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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구의 당기는 중력에 의해
자신들의 존재가 지탱하고 있듯이
인간의 거의 모든 일들이 자연의 법적인 현상이나 작용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인생들이 자신들이 중력에 의해 움직이듯,
인생들이 특별한 배려가 없이 법이 명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이란
법적 준수나 법을 위반시 처벌만 기다리는 삭막한 인간생활로 여기게 된다.
모든 것이 법이 정해준 대로 살아야 하며,
배려는 없고, 법만이 영향을 주는 삶이란 사람을 더욱 고달프게 한다.
생활하면서, 특별하게 생일을 축하하다든가, 집들이를하다든가,
결혼기념을 축하하는 것은 평범하게 살기쉬운 일상의 생활에 의미와 활력을 불어넣어주게 된다.
특별한 날들이 없고, 그저 다람쥐 체바뀌돌듯이 변화가 없거나 무의미하다못해,
권태가 일어나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삶의 에너지에 충전이 필요하다.
그 삶의 에너지는 자신을 향한 배려나 혜택을 통해 얻게 된다.
사람이 중력의 법칙대로, 자연적으로 되어진 대로 살아간다면,
결코 보다 가치있거나, 보람있는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한 아이가 자라면서 수많은 희생과정성이 깃들인 부모의 돌봄이나,
가르침의 결과로 사람이 훌륭하게 성장하게 된다.
저절로 무엇이든지 그냥되어지는 법은 없다.
거기에 정성이 들어가고,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의댓가로 자신의 출세나 성공이 이루어진다.
그런 일들 가운데에, 서로에 대한 희생과 기대감이 있고,
또한 서로를 향한 배려가 있고, 혜택이 있고, 봉사가 있고, 섬김이 있다.
만일 지구의 모든 인생들의 삶이
단지 중력에 의해 자연의 법칙대로 돌아가는 대로만 살아간다고 가정해보면,
인생들은 잠시도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는 천재지변이나,
자연의 힘에 의해 떠밀려, 존재하기도 쉽지않을 것이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홍수가 나거나,
재해가 닥쳤을때에 조금만 더 도가 넘어가면,
더 큰 재난이나, 고통스런 상황을 맞이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고비들을 넘기는것이 우연히 이루어 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그 배후에는 신의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잘못에 대해 용서나, 용납이나,
혹은 사면이나 면책을 해주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행의에 대한 심판에 의해, 인간스스로는 설수 조차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때에도 매를 들고,
법으로 아이를 바로 잡으려 하면 우리의 대하는 잣대로 자신도 완벽할수 없을 뿐아니라,
아이들을 변화시킬수 있는 교육의 효과의 길로 유도하기란 쉽지않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을 용납해주는 너그러움이 있고,
비록 실수를 했어도,그들을 받아주는 부모의 아량이 있어야,
아이들이 그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실수를 용납하면서,
계속적인 격려가운데에 바른 길을 걸어갈수 있을 것이며,
발전적인 성장을 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고,
특히 인간의 인성개발(영성, 지성, 감성)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물리적인 법칙에 의존하는 법의 테두리가 아닌 관용과 용서의 배려가운데에
사람의 잘못을 고치게 되고, 사람들 자신을 변화시키며,
그리고 나아가서 그런 연약한 것들을 극복하고
자신을 보다 나은 단계로 발전시킬수 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계에 뿐아니라,
인간의 다반사가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관계나,
비지니스세계에도 서로 잘못을 용납해주고,
그들의 실력이나 노력을 믿어주고 하는 신뢰의 관계가운데에 비지니스가 성공하고
또한 사회도 발전할 것이다.
그렇지만 느스한 법적용이나, 안일한 법위반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일 어느사회든지 사람들을 엄격하게 구속하고 다스리는 법만 있다면,
그사회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사람을 질식시킬것이다.
인간의 잘못이나, 허물을 용납하지 않은 비판과
법적인 구속만있는 전체주의사회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숨을 돌릴여유도 없고,
그런 구속적인 법규망속에서 사람들은 노예처럼 자신들을 포기하고,
배려나 혜택은 없고 의무나 맹종만 있는 험악한 상태에서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에는
서로를 향한 배려와 격려와 관용이 있는가운데에 넉넉한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살아갈수 있다.
이런 모든 인간사회의 배려나, 혜택이나, 관용등은
그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신의 용서와 배려와 신만이 줄수 있는 은혜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에는 신의 배려나, 관용에 의해,
서로를 받아줄때에 그렇게 살아갈수 있다.
사람이 물을 마시고, 공기를 마시고, 하늘의 창공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활보하고 살아갈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은혜의 배려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법적인 구속의 힘보다는
사람을 옳은 데로 이끄는 종교의 힘이 올바르게 활용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때에,
그 사회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참된 삶을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타인이나 사물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자기 표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감정은 사람의 마음이 집중할때에 나타나는 것으로
사람이 어느 사물이나, 정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이 감정으로 표현이 된다.
그리고 감정시스템은 두뇌에서 이성적 역활이 판단하는 것에 따라,
어느 사물이나 정보에 대한 자기인식에 대한 가치를 나타내는 시스템이다.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두뇌에서 작용하는 지속적인 신경조직의 활동을 통해,
특정한 방향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개인의 성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
사람은 어릴때부터 이런 두뇌에서의 감정인식이나 표현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서의 감정에 대한 자기규칙을 세우며,
감정을 운용하게 되는 나름대로의 자기성향을 세우게 된다.
즉 어릴때부터 감정의 표현의 훈련은 어른이 되어가는과정에서,
자신의 성향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감정을 조정하는 힘을 갖게 된다.
사람의 대뇌의 시스템에서 사람의 감각으로 부터 자극 받은
정보에 대한 의미의 평가나 ,
전달된 정보와 사물에 대한 가치인식를 통해,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
이 시스템에서 사람의 사회적인 접촉(바디랭귀지), 자기인식체계, 의식, 고양된 정신활동을 통해 감정이해가 형성되어진다.
사람의 대뇌의 왼쪽뇌에서 적극적인 감정을 감지하며 관장한다.
그리고 오른 쪽 뇌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감지하며,
사람의 얼굴의 표정과 감정인식을 관장하며, 감정을 조절한다.
감정의 표현의 단계에는 처음에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나
거기에 대한 반응에 대해 “지금 주의(인식)하는 상태로”
사람의 감정이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일이나 사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지난날에 겪은 자기경험의 기억들에 위해 평가하고
(사회적인 평가들을 포함함),
또한 감정의 표현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감각으로 부터 받은 정보에 대한 자극의 요소들,
미래에 대한 기대등을 포함한다.
감정의 기초적인 감정은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표현양식으로 볼때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뉜다.
감정의 긍정적인 것은 기쁨, 놀람, 흥미, 만족등이고,
부정적인 것은 슬픔, 분노, 걱정(두려움), 증오(싫증)등이다.
긍정적인 감정들은 자신의 그 감정들을 확대하는 데에 유용하며,
부정적인 감정들은 타인과의 소통에 조절된 자기감정을 맞추는데에 작용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런 감정표현들을 반복하면서,
정신활동에 있어서 자율적인 상태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개발하게 된다.
이런 위에서 언급한 이해 아래에서,
우리가 어느 일을 할 때에 이성적으로는 괞찮다라고 생각하는 일을
우리의 감정이 싫다라고 반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감정에는 의식적인데서 온 것이 있고,
무의식적인 것으로 부터 온 것이 있어,
그런 경우에는 우리의 이성이 감지못하는
무의식에서 온 감정과 이성의 인식차이 때문이다.
감정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속적인 감정적인 상태인 무드(분위기)라는 것이다.
이 무드(분위기)라는 것은 사람의 어느 감정이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 무드가 부정적으로 발전하여 병적인 상태가 된다는 것은
어느 감정에 자신이 조절할수 없는 상태까지 가서,
그 감정에의해 자신이 조절받게 될때에 발생한다(예: 불안, 우울증 등).
울고싶을 때에 우는 것, 웃고 있을 때에 웃는것,
기뻐할때에, 기뻐하는 것, 슬퍼할때에 슬퍼하는 것,
화가 날때에 화를 내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것을 표현하는 것등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표현일 것이다.
항상 자신의 얼굴이 심각하고 감정표현에 있어 자연스럽지 못할때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생활의 희노애락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이해하고, 대화하고, 인간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일에 습관화되지 않고,
억압시키는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때 부터 감정을 억제하는 교육을 받은 탓도 있을 것이며,
감정을 표현하며 부드럽게 하기보다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웃어도 울어도 극단적인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안에 감정이 정리가 되지않아,
그 감정들이 눌려있으며, 왜곡되어있어,
감정표현이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감성지능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특히 대인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자질이다.
그 감성지수는 자아의 높은 감정인식, 안정된 감정규칙,
그리고 건강한 감정표현을 포함한다.
타인과(특히부모와의 관계)의 안정적인 인간관계의 형성에 의해 자란 경우에,
감성지수가 높으며,자신있게 감정을 표현하며,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있게 대처하게 된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할 것없이 자신을 마음 껏 표현하게 하는 것,
특히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사람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며,
자신의 의견을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솔직담백하게 혹은 담대하게 표현할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또한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특히 어린 유아기에서 형성되기 쉽다)를
대하는 애정표현을 통해, 자기표현이나,
다른사람과의 감정교류와 마음을 연결하는 방법들을 자녀들은 터득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릴때에 그것을 통해, 인간관계의 형성을 어떻게 하는지를,
즉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방법을 배우게 된다.
부모의 양육에서 나타난 자녀에 대한 애정관계표현(감정교류와 상호 자아접촉및 영향)은
크게 네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다.
먼저는 안정된 부모의 사랑을 전제로 한 지속적인 애정관계인데,
이 관계는 부모가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자녀를 돌보며,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사랑이 변치 않아,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어 자녀들이 감성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자신들을 표현할때나,
정상적인 감정교류를 통한 인간관계를 형성할때나
사회생활에서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아주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어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거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건강한 관계나 교제를 형성하게 해준다.
즉 어릴때부터 부모와의 정상적인 관계안에서 돌봄을 받은 자녀가
나중에 인간관계나 교제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건강한 대인관계를 형성할수 있다.
이런 경우의 자녀들은 부모가 그들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대인관계나, 능동적인 자신을 표현하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자녀를 더 건강한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키울수 있다.
만약 자신이 이런 부모가 아니라면
자신이 먼저 주변사람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고,
자신의 과거의 부모와의 관계를 점검해 보고 자
신을 다시 한번 재양육하는 과정을 통해, 건강한 감정적인 자신이 되어,
가까운 사람과 애정을 자주 나눌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감성적으로 바르게 표현하지 않은 경우이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가는마땅한 사랑표현을 주지않고,
자녀가 부모의 사랑과 애정의 결핍증을 갖도록 하여,
부모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그리고 자녀들의 자아개념속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한다.
그래서 그 자녀는 자라면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우기가 쉽지않다.
이런 경우는 괜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정상적인 애정관계나, 정을 표현하기를 꺼려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을 깊이 사귀지 못하는 인간 감정교류에 지장을 받기도 한다.
자신의 머리에 이성적으로는 사람을 사귀고 싶고,
사람에게 친근하게 대하고 싶은데, 자신의 감성이 따라 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상처난 경험도 있을 것이고,
따뜻한 애정을 받은 기억을 갖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표현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감정표현을 하는 것을 배우고, 주
변에 있는 사람들과 따스하고 정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여,
인간관계나 감정교류에 대해 자신감을 갖도록 할 것이다.
다음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표현에 있어서 안정적이지 않고,
불안한 관계로 형성되어, 부모의 필요를 따라 애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자녀들은 부모의 애정표현의 피해자가 되어
자녀들은 남들과의 사랑표현이나 애정관계나,
우정관계를 유지하기가 정상적으로 갖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경우의 사람은 잦은 인간관계의갈등을 겪기도 하고, 오해를 사기도 한다.
이런 자녀를 둔 부모들은 먼저 자녀에게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애정표현을 알것이다.
자녀는 주변의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건강한 관계나 교제를 갖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킬때에, 부모는 그문제가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인정하고,
먼저 자녀에게 건강한 애정이나 관심표현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는 어릴때에 부모로부터 좌절되는 감정적인 경험들이 많아서,
자신안에 감정적인 불안을 떠안고 있다고 할수 있다.
신경질적인 사람들이 특히 그들이 애정에 굶주려 있는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불만이 다른 사람에게 표출되어,
다른 사람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그로 인하여 불만과 갈등을 갖게 된다.
어린 시절의 상처들로(성적인것이나, 혹은 육체적 학대들)로 인한
억압된 감정들을 끄집어 내어 그것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해소하는데는 기억치유나, 내적치유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기억치유나, 내적치유는 억압된 감정치유에 도움이 된다.
먼저 이것을 본인스스로 하려면
내면의 자신에 대한 일기를 써본다든가?
혹은 기도나, 혹은 그것을 가지고 신(하나님)에게 나아가,
그가 베푸는 자비(사랑, 은혜)의 힘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부모와 자녀의 애정이나 사랑의 연계표현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경우이다.
이경우는 부모에게 상당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이며,
부모도 또한 정상적인 자신의 부모로 부터 애정이나 돌봄을 받은 적이 없다.
부모들은 자녀의 인격형성이나, 대인관계감정교류의 형성에 혼란만을 초래해
자녀들은 거기에서 쉽게 벗어날수 없다.
이 아이들은 이성적, 감성적표현에 있어서나,
행위표현에 있어서도 정상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자신안에서 분열적인 자아 증상을 통해,
깊은 정신적인 갈등과 정서적인 혼돈과 불안을 경험한다.
이런 경우는 대개 부모가 건강치 못한 정서생활과
비인간적인 인간관계나, 문제의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중독에 빠지기 쉽고,
정신적인 질병에 걸리기 쉬운 성향을 갖게 된다.
이런 경우는 전문적인 상담인을 찾아
부모자신과 자녀가 동시에 자아상담이나,
인격상담등 전문적인 상담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나 자녀는 인생생활에서 겪는 문제를 다른데서 찾지 말고,
자신의 자아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하고,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도록 주변사람들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하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정상적인 인간관계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주변부터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관계들을 정상적으로 할수 있도록
회복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이성과 감성이 두뇌에서, 작용하는 존재인데,
이성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데는 감성적인 요소들이 더 영향을 준다.
이 모든 사람들의 정서적인 문제에
사랑의 힘이 가장 큰 힘이며, 치료제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정서적인문제들을 해결한다.
시편97편
주님이 통치하시니 온 땅이 즐거워 합니다.
온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섬들이 다 주님을 기뻐합니다.
주님이 계시니, 세계가 든든하게 서있습니다.
내일에 세상에 종말이 와도,주님이 계시니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지구가 뒤틀리고 온 천체가 흔들려도 우리는 요동치 않습니다.
온우주를 창조하신 이가 계시니 혼이 빠질일이 생겨나도
나가 떨어져 자빠지지 않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가득하고, 악이 횡횡하고,
정의가 땅에 떨어져 얼굴들고 살수없을정도가되더라도,
세상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이 계신주변은 마치 흑암에 둘러 쌓인 것처럼,
흔적도 없이 펑뚤린 하늘처럼 아무도 없는 적막한 밤 하늘의 창공에서도,
주님이 보이지 않으신 것같으나, 거기에 주님의 보좌가 놓여 있으니,
그가 공평과 정의로 세상을 내려다 보고 계십니다.
그의 보좌 앞에 불이 나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이
주님의 불꽃들이 적들에게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발하는 빛은 전광석화와 같이 온 땅에 비치며, 그 빛에 환히드러나고,
그의 앞에서, 두려워 떠닙니다.
그 옛적에 예수님 믿는 예수장이들을 잡으러 가는 길거리에서 살기등등한
그 바울에게 비쳐진 빛처럼, 주님의 빛은 인간의 어두움을 속속 들이 비쳐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휘황찬 그 빛앞에 벌거숭이가 되어 드러납니다.
높은 산들이 자신들의 높음을 자랑하고, 온갖 것들로 장식하며, 방어하며,
자신을 치장을 하여도, 그 산들을 지으신의 눈아래에서,
자신들의 높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그것은 다음과 같은 현상입니다.
세계의 높은 산들처럼, 온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도, 세력인들도, 권력인들도,
유력인들도 다 주님앞에 나약한 존재로 드러나며,
그의 심판하시는 역사앞에 촛밀 녹듯이 그들의 간장이 녹아내리듯
그들의 마음이 떨립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은 그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다만 육신의눈만을 가진 인간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존재는
온만물가운데에 충만히 계십니다.
미물도,미생물도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흠숭합니다.
하늘은 주님의 의(옮고 바름)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푸르고 맑은 하늘을 쳐다볼때에 우리는 당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하늘의 푸른 창공처럼 투명하며,
밝음이 드러나듯이 옮음으로 가득차 계십니다.
모든 인생들이 그 가운데에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분의 의가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의앞에 인간의 불합리도, 억울함도, 강압적임도, 인간적인 모순도
봄눈 녹듯 녹아집니다.
이런 놀라운 주님을 어리석은 인생들은 한갖 깍아만듯 나무토막이나,
석돌같은 존재로 만들어 그것들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자랑하는 인간의 무지가 모든 신들을 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을 지으신 창조주는 섬기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들위에 가장 으뜸이신 주님은 우상섬김들을 통해
인간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을 창조하신 신앞에 갔을때에 그들은 놀라운 어리석음에
자신들을 가눌길 없을 것입니다.
정작 자신들을 있게 하신 창조주를 몰라보고,
평생을 어리석게 억울하게 자신의 인생을 두고 후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조주를 찾아, 발견하고, 만나서, 그를 알아보았던 사람들은 즐거워 합니다.
주님이 계신 땅에서 주님을 만나,
그분을 통해 자신이 건짐받은 인생들은 기뻐좋아합니다.
인생들이 겪어가는 무지, 가난, 곤란, 미망, 허망, 억울함, 황당한 고통, 몸서리치는 고통,절망, 패배,좌절, 죽음을 통해 건짐받은 인생들이 주님을 향해, 기쁨으로 노래합니다. 이 땅의 보호받아야 할 인생들이 사람들의 딸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나약한자라고 여기고
주님의 보호와 보장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다행한 일이 었는지를 주님이 온세상을 심판하는 그날에 가서야 알게 될 것을
바라보고 기뻐 좋아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높은 곳보다 높이 계신 분입니다.
주님은 모든 신들가운데 높임을 받으십니다. 인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주님은 가장 높임을 받습니다.
인간이 다하는 온갖 정성과 찬양이 담긴 곳에서 주님은 높임을 받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고귀하고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흠송안에서
주님은 높임을 받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인생들을 주님은 보존하십니다.
그는 주님을사랑하는 무리들의 영혼들을 영원까지 보존하시며,
그들을 괴롭히는 온갖 적들로 부터 보호하시며,
마지막에 죽음과 지옥의 저주에서 까지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빛은 의의 빛이라, 그 빛을 받는 이마다, 그 마음이 의로 가득차게 됩니다.
주님을 기뻐합니다. 의로운 인생들은 주님의 구별되고 거룩한 이름을 두고 감사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을 의미합니다.
그는 인생들을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함께 하시는 주님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을 한다.
이말은 무슨 직업이든 직업을 가진 당사자에게는 가치있는 일이며,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할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는일이 무슨 직업에 종사하는 일이든, 그일이 자신에게 맞는 일이라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중요한 일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일에 열심을 낼 것이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완성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자기완성의 한 단계나, 과정으로서의 직업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며,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무숙자에게도 자신의 직업이라 할수 있는 일이있다.
미국 노스엔젤래스 도시에서, 많은 노숙자를만난 적이 있다.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흑인 노숙자가 차유리를 닦으려고, 다가와, 열심히 차의 앞유리를 닦으면서,
우리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짧은 봉사지만, 자신이 한 일에 댓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한국에도, 아이엠에푸시대이후에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직업을 잃은 많은 노숙자들이 생겨났다.
노숙자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노숙자로서의
노하우를 갖추는 직업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 많은 직업이 있다.
천하거나, 귀하거나, 할 것없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있으며,
그일이 자신의 생존과 결부되어 직업을 유지하고 살게된다.
직업에 대한 의식은 크게 두가지태도로 생각해 볼수 있다.
그하나는 천직이라는 직업의식과,
그리고 또 하나는 잠시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몸을 담고,
그 직장의 일을 일시적으로 종사한다고 생각하는 철새 직업의식이 있다.
그렇지만 직장인들은 자신의 어느 직업에 종사하든,
자신의 의식에 따라, 그 자신의 직장에 종사하는 태도에 영향을 주고,
그 태도는 자신의 직업의 모든 부분에서, 업무의 결과의 차이로 나타난다.
경력으로서의 직업의식은 자신이 그일을 하므로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다.
어느 한가지 일에 오랫동안 종사하다보면, 그일에 익숙해지며,
그일에 대한 여러가지 일에 대해, 노하우를 터득하는 일 일것이다.
자신이 종사하는 직장에 대한 애착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숙련이나,
일의 습득이나 직업을 통한 자기 발전을 꾀할수 있다.
그런데, 직업에 종사하면서, 계속적인 갈등이나,
자기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때에는
그 직업에 몸담고 있는 기간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직장생활이 시작단계인 경우에는 다른직업을 찾아가는 것도 좋을 듯하며,
중간단계의 기간에서는 쉽게 직장을 옮기지 못할 것이므로,
나름대로 그 직장에 적응하여, 오히려 발전의 기회로 삼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은 승진에 대한 도전이나, 준비를 하는 일일 것이다.
마무리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직업을 놓고서,
다시 한번을 자신이 해야 할일을 찾아가는 기간이 필요하다.
직업을 떠나, 자신만이 할수 있고, 평소에 직장이 있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또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할 일을 찾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직업을 너무 구분하여,
노동을 하는 것이나.기술적인 도공이나, 기능공을 천시하여,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고, 천시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기술직이나, 전문기술인들이 대우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무엇이든 그분야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숙련을 갖고서 일을 하는 경우에
전문인으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요즘은 무슨 직업이든,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계속적인 자기발전의 노력을 통한 전문적인 숙련과
자신만의 할수 있는 업무의 세계의 영역을 세워 나가,
그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대우받을 것이다.
조기 은퇴하는 말은 우리모두에게는 듣고 싶지않은 말일수 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은퇴를 하면,
자신의 인생은 일과는 상관없는 그저 소비하는 인생으로만 여기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태도의 사람이 은퇴하는 순간부터 사람이 갑자기 늙어지다든지,
그리고 삶의 의미와 의욕을 잃어버려, 할 일없고 쓸모없는 인생이라고 여기게 되어,
자신을 불행한 사람을 여기게 다.
그러므로 직업을 떠나, 자신이 평생하고자 하는 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삶의 지혜일 것이다.
운동(육체적, 정신적, 영적)을 계속하다든지, 사회봉사를 한다든지,
아니면 종교적인 활동에 몰입하다든지,
자신이 직업의 세계를 떠나, 자신만이 하는 고유한 자신의 일을 세워놓고,
그일을 하면, 은퇴와 상관없이, 남은 인생의 날들을 보람있게 보낼것이다.
직업의 세계만의 영역을 초월하여,
사람은 인생이라는 직장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따라,
세상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아,
그 일을 하며, 자신의 일생을 보낸다.
자신이 그저 이세상에 태어난 것이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일이 있고,
그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 있다.
이런 사명의식을갖고 사는사람과 그런 의식이 없이 사람과는
살아가는 삶이 서로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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