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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20
    비공식적인 허위논증들(논리3)
    목동
  2. 2007/03/19
    불멸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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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3/18
    자녀가 이렇게 자라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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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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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적인 도전들과 가족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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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3/14
    예수는 밥이다
    목동
  7. 2007/03/14
    결혼과 가족개념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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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3/13
    가족에 대한 개념들
    목동
  9. 2007/03/11
    인생의 복은 자신의 생활철학에서 온다
    목동
  10. 2007/03/10
    사람의 운명
    목동

비공식적인 허위논증들(논리3)

4. 인격에 대적하는 논증법 (argument against the person) (3)
이허위에는 두사람의 논증자가 필요하다.
한사람은 자신의 논증을 진행하는데,
다른 논증자가 전번 논증자의 논증보다는
그 논증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몰아부치는 허위진술이다.

이 허위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인신공격허위(라틴어:ad hominem) abusive,
환경오도(ad hominem circumstantial) 허위,
tu quoque(너도 그렇다의 허위:가식적인 것을 고발하는)이다.
인신공격허위는 두번째 논증자가 첫번논증자에 대한 말로 인식공격을 하는 경우이다.
환경오도허위는 반대 논증자의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았다는 암시를 하여
그 반대의 논증에 대해 불신하는 허위이다.
너도 그렇다의 허위논증은 논증자를 불신하는 태도로 대하거나
혹은 논증자의 가식적인 것을 지적하여 논증을 무시하는 허위이다.
논증을 펴는 논증자 자신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을 의미한다.

5. 사고허위논증 (accident)
사고허위논증은 일반적인 규칙이 특별한 경우에 잘못 적용된 경우이다.
전제에서 인용된 일반적인 규칙이 결론에 가서특별한 경우에 잘못적용되어지는 것이다.
예: “연설의 자유는 제도적으로 합법적인 권리이다.
고로, 존 래디컬은 지난 주일 폭통을 일으키게 한 그의 연설로 인하여 체포되지 않아야 만 한다.”
이 허위논증은 특별한 경우에 규칙에 예외적인 것을 적용하는 사고를 일으키는 논증이다.

6. Straw men (가공의 인물논증)
이 허위는 논증자가 반대자의 논증을 용이하게 공격할 목적으로 흔들어 놓는 허위이다.
그 과정에서 반대자의 논증을 왜곡시키고,
결론에 가서 반대자의 진실한 논증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논증자는 가공의 인물을 세워 그것을 넉아웃시켜,
진짜 사람의 논증을 물리치려는 수법이다.

7. 촛점을 빗나가게하는 허위 (Missing to point: ignoratio elechi, 증거를 무지하게 하는)
이 허위는 부적절한 특별한 형태를 묘사한다.
이 허위는 논증자의 전제가 하나의 특별한 결론에 가서 발생하는데,
다른 결론이 정확한 결론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논증자는 논증자의 전제를 논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무시하게 되어,
촛점을 빗나간 결론에 이르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논증을 잡탕으로 만들어 버린다.
예: “오늘날 사회보장제도의 남용이 만연해있다.
우리의 유일한 대안은 그제도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8. 스낵고기 유도허위 (Red herring)
이허위는 주제를 바꾸어 버림으로
독자나 청취자의 관심을 돌리게 하여 논증자가 하고자 하는 논증을
다른 이슈로 가게 만들어 버린다.
이허위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논증자는 독자나 청취자에게 알리지 않고 논증의 원래의 주제를 바꾸어야 한다.
또한 청취자의 시선을 끌기위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이슈를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가공의 인물허위와 혼돈되는 것은
그것들이 모둔 청취자나 독자의 방향을 이끄는 효과를 얻으려는 것에 있다.
가공의 인물허위는 두사람의 논증자가 있어야 하나,
스낵고기 유도허위는 그렇지를 않을때가 많다.

9. 인정받지 못한 권위의 허위 (appeal to unqualified authority)
이허위는 일종의 다양한 허위이다.
인용된 권위자나 증인등이 신임을 줄수 없을때에 나타나는 허위이다.

10. 무지를 호소하는 허위
증명될수 없는 것이나 증명하지 않았던 어떤 것에서 나오는 허위이다.
질문에 대한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만, 그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쓸모없는 것이다.
이 허위는 재판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1. 서투른 일반화적용
이 허위는 귀납적(귀납법은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연역법은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적용하는 논증법)인 일반화에 영향을 주는 허위이다.
이 허위는 사고허위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사고허위는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적용하는 것이나,
서투른 일반화는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12. 거짓 원인
거짓요인의 허위는 전제와 결론은
아마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상상하는 요인에 의존한다.
이 허위에는 세가지종류의 거짓허위가 있다.

1.이것후에 고로 이것때문에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주는 원인으로
일시적인 연속적인 관계의 요인이 충분히 성립되지 않는 허위이다.
예: “검은고양이 내길을 가로질러 가기에, 나는 넘어져서 발목이 졉쳐졌다.
그것은 검은 고양이가 재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원인이 없는 원인
전혀 원인이 없는 것으로 인하여 일시적인
연속적인 것이상의 원인이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허위이다.

3.지나치게 단순한 원인
다양한 요인이 어떤 효과에 책임을 지는 경우,
논증자는 이 요인들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에만 유일한 요인으로 삼는 허위이다.
예: “교육의 질은 수년동안 고등학교에서 떨어져왔는데,
확실히 선생들이 이기간에 그들의 임무를 잘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4.게임자의 허위
논증의 결론을 우연히 일어나는 게임의
독립적인 사건에 대한 가설에 의존하는 허위이다.
예: “평평한 동전을 던졌을때에, 앞면이 나오면,
나중에 던질때에는 뒷면이 나온다는 확률이 있을 것이다.”

13. 옆길로 미끄러지게 하는 허위 (slippery to slope)
다양한 허위를 일으키는 요인이 작용한다.
논증의 결론이 암시된 연결고리에 반응하는 것이며,
그리고 반응고리가 일어났을때에 충분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14. 약한유추의 허위 (weak analogy)
유추로부터 오는 귀납적인 논증에 영향을 주는 경우이다.
약한 유추의 허위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지원하는 유추가 충분하지 않다.

15. 질문청구하기허위 (begging the question)
이허위는 논증자가 부적절한 전제를 통해 결론을 지원하려는 환상을 갖는 것으로,
문제의 해결이 되는 열쇠인 되는 전제를 떠나다든가,
전제를 결론으로 다시 진술한다든가,
맴돌게하는 추리하는 과정을 통해 하는 것이다.
첫번째 형태는 질문을 청구하는 것이며,
둘째 형태는 논증의 전제가 다시 결론에 가서 하찮은 표현으로 재현되게 한다.
세번째는 맴도는 추리하는 과정을 추론의 연결고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16. 복잡한 질문하기 허위 (complex question)
이 허위는 하나의 질문을 두개의 질문으로 만들어
하나의 대답이 두개의 질문에 적용되게 한다.

17. 거짓 이분법 (false dichotomy)
이 허위는 either …or…의 선언명제적인 전제가 두개의 있을 법하지 않는 대안을 제시하며,
만일 그중에 하나가 유용하면, 논증자가
다른 바람직하지 않는 대안을 없애버려 결론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18. 억압 (감추어진) 된 증거 (suppressed evidence)
이허위는 귀납적인 논증에서 좋은 추리와 진실한 전제와 함께
이루어진 일관성이 있는 논증이라면,
억압된 논증은 중요한 증거가 될만한 요소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 허위는 가설의 허위로 분류된다.
왜냐하면, 그 허위는 전제들이 사실 없을 때에 만든 가설을 통해, 논증을 증명하려고 한다.

19. 다의성, 의미의 모호함 (equivocation)
이 허위는 논증의 결론이 말로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논증의 서로 다른 두개의 뉘앙스(같은 말의 서로 다른 의미)안에서
표현되지않은 것에 의존하는 허위이다.

20. 표현의 애매함 (amphiboly)
이 허위는 모호한 상태에서 잘못해석하여,
논증이 그 거짓된 해석에 기초한 결론을 이끌러 낸다.
그 표현의 모호함은 잃어버린 콤마, 부적절한 수식어,
모호한 대명사의 사용, 부주의한 말의 사용등에서 나타난다.

표현의 애매함이 허위는 두가지 점에서 의미의 모호함과 다르다.
첫번째 차이에 대해, 의미의 모호함은 말이나 어귀의 의미의 애매함을 따르며,
표현의 모호함은 진술하는 종합적인 구조의 모호함에 빠진다.
두번째는 표현의 모호함은 어떤 면에서 모호한 진술들을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고,
의미의 모호함은 전형적으로 논증자자신에 위해 만들어 진다.

21. 조합상의 허위 (composition)
논증의 결론이 어떤 것의 부분으로부터 전체로 옮아가는 과정에
잘못된 전이를 통해 얻은 것에 의존하게 하는 허위이다.

22. 나눔상의 허위 (division)
조합상의 허위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전체로부터 부분적인 것으로
옮아가는 과정에 잘못된 전이에서 오는 것에 의존하는 허위이다.

평범한 일상 언어의 허위들(ordinary language)
이 부분은 두가지주제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째는 일상언어에서 다른이들이 허위를 식별(detect)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언어중에 허위를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른 사람의 허위를 간파하기
일상언어에서 허위를 간파하기 쉽지 않는 것은
논증할때에 여러가지 실수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길이 있어서 그렇다.
하나의 모드가 하나 혹은 두개이상의 허위논증으로 복잡하게 얽여져 있다.
그리고 허위의 완벽한 형태가 잘 나타나지 않아,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자주 전제와 결론이 표현되지 않아
증거의 속성이나 전제와 결론이 연결된 힘이 모호하게 알게 된다.

자신의 허위를 피하기
왜 사람들이 자주 비공식적인 허위를 범하게 되는가?
직접적인 해답을 주기가 어렵지만, 허위의 종류가 많아,
그것들을 식별하지를 못하고 그런 허위들을 범하는 것이 복잡하게 이루어지며,
혹은 서로 연결된 오류로 인하여 생긴다.

자신이 허위를 피하는 열쇠는 의도적으로
도덕적인 교육의 형태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논증자가 의도적으로 속이려는 형태로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하는 부정직하게 지식을 사용하는 것임을 명심해야한다.

허위를 만드는 요인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좋아하든지
혹은 반대하는 감정적인 기질이 결합된 부주의한 정신적인 태도이다.
그리고 처음 둘의 요인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인 논증자의 세계관에서 나온 영향때문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조정하고 해석하는 세계관에 의해,
믿음, 자세, 습관, 기억들 가치들, 다른 요소들에 의해 허위가 일어난다.

허위를 피하기 위해 그 세계관의 영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논증에 대해,
논증자는 자신의 세운 견해(presupposition)에 대한 바른 지식이나
비판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Patrick J. Hurley 의 A concise introduction to logic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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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믿음

로마서 4: 17-21

17. 이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라고 기록된 말씀과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서 우리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18. 아브라함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었으므로 “네 후손도 저별들처럼 많을 것이다”
라고 하신 약속대로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아브라함은 자기 나이가 백세가 다 되어 몸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가 많아 도저히 출산할수 없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더욱 굳게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다 조상이 있고, 족보가 있습니다.
우리 가문에 역사가 있고 우리민족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족보가 있고 역사가 있음은 자신의 근본이 어떠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작에는 많은 조상들의 흔적이 있습니다.
기계를 처음 사용한 조상들, 도시생활을 시작한 조상들,
문명을 발전시킨 조상들, 고대에 유명한 조상들이 있다.

그런데 고대 인류의 역사가운데에 독특하고 유용한 조상들이 있는데,
그 조상들은 이세상에 살면서 이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동행한 인생의 발자취를 남겼으니,
과히 그조상들의 발걸음은 인생들에게 획기적이며 가치있는 일이며
의미있는 인생족적의 발걸음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를 만나,
자신들의 일생가운데에서 그분의 숨결과 손길을 경험했으니,
우리 인생들에게는 귀감이 될 조상들이다.
그 조상들중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은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유명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던 그의 믿음을 살펴보고저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개인이 경험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동행하셨으며,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사람들을 찾으며,
그들에게 그 약속을 주시며, 그 약속이 실현되어가는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내용은 하나님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지시고 죽음의 선고를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죽음앞에 절망합니다.
죽는 다는 사실은 인생을 비참하게 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모든 인생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을 접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원수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그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만이 죽음에서 사람을 살리십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사람을 다시 살리는 생명의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생명의 하나님은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생명은 그분에게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전능하시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무에서 유를 이룬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셨습니다.
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바랄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은 그 바라는 것을 향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이성을 초월하여,
바라는 바를 끝까지 붙잡고 나가게 합니다.
경험과 증명을 요구하는 과학적사고시대에
이성의 역활을 초월하는 믿음의 세계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성은 나타난 현상의 세계에 대한 것을 확인하기를 원하며,
경험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편견에 잡히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경험에 대한 이해나 지식은
새로운 미래의 도전에 대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너의 자녀들이
밤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수의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부인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너의 자녀가 이렇게 많아질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생산을 쉽게 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으면,
그 약속의 실현을 기대하게되겠지만,
아브라함은 나머지 일생을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자녀에 대한 기대를 한번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믿고 나갔습니다.

그의 믿음이 훌륭한 것은 믿을 수없는 상황에서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도 가능하지 않는
자녀생산에 대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는 믿음은 자신이 믿는 믿음의 대상이 중요한데,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을 수없는 믿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그믿음의 대상에 의해 자신이 믿은 그 믿음에 낭패를 당할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유다나라가 하나님앞에 우상을 섬기고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멸망을 당해가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을 즉,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용서받고 멸망에서 구원받으려면 회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에 대해 전혀 어떻게 할수 없는 자신들을 믿은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저주받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도 믿을수 없고 도저히 믿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을 믿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그런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잇닿게 한 것이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며,
약속하신 대로 자신의 삶에 실현되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멸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나 자신의 주변의 상태를 보아도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이며,
그가 가진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에 대한 그 믿음이
어떤 상황하에서도 그의 믿음을 소멸치 못하였습니다.

믿음을 방해하거나 소멸케하는 요인은 사람들 바로 자신이며,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성향이며,
또한 자신의 믿음을 방해하는 자신의 환경이라 할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자신이 믿음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자신에 대해 하나님 역활을 내세우면,
누구도 그를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이끌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부정하는 자신때문에
믿음의 세계로 들어올수 없습니다.

또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자신의 속에 있는 성향이 있습니다.
성향이나 기질이나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소극적인 사람은 믿음의 도전을 받아들이기를 꺼려 합니다.
매사에 또한 부정적인 성향이나 의심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믿음을 부정하기 십상입니다.

믿으려는 자신이며, 자신속에 믿음에 대한 강한 성향이 있는데,
자신의 주변이 그를 못믿게 만드는 환경이 있습니다.
그 환경중에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대대로 내려오는 불신이나,
무속의 영향을 받은 가정도 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 가문에서 좇겨나는 핍박이 있어,
그것을 감히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런 환경안에서 자신은 도저히 믿음을 가질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으로는 할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하에서도 그사람을 믿게 인도하십니다.

불가능을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현실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무능한 인간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믿는 믿음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믿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놓여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상황에 처해있는
이스라엘 200만명 가량의백성들은 모두가 다 진퇴양난의 처지에 있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은 앞에 놓여있는 바다를 갈라,
육지처럼 길을 터놓아,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을 탈출하게 하십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은 믿음입니다.
정실부인인 사라자신의 몸에서 아직도 자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하여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들이
저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질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분이십니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옛약속과 새약속사이에서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과거에 약속하신 것을 실현되게 하시고, 또한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옛 계약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수천년동안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예언자들로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따라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자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씨의 능력이 이미 육체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아기의 생명을 만들수 있는 정자의 수가 줄어들어,
도저히 생명의 탄생을 할수 없게하는 몸의 상태인데도
그것을 아브라함은 다시 살릴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녀의 속에 수정란을 만들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난자가 충분히 성숙하기에는 그녀의 몸은 이미 늙어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난자를 자라게 하고, 숙성한 난자들을 생산케 하셨습니다.

사라는 이미 여자로서 자녀들 가질수 있는 아기씨를 잉태할수 있는 자궁의 상태가 아닙니다.
자궁안에 생명을 착상시킬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도 하나님은
기적으로 그 상태를 복원하셨습니다.
원래 불임이었던 사라의 몸이 임신을 가능케 하는 상태로 변화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사라에게도 생명을 만들수 있는 몸상태가 아닌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생명을 가질수 있는 몸의 상태로 만든 것입니다.
이미 불임판정을 받아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한 사라였는 데,
하나님은 사라의 몸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불임의 몸을 가임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젊은나이가 아니라 몸에서 경수가 끊어진 상태인 그녀에게
생명의 씨인 수정란를 성숙케 하는 몸으로 다시 만든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합니다.
불신앙은 믿음이 없다가 아니고, 불신앙은 의심에 속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믿음은, 즉 불가능을 가능하게 믿음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죽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을 안고 사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의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범한 죄의 댓가로 인간의 삶의 현장에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죽는 현실앞에 자유할수 없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늘 죽음이라는 다가오는 현실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불신앙으로는 결코 죽어야 할 사람들을 살릴수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철학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도,
인간이 쌓아놓은 도덕률도 사람을 죽음에서 살릴 수 없습니다.
죽음에서 인간을 살리는 길은
오직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만이 가능합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질때에
비로소 죽음아래에 있는 우리 자신들이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할수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진리나 존재에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존재하지도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의심이 드는 것은 인간의 생각안에서 나온 현상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수 없으며,
하나님이 언급하는 내용(무에서 유의 창조, 생명의 부활등)에 대해서도 인정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들은 그분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선물을 통해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신앙할수 있습니다.

인간자신에게 드는의심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자신을 믿음으로 강화시키는 일입니다.
믿음에 굳게하는 일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바라볼때에, 가능합니다.

믿음의 대상에 따라 믿음의 성격이나 역사가 다릅니다.
어리석은 믿음의 경우나 현상은 자신이 믿는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었을 때에 생겨납니다.
인간을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가 따른다고 했습니다.
즉 그말은 의지할만한 힘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고로 인간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소망을 가질수 없습니다.
인간을 의지할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가 도모한 일이 한순간에 다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게합니다.
믿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시게 합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이 임합니다.

아브라함의 불멸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며,
그리고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실현에 대한 믿음입니다.

확신은 믿음의 닻입니다. 믿음을 자신의 마음에 정착시킨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온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진 자신이 믿음의 사람이듯,
그는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이라 인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기질이나 성향은 자신안에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믿음의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일에 있어,
그의 이성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성품안에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의지나 결단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떠나라 했을때에 가족과 친척과 고향땅을 떠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활동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에게 그믿음이 자신의 마음에 착상되어
그 믿음이 자신에게 고착이 되어 믿음이 자신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할동하는 믿음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확신하는 믿음이란 믿음의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그 확신은 자신안에서 실제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믿음입니다.
결국 그는 그 믿음으로 불가능에 대해
즉 자신의 나이를 극복하고 동시에 사라의 불임과 나이의 한계를 이기고
자녀를 가질수 있는 하나님의 가능을 자신안에서
경험으로서 얻는 단계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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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이렇게 자라도록

누가복음2:40, 49, 52

40.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에 건강하게 자라셨다. 지혜가 넘치셨다.
49.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점점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아기예수는 아이예수로 건강하게 자라셨다.
메시야는 아기로 오셨다. 주님은 왜 성인으로 오시지 않을셨을 까?
예수님은 성인으로 하늘에서 지상에 임하시지 않고,
낮고 천한 자리에서부터,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라나는 과정을 경험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람을 직접 경험하셨다.
인간이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자란다고 자라는 가?
인간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안에서라야 정상적으로 잘 자랄수 있다.
자녀들의 성장시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녀들의 성장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돌보시는 사랑안에 머물러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부모에 의해 생명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나는 아이들이
실상 그들의 자라는 과정안에서는 그들의 자람을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없이는 진정으로 건강하게 자랄수 없다.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어도 그것을 자라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도록 부모들이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자람에는 육체적인 성장도 있지만, 정신적인 성장이나, 사회적인 성장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자녀교육은 조화있게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면에서 구김살이 없이 잘 자라야 좋은 어른이 된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그의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그가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려주시고 있다.

예수님은 12살에 예루살렘에 부모들과 함께 유월절행사로 올라가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룻만에 부모들이 아이예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찾았는데,
아이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들과 질문을 하며, 대답을 하시며 아이예수님은 토론을 하는 중이었는데,
모두가 그의 총명함에 감탄하며
또 그의 지혜로운 대답에도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보통 이스라엘의 소년이 성인식에 참여하는 나이가 13세인데,
아이예수님은 이제 앞으로 성인이 되기전에
그는 성전에서 유대교의 선생들과 함께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는줄을 왜 모르십니까?라고
부모들에게 반문을 하는 아이예수님의 대답가운데에
아이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통 청소년시기에 자아의식에 눈을 뜨게 되어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에 대한 정체감을 인지하게 되는 나이이다.

아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중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감을 갖고 있는 아이예수,
그의 총명함은 탁월하며, 모든 지혜로운 대답등은 그의 정체감에서 비롯된 자의식,
즉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런 그는 탁월한 지혜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청소년 예수님을 생각할때에,
그의 내면에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의식,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으며,
자신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지혜의 지름길이다.
청소년시기에 자아에 눈을 뜨는 과정은
너무 중요한 자신에 대한 뚜렷한 자각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간파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시기에 자아의식를 찾는 작업이 잘못되게 될때에,
이후에 그의 삶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며,
모든 일에 대해 자아의식에 근거한 가치판단기준에 의해 판단하며
그 자아정체감이 앞날의 자신의 날들을 만들어간다.

아기예수가 자라는 과정과 아이예수가 자라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람은 여러단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기가 자라는 과정은 부모의 배려가 더 필요한 시기이다.
그 만큼 그시기는 인생의 어느시기보다도 더 부모의 영향력을 받아 자라게 된다.
이시기에 아기예수는 하나님의 배려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의 자람은 온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아기예수는 무럭무럭 자라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자라는 것이란
하나님의 배려와 돌봄으로 자라는 것이다.
인생의 자람에서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돌봄은
창조주께서 만물을 붙들고 계심을 보여주며
모든 인생들을 돕는 창조주의 보존케하시는 사역하시는 모습이다.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해줄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제대로 잘자랄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대개 많은 경우에 자녀들이 부모들의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녀들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로 대하게 될때에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겪게 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연적으로 있는 아이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배려하는 일이 지혜로운 일이다.
아이들이 조물주로부터 받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지혜와 재능을 개발되어지도록 도움을 주는 일만 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무엇이 그리고 어떤 교육이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합한가?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들의 상태를 존중하고, 그들의 의지를 꺽지말고,
그들의 성장발육과정에 그들의 조언자로 머물러
자녀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도록 배려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자녀를 부모의 기준으로 당겨서 부모에게 맞추는 교육도 안되며,
반대로 아이들을 매사에 아이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치하는 태도로 하는 것은
더 나쁜 교육적인 태도이다.

자녀와 부모가 적당한 거리를(부모와 자녀의 인간관계의 거리)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의 일관된 교육철학이 어떤 교육적인 대안보다 중요하다.
부모의 일관성인 태도는 아이들을 안정되게 건강하게 자라도록 한다.
만일 자신이 크리스찬 부모라면,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는 기도야말로
부모로서 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신성한 의무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가 아이들의 자람에서 유지도도록
부모로서 조언의 역활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을 명심하는 일도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옳은 태도를 갖게 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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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변화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는 가에 대한 질문은 인생의 중요한 질문중에 하나이다.
인간은 인생의 삶의 변화의 사이클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영적인 변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는 인생의 의미있는 여행의 중심이 된다.
우리의 희망이나 두려움을 통해
전적인 절대타자인 신과의 친밀함을 추구함으로 나아간다.
이 관계안에서 변화에 대한 기대가
영성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영적인 변화의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인 발전이 없이 인생이
그저 태어나는 때나 죽는 때가 매일반 다를것이 없다면
그 인생은 무의미한 생으로 끝나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인간생활의 변화에 대한 역동성연구은
기독교신학의 원리들과 사회과학의 이론들의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성(spirituality)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영성의 개념은
영성을 해석하는 종교에 따라서
혹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영적인 체험에 의해 나름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 개념은 모호하고, 다양하기도 하다.

그 다양한 영성에 대해 특히 크리스챤 관점에서의 영성의 연구는
종교와 과학의 원리들로 영성의 경험과 그 영성에 대한 생각들을 통해
변형을 위한 연구의 새로운 기회로 영적지도(spiritual direction)나 목회상담에서 활용할수 있다.

크리스챤 영성연구는 전통적으로 경험과 신비로 이해되어지며
복음적인 신학노선안에서의 영성을 추구한다.
영성화(spiritual formation)는 크리스챤생활의 핵심이며,
영성연구는 기독교신학의 중심에 있다는 전제를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인생안에서의 변화의 역동성에 대한 신학적인 표현들은
성령의 교리와 현대철학과 과학에서 얻은 통찰력과의
명백한 대화를 통해 실천되어질수 있다
(이부분에 대해 기독교입장에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에 대한
복음적인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그런 연구들을 대할 필요가 있다).

변형(transformation)
인생안에서 모든 변화(change)가 다 바람직한 변형(transformation)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가족시스템이론자들은(가족의 시스템안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변화나 상담을 추구하는)
인생의 바람직한 변화는 두가지측면에서
즉 일차적인 질서안에서 변화가 있고 이차적인 질서안에서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일차적인 것은 주로 인간의 행동에 있으며,
현재의 도전받는 이슈들에 대한 것이며,
이차적인 것은 보다 복잡한 시스템적인 변화와 그 변화에 대한 전략에 대해 다룬다.

종교적인 개종과 영성변화는 자기 정체감의 심오한 변화로서
중요한 긴장과 감정적인 격동을 동반한다.
영적이며 종교적인 변화는 병리학적인것 보다는 적극적인 정신적인 변화로 나타난다.

변형으로서의 변화는 점차적이면서 급진적으로 이루어 진다.
획기적(quantum)인 변화들중에 갑작스런 드라마틱한 인생의 변화는
핵심가치와 감정들, 자세들, 혹은 행동들안에서 깊은 변화가 일어난다.
획기적인 변화들중에 두가지 타입이 있는데, 통찰적인 것과 신비적인 변화이다.
통찰적인 변화는 개인의 이전 발달이론이나
인식적인 과정안에서 연속성을 가지는 변화이며,
신비적인 변화는 외부의 영향에 의해
전개되는 드라마틱한 감각과 연관이 된다.
이런 변화들에 대한 경험들을
이해하는 해석학적인 관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변형의 개념에 대해서, “기능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알코올중독자가 술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을
터득하는 것은 기능적이라는 것으로 자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자아 기능이나 도전하는 전략들은
자신의 행동변화와 연관이 된다.
이것은 인간발달에 있어서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인 변화나 의미의 존재하는
구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흡수화로 제한이 된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이차적인 변화인
시스템적인 변화나 패러다임인 동일화에 인간 자신의 구조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영성변화는 영적인 관점안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나
거룩해 지는 성화되어가는 것을 추구한다.
이 변화는 성례전적인 해석으로
보다 종교적으로 궁극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런 변화는 영성변화로서 웰빙(grace)과, 성숙과,
그리고 샬롬(자신과의 조화)의 상태로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관계성과 상호 훈련성
관계적인 통합성은 인간이 다른 존재와의 연결속에서
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관계적인 영성화는 인생의 관계적인 경험안에서
자신의 내면과 연관된 사역을 추구하는 모델이다.
그 관계성은 영성화나 영성변화를 촉진하든지
혹은 억제하는 제도로서 여겨진다.
그리고 영성의 변화는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상황에서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영적인 내주(indwelling)는 특별한 공동체와전통에 연결되는
종교적인 그룹과 관련이 되고,
영적인 구도(seeking)는 새로운 영적경험의 탐구나 순례로서의
공식적인 종교적인 테두리에 있든지 넘어서든지 새로운 영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영성강화의 역동성과 고전적인 방법들
크리스챤전통의 영성화의 개념의 3가지 방법들은 정화(purgation),
조명(illumination), 그리고 연합하는(union) 것이다.
정화하는 것은 일종의 각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각성은 자신들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영혼의 밤과 같은 상태에서 신비적이며, 명상적인 것을 경험하는데 거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어둠의 긴 터널속에서 새로운 존재에 대한 약속들을 추구하는 경험속에서
하나님임재안에 있는 기쁨과 평안함의 새로움을 경험할때에
조명되는 은혜안에 머물게 된다.
이 조명은 사람들을 변화시킬때에,
하나님의 임재의 빛안에서 사람들과 세계를
이해하고, 감지하고, 해석하는 데로 이끌어 준다.
그 조명안에서 사물을 본다고 해서 완전히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상태로 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 하나됨은 영성화의 핵심으로 절대자 하나님과
상대적인 존재인 인간의 연합됨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연합됨의 친밀함을 추구하면,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의 크신 은혜로 몰입되어가는 상태가 된다.

정화의 역동성은 갈등과 긴장과 자신을 비쳐보기등을 경험하게 한다.
조명의 역동성은 상상력의 조명을 의미하며,
자신이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련안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살펴보는 것이다.
연합의 역동성은 관계적인 연합과
친밀함의 새로운 감각에서 인간의 영혼이 자유하며, 열린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영혼의 역동성은 관계성의 질적인 강화화의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
그 강화화의 원리는 집중화, 의도성, 그리고 친밀성으로 인간의 내면인 영성을 강화하여 간다.
집중화는 인간생활에 필요한 관계적인 강화이다.
인간의 의식화에는 의도성이 요구되어진다.
그리고 의식적인 강화는 친밀함을 통해 인격의 친밀화로 개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 크리스챤의 친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친밀함을 통한
지속적인 인격변화를 가져올수 있다
(계속적으로 경험하는 주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자기체험에 근거한 주님과의 친밀함을 통한 자기변화)

영성변화의 도가니: 호되시련 (crucible)
도가니는 심각한 테스트를 받는 것을 의미하며,
불속에 집어넣어 연단하는 것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영성변화는 심한 시험, 시련들, 주도적인 자발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영성변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안에서
용광로의 불로 상징되는 것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스가랴 13:9, 말라기 3:2-3).
그 시련의 불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자신의 영성에
“강화화”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영성변화의 일반적인 상징을 의미한다.

크리스챤은 누구나 이런 영성변화의 여행을 하고 있으며,
존번연의 천로역정의 과정처럼,
거듭나서 하늘나라에 도달하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영성변화를 추구하는 사명과 도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F. Leron Shults and Steven J. Sandage’s Transforming Spirituality:
Integrating theology and spirituality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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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인 도전들과 가족의 의미

결혼과 가족개념에 대한 문화적인 도전들과 그것을 극복하는 가족의 의미

포스트모던니즘의 세계관은
흔히 전통적인 근대의 인간세상에서 받아들이는 상식적인 가치관이나
절대적인 가치나 절대선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결혼하기전까지 결혼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순결을 지켜, 결혼에 올인한다면,
행복하고 건강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같은 것이다.

포스트모던니즘은 또한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파편화된 세계관으로서,
개개인을 고독하고 소외된 채 방황하며 살도록 한다.

지금 결혼에 대한 서구화의 관점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는 등식으로 널리 퍼져있는 영향등이
인기연예인들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결혼에 대한 신성한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니즘적인 세계관은
타인이나 외부인에 대해 예민한 문화적인 단절의식을 느끼게 한다.

예를들어 같은 문화권안에서도 남자와 여자사이에 결혼을 하는데,
그들의 관계는 마치, 서로 다른 인종이나 그의 영향권에 사는 사람들처럼
(아시아들이 백인들과 만나 사는 사람들처럼 같은 문화권의 부부가
서로를 잘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
서로가 전혀 이질적인 상대로 만나지고 이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말은 사회가 그 만큼 복잡하고 단절되어 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포스트모던니즘적인 접근은 지금까지 결혼과 가족을 지탱하고
이해하였던 전통적인 가치의 변형을 초래하며,
기존의 상식적인 결혼관습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포스트모던니즘적인 관점안에서 가족에 대한 개념은
혈연중심이나 상호관련성의 전통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주의의 편리함(개인의 확장된 소외의식안에 있음)에 맞추어,
결혼과 가족에 대한 개념들을 가족통합보다는 가족해체의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그런 형태의 가족개념은 절대적가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지며,
절대기준에 대한 준수이완을 조장하는 그런 문화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결혼과 가정안에서 서로의 인간관계를 묶어주는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하며,
가족관계의 이완된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한다.
고로 그런 관점들은 근래에 결혼의 응집력의 문제나
가족개념의 보호해주는 전통(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부부유별이나 부창부수
혹은 장유유서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가치의 이탈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그 문화적인 접근안에서 자유로운 성문화와 성의 개방성을 촉진하여,
가족의 신성함과 통합성을 해체하며,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변질시킨다.
가족의 구성원간에 이완된 관계와 더 복잡하고
소외되어가는 사회적인 영향의 소통의 문제안으로 유도한다.
탈근대적인 가치관의 범람으로 인하여,
결혼과 가족의 신성시하는 것이 무너지며,
이탈적인 가정의 형태가 가족자체의 존재와 존립를 위협하고 있다.

가족의 개념에 영향을 주고 있는 근래의 사회문화적인 영향은
남자와 여자의 단일 가족으로서의 전통적인 형태에 대한 다양한 의미의 변형을 가져왔다.
여성의 지위향상이나, 여성들의 직업참여로 인하여,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가사의 일만을 하는데서, 사회의 진출이 활발해졌다.
그래서 여성들위주의 싱글가족의 가족개념
(많은 수의 여성들이 결혼을 자신들의 인생의 과정에서 여러개 중에 하나의 선택으로,
아니면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외면하는 경향)이나,
결혼 대상자의 확대로 기존의 동족간의 결혼에서 국제결혼이 성행하는 풍조도 생겨났다.

작금의 문란한 성문화나 정상에서 변형되어가는 성윤리는
동성애라는 세계적인 현상의 영향에서 우리도 예외없음을 보여준다.
동성애적인 가족개념의 변형은
성의 정상적인 역할을 변질케하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문화적인 성향안에서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안에 있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경향은
가족의 구성이나, 가치나 의미에 많은 변화와 영향을 주었지만,
그러나 서로 다른 남남의 두사람이 만나 시작하는 가족은
혈연중심의 공동체로
그리고 사회의 냉정한 이기적인 만남이나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하는 사회의 기본단위로 존재한다.

가족은 무엇을 위하는가?
가족은 사람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가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종족과 가치를 보존하고 계승하며,
자신의 존재를 보호받는다.
가족은 혈연공동체로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은 가족안에서 자신의 삶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여 간다.
가족은 사람자신을 위하여 사람을 태어나게하며,
자라게 하며, 성장시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만들어 내는 역활을 한다.

가족은 인간자기표현과 자기성취를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성장과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가족안에서의 삶이 대부분 인간의 생활이 주어진다.
가족안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서,
나중에 그 자신이 가족을 이끄는 단계에 이르며,
가족안에서 인간존재의 안정과 실현을 추구하는 피난의 공동체이다.

가족은 부부자신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부부자신들의 사랑과 자기실현의 장으로 가족은 존재한다.
부부는 남편이 아내를 로맨틱한 사랑으로 성적인 사랑을 사랑하며,
대등한 인간관계로서, 아내를 대하며,
또한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가며,
자녀들을 교훈을 가르치고 가족의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을 다한다.
아내는 가정의 화목의 중심에서 가정의 사랑스런 분위기를 위해 사랑으로 헌신한다.
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일을 한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돕는 베필로서,
매사에 남편과 협조하여 가족의 대소사를 함께 감당해 간다.

가족은 자녀들을 위해 존재한다.
가족은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으로 인하여
자녀생산과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을 위해 존재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돌봄으로 일정기간
그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가정의 보호와 양육의 테두리안에서 성장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물질적인 공급과 정신적인 안정을 주며,
자녀들이 한 개인의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역활을 한다.

가족은 인간문화와 문명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존재한다.
가족을 통해 인류는 문화의 발전과 문명의 발달을 이루어냈다.
가족은 사회의 가장 작은 기초단위이지만,
가족안에서 모든 인류문명과 문화의 시작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그 가족안에서 농사를 짓는 기술을 만들어 내며,
농경사회의 기술을 주도하였으며,
산업사회에서는 가족개념의 변천의 소용돌이와
복잡한 사회안에서의 소외된 개인들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 갈등하는 개인들을 포용하는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서,
건강한 사회의 건전한 기반을 이루어가는 역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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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밥이다

밥은 인간의 몸을 유지하는 음식이다.
하루도 밥없이 살수 없다.
밥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준다.
먹는 재미와 먹는 기쁨은 인간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내린 축복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나 모두에게 식사를 할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음식을 먹음으로 자신의 육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몸이 음식을 요구한다.

밥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말은 밥보신이 제일 몸에 좋은 보신이 된다는 말이다.
밥에서 주는 영양을 골고루 섭취해야
몸의건강에 좋으며,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밥은 육체의 밥이 있지만, 영의 밥도 있다.
영의 양식은 인간의 영혼을 살리며,
인간속에 있는 영성을 일깨우며,
인간의 영을 먹여 살리는 영의 음식이다.
고로 인간의 영혼속에 생명의 밥을 얻어 먹어야 영혼이 산다.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밥을 먹이기 위해 이세상에 오셨다.
그의 육체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찌어지고,
상하고, 고통에 찌들렸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의 심판의 제단에 드림으로써,
자신의 육체가 사람들의 밥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을 이루셨다.

자신의 몸을 인류을 위해 내놓은 그는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범한 죄들을 감당하여,
모든 인생들의 죄로 인한 저주와 형벌을 모두 가져가,
자신이 친히 그것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밥이 되셨다.

한번은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늘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광야에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의 설파하는 하늘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양식으로
그들은 들어도 들어도, 듣고 싶어, 음식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넒은 산야에서 굶주려 가면서
말씀을 경청하고 있을때에,
그들을 먹여주어야만 하는 예수님의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보리떡과 물고기로 굶주린 청중들을 먹이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다." 그가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몸이며 살을 먹어야 사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주는 혜택을 받아야
비로소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잘살수 있다.

예수를 먹어야 자신의 영혼이 살며,
비로소 자신안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공급받는다.
예수를 먹는 일이란 그에게 나아가서,
그 분을 대면하여, 그분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다시 하늘의 생명을 받아,
앞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으로 약속을 보장받는 다.

예수안에 생명이 있다. 반면에 인생안에 죽음이 있음을 본다.
사람들은 죽을까하는 염려때문에 하는 늘 불안함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 어느 인간속에나 다 있다.
그것은 죄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인간내면에 있는 죽음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다.
죽은 자에게 생명이 필요하며,
죽은자가 죽은 자를 살릴수 없고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죽은 자를 살릴수 있다.

예수님에게 인생을 살리는 생명의 활력이 있어,
비록 인생들이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생활에서도,
그 가운데에서 만족할수 있으며, 그런 시련들을 감당할수 있다.
예수안에 있는 삶에는 즐거운 인생이 있어,
그분과 함께 자기가 겪는 갖은 고난과 이유없는 고통에 대해 해답을 얻으며
그 시련속에서 힘있게 살아간다.

하나님의 집 교회는 밥상공동체로 예수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예수밥상을 통해, 생명의 빵을 먹으며, 그의 몸에서 주는 생명의 향취를 섭취한다.
각 나라에 흩어진 한인교회는
고국에 대한 향수와 같은 동포들의 만남이
즐거운 점심식사를 함께 한국식으로 먹는 기쁨과 만족함을 나누며,
주일마다 예배후에 어울려 밥상의 잔치를 맛본다.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예수를 먹으면, 생명을 먹는 것이다.
예수를 먹는 일이란, 예수의 진리의 말씀을
머리와 가슴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 의 진리의 가치는 가는 세상, 오는 세상할 것없이 영원하다.
그의 가르침은 인생들이 기대할 만한 생명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인생이 얻을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법이다.
자신의 묵상은 구체적인 대상
즉 그 진리을 생각하고 궁구하고, 또 사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밥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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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가족개념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들

가족이라는 연합체를 약화시키는 사회적인 요소들은
사회전반의 팽배해있는 개인주의나 자본주의적인 영향등을 통해 나타난다.
결혼에 대해 공격하는 두가지 형태는
경제적인 문제의 접근이해와 사회적인 분위기의 성의 자유로운 역활과
비정상적인 성모랄에 대한 이해가 주류를 이룬다.

개인주의는 인간관계의 우선보다는 자기개인의 권익을 따르다 보니
결혼에 임하는 개인개인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의 판단이나, 의견에 의해 가족의 관계에 영향을 주어,
가족관계가 통합적인 흐름보다는 느슨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성의 개방이 결혼안에서 유지되어야 하는 성의 오용이나 남용을 불러 일으켜,
결혼의 관계를 위협한다.
혼전정사나, 결혼관계외서 행해지는 성적인 결합처럼
성이 단지 인간의 유희로서만 여겨질때에,
정상적인 성의 역활에 혼란을 초래하며,
결혼의 관계를 위협하는 성적인 남용을 이끌어낸다.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서로의 조건에 의한 합의라고 여기는 것이
결혼의 응집력을 약화시킨다.
이런 결혼의 조건의 분위기에서
결혼은 경제적인 조건등 외부적인 요인에 근거한 합의로 이루어져,
결혼의 신성함을 약화시키는 역활을 한다.
즉 결혼의 개념이 결혼당사자의 본인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조건이나,
환경적인 요인을 더 생각하는 경향은
또한 결혼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족관계를 강화하는 경우는
가족의 부양의 수가 과거보다 많아서,
부모가 자녀들에 대한 부양의 책임을 감당하기가 용이해졌다.
과거에는 자녀들의 수가 많아서 자녀양육을 소홀히 할수 도 있었으나,
이제는 자녀의 수가 제한이 되어
부모가 그만큼 책임있는 부양을 할수 있게 되었다.

가족관계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또한 결혼연령이 과거보다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결혼에 대해 과거보다는 신중하게 하여, 조기이혼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결혼적령기의 정신연령이 높아져,
그만큼 결혼이 이혼으로 발전할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조기결혼은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은
아직도 육체적인 연령이 되었어도,
정신적인 연령이나 사회적인 연령은
결혼과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가족이라는 배를
항해해가는 바다와 같은 세상이 너무 험악하니,
결혼에 올인하는 결혼연령의 늦추어 지는 것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를 헤치는 데서 보호받을 수 있다.

끝으로 복잡한 사회적인 현상안에서
가족이라는 단위는 인간을 안정과 자기성취를 돕는 기관으로 기여한다.
복잡한 사회구조안에서 인간은 안정과 보호를 갈구한다.
그것의 요구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채울수 있다.
가족관계를 통해 범람하는 사회적인 현상인 개인주의에 맞서서
개인의 안정과 가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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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개념들

가족이란 가장 가까운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의 기초 인간공동체라 할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부부를 이루어 가정은 시작된다.
가족은 혈통과 가문을 통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와 교제를 나누는 모임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가족안에서
인간은 서로 돕는 가운데에 존재하며 살아야 할
기본적인 이기주위보다는 이타적인 사람공동체이다.

그 가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함께 살아가야 할 모임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안에서 태어나 가족의 일원으로 살다가
가족의 보살핌아래에서 죽어간다.
사람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은 핏줄을 나눈 혈족이며, 전통적인 가문에서 나오는 연합체이다.

가족은 한 울타리라는 인간의 피와 정을 나눈 집단이다.
이익단체나 다른 인간공동체와는 다른 가족고유의 공동체의 특질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부모로부터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관계를 맺는 기본적인 경험을 하는 장소이며,
인간상호성을 서로 돕고 유지하는 인간성을 바탕을 둔 모임이다.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인간의 생활문제를 함께 해결하며, 함께 경험하는 곳이다.

성경에서 가족은 하나님의 축복과 창조의 명령으로 인하여 시작된 공동체로,
그는 남자와 여자를 한가정을 이루게 인도하신다.
가족은 신의 명령을 실천하는 곳임과 동시에 가문의 혈통으로 이어가는 체계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삼사대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12자녀들의 가족이야기를 통해,
가족은 자손의 번영과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과
약속의 실현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이다.

구약에서는 가족은 혈연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대가족위주의 가족개념과
소가족개념의 가족이 공존하면서,
가족은 사회의 구성단위로 문화를 계승하며 전달하는 역활을 하였다.
그리고 사회의 한 부분에서는 일부다처제나,
첩을 인정하는 다양한 부부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혼의 발생이나
가족의 이탈에 대해, 법으로 규정을 하기도 하였다.

신약에서는 가족은 좀더 단일위주의 일부일처제의 가족으로 발전하며,
영적인 의미로의 가족은 하나님앞에서,
신성한 공동체로 이혼을 불가하는 가족의 개념을 성립하였다.
예수님은 가족의 일부일처의 신성한 의미로서의 가족의 정의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약교회는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일부 일처의 부부개념으로서의 가족개념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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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복은 자신의 생활철학에서 온다

시편1편1:1-8

1. 복있는 사람은 악한 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죄인들을 본받지 않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2.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과실을 맺고
그 잎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하는 일마다 다 잘될 것이다.
4.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뿐이다.
5.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날에 무사하지 못하고 죄인들이 의로운 자들 가운데 서지 못할 것이다.
6. 의로운 사람의 길은 여호와께서 지키시나 악인의 길은 파멸에 이를 것이다.

소문만복래라는 말은 사람이 웃음으로 사는 경우에
그곳에 복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인생의 복은 대개 자신의 보는 인생의 관점에 따라 달리 생각해볼수 있지만,
대개 형통하는 삶은 복받은 삶이고, 반대로,
자신의 인생이 역경이나, 고통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의 가시밭길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더 가치있고 유용하다.
복은 수단보다는 목적에 치중하면 얻어질수 있다.
복은 의에서 오는 것이지 악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가 의로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화가 임한다.
그리고 의를 행하는 자에게 복이 임한다.

하늘나라는 축복의 나라이며, 지옥은 저주의 나라이다.
인생들이 지금 살고 있는 지상은 사는 과정을 통해서,
장차 영원한 댓가를 받을 것을 바라보며,
인생이 저주와 축복을 함께 경험하는 곳이다.

흔히 행복한 사람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
자기안에서 자신의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며.
반면에, 곤고한 사람이란 자신안에 갈등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불만과 불안, 불평속에 살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그 정체성이란 두가지로 대표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데
하나는 자신이 복받은 사람으로 여기고 사는 것이며,
또 하나는 복은 커녕,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여기는 채로 살아가는 자이다.
그 정체성이란 언제든지 자신안에서 개선하며 살수 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인생전반에 있어서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인생이 누리는 복은 악에서 오지 않고, 의에서 온다.
그 복은 의의 생활철학에서 온다.
즉 복있는 사람은 올바른 생활철학을 갖고 살고, 그의 삶이 올바르게 되니,
그는 자신의 의로운 길에서 인생의 복들(장수, 형통, 자족,덕행,영향력) 을 받게 된다.

사람의 생활철학은 사람이 쓰는 언어에 대한 자신의 개념설정에서 온다.
무슨 말을 듣는가에 따라, 그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습성에 영향을 준다.
자신의 생활태도에 영향을 주는 타인의 말을 잘들어야 한다.
옳은 조언을 찾아가는 것은 지혜자의 일이다.
악한 친구의 꾀임에 빠지거나, 악한 자의 유혹에 이끌리면, 패가망신하기가 일수 이다.
자신이나 남에게 죄를 짓는 자들은 항상 그 마음속에 악에 대한 유혹이 있으며,
죄를 범할 것을 생각한다. 범죄인들은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 뉘우침이 없으면,
계속해서 가중되는 죄를 범한다.
가중범죄에 대해 더 가혹한 형벌이 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그를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존재를 비웃는 일을 통해
인생들은 점점 악해져 가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의 주변의 삶에 악의 조장이나, 죄악의 흔적이나,
어둠세력들(타락한 영들)의 영향들이 나타나
자신을 더럽게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며,
자신이 그의 엄정한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자신의 인생이 복이 있으려면,
먼저 죄와 악을 행하는 태도나 환경에서 벗어나는 일이 우선이다.

고로 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복이 온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야야 할 것이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고 난후에, 인간들을 이땅에 살게 하여,
그의 혜택안에 살도록 하였다.
그는 지금도 세상을 유지하게 하며,
그 세상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하늘을 무시하고 역천하는 사람치고 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하늘은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할 가르침을 전하고 있고
그것을 얻으면 그에 댓가를 인생들이 받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의 가르침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복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진리이며 생명이며, 소망이 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복을 낳으며,
그 말씀들이 자신에게 복있는 생활철학을 살게 한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을 유익하게 위해 주어진 것이다.
사람이 그 법을 따르면 살길이 열린다.
생명을 얻게하며,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사람에게 주신 그의 법은 그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그 법을 통해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여준다.
사람이 그 법을 지키면, 자신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이 된다.

하나님의 법인 그의 말씀에는 하나님자신의 정체감이나, 임재하심이 있다.
그의 말씀을 신언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있으며,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신언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안에 현상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한 숨결과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단계에 이르기 위해, 그저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품는 것이란 마치 닭이 달걀을 품고
생명의 소중한 탄생을 기다리듯 자신의 마음속에 그 말씀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 말씀의 육체화(성육신화: 말씀의 실현화)를 묵상의과정을 통해
그것을 기대하 며 그 실현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이들은 그 법을 늘 생각하며, 그 법안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그 법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삶의 철학으로 삼으며 살때에, 인생이 살아야 길이 보인다.
그 가르침의 진리들을 품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일에 올바른 선택과 지혜로운 결정을 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며, 자기가 심은 일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일을 하는 목적이나, 동기나,과정을
주님이 주시는 말씀안에서 형성하기 때문이다.
열매를 거두려면, 뿌려진 씨가 좋고, 그것을 뿌린 밭이 좋은 밭이고,
그것을 잘 가꾸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은 자신을 잘 가꾸어 준다.

무슨일을 해도 건강한 씨처럼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지면,
그것은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든지, 든든한 사람이 되며,
그리고 자신이 심겨진 환경들을 바꾸는 능력을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통해 공급받는다.
그리고 때를 따라 적당한 시기에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을
가꾸고 돌보는 노력을 하면,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일의 결과인 열매가 나타난다.

인생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둔다는 이치안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삶의 열매를 가져온다.
똑같은 나무를 심어도, 열매의 많고 적음은 농사짓는 모든 일의 결과이다.
인생은 이땅에 심겨진 씨이며,나무처럼, 자신을 통해 열매를 거두어 들인다.
그 열매를 거두게 하는 것은 전혀 사람농사를 행하시는 농부의 손에 달려있다.
그 농부는 모든 인생농사에서 유능한 사역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농부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농사가 풍작이 되기도 하고 흉작이 되기도 한다.

인생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그의 손길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악이다.
그의 길은 인생들이 의의 길에서 발견할수 있다.
인생의 삶안에서 옳음을 좇아가고, 바름을 위해 살려고 하면, 그를 만날수 있다.
하나님이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그의 존재를 거부하고,
그의 가르침과 제시하는 길을 무시한다.
고로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악한 일만 거두게 되는 것은
죄악도 뿌린대로 거두어 지는 것이 인생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며,
악인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며, 주변을 어지럽게 한다.
충실한 알곡이 거두어지고, 열매를 거두는 일이 이루어질때에,
바람에 나는 겨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모든 것을 어지럽게 할 뿐이며,
수고한 만큼 댓가를 가져올수 없는 공허와 요란함과 낭비만이 있을 뿐이다.
이땅에서 선을 이루기는 쉽지 않으나, 악을 행하기는 쉬운 길이다.
악인이 뿌린 어둔 일로 인하여 세상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통해, 사람들은 악인과 선인의 삶의 차이를 판단하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배운다.

악을 조장하는 인생들은 결국 자신이 저지른 일들의 댓가를 받으며,
자신이 뿌린 악의 열매를 자신이 거두게 되어,
그 사람들에게 그들을 붙들어 매는 구속과 거기에 따르는 형벌의 심판이 있을 뿐이다.
악인이 아무리 선한 척, 백노가 노니는 곳에가 있는 까마귀처럼
아무리 선한 포장으로 자신을 뒤집어 썼어도,
결국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고로 자신이 까마귀에서 백노로 신분변화
(자기갱신, 자기회개, 자기변화)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인생의 열매는 옮고 의로운 길에서 얻을수 있다.
의인의 길은 바른 길이며, 인생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다.
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이 바른 길인가?
인생에서 바른 것은 인간다운이의 모습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하나님이 될수는 없다.
이 말은 결코 자신스스로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해결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절대자 하나님앞에서 그를 통해 이땅에 태어났으며,
자신의 가는 인생의 길을 통해, 인생문제를 해결받아야 할 존재이다.

죄인의 길은 죄를 짓는 법범자의 삶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무엇이 죄인가? 죄의 기준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 악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그길을 따르는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그 길을 저버리고 살아갈때에, 죄의 길에 들어서기 쉬운 것이다.

의인의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심판에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돌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을 두고, 인생들이 행한 일에 보응을 하신다.
이세상에서 받지 못한 인생들은 시간을 넘어가는 영원을 향해,
그들에게 합당한 댓가와 보상을 얻게 하신다.
때로는 의인이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시간속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에게
이해할수 없는 삶의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생에 대한 평가(심판)와 보응을
결코 이 시간적인 선상에 있는 세상에만 국한해 놓지 않으셨다.
오히려 시간을 넘어가는 영원한 세계에 더 중점을 두고
인생들을 다스리며, 훈련하며, 인도하신다.

악인은 당대에 자신의 생이 끝난다는 생각을 갖고 살기 때문에
죄와 악을 쉽게 행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저지른 결과가 앞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영원한 장래에
보응받는 형벌을 생각하면,
감히 그 죄와 악을 안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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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

예레미야10:23
“여호와여 내가 알기에는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수가 없고
삶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 할수 도 없습니다.”

사람은 각자가 자신의 운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상관없이 태어나며,
그곳에 있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안에서 정해진 인종이나
환경안에서 사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고로 사람은 자신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자신의 삶의 시작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처럼, 자신의 운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운이란 사람의 정해진 길을 살아가는 인생의 한계나 테두리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마치 전세계의 바다와 육지를 갈라놓는 해변의 경계선처럼,
바다의 물결이 해변에 휘몰아쳐도 어떤 정해진 경계에 물이
더이상 그 경계를 넘지 않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내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러시아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백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자신이 황인으로 태어났으면 그는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간다는 생각에는 그저 숙명을 좇아가는 경우처럼,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살아갈 때에,
부정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없이
그저 자신에게 정해진 삶을 살아가다면,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순응하듯이 살지만,
자신의 개선이나 발전을 위한 의지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도 알수 없는 운에 맡기고 사는 경우이다.

윤회설에서 말하는 인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업보로 생각하고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자신에게 더 나은 새로운 미래의 삶을 위해 현재에 당하는 힘든 일들을 극복하고,
선행을 힘쓰고 살아가면 언제가는 다시 태어날때에,
보다 좋은 인생이나, 영물로 살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돌고도는 윤회적인 인생철학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데는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의 삶의 기회가 유일하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천운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느 인생에게는 하늘의 정해진 뜻이 있다라는 말로 이해된다.
역사에 나타난 유명한 인물들은 그들의 삶이 하늘이 정해준 이치나,
삶의 길로, 그들이 당대에 필요한 일들을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하늘이 정해준 이치를 따라 살면서
자신안에 있는 적극적인 동기부여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을 악인으로 규정하였는데,
그는 인간세상에 악을 행하고, 그 악을 행하는 댓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주실때에,
이집트의 왕인 바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도전하여 거역하고,
이스라엘을 노예로 잡아두려고 했으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고집과 오만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으므로써,
하나님의 역사나, 섭리를 나타내는 도구로 활용이 되었다.

예수그리스도를 돈에 팔아버리기로 선택한 유다는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으로 애석하게 여긴다.
성경은 그의 태어남을 후회하듯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다가 없이는 예수님이 팔리지 않았으며,
십자가의 죽으심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만인구원의 길을 열지 못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던 인생이지 아닌가?
그것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선택한 일로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겪어야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예레미야는 태어날때부터 모태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유다민족의 예언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을 고난중에 감당하였다.
그의 인생은 이미 태어나기전에 하나님에 의해 선별되고,
자신이 해야할, 자신의 사명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진 인생은 그에게 정해진 인생의 운명의 한계안에서
자신의 삶의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알고
자신의 삶의 한계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간다.

유다나라는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국민이
하나님앞에 그를 버리는 잘못과 우상숭배의 죄를 지으므로,
멸망으로 치닫는 결정된 미래를 따라 나라가 온통, 주님의 심판에 놓여 있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노력하여 정해진 멸망해가는 코스를 바꾸어 보려고 시도하지만,
자신들과 조상들의 범죄한 우상숭배와 도덕윤리의 타락은
결국 유다나라를 침입하는 이웃 강대국들에 의해 멸망해 갔었다.

인간이 하나님이 결정된 미래를 살아가는 것과
인간이 운명처럼 변개할수 없는 것의 삶의 코스를 살아가는 것이란 다르다.
하나님이 정한 테두리안에서 자신의 최대한의 노력이나 발전적인 시도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야 숙명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수동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에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결정이나, 선택에 의한 미래의 결과를 알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를 결정하고 어느 일을 선택했을때에,
그 선택이나 결정이 자신의 미래를 모르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자신이 결정하는 결혼도, 자신이 선택하는 직업도,
자신이 만나는 만남도 결과를 알수 없는 미래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때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자신이 생각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자신이 계획한대로 내일 그것이 다 이루지 못하며,
자신이 정한 삶이 방향이 아닌
삶의 변수(사건사고나 불행이나 불운을 통해 겪는 일들)가 주변에 많이 놓여있다.
선택과 결정은 자신이 하더라도 그 삶의 전체 흐름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다.
선거때마다 유권자들이 어느 후보를 택하지만,
이외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의 미래에 대해, 알 수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자신이 정한 인생의 방향을 끝까지 지속하기위해서라도,
자신의 인생의 길을 정하고,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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