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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19
    믿음예찬
    목동
  2. 2006/11/18
    사람들의 필요
    목동
  3. 2006/11/16
    생각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
    목동
  4. 2006/11/15
    신을 높이는 인생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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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11/14
    한 크리스챤자아발달모델
    목동
  6. 2006/11/12
    친구와 함께 어울리는 인생이기를
    목동
  7. 2006/11/12
    결혼과 결혼생활이란?
    목동
  8. 2006/11/12
    두뇌의 기능
    목동
  9. 2006/11/10
    영혼추구의가치
    목동
  10. 2006/11/10
    용서와 화해의 사역을 위한 제언
    목동

믿음예찬

인간사회는 쌍방간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 믿고 혹은 서로 믿어 주는 약속의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신용사회라는 말도 특히 경제적 생활에 대해
각 사람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정능력이나 관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크레디 이라는 제도를 통해, 거래나 재정 관계에서 믿음으로
서로 거래 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크레디카드를 발행하여 제시하는 회사가
수여자에게 돈을 감당할 재정능력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를 신뢰하고,
카드를 내주며 그것을 사용하게 한다.
만일 크레디카드 사용자가 지불능력이 없는경우에 파산이 되는데,
미국에서는 자신이 감당할수 없는 재정관계나 부채가 발생시에는
파산신고를 하여 자신을 파산자로 설정하여,
자신이 재정을 감당할수 없는 자로 판정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의 재정능력에 대한 믿음의 상실일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믿음은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버스나 택시를 탈때에도 운전을 하는 기사들의 실력을 믿고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처럼,
모든 일상에 일어나는 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에 생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남자들이 이발소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이발사에게 자신의 얼굴을 맡기고
수염을 베는 면도를 하게 하는 것도 일종의 신뢰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자들인 경우에는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가 산부인과를 의사를 신뢰하고
자신의 몸과 아이의 생명을 그 의사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사는곳마다 필요한 인간의 가져야 할 성품이며,자질이다.
청춘남녀간의 연애를 하고, 혹은 더나아가 서로 뜻이 맞아,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하는 결혼에도 서로에게 믿음과 깊은 신뢰심이 요구된다.
그들의 연애나 결혼관계에 있어 서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서로 상대방의 인격을 맞대어,동등한 관계에서 성립되어있으면,
그 관계는 더 돈독하며, 건강한 남녀간의 관계라고 할수 있겠다.

정부와 국민사이에도 서로 보이지않는 믿음의 관계가 성립된다.
정부는 국민을 믿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며,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그들의 리더쉽을 따를때에,
좋은 국가의 상태를 유지하며, 발전하게 된다.
어느 단체의 리더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서로간의 신뢰의 관계가 필요하다.
리더가 사람들에게 할수 있는 중요한 것중에 하나가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믿을수 있는 사람으로 각인되도록
그들에게 신뢰심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서로를 믿어주는 신뢰의 관계가 가정을 든든하게 세우며,
자녀의 건강한 성장을 통해, 가정의 발전을 이루어 가게 된다.
자녀가 조금 잘못했을때에, 자녀들의 인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불신의 말을 통해,
부모와 자녀들의 신뢰의 관계가 손상을 입게 된다.
자녀또한 자신들의 부모들을 향해, 끝까지 그 부모들의 사랑과 돌봄을 신뢰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그 가정은 서로 신뢰하는 가정이 되어,
자녀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험한 세파의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겪어도
능히 그 어려움들을 헤쳐나갈 힘을 가정으로 부터 공급받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믿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은 신뢰심을 갖고 있으면,
그는 무엇이든지, 자신에 대한 자질과 능력을 믿고 있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경우는 자신있게 아무것도 할수 없을 것이다.
어릴때부터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들의 인격을 믿어주는 습성을 통해,
자녀들이 자신에 대해 믿고 신뢰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의 이메지(자아상)를 가져서,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수 있을 것이다.

믿고 사는 사람과 무엇이든지 의심하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모든일에 있어 믿음은 인간의 삶을 바쳐주는
근본적인 토대의 사람의 가져야 할 성격이며, 특성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에게 사기를 당했다든가,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고,
혹은 자신의 신뢰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경우에,
모든 것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럴경우에는 정말 자신이 믿을수 있는 사람과의 지속적인 관계나 가르침을 통해,
그런 불신하거나 혹은 모든 일에 의심하는 생태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 태도로 살경우에 현실생활에서 소극적이기 쉬워지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발전하기 쉬어지며,
자신의 미래의 전진적이고, 진취적인 삶에 장애가 된다.

물론 우리가 처음 만난 사람을 무조건 신뢰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살필줄 아는 사려깊은 분별력이 모든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귀어 보는 기간이나 겪어보고 나서 그 사람의 어떠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서로 믿어주며 서로 신뢰하는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더 발전시켜주는 삶의 환경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신뢰하는 사이가 되려면
자신부터 믿어주는 사람,
그리고 남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이 믿음의 태도는 원래 어디서부터 왔는냐 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이땅을 살권한을 부여하는 가운데에,
그들은 신과 신뢰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신의 돌봄의 테두리안에서 서로 신뢰하며,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의 상태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최초의 사람들이 얼마의 기간을 사는 동안,
삶을 살면서, 신의 의도를 위반하고, 신이 명하는 바를 거역하게 되어,
신과 인간의 믿음과 신뢰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이 사는 삶의 환경은 믿음이 깨어진 상태에서 살게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태어날부터 이 믿음과 신뢰의 관계를 계속유지하면서 살기란 쉽지않고,
이 믿음이 무너지면서, 인간안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고,
사람들이 사회에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갈등과 투쟁과 전쟁이 야기되어, 사람들이 사는 곳이 험악하게 되었다.

그런 인생들에게 신은 찾아와서,
그들에게 잃어버린 믿음의 힘를 주며,
그들과의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찾아 가는 것에서부터,
신과의 만남을 통하는 것이나,
그리고 더 나아가 신과의 모든 교제안에 살아가는 데에,
사람들이 가져야 할 제일 필요한 것은 이 믿음이다.
사람들이 신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것도
지식을 추구하는 이성의 능력으로는 신을 알수 없으며,
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모호하게 된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더듬어,
자신이 더듬는 대로 인식하는 정도밖에는 안된다.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자아의 눈을 떠야, 신의 본질을 알게되듯이,
신을 추구하는 것은 이성의 도구로 한계가 있으며,
믿음의 단계에 이르러야 신과의 관계설정을 통해,
신과의 신뢰의 교제의 경험을 통해 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경험하는 것은
단지 단순히 이성의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신뢰의 관계의 형성과 교제를 통해,
진정한 앎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는 것도 지식의 단계를 넘어서,
확신하는 단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연구한 이론이나 발견이나 발명이 효력있는 사물이 되는 이치일 것이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그 믿음은 필수적이며,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모든 일을 추진하고자 하는데에,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밑거름이 바로 자신이 가져야 할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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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필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말에 따라 사람들은 무엇에 대한 필요를 통해,
자신의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는 것으로 추구하며,
그 필요성은 자기발전과 사회발전을 의한 좋은 동기부여를 하게된다.
사람은 자기 필요를 따라 살다보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게되며,
자신의 필요를 의식하여 살았기에,
그 필요의식를 좇아, 자신이 가져야 할 분명한 이유를 확신하게 하며
그 의식을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도록 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 필요의식을통해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명분을 가지고하고,
무엇이든지 그 필요를 이룰 일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하게 한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인 동기부여를 하고,
그 동기부여를 통해 사회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여
감추어진 것을 발견하고 혹은 새로운 것을 발명을 하게되어,
인간 사회의 발전과 성장을 이루어 온것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50년이상전에 동족간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으로 온국토가 폐허가 되어,
당시에 살고 있는 한국의 국민들이 가장 삶의 환경에 대한
모든 필요에 대한 절박한 경험을 하였다.
배고픔과 헐벗음과 파괴와 피폐한 환경등 사람들이 살긴 힘든 시대를 거쳐 오면서,
국민들의 마음속에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려는 발전과 성장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일어나,
짧은 기간에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의 삶의 조건이나 사회의 환경등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해 왔다.

이 사회적인필요나 국가적인 필요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수 있다.
옛날 60,70년대의 필요는 잘살아 보세라는 명제로 주로 물질적인 경제적인 부와
잘사는 삶의 양적인 성장환경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였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의 필요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좀더 사회나 세계에 대해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영향을 주며,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면서,
잘살아보는 일에 대해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정신적인것과 정서적인 (문화활동의 수준높이기나, 혹은 사회보장이나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적인요구나 사회체제의 긍정적인 변화)
잘사는 일을 실제적으로 얻고 살려는 필요를 추구하는 세대일 것이다.
그 두시대의 사람들의 필요는 이렇게 다르다.
그리고 각 시대에 맞는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일이 정부나 개인이나,
그 시대에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을 6,70년대처럼 사는 것은 넌센스일 것이나,
어려운 시절에 살았던 고생하는 정신으로 산다면,
오히려 삶의 질을 잘 높이며,
보다 더 발전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위해 살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개인의 필요의식도, 어릴때와 청소년기의 때와 성인이 되어
장년의 필요와 노인의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르며,
그리고 각시기의 강한 필요의식은 그시기마다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동기부여하며,
그시기안에서 자기성장이나 발전을 가져올수 있다.
인생의 지혜중에 하나가 각시기에 가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필요를 좇아 집중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그 필요에 충족하고자 하는 것일것이다.
그 시기에 자신의 필요에 민감한 만큼 그 시기를 충실하게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에게 지금 남은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삶을 정리하는 쪽으로 살라고 말하면,
아직 삶을 펼쳐보지도 못한 그들을 모욕하는 것일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기를 그렇게 거꾸로 살아가는 지혜에는 역설적인 면도 있다.
노인이 젊은이처럼 살려고 하면 더 자신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리고 몸을 튼튼히 하려고 열심히 운동하여 뒤받침된 그 건강한 몸으로,
무엇이든지,새로사는 것처럼 젊고 건강하게 생활하게 된다.
예를들면 노인이 대학교에 들어가 노인 대학생처럼 사는 경우일것이다.
이렇듯이 젊은 노인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있게 삶을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면에, 젊은이가 노인처럼 삶을 아주 소중하게 얼마남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다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소중한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순간마다, 여러가지 환경의 삶을 통해 각자의 필요의식를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시인 필요에 민감한 사람이 있는데,
그 필요는 쉽게 이루어져야 할 필요이다.
그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의 생존에 요구되는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필요한 물질을 구하며,
여러가지의 생활의 필요를 얻으려하며,
그 당장에 필요한 것을 얻은 것에 만족하려고 한다.
그런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에게 보다 나은 발전에 대한 기대나 동기를 갖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필요일 것이다.
사람의 가치나 삶의 의미보다는 일시적인 효과적인 결과에 매말리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필요를 그 일시적인 것에만 극대화하려는 경우이다.

단순한 일시적인 필요를 넘어서는 것은
자신의 성장이 나 발전의 필요을 따라 장기적인 필요를 따라 사는 경우이다.
그 장기적인 필요의식은 많은 세월을 기다리며 준비하여,
그필요를 채우려는 동기로 인하여, 자신에게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하여,
자신의 성장이나, 발전을 이루어 간다.
어릴때에 어렵게 자란 사람들중에, 어릴때부터 장기적인 필요의식에 대해,
눈을 뜬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환경이나 처지를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공부에도 전념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필요의식가운데에 자신의 노력이나 성취를 통해 성장이나 발전을 이루게 된다.

사람이 사는 데에 무엇이 필요한가? 의식주의 문제인 일차적인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기본적이면서 절박한 필요라 할수 있겠다.
산 입에 거미줄칠정도가 되어버리면,
사람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먹을 것만 찾아가게 된다.
단지 그들의 생존을 위한 음식을 얻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이부분은 어느 사회이든지,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의 어느 필요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에만 매달려 사는 것도,
사람을 그것을 넘어서는 사람들 자신들의 필요에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요구만 추구하는 인생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만 가지고 살면, 사람의 삶이 천박하여,
자신의 삶을 낭비만 하는 무의미한 인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먹는 것이 해결되면, 사람들은 집을 갖추고,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 집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
옷은 유행을 좇아 무엇을 사서 입을까 신경을 쓴다.
사람들 사이에 자신을 나타내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특히 외모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좁은 땅에서는 사람들이 더 심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 만나는 일로 자신의 드러나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
이런 필요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자신의 수입을 소비하며,
거기에 충족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필요를 채워가고 있다.
그렇게 외모관리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진정한 자신의 필요를 채울 기회를 소홀히하여,
자신의 삶을 충실과 진정으로 체워줄 내면의 정신적인 필요나, 영적인 필요를 멀리하게 된다.

그 다음단계의 필요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만족해지려는 필요로,
정신적인 필요를 위해,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정신적인 노동을 통한 자기의 필요에 부응하려 한다.

더 나아가 정신적인 필요에는 여러가지 사람에게 필요한 요구들이 있다.
자신의 생존에 대한 안정을 얻으려는 소속감의 요구가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소속감은 가정을 통해 얻게 된다.
경제적인 동기에 의한 여러 단체나,사업체나, 자발적인 동기에 의한 사회기관이나,
종교기관에 소속하는 것이나, 동호인모임이나, 친우모임등에 참여하여 그 필요를 채운다.

그리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인정을 받으려는 필요를 또한 가지고 있다.
이 필요는 다른사람과의 관계에서나,
혹은 자신의 일들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동기로, 자신의 유일성과 객체성을 인정받으려 한다.
이 필요는 자신의 삶의 필연적인 동기를 부여하여,
무엇에든지, 자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하여,
거기에 자신의 생활의 의미와 삶의 만족감을 얻게 한다.
이 자기인정을 받으려는 필요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가 소속한 곳에 필요한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단체나 기관을 발전시키는 역활도 하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일들이나,
삶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인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필요가 있다.
자기 성취를 얻으려면 자신의 삶속에 있는 장기적인 시간과 지속적인 자기노력의 투자와,
그것을 얻으려는 단계마다의 과정들이 있다.
단기적인 성취하고자 하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장기적인 성취를 얻으려는 일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일들중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내가 이루어야 할 성취적인 일들을 갖고 사는 것이
인생을 길게 그리고 흔들림없이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자기 성취에 대한 강한 동기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분야에서나
혹은 자신들이 속한 모든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며,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필요의식이 되어 자신의 삶을 보람있고 가치있게,
그리고 생산적인 인생을 만들어 간다.

언제나 사람은 가장 고상한 필요를 따라 살아야 할 명제가 있는 것은
사람이 육체적인 몸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고,
이 몸안에 담고 있는 영혼이나 생명의 가치
(이 가치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는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수 없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있어야 온 천하도 있기 때문이다) 가
너무 소중하기에 그 영혼이나 생명의 필요에 강한 반응을 보일 동기부여가 있는 것이다.

이 영적인 필요는 일시적이지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으며,
인생을 약화시키지도 않으며, 인생을 헛되게 낭비하지도 않게 한다.
그리고 영적인 필요는 가장 인간적이며, 신앞에 갖추어야 할 사람됨의 도리의 필요이다.
영적인 필요를 제치고, 육체적인 필요나,
정신적인 필요를 아무리 따라가도 사람은
자기자신의 생명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자신의 전체적인 삶의 필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인 요구는 평생 사람을 만드는 작업이며,
결국 신앞에서 자신을 구원할 명제의 필요이다.
사람이 신으로부터 나와서 신에게로 돌아갈 운명이라면,
사람은 자신의 소속감이나, 인정감이나, 성취감이 그안에서 만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그리고 그 필요안에서 자기인생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신은 사람의 마음깊은 곳에 그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영혼의 욕구를 심어 놓았다.

사람이 신을 떠나 살수 없는 것이
신을 없다고 부정하는 무신론자의 의식속에
신의 의식이 뚜렷이 부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신은 자신에게 부정된 존재이나,
그 신은 엄연히 그 사람의 인생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신에 대한 그릇된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흐리게 하며,
쓸데없고 무익한 일로 자신의 낭비를 만들게 되어,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무시하고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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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

사람은 생각(두뇌안에 있는 감정이나, 감각의 흐름과 연관된 논리적인 활동의결과)할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늘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생각을 할 줄아는 인생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기가 겪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할수 있다.
그런데, 생각없이 살아간다고 가정해보면, 상상하기가 조차 싫은 시도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각이 없이 혹은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생각하는 자신의 두뇌의 기능이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며,
그 기능이 감퇴되어, 영혼이나 정신에서 나오는 생각이 이끄는 대로 살지 않고,
몸의 육체의 본능에서 나오는 원시적인 생각하는 것에만 의존하여 살아간다고 할수 있겠다.

사람은 생각의 능력에 따라, 각기 인생의 성장이나, 성숙도의 차이가 있다.
피아제의 인간발달의 이론에 의하면,
두뇌의 생각하는 능력정도 에 따라 인생의 여러 단계(어린, 청소년, 어른)를 구분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보는 대상을 막연히 보는 것에서 생겨나는 원시적인 생각하는 단계가 있으며,
학교 연령의 나이가 되면, 사물과 대상을 보고 구체적인 생각을 하는 능력의 단계로 발전한다.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이나
추리하는 능력을 배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단계로, 다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훈련을 터득하여,
사물에 대해 종합적으로 생각하는 단계가 있으며,
그리고 더나아가 생각을 정리하여,
시스템적인 생각을 할줄 아는 단계와
그리고 역설적인 원리들을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왜 공부를 하는 가 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사람이 공부를 해나가는 중에, 주어진 문제들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
그 문제들을 풀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두뇌의 암기하는 기능이나 사물을 생각하는 기능의 적용을 통해,
두뇌의 생각하는 작용을 지속적으로 활성화를 시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언어 습득이나 확대를 통해
자신의 생각하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터득하는 훈련을 하게 되어,
자신의 생각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생각을 조직화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개발하며,
그리고 자신의 생각하는 정신세계를 체계화하여,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생각에는 크게 생각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는가에 따라,
즉 생각의 출처에 의해 육의 생각이 있고, 영의 생각이 있다.
육의 생각은 육체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육체의 본능이 욕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생각이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가 선한 상태 였으나,
신앞에 죄를 범하므로 그 본성의 기능이 변질, 타락하여, 악한 상태로 있어,
그 본성안에 있는 육체의 생각을 좇아가다 보면,
사람들의 몸을 낭비(소비)하게 하고, 억제하지 않으면,
나쁜 방향으로 인생들을 몰아간다.

영의 생각은 영혼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인간의 육체를 조절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타난 현상에만 반응하지 않고,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나,
자신을 보다나은 상태로 발전하게 하는 생각이다.
이 생각에서 신을 생각하고,
영혼의 세계를 생각하고,
도덕적으로나 양심의 기능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하며,
생각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며,
인생을 고상하게 하는 생각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차원의 구분에 따라,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있다.
1차원의 생각은 육체가 그 출처가 되며, 본능의 욕구나 나타난
사물이나 현상에 반응하려는 생각이다.
2차원의 생각은 두뇌의 기능이 활동으로 생각하는
정신세계의 여러가지 현상이나 이념들을 생각하는 생각이다.
3차원의 생각은 영적인 세계의 것들을 생각하는 생각이며,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나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단계의 생각으로
사람의 육체나, 정신의 세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생각이다.

생각의 결과의 영향에 따라 나눌수 있는 자신의 삶에 새로운 아이디어나,
삶에 보탬이 되게하는 창조적생각이나 생산적생각이 있고,
반면에 자신의 삶에 해를 가하고, 자신을 파멸케하는 파괴적인 생각이 있다.

다음의 생각들은 병적인 생각들이 있다.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그 자체에 빠지게 하여 생각하는 자신의 주체나
생각의 방향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여
자신의 정신의 상태를 헛되게 하는 공상이 있으며,
생각하는 자신을 혼란시켜,
실제적이지 않은 것들을 좇아가게 하는 망상이 있다.

생각하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의 정도에 따라,
생각하는 자신을 강하게 영향을 주어,
자신의 의지를 움직이게는 적극적생각이 있으며,
반면에 생각의 힘이 자신의 의지의 동기에 미치게 하지 못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소극적생각이 있다.

생각하는 자신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주는 것에 따라,
생각하는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하는 긍정적 생각과
생각하는 자신에게 전반적으로 안좋은 방향으로 몰아가는 부정적생각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에 느끼는 분위기에 따라 구분되는 생각이 있는데,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에 긍정적인 느낌
(사랑, 기쁨, 담대함, 평안, 확신, 신뢰, 용서등)을 갖게하는 긍정적인 감정의 생각이 있으며,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에 부정적인 느낌(미움, 슬픔, 두려움, 수치, 의심,걱정, 정죄등)
을 갖게하는 부정적인 감정의 생각이 있다

양심의 기능이나 도덕률의 정도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생각하는 자신에게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나쁜 생각이 있는가 하면,
생각하는 자신에게 양심이나 도덕의 정도에 도움을 주는 좋은 생각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릇것인지의 판단력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따라,
생각하는 자신을 그릇되게 하며, 남에게 해를 가하게 만드는 악한 생각이 있으며,
반면에, 생각하는 자신을 도와주며,
자신을 바르게 인도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게 하는 선한생각이 있다.

생각하는 기술이나 능력정도에 따라,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의 기능을 극대화시키게 하여,
생각을 활성화되게 하는 깊은 생각이 있으며,
반면에, 생각하는 자신의 기능을 약화시켜, 더 나은 정신의 생각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낮은 생각이 있다.

그리고 더나아가, 깊은 생각하는단계의 생각들이 있다.
그 생각들 중에 명상의생각은 생각의 집중력에 의해,
자신의 정신에 떠오르는 것에 집중하여, 생각하는 것을 극대화하여,
더 넓고 깊은 생각의 세계로 들어가, 머물게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종교적인 명상이 있으며,
요가나, 정신의 기나 도를 얻으려는 수련을 하는 명상의 생각도 있다.

또한 그 명상의 생각하는 스타일중에
어느 한 주제나 대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케하는 묵상의 생각이 있다.
종교적인 묵상이 여기에 해당되며,
기독교인의 묵상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신의 성품과 행적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의 은혜를 맛보게 하며,
신과 인간의 관계의 설정에 도움을 주며,
신과 인간의 교류의 증진에 도움을 주며,
혼란 스러운 사람의 영혼의 상태을 치료하며,
마음의 병든상태를 회복시켜주며,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든 일에 대해
올바른 결정을 하게하는 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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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높이는 인생의 유익

너 인생의 영혼아,
너를 창조한 주님,
그분을 송축하라.
그 하나님을 흠모하며,
그분을 향해 너의 모든 것을 다해,
그분께 영광을 올려라.
너의 일생을 다해, 너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으로 그분을 섬겨라.

인생속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분의 아름다운 이름을 높여라.
인생속에 있는 영혼아,
그분을 향해, 호흡하는 너의 영성의 입김으로 그분을 높이라.
너의 마음도 즐거워하고,
그분을 향해 온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라.
너의 정신도 그분을 향해 맑은 기운으로 그분을 향해 집중하여,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궁리하며, 연구하라.

인생들의 육체야, 너도 그분에게 닿는 손, 발, 눈, 귀, 입등이 되어,
만민에게 그분의 영광을 증거하라.
움직이는 모든 몸의 기능들도 그분을 통해 활동하니,
당연히 돌아갈 찬양을 그분에게 올려라.

인생들아, 주님을 송축하며, 영광을 올려 찬양을 드리면,
주님을 높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주님으로부터 유익함이란?

인생들아, 너의 영광과 찬양을 받은 그분은 너의 죄를 용서하신다.
너의 죄가 너를 얽매이게 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빚진자와 같이 빚덩이에 눌러 질식하며,
너를 감옥에 갇힌 수인처럼 살아갈수 밖에 없게 하였으나,
그분은 너를 그죄의 모든 속박에서 너를 해방시켰다.
너의 죄가 너 인생들의 영광과 명예를 욕되게 하고,
너 인생들을 죄어, 불안과 근심과, 수치에 올아매어,
너 인생을 병들게 하며,
너의 몸을 망가뜨려, 모든 병에 노출되어,
죄의 병균이 인생들의 몸에 침투하여,
인생들의 몸구석구석을 암이 퍼지듯,
모든 정신과 마음과 육체를 몹쓸게 만들어 버렸다.

인생들아, 너의 영혼을 욕되게 하는 그 죄가운에에 있는 너를,
그분의 용서하는 은혜로 풀어, 자유와 고귀함으로 회복시켜주신다.
그리고 그 죄가 너를 파멸로 이끌어 가며, 죽음에 이르는 절망가운데 살게 한다.
결국 죽을 인생의 운명안에서 신음하다가 사라질 너의 인생이다.
그런 인생을 주님은 멸망의 길에서 건져주신다.
절망의 나락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며 파멸로 달려가는 허무한 인생을 찾아와,
영광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너 인생들을 돌아보신다.
절망과 죽음의 파멸에서 헤매이고 허덕이는 인생들을 찾아와,
그분의 사랑으로 인생을 구원하며,
그분의 자비로 그 인생들을 생명의 길로 이끄신다.

그분은 너의 입을 채우는 모든 좋은 것으로 너를 만족케 하신다.
그분은 너의 모든 필요의 충분한 공급자이시며,
너의 풍부한 자산이시며,
너의 아름다운 기업이시며,
너의 인출할수 있는 은행의 자금의 출처이시며,
너의 거처와 모든 가족들의 보금자리이시다.

그분을 섬기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날마다 새롭게 하신다.
몸을 강건함으로 새롭게 하며,
마음을 기쁨으로 새롭게 하며,
정신을 총명으로 새롭게 하며,
영혼을 그분의 평화와 안식으로 새롭게 하신다.
저 높은 하늘 창공을 힘차게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너의 인생을 힘있는 자로 높이 솟아오르게 하신다.

그분을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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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크리스챤자아발달모델

인간발달이론에 있어서, 상호연관성의 자아에 대한 개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보완적인 관계개념에 의거하여,
인간의 심리학적이며, 신학적인 인간발달이론을 꾀하고 있다.
인간의 자아발달에 대한 연구의 대안으로서 상호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을 통해,
그 상호성의 자아성장개념을 발달 심리학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성에 대한 자아형성이해와 외부적인 사회환경과 구조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상호연관적인 영향을 통해 이루는 자아의 발달이론을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 모델은 통합적인 접근으로서, 기독교 심리학적인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모델은 인간의 전 생애의 발달되어가는 성장 도식을 따라,
상호연관성의 자아성장의 실질적이고 이론적인 면들을 다루고 있으며,
인간성의 사회적이고, 영적이며, 심리학적인 측면을 통해, 인간발달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이 자아성장모델은 인간의 자아발달의 정체적인 면보다는
역동적인 측면에서 인간발달을 추구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안에 있는 몸과 영혼의 관련성을 통해,
인간의 성장자아가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된 존재와 되어가는 존재사이에서 자기성장의 발달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 모델은 사회적인 상황의 거시적인안목과 인간성자체 이해에 대한 미시적인 안목을 따라
자아성장의 세대간의 영향과 환경적인 상황하에서 형성되어 가고 있다.
인간자아의 상호성모델은 톡특성과 통일성을 함께 묶는 것으로,
인간의 성장 발달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교제의 근거와 존재방식을 좇아,
인간성장은 자아의 상호연관을 통해 자기성장 발달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 상호연관성의 자아는 이렇게 주고받는 관계로서 형성되어 간다.
기독교적인 관점안에서, 그 자아의 성숙은
하나님의 계약과, 은혜와, 변화의 다이다믹한 과정을 통해 성숙되어진다.
그리스도인의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성은 하나님의 계약안에서,
내면적이고, 관계적인 면들을 상호적인 은혜와 능력부어줌을 통해 자아성장이 형성되어 간다.

상호연관성의 자아 발달이론은 미시적안목에서의 자아의 정신분석이론에서 출발하여,
목적관계이론을 거쳐, 거시적인 안목에서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사회배움이론을 통해 확립이 된다. 자아성장의 관계중심으로서 상호성자아는
서로 인생의 각 발달단계을 따라, 서로 관련성을 맺어가며, 발달하게 된다.

발달의 한 모형을 세우면서, 상호영향을 주는 그 상호성자아는 사회적역활을 통해 생태적인 환경안에서 관계성의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유아기의 상호성의 자아는 관계성의 작용하는 모델로 나타나,
내적으로 서로 접촉하는 가운데 관계형성을 통해 자아성장을 하게 된다.
학교 아동연령의 상호성 자아는 자아표현의 발달의 골격을 이루는 매너를 통해,
동료그룹과 학교의 여러가지 활동과 놀이를 통해 자아가 성장발달한다.

청소년의 자아는 믿음, 가치, 그리고 자기 정체성을 통해,
안정과 인생에 대한 안내를 받으면서, 자아가 자란다.
이때의 자아성은 자기방어에 보다 강화되어간다.
젊은이의 그 상호성 자아는 점차적으로 성인의 여러가지 변화와 성장을 위해,
더 큰 사회적인 관계 형성과 이성의 친밀한 관계나 결혼을 통해,
그 상호연관성자아가 더욱 성숙해 간다.

중년의 성인 상호성자아는 책임을 지고자 하는 습관된 습성을 형성하여,
자신의 감성지능의 여러가지 특성과 활동에 의해 자아가 성장하여 간다.
그리고 인생의 한계적인것과 궁극적인 것들을 배우면서, 자아가 성장하며,
그 때의 사람의 지혜는 가장왕성하게 활동한다.

장년이나 노년의 상호성 자아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근사치
(서로 닮은 꼴을 추구하는 경향)로서의 모델로 나타나며
그 상호성자아의 자아표현 능력은 은퇴와, 건강, 가치의 감각,
인생의 의미, 관계적인 친밀감, 독립적인 것과 의존적인 것을 함께 경험하면서,
그 상호성자아가 자기완성을 향해 발달되어진다.

크리스챤의 자기성화의 그 상호성비전(상호성자아활동을 통한 성장)은
인간성의 변화나, 갱신을 추구하며,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심리학적 발달로서 도덕성의 발달이 따라온다.
그리고 그 도덕성의 발달은 자아의 도덕적인 판단과
사회적인 영향하의 인간관계안에서의 감성능력을 통해 상호성 자아를 성장하게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성장은 인식적이고, 사회심리적이며, 감정적인
그리고 행동적인 요소들도 포함한다.

크리스챤의 믿음의 단계의 발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개관화(자신안에 정착된)하는 자신의 믿음의 통일성과 독특성을 통해 형성된다.
그 믿음의 상호성자아발달은 사랑의 관계안에서 성장한다.
그 객관화된(효율적인) 믿음은 생물학적,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영적인 요소들의 지배에 의해 형성이 되어진다.

그 상호성자아의 인간발달을 통한 인간의 됨과 되어가는 존재방식 사이에 있는
인간성장모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형성모델(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관계성)에 기초한다.
그 성장모델의 목표는 사람이 온전해지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장처럼 그리스도인 자신의 자아성장발달을 이루고저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숙과정의 목표는 한 인격이 능력과 경향으로 사랑과 사랑을 받는 것,
능력을 주는 것과 능력을 받는 것, 아는 것과 알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과정안에서
상호적인 작용을 통해, 자신의 상호성의 자아성숙이 이루어진다.

그 상호성자아에 의한 인간성장의 모델은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하나님의 관계성안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려는 하나님의 관계성의 의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모델은 통합적인 모델로 기독교심리학적인 측면으로
자아성장에 의한 인간발달을 생각이 되어진다.
그 다이나믹한 인간발달이론은 삼위일체하나님의 관계모델로 이해되어진 인간의 관계성과
사회성에 근거를 둔 성장모델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관계방식을 모델로 자아성장발달이론을 추구하고 있다.

그 모델은 인간생애의 인간성장발달단계을 근거로 하여,
각 단계마다의 인간적인 특성에 맞추어, 자아발달을 통한 인간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인간생활의 전 단계를 각각 나누어, 그 단계에서 필요와 성장에 따른 요소들을 통해,
바람직한 기독교적인 자아성장발달을 추구하고 있다.

그 모델은 정체적인 자아발달이론 이라기보다는,
역동적인 상호성의 자아형성의 발달을 통해 인간의 도덕성과 영성과 자아완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모델은 정신분석적인 측면과 사회상황에 근거를 둔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되어지지만,
이성과 감성의 역활부분에 있어,
인간의 두뇌의 생물학적인 영향이나,
가족적인 관계(세대적이며, 구조적인)에 대한 이해를 더 보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자아발달에 의해 추구하는 그 인간성장 모델은 기독교의 모델로서,
보다 더 구체적인 믿음성장과, 영적성장과 도덕성성장의 함께 추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자아성장모델은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과
인간의 성장의 통합된 접근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면,
가장 이상적인 성장모델을 이룰수 있을 것이다.

상담가로서 자아발달이론을 활용하는 면에는,
피상담자의 자아성장발달을 이해하고,
그리고 또한 자신의 자아성장에 대한 이해도에 기여하리라 생각된다.
인생의 각 성장단계에 있는 피상담자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각 단계에 가서는 상담자가, 그 단계에 맞는 상담의 필요성에 응할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상호보완성의 자아의 다이나믹한 발달성장을 통해,
전 인생의 단계들의 과정을 통해 추구하는 것으로 단지 인식위주의 성장만이 아니라,
감성과 인간관계안에서 조화된 성장모델로 인간발달에 기여하고 있는 모델이다.

( "The Reciprocating Self" 라는 책을 읽고 요약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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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어울리는 인생이기를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때에,
뜻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면, 친구가 되고,
서로 정을 나누는 다정한 관계혹은 친밀한 만남이 이루어 진다.
평생을 살면서 누구나,
여러 사람의 친구를 가졌거나, 그리고 지금도
친구의 관계와 교제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다.

친구를 의미하는 동무라는 말이 우리에게 좋은 어감을 주는
한국인의 인간관계의 구수한 만남이나,
관계를 형성하는 이웃에 대한 말인데,
이말을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을 전용으로 쓰는 바람에,
동무라는 말속에 두가지의 뉘앙스를 맛보게 된다.
하나는 옛날 어릴때에, 같이 놀았던 동무라는 것과
공산주의의 사회속에 서로 경계하며, 감시하며, 살벌한관계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무라는말보다는 친구라는 말을더 쓰게 되었다.

친구중에는 동네친구, 술친구, 인생친구, 취미친구, 짝친구, 악한친구, 선한친구, 경쟁적인 친구, 좋은 친구, 나쁜친구,사업친구, 공부친구등 여러 종류와 동기로 형성된 친구관계에 대한 말들이다.
그중에 제일 좋은 친구의 의미는 아마 평생친구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도 더우기, 신은 사람에게 시간과 공간과 초월하여,
영원가운데 항상 곁에 같이 지낼수 있는 영원친구를 주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친구같은 관계라도
그와 항상 함께 할수는 없고, 영원한 이별의 죽음앞에는
더욱 애절함만 남기지 함께 갈수가 없지만,
이 영원한 친구는 그 죽음가운데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할수 있는 존재인데,
그존재는 바로 신으로부터 나온 신의 영인 것이다.
신은 그자신의 영으로 온세상을 동시에 모든 사람들속에 거주하며,
친우관계안에서 인생들을 도운다.

그신은 자신도 서로 신의 우정관계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 뿐 아니라,.
그 신이 인간을 세상에 보내어 놓고, 사람들이 혼자 살아가도록 하지 않아,
그것을 보는 것이 안쓰러워, 홀로 살지말고 함께 살 친구들을 주었다.

사람이 어릴때에는 함께 놀아주는 동무같은 친구,
학교에 가서는 학교친구들이 있으며,
사회에서는 사회성의 친구(남자는 군에 가면 군대친구, 여자들은 아기자기한 정을 나누는 친구),
결혼을 통해 집안에 있는 친구인 배우자,

어느 친우관계는 애인관계보다 더한 우정을 나눈다(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 동성애는 신이 금하는 인간의 왜곡된 죄의 모습의 한 부분이다).

아마 남자는 야성적인 감각이니, 혹은 이성중심의 존재라면
여성은 미적인 감각이니,
혹은 감성중심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원래 신이 남자를 먼저 만들고, 남자의 친구로 여자를 주어서 그런지,
여자는 남자보다, 더 관계중심인 것같다.
여자에게는 사람과의 만남이나, 정을 나누는 친구성이 더 강한 성향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만일 신이 세상에 남자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그대로 두었다면,
이세상이 너무 삭막하고,재미없고, 아기자기 하지도 않고,
낭만이 없는 살벌함이 있는 곳이 되지 않았을까?

모든 따스한 인간관계나 만남뒤에는 여성들의 입김이 있음을 부인할수 없으며,
여성들이 지나가면, 세상이 푸근해지는 느낌이 든다.
여자들이 존재하므로 이세상이 좀더 사람다운 세상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우리집안에서도 친구관계에 있어서도
남자인 나 보다는 여자인 집사람이 더 친구중심의 삶을 살아간다.
친구와의 교류없이 그저 이웃이나,
아는 사람들만의 생활에는 자신의 생활에 여러가지로 미흡함이나,
삶이 즐겁지가 않게 된다.

왜 사람들이 인생을 살때에 친우관계나 교제가 중요한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라고도 할수 있겠다.
감성지능의 저자 데니얼 골만이 10월 9일자 뉴욕타임즈에 난 기사에서,
인간의 두뇌속에 반사,혹은 거울신경 (mirror neurons)들의 감정신경들이
두뇌에 넓게 퍼져있는 두뇌의 감성운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쪽사람의 좋은 감정의 두뇌에서 활동하는 것이
타인의 두뇌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거울 신경들은 감정을조절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어,
사람들 상호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두뇌의 영향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전체적인 자세나 태도에 영향을 주어
몸의 상태를 건강하게 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 인간관계가 논쟁이나 다툼이 있을때에는
그 감성기능이 역기능적으로 작용하여
몸의 전반적인 신경활동이나 심전도기능을 떨어뜨려,
몸의 상태를 나쁘게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홀로 살수 없다. 홀로 살기를 원하면,
그자신이 모든 면에서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이 그렇고, 두뇌의 감성기능도, 그리고 몸의 건강도, 그렇다.
사랑하는 님을 보내고 오래 살지는 못하는 경우라든지,
결혼하지 않고 혼자사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결혼하여함께 사는 경우가 건강에 더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관계나 교제시에 서로 불화가 다툼이 있을시에는 더 안 좋을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부부생활도 서로 좋아하고 서로 아껴주는 친우처럼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좋은 친구를 구하고 갖고 사는 삶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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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결혼생활이란?

조물주께서 인생을 남자와 여자라는 카테고리안에서 만들어,
서로 각기 다른 독립적인 성의 객체로서,
함께 상호보완하며 하나의 객채(가정단위의 )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다.
신의 오묘한 의도아래에 사람은 홀로서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로 세상에 보냈다.
물론 여러가지 동기(종교적인이유나 혹은 육체적인이유,
아니면, 불가피하게 홀로 사는 경우)로 혼자살아가는 사람도 주변에 많이 있지만,
창조주의 의도는 한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한 지붕밑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년이되어, 연애할 나이가 되고,
결혼한 연령이 되어 자기가 좋아하는 이상형을 만나, 결혼을 한다.

결혼생활이란 서로 너무나 다른(성적인든지, 혹은 기질이든지,
혹은 세계관 이해에서든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라는 계약으로 함께 사는 것이다.
결혼생활이란 청년의 시기를 보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상적인 이성의 대상을 찾아 여러가지 동기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어느 경우는 사랑의 동기로, 혹은 성적인 충동을 극복하기위해,
혹은 경제적인 보장을 받으려고,
아니면 자기실현을 위해, 아니면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해,
혹은 숫컷이 암컷이 만나듯 동물적인 충동적인 동기,
아니면 막연한 상상의 기대의 동기로,
어떻든 여러가지로 시작하지만,
결혼이란 것을 혼자의 삶이 아니라,
둘이 함께 사는 삶이기에 결코 만만치 않는 삶의 도전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집을 옮기거나,
자신의 삶에 중요한 결정을 할때 마다, 진지하게 기도할것을 권면하였다.

망망대해의 바다로 나가는 자신의 삶에 도전이 있고
위급한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를 중대한 일에 한 번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혹은 자신의 목숨이 달린 전쟁을 나갈때에는 두번을 아주 심각하게 기도할 것을 명하고,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기도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결혼에 대한 결정에 대한 기도의 태도이다.
그 세번을 기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만큼 결혼을 중요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결혼이란 사람에게 일생이 달린 살면서 풀어야 할 숙제이며,
배움이며, 자신과 상대방과의 기나긴 여행이다.

50년대이후에 여러세대를 걸쳐오면서,
미국인의 결혼연령이 어렸을때에,
순진한 젊은이들이 막연한기대와 성급한 결정으로 결혼을 하여,
나중에 얼마 안가 배우자와의 차이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으로 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음을 보아 왔다.
요즘 우리나라도 결혼에 대해 진지함이 없이 하다보니,
많은 경우에 별거나 이혼으로 끝나는 경우도 종종 주변에서 듣는다.

대개 결혼은 자기중심인데서 출발하여,
점점 자신의 상대인 부부의 어느 한쪽에 맞추어가는 타인중심의 삶으로 바뀌어 간다.
결혼은 처음에는 성적인 호기심과 탐구에서 출발하여,
성을 정복하려고 시작하였다가,
점점 성을 배우고, 성적인 교제(이교제는 단지 육체적인 접촉뿐아니라, 이성간의 감정교류,
혹은 이성간의 대화나 성의 이해 교류등)의
자기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하여 가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또 결혼이란 시작할시에,
대개 행복의 파랑새를 좇아가듯, 행복을 추구하는 쪽으로 누구든 생각하고,
그것을 실현하기를 바라며, 생활한다.
그런데, 인생의 결혼이란 단지 행복만을 좇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놓여 있다.
환경의 변화, 경제적인 변화,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상대방의 기질이나 혹은 성품의 변화,
사건 사고의 변수, 여러가지 주변인들의 영향으로 인한 변화(시댁, 혹은 처가댁식구, 아니면
가까운 이웃이나 친우, 혹은 불의의 불청객등)으로 인하여
처음의 낭만적인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않다.

그리고 결혼은 서로 배우자에 대한 기대감에서 현실에 대한 만족감으로 변화되어,
어느 정도 살다보면, 오히려 본인이 배우자의 기대나,
현실충족에 부응해야 하는 쪽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결혼처음시기에 지나친 기대감을 갖기 보다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사명의식
(배우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본인이 배우자를 위해 봉사해야지 하는 태도)을 갖는 것이 더 지혜이며,
결혼생활을 마음 편하게 할수 있게 한다.

애당초 신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는 의도에 따라가는 것이 훨씬 결혼생활을 잘하는 것이다.
그 남자와 여자가 함께 모여 한 지붕밑에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인간을 사회적인 존제로 만든 신의 의도는 그렇게 함께 살면서,
서로 다른 성, 서로 다른 가정이나 성장배경,
서로 다른 개성이나 기질등을 서로 나누면서
자신을 제대로 가꾸는 옳은사람 되어가라고 하는 신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왜 나는 팔자가 사나워서 저런 위인을 만나서, 내가 죽도록 고생만 할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결혼을 제정한 신의 의도를 몰라,

결혼을 단지 자신만을 위한 삶의 안일한 피난처,
혹은 자신만을 위해 배우자를 활용하는 도구처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결혼을 막연한 상상의 기대를 좇아,
낭만의 사랑과 행복인 파랑새를 좇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에 임하거나.,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결혼과 가정생활과 자녀양육을 의한 봉사나
사명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훨씬 부부간 갈등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런 섬김의식을 가지고 살게 되면,
자신이 구하지도 않던 낭만의 사랑과 행복이
자신의 결혼생활과 가정안에 깃들게 되는 것이다.
부디 이글을 읽은 모든 독자들께서
부디 이런 결과를 도출하는 결혼의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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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의 기능

인간의 두뇌에는 생각하는 기능과 감정적인 기능이 있다.

그 두 기능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일들이나 사건이 우리뇌에 기록이 되어,

그것이 우리의 생각하는 기능에 영향을 주는 감정적인 역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우리가 경험한 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도

우리의 뇌에 기록되어 있어, 현실적인 판단과

우리의 일상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이나, 좌절감, 무력감, 걱정하는 감정등은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 남아,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환경이나,

주입된 지식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일에 영향을 준다.

물론 기쁜 감정이나 좋은 경험들은 우리의 뇌에 남아,

기분좋은 기억으로 남아, 우리의 과거를 추억으로 회상하게 하곤한다.  

 

두뇌는 대체적으로 생각하는 역활로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 

우리의 두뇌는 과거를 살았고, 현재를 살고 있으며,

미래를 대비하면서 인간의 삶을 인도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가 건강하면, 과거에 대해 좋은 기억과 교훈을 바탕으로

현재에 대한 바른 판단과 분별력을 가능하게 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결단하는 기능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이 전인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아울러

조화롭게 움직이는 두뇌의 기능에 따라 좌우된다. 

건강한 사람은 바른 생각을 하게 되고, 무엇이든지 옳은 판단을 하게 되고,

특히 위기나 외부의 도전에 대해 잘 대처하며, 어려운 일까지도 잘 처리하게 한다. 

그런데, 두뇌의 기능이 과거의 경험이나 사건이

기록으로 남긴 부정적인 영향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것은 두뇌의 생가각하는 기능에 영향을 주고

움직이게 하는 감정적인 기능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예를들면, 수험공부를 준비하는 학생이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제대로 두뇌의 공부하는 기능을 잘발휘할 수 없으며, 집중력또한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뇌의 기능을 건강하게 하려면,

자기의 과거에 받은 사건이나 경험들을 다시 재해석을 하여,

감정적으로 우리의 두뇌에 좋은 기억으로 기록하는 일들을 하게된다.

우리가 과거의 일들을 돌아보고,

그것을 다시 바르게 입력하면, 행복이나, 혹은 승리감같은 것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건강한 두뇌의 생각하는 기능을 통해,

어느 일에나 옳은 생각으로 대처 할수 있다.

 

인간이 어느 일에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능이 있는데,

이것은 감정적인 기능이 건강하게 생각하는 기능이 마음 껏 발휘될때에,

최선의 일을 생각하고,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런 건강한 두뇌를 가지려면, 

인간의 내면을 억압하는 것으로 부터 자유를 얻어야 한다.  

내면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의 상태와 무관치 않다.

인간의 본성이 건강한 상태에 놓여 있으면,

내면은 억압된 감정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 

 

예를 들면, 도둑질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함이 없고,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 속이고, 거짓으로 우리 자신을 매도할때에,

우리의 양심이 마음을 찔러 불안정한 상태로 돌아서게 한다.

그러면 사람은 내면이 건강할수 없으며, 바른 두뇌의 기능도 기대할 수 없다. 

늘 억압된 감정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걱정이나 두려움,

혹은 불안감에 사로 잡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억압가운데서 빠져 나오는 것이 가장 시급할 것이다.   

 

인간은 조물주의 창조물로 영물이며, 생각하는 기능을 가진 두뇌가 있고, 

이것이 인간의 영혼을 담고 있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속에서 건강한 내면을 갖는 길은

영혼의 존재인 인간이 영적인 상태에서 원만한 관계를 가질때에 가능하다. 

 

인간의 영혼은 신과의 관계에서 끈을 래야 끈을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가 만든 신이든지, 미신이나, 우상이든지, 아니면, 

진정한 창주주와 어떤 관계로든 연관이 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두뇌에 수억의 신경세포로 연결되는 것을

복잡한 것 까지도 할수 있는 기능도 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중에 인간의 두뇌의 기능이 영혼의 매개체로

영적인 존재인 신과 연결할수 있는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인간의 두뇌는 신과의 정상적인 관계에 있을때에만,

정상적으로 최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반면에, 억압된 감정이나,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인간의 뇌속에 있는

수억의 신경세표끼리 연결되는 신경연결고리들을 제한하게 한다.

그래서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과대망상이나,

지나친 불안감이나, 손상입은 두뇌의 감정의 흐름들이

인간의 두뇌의 전체기능들을 위축시키며, 정상적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두뇌의 기능을 정상화하려면,

약물을 쓰든지, 아니면, 대화테라피이든지,

자신을 표현한 연극테라피이든지, 

아니면, 상담가와 지속적인 만남과 교제를 통한 치유의 길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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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추구의가치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향해 할 수있는 생각은
그 영혼이 신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본성안에 있는 육성은 자신의 몸이 감지하는 오감에 따라,
나타난 감각의 충동에 의해 살려고 한다. 그
리고 사람의 이성은 생각을 좇아서, 지식을 추구하고, 철학을 이야기하고,
시를 노래하며, 책을 읽거나, 사상들을 추구한다. 그
래서 육성과 이성은 둘다, 세상의 나타난 법칙을 따라 살기를 희망하지만,
사람안에 있는 자신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찾아,
신의 존재를 찾아보고, 자신의 영혼이 신에게서 나왔기에,
자신의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원상복귀에로의 순례의 길을 가려고 한다.

우리의 육성은 순간의 감각의 즐거움을 맛볼려고 하여,
음식을 탐하고 즐긴다든지, 본성안에 있는 감각적 느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맛집을 찾아 전국을 순례하며, 맛을 즐기는 미식가들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속에 있는 성적인 경향은 남성은 계속해서,
여성의 미나 매력에게로 끌리고,
여성은 남성의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동경을 하게 된다.
특히 남성에게는 여성의 육체의 미에 쉽게 빨려들어,
그것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남성의 취미나, 관심을 사로잡는다.
여성은 사랑을 사랑하지만, 남성은 여성의 성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이성은 지식을 찾아 끊임없이,
정보를 캐려고 하며,지식에 대한 욕구를 발산하여,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는지, 혹은 밤새토록 인터넷의 정보의 바다를 헤매며,
새로운 것을 찾아, 이성의 지식욕구추구에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나서는 뜻이 통하고 말이 서로 통하는 지인들과 함께 모여,
즐겁게 여러가지 이야기와 대화를 나누는 정신적인 활동을 즐긴다.
혹은 지식의 양이나, 정보의 습득훈련을 통해 타인보다,
지적인 재산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동기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영성은 어떤가?
그분야는 사람에게 가장 소홀히 하기도 쉽고,
그것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없이도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도 않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추구함이 없이 살아도
별로 자신의 삶에는 상관없는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사람안에 있는 영혼에 대한 갈망이나,
영적세계의 추구에 대한 시도를
우리의 육성이나 이성의 지나친 그것만을 추구하는경향들이 길을 막고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도
영성을 개발하는데 제한을 받기도 한다.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가?
사람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의 전체의 몸인가 아니면,
사람안에 있는 모든 기능을 조정하며, 정신적인 활동을 하는 두뇌인가?
아니면 뇌사상태가 되어도, 사람의 생명이 붙어 숨쉬게 하는 심장의 고동소리인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신의 영혼에 감추어 있다.
모태에서 신으로 부터 받은 영혼이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숨을 쉬게 되고, 생명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세상의 삶을 끝날때에도, 그 호흡이 멈추면서, 사람의 영혼이 떠나면서,
그 사람의 생명이 이세상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생명의 원천지인 그의 영혼은
다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어디로 가든지 간에 가게된다.

바쁘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한번쯤은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인식해보는 것도 후회스럽지 않고
자신의 인생의 삶 속에서, 아주 유익한 추구이며, 자신의 생명을 돌보는 고상한 시도이다.
자신을 향하여 “내 영혼아, 너는 너를 생기게 한 너의 존재의 근원을 향하여, 가고 싶지 않은가”라고 물으면 자신의 영혼은 그 존재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을 나서게 되며,
결국에는 그 영혼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인 신을 찾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은 사람의 영혼(생명의 원천)을 두고 어떤 혜택을 베풀어,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얻도록 하였을까?
사람에게는 원래 그 자신의 영혼의 생명이 신과의 교류안에 살아갈수 있도록 하였으나,
인간의 반역으로 인한 죄를 범하므로,
그 자신의 영혼의 눈이 감기어 자신의 생명의 진정한 실체나 상태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신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사회에 신의 존재와 같은 똑같은 신과 인간의 똑같은 두성향을 가진 존재를 보내어
그로하여금, 인간의 문제를(죄와 그 결과인 것들) 해결하여,
신을 만날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또한 신은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설정해 놓았다.
사람이 육체의 욕구에만 따라 가다보면 한없는육체의 탐욕의 도구로 전락되어,
결국에는 육체안에 있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거기에 머물러, 육체가 이루어진 자신의 몸이 결국 사라질 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의생명이 흙안에 담겨있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사람이 흙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자신의 생명의 원천인 영혼을 발견하여,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수 있도록 하여,
결코 육체가 사라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생명의 갈길에 대해 두려움없이 맞이 할수가 있을 것이다.

외모지상주의, 지식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인생들이,
육체의 매력에만 이끌려 살기보다는
진정한 자신 속에 있는 매력을가질수 있도록,
자신의 영혼(자신의 생명의 원천)을 위해 관심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그 자신이 더욱 보배스러운 영혼을 담은 육체의 아름다움 가운데 살게 될 것이며,
또한 지식과 정보의 홍수속에서 끊임없이 지식추구하는 방황에서
혼란스러운 자신의 정신의 세계를 안정되게 정리할 수 있는
영혼의 진리를 추구하는 그 자신에게
이성의 역활도 더욱 자신의 삶을 빛내게 할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영적인 세계의 영향이 건전한 정신세계를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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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의 사역을 위한 제언

인간사회안에서 발생한 갈등이나 분쟁의 와중에서, 상호 간의 일어나는 화해의 시도가
왜 개인적 차원에서 와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힘들게 여김을 받는가?

이 화해하는 시도는 인간사회에 갈등이 있으며,
분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것을 해결하기위해,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에는 서로 용서하고,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하는 자신의 희생이나, 봉사가 요구되기에 그렇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는 어느 한 쪽에 있는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앞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살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의 기본권이 무시될때에, 늘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 사회에 정의가 실현이 되지 않고,
서로 차별화에 의해 갈등이 일어나며, 거기에 분쟁과 폭력이 발생하여,
그에 따르는 상처와 고통스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는 때에는 언제나, 상처를 입은 측과 상처를 주는 측이 있기 마련이다.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성공회주교 투투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민족사회에서 겪는 전형적인 인간차별화로 인하여,
그 사회에 겪은 계층간과 인종간의 분열의 현상이 일어나고,
그 분열과 갈등의 현장에 가해자측과 피해자측사이에 깊은 갈등의 골이 깊어 있었고,
그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는 과정에 많은 노력과 서로의 용서와 화해의 과정들이 필요하였다.
그 용서와 화해의 현장의 중심에 종교가 역활을 하였고,
함께 고통받는 자의 편에서 투투는 진실과 화해의 위원회를 중심으로
그 사회의 근본적인 갈등을 해소하게 되었다.

그 갈등이나 분쟁을 화해하는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그 화해하는 과정에 반드시 가해자측에 대한 피해자들의 복수를 하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그 가해자들을 용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 용서하는 과정에 드러난 차별화나 폭력에 대한 피해자측의 자신들의 아픔들을 감당하고,
그 불합리한 일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관용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 용서에는 자신들이 받은 상처나 고통에 대한 자기이해의 희생들이 요구되며,
그들의 아픔이나 상처에 대한 자기설득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기설득의 과정에서, 피해자들 자신들의 접근하는 관점에는
복수하려는 마음을 극복하려는 강한 사랑과 용서의 의지가 필요하다.

피해자측의 개인적인 복수하려는 의지의 해소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들 자신들의 복수하려는 심리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
그 심리적인 상태를 해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조건적인 용서의 극복에도
그들의 용서를 하려는 조건적인 전제를 포기해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불평이나 불만의 해소를 하려는 관점으로,
그들의 탓으로 비난하려는 의지의 포기에는 피해자들의 자비를 실천하려는 강한의지와
정책적인 전략들이 필요하다.
마음에의 결심을 행동으로옮기려는 결단에 따르는
구체적인 용서의 행동의 실현이 따라야 할것이다.

용서에는 개인적인 사랑의 힘이 요구된다.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에 대한 사랑을 하려는 의지가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화해는 하나님의 자기노력이나, 자기희생이 따르는 사랑의 결과에서 시작하게 된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취적인 측면이나,
사랑을 희생하여, 독생자를 인간의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 희생의 제물로 설정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는 하나님만이 겪은 희생적인 고통이 따랐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희생적인 고통가운데에 인간에 대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한편에서의 사람들의 용서에는 사회적인 조화나,
건전한 상호간의 관계회복을 이루는 데 일조한다. 사회적인 평화에 대한 노력이나,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회적인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도덕성회복의 켐페인이나,
평화건설위원회를 상주시켜 그위원회의 활동들을 통해
지속적인 인권,평화운동이 일어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화해하는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활동이나, 운동을 이루어야 하기에
그런 화해를 일으키는 과정에는 힘들고 어려운 점들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가해자측이며 권력이나 힘을 가진자들이나,
사회적인 시스템이 자신의 기득권을 제한하고,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인 시스템이나,
도덕적인 사회적인 규약이나, 인간의 평등확립이나,
인간의 기본권리등을 보장하는 사회를 달성하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불평등이나, 인간차별화로 인하여 일어난 갈등의 간격이나 증폭을 줄이려면,
갈등의 원인을 해소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갈등이 일어날때에, 쌍방에 대한 화해가 필요한 협력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화해의 과정에서 가해자측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뉘우치는 회개와
재발방지를 위한 사회적인 공정관리의 장치의 정착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더나아가 가해자들은
피해자측의 고통스런 삶의 현장을 회복해주려는노력이 필요하다.

가해자측과 피해자측모두는 불공정한 차별화로 인한
남용된 권력이나 폭력사용에 따르는 사회적인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고,
그 불합리한 현실을 다시 재해석하여 함께,
진정한 정의의 사회가 실현될수 있도록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는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도덕성의 문제해결로는 인간의 악이 폭력으로 표출되어,
피해자측인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기게 되는
그런 죄를범하는 인간의 양심의 기능의 회복과 상하게 되어 있는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어느 인간의 인종이나 낮은 사회적 계급들의 사람들을 차별화된 사회적인 의식이나,
차별화의 악을 조장하거나 방조하는 구조적인
악한 사회적인 시스템을 대안적인 사회적인 시스템을 세워 대체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규약에 대한 상호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회적인 보장과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장치의 회복을 시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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