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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1/07
    우울증에 대해(1)(1)
    목동
  2. 2007/01/07
    자신은 어디에 속한 자인가?
    목동
  3. 2007/01/07
    가족의 여행이야기
    목동
  4. 2007/01/06
    신앙과 인간발달과의 상관관계(1)
    목동
  5. 2007/01/06
    문제해결을 향하여
    목동
  6. 2006/12/27
    소명된 삶이란
    목동
  7. 2006/12/23
    기도하는 인생
    목동
  8. 2006/12/21
    최초의 가정이야기
    목동
  9. 2006/12/19
    미련한 신부이야기
    목동
  10. 2006/12/17
    여성신학적인 표현양식과 메시지
    목동

우울증에 대해(1)

얼마전에 타임지에서 앞으로 미국인들의 높은 사망율이 되는 3가지 질병이 있는데,
그것들은 에이즈와 심장병그리고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그중에 우울증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겪는 사소한 일이든지
혹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든지 얼마간 사람들의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오며,
긴장과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들의 생활에 걱정과 근심,
그리고 분노와 격정으로 인한 심적부담이 지속적으로 주게 될때에,
그것에 대한 반응이 마음에 무거운 짐을 가져오는데,
그것이 우울증으로 발전할수 있게 된다.

우울증은 지속적으로 사람의 마음이 좌절감에 빠지게 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할수 있는 소지가 있다.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기쁘고, 성공적이고, 특별한 날로 기억되는 날들이 많지 않으며,
평범한 날들이 지속한다.
그리고 반면에 우리에게 어두운 날들이 있는데, 혼란, 의심, 좌절,
그리고 실망등이 이어지면,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주어진다.

그리고 사는 환경의 구조화되고, 변경할수 없는 상태에서,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의 생활에, 시집식구든지, 친정식구가 함께 얹혀서 사는 경우에,
그 사는 환경에 희생자로서 남편이든지, 부인이든지 우울증으로 발전할수 있는 요지가 있게되며,
지속적으로 직장상사가 괴롭히는 환경이든지,
주변인물들이 왕따를 주는 경우라든지,
그리고 지속적으로 대인관계에서 따스한 사람냄새를 맡기가 힘들고,
딱딱하고 냉정한 인간관계만 계속되면,
자신의 마음에 심적부담을 주고,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않고 놔두면,우울증으로 발전할수 있다.

우울증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전부터,
사람들사이에 세계적인 현상으로 보편화되어 있다.
그리고 우울증의 현상은 유아기로부터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다 노출되어있다.
마치 감기증상을 겪는 것처럼 오늘날 인간들사이에 우울증은 만연되어 있다.
심각한 우울증은 깊은 좌절감, 두려움, 허탈함, 무정함, 희망없음,
그리고 내적 자포자기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우울증에 대해 알아보면서 우울증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에 함께 그문제를 풀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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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어디에 속한 자인가?

시114편 1-2
자기백성이 우상의 나라들의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날때에,
하나님은 그 크신 능력을 나타내시어, 그백성을 구출하셨다.
그 신의 능력은 억압하는 민족위에 강한 손을 펴서, 압박받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출하셨다.
신이 자기가 택한 민족이나, 씨족이나, 가족이나, 개인을 향해,
자신의 능력을 나타냄은 그 택한 존재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에 의한 구원의 역사이다.

한개인 자신이 구원받은 것도 크나큰 신의 손길이 개입되어 있으며,
자신의 일생을 통해 전개된 기이한 손길을 포착할수 있으니,
자신을 있게한 신은 인생의 삶을 귀하게 보며,
한걸음 한걸음씩 걷는 발걸음의 발자취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신의 도움의 터전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신을 통한 개인의 부름이나 민족의 부름에는
신의 선험된 뜻이 있어, 그 뜻을 통해 자신들이 선택된 존재로 나오게 되었다.

한 민족이 이상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가운데에서
신의 개입으로 나오게 되어, 오랫동안 약속되어진 신의 계약을 따라 유일하게
신의 역사를 통해 세계안에서 중심으로 세움을 받게 되었다.
그 민족(신이 부른 민족)의 백성들을 통해 신의 언어를 섬기고,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신의 언어를 알리는 역활을 하는 민족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그 고통받는 자기백성을 구출하심은 신을 저버리고,
신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있는 나라가운데에서 구출하여,
신은 그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여, 자신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세상에 속한자에게 속하여 신아닌 우상을 섬기는 경우는
그들이 그 세상의 노예된 상태를 벗어날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의 선택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되어, 신을 섬기는 일로 나가게 되었고,
그 백성은 신을 섬기는 그 일이야말로, 자신들의 존재와 가치의 전부라고 할수 있게 되었다.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세상으로 부터 나오게 된 사람들이 자신이 과거에 섬겼던 우상으로부터,
즉 세상에서 신아닌 것들을 통한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
돈, 명예, 권력, 자아중심의 인생, 쾌락과 무가치한 것등을 따르는 가치관들,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신을 섬기는 데로 나가게 되어,
그들이 사는 곳이 신을 섬기는 곳이 되고,
그들의 터전이 신을 예배하는 중심에 서있게 되었다.

나 자신의 인생은 누구의 영역안에 있으며,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
세상에 속해 있는 가? 아니면 신에 속한 자로 있는가?

세상에 속한 자로 사는 인생은 세상, 그의 지배를 면할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누구에게 속해 있는 것인가?
온 세상은 유혹자의 유혹에 넘실대며,
인간의 초인간적 망상과 주권을 부추겨, 인간들에게 만용을 부리도록 외쳐대고 있다.
신을 떠난 세상은 인간에게 과장된 자유를 약속하고
그 자유안에서 인간들을 방종으로 유도한다.

이집트의 사람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의 신은 세상이다. 그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신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그들을 강제로 세상의 신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이집트에 속한 세상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우상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그(세상)의 노예로 전락되어 살게 한다.

신을 떠난 세상은 보기에도 좋아보여 인간들이 마음껏 자기자신대로 살아도 간섭이 없고,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신의 심판과는 무관하다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도록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신의 소생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의 삶을 통해,
신의 판단과 그의 심판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고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신을 떠난 세상에 속한 자로
세상의 신을 섬기는 이집트땅에 안착하고 있는 인생들을 향해,
그리고 그런 세상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탄식하는 영혼들을 위해,
신을 떠난 세상에 신이 손을 펴고 심판과 구원의 역사을 행하심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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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여행이야기

캘리포니나주의 로스엔젤레스시로 향하는 목적지를 향해,
켄터키 주 루이빌시에서 출발하여, 버스로 이틀을 가는 장거리 여행을 나섰다.
연말연시로 사람들의이동이 많아져, 버스는 만원이었으며,
새해를 맞이하여, 사람들이 가족들을 만나거나
혹은 자신의 새로운 직업이나, 일들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나서게 된다.

만원인 고속버스안에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흑인여인들이 있고,
홀로 여행하는 백인남성들이 있으며, 여러 무리를 지어가는 흑인 남성들이 보이며,
여러인종의 히스패닉 남성과 여성들이 보이며,
신병훈련을 마치고 휴가를 즐기는 군인들과,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 자기집을 방문하려는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져,
버스를 탈때마다 버스은 늘 자리가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몇해전에 시카고에 갈일이 있어, 그레이 하운드 고속버스로 타고 내려 온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행이 편안하게 9시간이 걸렸지만, 자동차로 6시간을 가는 거리이지만,
중간에 정차하여 쉬는 시간을 포함하였다.
그런 버스여행경험이 장거리로 고속버스를 타는 일을 시도하게 하였다.

승객들중에 어느 흑인 부부가 있는데 조금 이상하게 생겨, 자세히 보니,
두여성이 한여성은 여성이며, 한 남장을 한 여성이 둘이서 함께 부부처럼 행새하며 타고 있다.
어느 히스패닉여성은 아이를 데리고 장난을 하며 몇시간을 타고 간다.
집사람 옆에, 한 흑인 여성이 탔는데,
그 여인과 나누는 대화가운데에 자신은
어느 유명한 여성 설교가 세운 선교단체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집사람은 대화중에 좋은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난 사람들중에는 우리가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시에 살때에 가까운 곳에
한인 목회자가 담임목회자이며, 부교역자들이 몇명의 백인인 국제적인 교회에 다닌 적이 있는 데,
당시 그 교회는 생긴지 얼마되지 젊은 교회지만,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교회는 활력있게 부흥하며, 예배나 모임이 상당히 활발하였다.
몇해전에 그 교회에 참석하였던 한 백인 노인여성을 같은 버스에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우리가족같이 남편과 부인,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여행을 가는 경우를
자주 보지를 못했다. 많은 경우에 홀로 가거나,아니면, 부인과 아이들이 함께 가는 경우였다.
그것은 아마 가족여행이 자동차로 가거나 아니면 좀더 편한 여행기관인 비행기나 기차로 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리고 텍사스주에 이를렀을 때에(아마 멕시코와 국경접경지역인 것같았다)
학생신분인 우리 부부는 국경검문에서(국내여행을 하기때문에
우리는 여권과 비자를 집에다 놔두고 갔기에, 단지 운전면허증과 학생증만 있었음)
검문을 받고, 20분동안 내려서, 신원조회를 검사받았는데,
친절한 상관이 우리에게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무사히 지나오게 되었다.

왕복약 4일간의 장거리 여행길을 버스안에서 이틀밤을 지내며 갔다.
두아들들이 힘들게 생각이 들줄알았는데, 장시간을 버스로 가는데 별로 힘들어 하지 않아,
오랫만에 하는 여행을 즐기고 있다.
게임기를 가지고 게임을 하거나 혹은 둘이서 장난을 치며,
혹은 잠을 자기도 하면서 그리고 책을 보기도하면서 긴 시간의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하였다.

이 여행길에, 루이빌시에서 로스엔젤레스시로 가는 길은 이틀과 4시간이 걸렸으며,
돌아 오는 길에는 이틀과 5시간정도 걸렸다.
그동안 우리가 만난 버스기사만 12명정도이었다.
그들은 자기가 정해진 코스에서 시작하여 자기에게 할당된 지역까지 운행하고는
다시 새로운 기사가 다음 운행시간을 릴레이식으로 이어갔다.
백인기사, 흑인기사, 히스패닉기사,
그리고 흑인 여기사등 다양한 기사들이 자신들의 운행시간을 채워 나갔다.
어느기사는 8시간을, 어느 여흑인 기사는 4시간을 운행하기도 한다.

어느 히스패닉기사는 이중언어로 안내방송을 한다. 그는 유창하게 이중언어로 안내방송을 한다.
버스내에서 담배를 피울수 없다든지, 마약이나,
혹은 타인에게 피해되는 행동을 삼가할 것을 안내한다.
그리고 음악을 듣는 일이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며,
핸드폰을 사용할시에 작게 말하며 사용할 것을 주의를 준다.

버스가 운행되는중에 2시간이 혹은 3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주를 거쳐 몇몇 도시에 정차한다, 그때마다 대합실에서 대기하며 버스를 기다리곤하였다.
몇번인가는 버스에서 승객들이 모두 내려, 버스안을 청소하는 시간도 있다.
버스기사는 승객들이 버스에 다시 탈때에 리보딩 티켓을 나누어 주어, 버스를 타게 한다.

주로 우리는 버스터미날에서 기다리며, 책을 읽기도 하였다.
김밥을 만든 것을 먹기도하다가, 맥도날드음식을 사먹기도 하며, 지냈다.
대합실에는 많은 흑인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많은 히스패닉사람들과 가난한 백인들이 모여있다.
가끔 아시안들도 보인다. 그리고 아랍사람들이나, 모슬렘사람들도 보인다.

켄터키주를 지나,인디아나주로, 캘리포니아주까지 밤에도 달리고 낮에도 열심히 달린다.
겨울날씨에 어느 주에는 따뜻한가 하면 어느 주에는 눈이 내리고 있으며,
어느 주에는 긴 황무지가 펼쳐져있어 아직도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들이 널려 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여행은 미국인들중에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주로 이용한다.
그들은 이버스로 전국에 어디나 손쉽게 여행을 하며,
친척집을 방문하거나, 여러도시로 직업을 구하며 떠나는 이들,
일용직장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생들이 학기가 바뀔때마다, 고향이나 집을 방문하러 가며,
군인들은 훈련을 마치고 집을 방문하기 위해 가는 경우등,
여러가지 사유로 넓은 미국의 각지를 고속버스로 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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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인간발달과의 상관관계(1)

신앙은 정적이며 단원적인 것보다는 역동적이며, 다차원적인 인간반응에 관여하고 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신뢰와 동의와 순종과 자기복종으로 묘사된다.
신앙은 또한 하나의 인간의 발달적인 현상이다.
그 신앙은 인간의 개인적인 발달주기에 참여하고 있으며,
개인의 성장기의 발달현상에 따라 그 개인의 신앙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궁극적인 은사로 주어지지만,
인간의 응답에 의해 형성이 된다.

에릭에릭슨의 인간발달의 후천적인 경향에 위한 발달이론에 의해 신앙이 형성이 된다.
에릭슨의 인간발달은 8가지 단계로 유아기(신뢰와 불신), 어린시절기(용기와 수치혹은 의심),
놀이아동기(순종과 죄책감) 학령아동기(동의와 불찬성),
사춘기(자아형성과 자아혼란), 초기성인기(자기순응과 자기괴리),
중기성인기(무조건적인 자기헌신과 현세의 욕망),
성숙성인기(무조건적인 자기응답과 자기파멸) 나눈다
(이 단계들을 개인의 영적성장의 단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뢰로서의 신앙
영적인 유아기에는 주로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공조하는 것에 반응하며,
그 욕구가 불만족스러울때에, 타인과의 신뢰가 형성이 잘 안된다.
신뢰하기는 유아기의 특징으로, 자신과 타인에 대해 자신의 신뢰의 욕구가 충족되면,
건강한 인간관계와 성취심을 갖게 된다.

만일 개인의 신앙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차별화된 반응으로 이해되어지면,
신앙이 형성되기 쉽지않으며, 하나님을 이해하는데에도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신앙이 의식적으로 반사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유기적이며, 무조건적인 원시상태의 것이라면(즉 차별화되지않은),
믿음은 신앙의 유아기의 신뢰형성에 큰 밑거름이 된다.

유아기적인 신뢰로서의 신앙은 열림과 수용성의 반응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즉 타인과의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형성이 되며,
신앙유아기의 차별화되지 않은 신뢰의 감정으로 좌절이 아닌 성취되어지는 믿음을 이루게 되며,
인생에 있어 다른 사람과의 신뢰를 쌓을수 있는 본인이 믿을만한 사람이 된다.
이런 유아기적인 신앙의 단계에서 실패하면, 나중에 의심이나,미심쩍은 태도를 갖게 된다.

용기로서의 신앙
에릭슨에 의하면, 두살때의 아이들은 근육시스템의 발달로 인하여,
유지와 소멸의 행동을 통해 자기 중앙집중적인 사회심리학적인 단계로 발전한다.

영적인아이는 자신에 대해 미성숙한 힘을 사회적인 보유(좋은 것을 선택하기)와 해제(나쁜 것들을 버리기)들을 통해, 자신의 중요한 주변인물들에 대한 반응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아이들의 불규칙적인 행동은 자신의 성장하는 힘을 통해
새로운 대안들을 선택하는 타인의 의지나 명령에 대항하는 자신을 지원한다.
이 힘은 어린시절의 자신과 무자아사이의 차별화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이시기에는 아이들이 자율성과 자기 결정에 대한 능력이 배양이 되는 시기이다.

영적어린이에게 적당한 척도로 자존감의 상실없이 자기결정이 평가되어진다면,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생존하며 성장할수 있는 책임있는 자기단언의 감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타인의 의지에 영향을 받고,
자기조절이 부족할시에는 수치와 의심하는 병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영적 어린이의 자율성에 대한 노력은 두가지 단계로 신앙에 반응한다.
하나는 자아발달의 시작으로 사춘기에 이상적인 자아발달을
가져오는 단순히 주고받는 반응의 처세를 넘어서는 이상적으로 주도하는 능력을 배양한다.
그리고 반응으로서의 믿음은 참인간의 면모와 그에 따르는 개인적인 성장을 가져온다.
이후에 장년이 된 시기의 신앙형성에 핵심적인 역활을 하며,
인간자유의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초월하는 능력을 끌어내는 계기가 된다.

또 다른 하나의 레벨은 아이의 싹나듯 시작되는 자기결정의 감각은
자기단언의 미숙한 능력을 가늠하여,
인간상호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자신을 확립하는 유기적인 체계를 갖추는 능력을 배양한다.

영적어린이시절의 용기로서의 신앙은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는 그 시절의 신앙의 기본적인 형태이다.
왜냐하면 용기는 신앙안에 잠재되어있는 모험을 이길만한 요소가 있기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이 완전히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기확증을 갖게하는 삶의 기반을 부수어버리는 위험을 극복하게하기 때문이다.

LeRoy Aden의 “Faith and Developmental Cycle”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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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해결을 향하여

생활의 주변에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났을때에,
전문가에게 상담을 하고 도움을 받으며 살면,
얼마나 생활을 편안하게 그리고 쉽게 살아갈수 있을까?
자동차가 고장이 나거나, 전자기계나, 컴퓨터가 고장이 났을때에,
자신이 고칠려고, 몇번 시도하지만,
오히려 망가진 상태를 더 못쓰게 만드는 경험을 하였던 적이 있다.
물건이 고장이 났거나, 집의 구조에 문제가 생겼을때에,
전문가에게 가서, 고치게 되면 그 물건을 고쳐 쓸수 있게 되며,
문제된 부분을 해결하게 된다.

가정생활에서, 부부간에 문제가 생겨,
서로 함께 사는 것이 힘들때에,
가정상담이나, 전문 부부상담을 받는 것도 가정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부부사이에, 서로가 가벼운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때에,
쉽게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의외로 그문제가 확대되어,
더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장기적이며 구조적인 문제의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공동체에 문제가 있을때에, 그것을 정확히 진단해보고,
그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외부 전문인의 객관적인 평가에 의해,
문제점을 파악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할 대안들을 내놓으며,
그문제들을 풀수 있는 계획들을 실천해가면
그 공동체의 기능은 죽어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새롭게 활성화되는 단계로 옮겨갈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공동체에는 가정이라는 기본단위에서 부터,
사회의 여러종류의 기관들이나 단체들에 대해
그런시도를 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을 것이다.

컨설팅하는 일들을 주변에 많이 찾거나,
그런 일들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인들이 많이 생기는 것은 사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거에 자신이 알았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못하거나, 더 발전되지 않게 된다.
그럴때에, 전문가의 의견이나 도움을 받게되면,
그 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더 개선하여, 발전하게 된다.

문제에 부딪혔을때에, 자신에게서나 남에게서 얻은 것이든
그문제들에 대한 발전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나,
혹은 문제해결의 정책에 의존하면, 그 문제된 상황을 넘어가서 더 발전적인 상태가 된다.

과거에 아이엠푸를 겪던 시절에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
경제가 힘들고, 기업들이 생존하기 힘들며,
그 상태로 그냥 있기만 하면, 부도가 나거나, 혹은 다른 기업으로 넘어가서,
결국에 파산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을때에,
어느 곳이나 기업에서는 그상태를 비상사태로 생각하여,
사업의 리모델링을 하며 기업들은 어려운 시절들을 극복하기도 하였다.

요즘 우리사회의 주변에 서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서로 문제시하는 내용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해결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겠다.
정치문제나 경제문제, 혹은 실업문제나 사회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통해 문제들을 정확히 분석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대책을 세워서 한단계씩 문제를 개선하며,
문제해결의 길로 나가게 되는 것은 성숙한 사회와 사람들의 태도라 하겠다.

인생들의 문제는(인간의 근본적인 죄의문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생의 고뇌와 고난과 고통의 문제들,
인간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의 문제,
사회적인 병폐와 인간갈등의 문제,
그리고 해결될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사의 문제들)
인간이 모여사는 인간사회의 테두리안에 늘 머물러 있고,
그 인간문제의 해결은 신의손안에 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문제들의 해결들을 찾아, 신의 도움을 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문제해결의 삶의 지혜를 얻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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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된 삶이란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아래에 그분을 흠모하며, 경배하는 일꾼들의 삶들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하심이 임하며, 실현되어간다.
그분을 섬기는 이들의 삶의 의무와 가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목표에 의해 높아지며,
자신들의 인생을 고귀하게 높여 고명한 인생을 살아가게 한다.

하나님나라의 신비는 하나님의 임재의 수수께끼, 하나님나라의 능력과 목적,
그리고 그 나라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의무와 가치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위에 초월된 존재이지만,
모든 만물가운데에, 내재하며, 인간들속에 신의 보좌를 펴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옛적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과 40년동안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으로 임재하였다.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품고 살아가는 것은 여러가지 세상적인 것에 대해,
즉 돈, 명예, 능력, 성공, 여가, 육체적인 멋, 영향력등에 대해,
새로운 대안의 길을 제시하고, 세상적인 가치들을 판단하고,
사람들을 옳은 길로 들어올수 있도록 회개로 인도하는 역활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자신이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는 자각은
세상의 거짓된 자만과 경멸되는 것으로부터,자신에게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하나님나라를 품고 사는 것은
세상적인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자신들만의 아름다운 대안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분을 섬기는 이들에게 있어,

돈은 무엇인가? 돈은 모든 인생들의 필요에 응답하며,
인생들의 요구에 부응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모든 인생의 삶의 전반에 놀라운 세력으로 다가온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세력앞에 굴복하여,
돈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알고 사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를 품고 사는 이들은 돈은
창조자의 그늘아래에 있는 인생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돈을 관리하는 지혜를 통해 돈을 조정하며 지배하며 살아간다.

명예는 어떤가를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명예는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게 하고,
때로는 부를 얻게 하며, 권력을 누리게 하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다.
세상의 유명인들은 그 명예앞에 굴복하며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이 명예는 인생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쉴새없이 불어대는 바람을 잡는 것같은 속성이 있다.
오늘은 아무개에게 내일은 또 다른이에게 계속돌고 돌듯이 사람을 유혹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명예의 일시적인 효력을 알고 있기에 거기에 연연하는 것보다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명예를 추구하는 생을 살아간다.
신으로부터 오는 인간을 향한 명예는 영원히 지속되는 가치가 있으며,
생명을 바쳐서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이 추구하고 사용하는 능력을 생각해보면,
인간의 타락이후에 잃어버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스스로의 인간적인 힘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여러 사술과 마인드 콘트럴과 뉴에이지에 몰입하게 하며,
인간능력의 극대화를 추구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죄를 범한 인생들에게 정해져있어,
그 능력은 인간을 영적인 어두운 세력에 노출시켜 자신을 신으로부터 버림받는 길로 인도한다.
그러나 신이 제한한 인간의 능력은
인간이 신의 품으로 돌아와 그에게 순종하며, 따르는 가운데,
신의 영(성령)의 활동과 인도로 인하여 인간은 죄를 해결하며,
자신속에 있는 죄로 인한 결과였던 자신속에 있는 불안이나, 불만, 무능, 그리고 무지등을 해소하며, 더나아가, 신의 약속안에 있는 구원의 능력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인생의 성공에는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의하면,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 업적이나, 물질적인 판단에 의한 소유나, 소득을 추구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사람들의 성공개념은 그나라의 가치기준을 따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정립과 지속적인 교제에 의한 자기성장이나 성숙에 두며,
그 안에서오는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기쁨이며,
자신의 삶의 가치창출(봉사, 헌신, 섬김, 희생을 통한 열매들)로 인한 자기 실현이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처세로서의 만족된 태도이며,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안에서 통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삶이다.
즉 자신안에서의 자족, 주변인들에게 주는 평안의 영향력,
그리고 자신의 삶의 전 영역안에서 이루는 조화된 자기완성이다.

오늘날의 여가된 생활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여, 비디오게임이나,
엔터테이트먼트(육체적인 충동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영화, 음악, 예술활동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 몰입하며, 자신을 망각하고,
기계화된 대상을 통한 놀이(에 빠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자신의 여가된 시간을 통해,
자기완성에 도움이 되는 여가보내기를(영적인 여행, 묵상의 산책,
자연과의 내면의 대화) 통하여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에 집중한다.

육체적인 멋으로 말하자면, 세상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외형적인 꾸미기에 집중하여
전체적인 육체의 조화를 무시하여,
비조화대칭의 기형적인 성형과 모조된 자신의 외모만들기에 투자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비록 경과된 시간에 의한 육체적인 소모나 낡아가는 외모에
오히려 내면의 미를 가꾸는 일로 인하여,
늙어도 멋있게 늙어가는 젊어도 천박하지 않는
당대의 자신의 인생의 육체적인 자연의 멋을 드러내어,
자신이 소유한 육체를 잘 보존하여,
내면에 담겨있는 질(영적성숙, 인격성장, 자기이해의 발달)로 인한 외모의 그릇으로서의
건강한 자신의 반향을 통한 육체의 미를 나타낸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으로 말하자면,
세상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보이는 것이나, 일시적인 것들에 좌우되는 경향이 많이 있다.
당대에 끝이나는 결과에 매달리며,
미래나 영원세계에 대한 기대를 무시하고,
현재에 안주하여, 현재의 자신의 삶의 반경을 생각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예를 들면, 자신만을 위해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여 살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수명이 끝나는 것으로 자신의 영향력은 가치를 잃어버림) 추구한다.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향력을 중시하며,
일시적으로 사라지질 않는 영원의 가치에 투자하여,
사람들에게 영생의 삶의 가치를 전달하여,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통치안에 머물러 살도록 인도하게 하며 함께,
그나라의 시민의 동반자로(자신만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소유나 물질을 나눔으로써, 다른사람들에게 잘 살수 있도록 영향력을 주며,
그것의 가치는 영원한 가운데에서 신의 보답이 이루어 진다)세상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뿐아니라,
자신의 미래나 영원의 세계에 까지 영향력을 이루어 낸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 어린아이의 심정으로서,
모든 삶의 영역안에서 새로운 시작, 새로운회개, 새로운 응답,
그리고 새로운 열림등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지속적으로 자기자신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는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듣는 이들(세상사람들이나, 구도자들이나,
혹은 불안과 실망을 안고 살면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며,
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 나라의 미션(사명)에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세계에 초대하여,
그의 사역에참여하도록 하며,
자신들의 직업이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구현이 실현되도록,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며,
그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에 베풀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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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인생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신과의 대화이다.
쌍방간의 소통에 근거한 신과 인생의 만남이다.
기도는 신이 인간을 향해 찾아오는 매개체이며,
신의 자기계시를 알리는 인간의 응답의 표식이다.
신은 인간의 기도를 통해 일을 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일과 필요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에게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다.

기도는 능력의 통로이다.
기도를 통해 자신을 창조한 신의 숨결을 느낄수 있으며,
신의 전능한 힘의 세력안에 몰입하게 된다.
기도는 사람의 영혼을 고양시켜, 신의 세계를 맛보게 하며,
신의 창조와 섭리의 능력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기도를 일분하면 자신이 100시간을 투자하는 일보다 더 효력있게,
그리고 능력으로 일을 할수 있다.
사람이 기도하므로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할수 있다.
기도는 자신의 능력을 (120%-자신이 도달할수 있는 퍼센트까지) 발휘하게 하며,

지성에 있어 자신의 지혜가 빛나게 되며, 바르게 생각을 하며,
내면의 혼란이나 충동으로 부터 보호를 받아,
총명한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표현할수 있다.
학자나 지식을 가진 이들이 기도로 하게 되면
자신의 연구에 놀라운 신의 도움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사업가나, 창의적인 일을 하는 이들이 기도를 하고 일을 시작하면,
자신의 생각에 가능성이 있는 아이디어가 나오며,
그 아이디어를 추진할 힘을 공급받아, 그일을 훌륭하게 처리하며,
생각이, 계획을 이루며, 그 계획이 과정을 순탄하게 거치게 하며,
일의 질서있는 순서의 진행을 통해, 자신이 계획한대로 일을 추진하게 된다.

학문을 연마하는 자(학생들)나, 기술을 익히는 자나,
기예를(악기, 그림, 도예, 재능발휘를 통한 창작이나, 작품생산을 이루려는 일들) 닦는 자들이
기도로 시작하며 기도로 과정을 거치게 되면
자신의 순조로운 발군의 실력발휘가 기도를 통해
마무리하는 단계를 통해 기대이상의 효과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기도는 종교생활의 단계를 익혀가는 평생의 작업이며,
접촉하는 신을 이해와 경험하는 장기간의 과정이다.

신앙의 세계에 종교적행위에 있어서
가장 알기어렵고 오랜시간을 들여야 깨닫고 경험할수 있는 과정은
기도를 통해 신을 만나는 과정이다.
진리를 이해하고, 종교적인 체계(이성적학습이나, 이해를 통한 경험습득,
혹은 훈련을 통한 숙련을 이루는 과정을 통한
평안한 종교및 신앙생활에 들어갈수 있다)에 익숙해지는 것은 얼마간의 마음을 결단하고,
숙련되어가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이룰수 있다.
그중에 가장 오랜기간이 걸리며,
고도의 이해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어가는 기도하는 과정은
긴 시간의 투자와 이해와 경험되어지는 오랜과정이 필요하다.

기도하는 세계는 신을 알아가며 동시에 사람(자신)을 알아가며 경험하는 세계이다.
기도를 통해 사람이 신을 이해하고 신의 세계에 접촉하며,
신의 본성과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며,
자신을 향한 신의 의지(뜻)와 섭리(사람의 삶안에서 일을 하는 신의 역사)를 알아가며,
이해해가며, 맞추어 가며, 인도되어,
자신이 도달할 자기인생의 목표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기도없이 사는 인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능력과 지혜와 삶을 유능하게 살아가는 수단을 잃고 사는 것과 같다.
기도없이 사는 자체가 사람을 있게 하고 살게하며
도달하게 하는 신의 의도나 목적을 무시하는 버림받은 삶으로 전락되어 사는 것이다.

기도는 만인이 필요한 인간됨의 자기표현이며, 자기성찰이며,
기도하기는 자기 인생목적의 성취나 성숙에 있어
근본적인 역활을 가능하게 하는 고도의 모델학습이다.

기도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사는 것은
자신이 신앞에서 가장 오만하게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
(인간이 신과의 대화적인 존재로 창조되어,
신과 대면하여 대화할수 있는 능력의 상태에서 떨어져,
신과의 단절과 그로 인한 불안과 무의미와 불충분함의 삶)의 모순과 혼란을 안고
살아도 아무런 대책없이 사는 것과 같다.
기도의 세계를 모른다는 것은 신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사람이
신이 만들어 놓은 이세계의 비밀을 무시하고 사는 것과 같다.
방향없이 혹은 도움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인생의 암초나,
곳곳에 놓여있는 삶을 훼방하는 요소들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 이다.

자신이 기도를 하는 경우에,
사람이 신앞에 있어보는 순간은 자신의 인생의 보내는 어떤 시간의 가치보다 중요한 순간이며,
시간효용극대화의 진행이다.

기도는 여러가지 자신의 삶에 있어, 인생(자신)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며,
무가치하다고 느끼며 사는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하며,
자신이 당하는 불안과 고뇌와 고통과 고난을 통과하게 하여,
신이 사람자신을 위해 이룬 그리고 이루어 가는 지복(행복, 기쁨, 보람, 성취, 만족, 자신의 충만함)의 상태를 맛보며 살게한다.
이런 좋은 것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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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가정이야기

창세기 1:26-28
하나님의 창조의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음,
하나님과 관계의 독특성을 의미,
창조하시고, 말씀하시고, 축복하시며, 다스리게, 정복하게 하셨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인간의 창조의 의미는 남녀의 지음이다.
창2:15-25
하나님께서 남자를 택하사, 에덴동산에 살게 하심,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자유로이 먹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의 지식의 열매를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죽으리라.
하나님께서 남자의 홀로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심,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뼈와 살의 관계를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창3:1-7
뱀이 간교하여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더냐?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먹어도 죽지아니하리라,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리라,
여자가 먹음직한 좋은 것으로 여겨, 눈을 즐겁게하여,
자신을 지혜롭게 할 나무로 생각하였다.
그녀는 그열매를 취하여 먹고, 자신의 남편에게도 주어 그 남편도 먹으니,
둘이 자신들의 몸이 벗은 몸인줄알아, 무화과나누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다.

(최초의 가정이야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을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자신의 존재임을 알게하는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와서, 신의 생김새를 닮아,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통치아래에서, 사람으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자신의 삶의 목적이다.
인생들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인생의 관리자로 살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의 세계에 까지 돌보는 책임을 받은 자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만남이나, 가정이룸은 창조사역중의 중요한 사역으로 사람은 결혼을 통해,
자신이 속한 한 가정을 이루며, 그 가정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따라,
이세상에 대해, 정복하고 다스리는 통치의 역활등을 맡게 된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온 창조의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는 신을 향해 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며, 신과의 교류안에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가정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 관계가 시작할때에,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여자를 통해 자신의 몸의 한부분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여인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한다.
여인들은 자신의 남편을 통해 자신의 삶의 울타리를 세우고,
자신의 안전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겨,
그곳에 안주하며, 만족히 살려는 생각에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품는 사람을 찾게 된다.

가정은 신비스러운 기관이다.
그것은 전혀 성이 다른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한지붕밑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서로가 질적으로나, 성적으로 아주 다른 사이인데도,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남편은 여자의 남자편에 있는 여자를 지키는 자이며,
여자는 남자의 안에 있는 남자의 허전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안사람으로 존립한다.

그러므로 서로 안과 밖이 함께 어우려져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결혼생활이 신비로울수 밖에 없다.
남들이 볼수 없고, 알수 없는 둘만의 은밀한 세계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자신들이 한몸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한 몸을 이루어 가는 명제는
평생을 한 지붕아래에 있는 가정에서 이루어 가는 삶이다.

작금의 가정은 너무 쉽게 이가정의 신비로운 면들을 깨뜨리려 하는 현상들이 있지만,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는 남녀의 가정, 결혼 생활은
서로를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묘한 생활의 연장의 선상에 놓여 있다.
결혼생활을 통해 사람은 다른데서 배울수 없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인생의 깊은 만남과 지속되어가는 인간관계형성과
그로인한 자신의 성품이나, 자질의 개발이 이루어 지게 된다.

물론 부정적인 면으로 부족한 남편과 부족한 아내가
서로의 부족과 허물때문에 서로가 성격이 부딪치고,
상처를 입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자신들은 서로를 통해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

가정은 최초의 이세상에 신으로부터 오는 축복의 기관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정을 통해 인생의 분복을 누린다.
인간의 복의 기관인 최초의 가정의 출발은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 주어진 남녀 자신들의 사명의 명령안에서
신랑과 신부가 함께 한 공동체의 운명을 따라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정을 이룬 사람들에게 생육하라 하셨다.
자녀를 생산하는 복을 주시며, 자녀의 출생을 통해
다음세대에 내려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라는 것이다.
땅에 있는 만물에 대해 관리자로 임명받은 인간들은
가정이나 결혼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들을 넓혀 가는 것이다.
직장을 통해, 인간관계를 통해, 사회생활안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확장해 가라는 것이다.

땅을 정복하라함은 가정을통해,
외로움과 미움과 두려움이 있는 세상의 어두움을 정복하여,
사람들을 품어주는 좋은 인간관계형성과 사랑과 자신감의 사람들이
가정안에서 많이 나와
이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세상의 비참한 부분들을 향해, 소망과 빛남과 밝음과 맑음으로 나가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절망을 소망으로, 주변 사람들의 성격의 어두움을 빛으로,
주변 사람들의 성품의 흐릿함을 밝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흐림을 맑음으로 바꾸어가는 역활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혼생활, 가정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검은 머리가 흰머리(파뿌리)가 될 때까지,
생활에서 오는 고민과 고생과, 그리고 고통스런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변함없이 남자는 밖에서, 여자는 안에서 가정의 테두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뜻밖의 일로 격정을 겪으며,
서로에 대해 불신과 상처을 입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재정관계로, 혹은 자녀문제로, 아니면, 자녀교육문제로,
사소한 습관의 차이로, 혹은 몰이해나,
잘못된 의사소통의 문제로 여러가지 일들이 부부사이에 가정안에서 일어난다.

행복한 가정에 불의의 불청객인 뱀이 나타나 여인을 유혹한다.
그 가정에 신이 명령으로 내린 제한에 도전하는, 유혹받지 말았어야,
뱀의 유혹을 받아, 뱀이 충동하는대로,
그 열매를 바라보니, 보기도 아름답게 보이고,
자신을 지혜롭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먹지 말아야 할 금단의 열매를 보고,
여인은 그것을 따 먹고 그녀의 남편까지 그 열매를 먹어버렸다.
인간의 죄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명령을 어기고, 인간의 제한을 넘어섰을때에,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부조화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자신들이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습은 사람이 자신안에서 자신에 대한 불안을 보며,
바로 가까운 부부사이에서 서로의 소외와 비난를 경험하며,
가정이 딛고 삶의 터전이 황량하게 변해가는 것을 경험하며,
평생 삶을 사는 과정이 땀과 고뇌가 섞인 생활을 살아야 하는 것을 감수해야한다).

지난 날에 그들은 신의 통치하에서 순종하며 살때에는,
그 부부 자신들의 가정생활이 행복하며, 즐거운 나날이었으나,
그 행복한 가정에 먹구름이 덮히게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행복한 가정에 여러가지 불미한 일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부부사이의 순정을 깨는 결혼밖의 간음이나,
혹은 부부간의 부정한 행실로 인한 갈등과
그것의 결과인 별거, 그리고 이혼으로 발전하는 경우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인간의 죄와 연결이 되어있다.
남편의 부정이나 혹은 간음, 부인의 간음이나 혹은 부정
이런 것은 부부간의 정상적인 관계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가정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작금에 메스콤을 타는 유행어중에,
혼외정사, 혹은 프리섹스 혹은 스와핑부부게임이니,
하는 비정상적인 위험한 부부간의 관계모임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타락한 사회의 도덕불감증에서 오는
아주 더러운 사람들의 악한 행태들이 주변에 있다.

섹스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소중한 선물이며,
사람들이 결혼과 정상적인 가정생활중에서 누릴수 있는
가장 깊은 단계의 인간의 접촉이며,
인간이 즐길수 있는 신비한 것이다(섹스를 통해 남녀는 서로가
자신들의 영혼들의 통합이 이루어 짐:soul tie,
그러므로 섹스를 할때에 정상적인 관계에서 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행위는 몸만을 섞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악행이란 것, 죄악이란 것은 신이 내린
좋은 도구나, 선물들을 악용이나 남용하여,
인간의 타락한 욕구나,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로 나타낸다.

인간이 짓는 죄중에 가장 더럽고, 자신에게 심각한죄중에 하나가,
자신의 몸으로 짓은 성적인 죄들인 것이다.
이죄는 범죄한 인간이 자신의 몸에 짓는 죄로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부정한 성적인 접촉이나, 관계에서오는 동성애로 인한
비정상적인 인간성의 변질과 그로인한 모순된 삶,
성도착적인 행태들, 매독이나 성병, 그리고 에이즈등은
신이 내린 소중한 선물인 섹스의 법칙을 어기는 데서 오는
자신의 몸에 받는 신의 엄중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섹스에 대한 이해와
거기에 대한 자신의 건전한 철학위에 세울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한 가정이나 건겅한 가정을
이룰수 있는 요인이 몇가지 더 되는 것은
혼전정조(남녀동일함)에 대한 자기순결을 지키는 것과
결혼후에는 혼외정사에 대한 유혹을 받는
(마치 이브가 자신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금단의 열매를 바라보고 따먹는 것처럼,
혼외정사의 유혹을 받기가 쉽다) 것을 이기는 것들이다.

최초의 가정이야기는 인류시조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혹은 남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우리들 자신들의 이야기이며,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그리고 가정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정에 대한 교훈, 인간성에 대한 교훈등을 배울 수 있다.
더 나아가 상한 가정, 병든가정,
그리고 깨어져 가는 가정등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길은
가정을 세운 신에게로 나아가 그의 지혜와 조언을 구하며,
그의 치유와 회복의 힘을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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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신부이야기

미련한 신부이야기(마태복음 25:1-13)

그때 하늘나라는 마치 저마다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이다.
열 처녀중에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지혜)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졌으나,
기름이 없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에 기름을 채워 두었다.
그러나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자, 신랑이 온다. 맞으러 나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녀들은 다 일어나 저마다 등을 손질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는데 너희기름을 좀주겠니? 하자.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기름을 나눠 주면 우리도 모자라고 너희도 모자랄거야.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지 그러니?’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사이에 신랑이 왔다.
그래서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후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신랑은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기다림이란 누구에게나 힘든과정이며, 인내가 필요하다.
좋은 일을 앞두고 있을때에는 더욱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다리는 그기간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것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차이는 기다리는 약속시간이 다가와서,
일을 만나보고, 직책에 올라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된다.
왜 내가 이때를(일을 할때에, 기회를 얻을 때에, 직책에 오를때에)
준비하지 못했나를 후회하게 될것이다.

신랑신부가 서로 약혼을 하고 난후에
결혼하는 날까지 서로 자신의 몸을 지키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약혼을 한 신분이라면 약혼한 사람답게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지키며,
장차 주어질 결혼에 대한 설계와 더불어 미래를 대비하는 준비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훨씬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시작할수 있다.

밤에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시간이 가까올수록
그들에게는 힘든 시간이며, 지칠수 있는 기간이다.
누구나 깨어있는 저녁시간에 오면 참 좋을텐데,
모두가 지쳐 잠이 오는 그시각에 신랑이 온다는 소식은 인간에게,
때를 기다리는 것과 준비없이 갑자기 일을 당하면,
더 힘든 경험을 겪는 것처럼,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필요한 것이며,
인생의 일들중에 기다림에서 오는 일들이 많이 있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지,
우연히 오는 기회도 있지만,
대개는 준비하고 대기하는 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 주변에 가끔 버스지나가고 난뒤에 버스스톱을 외치며,
손을 흔드는 경험과 같은 일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왜 천국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 비유하였을까?
천국은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준비해야 들어가는 곳인가?
천국은 준비된 자, 혹은 기다리는 자가 갈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저 인생을 마음대로 살다가 갈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히 천국을 구하고 거기에 가려는 사람들에게,
결혼식을 준비하는 신부로 비유하여,
신랑을 맞이할 처지의 신부로 둔 것이다.
신부는 결혼으로 자신의 삶과 운명이 신랑에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듯,
신부인 사람은 하나님에게 대한 자신의 준비와
기다리는 과정으로서의 인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있다.

천국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심정
(결혼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은 자신의 삶의 운명 전체를 내어던지는 마음과 같다.)
으로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다.

필자가 결혼을 하려 할때에, 신랑은 되어 보았지만 신부는 되어 보지 못하는데,
집사람은 결혼할때에, 결혼의 긴장함이나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감정이 북받치고,
부모님에게 눈물을 보일만큼 심각하고 지대한 것이었다.

신랑의 입장이 었던 필자는 남자들이 겪는 결혼에 임하는 경우는
군대에 가는 것이나,입사시험을 치르는 것이나,
비슷한 자신의 일생에 또 하나의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덤덤하였다.

결혼은 남자에게는 여러 일들중의 중대한 일을 치루지만,
결혼은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달린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여자들에게 남의 집(가문, 미국인들은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는것이다.
한가문에 있는 여인이 다른 가문으로 호적을 파서,
새로운 가문의 사람으로 들어가는 결혼은 여자(신부)에게 있어서는
과거에 자신이 살았던 집과는 전혀 다른 가문에 새로운 인생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결혼은 여자에게 중대하고도 소중하며, 진지한 경험이다.

결혼식장에 신랑이 준비하는 것은 간단한 예식복을 입지만,
신부는 신부화장에서부터 신부의 결혼식 옷(드레스)을 입는
상당한 시간이 요하는 준비를 해야한다.
그렇게 신부에게는 결혼식날에 많은 준비와 자신의 몸을 가꾸어야 하듯,
여기서 본문이 주는 교훈은 인생의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
그 분안에서 살려는 이들은
신랑(하나님의 아들로 비유하였음)을 맞이할 마음 준비와
다가올 신랑과의 만남을 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여행을 하거나, 출장을 가려할때에, 준비물을 챙긴다.
어느 사람은 일찍 감치 준비하는 경우,
충분히 시간을 두고, 준비하는 습성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닥쳐서 준비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는 시간까지 준비하려는 게으름이나 지체함이나,
혹은 미리 해놓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시간이 다 되어가는 상태에 준비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늘 약속시간에 늦게 도착하기 마련이다.

코리안 타임이란 것을 겪는 사람들은 준비시간을 약속시간에 맞추어 늦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준비시간을 약속시간을 약속한 시점에 두고 준비하는 경우,
예를들어 내일 등산을 갖자는 약속이 시작하는 때부터 준비하는 경우와
약속시간을 맞추어 준비하는 경우일 것이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준비하는사람은 허둥지둥 시간에 닥쳐 준비할수 밖에 없고,
등산을 가서는 가져와야 할 것을 잊어버리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을 약속하게 되는 시간으로부터
맞추어 준비해가는 사람은 약속시간까지 있는 충분한 준비기간을 갖고
가기에 미비됨이 없이 준비를 잘하여 좋은 등산을 할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일을 잘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태도이며, 기술이며,습성이다.
미래의 일을 내다볼 줄아는 태도이다.
여기에 나오는 슬기(지혜)로운 다섯신부는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였다.
지헤로운 신부들은 등불이 밝을때에는 괜찮으나,
불을 밝힐 기름이 다 되어가는 것을 대비하여, 그들을 신랑은 맞이할수 있었다.

두신부들의 차이는 준비하는 것, 지혜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자가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며, 기회가 오기를 대기하고 있다가 기회를 낚아 채는 것이다.

미련한(어리석은)처녀들은 앞에 것만을 보려는 태도,
현재 자신의 손에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신부들은 자신의 등불이 지금 밝혀있는 것으로 만족하여,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여,
정작 신랑이 올 시각에 자신의 등불을 밝힐 기름이 다 떨어지고서야
기름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어지만,
후회스럽게도 신랑과 결혼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이것은 늦은 막하게 하고 싶은 것다하고나서 나중에 하나님을믿어보게다는 사람이다.
인생의 시간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기름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생에 있어,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힘이며, 열정이다.
인생을 활동적으로 일을 하려면 자신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
건강이 뒷받침이 되고, 무슨일을 하려고 할때에,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재능이나, 기술이나, 학식이나,
자신의 일을 이룰 여러 요소들이 필요하다.
자신이 할수 있을 힘이 있을때에 못하고
쓸데없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게 되면, 늙어서 후회할 일 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본문이 주는 크리스챤의 믿음의 예를 든다면,
기름이 자신의 믿음생활을 유지하는 데 왜 필요한가?
하나님을 알고, 배워가고, 경험해 가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신앙인의 경력이나 직분이나, 혹은 과거의 경험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모시고 살아가는데에는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분으로
늘 그분은 신앙인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마치 미래를 사는 것과 같아, 앞을 알수 없는 삶을 살아가듯,
자신의 앞길을 밝혀줄,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해야 살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고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주신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부단히 그분에게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지혜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과 신앙생활을 유지할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여기 나오는 미련한(어리석은) 신부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돈을 갖고 있는 자가 돈을 쓸줄 모르는 것과 같고,
예를 들어, 어느 갑부가 재산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으면서, 남을 도와쥐는 커녕,
자신이 쓸수 있는 것도 못쓰고,그는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던 이가 남에게 주는 자신의 그 값진 것을 몹쓸 것으로 오용할때에,
그 아름다움은 천박하며, 타락하여 냄새나게 하는 것과 같고,
권투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 자신의 그주먹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는 데 잘못활용하는 경우라든지,
혹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학식으로 남의 유익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교만의 밑천으로 삼는 것이나,
인기 있던 정치인이 좋은 시절에 국민들에게 바르게 봉사하지 못하다,
인기가 사그라 져, 후회할 날이 있는 경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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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적인 표현양식과 메시지

크리스챤의 메시지는 시대에 맞는 자신의 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시대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시대를 판단하고,
시대를 인도하며, 시대를 구원하는 역활을 한다.
메시지는 영원성과 구원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사회를 바르게 선도하는 역활을 한다.

크리스챤 메시지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여성적인 신학표현과
여성적인 신학화모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런 요구는 인간사회(예: 교회안에 있는 많은 여성들)의 한축인
여성들의 위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며, 인간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대한
신학의 포괄적인 자기표현이다.

신학의 여성적인 표현은 인간구원의 전인적이며,
신학의 자기표현의 다양성과 효과성을 제공한다.
신학의 개념표시는 그 당시의 문화적이며, 사고적인 바탕에 의해 나온 말로서,
당시의 인간들의 사고개념이나 신이해를 나타낸다.

가부장적인 신학적표현에 대해
남성우위의 사회에서 겪고 당하는 남용으로 인한 상처에 대해
여성적신학 표현은 인간치유회복을 위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여,
인간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해할수 있는
인간존엄의 신학적 이해의 기반을 마련할수 있다.

신학의 여성언어의 표현은 인간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역활과
여성들의 특징을 대변하는 신학적 표현으로
인간사회에 특히 기독교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수 있는 신학적 자기표현이며,
신학의 자기 역활에 대한 재발견이다.

통합적인 하나님의 인간사회의 개입역사에 대해,
여성적인 신학표현은 여성의 특성인 생명, 보호, 치유, 회복, 양육의
기능을 발휘하는 기독교의 메시지의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의 여성표현은 또 남성위주의 신학적인 표현과는
다른 면으로서의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과 활동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이며,
유기적인 하나님 통치(하나님은 양성을 초월하신 존재)의 신학적인 표현의 행동양식이다.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사회에 몸담고 있는 계층이나, 개인의 신분간에 필요한 요구나
상황적인 이해에 대해 바른 개념이나 생각들을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접근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른 신학적인 해석을 내릴수 있도록 하는 융통성이 있는 신학적인 개념들을 제공해야 할것이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의 언어사용은 다양한 사회적인 현상들과 요구들을 이해하며,
복잡한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구조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지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 언어가 교회안에 머물러 있는 제도화된 언어가 아니고,
유기적인 언어로 인간사회에 다양한 구조안에서
(작금의 일반사회는 교회안의 사회보다 훨씬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
기독교메시지를 전달할수 있는 언어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섬김의 개념이나 종의 정신은
일반적인 사회적인 사회개념의 종의 개념과는 다르다.
신분계급이 낮은 사회나, 혹은 여성사회에 그리고 아이들사회에 통용되는 종의 개념이
기독교정신에 의한 봉사개념의 변형으로 인하여
기독교사회나 공동체안에서 섬김의 역할로서 종의 정신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어두운 사회적인 현상이라 할수 있는 빈부격차, 계층간갈등,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인 갈등이나 분열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대안을 제시할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리스도화된 종의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의 사용을 통해,
공동체사회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종의 정신을 실천할수 있을 것이다.
종적인 사회, 가부장적인 사회의 사고시스템에 대해
공평과 정의의 사회가 실현되어지도록,
기독교의 여성적인 역활인 치유와 회복들을 알려야 하며,
섬김을 나타내는 가치있는 개념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일반사회적인 개념의 종은 계급사회나, 종적인 사회의 권위나,
권세에 굴복하거나, 굴종하는 약자의 위치의 상표로 인시되지만,
교회안에서는 더 강한자, 혹은 힘있는 자가 교회의 공동체안에서 섬기는 자로 거듭나,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정신을 실천하여,
일반사회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이나 상처가 생기게 하는 종의 일반사회적인 개념에
대한 섬김이의 대안적인 제시나,
실현된 하나님나라의 모형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용어의 남성적사용만을 고집하지 않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상처와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하나님의 상처를 감싸주며,
치유하며 보호해주는 성품이 표현되어지는 것이
훨씬 상처받은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인격에대한 여러가지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활동의 충분함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는 신학적인 필요한 표현양식의 다양화가 요구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적인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을 여성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는
신학적인 가치있는 표현활동이며, 가부장적인 신학표현의 한계를 넘어가는 효과가 있다
(하나님의 어머님의 역활은 훨씬 인간구원에 있어 필요한 하나님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사역에 여성적인 면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사회안에 가치있는 여성적인 역활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 하는데 기여한다.

여성신학적인 언어는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경험의 표현이며,
가부장적인 체계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의 상황하에서 나온 삶의 언어들이다.
고로 지금세대에 필요한 신학적인 시도로서,
전통적이며 강압적인 관계에 대한 변형을 통해
남성위주의 주류문화의 지배에 대한 평등을 추구하는 신학적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여성들에 대한 종(섬김)의 개념의 해방은
여성들에게만 더이상의 봉사의 의무를 지우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들의 제자도의 언어는 남성위주의 가부장적인 제자도의 배타적인 것과
왜곡된 면들을 깨뜨리는 가능성을 제공하며
가부장적인 교회안에 인간평등을 심는 것과
그 종적인 인간관계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갈등의 현장을 치유하는데 기여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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