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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9
    영혼의 기쁨
    목동
  2. 2007/08/19
    가나안 여인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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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8/17
    하나님이 주신 새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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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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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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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8/10
    좋은 사람, 좋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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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8/02
    자기방어 시스템의 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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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8/01
    한 여인의 도전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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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7/25
    한인세대들의 정체감과 사고방식
    목동
  10. 2007/07/24
    가장 큰 계명
    목동

영혼의 기쁨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케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가 제자들이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순종하는 가운데에서
맛보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인격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경험하는 만족한 상태를 가르치고 있다.

신앙인들은 때로는 믿음을 세상을 탈출하기 위하한 도구로 생각하여,
자신의 불안과 답답함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신앙인들은 교회의 신앙적 가르침안에서 더 중한 종교적인 짐을 지고,
영적인 부담감안에서 허우적 거릴때가 종종 있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이 내게로 오는 것은 삶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을 얻고,
쉴수 없는 영혼의 답답함에서 자유를 얻어 진정한 평안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신앙인들은 쉼보다는 얽매임을 더 가질 경우가 있다.
세상의 짐을 지는 것위에 종교적인 짐까지 올려놓는 부담감이 있다면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할 자신이 도리어 영적인 스트레스에 더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는 많은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알고 느끼지 못했던 죄의 중압감이나 영혼의 부담감은
신앙안에서 더 자신을 억누르며, 영적인 우울증에 내몰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할 때에 신앙인은 진정한 거듭난 영혼의 평안과
구원받고 은혜받은 심령으로서의 영적인 자유와 희열을 얻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영적인 자유와 기쁨은 먼저 자신의 영혼의 만족한 상태에 있을 때에 경험하게 된다.
신앙인의 자유와 기쁨은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의 테두리안에서
진정한 마음의 자유와 영혼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세상에서 흔히 주장하는 자유를 통한 자유가 아니다.
그런 자유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보장(자기의 독립성이나 주관성)하는 것같으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원칙없는 자유를 통해 자신
(인간의 무는함과 무지함 그리고 선하지 못함 으로 인한 건강치 못한 자아)을
방종하게 하는데로 빠지게 하여, 죄와 그로 인한 좌절과 절망의 나락으로 헤매이게 한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그는 진리를 모르는 인생들이 모든 미망에서 갇혀
결국에는 죄의 속박을 받아 죽음의 세계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진리가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주님은 인생을 자유케 하는 진리로 오셔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생들을 자유하게 하신다.
그가 죄에 대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 주셨다.

신앙인들은 죄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는 데에서부터
진정한 영혼과 마음의 자유를 맛보게 된다.
신앙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용서받은 자신으로 하나님앞에 용납받으며,
하나님의 의가 주는 혜택을 받아, 영혼의 만족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 영혼의 만족함 속에서 나오는 충만한 상태의 기쁨은
자신의 심령에서 노래(깨달음과 감사함에서 나오는)가 쉴새없이 흘러 나오게 된다.
그것은 결국 신앙인들이 영혼의 기쁨을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하늘의 신비의 경험으로 자신의 생애에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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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인의 신앙

마태복음 15:21-28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발전은 저 미지의 세계 넘어있는 그들의 꿈과 비전의 이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불굴의 용기의 정신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위기나 혹은 어려운 일에도 포기하지 않는 기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때에 장애물을 극복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어가는 도전하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세계안에도 그러한 도전적인 정신이 있는 깃들어 있는 믿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안에서 믿음의 도전적인 성격이란 이렇습니다. 그 믿음은 바라는것을 이루며,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특성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믿음의 도전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시돈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가셔서 접촉하신 일은 드물게 그의 사역에 나타납니다.

이방인들은 보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문화이기에, 사람들 가운데에 악령들이 쉽게 영향을 주며, 사람들은 귀신들의 지배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문화나 문명이 발달하여도 하나님을 모르는 문화나 문명은 영적인 존재들에 영향을 받는데, 특히 악한 영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이방인인 한 여인이 자기 딸로 인하여 늘 염려와 사랑으로 돌보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딸은 소중한 자녀로 그녀에게 삶의 희망이었으나, 그녀의 딸이 몹쓸 귀신이 들려버렸습니다. 아마 그녀의 딸이 어린 시절의 아버지나 혹은 나쁜 어른들로부터 상처를 입은 상태로 지내다. 그 상처로 인하여,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딸이 실성하여 귀신이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패인이 되어버린 그녀의 딸은 어미에게는 크나큰 인생의 짐이며,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앞으로 나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하는 태도나 답변은 그녀의 청원을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에게 유대인우선순위를 내세워,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하리라. 이방인들이 들으면 화가 날 개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민 그의 자녀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녀는 그러한 기존의 편견이나 선입관들에 대해 여인은 자신의 도전하는 믿음으로 맞섰습니다.
첫째로 그녀의 도전하는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이 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딸의 문제를 간청할 때에 거부와 반대와 같은 장애요인들이 있엇습니다. 1) 당시에 이방인들이 유대인에게 상종하는 것은 금기로 여기는 것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서로 접근이나 대화의 장벽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거절과 제자들의 반대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15장에 보면 제자들이 그 여자를 제자들이 귀찮게 여기고, 보낼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장애물을 넘어갔습니다.그녀에게 유대인과 이방 인의 차이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다만 자신의 딸을 치유하는 의사이신 주 예수님이 계시고, 그녀에게는 오직 그 딸을 치유하려고 하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절박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강인한 갈망의 에너지가 넘치는 믿음이 었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믿음에 갈망의 에너지가 넘쳐나 그 에너지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해결의 접근하게 하였으며, 여러가지 장애요인들을 극복하는 집중적인 믿음의 활력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분출하였던 것입니다.

그녀의 도전하는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여 기회를 잡았습니다. 자신앞에 메시야 구세주 예수께서 다가오실때에, 기회를 잃지 않고 그녀는 담대히 유대인앞에 나가서 자신의 요구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하늘 나라의 좋은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천국은 사모하고 갈망하고 얻고자 하는 강인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두드리고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열려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천국은 가고자 갈망하는 자들에게 열린 문으로 다가옵니다. 구하는 자에게 얻어지는 곳이며, 찾는 자에게 찾아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두번째로 그녀의 도전하는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매몰차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줄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자녀의 떡에 제한 하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그 자녀의 떡을 취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개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끝까지 요구하였습니다.

바로 그 옛날 구약의 조상중에 가장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한 야곱의 믿음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형인 에서에게 장자대신에 차자로 태어나서 그 장자에 대한 축복을 취하고저하는 열정과 그 그 장자권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통한 일관된 추구는 급기야는 그가 어느 발 밤에 얍복강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면서 축복의 하나님에게 축복을 쟁취하고야 만 하는 그의 도전적인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칭호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속에 하나님과 겨루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축복을 얻어내는 인간의 믿음의 도전적인 시도들을 격려하며 축복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필요를 관철하고저 하는 끈질긴 간구의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이나 효과는 믿음의 기대만큼에 정비례합니다. 끈질긴 믿음은 결국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합니다. 모든 일에 잇어, 일의 성공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나타납니다. 일의 성취도 중간에 있는 반대작용이나 한계를 넘어가면서 이루어 집니다.

어거스틴은 교회역사에 가장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을 때에 허랑방탕하며, 사생아를 낳았으며, 진리를 추구하였으나, 이방종교인, 마니교에 빠져 그의 영혼과 몸이 모두 타락한 상태에서 혼돈과 절망속에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가 잇었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그녀는 십수년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녀는 긴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결국에는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로, 어거스틴이 어느날 정원에서 자기의 동료와 이야기 하다가,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노는 소리에 탁자에 올려 있었던 성경을 로마서 13:13-14을 들고 읽거라는 신비한 음성을 듣고 그동안 성경을 읽어도 마음에 변화가 없던 그에게 하늘로부터 깨달음의 빛이 그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 그가 그때부터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잘못된 것을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어 장차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는 유명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세번째로 그녀의 도전적인 믿음은 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주장에 대해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이 표현이 그런데 마태복음15장에서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크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인정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이 하나님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의 정신은 절박함이나 간절함에서 나오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인간의 생각이나 태도나 정신은 그 간절함이나 절박함에서 나오는 기대감일때 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이나 인간의 편견을 넘어가는 그녀의 믿음은 할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급을 얻게하는 큰 믿음이 었습니다. 사람은 대개 기존개념에 머물게 됩니다. 도전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상식적인 생각을 넘어가며, 그 너머에 있는 할수 있는 가능성의 열매를 따먹습니다.

다윗시대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틴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군인들은 누구나 저 거인을 아무도 이길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거인에 도전할 만한 용기가 나서질을 않았습니다. 모든 군인들의 생각에 거인을 이길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만은 달랐습니다. 골리앗이 거인이라도, 전사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이길수 있다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 용기가 있는 믿음이 큰 상급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수로보니게 여인의 도전하는 믿음은 먼저 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으로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상급을 얻는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녀의 그러한 큰 믿음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그런 큰 믿음을 갖고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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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새 계명

요한복음 13:34-35
34. 이제 내가 새로운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주 예수님 자체이다.
그의 삶은 사랑의 화신의 삶이다.
그는 사랑으로 인하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위하여 이땅에 오셨으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의 생명까지도 그의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희생을 하셨다.
예수님에게 있어 사랑에 대한 그의 태도는 목숨보다 더 강한 정열을 보여주셨다.
그 사랑때문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기위해 자신을 버리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함을 보여주시며,
그 사랑안에서 인간들이 잃어버린 영광의 자리를 회복케하여,
인간의 죄와 허물로 벌어진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복원케할 진정한 사랑을 심으셨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이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본성과 연결되는 의미가 있다.
사람은 사랑할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랑할때에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인간의 선함과
자신속에 창조된 풍부한 하나님의 속성이 빛을 발하게 된다.

주님이 주신 새계명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계명중에
가장 고상한 인간 선의 온전함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그 계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하나님에게 가까운 속성으로 인도하여
인간속에 심겨진 신의 흔적을 볼수가 있다.
사랑을 통해 신의 세계가 열리며, 인간성의 고상함을 보여주게 된다.
하나님이 바라는 세상은 인간들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참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은 그들의 공동체안에서 서로에게서 사랑을 잃어버려서 붏신과 좌절과 절망을 겪으며,
결국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은 서로 나누는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유익을 주며,
사랑은 사람들속에 있는 모든 좋은 소유들을 서로 공유하게 하며,
풍부하게 하며,사람들간의 서로 상호의 온전함을 이루는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사랑은 인간의 유치함(어리석음)을 성숙케하며,
단절된 신과의 관계에서 오는 절망과 죽음으로 부터 오는 모든 두려움이나 불안을 떨쳐 버리게 한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사랑의 관계에서 출발할 때에
인간관계는 오랫동안 유지되며,
그리고 숭고한 인간성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심으신 인간성안에 있는 인간의 고귀함을 가꾸며,
더 나아가 자신을 온전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함께 유익한 존재들로 변화되어 가게 한다.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공동체는 이상적인 인간들의 모임을 이루며,
그 안에서 사람은 사랑을 서로 먹으며 생존하고, 자라며,
온전한 성숙을 향하여 나갈수 있다.
특히 가정이라는 공동체는 늘 사랑의 분위기에서 유지되면,
사람은 그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일과 사명에 충실하며,
자신들의 이상적인 비전을 펼쳐 갈수 가 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서로를 돕는 존재로 나타나게 하며,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안의 갈등과 인간관계의 문제에서 겪는 어둠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로를 빛나게 하는 은총의 세계로 나가게 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들사이에 있는 사랑을 통해 그 빛을 발한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과
그로 인한 풍성한 혜택들을 누리게 되며,
더나아가 사랑하는 자기들 안에서 살아있는 진정한 인간성의 숨결을 느끼며,
고상한 사람냄새의 아름다운 향기를 마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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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치있는 믿음의 소유자

마태복음 8:5-13

5.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장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구하며.
6. “주님 제 하인이 중풍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7.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 하시자
8. 장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까지 오시게 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나으라는 말씀만 한마디 해주십시오.
9.저도 윗사람을 모시고 있고 제 아래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부하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제 하인에게 ‘이 일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예수님은 이 말에 놀라시며 따라 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스라엘 온 땅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하였다.
11. 또 너희에게 말한다. 동서 사방에서 ‘많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12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통곡하며 이를 갈것이다.”
13. 그러고서 예수님은 장교에게 “가거라.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바로 그 시각에 그의 하인이 나았다.

이 치유는 치유자와 병자와의 관계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만난 백부장과의 관계를 통해 치유보다는 치유에 따르는 믿음의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믿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를 알려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의해 나타난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의해 생겨난다.
믿음의 성격중에 순종을 하는 것이 있다.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따라 순응하며 좇아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순종으로 향하여 나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고 신뢰할수 있는 것을 그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믿음은 또한 신뢰받을수 있는 분에 대한 존경이나 공경에서 나오는 자세가 있다.
높으신 하나님이 그것을 명령하는 것을 공경하는 태도로 받아들일 때에
그의 약속은 받아들이는 자에게 실현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역방문은 그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으로 다가온다.
가버나움은 제자들의 고향으로 그 지역에 주님은 여러 가지사역을 행하셨다.
그 지역에 가셨을때에 이방인이 한 로마군인을 만나게 된다.
그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으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통해
주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는 건전한 군인이었다.
그는 점령군의 군인이었으나 식민지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대문화나 생활습성에 적응하며 그들의 문화나 생활방식을 존중하였을 것이다.

그 군인에게는 자신을 돕는 하인이 있었다.
군인은 늘 그 하인의 병으로 인하여 마음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 하인의 병을 염려하던 그인지라
그는 자기의 일처럼 하인의 질병을 치료하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그는 주님의 지역방문의 뉴스를 접하고
주님을 만나러 나와 그에게 겸손히 간청하는 것이 었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요청을 들어주시려 하여, 자신이 가서 고쳐 주겠다라고 하셨다.
사람이 주님에게 나가 간구를 하며 요청을 할때에 그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 백부장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하인의 일로 인하여,
주님에게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간청을 하였다.
즉 그 백부장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마음에서 주님에게 매달렸더니
주님은 그 요청을 열납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분에게 간구를 하며,도움을 요청을 할때에,
자신의 기도의 동기가 중요하다. 이기적인 동기인가 아니면,
타인을 유익하게 하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자신의문제를 해결받기를 기대할때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의 요청하는 의도가 선명하며, 올바를 때에 그의 간구가 힘을 얻어,
강청하여도 그의 간구는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다.

그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시마 하던
예수님에게 주님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물론 이방인인 그가 유대인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이
문화적인 차이나 혹은 민족적인 감정의 차이가 있다고 느끼지만,
그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에게 대한 전적인 신뢰와 그의 직업에서 오는
상관의 명령에 대한 절대복종의 삶의 원칙들에 충실하였던
평소의 습성이 주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그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심의 자세는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진정하며 숭고한 경배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여기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며,
그분의 자신의 집에 오심을 막을 정도로 주예수님을 모시고
영접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주변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사람들의 하는 이야기를 통해 전해들었을 것이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천국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시며,
자신에게 나오는 수많은 병인들을 치료하며,
사람들을 일깨워주시는 그의 사역에 대한 뉴스는
그 백부장에게 주님에게 대한 깊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는 아름다운 소식이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의심하는 한 제자에게
그는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가진 이들을 주님은 칭찬하시며 축복하신다.
믿음이란 경험이나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이성적이고
감각적인 판단에 의해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하시는 일을 대하는
신앙인의 마음의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부여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은총과 그나라의 기이한 역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나아가 천국의 시민이 되게하는 그분의 선물로서
다가오는 믿음의 역사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서 나타나게 된다.

백부장이가 이해하는 하나님을 대하는 믿음의 세계는
절대복종이라는 평소의 군인정신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였던 같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살고 그 명령에 죽는 철저한 군인정신에 의해 훈련되었다.
그의 평소에 가졌던 그 정신은 주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상관의 명령의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있는 가를 체험하였기에
그는 주예수님을 대하는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은
그저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가 듣고 이해하였던 메시야로서
주님의 능력과 그분의 사역을 충분히 신뢰하고도 남는
좋은 믿음의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 진다는 믿음은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의 창조사역에 모든 만물이 생겨났으며,
그 말씀 한마디의 영향력은 하나님의 지대한 능력의 표현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백부장이 그런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
자신이 주 예수님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만 해주세요, 그러면 자신의 하인이 낫게 되리라는 것을 보이며
그는 말씀창조의 사역의 주님에 대한 절대 신뢰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백부장이 군인의 세계에서 있는 명령체계에서
그는 상관의 말한마디에 따라 그 밑에 있는부하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영향력을 주는 것임을 익히 알고 있는 그가
주 예수님에게 자신의 진정한 군인정신에서 우러 나오는 믿음의 깊은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주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의 태도에서 백부장이가 이해한 믿음은
절대 순종으로 대하는 믿음의 세계였다.
하나님의 세계와 연결해주는 신앙인의 믿음의 세계는
하나님과 그분의 하시는 일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절대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인격적인 관계는 서로 신뢰하는 상태에서 발전이 이루어 지며, 진정한 관계를 형성할수 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다.
그 백부장은 자신의 군인정신의 자세에서 나온 믿음의 태도에 의해
주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갖고 주님에게 나왔다.
그가 이해하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은
철저한 복종정신과 그리고 그에 따른 경외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때에 철저한 태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깊이 이해하고 경험할때에
그가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인간의 진정한 모습과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하나님앞에서 갖게 되는 본연의 모습이라고 할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해 인생들을 창조하셨으며,
인생들은 하나님의 세우신 테두리안에서 존재하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안에서 자신의 영광됨을 찾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세계안에서 사는 것은 인간의 참가치를 발견하고 하나님안에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자신의 자리를 되찾게 되며,
그분안에서 있는 인간고귀함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갖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통해
하나님의 길을 찾으며, 그의 영광을 바라며 나가는 것이 믿음의 발걸음이다.

하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믿음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선택하여 사람들을 구원할 자리를 마련하셨다.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구원을 통해 천국의 백성이 될 것이다.
세상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은 단지 구원을 얻을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천국에 장차 구원얻을 수억만만의 만민들이 모여들 것이며,
그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왔지만 그 유대인의 혈통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한 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는 제외되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안에 있는 인간구원과
그에 따르는 영광을 얻을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사람앞에 놓여있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은 인간이 가서 영광을 얻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 아니면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심판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
결국 죽음의 세계안에 영원히 머물게 되는 고통의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현실앞에 하나님나라의 메시지를 들고 오셨다.
누구나 그분에게 오면 구원을 얻을 것이며, 자신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 백부장은 자신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하인의 질병을 들고 주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님의 치유를 하인에게 주었다

동시에 그 백부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얻을 백성으로 인정받았으며,
더나아가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가장 뛰어난 가치의 믿음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해 하인을 치료받게 하며, 자신을 구원하며,
하나님안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백부장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임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믿음은 그의 인생을 가장 가치있는 것들중의 하나로
하나님나라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천국에서는 믿음있는 자가 존귀함을 받으며,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치있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또한 그의 믿음의 삶은 이웃을 섬기는 것과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이웃을 이롭게 하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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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올바른 삶

학개 1: 3-7
3. 여호와께서 다시 예언자 학개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4.”내 성전은 황폐한 채로 있는 데 너희는 호화주택에 살고 있느냐?
5. 그러므로 전능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자기 소행을 잘 살펴보아라.
6. 너희가 많이 심었으나 적게 거두었으며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흡족하지 않으며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품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지갑에 넣는 격이  
 되었다.
7. “전능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자기 소행을 잘 살펴보아라.

 

성전중심의 삶은 성전중심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중심의 신앙을 전개하며,
말씀중심의 신앙을 정착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현현을 기대하게 하는 성전중심의 신앙은
언제나 성전을 통해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통치를 바라보며 나가는 신앙이다. 

주님은 주님의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다. 
성전에서 부르짖는 간구에 주님이 응답하시며,
그의 손길과 역사하심이 그의 임재를 통해 이루어진다.

 

당시 유다백성은 바벨론 유폐의 생활에서 고토에 돌아와
옛왕국이나 자신들의 살았던 삶의 터전을 세우는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살집이나, 혹은 사회기반건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유다백성의 삶의 근본은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망각하고,
그들은 성전재건의 사역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자기살 길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에 성전을 지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학개 예언자는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전달하실때에 그의 메신저를 들어서 전달하신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달할 책임이 주어진다. 

고로 예언자는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설교자나, 성경교사들은 말씀전달을 통해
주님의 뜻과 그의 음성을 전하는 것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유다백성들은 고토에 돌아와 자기 살길이 바빠, 하나님의 집의 재건을 소홀히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그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길로 가기가 쉽다. 

인간의 관심이 자기에게로만 집중이 되면,
객관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살펴보는 지혜가 없어진다. 

사람에게 영적인 관심이 없어지면,  육체적인 일에 집중하며,
도덕이나 윤리적인 원칙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행위를 살피지 않고, 가치없고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
집중력을 잃고, 자신을 흩어지게 하는 산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상태를 간파하시며,
인간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임을 알고 계신다. 
인생은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잘못되었나를 무시하고 살아가기 쉽다. 
인생이 기준없이 살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보면,
자신의 일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관찰하시며 판단하신다.

사람이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최선을 하기가 어렵다. 
이말은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고, 자기의 생각이 명료해지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영혼이 만족한 상태에 있을 때에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안에서 인간의상태가 영과 혼과 육의 체계를 질서있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게 된다.  

 

고로 먼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살펴서 자신을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질서를 따를때에
사람은그 안에서 가장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며, 인간의 자기능력이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자신의 인간성안에
인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영혼의 가치를 추구할 때에 가장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며,
그 상태에서 자신의 본연의 삶에 충실할수 있다. 
고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먹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그 일을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일이 잘되어야 자신의 능력을 잘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은 먼저 인간의 상태를 보시는데, 
그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근본적인 상실감속에 있거나, 진리를 떠난 미로의 길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여
자신의 영혼을 바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하는 일을 판단하며, 그들의행위를 살피며,
그들을 평가하며, 심판하신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상태를 반영하는 고로 자신안에
하나님의 선과의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들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기준을 통해
그들의 행위를 바르게 할수 있으며, 자신의 삶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수 있다.     

 

여기서 성전중심의 삶은 바로 하나님중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생활은 자신의 영혼의 근본적인 문제를 돌아보며,
자신의 상태를 올바르게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며,
자신의 하는 일을 통해 아름다운 결과를 이룰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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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좋은 인생

마태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사람은 겪어보아야 사람됨됨이를 알수 있다라고 하듯, 사람은 서로 알아가며, 사귀는 단계가 있어야 진정으로 그 사람을 알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는 처음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지내는 과정을 통해 친밀감이나, 혹은 우정을 나눌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에 품은 뜻이 어떠하며,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지는 것을 보며, 그 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되어, 그가 한 일을 보고난 후에 그 사람을 판단하며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생활이나 누구의 지도를 받는 선생을 두거나 지도자를 둘때에, 사람들은 선생이나 지도자의 영향을 받게 된다. 지도력은 그 지도의 영량으로 나타나지만, 그 영향을 받는 따르는 사람들은 지도자나 선생의 지시에 자신의 삶의 방향이나 결정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지도자도 그 지도력을 배우려는 좋은 제자나, 혹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자신의 원하는 일들을 추진 할 필요가 있듯이, 그 지도력을 따르려는 사람들도 좋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자신이 좋은 일을 할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나 지도자들의 자질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통해 자신들의 하는 일의 결과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지도자는 그들의 상태를 통해 지도의 영향력을 나타낸다. 그들의 상태를 분별하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그들의 진위를 알아내게 된다. 선생이나 혹은 조언자나 영향력있는 친우등 나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 잘 분별하여 선택해서 자신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인간 처세술의 지혜이다.

사람은 좋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며, 좋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어느 때에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으며, 혹은 평소에 자신과 소원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이외로 자신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에나 중요한 결정할때에 자신에게 중요한 역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지도자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특히 영적지도자는 사람들의 인생이나 영혼의 상태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까지 영향을 주기때문에 자신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자신의 주변에 있는 여러 영적지도자들에 대해 옳은 선택하며, 또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지도자를 분별하여 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게 되면 영적지도자의 권위에 의해 어뷰즈를 당하는 경우를 만나면 영혼을 망치며, 삶을 허비하며, 인생을 파탄으로 내몰리게 된다. 반면에 옳은 영적지도자를 만나면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옳은 영적인 생활과 바람직한 정서적이고 정신적인생활과 그리고 건강한 인격적인 관계안에서의 사회적인 모든 일)에 있어 한층 상승하는 단계를 지나게 된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 그 나무의 정체를 알아볼수 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맛보며 좋은 포도나무인지를 알며, 가시나무는 찌르는 가시가 있는 것을 통해 그 나무의 가치를 알아볼수 있다. 그렇듯이 사람도 그 사람의 하는 일이나 행동의 결과에 따라 사람의 진가와 가치를 알수 있다. 인생은 모든 일에 자신이 심은대로 거두는 원리가 있듯이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살펴볼수 있다. 나이가 40이 되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지난 세월들의 살아온 흔적을 찾아볼수 있으며, 또한 불혹(흔들림이나 동요등에서 자유로운 상태, 즉 자신의 살아온 경험이나 지식이나 이해를 따라 판단하여도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을 수 있는 자기처세의 단계)의 나이를 넘긴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주변인들의 됨됨이를 잘 평가할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사람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는다. 긴 세월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가 형성이 된다. 그리고 사람의 가치의 형성은 그의 평소의 생각을 통해 정해놓은 좋은 습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격의 갖춤과 평소에 갖고 있는 자신의 삶의 원칙에 의한 인생의 지속적인 전망을 통해 그 사람의 일의 결과나 행위의 생산을 통해 그사람의 인생의 열매를 맺게 된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고방식과 좋은 습관과 좋은 생활의 진행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할수 있다. 자신의 삶의 과정속에서 의인은 의의 열매를 맺으며, 악인은 악의 열매를 딴다.

한 번 그 길로 방향을 잡으면 돌이키는 데 많은 시간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길로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나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좋은 습관이나 좋은 사람의 모습은 기나긴 세월을 두고, 일정한 지식습득과 경험의 훈련의 기간을 통해 좋은 사람의 판단이나 행동을 유발한다.

나쁜 인격으로 형성된 사람은 좋은 행동을 할수 없으며, 나쁜 생각을 평소에 늘 품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에 영향을 줄수 없다. 평소에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에 힘쓰며,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에 따라 그가 자신의 행동의 결과나 일의 열매에 결과가 나타난다.

사람은 서로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생을 살아간다. 어느 사람이든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선생이 되기도하는 가 하면, 혹은 타인에게서 영향을 받는 학생이 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인생은 각종의 여러 인생들의 살아가는 경주장이며, 여러 사람들이 널려 있는 인간상품의 전시장이라 할수 있다. 사람은 크게 있어서 유익한 사람이 있으며,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으면 해로운 사람도 있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지도자나 혹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든지 사람들은 다음의 질문,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가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할 필요가 잇다. 먼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인생의 삶에 유익을 줄수 있는 사람은 부단한 자신의 발전에 노력하는 사람이며, 인생의 의미나 가치를 깊이 명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아름답고 사람답게사는 좋은 향기가 난다. 있으나 마나한 사람은 인생의 길이에서도 별 의미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지탱하는 삶으로 자신의 시간을 무익한 것으로 허비하는 경우일 것이다. 해로운 일을 꾸미는 사람은 쉬지않고 악을 도모하며,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 인생을 소비한다. 특히 그런 인생들은 하늘에서 볼때에 결국 도끼에 찍히는 나무처럼 찍혀서 내던져지는 심판의 형벌을 면할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람은 두가지 결산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삶의 길이를 보내고 있다. 하나는 누구나 자기 개인의 종말의 시간이 앞에 놓여 있어, 자기에게 주어진 정해진 시간이 다하면 그 살아온 시간속에서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 평가하며 판단을 받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자신의 삶의 결산을 갖게 된다. 또 하나는 역사의 종말이 있다. 모든 인생들은 그 역사의 종말을 향해 지금 향하여 나가고 있다. 역사의 종말의 때는 한정된 때이며, 제한된 시간이다. 고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항상 그리고 영원히 자신들에게 인생의 시간들이 주어진 것이 아니며, 그리고 이세상도 반드시 마지막이라는 기간적인 구분이라는 것이 있다. 그후에 전혀 지금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고로 지금 자신의 시간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며, 자신의 삶도 자신에게 귀한 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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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방어 시스템의 예들

10/27/06 (금)
사람이 주님앞에서 자신이 바꾸어져 치유받는 일보다는 회개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이야기하는 크랩의 주장에 공감한다. 얼마나 인간자신이 하나님앞에서 회개하고 살아야 하는 지를 일깨워주는 것인데, 나는 평소에 죄의식을 별로 많이 느끼지도 않았고, 그 죄를 처리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영혼이 죄의 오염이 되어, 나의 영적의식이 죄를 감지하지 못하고, 죄를 청소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죄의식은 영적인 자아의식을 강하게 주님앞에서 세우게 한다. 민감한 영성을 형성하게 하여,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에 쉽게 반응할수 있다.

그런데, 죄의식이 무디어지면, 영적인 감각의식도 희미해져,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상태를 간파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나, 영적인 소리에 민감하게 받응하지 못한다. 그러면 상담자로서 피상담자를 도울수 가 없게 되는 것이다.


10/25/06 (수)
해가이를 생각해보니, 그가 문화가 다르다보니, 그가 가지고 있는 사고시스템이나, 감정적인 체계나, 관계적인 인간관계에 있어, 서구의 스타일과도 다르고, 한국적인 스타일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왜 그는 자신을 보여주기를 극도로 싫어하며,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나는 그가 어릴때에, 상당한 충격적인 일들을 많이 겪지 않았나 상상해본다. 아프리카에서 흔히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하여, 자신을가누기 힘든일을 당할수 도 있다. 어느종족은 서로 싸우며, 살인하는 것을 밥먹듯하며, 자신들의 부족의 영의 영향아래에서, 자신이 머물러 있는 것을 경험한다.

그가 느끼는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는 그룹멤버들에게 의외로 들려지고, 나자신에게도 받아들일수 없는 견해라고 생각되어진다. 왜 그는 자신이 상담케이스를 발표하고, 자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추궁하는 질문에 대해, 인종차별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일까?

나도 과거에 백인들에게 인종차별이라는 느낌을경험한 적이 있다. 그들은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 상대적으로 자신을 약자로 보게 되고, 피해자로 생각하는 것인 것이다. 그래서 쉽게 인종차별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측면에서. 한편으로는 해가이가 이해가 된다. 그는 자신의 두꺼운 껍질속에 갇혀서, 나오지를 못하며, 두터운 자기방어의 벽에 자신을 감추고 있다.

10/23/06 (월)
해가이의 그룹발표를 보면서 느낀 것은 그가 자신안에 갇혀있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노출하기를 두려워 한다. 자신이 어느부분에서 스탁이되어, 자신을 볼수없으며, 자신을 노출하여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바로 직시하기를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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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도전적인 믿음

마가 복음7:24-30
24.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계시려 하셨으나 곧 알려지고 말았다.
25.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가진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즉시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녀는 수로베니게 태생의 그리스 사람인데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27.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 개에게 던지는 것을 옳지 않다.”
28.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있는 개도 아이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29. “네 말이 옳다. 이제 너는 돌아가거라. 이미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래서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귀신은 이미 나가고 어린 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발전은 저 미지의 세계 넘어있는 그들의 꿈과 비전의 이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도전정신과 실험시도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그들에게는 위기나 혹은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기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실험정신, 즉 개척자적인 정신이 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기회를 쟁취하는 불굴의 용기의 정신이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시돈지방으로 가셨다. 그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잃어버린 선민들을 위해 이땅에 오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셨다. 본문에서는 그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시게 되었다.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가셔서 접촉하신 일은 드물게 그의 사역에 나타난다. 사마리아 지역에 가셔셔 전도하신 일이나, 혹은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에 이방인들을 만나신 일도 있지만, 이렇게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시게 되었다.

그 지역에 이방인인 한 여인이 자기 딸로 인하여 늘 염려와 사랑으로 돌보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에게 딸은 소중한 자녀로 그녀에게 삶의 희망이었으나, 그녀의 딸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귀신이 들려버렸다. 이방인 지역은 우상을 섬기고, 악령이 횡행하다보니 그녀의 딸이 사춘기의 급격한 변화로 혹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나 혹은 나쁜 어른들로부터 상처를 입은 상태로 지내다. 그 상처로 인하여,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딸이 실성하여 귀신이 들렸다. 패인이 되어버린 그녀의 딸은 어미에게는 크나큰 인생의 짐이며,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앞으로 나아오게 하였다. 인생의 문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앞에 나오게 한다.

그녀는 그리스의 사람이 었다. 수로보니게의 지역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리스사람은 당시 전세계에 헬라(그리이스)문명이 영향을 주고 있는 시대여서 그리이스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 살았던 것 같다. 이방인들은 보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문화이기에, 사람들 가운데에 악령들이 쉽게 영향을 주며, 사람들은 귀신들의 지배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무리 문화나 문명이 발달하여도 하나님을 모르는 문화나 문명은 영적인 존재들에 영향을 받는데, 특히 악한 영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인간의 죄나 그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악령들은 인간에게 영향을 주며, 지배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 땅에도 악령들의 지배가 있었으며, 마음에 상처를 받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때에 악한 영들은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영향을 주며, 나중에는 상주하여 지배를 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중에 하나가 인간세계에 있는 사단이나 그의 하수인들인 악령들의 영향이나 지배를 없애려고 오셨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녀의 청원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기존관념을 내세우며, 기존의 유대인우선, 선민사상으로 나가셨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에게 유대인우선순위를 내세워,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하리라. 이방인들이 들으면 화가 날 개념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기존 관념의 한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관념이나 편견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충실하였으며, 자신의 간절함을 따라 행동하였다.

이방인들에 대한 처우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편견이나 제한을 생각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민 그의 자녀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씀하셨다. 기존 관념에 대한 생각들에 대해 여인은 자신의 주장으로 맞섰다. 믿음은 주님의 의견이나 생각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으로 그 여인은 믿음의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믿음은 자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믿음이 었다. 그녀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상관이 없다. 그녀에게는 다만 자신의 딸을 치유하는 의사이신 주 예수님이 계시고, 그녀에게는 오직 그 딸을 치유하려고 하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절박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강인한 갈망의 에너지가 넘치는 믿음이 었다. 자신이 소유한 믿음에 갈망의 에너지가 넘쳐나 그 에너지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해결의 접근하게 하였으며, 여러가지 장애요인들을 극복하는 시너지 효과로 종합적이고 집중적인 믿음의 활력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분출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기회를 잡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앞에 메시야 구세주 예수께서 다가오실때에, 그녀는 담대히 유대인앞에 나가서 자신의 요구를 간청하였다.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상종하는 것은 금기로 여기는 것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서로 접근이나 대화의 장벽이 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장벽을 넘어가는 믿음이 었다. 그녀의 시도는 실험정신이며, 도전정신이다. 이것이 세상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다. 발명이나 발견의 시도는 모험이나 시련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새로운 시대나 흐름에 대한 개척정신이다.

그녀의 믿음은 하늘 나라의 좋은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믿음이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천국은 사모하고 갈망하고 얻고자 하는 강인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언제난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은 천국을 두드리고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열려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천국은 가고자 갈망하는 자들에게 열린 문으로 다가온다. 구하는 자에게 얻어지는 곳이며, 찾는 자에게 찾아지는 곳이다. 그리고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녀의 믿음은 도전하는 믿음이며, 실험정신의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자녀의 떡에 제한 하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그 자녀의 떡을 취하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녀들의 빵을 취하고저 하는 도전정신이 있었다. 이 믿음은 바로 그 옛날 구약의 조상중에 가장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한 야곱의 믿음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다. 야곱은 자신이 형인 에서에게 장자대신에 차자로 태어나서 그 장자에 대한 축복을 취하고저하는 열정과 그 그 장자권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통한 일관된 추구는 급기야는 그가 어느 발 밤에 얍복강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면서 축복의 하나님에게 축복을 쟁취하고야 만 도전적인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칭호를 갖게 되었다. 너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속에 하나님과 겨루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축복을 얻어내는 인간의 믿음의 도전적인 시도들을 격려하며 축복하셨다.

그녀에게는 기회를 쟁취하고저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절박함을 주님에게 대한 한계나 제한을 넘어가는 믿음으로 표현하였다. 만일, 인생에 절박함이 있고,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에게 구하지 않으면 그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고질적인 딸의 문제를 들고 주님에게 나온 것이다. 그 문제로 인하여 그녀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에게로 나와 그의 은혜의 치유로부터 딸의 치유와 구원을 받는다. 자신의 딸의 문제로 구세주를 만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그 딸을 악령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딸의 구원과 치유를 받는다. 더구나 그녀의 불굴의 용기와 같은 믿음의 표현으로 인하여 주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녀의 불굴의 용기와 끈질김은 그녀의 간청으로 포기하지 않고 주님에게로 매어 달리는 믿음으로 나타난다. 매몰차게 제한과 한계를 설정하신 주 예수님의 거절의 답변을 듣고도 그녀는 주님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한다. 일의 성공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나타난다. 일의 성취도 중간에 있는 반대작용이나 한계를 넘어가면서 이루어 진다.

그녀의 주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고백은 이렇다. 상아래있는 개도 아이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필요를 관철하고저 하는 끈질긴 간구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 믿음의 능력이나 효과는 믿음의 기대만큼에 정비례한다. 끈질긴 믿음은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한다.

예수님은 그녀의 주장에 대해 옳다고 인정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인정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셨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이 하나님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의 정신은 절박함이나 간절함에서 나오지 않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인간의 생각이나 태도나 정신은 그 간절함이나 절박함에서 나오는 기대감이다. 그의 이론이나 생각이나 인간의 편견을 넘어가는 도전적인 것이 있다. 사람은 대개 기존개념에 머물게 된다. 비상한 사람들은 그 상식적인 생각을 넘어가며, 그 너머에 있는 가능성의 열매를 따먹는다.

다윗시대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틴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도전을 받았다. 당시의 군인들은 누구나 저 거인을 아무도 이길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거인에 도전할 만한 용기가 나서질을 않았다. 모든 군인들의 생각에 거인을 이길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잡혀 있었다. 그런데 다윗만은 달랐다. 골리앗이 거인이라도, 전사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용기가 있었다. 용기가 있는 믿음이 큰 상급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 여인에게서 배울 것은 그녀에게는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갖고서 주님의 은총을 입고 그녀의 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녀에게는 먼저, 실험정신의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의 이방인에 대한 새로운 사역을 가능하시도록 유도하였다.

그녀의 믿음는 편견을 넘어가는 믿음이 었다. 유대인은 되고, 이방인은 안되는 편견을 넘어가는 것이었으며, 자신에게 오는 불편 부당한 대우나 편견된 상황을 뛰어넘는 자기 재치나 지혜나 지략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녀의 표현된 믿음안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입견이나 상식을 넘어가는 창조적인 정신이 있어, 그 정신에 의해 축복의 기회를 잡았다.

그녀의 믿음은 도전하는 믿음으로 유대인이신 주님의 매몰찬 거절과 냉혹한 한계의 현실을 극복하여, 여러가지 장애를 넘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었다. 세상은 여러 많은 도전이나 시련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원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은 자신의 성취의 동기의 주요한 밑거름이나 자신을 단련하는 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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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세대들의 정체감과 사고방식

미국에있는 한인사회에서 한인 1세대는 한국어를 쓰고
한국식 사고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기성세대이다.
그들은 미국에서 오래살았어도 여전히 그들의 의식속에는
한국적 문화와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
미국의 다문화권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중시하며 살고 있다.
그들의 의식속에는 늘 고국에 대한 뉴스와 정보에 눈과 귀가 열려 있으며,
고국의 향수에 늘 젖어 있다.
미국안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은 늘 고국에 대한 것들이다.
뉴스나 정보에 대한 습득은 주로 한글로 기록된 인터넷, 신문, 그리고 잡지에 의존한다.

이 세대는 한인가정의 주도세력으로 현재의 생활에 금전적으로나 역활적으로도
한인문화권안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나, 한인 문화권을 넘어,
미국주류문화나 타 이민문화권에 깊이 연류되지 못하고 다만 피상적인 접촉을 할 뿐이다.
언어적인 한계로 인하여 미국민들과의 소통에도 한계가 있으며,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2세와의 소통이나
문화적인 사고방식의 차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들의 자녀들과의 교제나 의사소통에 일정한 벽을 느끼며
미국의 타문화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한민족 끼리의 한인문화권의 자리매김에 중요한 역활을 하며 영향을 주도 하고 있다

청소년시기중에 미국에 건너온 이 세대는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문화의 기존양식에 이미 젖어있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단지 겉모양만이 그들의 문화에 접할 뿐이다.
그들의 속은 여전히 한국적인 사고태도와 기존전통적인 습성에 젖어지낸다.
이런 한인1.5세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를 함께 겪으며,
자신들의 정체감을 새롭게 하는 세대이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쓰는 세대로,
그들의 배움에서 영어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면서도,
한국에서 습득한 문화나 사고시스템에 여전히 영향을 받는 세대이다.
이 세대가 2세와 1세를 연결해주는 연결고리로서의 한인문화에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
한인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자신들의 정체감을 세우고 적응할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은 양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기세대로서의 갈등을 겪고 있다.
오히려 때로는 이들의 정체감이 가장 미흡하고 불안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한인2세들은 미국식문화에 익숙하며, 미국문화와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사고방식까지 미국화가 되어 있다.
이들은 미국 땅에서 태어나 그들의 성장이나 배움의 환경은
오로지 미국적인 것만이 있는 세대이다.
이들속에는 체계적이고 깊은 한국적인 사고방식은 없고,
다만 가정안에서 다른 세대의 가족들로부터 피상적으로 경험하는
복합된 한국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한국적인 사고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이질감을 갖게 한다.
부모세대에서 배운 한국적인 지식은 제한되고
변질된 문화적인 인식으로 그들에게 한국문화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의 정체감은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은 미국적 문화체계로 세워져 있다.
이들의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미국적인 것이 자연스러우며,
한국적인 것이 이질적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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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마태복음 22:35-40

35. 그들중에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36. “선생님, 모세의 법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다.
39.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교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살아가는 중심계명이다. 이 계명은 성경의 전체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의 삶의 계율이다.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가교의 계명이며,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신의 의지의 반영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안에서 새롭게 그들의 잃어버린 지위와 권세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의 계명은 그의 삶의 정신에서 나오는 교훈이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사랑의 정신으로 그가 수행하신 사명을 감당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가를 보면 알수 있다. 교회공동체나 신앙적인 모임안에 이 사랑이 존재하고 있을 때에 그곳은 그의 나라의 실현을 이루어 가는 것이며, 인간관계의 이상적인 분위기를 세울수 있을 것이다.

율법학자는 율법을 정통하였던 사람들로 그들은 항상 율법을 생각하며, 연구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율법의 핵심의 의미를 소홀히 하여, 그법에 매여 법으로 이웃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는 역활을 하였다. 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 학자들이 율법의 눈으로 인류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시험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라고 할수 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그들의 모든 생활이 근간이 되는 율법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종교와 윤리의 기준을 세운다고 생각한다. 고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은 자신들의 삶의 기준을 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율법의 본질적인 진위를 모르고 피상적인 이해와 형식적인 법적용에 머물러 있다. 고로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의 성품과 속성의 근저는 그 사랑하심에 있다. 그는 사람을 향해 그 사랑의 화신으로서 사람에게 다가 오신다.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구원의 근간을 이루며, 하나님의 자기의지의 표상으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갈수 있는 그의 성품이며, 그의 속성의 본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의 생애 그 자체는 하나님 사랑의 화신으로서 사셨으며, 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향한 지극한 삶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그 길을 보여주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이나 삶의 표현방식은 하나님 사랑에 도달하면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며, 가장 고상한 사람의 성품에 도달한다. 사람이 갖고 있는 영이나 혼이나, 마음이나 정신이나 생각에 있어, 하나님사랑하는 표현이 나타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과 그의 선하신 뜻이 실현되는 것이다.

인생이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알고, 터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인간구원이나 승리의 보장을 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나 생활이나, 삶의 흔적들이 오직 그 계명 즉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의지와 정신의 실현에 있으셨다.

주님은 강조하신다. 하나님 사랑하는 계명이 제일 근본이 되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가장 고귀한 존재로서의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그의 성품을 부여받은 존재로 이세상에 태어났으며,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속에는 자신 스스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나 표본을 따르지 않고 자기 중심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시도에 의해 그 하나님의 수준을 벗어나, 어리석은 사람의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며, 자기혼란안에 빠져 버렸다.

사람이 원래 하나님이 만드시고 원하시는 위치로 돌아가는 길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의지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생활이나 삶의 평생의 과정이나 흔적들은 그 계명의 실천과 그 실천안에 있는 인간의 자기사명과 자기 수행을 진행할 때에 사람은 자기가 가야 할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웃도 그의 모습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그의 돌보심과 주관하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웃의 모습안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이메지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웃을 바라보는 눈이 사랑의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 바라볼때에 그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의 하나님의 대상이 되며, 이웃도 바로 그의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이웃의 모습안에서 자신과 비슷하며 자신을 반영하는 속성이나 자신과 똑같은 인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형상을 본다. 고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태도의 연장으로 바라보게 되며, 자신을 사랑하고 애착하듯, 이웃을 향한 자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웃은 바로 나 자신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세계안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안에서 이웃은 나 자신과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공동운명체의 부분이며, 함께 그의 형상을 받고 나눈 혈연이며, 글로발 가족의 한 일원 인 것이다. 고로 이웃사랑의 범위나 실천적인 영향력의 대상은 민족이나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확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사회를 향한 뜻과 의지의 실현이 율법을 통해 계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은 인간의 삶을 보호하며, 인간사회안의 사람들사이의 상호 합리적인 관계와 질서있는 생활의 기준의 법으로 제시되며, 그 율법의 중심에는 십계명이 있다. 그 십계명의 정신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율법을 받은 인간사회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사회를 향하여 계속하여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우신 법을 지키도록 하셨다.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사회에 알리시며,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인도를 받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들을 돌보며 인도하시는 큰 테두리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각자 개인의 삶을 통해서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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