 신분변화에 이어 의식변화(저주받은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에서
축복을 통하는 긍정적인 인생관)를 가져오는 내면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자신의 옛 죄(원죄, 자범죄)를 범한 옛자아(자신이 주인노릇하는 자아)에서
새로운 영적인 자아에 눈을 뜨고,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이루며 커가는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자아(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아)의 성장을 이루어 간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받은 구원은 자신의 영적인 일생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와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만남의 삶의 과정이며, 연속이다. 

이 구원에 관해서, 성도들의 생활을 통해 계속적으로 성장케하는 책임이 있으며,
사람들의 삶이 전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여 믿음으로, 영혼의 생명을 얻어,
그 생명을 풍성하게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앙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로부터 시작이 된다. 
주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신자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안에서
모든 일이 형통(고난도 실패도, 좌절도, 고통도
자신의 영성의 성장을 형성하는 유익을 가져오므로
주님의 손끝에서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을 합하여,
자신의 완성을 이루어 내는 창조주의 솜씨에 의존함)하게 되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모든 경험들이 열매를 이루어 간다. 

 

더나아가, 구원의 샬롬의 웰빙(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인)의 상태는
자신의 영혼의 만족과 성장과 그리고 더불어오는
육체의 온전한 (늙어가는 것도 건강한 상태에서)생활에 있으며,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만족한 태도로 살아가는 상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샬롬의 구원의 축복은 전인적인 구원을 가져오는 축복이며,
인간의 상태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발전을 가져오며 그분의 손길안에서 자기완성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믿음의 말씀과 성령의 상담

요15:1-8

 

참 포도나무비유에서의 주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교제의 갱신하는 문제가
신앙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되려면, 자신의 믿음이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주님과의 산 교제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뿌리깊은 신앙의 터전을 내리도록 힘써야 할것이다.

 

그 뿌리는 자신의 주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산 믿음에서 시작이 되며,
그 살아있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믿음으로 발전시키는 들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여 그 말씀을 생각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은대로 자신의 마음속에 되새겨서(반복해서 말씀을 상기하며,
그 구체적인 가르침의 교훈이 자신의 생각의 시스템에 새기도록)
그 말씀의 메시지와 교훈이 자신의 의식속에 의식화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하는 과정)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실천 되어야 한다. 

 

그 산 믿음은 단지 성경을 문자만이 아니라,
그 기록된 말씀을 자신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일때에,
자신안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법으로 주어진다. 

고로 자신이 성경을 읽고 듣는 선포되어지고 주어진 말씀안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말씀들을 단지 문자에 매이지 말고,
자신의 영에 부딪히는 살아있는 언어로 받아들인다.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큐티를 안하면 불안해하는 율법적인 태도에 대해
자신의 믿음시스템이 문제라면 아직도 자신의 믿음이
율법주의적 사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에 위해 자신에게 말씀의 내용을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경우는
자신의 영을 죽이는 종교나 관념적이며,형식화된 신앙으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즉, 문자의 교리에 매이는 것과 종교적인 형식화에 매이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종교직인 괴로운 짐을 더 얹어주는 경우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적인 문제에 대해 성령께서 지적하는 권면을 듣고
자신의 영성의 흐름에 대해 근본적으로 갱신을 가져오는 .
영혼을 살리는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씀을 읽고 묵상하든, 혹은 선포된 말씀을 듣든지,
자기자신에게 믿음안에서 자신의 영을 살리는 말씀을 부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신에게 생명력있는 믿음이 생기고,
자신과 남을 용서를 하는 넉넉한 신앙을 갖게 되어,
자신도 살리고 풍성하게 하게 하며,
남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살리는
사람의 눈높이의 영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어
자신도 남도 영적으로 죽게 만드는 문자에 매이는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나,
영혼을 움직이는 신앙의 영향력아래에 머물러 있게 된다.

 

예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
그것은 "내 양은 내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대로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자신의 영혼안에 확신과 기쁨과 평안으로 다가온다. 

이때에 조심할 것은 주님의 음성외에 두가지의 음성에 주위를 해야 한다. 

마귀의 음성과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분별하여,

그것으로부터 주님의 음성을 지키며,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구체화(순종하는 자신이나, 설득되는 자신)할수 있어야 한다.  

 

말씀을 듣든지 상고하든지간에 주님의 음성을 들으므로
믿음이 자신의 심성안에서 생겨 난다.
그리고 생겨난 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가져오는 축복이 된다. 
말씀을 통해 얻은 믿음은 자신에게 실상에 대해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자신이 예수님안에서 죄사함을 받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성령충만한 모습을 바라는, 그리고 예를 들면,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중에 하나인,
가족구원을 바라보는  자신의 믿음안에서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중에 “나의 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생명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하나님의 믿음을 창출 한다. 

 

고로 성도는 믿음으로 일을 한다. 
참성도는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하기를 힘쓰며,
더 나아가, 자신의 삶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발견한다.

무엇을 바랄 것인가?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첫번째 바라는 것은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채널이 강하게 나타나도록 만들어
자신을  상담을 하든지, 혹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갖든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사역에 대해서는 바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그 사역에 대해서도 성령으로 역사하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성령의 재충만을 받을 수 있도록,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나도록 자신이 열려있으며,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전달되도록, 성령으로 열려진 말씀에 대해,
항상 마음과 영혼이 아울러 함께 응답하는 열린 자세로 
자신의 영성의 발전을  이루도록 할 일이다.

 

특히 성령이 성도들 자신에게 권면하는 것으로,,
성도들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메시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성령안에서 자기상담을 하여
자신안에서 지속적으로 개선과 치유가 일어나,
전인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하시는 사역에

자신을 열어 놓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성령을 자신의 상담자로 모시고,
자신을 상담하는 일은 항상 지속되어야 할 성도의 거룩한 의무이며,
자신에게 주는 무한한 축복이며,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고로 자신이 시간을 정해서,
성령안에서 무릎을 끓고 상담받는 일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할일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크리스챤 묵상과 내면의 치유(1)

새하늘, 새땅, 새마음, 새로운 몸

성도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약속으로 주어져 있는 소망을 자신의 마음과 정신, 또한 동기들,그리고 매일의 분별로 실제화하는 것을 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임재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변화를 일으킨다.
세상의 절망과 죽음을 극복하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풍성한 삶을 살도록 초청을 받아,
단순히 영생을 주는 피안의 것이 아니며,
자신의 마음에 실제적으로 경험되어지는 현실로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종교적인 전통이나 가르침들은 원래 인간들이
잃어버린 영생을 주는 영향력을 사람들이 힘입고 살도록 돕는 것을 추구한다.
그들은 어떤 확실한 내면의 자각이나 혹은 묵상의 조명을 개발하는 필요성을 통해
자신안에 일어나는 내적인 갈등을 치유하며, 약속되어진 내면의 평안을 추구하기 위해 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죄책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여왔다.
우리가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그것을 현대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보면, 실존적인 고통에 대한 물음을 갖게한다.
어떻게 역경과 고난의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살수 있을까?
인류의 인재적인 재난이나 혹은 환경적인 소멸이나 재앙에 직면해 있는 세계를
어떻게 희망으로 바꾸어진 미래를 열것인가?
그 인간실존에 대한 희망에 대한 질문은 실존의 다른 문제들
즉 인간들의 죄책, 진정성, 사역등에 대한 문제를 풀기전에 답변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사람들이 우주적이고 개인적인 위기가운데에 살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더라도,
인간생활의 출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
그 패러다임은 개인적이고 우주적인 고통에서 구해줄 만한
하나님의 희망과 더불어 함께 인간문제를 풀어가는
인간의 책임적인 참여를 통해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패러다임의 근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부활에 대한 소망이다.
새로운 생명은 낡은 것으로부터 소생한다.
죽음은 결코 인생에 마지막 답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세상의 존재들을 재창조하며, 갱신하는 것으로 활동한다.
그런 이슈들에 대한 해결책은 개개인적으로
어떻게 영원히 재창조하며 갱신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을 개발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은
이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그들의 신앙안에서 구하며 살아왔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가를 배워 왔으며,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안에 있는 내면의 갈등을 다루는 가를 익혀왔다.
그리고 그들자신안에 하나님 센터의 중심적인 역활이나 활동들을 듣기를 터득해왔다.
우리는 그들이 배운 내면청취의 여러가지 방법들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Dwight H. Judy, "Christian Meditation and Inner Healing"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건강한 영성유지를 위해


하나님중심의 삶을 살고저 하는 자신의 태도가, 저으기 자기중심적일때에,
그 숭고한 생각이나 묵상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비쳐질때가 있다. 
신앙인들이 쉽게 빠지는 자기연민이나, 자기도취에 대해
항상 말씀안에서 자신을 비쳐보는 영적인 거울로 자신의 동기와 목적이나,
자신이 하고저 하는 영적인 헌신의 깊은 생각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앙인들이 갖는 일반적인 성도의 목적에 대한 가르침처럼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영광이라는 문구를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거룩으로 포장할지라도 자신안에 있는 숨은 불순한 동기나,
그릇된 방향성은 사람의 깊은 속을 모두 다 헤아려 살피시는 하나님의 안목에 드러나게 된다. 

 

자신이 헌신하는 영적인 시간들, 드리는 몸의헌신들,
주님과 교제하는 순간들속에서 항상 면밀하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다 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자신의 영성의 성장과 전진에 장애가 될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겪는 여러가지 일들이 오감을 통해
항상 자신에게 두뇌의 인식창고에 이성으로나,
감성으로서 각각 낱개의 정보를 입력하고 있다. 
그 정보들이 모여 자신안에 하나의 사고적 가치관이나
감성적 습성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신앙인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정보에 대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 

오감중에서 가장 쉽게 들어오는 감각의 창구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정보의 창고에 쌓이게 되어, 자신의 영성의 집들을 이루는 재료들이 되어진다. 

그 재료들중에 어둠에서 온 불순한 것들과, 방종에서 온 악한 것들,
헛된 가르침이나 정보에서 들어온 부정한 것들,
잘못된 윤리나 도적에서 온 그릇된 것들,
영적인 무지로 인하여 들어온 어리석은 것들등을
판단하고 살피는 자신의 영성의 바로미터의 불빛이 켜있어야,
그런 것들을 자신의 내면에서 걸러내어, 마음에 뿌려져
자신의 영혼에 더러운 것들로 남아있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회개와 내면청소를 해야 건강한 영성을 유지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신을 찾아가는 인생의 태도

인간이 신을 찾는 데 가져야 할 태도는
신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를 향하여 가난한 마음으로 그에게 나가는 것일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에게 신의 은총을 입는 접촉점은
두가지의 사실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신을 이해하는 분명한 식견으로 신앞에 나가는 인생이
신의 영광스러움을 통한 신의 관대함과 용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또하나는 인간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기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해는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인간은 자신이 신의 소생으로 자신의 처지가 항상 신을 갈망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배고픔이 있는 가난함에 대한 철저한 자기인식일 것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인생자신이 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가?
대개는 자신의 나약함에서 오는 인간한계에 부딪치게 될때에 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는 다든지,
혹은 사랑하는 자녀가 교통사고나, 죽을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은 인생의 한계를 생각하며, 신에게 두가지 반응을 나타낸다.

어떤 반응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 하고 신에게 반항하며,
무시하며, 신을 떠난 인생의 절규와 같이 애써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반면에 자신이 어떻게 할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나 사건에 대해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자신이 신의 손길을 찾아나서는 심정을 갖게 된다.

인생의 삶의 밑바닥과 같은 절망적인 경험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찾게하는 것은 자신안에 있는 내면의 절규와 영혼의 목마름을 통해,
인간속에 있는 근본적인 필요를 만족케하는 신을 찾아나서게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여러가지 우울증들과 성경에 나타난 우울증이야기(우울증3)

며칠전에 또 우울증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유명한 연예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우울증으로 인한 반응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울증이 어떤 일이나 사건의 반응에서 일어나는 것과
혹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요인,
일차적인 혹은 이차적인 원인, 단극적인 혹은 양극적인 현상으로 일어난다.

어떤 일이나 사건의 반응에서 일어나는 우울증은
(때로는 외인성이나 혹은 신경성 우울증이라한다)
주로 어떤 실제나 상상에서 일어난 상실내지는 상처에 대한 반응으로
혹은 걱정스런 감정의 높은 수치의 상태에서일어나는데,
그것은 그기간이 짧을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조절이 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에서일어나는 (내인성의)
(그것을 또한 자율적이며 정신적인우울증이라 불리운다)
마음의 내면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며
때때로 그것은 자기파괴적인 성향이 있는 강한절망의식을 동반하며
그 증상이 오래가기도한다.
그우울증치료하기가 용이하지 않으며, 그 우울증의 재발가능성이 높다.

일차적인 우울증이 일어나는 것은
이차적인 요인인 다이어트의 부작용이나 암이나 당뇨
그리고 인퓰레자 감염으로 인한 병의 결과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
단극적인 (unipolar)우울증은 일차적인(주요한)심리적인 장애로서
한 기간이나 그 이상의 우울증의 일어나는 조건하에서 일어난다.

자주 일어나지 않는 우울증은 양극적인(bipolar) 우울증으로
우울증적인 행동이 스며든 조적(정신적인 우울증의 반대인 조적인 현상)인
증상의 기간에서 일어난다.
대개의 전문가들은 이런 단 혹은 양극적인 우울증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실망이나,
실패나, 그리고 상실에서 오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증상인 우울증의 현상들과는 구별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우울증은 사람들에게 다 일어나기 쉬운 평범한 현상도 있지만,
때때로 그 우울증 증상이 복잡하고 힘든 상태의 현상으로
정확히 우울증을 묘사하기가 쉽지 않으며, 치료하기도 용이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에서는 우울증이라는 임상적인 용어는 다루지 않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런 증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 69편과 88편, 그리고 102편은 시인이 겪는 우울증적인 현상을 절망의 노래로 언급하며,
그런 좌절속에서 삶의 희망을 가질것을 호소하고 있다.
시편43편에서 다윗은 삶의 우울과 기쁨등 양쪽의 인생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영혼아 왜 너는 의기소침하여 있으며, 내안에서 혼란스러워 하는가?
그리고 불안해 하는 가? 하나님에게 너의 희망을 두어라
왜냐하면 내가 나의 구원자이며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곳에서 우울증의 증상을 겪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준다.
욥이나 모세,와 요나와 베드로,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전체가 우울증을 겪기도 하였다.
예레미야예언자는 이스라엘민족의 절망이나
우울한 현상을 애가(비탄, 통곡)라는 책 전체에 기록하고 있다.
엘리야는 가멜산에서 우상선지자 850명을 대결하여
승리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하였지만,
살인자이며 우상숭배자인 이세벨왕후의 추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광야로 도망을 가, 거기에서 극단적인 절망감이나 자기낙담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죽기를 원했으며(자살충동)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천사에 의해
그 상태를 치료받을수 있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극단적인 슬픔과 고통으로 인하여, 극단적인 우울증상태에 빠져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이 매우 슬프며,
그 슬픔속에서 깊은 고통을 통해 죽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Amplified Bible에서 표현된 ).

이런 예들은 성경이 사람들이 사는 인생의 현실이
수많은 슬픔의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인생에게 꼭 필요한 희망과는 대비되는 인생의 절망적인 현실성을 알려준다.
믿는 이들은 궁극적으로 그런 인생의 우울한 현실들을
돌파하는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기쁨을 신앙안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다.

요즘에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성경에 이것은 엄격히 금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생들에게 소중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며
자신의 유일한 생명을 포기하는 이중적으로 짓는 심각한 죄이다)
두 연예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데 충격적이며
새삼 그들의 삶에서 오는 우울한 현상들과 삶의 도전들을
이기지 못하는 신앙의 무력감을 금할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성경은 강조하기를 이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과 그로 인한 하나님나라에서 오는 풍성한 인생의 확신은
인생이 겪는 모든 인생좌절들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라고 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하나님의 영)의 능력에 의한
희망이 넘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생의 모든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것을 기도하고 있다.
(게리 콜린즈의 Christian counseling 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진리안에서의 인생의 자유

요한이 기록한 기쁜 소식 8:31-32
"너희가 내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자신에게 멀기만 느껴질때가 있다.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스쳐지나며, 자신의 기억에서 곧 사라진다.
그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마음에 부딪치지 않아 메아리로 남았다가 이내 잊어버리게 된다.
말씀을 붙잡았다고 생각하고 마음안에 되새김질해도 그 말씀의 맛이 둔탁하기만 한다.

자신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머물곳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의식안에는 가득세상의 언어로 꽉차있다.
자신의 생각에는 주님의 말씀을 넣어둘 의식의 창고가 없다.
세상의 잡다한 사상이나, 규칙들이 자신을 얽어매어,
영적으로 맹인이 되게 하고,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육적인 소리에 한눈을 팔아,
말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예수님은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세상에 오셨다.
그는 말씀 그 자체이며,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근본 인생에게 생명을 주는 영생의 말씀이시며,
그는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그는 하나님이 육신이 된 말씀으로 이세상에 오셔서,
인간세상에 계시되고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임하셨다.

오늘날,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나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말씀의 주제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촛점이 맞추어 져 있다.
성경을 어디나 펴서 읽어도 쉽게 주님의 음성과 흔적을 발견할수 있다.

시초부터 시말까지 전개된 계시된 말씀은
인간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주는 메시지로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된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예언들이 때가 되어 이루어 진다.
예수님 그는 또한 선포되어진 말씀으로 세상 어느 곳에 든지 복음의 메시지가 전파되는 곳마다,
선포되어지는 그 말씀안에 주님은 그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나타난다.
말씀이 알려지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그 말씀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경험하는 이에게 생명의 메세지로,
병들고 찌들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부요한 삶을 주는 능력의 언어로,
어둠에 처한 인생들에게 빛의 전파로,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성공에 대한 강한 의욕의 언어로,
낙심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격려의 메시지로,
절망하는 이웃에게는 소망의 닻으로 다가온다.

주님이 계시는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주님의 영이 임하신다.
주님의 영은 선포되어진 말씀을 통해 따르는 표적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자극과 격려와 치유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며,
그의 임재하심을 동반한 말씀의 선포을 통해,
더 명료하고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온다.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말씀에 거하는 자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믿고 그를 인생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며 그들은 어디서나 언제든지,
주님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모든 일에 대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며,
이 세상속에서 특별하게 주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실천하는 제자가 된다.

진리는 단지 언어이며, 이성이다라고 여기는 경우는
진리를 받은 자신의 신앙이 이성에 따라 움직이고,
이성의 판단을 좇아 신앙의 신비의 부분이 상실된다.
그리고 이성을 좇아 진리를 추구하다보면
자신속에 있는 진리는 자신의 이성의 규격된 틀안에서,
진리의 맛은 잃어지고, 그 진리의 보석의 가치는 화석이 되며,
자신을 율법화된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는 원리이다라고만 여기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자신은 자신이 받은 원칙대로 영적인 원리나
혹은 교훈으로 받은 가르침을 따라 행동을 하지만,
진리에서 나오는 인격적인 관계나 개인적인 교제는 성립이 되지 않고,
더이상 진리와 주고 받는 살아있는 인격인 하나님과의 신앙의 깊은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진리는 과연, 이성이나 원리일까? 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넘어서,
진리는 인격이며, 생명이며, 우주를 말씀(진리)으로 창조한 하나님이며,
우주의 원리를 세운 창조주이며,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교제를 나누며, 대화를 하기를 원하는 주님이다.
그 진리이신 주님을 아는 자가 진리안에 거한다.
진리는 단지 두뇌의 이성이나 지적인 활동으로 아는 것뿐 아니라,
일회적이든 다양하고 다차원적인 경험으로든 자신의 오감에서 오는 경험으로 알며,
인격이신 진리와 의 인격적인교제의
인생경험의 일정한 역사(길든지 짧든지 그러나 대개는 연결되어가는) 인생의 과정속에서 알아가는 것이다.

진리를 알아가려는 사람들은 진리이신 하나님은
늘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 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과거에 머물러 그분을 판단하지 말것이며,
과거의 습관이나 패턴으로 오늘의 진리경험을 왜곡하지 말며,
오늘의 경험의 한계에서 미래에 다가올 진리이신
그분의 거대한 역사(이루어지지 않은 많은 예언을 기록된 성경은 포함하고 있다)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를 머물 예언이나 약속에 붙잡힌 채로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는 오늘의 진리이신 주님의 숨결이나
손길이나 발자취를 자신의 삶을 스쳐 지나가는 우연으로 여겨서도 안될 것이다.

신앙은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우연의 일들을 필연으로 해석하여,
진리를 알며 진리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가지가지의 삶의 얽매이는 현장속에서 살아간다.
먼저는 인간의 시조가 범한 원죄의 속박은 인류모두에게 죄의 구속으로 얽어매어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죄의 갇혀진 삶의 환경안에서 살아간다.
그 죄는 인생의 현장에 불합리와 불법과 저주와
형벌을 가져오는 인생의 굴곡안에 인생자신을 갇히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죽음과 멸망으로 달음질하는 처절한 절망하는 삶으로 전락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주님은 인간을 갇히게 하는 모든 것을 해방하기 위해 이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인간을 대신하며 죄의 댓가인 죽음의 형벌을 받아,
모든 갇힘으로부터 인간해방과 자유를 주셨다.
그 진리안에 죄와 그영향력의 모든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을 맛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가져다 주는 인생의 능력과 삶의 만족이 있다.
진리를 알고 따르는 자들은 인생자체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다.
인생의 생사화복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 인생이 알수 있는
삶의 비밀의 지식을 알고, 자신이 겪는 모든 인생경험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판단의 지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모든 인생이 겪는 불안과
형벌받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을 받아,
스스로 알수 없는 미망이나 미혹에서 건짐을 받아,
세상의 그 누구로부터에서도 얻지 못하는 마음의 평안함과
자신을 삶의 목적을 두고 세상으로 내어놓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인생의 안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무능한 인생의 탄식을 바꾸어주는 유능함으로 그분안에서 발견한다.
진리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겪는 여러 종류의 유혹이나 좌절이나,
시련이나 절망에서 자신을 일으키는 진리의 능력을 경험할수 있다.
진리를 품고 있는 사람이 절망적인 인생의 환경을 자신안에 있는 희망으로 다가갈수 있으며,
여러가지 인생자신을 무능하게 하는 요소(자아감상실에서 오는 혼란과 방향상실,
자기무력감에서 오는 불안과 내면의 고통, 혹독한 환경의 역경과 시련,
인생의 쓰디쓴 실패와 좌절,
내면의 분노와 갈등을 일으키는 인간관계의 상처들)들을 극복하게 한다.

유한한 자원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그 세상의 유한성에서 겪는 모든(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차원들)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진리이신 주님은 부요한 창조주로 그에게 있어서
모든만물을 무에서 유로 이루어놓은 것을 통해
(오늘도 개인이나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다)
그는 진리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분안에 있는 모든 부요와 풍성함을 맛보며 살도록 한다.
진리를 믿고 따르는 신앙만이 세상의 모든 궁핍
(삶의 왜곡이나 인생고통의 질곡에서 오는 불만족한 인생의 상태)으로부터
진정한 승리를 맛보게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신의 영성과 자신속에 있는 죄의 문제

2007/02/06 오후 11:26 | 영성과 묵상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어두워 져 있는 가를 잘 보지를 못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목으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바라볼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기고 싶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기가 쉬운 것으로 인해,
자신의 전반적인 성품이나 본성에서 자신의 허물이나 자신의 죄의 처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부주의하여 자신의 영성관리를 소홀히 하기 쉽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게 되면,
자신의 영성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왜곡되어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이 주님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게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정말,자신에게 많은 해결되지 않은 내면의 문제나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처리하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지난 날 하나님을 섬기고, 영적으로 기도를 드리지만,
자신에게 변화가 없고 여전히 자신안에 있는 모순이나,
불합리한 내면의 불순물이 있음을 부인하는 자세는
결코 하나님앞에 있는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바른 상태나 혹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나 교제가 이루어지기전에는
자신의 영적생활이나 기도의 생활에 전진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못한다.
그리고 영적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받는 일에 대해서
효과가 없을시에는 진지하게 내면의 모습의 자신의 태도나
사고시스템이나 자신의 영성을 살펴볼 일이다.

자신의 영적 생활을 통해 자신의 영성훈련이나 습관들을 통해
자신의 영성이나 신앙진보에 도움에 효과가 많지않다고 느낄때에
그것은 자신을 대하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자신이 처리하지 못한 더러운 자신의 죄나
그릇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습성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의 그릇된 습관이나 왜곡되고 굳어진 사고 시스템이 문제라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마음아파하지 않았으며,
그 죄를 처리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를 반문해 필요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주님과 나사이에 영향을 주며,
영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해 왔는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무지하며,
자신의 자기열림에 대한 희미한 상태에서, 기도를 많이 해본들, 역사는 없는 것이다.
이문제를 반드시 처리하고 싶다고 다짐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영적상태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럴까? 그동안 자신이 드린 많은 영적인 시간이나 기도의 시간을 보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효과적인응답은 적은 것이다.

혹 하나님에게 대한 불신과 어두움의 영향아래에서
자신의 영적인 방향성이 하나님의 방향에 빗나가 있기 때문이며,
자신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과 자신의 영의 희미함등은
해결되지 않은 죄로 인한 영적인 상태의 문제가 아닌가?

영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앞에 자신의 영을 밝히는 일은
먼저 하나님앞에서 처리해야 할 구체적인 것등 즉 회개치 않은 것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마음으로 지었던 죄: 불신,반역, 방종, 욕망, 정욕, 영적인 소홀등
입술로 지었던 죄: 적극적인 대응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소극적인 대응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말, 미워하는 말등,
생각으로 지은 죄: 부정적인 시스템, 불신, 교만이나 방종적인 태도들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죄들외에, 하나님의 영을 거스리는 육체(영과 반대되는)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릇되게 성적인 죄를 범하거나 상상으로 성적으로짓는 죄,
포르노를 보는 것, 생각으로 부정하고 원망하는 죄등
수많은 죄의 영향들이 자신의 영혼에 미치고 있다.

또한 영적으로 긍정적인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죄,
해야 할일을 하지않은 것: 전도하지 않은 죄, 기도하지 않은 죄,
이런 죄들을 주님의 십자가앞에 나아가, 나의 시커먼 죄의 먼지를 털어내고,
주님의 피로 말끔히 씻어내는 기도를 드리자.
그리고 나서 자신의 영성생활을 재출발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의 보다 나은 영적생활을 위하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