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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06
    신의 진리와 자비
    목동
  2. 2007/02/04
    하나님의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목동
  3. 2007/01/30
    주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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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1/22
    청소년의 건전한 자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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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1/22
    우울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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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1/22
    중풍병자의 치유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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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1/21
    여인들의 경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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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1/20
    인간의 선택과 신의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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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1/15
    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길
    목동
  10. 2007/01/10
    하늘의 메신저
    목동

신의 진리와 자비

시편117편1-2
신의 진리와 자비는 인간들의 찬양의 주제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높이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생활하면서 신의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신의 보호의 테두리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올바름을 알려주며,
정의와 진실과 성실로 신은 인간사회에 영향을 준다.
인생들이 바른 길을 걸아가는 것이 신의 바라는 의도이며,
세상에 진리가 결국 승리할 것을 예정해놓은 것도 신의 작정하신 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자녀에게 바른 길을 살아가도록 원하는 것처럼
신이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인생들을 대하며
그들에게 진리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신의 속성에 속해 있으며, 변하지 않는 그의 절대성에 근거한 원칙이다.
그 원칙으로 세상은 창조되었고, 움직여 지며 일정기간 신이 정한 시점까지 보존되어 간다.

신으로 부터 나온 진리의 언어는 세상을 이룬 근간이 되며,
세상을 창조한 그의 능력의 표시이다.
그의 언어에서 나오는 진리는 영원성과 절대성을 소유하고 있다.
신의 절대적인 진리앞에 상대적인 인간은 신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갈때에,
인간이 겪는 혼돈이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신은 인생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며,
진리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기를 원한다.
그의 진리는 그의 언어를 통해 나타난 그의 자기표현에 의해 인간들에게 알려진다.

신의 진리는 인간사회에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자연세계의 원리에 영향을 주며,
인간세상의 생노병사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또한 신의 진리는 인간세상을 향한 그의 심판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는 인간의 행위나 삶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며,
단 한번의 기회를 좇아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책임있는 태도를 요구한다.

사람들이 신의 진리를 따르면,
그 사람들과 그들이 사회는 정의와 배려가 있는 세상이 되어,
조화를 이루어 그들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이루어 간다.

신의 자비는 그의 속성의 또 다른 면이다.
그의 자비는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의 자비는 인간을 용납하며,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는 데에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신은 언제나 한없는 사랑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신의 사랑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
모든 인간의 사랑의 표현은 신의 사랑의 반영의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만남과 관계들을 통해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살도록 하였다.
인간세상에 언제나 사랑하는 만남이나 관계가 인간들의 관심사이며,
그 사랑이 언제나 인생의 삶의 큰 주제라고 할수 있다.

늘 인생문제를 안고사는 인간 삶의 현장에 신은 그의 사랑을 나타내 보인다.
그의 사랑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그가 자신의 외아들을 이세상의 살고 있는 인생들을 위해 세상에 보내어
그가 사람들의 모든 죄의 짐들을 지고 죄인으로 죽게 만들어
그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었다.

삶에 지쳐있는 인생들은 자신들이 지는 무거운 짐들을
이미 오래전에 신의 아들에 의해 처리되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혜택을 받으며 살면,
모든 인생의 짐들이나 역경을 극복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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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의 역사를 통해 사람의 사는 삶의 현장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선험적지식,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선험적지식의 예를 든다면,
요셉의 노예팔림, 바라오의 악한행위, 베드로의 부인, 유다의 예수님을 배반,
십자가의 죽으심등은 하나님이 예견하심가운데에서 인간의지의 선택의 결과로 일어났다.

루터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아시고
그것을 미리 예정하셨다는 것을 진실하게 믿는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선험적지식이나 예정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의 뜻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일어날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이성의 증거에 의하면,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의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험적인 지식은 신적인 결정주의를 반드시 암시하지 않으나,
인간의 의지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섭리는 때에 제한을 받지 않으셔서
그는 인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볼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조금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데,
인간의 의지는 결정된 한도내에 있기에,
자발적이든 자유이든 우리의 결정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존해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적인 결정주의와는 다른
하나님의 지속적인 변화를 가진 그의 마음과 의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의 결정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포용성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파괴하는 예를 든다면,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참새도 떨어지지 않는다(참새가 팔리지 않는다)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100%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 확실한 것을 이루는 원인으로서 포함되어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삶이나 선택을 통해 일하신다.

루터는 의지의 노예가 은혜신학의 기본적인 기초가 된다고 논의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힘으로 의로와 질수 없고, 믿음을 얻거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공헌할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진리안에서 무이다.라고 루터는 주장하였다.
칼빈도 그점을 옹호하였다.
“자유의지를 지켜가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 아닐수 없다라고 하며,
교회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커다란 이익이라고 하였다.

신적인 결정주의는 하나님의 선험지식이나, 전능하심의 교리에 근거를 두며,
그리고 은혜는 원인과 결과를 따르는 자연적인 결정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성서적믿음은 하나님은 창조적질서를 통해 일하신다고 암시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며 방법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인간의 의지는
그 은혜의 손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자체안에 위험요소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의지의 선택의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그의 선험적인 지식에 따르는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또한 그의 전능하심의 다스림으로 인한 결정에 제한을 받으며,
그리고 더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제한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대안(은혜의 길)을 따르는 의지의 노예로서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Myers, David G.의 "Psychology through the eyes of faith"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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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

누가복음4:14-20

세상의 생명으로 오신 주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전도인이나 설교자도 예수님처럼 성령의 힘으로 말씀을 선포하면
그 생명의 말씀이 증거됩니다.
주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말씀이신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런고로 증거의 영이신 성령께서 설교를 통해 주님을 증거하시며, 주님을 드러내십니다.
선포자가 말씀을 선포할때에 성령이 오셔서
그 선언된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려주시며,
주예수님에게 촛점을 맞추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생명이 선포로서 드러나게 될때에,
성령이 오셔서 그 선포되어진 말씀을 조명하며,
듣는 이들에게 그 주어진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듣는 이들이 성령의 능력안에서 말씀을 선포되어지면,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선포되어진 말씀앞에 겸손한 이들은 성령의 능력을 사모합니다.
또한 말씀을 깨닫기를 힘쓰면,
성령이 오셔서 마음을 열고 말씀의 비밀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실때에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분을 말씀의 주님으로 높였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듣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를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나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선포되어진 말씀을 가르치며, 말씀을 드러내면,
주님이 알려지며,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들이 듣는 사람들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렇듯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만남을 이루며,
그 만남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며, 자신을 치료하며,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
선포되어진 말씀은 창조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인생도 자신이 하는 말로서 행동과습관이 조성이 되고,
말의 영향하에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갑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 듣는 자 자신들의 인생을 바꿉니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뜻을 바꾸고, 꿈을 키워 갑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생명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언어는 듣는 사람들의 삶에서 바라는 바의 실상을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중심의 관점을 이해하며,
그 관점을 통해 인생을 이해하며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안에 갇혀있는 부정적인 사고 시스템이나,
나약하고 무능하게 바라보는 자신에게서
능력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안에서 할수 있는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구약 예언자 이사야를 읽었습니다.
성경을 펴고 그가 읽는 곳은 메시야의 사명에 대한 약속이 선포되어진 곳입니다.
메시야의 임하심과 그의 사역에 대해서 예언자들은 오래전에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으로 주어진 것으로 성취되어지는 약속입니다.
성경은 읽혀지는 것이며, 누군가가 가르치며, 누구가에 의해 증거되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럴때에 성령의 조명과 감동으로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게 되어,
듣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주는 말씀이며,
동시에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메시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구세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한량없이 기름부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을 하십니다.
그는 이세상에서 성령으로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늘 성령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작정하신 모든 뜻을 이루셨습니다.

더나아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성령을 사람들에게 보내십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고,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힘을 받아,
자신의 인생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인치심이며, 하나님 임재의 구체적인 사인입니다.

또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기름부으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그힘으로 살게하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앞에 나오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대합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을 들을때에 성령의 임재하심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내게 임하면
나에게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능력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 기름부으심은 사람의 마음에 빛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나의 어두운 마음이 밝은 마음으로 변합니다.
나의 감추어진 죄악이 드러나 더럽고 추한자신을 정결케하며,
자신의 어두어진 마음과 헛된생각을 건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은 나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입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오면 육신의 생각이 영의 생각으로 변화 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불안하며 걱정안에 있는 자신에게 평안과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안에 머물게 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자신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인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복되고 기쁜소식으로 증거됩니다.
주님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복음의 말씀이 옵니다.
자신스스로 가난하고 겸손하게 여기는 자에게 주님의 말씀이 들려집니다.
그 말씀이 자신에게 축복이 되며 능력이 되어, 자신을 축복받게 합니다.
그 기쁨의 축복의 소식은 모든 가난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는 이들을 벗어나게 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삶의 모든 요소에 가난의 상황이 있습니다.
그가난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은
만물의 창조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공급이 우리의 가난을 부요케 합니다.

주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산상수훈의 팔복에 첫번째 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부족한 것을 보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해 자신의 겸손함을 갖게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안에 있는 처지를 바르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앞에 노출시켜,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버려지고 잃어버리고 상처난 자신의 영적상태를 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필요로 하며, 영적으로 왜곡된 자신을 치료하며,
자신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복음의 말씀은 모든 갇힌자에게 놓임을 선포합니다.
인생의 갇힌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생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로 머물러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아래있어, 죄의 영향으로 인하여 저주와 잘망과 죽음을 안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인간을 죄의노예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이 속박된 경우는 자신안에 있습니다.
육체에 갇힌자, 질병에 갇힌자를 말씀의 치료로 풀어줍니다.
나약에 갇힌자에게 주님의 은혜의 강하게 하심으로 다가옵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에 은혜를 받으면 자신의 육체가 더 강건하며 강해집니다.
말씀을 통해 생각에 갇힌자 (부정적인 생각에 갇힌자를 긍정적인 생각으로, 저주받았다는 사고시스템을 축복의 사고시스템)를 바꾸어 줍니다.

말씀의 은혜는 마음에 갇힌자 (불안에 갇히고, 걱정에 갇히고,
마음에 답답한 안고)로 살아가는 상태를 풀어 줍니다.
이 불안한 마음에서 평안을 얻습니다.
또한 말씀은 영에 갇힌자 (어둠의 영에 영향을 받음:
이 어둠의 영은 사람들을 가두어 진리를 못보게 하며,
특히 세상의 악을 좇아가게 함)를 진리의 빛을 통해,
그 자신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생명의 빛가운데로 나아오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보통 세상사람들이 못보는 것을 보게 합니다.
먼저는 인생자신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자기자신을 바로 알게 합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상태를 보게 합니다.
인생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우리 각자에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합니다.
말씀은 지혜의 눈을 뜨게 합니다. 진정한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에 눈을 뜨게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부족을 보고 회개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바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거울을 보아야 자신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남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억압당하는 자들을 풀어줍니다.
먼저는 육체의 억압이 있습니다. 육체는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의해 눌림을 받습니다.
삶의 긴장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눌림을 받아, 인간의 육체는 쇠약해 집니다.
현대인은 대부분 정신적인 억압(걱정, 근심이 주는 심리적압박)을 늘 안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인생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믿는 것중에 중요한 것중에
하나는 우리의 삶의 무거운 짐을 그분에게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배려와 인도하에 마음을 가볍게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안에 있는 마음의 불안을 말씀으로 치료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지키며 삽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살지 않을때에 누구나 모두 세상의 영의 억압 (악한 영들의 영향이나 세력 속에서 살아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세상의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저주와 불만족한 삶)을 주며,
자신을 정죄하며, 불안과 그릇된 두려움을 심습니다.
그러므로 늘 믿는 이들은 말씀의 영향으로 영적인 자유를 얻도록 힘씁니다.

이스라엘은 50년 마다, 희년을 선포하여, 노예를 풀어주고,
그 땅을 고치며 회복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에 희년을 선포합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축복안에서 모든 것에 대한 회복을 주는 날이며,
서로의 빚을 청산하는 날이며,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날입니다.
억압되고 얽매인 사람들의 상태를 풀어 살려주는 날입니다.
그날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안에서 새롭게 되어지는 날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날은 복음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는 날입니다.
그날에 영원가운데에 자신을 주님의 나라에 속한 자로 삼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속량하신 날입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의 그 회당에서 예수님을 두루마리 성경을 읽으시고
자리에 돌아가 앉으셨습니다.
그 회당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에게 집중하였습니다.
신앙인의 모든 예배나 신앙적인 모든 활동은 예수님에게 촛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성도들은 세상사람들로부터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예수님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주이며, 우리의 믿음생활의 알파아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 주님이 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시작과 끝도 주 예수님으로 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으로 시작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는 첫사랑이나 첫헌신혹은
마음의 변화나 삶의 전환을 통해 늘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종착역에서도 예수님안에 자신의 영혼을 맡겨 드리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촛점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활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안에서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정신을 구현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작은 예수로 살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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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건전한 자아상

사람이 사는 곳에 항상 합리적이지 않고,
서로 상반대 모순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잘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사는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는 가하면, 선한 사람도 있다.

사회발전에 대한 철학적 개념에 정반합의 원칙이 있듯이,
자신이 겪는 인간관계나 인생의 삶의 과정에도
정으로 나가는 길이 있는 가하면,
반대로 나가는 방향성이 있고,
나중에 서로 조화되어, 새로운 합을 이루어 가는 원리가 있다.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합리적이고,
모순이 없는 사회에서 살지 않게되는 것이 보통 삶의 현실이다.
오히려, 현실은 상호모순된 구조안에서 살때가 많이 있다.
착한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와 산다든지,
악한 며느리가 착한 시어머니를 괴롭히며 사는 경우이라든지 말이다.
착한 사람이 악한 환경안에서 살게 된다든지,
못난 인생이 좋은 환경안에서 지내기도 한다.

그런 불합리와 모순이 주변에 있을때에,
상대적으로 약한 자아상이나 흔들리기 쉬운 인생관을 갖고 있으면,
자기자신에 대해 무너지기 쉽고, 가치관을 잃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자신을 건강하게 세우는 자아상을 정립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릴때에
자기를 세울수 없기 때문에 타의에 의해 자신의 많은 부분이 조성이 된다.
특히 내면의 사고시스템이나 감정시스템의 상당부분은
부모나 가까운 친척이나 형제들 즉 타의에 의해 형성되어지게 된다.

특히 인간은 부모와의 관계안에서, 자신의 자아에 대한 간섭으로 인한 영향을 받아,
자신안에 자신을 조정하는 초자아가 형성되며,
자기자신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갖기전에 부모로부터 좋지않은 영향으로 인하여,
자기혼란과 자기모순을 경험하며,
청소년기에 이르러 자신이 세운 자아상을 세우는데에 많은 도전을 받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영구니를 갖기전에 가졌던 즉 어린아이때 가졌던
어린치아들을 갈아치우는 것처럼,
자신의 자아의식을 깨달아, 부모으로부터 독립적인 객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올바른 자신의 판단과, 바른 가치이해에 따라
자기만의 건전한 세계관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건강하게 자기 자아상이나 가치관을 세우게 되면,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삶의 도전이나 위기에 대해 잘 대처하며,
삶의 모든 문제를 극복하는 데 흔들리지 않는 자기 철학이되며,
귀중한 자기 처세술에 기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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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2)

사람은 어느 환경이나 삶의 조건들이나 사건가운데에
같은 반응을 하지 않는다.

각기 다른 응답을 하며,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자신의 느끼고 생각한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어느 사람에게는 우울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어느 사람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성향에 의해 차이가 난다.
그것은 타고난 자신의 기질의 영향(내성적이고 자기 연민에 쉽게 빠지는 경우)이나
자신의 성품(부정적이며 비관적인 태도)이며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우울증도 여러가지 자신이 사는 환경안에서 반응을 통하여
자신의 우울증증세가 심각하게 발전하든지
혹은 우울에 빠지는 경험을 자주 겪는것이든지 아니면
그 우울증의 증세가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주든 지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을 사소한 일에도 우울이라는 것을 새로 겪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좋은 반응을 하든가,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을 겪었을 때에,
자신의 마음이 우울하게 되는 길을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몇일 전에 일어났던 유명가수의 자살도 우울증으로 인한 것이란다. 그녀는 인터넷상에서 받은 자신을 험담하는 네티즌의 평가에 (악필로 인한 인간경멸에 대해) 대해 지나친 반응을 나타내,
우울증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을 주체할수 없는 상태로 발전하여, 자살하기에 이르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더 해준다.

우울증이 특히 안면수치심에 쉽게 노출되어,
자아상의 내면에 대해 강한 상처를 입는 아시안에게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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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의 치유받음

마가복음 2:1-12
1.며칠후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2.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 앞까지 꽉 차서 발 들여놓을 틈도 없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3.이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왔다.
4.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어서
그분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렸다.
5.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얘야,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6.그러자 거기 앉아 몇몇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7.“이 사람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8.예수님은 즉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침구를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10.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특권이 내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하시고 중풍병자에
11.“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침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12.그러자 그는 곧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침구를 걷어 가지고 걸어나갔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 “이런 일은 처음 보았다!”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중풍병자의 치유받음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병자들이 몰려오며, 치료받아야 할 인생들이 밀려온다.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들어가셨을때에,
어느 집에 머물러 계셨는데,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하여 그 집주위는 사람들로 빽빽이 차있었다.

예수님은 세상의 희망이며, 사람들의 구주이다.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다.
죽어가는 세상에 생명을 주러 이땅에 오셨다.

타락한 세상(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은 사람들을 방황하게 하고,
허왕되게 하며, 그리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유혹하고,
결국에는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만,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상담하고,치유하고, 살리며,풍성한 삶으로 인도하며,
결국에는 영원한 영광의 세계로 인생들이 잃었던 낙원으로 앞서서 인생들을 인도하여 가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람들이 구해야 할 생명이다.
죽어가는 인생에 생명의 소식이 가장 필요하다.

죽어가는 중환자에게 소생의 소식은 놀라운 희망이 된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치유가 필요하며,
미움이나 분쟁이 있는 곳에 용서와 화해가 필요할 것이다.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바른 길을 제시받는 것이 필요하다.

생명의 소리가 전파되는 곳에 들을 인생들이 몰려오며,
소망이나 구원의 희소식이 알려지는 곳에 뭇 중생들이 생명의 메시지를 목말라 달려온다.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어둠의 현실을 탓하지 말고
할수 있는대로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소리앞으로
자신을 이끌어 오듯 사람들은 듣고 싶어서 예수님에게 몰려왔다.

주변에 병든이들이 많이 있으며, 죽어가는 이들도 멀리 널려있다.
주위에 안타깝게 질고와 고통과 절망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태어날때부터 육체의 질고를 지는 사람들,
우연찮게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반수불수로 생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고 직장을 잃고,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불안과 허탈속에 살아가는 자신의 속에서 애타게 우는 영혼들,
인생의 실패와 거부된 인생처럼 희망이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생존할수 없는 중병의 환자들,
우리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서로 돕고 사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돕는 근치상불능의 사람들의 가족들,
친구의 실패나 고통을 자신의 아픔이나 고통으로 알고 위로하며
도움을 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척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버려진 사람들을 거두어.
말없이 소문없이 돕는 자선의 사람들이나 단체의 손길들이 있다.
이렇게 우리들이 모여사는 주변 사회에
인지상정으로 서로 상부상조하며 사는 사람들이 늘 있다.

여기 불행한 중풍병자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는 고마운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그 중풍병자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질고로 알고,
어떻게 하든지 친구의 질병을 고쳐
그의 불행한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그들이 그 친구를 치유와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왔다.

중풍병자는 과거에는 잘나가는 인생으로 살았을 것이다.
건강하고 혈기 왕성하게 한때는 자기중심으로 살았을 것이며,
자신의 앞날에 푸른 꿈을 안고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인생의 어려운 일을 만나,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거나,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척추신경이 마비되었을 것이다.

어쨋든 그는 이제는 육체적으로 무너진 자신의 불행한 상태는
지나온 자신의 삶의 발자취가운데에
숨겨있는 자신이 저지른 죄와 그에 따르는 악한행위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병들고 못쓰게 되는 인생이 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째는 부모의 잘못된 교육이나 영향으로 인하여서 이고,
주변의 좋지 않은 환경이나 나쁜 친구나 주변사람들로 인하여
악한 영향을 받아 그릇된 길로 가기 쉬워진다.

그리고 스스로(인간의 원죄로 인한 타락한 성품이나 악한 성격때문에) 악한 길로
들어서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자신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스스로 악하고
그릇된 자신의 성향으로 인하여 몹쓸 인생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건강할때에 자만하거나 방탕하기 쉽고,
잘 나갈때에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오만하게 대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실패나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범죄(사기, 강도, 도둑질)에 연류되었을 수도 있다.

병에는 육체의 병이 있으며,
또한 마음과 정신적인 병도 있다.
먼저, 육체적으로 병이들면 마음도 약해지고, 자신감을 잃게 되기 쉬워진다.
몸이 활동적이지 않으면 마음에 번민이나
쓸데없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점점 부정적인 생각시스템으로 발전하기 쉽고,
심리적으로 불안해져 정신적인 병에 걸리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릇된 가르침이나 철학에 노출되어,
자신의 마음이 허망해지고, 악해지면,
혹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응어리로 품고 있는 사람들도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리기 쉽다.

죄는 인간을 죽이는 독약이다.
독이 몸에 들어가면 서서히 죽어가듯,
우리에게 죄의 씨앗이 있어 우리 자신들을 점점 모든 질병에 노출되어,
병들게 하며 죽어가게 한다.
죄에 대한 치유는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믿음의 차원에서 오는 치유이다.

예수님은 그의 인간의 질병을 담당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인 질병에 대해서 치료받기를 원하신다.

그가 가는 곳마다, 육체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치유를 선포하셨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주님은
그 자신이 친히 인간의 병든 것과 연약한 것등을 짊어지고 병을 치유하는 은총을 베푸신다.

본문 2장4절에서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얘야, 네 죄는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질병과 치유의 관계는 죄와 용서의 관계의 비유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인간적인 사랑과
서로 협력하는 믿음을 보시고 용서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중풍병자가 과거에 인간관계안에서
범한 죄를 생각나게 하는 너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의 친구들의 친구살리기의 사랑과 정성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고 그들의 우정의 관계를 보시고, 그 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중풍병자의 질병의 원인이 자신의 죄와 연관이 되어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아마 그 병자는 타인에게 해를 입히거나,
혹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주변인들을 괴롭게 하거나 힘들게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가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병자의 신세로 있지만
그의 마음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 더 그를 눌러 괴롭혔을 것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질병도 힘들지만,
심리적인 압박이나 마음의 고통이 사람들을 더 괴롭히고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병자는 육체적인 질병보다는 마음의 병으로 인하여 괴로와 했을 것입니다.
그런 병자의 질고의 고통은 그의 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범하는 죄나 악도 모두가 하나님앞에서 범하는 범죄입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도 또한 그 사람들의 허물입니다.
아마 그 병자의 죄도 그런 종류의 죄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런 죄로 인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으며,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처받는 사람의 내면에서 느끼는 질병은 다음과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해 미움의 감정이나,
분노하게 하는 악한 감정은 사람의 심정 깊은 곳에 억압의 골을 새겨,
그 깊은 골안에 있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아가 그 상처를 안고
그 악한 감정안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즉 자신이 과거의 상처로 인한 억압된 감정이나
왜곡된 자신의 상을 새롭게하기 위해
그 상처들을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아의 표현을 통해 자신의 상한 감정이 치유받고,
새롭게 건강한 자아로 발전하게 되어,
현재의 자신의 건강한 모습을 찾으며,
동시에 다가오는 현실의 도전에 대해서도 힘있게 반응하여
자신의 주변에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잘 극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친구들의 병자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내 주십니다.
네가 진정 죄에서 용서받았으며, 너의 무거운 짐을 쉬게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형벌과 질병의고통 과 저주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예수님은
항상 당신에게 찾아오는 인생들을 향해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인생들을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며,
죄에서 오는 형벌로부터 용서의 복을 받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놀라운 마음의 평안함을 예수님을 통해 소유하게 됩니다.

모든 질병을 극복하는 길은 주님안에 있는 생명의 복과
그의 치유와 축복의 메시지를 통해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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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경외심

출애굽기 1:15-22

15. 그리고 이집트 왕은 히브리산파인 십브라와 부아에게
16. “너희가 히브리여자들을 조산할 때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살려 두어라”라고 명령하였다.
17 그러나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주었다.
18. 그때 이집트 왕이 그 산파들을 불러 “너희가 어째서 내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주었느냐” 하고 묻자
19.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 같지 않고 건강하여 우리가 미처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해산하였습니다.”
20-21 그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 자신의 가정을 이룰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번성하여 강력한 민족이 되었다.
22. 그러자 바로가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모조리 강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은 살려 주어라.”

그 여인들의 경외심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있었다.
그 요소들은 그녀들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충정의 믿음과
올곧은 소신있는 삶이며,
그리고 그들의 역경의 운명을 극복하는 고난을 동반한 축복의 믿음이었다.

이스라엘의 인구의 번창에는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히브리여인들의 출산을 돕는 산파 여인들의 용기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노예신분으로 있는 동안에 그들은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의 탄생을 가져올 만큼의
인구증가를 통한 왕성한 민족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집트왕은 이스라엘의 사람들을 고통을 주는 정책을 세워,
그것을 실천하는 것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노예의 생활로,
그들을 혹사시키는 중노동과 삶의 어려운 환경안에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그가운데에서 오히려
자기민족에 대한 양적성장과 하나의 국가로 태어날 능력을 키워냈다.

이집트왕은 이스라엘민족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태어나는 아이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당시에 산파로 아이낳는 일을 돕는 여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 남자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내리는 통치하는 왕의 명령은 생명을 걸고 지키지 않으면,
그들은 사형을 당하는 형벌을 면할수 없다.

이스라엘의 남자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도,
산파들은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정신으로 일관하여,
민족의 배신자나 매국노로 변신하지 않고,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여인들의 건강한 출산을 돕는
자신들의 좋은 산파역활을 잘하였다.

위협적인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평소의 믿음을 지켜, 자신들의 역활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사람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갖고,
분명한 직업의식이나 삶의 철학을 따라 소신껏 사는 것이 쉽지않다.

누구나 권위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 자신의 지론을 흔들어 놓는 경우를 당할때에,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이 여인들은 믿음에서 나온 용기있고 그리고 소신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 섬기는 충정이 그들의 삶의 철학의 중심에 놓여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타락으로 영향을 주는 그릇된 삶의 문화의 흐름에 대해
역행하는 신앙인의 소신은 변치않는 신앙에서 나오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용기는 확신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며, 그 마음의 확신에 기반을 두고 나오는 내면의 힘이다.

여인들은 자신들이 평소에 섬긴 하나님과의 신실한 교제를 통해
그녀들은 위협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자신의 신조있는 삶의 기조를 지켜나갔다.
목숨을 잃을수 있는 위협적인 상황하에서도,
그녀들은 하나님께 지조있는 절개의 신앙을 따라 살았다.

세상은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들에게 어려움을 주어,
그 신앙을 포기하기를 종용하고,
세상의 안일함과 타락의 손짓을 통해 신앙이 변질되기를 유혹하기도 한다.
세상은 타락된 문화의 힘으로 혹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권력의 힘으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빼앗으려 한다.

예를들어, 일본시대에 신사참배의 강요를 받은 조국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과 함께 일본천황을 동시에 섬기도록 강요하는 교묘한 술책을 통해
오는 여러가지 불시험을 이기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과거의 믿음의 선진들의 고난의 믿음의 발자취를 통해
지금 이시대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격려와 도전을 주어,
타락케하고 타협하는 부조리한 세상의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의 창조적 소수자로 살게 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축복의 미래를 열게 되는 신앙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여인들의 용기있는 믿음은 라합이나, 에스더의 용기를 생각나게 한다.
라합이란 여인은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적군으로 다가오는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보호함으로써,
악을 자행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라합자신이 사는 악한 나라와 사회에 대해
대항하는 의인의 용기을 보여주었다.
라합은 자기목숨을 담보로 비밀히 정탐꾼을 숨겨주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그 담대함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의 힘에서 나오는 용기였었다.

에스더의 용기있는 의지는 알량하게 자신만이 안일하게 살려는
자기영달의 안위에 빠지지 않고,
자기민족의 고난의 운명과 생존의 위협의 짐을 함께 지는 결단에서 나온 그녀의 의지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도 얻으려는 민족의 살길을 위해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에서 나오는 거대한 힘의 용기를 통해 믿음을 실천하였다.

에스더, 그녀는 왕의 계율을 어기고 왕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만일, 왕의 허락없이 스스로 왕앞에 나올수 없는 법령을 어기고 나가게 될때에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위협이 있었지만,
그녀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충정어린 청원을 왕앞에 나아가 왕에게 요청한다.

여인들의 지혜는 위기를 기회를 바꾸는 지혜가 있었다.
그들에게 내려진 위협적인 명령은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흔드는 지대한 요구였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을수 도 있는 처지였다.
그녀들은 다음과 같은 지혜의 대응으로,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 같지 않고 건강하여 우리가 미처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해산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산파들은 남자아이를 낳을수 밖에 없는
히브리여인들의 출산의 변명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사람의 두려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일때에 마음이 혼란되고,
마음을 주체할수 없으며, 쉽게 강요하는 외부의 세력에 쉽게 타협하게 된다.
그렇지만 자신의 소신을 붙드는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통해 자신의 소신을 지킬수가 있다.

자녀를 생산하는 히브리여인들의 힘은 민족을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노예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은 더욱 강성한 민족으로 번영하여 갔다.
고난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히브리 여인들은
스스로 아이를 낳을 만한 강한 어머니로서의 모성애를 가졌으며,
또한 그들은 노예의 고된 생활속에서도
어머니로서의 충실한 자녀생산과 자녀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민족에게는 다음세대에 대해 더욱 희망을 주는 민족적인 정기를 이어갔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강해진다. 삶의 과정에서 겪는 고난이나 시련을 통해
자신이 힘들게 훈련을 받으면, 그것이 그 사람을 더 강하게 단련한다.
군대에 들어가는 젊은이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집중적이고 고된 훈련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강인한 군인정신을 갖춘 군인으로 태어나게 된다.
신앙인의 십자가 군병이라는 의식은 삶의고된 훈련과
고난과 위기중에서 얻은 신앙의 생활화에서 오는 결과로 인하여 생성되며 성장하게 된다.

신앙은 어려움을 당할때에 더욱 빛을 발한다.
빛의 효력은 어두움이 깃들어 있을때에 나타나듯이
어둠을 밝혀주는 가느다란 빛의 힘은 주위를 밝게 해주는 힘을 발휘한다.
자신의 믿음도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있을때에, 흔들리지 않고, 헤쳐나가는 힘을 제공한다.

이스라엘이 고난받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의 와중에서,
그 히브리 산파여인들은 같은 동족의 용기있는 출산의 도움으로
봉사한 여인들의 신앙은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는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위협이나 삶의 위기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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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택과 신의 인도

시편25편 12절-14절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하나님이 가르치시리라

하나님을 자신의 공경과 진실로 섬기는 이는 하나님의 길이 보일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다.

충청도의 천안 삼거리에 가면
그 삼거리 길목에서 세가지 갈래 길로 퍼져 나가게 된다.
전라도로 향하는 길과 경상도로 가는 길, 그리고 충청도에 머물러 있는 길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지 선택하면 그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길로 가고 싶은데 저길을 선택하면,
이길은 가지 못하고 저길로 가야만 하며,
세 갈래길에서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면 그냥 주저하는 일밖에는 안된다.

삶이란 항상 자신에게 선택을 하도록 요구한다.
무엇을 할 것인지 누구를 만나야 할는지,
그리고 점심시간에 나가서 외식할때에도 오늘은 무슨 음식을 먹을 것인가?
집으로 오는 길이 여러가지 변수가 있는 데,
어느 길로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하며, 정해진대로 길을 가게 된다.
인생의 일에 있어, 중요하고 인생사에 큰 일을 처리할때에,
무엇보다도, 선택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일을 잘하는 비결은 어느 일이 든지,
그 일에 적합한 선택을 잘해야 하는데,
그런 선택을 잘하는 데는 선택의 지혜가 필요하며,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정적인 자신의 마음의 결단력이 필요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선택한 그 일을 진행시킬 추진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인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줄 알며,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일 것이다.
인생을 함부로 살려고 하지 않으며, 낭비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인생의 주인이신 신에게 다가가 그의 조언을 경청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저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선험적인 지식을 갖고서, 인간의 만사에 대해 관여하신다.
그리고 그의 전능하심은 인간의 삶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신다.
인생이 수도 없이 다가오는 삶의 선택의 기로에서
신은 신의 지혜를 인정하고 의존하려는 인간에게 그들의 갈길을 지시하신다.
그지시나 인도는 신을 섬기는 자만이 알고 경험할수 있는 권한이다.

그는 언제나 번영을 누리며 살고 그의 자손들은 땅을 상속하리라.

그들(하나님을 인정하는 이들)은 항상 자신들의 일들이 형통하게 되며,
자기가 계획하는 일들이 성취하게 된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두려움없이 불안해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확실한 것을 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생은 불확실성을 통해 모든 일에 대해 불가지론으로 일관하게 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어느 것 하나도 보장된 것이 없이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무지한 가운데에 머물다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세계로 던져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자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보장,
자신의 삶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이해, 인생의 생노병사의 가치이해)을 잡은 이들은
이 땅에서 자신이 아는 것 만큼,
자신의 삶에 대해 신으로부터 특별한 보장을 받으며 살게 되어,
자신의 미래의 상태가 점점 밝아지며,
자신을 통한 자식이나 후대들에게 까지 확실한 인생의 지침을 전수하므로,
그 자손들이 인생의 만족과 행복과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친밀감을 가지시고
그 약속의 비밀을 그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하나님은 늘 자신에게 다가와 그를 사랑하며,
그와 더불어 교제하며, 그의 숨결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와의 친밀함을 이루며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인생의 감추어진 비밀속에 있는 중요한 삶의 지침이나,
인생성공이나 승리의 비결을 알려주신다.

그러므로 경외하는 이들은 늘 그분과의 정상적인 관계안에서
계속되는 만남이나 교제안에서 그분의 뜻을 알고,
그리고 그분의 섭리(자신뿐 아니라 인간세계를 움직이는)의 뜻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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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길

새해에는 모두가 복많이 받으세요 라고 서로 인사를 한다.

인간생활에 복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복을 추구하는 인간은 누구나

그 복안에서 만사형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복에 대한 생각이 중요하다.

복을 추구하는 나의 생각에 따라 내가 행복하게 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된다.

우연히 주어지는 복을 기대하며,

많은 사람들이 로또에 일확천금의 기대를 걸고, 행운을 기다린다.

물질과 번영이 주어지는 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물질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들을 보면,

소유한 만큼 행복이 주어지지는 않는데,

도리어 그들은 가진 것 만큼 행복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오는 반대급보로 불만족이고, 불행한 인생을 보낸다.

못되게 살면서도 잘된다고 생각하는 것,

양심대로 살지 않으면서 형통하게 된다는 것은
일시적인 안녕을 주고, 출세와 영달로 자신을 포장하며, 살게한다.

그것을 얻었을때에, 남을 무시하기 십상이고,

자기 잘난척 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헛된 욕망에 도취되어

인생의 좋은 가치들을 저버리고 살게 해버린다.

사람이 소유에서 오는 복을 구하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끊임없이 그것에 목매어 살아야 한다.

소유에서 오는 외형적인 복은 사람에게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것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가져본 사람, 높아본 사람들이 그것에 안주하다보다가,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느낄때에는

그것보다는 높은 가치와 삶의 의미를 주는 내면의 행복을 구하게 된다.

잠시 생각하면, 외형적인 복을 구하는 그런것들은 결국 인생에 있어서,

그런 것들을 구하는 자신에게 대해, 자신이 배반 당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치가 변질되어 자신을 행복으로 이끌어 주질 못하고

도리어 자신에게 주어진 그 행운들이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다.

인생의 참가치를 알게하고 깨닫게 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공자의 말처럼 아침에 일어나, 하루 종일 수고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때에

자신의 생활을 두고 만족해 할수가 있다.

진리는 인간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졌을때에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

변함이 없이 인간에게 영원한 가치를 주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철학으로 그 진리에 이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정작 그 진리는 인간에게 감추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진리가 인간자신에게 가리워 있다.

그 진리는 다만 인간을 지은 조물주에게 물어보는 길밖에 없다.

그 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 라고 선언하신다.

그 내용인즉 사람이 매일의 인생의 삶을 살아갈때에

신이 우리에게 주신 그 진리의 내용들을 깊이 생각하며, 연구하며,

그 내용대로 살아가면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참된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밤낮으로 신이 우리에게 하신 내용들을 생각해보면 인생의 길이 보인다.

앞날이 보이지 않고 답답해 할때에,

어디에 내가 지금 머물어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고, 방황하는 인생에서 하고자 바 대로의 바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하늘을 거스리고, 신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살게 되면,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헛되게 자신이 지난 시간들을 보냈다고 후회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신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이 마구 휘젓으며 잘 살가는 것 같으나,

잠시 지나고 나면 마치 바람에 불려

흩날려 버려지는 쭉정이 같은 인생으로 기억에 남게 된다.

인생의 삶의 현장은 마치 인생이라는 경주의 일정한 기간을 통해

사람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인생의 경주를 많은 이들이 지나가며,

어떤 이들은 악하게 살다가 가며,

어떤이들은 비관하면서 인생을 마치며,

어떤 이들은 바르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게 한다.

 

그런데 그 인생들이 바른지 그른지를 어느 시점에 가서는 판단을 받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 한 날 살다가 없어지는 인생이 아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온지를 판단받게 되는 그 순간에

자신의 전부가 결정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말해주는 내용들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매일 순간마다 깊이 생각하며,

또 생각하며 살아가노라.

그러면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후회하지 않는 진리를 따라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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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메신저

마가복음 1:1-8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소식의 시작이다.
2.예언서에는 “보라! 내가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겠다. 그가 네앞에서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3.광야에서 어떤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를 위해 길을 준비하라.
그의 길을 곧게 하라’고 쓰여있다.
4. 이 말씀대로 세례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를 용서받게 하려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5. 그러자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사람이 모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산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내뒤에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 오신다.
나는 몸을 구푸려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하늘의 메신저
이곳에 설교자와 청중과 있고, 그사이에 생명의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어,
듣는 청중들이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듣고 반응을 하는 것을 본다.
그 설교자의 생활과 메시지를 보니, 한편의 그림과도 같이
세례요한은 야생의 사람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살아있는 소식을 전하는
하늘의 메신저로 나타나있다.

그는 광야의 사람이며, 산과 들의 사람이다.
그는 도시의 사람이 아니라, 산에서 사는 사람이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며, 세상의 신이 난무하는 곳이다.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이켜 그곳에서 인간들을 묶어두어,
하늘의 소리를 들을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도시는 사람들을 바쁘게 만든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도시의 생활은 사람들에게서 여유을 빼앗아 간다.
그래서 자신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그가 와서 외치니, 오랫전에 몇백년전에 한 선지자 이사야가 전하는 그 예언자였다.
이사야는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한 예언자이다.
그가 또한 메시야의 메신저에 대해서도 예언을 한대로 그 예언자가 왔다.

사람사는 삶의 주변에서 수없이 들여오는 소리들,
그소리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소리뿐이 아닌가?
쓸데없는 가쉽이나 헛된 소문들을 나누는 무가치한 소리, 시시비비하고 다투는 소리,
시기하고 모함하는 소리, 걱정하고, 분노하는 소리,
욕지거리를 나누는 소리, 음담패설을 내뱉는 소리,
마음을 혼란케하는 요란한 소리들.
이런 소리들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병들게 한다.

그 메신저가 나타나, 요단강에서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하늘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강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사람들의 삶의 젖줄기이랄수 있는 곳에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선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강에서 물을 긷고, 빨래를 하고, 목욕을 하며,
강이 있는 곳에 삶의 문명과 문화가 꽃피운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큰 물줄기인 그 요단강에서
하늘에서 온 그 예언자는 어느 날 갑자기 외쳐댄다.
하늘의 오랜침묵을 깨고, 하늘에서 생명의 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그 생명의 소리는 미워하고 불안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선사하는 아름다운 하늘의 소리이며,
인생의 저주와 절망에 우는 인생들에게 구원과 희망을 전달하는 복된 소식이다.

그 메신저의 메시지는 이렇게 선포하는 것처럼 들린다.
당신들,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시는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하시오.
그 메시야를 맞이하려면,
당신들은 잘못된 것(마음과 행동)들을 좀 고쳐져야 만날수 있소.

그 메신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며,
하나님이 마련하신 생명과 구원의 길로 나아오기를 초청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길은
거짓되고 불행한 인생에서, 진정하고 행복된 사람됨의 모습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인류시초부터 인생들은 자기중심의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오고 있다.
하나님의 법의 테두리를 떠나서,
자기중심에서 오는 오만과 아집과 편견들과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인생이 안고 있는 쓴뿌리(불경건한 것이나 불만족 스러운 것들,
어둠의 일들, 인생의 저주나 불행)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중에 살고 있는 사람들사이에서 넘쳐나고 있으며,
그로인하여 사람들은 진리를 찾기가 쉽지 않으나,
인생의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 줄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면 거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유대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민족적인 울분을 참고 살고 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압제와 유페의 생활에서 다시금 민족을 세우고,
진정한 민족해방의 구원의 소식을 기다리며,
로마의 압제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고통받는 처지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심과 도덕률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기다리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종교의 변두리에서 사는 목자들이나,
사회에서 천시받고 있는 세리와 천민등은
세례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구원과 소망이 담긴 생명의 소리를 통해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형식적인 종교적 틀을 찾아볼수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에게로 향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는 순박한 양심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람이 되어가는 길은
종교심(인간이 만든 종교의 율례나,
의식의 화석화로 인한 허울뿐인 종교인들의 심성)을 벗어던지고,
자신안에 왜곡된 자아의 눈을 뜨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모습에서
인간성의 모순과 나약을 깨닫고,
그가운데에 있는 자신들의 죄와 죄책과
그리고 그것들로인한 고뇌와 불행을 벗어던지고,
자기중심의 삶의 스타일에서
하나님중심의 삶의 패턴으로 나아오는 회개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죄는 인생속에서 자연스레 붙어있는 것으로
원래 태어날때부터 사람들은 그 죄를 자신들의 몸과 운명안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의 영향아래에서
인생의 모순과 불합리를 겪으며 살아 오고 있다.
더나아가, 죄는 사람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가며,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병들게 한다.

상처가 나고, 몸의 어느 한 부위가 썩어가거나,
암덩어리가 퍼진다고 가정을 해볼때에,
우리는 당장 그것을 치료하여 없애려고 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는 영적인 암덩어리이며,
우리의 인생전체를 망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할수 있는대로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내면의 죄의 쓴뿌리들은 사람들은 원래 인간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죄와 자범죄와,
그리고 유전의 죄나 과거에 지은 조상의 죄의 무거운 짐들을 진채 살아오고있다.
더우기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겪은 부정적인 경험들,
즉 남에게 상처를 입었거나, 원치 않는 해를 입기도하며,
그런 경우를 당했을때에 자신의 마음에 분노를 심어서,
그 분노가 쓴 뿌리가 되어,자신의 마음의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어,
나의 진로와 진취적인 삶의 행위들을 막아서고 있으며,
사람들을 망하게 하고 있다.
그 인간관계로 부터오는 죄가 인간을 옥죄어 죽음으로 몰아가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심판을 면할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회개는 이런 죄들을 뉘우치고 청산하고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죄있는 인생자신의 모습을 바로 직시하며,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죄를 통해 일어난, 하나님과의 차별화를 통한 단절과
구부러진 자신의 관점을 고쳐 바로 잡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속에서 자신이 해결할수 없는 것들을(죄와, 죄책과 그리고 인생의 저주나,
고뇌와 고통)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신속에서
치유와 회복과 평안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여는 작업이며,
그 눈을 통해 구원과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일이다.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다. 물로서 더러운 것을 씻듯이,
인생들에게 묻어 있는 더러운 죄들을
인생의 죄를 담당한 메시야의 흘리신 보혈(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흘리신 그의 피)로 씻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씻는 상징의 세례의 물속에 들어가든지, 물을 뿌리든지 간에,
자신을 새롭게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례는 자신을 위하여, 자신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의 축제의 의식이다.
그 세례를 받음으로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 예비해 놓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축복과
구원의 특권에 동참하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로 인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자신의 결단이며,
하나님의 초청의 자신의 응답이다.

사람들에게 두가지 길이 놓여 있는데,
그길은 심판과 멸망에 이르는 것과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심판과 멸망의 길에서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들이 나타난다.
모든 인생들이 맞이할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피할수 없는 육체의 생명이 다하는 이후에 받아야 할 하나님의 평가이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날들에 대한 미래의 댓가인 죽음과 멸망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이 그 길에 머물러 거기로 가기를 원치않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복있는 소식을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 모두 에게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이끌어 내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일이다.
하늘의 소리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듣고 응답하여 얻는 하나님의 약속된 선물이다.
인생에 있어 사람들에게 극적인 전환점이라 말을 자주 듣는다.

세례요한 으로부터 들려주는 하늘의 이 메시지는
듣는 이들에게 자신의 답답하고 괴로운 인생의 삶에서 즐거움과 희망을 가져다 주어
인생반전을 가져올 복된 소식이다.
무엇인가를 찾아 늘 방황하고 공허한 자신의 인생이나
삶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려는 이들에게 희소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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