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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구원사이에서

예레미야 4:1-4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나에게 돌아오너라.
네가 만일 내가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우상을 내 앞에서 제거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2. 살아있는 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또 네가 진실하며 정직하고 의로운 가운데에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속는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4. 유다와 예루살렘사람들아, 너희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너희 자신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행한 악한 일에 대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너희를 태울것이니 그 불을 끌자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방황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백척간두의 나라의존폐의 위기에서 나라살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의나라는 계속해서 외침으로 인하여 약화되어 가고 있다.
내우외환으로 인하여 나라는 피폐하여져서 멸망하기 일보직전의 상태이다.
그들의 정치지도자들은 나라를 살릴려고 주변국의 도움을 구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를 힘쓰고 있지만,
나라 온전체가 지도자나 백성이나 할 것없이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우상숭배의 죄와 모든 도덕적인 죄까지 범하고 있었다.

여기서 돌아가야 할 곳은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가는 것이며,
나라도 민족도 그 처해있는 상황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라가 힘들고 민족이 갈길을 못찾아 헤매이고 있을때에,
지도자의 역활은 중요하다 하겠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하에서,
지도자의 잘못된 인도와 정치철학으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을 세우고 번영케 하신 하나님에게
이제는 그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버림받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을때에,
그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얻을 길을 찾아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때에, 그것을 해결할 길을 모색하여,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사람이 타향에서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자기가 자라나고 자신의 근거지가 되었던 고향을 그리워 하며
원래 가졌던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갈때에 자신에게 뚜렷한 명분을 찾아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아무런 가치기준이나 삶의원칙없이 살아가는 것이란 하루아침에
마음이 바뀌어지고,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줄만한 철학이 없는 상태에서는 방황하지 않을수 없다.
우상은 신이 아닌 것을 신을 섬겨야 할 자리에
그것을 대신놓고 신처럼 섬기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영의 걸림돌이 되었으며,
국민 전체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민족의 미래가 참담해져가는 상황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자신들의 생활과 문화의 근거로 삼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대한 마음이 변질하여,
종종 주변국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우상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음과 죄를 범하였다.
지금은 우상숭배의 죄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하던 그 백성을 해방시켜 나라를 세우게 인도하였다.

인생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전능하심과 역사하심을 알아야 하며,
그의 이름으로 일컬어 지는 모든 그의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인생이 세상을 있게한 신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자신의 모든 삶이 제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서게 된다.
인생은 하나님앞에 있을때에, 자신에 대해 진실하며, 정직하며, 의로운 생을 살아간다.

진실, 진리, 참등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진리는 영구불변하며,
인생들이 기댈만한 가치와 원리를 가지고 있다.
진리안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있으며, 인생이 따라야 할 가르침이 있다.
그 진리는 사람들의 삶을 비쳐주는 빛이다.
빛이 비쳐주어질때에, 옳고 바른 것을 알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봄에 씨를 뿌리기 전에 그들은 땅을 고르고,
씨를 받아, 생명이 움터, 자랄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계절에는 만물이 자신의 옷들을 새로 갈아입듯, 봄갈이을 한다.
인생의 마음이나, 삶의 환경도 자신안에 생명의 숨결이 쉬어지고,
생명의 태동을 기대하려면, 자신안에 새로 정지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새로와 지기를 기대하신다.
인생의 마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부패하여,
바람직스럽지 못한 사람들의 내면이 드러난다.
마음의 부패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며,
자신안에 있는 어둠과 그로 인한 모든 악한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주어,
자신속에 선을 찾아 보기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선한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일도,
결국 자기중심의 자화자찬의 선행에 불과하며,
그런 행위는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의 눈에 오히여 오만한 위선으로 보일 뿐이다.
인간의 상대적인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의 선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고로, 자신의 밖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르게 진단하고,
부패안에 있는 자신의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고,
그릇된 길에서 자신을 옳은 길로 인도하여줄 진리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전혀 다른 차원의 새마음을 받아야 자신을 새롭게 할수 있다.
사람들에게 새롭게 되기를 기대하는 하나님은 그의 영을 사람들에게 보내어,
부패한 마음을 깨닫고 그 잘못을 고치고 회개하는 심령에
새로운 마음을 가질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갱신하기를 기대하며,
그들의 생각이나 성향이 정결한 모습의 인물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상에게 빼앗긴 사람들의 마음의 관심과 방향을 돌이켜
자신들을 살리는 길로 나아오도록 권면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자신이 관심하는 것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마음에 무엇으로 채워있느냐는 것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음을 드리는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에게로 향할수 있다.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선한 존재가 되기를 기대한다면,
악을 멀리하는 일과 악을 짓는 행위로부터 자신을 고치고 새롭게 하기 위해,
선을 좇아가려는 마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소시적부터 인생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류의 원조들의 원죄와 조상들의 죄의 흔적으로 인하여,
자신의 내면에 어둠과 악에 노출되어 있다.
순전하게 태어난 사람이 세상의 편만하게 있는 악에 물들고,
자신의 주변에서 겪는 일들로 인하여,
자신이 어릴때부터 받은 상처들로 인하여 악을 행하는 자의 피해자임 동시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당한 것을
자신도 같은 상처들을 타인에게 범하며,
선한 자신의 동기가 점점 어둠에 물들어 가서,
악을 행하는 어둠의 세력의 동조자로 서있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향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몹시 안타까워 하신다.
그 원래의 모습이란 사람이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소생으로 마땅히 하나님과의 교류안에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렇지를 못한 것이, 원래의 상태를 잃어버린 채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것이 자신안에 있는
좌절이나, 불행이나, 절망이며, 결국 죽음(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탄식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상태로 머물러 계속하여
악의 영향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그 죄있는 상태를,
악한 영향(어둠의 세력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을 받은 모습을 분노하신다.

하나님의 분노아래에 있는 인생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욕망이
그들을 그의 심판의 불길에 휩싸이게 하며, 그의 심판을 면할수 없게 한다.
불을 품는 자가 자신을 태우기 마련인 것처럼,
죄와 악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사람들에게 향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그의 자비와 함께 하는 구원의 역사와 동시적으로 임한다.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생들 자신의 선택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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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잔치에서 일어난 일

요한복음 2:1-12
1. 이틀후에 갈릴리 가나에 결혼식이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님이 거기 계시고
2.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아 갔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하자
5.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러 주었다.
6. 거기에는 유대인의 정결 의식에 사용되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각각 물 두세통 드는 크기였다
7.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워라” 하시자 그들은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웠다.
8. 그리고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이제 떠다가 잔치 책임자에게 갖다 주어라” 하시자
하인들은 그대로 하였다.
9. 잔치 책임자는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몰랐으나
그것을 떠 온 하인들은 알고 있었다. 잔치 책임자는 신랑을 불러
10. “흔히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군요” 하였다.
11. 예수님이 갈길리 가나에서 처음으로 이런 기적을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12. 그 후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서 며칠 동안 머무셨다.

예수님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거기에서 기적을 베풀어
자신의 가까운 제자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메시야이며,
자신이 인간들을 고치는 분으로 오신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신랑신부이야기는 주님과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같다.
성경에는 종종, 하늘나라의 진리를 결혼이야기로 여러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구주 예수님과 그 구세주를 믿는 이들이 신랑과 신부로 함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즉 장차 천국에서 일어날 일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참석하셨다.
마리아도 하객으로 참석하고, 몇 제자들도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가나는 갈릴리지역에 있는 곳으로 예수님의 전도활동에 주무대가 되는 곳의 한 마을이다.
가정을 떠나 공생애를 사는 예수님이,
그의 모친과 함께 결혼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결혼식이나 특별한 예식에 초청받는 일은 정중하게 진행된다.
불청객이라는 말이 있는데, 초청받지 않는 손님이다.
잔치에 가서 별로 흥미가 없고 자신이 없어도 될 자리이면,
구지 그 곳에 있는 곳이 불안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 자신을 불청객으로 여기는 것이다.
(혹여, 교회나 성당에 갔을때에, 이런 느낌을 받는 경험이 있는 지,
그런 경험이 지속되는 것은 자신을 신앙의 무관심에 방치하는 것이다.)

주님은 정중히 인생의 삶의 자리에 노크를 하시는 분이다.
주님은 이세상에 원리를 세우고 그 원리를 따라
세상을 창조하며 다스리며,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인생의 불청객이며, 불법을 행하는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귀신으로 인하여
인생이 힘들고 고달파진다.
그리고 인생들이 범죄하여, 자신들의 삶의 환경이 어두워 지니,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 그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영향하에 살게 된 것이다.

결혼식에 포도주가 하객들에게 흥을 돋우는 것은
중동지역에, 음료수처럼 이용하는 것으로 잔치에 포도주를 내어놓고,
포도주로써 잔치의 규모와 질을 평가할 정도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포도주는 물을 구하기 싶지않는 사막지역에 살고 있는
중동사람들의 일상의 필수품이며, 음식문화이다.

이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그 잔치집에 실물경제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인생의 삶의 많은 문제는 이렇듯 경제문제에서 오는 것이 많다.

경제의 문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생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판단하시고 관여하시고. 그리고 해결하신다.

때로는 어느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일방적인 메시지로 거부감을 일으킬수 있다.
자신과 무슨상관이 있나?
그 인생자신이 주님에 대해 이질감이나 생소함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해소하는 길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럴 경우, 인간의 근본문제(죄와 죽음의 문제)에 접근하여, 생각하며,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주님이 어느 인생의 삶의 현장에
손님으로 와 있는 주님자신이 그 잔치에 관여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때에,
비로소 주예수님은 그 인생들의 주인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의 인생안에 손님으로 예수이 주님으로 바꾸어지는 날,
자신은 메시야를 통해 구원받는 날이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인생의 난제들이나
문제들에 휩싸인 삶의 문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잔치의 흥이 깨어질 낭패스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잔치의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모자란 것이다.
인생은 공급과 수요의 온전한 가운데에서 넉넉하게 주어진 만물이지만,
인간의 허물은 만물이나 자신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신앙은 무조건적인 순응이나 의존이 필요하다.
이해하고 믿으려는 이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하려는 것과 같은이치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기에는 인간의 두뇌의 인식의 그릇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
하나님에게 인간들이 할수 있는 일은 그분을 시인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되려다가, 결국 인생들은 모두가 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신뢰의 관계가 깨어졌다.

그러므로 진리를 구하고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받아들일때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인간자신을 위한 인간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더 강한 영향이나 짙은 돌봄을 받는다.
그 말은 친밀함은 신뢰에서 비롯되며,
친밀함은 서로 가까운 의존적인 관계와 교제가 이루어 진다.

신앙은 이해하지 못하나, 친밀하게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른이 이성을 사용하나, 그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다 알수 없는고로,
차라리 어린아이로 돌아가, 순수하게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이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올수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이
어린아이의 부모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그 수용성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나님을 수용하고, 순종하고, 신앙하는 것으로 바꾸어져야
제대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그분에게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려고 할때에 그분을 알게 된다.

물을 통해 자신을 씻는 예식,
물을 통해 손발을 씻게하는 것은
중동지역에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대하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손님접대이다.
그리고 당시에 그들의 종교적인 생활에서,
중요한 결례의식에 필요한 물이다.
(이런 의식은 구주 예수님의 사역이 있기전에는 필요했지만
그분이 인간구원을 위해 이루신 십자가사역은
모든 인간적인 종교적인 전통이나 가르침을 넘어가
구원에 이르는 계기를 만들어 내셨다)

종교생활에 늘 자신의 손이나 씻으며,
종교의 의식이나,겉핣기에 머물러 있는 수준에 있다면
그 단계에서 종교가 가져다 주는 유익을 친히 맛보는 수준으로 옮아가야 한다.

이 씻는 물이 맛보고 마실수 있는 포도주로 바꾸어진 것처럼,
종교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겉치레로 종교적인 행위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히 그분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분을 알아가며,
교제하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경험하는 것은, 신앙을 경험하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종교행사에서 서로 인사나 하고, 자신의 손발이나 씻는 겉치레에서
속으로 경험하는 친히 맛보는 단계까지 가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인생들에게 주어진 영생은 경험하여 아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순종으로 표현되어진다.
주님이 명하시니 하인들이 따라 순종하여,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웠다.
물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기본도리는 다 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인간구원을 위해 베푸신 구원의 은총과 축복은
인간의 응답과 반응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거이다.
물을 아구까지 채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앙생활도 신앙심이 있고, 다른 종교에서 종교생활하던 사람들이 잘한다.
종교에의 귀이하여, 사람의 도리와 인생의 이치에 대해
가르쳐주는 종교적인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종교의 약점이다.
그렇지만 그 종교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을 전해주고 있다.

손을 씻는 물이 사람들의 목을 채우는 음식용으로 용도변경이 이루어졌다.
물을 항아리 아구까지 사람들이 채울수 있으나, 그물을 포도주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창조하신 이인 창조주만이 사람들 고칠수 있으며,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만들어 쓸모있는 인생, 구원받은 사람들로 만들어 내신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삶을 떠다가
우리네 인생들을 별난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주소로 재파송하신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물을 떠다 잔치책임자에게 갖다주는 일을 통해,
주님안에서 변화받은 사람들은 세상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안에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구주를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일은
인생의 숭고한 일중에 하나이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통해, 자신에 대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다지는 것이다.

사람은 필요하여 이세상에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모든 인생은 우연히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그것은 신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인간의 영광과 축복을 받는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의 요구)
의해 생겼으며,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결례에 쓰는 물이 포도주로 바꾸어지는 것은
인생들이 도전받아야 할 메시지로, 인생들은 자신들이 변화받는 것을
주저해서도 안되며, 망설여서도 안된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수 없다.
그것은 우리 몸의 세포도 일주일마다,
그리고 7 년주기로 탈바꿈을 하여 우리의 몸이 지탱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경향은 먼저 좋은 것을 취하려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인간들은 세상에서 소비하는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소비하고, 하나님은 생산하시는 분이다.

만물을 인간들을 위해 조성하셨다.
만물들을 통해 인간들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래, 인간들을 좋은 인생들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인간의 오만과 허물로 자신의 좋은 것들을 상실하고, 좋은 면들이 변질되어 버렸다.
다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이 바꾸어지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도 만나고 사귀어 갈수록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오래된 친구가 좋은 친구이며, 산전수전다 겪어
그의 여러가지면을 알고 있으니, 이제야 서로 통하는 사이가 아닌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도 그렇다.
평생동안을 섬기고 살아왔던
기독교 교회의 초기역사에 살았던 폴리갑은
자신의 말년에 한번도 자신에 대해
섭섭하게 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구주에 대한 신앙을 위해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하나님의 경향은 먼저보다낫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으시다.
훈련을 시키고 사람을 만들어 그 사람에 맞는 직책과 사명을 주신다.
사람을 점점 좋게 만들어 가신다.

이기적이야기는 제자들에게 인상적이었으며,
자신들의 스승이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결혼잔치에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의 구세주역활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맛없는 인생들을 맛나는 인생으로 바꿀어 줄 메시야이다.
살맛이 없고, 맛이 없는 인생살이를
맛있는 인생의 삶으로 바꾸어주는 구주의 사역을 보여준다.

앞으로 전개되어지는 주 예수님과의 공적인 사역에 제자들은
메시야이신 구주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하실 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함께 사역을 이루어 갔다.

이 기적이야기는 하나님에게 찾아오는 인생들에 대해
감격적인 변화와 자기갱신과
인생변화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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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2)

비공식적인 허위논증들(fallacies )
허위(fallacy)를 나타내는 진술들은
단순히 거짓전제들 (premises)을 의미하는 것보다 더 어떤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허위는 추리하는 과정에서의 오류(mistake)를 포함하며,
그 허위는 “그것에 따르지 않는다”
즉 전제에 의해 제기된 문제가 결론에 가서,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연역적인 것과 귀납적인 논증들은 허위들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진술들이 거짓되거나 일관성이 없는 논증들에 위존하면 오류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허위에는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그룹들이 있다.
공식적인 허위는 단순히 논증의 형태나 구조를 조사하여 확인할수 있는 것이다.
그런 허위들중에 연역적인 논증들중에 카테고리적인 삼단논법(syllogism), 선언명제적인(disjunctive) 삼단논법, 그리고 가설적인 삼단논법이 있다.

비공식적인 허위들은 논증의 내용을 조사하여 확인할수 있는 허위이다.
비공식적인 허위에는 22가지의 비공식적인 허위들이 다섯종류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관련적(relevance)인 허위들, 약한 귀납적인 허위들,모호성(ambiguity)의 허위들, 문법적인 유추(analogy)의 허위들이 있다.

관련성의 허위들(fallacies of relevance)
관련성의 허위들은 공통적으로 심리적으로는 맞는 전제에 맞는 결론을 펴고 있어도,
논리적으로는 전제와 결론을 서로 맞지 않는 비적절한 표현들이 나타난다.
이런 종류의 논증들은 논리적으로 맞지않으나, 감정적인 표현에 있어,
전제와 결론이 서로 연결되어있다.
고로, 이 허위들을 판단하고 분석(identify)하기위해,
여러종류의 감정적인 제안(appeal)들을 가진 형태들로부터 참된 증명을 분별해야 한다.

1. 강압적인 제안 (appeal to force)
이런 어필은 논증자가 다른 사람에게 결론을 이야기할 때에,
그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그 사람에게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해를 가하는 허위이다.
이 허위는 육체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이 있고, 또한 심리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이 있다.

예 1. “만일 내가 당신을 위협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때에 내 월급을 올리는일이 수월 할 것이다.”
예2. “만일 내 동생이 당신에게 테레타비가 어린이 텔레비프로의 최고의 프로라고 우기다면,
사실 그 어린이 베스트 프로쇼안에 탈리타비가 보여질 것이다.”

2. 동정을 사는 제안 (appeal to pity)
이제안은 논증자가 독자나 청취자에게 동정을 일으키는 결론을 유도하려고 할때 일어난다.
이 논증은 아주 자주 쓰이는 것으로 학생이 교수에게 혹은 변호사가 재판관에게 쓰는 논법이다.
예: 납세자가 재판관에게/ 존경하는 판사님, 나에게는 비록 두아이가 있지만,
나는13명의 어린이들을 통해 세금을 돌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나에게 세금포탈의 혐의를 발견한다면,
내 명성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아마 나는 직업을 잃게 되겠지요.
나의 불쌍한 아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료품을 구입할수 없을 것이고,
우리아이들은 굶어죽게 되겠지요. 나는 분명히 죄가 없습니다.”

3. 사람들에게 호소 (appeal to the people)
이 제안은 독자나 청취자들이 자신이 제안한 결론을 받아들이오록
자신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간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있다.

직접적인 접근법은 논증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감정이나 열정에 호소하는 제안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즉 의혹이나 의심을 군중에게 일으키게도 하는 방법이다.
이제안은 과거 히틀러가 자주 썻던 방법이다.
간접적인 접근은 논증자가 자신의 호소를 군중이나
혹은 개인에게 차별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밴드웨건논증법,
허무(공허함)에 호소하는 논증, 속물근성(윗사람에게 아첨하는 법)논증이 있다.

벤드웨건 논증은 논증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부산물을 낳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뒤에 남기거나, 혹은 사람들을 내버려두도록(관심을 잃도록) 하는 것이다.
예: “ 물론 당신은 징 제품의 치약을 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의 90%가 징제품으로 이를 닦기 때문이다”

공허함에 호소하는 논증은 칭찬하든지, 설득하든지, 모방하든지,
자신이 사용하기를 원하는 아이디어로
논증자자신이 원하는 제품들을 연상하도록 하려는 논증이다.
최근에 미국의 TV에서 나오는 광고에서 나오는 문구에서 이방법을 쓴다.
예: “소수자, 자랑할 만한 것, 그것은 마린(제품이름)이다.”

속물근성논증법(appeal to snobbery)은 연상하는 작용을 이용하는
위의논증과 비슷하게 활용하는 논증이다.
예1: “롤스로이스(제품이름)는 누구에게나 위하지 않고,
선택된 소수자인 당신에게 주어지는 것이며,영국의 자동차회사들도 애용하는 것이다.”
예2. 엄마가 여자자아이에게/ “너는 슈퍼우먼같은 여성(wonder woman)으로 자라고 싶지 않니?
그러면 홍당무를 잘먹으려무나.”

Patrick J. Hurley 의 A concise introduction to logic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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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논리(logic)의 목표는 우리자신의 논증들을 건설하는 안내로서
다른 이의 논증들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사용되어지는 방법이나 원리들의 체계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논리의 연구에서 기대할수 있는 유익들중에 하나는
우리자신의 논증들을 발전시킬때나 다른 사람들의 논쟁들을 비판할때에,
우리가 만들어가는 필요한 감각들에 대한 신뢰를 높이게 한다.

 

논증(argument)은 논리가 일어날때에,
우리가 믿고 주장하는 이유나 다른 사람들이 믿고 지원하는 주장들을
나타내는 진술된 하나의 문장이나 혹은 문장들의 그룹이다.

 

모든 논증들은 두가지 기본적인 진술그룹이 있는데,
하나는 전제(전술)에서 결론을 뒤받침하는 것이며,
또하나는 비록 주장하는 바가 있으나, 그 전술에서 밝힌 것이 결론을 지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전의 것은 좋은 논증이 되나,. 나중의 것은 나쁜 논증이 된다.

 

논리의 목적은 논증들을 평가하는 것이나,
나쁜 논증으로 부터 좋은 논증을 구별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나
테크닉을 익히는 학문으로서 목적을 달성한다.

 

진술은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선언하는 것을 나타내며,

그 선언적인 것을 지원하는 문장이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하는 것을 진리판단이라고 하며,
진실한 문장이 있을시에는 그문장은 진실하며, 거짓이 있을 때에는 가짜문장이다.
 
진술들은 하나혹은 그이상의 전제들과 하나 그이상의 결론으로

나뉘어진 논증등을 만들어낸다. 
전제는 이유나 증거들을 제시하는 문장들이며,
결론은 전제가 주장한 내용들을 지원하거나 암시하는 것을 증거해주는 문장들이다.

 

결론을 가리키는 키워드인 지시하는 접속사들은 이렇다:
"그러므로, 따라서, 결론으로 말하면, 그와같이, 결론적으로, 추측한다,  이런이유때문이다, 그래서, …을 포함한다.  암시한다." 등이다. 

 

전제를 가리키는 키워드인 접속사들은
"그런즉, 때문에, 그와같이, 왜냐하면, 그런이유때문에, ..으로부터 가정하는데, 주어진 것에 의하면," 등이다.

 

추리(추론)(inference)는 논증에 이해 표현되어지는 추리(reasoning)하는 과정이다.
추론은 논증들(arguments)을 통해 표현되어질 뿐 아니라,
조건적인 진술들에 의해서도 진술한다. 
조금 느슨한 의미로서, 추론들은 논증과 섞여서 사용되어진다. 
명제(proposition)는 진술(statement)의 의미하는 것이나 내용을 알리는 것이다. 

 

Patrick J. Hurley 의 A concise introduction to logic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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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한 신의 메시지

이사야51:4-6
4. 내 백성아, 나에게 귀를 기울여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율법이 나에게서 나올것이며 나의 의로운 진리가 만민의 빛이 될 것이다.

신에게로 나오는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 자들이며, 그가 부르는 자들이다.
신에게서 나온 사람들은 신이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인생들이 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신이 가야할 마땅한 길이며,
그렿게 하므로 그들이 신에게 속한자들처럼, 신의 은총을 입을 것이다.

세상에 진리는 하나이며, 그진리는 신에게서만 나오는 영원한 원리이며,
인생이 들어야 할 이치이다.
그에게서 법이 나오며, 인생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법이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명제는 신에 대한 인간들이 가져야 할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하늘에 대한 태도이다.

신은 그의 속성이 의롭고 바르며,
그의 절대성에 기초하는 그가 정한 정도의 길을 걸어가는 원칙을
모든 인생들에게 내세우고 있다.
인간들은 조석으로 변하는 상대적인 이치에 머물러,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며 자신들의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며,
세상의 물결에 허우적 대며, 갈바를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인생들은 신에게로 나오는 자신에게 신은 바른 정도를 가르치며,
변치않는 원리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의 진리가 모든 인생들이 받아야 할 생명이며,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된다.
신은 태초에 세상을 지을때에, 빛이 있으라 하여,
그 빛가운데에 모든 만물이 생성되고, 형성되고, 조성되게 하였다.
모든 만물이 그빛안에서 지음을 받아 생존하며, 유지되며,
결국 그 빛가운데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 빛은 만민에게 비쳐줄 생명의 빛이다.
또한 모든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진리의 빛이다.

5. 구원의 때가 가까왔으므로 내가 속히 가서 그들을 구원하겠다.
내가 만민을 심판할 것이니 모든 민족이 나를 바라보며
내가 구원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인생들은 시간속에 살아가는 시간살이같은 존재이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까지 자기가 정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지구상에 곳곳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시간들을 시작하고 있으며,
또한 반대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끝난 인생들은
자신이 받은 시간들을 반납하고 자신이 왔던 곳으로 가고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죽음이라는 문턱에서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을 무수한 인생들을 생각해본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남은시간을 보내는 인생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상실한채, 허탄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다.
시간에서 태어나서 시간속을 달리는 인생들은 그 정해진 자신의 시간속에서
신의 구원하는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인생들은 자신의 신에게서 나오는 구원의 소식을 어느 시점에서 들을 것인가?
어느 인생들은 인생초반부터 먼저 세상에 온 선진들로 인하여,
신을 알아가는 지식을 얻게 되어, 어린시절부터 신을 찾고, 만나고 섬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의 혜택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삶들은 아직도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에게서 나온 진리의 도, 생명의 메시지가 인생들을 살리며,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인생들에게 구원의 제안을 했었던
신은 이제는 인생각자에게 자신들이 경주한 인생경기장에서,
결산의 때를 정해놓고, 한 사람, 한사람씩 그들을 판단하며
자신들이 살아온 이력들을 내어놓고, 신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신이 정한 인생들의 살아가는 노정이며,
인생들이 경험할수 밖에 없는 삶의 종착(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신의 평가)이다.

6. 너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그 아래 땅을 살펴보아라.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낡은 옷처럼 헤어질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하루살이처럼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나의 의는 쇠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마음이 시원하며,
구름한점없는 하늘을 보노라면,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얼마전에 어느 도시에 가서, 근처에 있는 해변에 갔는데,
경비행기가 몇번을 주변을 돌더니, 얼마안있다가,
하늘에 글씨를 하얀 연기로 써가고 있는 데, "아무개가 아무개를 사랑한다"라는 글귀였다.
그 하늘에 그 문장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난다.

하늘은 언제나 푸르고 청명하여,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들을 시원함으로 쓸어 내려주어,
마음을 한결가볍게 해주곤한다.

우리마음에 맑으며, 밝음으로 고마움을 선사하는
그 청명한 하늘도 언제가는 체질에 풀어져 하늘이 사라진다는 말은
청천벽력과 같이 인생들의 뇌리에 부딪치는 단어는 종말이라는 단어이다.

이지구가 새로운 체제로 들어서게 되는,
모든 인생들의 시간끝이라는 상황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사는 땅이 흉악하게 변해버려,
그곳에 사는 인생들이 하루살이처럼 하루 사이에 자신의 생명들이
촌각에 달리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기억에 혹성탈출이나 혹은 지구종말에 대한 주제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가 어느 시점에 가서
지구자신의 존재가 무너져 내리는 현실이 다가온 것이다.

사람들이 우왕좌앙 살 궁리를 하지만,
생존세계전체가 흔들리고 변화를 겪는 현실앞에 인생들은 하루살이 목숨처럼,
그 현실에 매몰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신이 기획하고 있는 그런 지구혹은 세상 종말시나리오는 언제가는 현실로
인생모두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신이 신자신의 존재를 두고 인생들에게 알리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신은 모든 인생들을 만든이로서
그들을 할수 있는대로 자신의 구원으로 인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에 사는 인생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힘들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있으므로 견디고
신이 베푸는 구원을 의지하여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인생 자신의 시계는
지금도 신이 자신에게 정해준 시점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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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인생철학

인생의 삶은 그 사람의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지향하는 자세에 따라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 시간에 어떤 태도로 일관하는 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되어진다.
시간을 살아가는 네가지 삶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는 과거지향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그녀는 늘 과거를 추억하고 과거에 매이는 태도로 살아간다.
과거를 회귀하려는 미련에서 계속겪는 현실을 소극적으로 대하게 된다.

전통이나 관습에 매인 경우에는 과거에서 내려온 주어진 조건이나 규칙을 따르며,
자기개선이나 생활개선에 대해 소극적이어서,
자신에게 가져오거나 다가오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과거에 경험한 사건이나, 일들이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아,
그 영향이 자신의 사고시스템이나,
처세술의 밑바닥에 깔려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데 매이게 된다.

또한 과거에 몰입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 충실하고 그 조직에서 주장하는 원칙에 순응하려고 한다.
그 조직에서 갖고 있는 전통적인 법에 매여,
거기에 자신의 위치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의 자신의 발전에 대해 애를 쓰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발전적인 미래보다는 현실적인 안정에 더 관심을 갖기 쉽고,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개선하려는 시도를 두려워 하여,
과거가 자신에게 물려준 환경이나 습관이나 처세술로
자신의 처한 그 자리에 머물려는 습성이 있다.

현실주의적태도는 언제나 자신이 현재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려고 한다.
시간관리에 있어서는 현실주의자들은 지극히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한다.
자신이 세운 시간계획에 따라 현재에 주어진 자신의 시간이나 일에 충실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자신을 개발하는 일에 투자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주는 이익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그안에 머물러,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감각이나
인생을 선으로 보지 않고 점으로 만 보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 쉽다.

예를 들어, 어려운 일을 만나는 일에 대해,
그 어려움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 어려움에 빠져 허우적되기도 한다.

미래지향적인 자세는 늘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앞으로 달려가는 자세로 살려고 한다.
자칫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시간적인 현실에 불충하여,
자신의 삶이 가지고 있는 현실이 가져다 주는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언제나 미래만을 바라보는 자신의 이상에 붙들려
현실적인 순간에서 얻어야 할 지금안에 있는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과
단계적인 성취을 잃어버리기 쉽다.

항상 무엇을 잡으려고 꿈을 꾸지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전에,또 다른 이상에 자신을 내맡겨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상념에 잡혀 살아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흐르는 시간과 다가오는 영원을 연결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살펴보면,
자신의 유한한 인생에서, 시간속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와 처세는
인생전체에 대한 자신의 위치설정(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나
치우치거나 빗나가지 않는 자신의 삶의 균형(이생과 저생과의 조화)을 잡아간다.

시간과 영원을 잇대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흐르는 시간속에서 지나가는 세월로 이해하여,
그 세월들이 주는 가치를 생각하며,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영원과 연결되는 시점을 향하여,
자신의 인생의 시간에 더하기 빼기식의 대차대조표의 상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또 그런 시간과 영원을 이으며 살아가려는 태도의 삶은
자신안에 물흐르듯 지나가는 시간을 아쉬어 하며,
그 안에서 시간이(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점점 자신에게서 줄어들고 있다)
주는 가치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인생의 사는 존재의 시도는 피안과 차안에서
맞주치는 삶의 태도의 이중적인 구조안에서 이상과 현실에 대해 조정하며,
자신의 전체의 삶의 지평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태도로 살아간다.

그/그녀자신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오늘의 교훈으로 받고 살며,
순간의 시간을 보내는 오늘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 사라질 시간안에 이루어야 할 일에 대해,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드리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오늘이라는 자산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축적하는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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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계획과 인생의 회복

이사야 46:8-10
8. 너희 죄인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라.
9. 너희는 오래전에 있었던 옛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나와같은 자도 없다.
10. 나는 처음부터 일의 결과를 말하였으며
오래전에 벌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고
내 계획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인생들이 아무리 선한척하고,
선한생각에 휩싸여 살아간다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죄안에서 태어나 죄를 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현실을 벗어날수 없다.

인생은 자신의 현주소가 어디에 속한지를 알아야 하며,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자신의 하는 일을 생각하여 그를 찾으며,
그에게 나오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살리는 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속성과 자신의 하는 일을 알린다.
인간이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자신의 인생의 걸어가야할 목적과 방향을 알고,
자신이 겪는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하는 의식속에 뿐 아니라,
느끼고 깨닫는 감정과 의지안에서 자신의 뜻을 알리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이미지를 새기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의 깊은 곳까지 살피는 분이다.

그가 인간을 자신의 파트너로 정하였지만,
인간들을 각기 하나님앞에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각각 제각기 제가 원하는 곳을 가다가, 방황하여, 길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하나님이 보낸 영을 받아들여,
그 영을 통해 알려지는 그의 음성을 접하고,
그음성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고 정한
이치와 법도를 마음에 새겨 살아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인간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소생으로 지었다는 것과
자신의 이메지(상)를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은
동시에 인간이 가진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 변질되어,
자신안에 자신도 모르는 빛인 하나님과 다른 어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은 끊임없이 빛과 어둠의 충돌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자신도 모르는 세력이 판을 치고,
어리석은 인생들은 그 어둠이 유혹하고,
미혹하는 대로 끌려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다. 그만이 인간에게 생명과 구원을 비쳐주는 생명의 빛이다.
이 생명의 빛이 이땅에 오므로 모든 것이(특히 어둠의 일들이) 드러났다.
그 빛을 보고 빛을 향해 가는 자는 진리를 발견하고,
생명을 얻으며, 인생의 바른 길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상태와 처지와 운명에 대해 말씀하여 왔다.
사람이 범한 잘못으로 인한 결과는 인생이 겪는
모든 불행한(죄의 응보로 인한 역경, 저주,고난, 고통, 죽음) 문제들의 원인이 제공되었다.
세계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해오고 있으며,
그 장래의 위기(다가오는 인간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에서
인간이 구출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이 시작될때부터 계획을(잃어버린 하나님의 소생인
사람들을 다시 되찾아,
그들이 있어야 할 그 신분과 위치를 회복케하는 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모든 인생들을 향해 그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모든 인생들에게 영향을 줄것이다.
그 계획을 실행하였고 지금도 실행하며, 앞으로도 실행할 하나님은
그분자신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깊숙이 와서,
인생이 겪는 일(문제들: 저주,고난, 고통,죽음)들을 맛보며,
인생의 당하는 어려움을 친히 경험하였다.
그 계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도록 활동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한
그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인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마당안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은 지금도 여러 인생들 주변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 그것은 사람들이 본래의 신분(자녀의 신분)과
위치(하나님이 머무는 자리)와 권한
(자녀의 권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죄의 모든 속박에서의 자유와
하나님이 허락하는 모든 자녀의 영광)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파트너로 다가올 세상의 주역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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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영혼을 회복하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는 꺼져가는 심지를 끊지 않으신다.
그것은 아무리 약한 자라도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고,
영혼이 회복이 되는 사역을 행하신다.

주님의 사역은 적게 시작할지라도 하늘에서 오며,
그의 영이 상한 심령속에서 그 연약한 영을
그의 사랑의 불꽃을 점화하므로
그의 자비의 사역이 시작이 되며,
또 그 완성을 이루어낸다.

그 사역은 그의 자녀들에게 능력의 은혜의 영광으로 다가와
어두움가운데에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심령들에게 빛을 발한다.
고로, 그의 사소한 은혜의 역사도
절절한 도움을 구하는 사람의 심령속에서는 귀한 것이다.

이사역이 귀한 것은 새술은 새부대에 담는 은혜로,
절망스런 삶을 살아가는 심령속에
마치 온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과 같이 역사한다.
자신의 영혼이 깊은 속에서 매말라가는 가운데에
영적으로 기갈이며, 절망스런 상태에 있지만,
그런 심령에 다가오는 주님의 사역은
병들고 상한 영혼들을 회복케하는 귀한 사역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그런 인생들의 약한 것을 지원하는 것이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과 인간의 불순한 성품이 서로 상치된다.
그의 성품은 인간성의 온전함과 신의 성품안에서, 그의 비쳐주는 생명의 빛은
약한 인간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상태의 영혼에 불을 붙여,
병든 영혼들을 소생케 하는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비참함 가운데에서 시작하신다.

젊은 시작한 크리스챤들이 적은 일부터 시작되지만,
근본적인 가르침안에서 보다 점점 탁월한 방법으로 훈련을 받는다.
처음에 그들을 신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허물을 감추거나,
어떤 실패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이 겪는 멍에를 잘 감당하여
그들이 얻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봉사에 도달하기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 중에 약한자들은 무시당하지 않아야 하며,
그들이 만족할 만한 격려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약한자들에게 대해 그의 은혜로우신 능력으로 임하신다.
그는 겸손히 상한 심령들을 이해하며,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살피시고,
그들을 치료하고 회복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하여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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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심지

예수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에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않으시며,
그불꽃이 타오르도록 불을 붙이신다.

은혜는 처음에는 적은 것으로 다가온다.
믿음은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
은혜도 처음에는 작으나,나중에는 아주 큰 영광을 인도한다.
위대한 완벽한 것들은 성장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간은 세계안에 가장 탁월하고 온전한 존재로 자라기 위해 조금씩 성장한다.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듯,
예수 그리스도도 가장 낮은자로 오셨으나, 천국보다 높은 자로 오르셨다.
거룩한 진리들의 결론은 감추어져 있는 원리들이 있다.
성도들의 거룩함과 열정도 처음에는 적은 불꽃에서 시작한다.

은혜의 적은 시작을 실망하지 말고,
거룩하고 흠없는 자로 선택된 것을 기뻐하며,
불완전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함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은혜는 비록 작지만, 그 힘과 가치는 지대한 것이다.
눈의 동공이 작을 지라도 그눈으로 천국의 모든 것을 볼수 있다.
영광의 천사들이 가장 작은 자일지라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은혜의 작은 알곡보다 세상에 가치있는 것은 없다.

은혜는 타락과 함께 역사한다. 은혜는 처음에는 미미하지만,
타락가운데에 있는 우리에게 역사한다.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타락된 부분들을 일시에 없애지 않고,
그들이 남은 타락된 부분들을 싸우기를 바란다.
가장 순수한 자가 순수한 행동을 할지라도
그에게도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에 어떻게 기도하지를 모를때에,
성령은 우리을 위해 탄식하듯 도우신다.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들은 상한 간구를 드릴수 밖에 없다.
심지가 꺼져가는 듯한 어려운 상태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모세가 홍해바다앞에서 그렇고, 다윗도 외국땅에서 그렇게 되었다.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절망스런 고백과 함께
자신의 영혼이 꺼져 가는 듯한 상태를 경험하였다.

자연과 은혜가 서로 어울려져 우리안에서 공존하며 있다.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은 안전과 자만에 기울이지만,
의롭다고 여기다가도 우리안에 허물이(stain)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안에 은혜를 통해 붙은 영적인 불이
우리안에서 남아있는 타락의 흔적인 육의 불에 의해,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Richard Sibbes's the Bruised Reed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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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갈대를 향한 예수님의 사역

의사는 통증이 심한 환자들을 다둘때에,
칼을 들이대고 아픈 부분을 자르지만,
환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치료한다.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싸매어주시고,
은혜로운 돌보심으로 하나님앞에서 중보자요 구주의 역활을 하신다.
예언자로서 사람들에게 가난한 심령이 복이 있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면서 양을 돌보는 목자와같이 하신다.
그는 그의 적들에 대해 양무리들을 위해 제사장으로 죽으러 오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따르는 무리들을 위해 우셨으며,
하늘에서 그들을 위해 중보자로 기도하신다.
그는 온유한 왕으로서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왕이었다.
그는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는 모든 질병을 가진이들의 의사였다.
우리의 죄를 위해 담당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그는 그의 피로서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고자 죽으셨다.

우리자신들을 위하여 우리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앞에 나가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처를 감추지 말고, 그에게 상처난 자신을 그에게 열어보여야 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니, 하나님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어 하지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왕국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으며,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신다.
우리의 상처난것을 그리스도에게 가져가 치료받게 된다.
그분은 나를 위해 유혹을 받으시고 시련을 겪으시므로
우리 자신을 깨뜨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니,
사단이 자신을 삼키려고 깨뜨려고 달려드는 모든 것에서
우리들 자신이 파멸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사단이 망가뜨린 모든 파멸들을 보상해줄 것이다.
특히 그는 약한자들을 돌보신다.
교회안에 가장 약한자라도 그의 돌보는 날개아래에 의존하여,강하게 될 수 있다.

누가 상한 갈대들인가?
어떻게 우리가 자비를 기대하기를 알수 있는가?
상함은 자신의 지는 십자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한 상처들을 말함이며,
우리의 양심이 죄의 영향력아래에서, 하나님의 분노에 신음하는 우리의 영혼이 신음하며,
모든 타락한 농담들이 병들고 상처난 몸을 만든다.
지난 날의 죄가 자신들을 가두고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주님은 자신의 죄에 대해 심판하셨지만,
이제는 주님은 우리 자신들을 치료하신다.
자신의 죄에 악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의 큰 은혜를 경험한
그는 이제 자신에 대해 겸손하며 타인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며,
성령안에서 가장 행복한 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을 대하며,
상한 마음의 내면의 살피는 일을 통해 성화를 이루어 가는 일에 유념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것인가?
우리의 상함에 하나님앞에 우리의 상함의 상태에 대해 인식하며,
우리가 범한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앞에 대적하지 않고 겸손하게 나가면 그는 우리를 배나 어루만져 주실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완고함을 풀고, 우리가 저질은 죄를 적대시하여,
우리의 죄를 위해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령의 감동에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죄는 그저 있게 되고 더이상주님앞에 나가지 못한다.
죄를 시인하는 것은 회개하게 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서게한다.
우리의영혼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빛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상함의 상태가 어느 정도이지를 묘사할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고쳐질 것이며,
비록 우리의 오른손이나 눈을 뽑아야 할 처지일지라도,
우리의 잘못된 것들이 개선될 것이다. 우리의 잘못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거나,
우리 마음의 허물을 가리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공포나 짧은 슬픔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으며,
우리의 머리를 조아려 겸손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회개를 거부하는 거룩한 횡포를 하게되면,
우리의 죄가 우리를 처벌받는 것보다도 더한 악취를 겪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이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영적진리의 근본이다.
자신의 영혼이 상처입은 상태에서 천국가는 것이
안일하게 있다가 지옥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우리가 처벌에 대한 것보다 죄자체 대해 슬퍼하면,
우리가 상함을 겪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외부의 불평으로부터 오는 슬픔은
하나님의 기뻐하시지 않게하는 것에 대한 슬픔보다 우리의 영혼을 짓누른다.
왜냐하면 그런 슬픔은 우리의 안과 밖을 아울러 전인에 영향을 주며,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격한 불평때문에 믿음의 효력이 잠시 정지되어진다.

갑작스런 고통(스트레스에서 오는)은 우리의 영혼에 격류와 홍수와 같이 다가오면
영혼과 몸의 연결로 인한 원인때문에 우리의 몸에 병이 찾아온다.
우리의 영혼의 활동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현실에 압도된 믿음은 죄에 대한 슬픔을 통해,
비록 죄로 인한 불행스러움이 있지만,
다시 막혔던 둑에 물이 다시 흐르듯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준다.

상함의 철저한 사역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하게 하는 것같은 시련에서
우리가 인내하면,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된다.
우리안에 있는 거룩한 좌절은 참된 소망의 근거가 된다.
도울힘이 없는 자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도움이 되시며,
가장 약하고 낮은 영혼까지도 돌보시는 사랑을 가진 분이다.

Richard Sebbes's The Bruised Reed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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