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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현재와 종말에 대한 사회적역활

크리스챤 공동체는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살며,
동시에 또한 이사회의 소속된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있어 이세상에 대해 저세상을 알리며,
일시적인 것에 대해, 궁극적인 것을 알리는 역활을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와 세상의 종말에 대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표현하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도덕적 차원을 위한 윤리적인 잣대역활을 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교회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윤리상을 갖도록
그리고 크리스챤들이 모델역활을 할수 있도록 훈련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사회의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그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를 분석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본성안에 있는 원죄의 자범죄와 사회적인 범죄에 대해
교회는 사회에 보다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죄의 일시성에 대해, 구원의 영원성을 알려주는 역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죄는 인간을 악으로 몰아가며, 인간의 죄의 폐해가 인간사회를 어둡게 만들지만,
그 죄의 어둠의 영향력안에 있는 사회를 향해,
인간의 악과 죄에 대한 폐해에 대해 심판과 정의의 역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죄과 악으로 인한 폐해등,
차별, 고통, 분쟁, 질병등에 대한 치유적인 역활도 보조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이 옳다고 여기는 악에 대해서 악이라고 말하지 않는 죄를 범할수 있다.
그러므로, 다수의 잘못이나, 사회적인 오류에 대해 교회는 바른 말을 해야 하며,
인간의 죄라도 사회적인 범죄로 취급되지 않는 것에 대해,
즉 일곱가지 죄악(교만, 시기, 분노, 게으름, 탐욕, 방종, 음란)들에 대해
언급하는 역활도 무시할수 없는 교회의 역활이다.
사회적인 법정에서 다루지 않는 실정법이 아닌
인간의 심성이나 본성에 대한 왜곡에 대해 잘못들을 지적하여 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일반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에 있어서나,
혹은 편향된 사회적인현상에 대해,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이나,
다른 국가를 침입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평화를 깨뜨리는 행위에 대해서도
바른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부분적인 사회적인 현상인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사용에 대해서,
교회는 인간양심에 경종을 울리는 제 목소리를 내야할 것이다.
교회의 목소리는 근본적인 성경적인 가르침에 의존하여,
사회적인 이슈나, 관심에 대해 자신의 기준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며,
그것의 윤리적인 잘못을 지적하며,
그리고 동시에 교회는 그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촉구하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는 빛의 역활을 하며,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역활도 해야 할 것이다.
종의 자세로 섬기며, 화해를 행하며,
사회를 변혁시킬만한 소망을 주는 역활도 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사회적인 치유적인 과정과 화해에 대한 종교적예식은
진리를 찾고, 갈등을 해결하는 근원지로서 대화와 논쟁을 통해
교회는 자신의 역활을 감당하는 것이다.
교회의 소명은 자신의 정체감을 재발견하여,
세상에서 구별된 독립된 개체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사회갱신의 타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변두리로서 세상에 대해 자신의 사명을 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 대한 위임의 책임 의식과
세상에 대해 구별된 의식으로 세상을 향한 미션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대행기관으로서,혹은 하나님나라의 실현의 공동체로서,
인간사회안에 믿음,소망, 사랑의 실현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인 양심의 기능으로서, 사회의 모든 할동이나 행위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사회적인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려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것이다.
교회는 또한 정상적인 윤리적인 믿음공동체로서,
윤리에 대한 소명을 갖고서,
교회는 사회에 대해 높은 도덕률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또한 사회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에 협조하여,
공공의 유익을 위한 사회의 목적론적인 성취를 바라보면서,
교회 자신의 사회적 협력행위를 강화하며,
시간의 역사적 의식과 현대적인 관련성에 대해 기독교의 역활를 강조하며,
기독교의 세속사회와의 교류와 영향력행사를 통해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의 상호성을 증진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
그들이 살고 있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대안공동체로 사회에서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일이나 이슈에 대한
해결의 대안이나 정책적 제안으로 교회가 속한 사회에 건전한 이상향을 제시한다.

교회는 일반사회에 대해서 국외자의 공동체로
사회문제에 조정하는 역활을 통해,
사회적인 사건들에 대한 비상식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에게
문제해결의 구체적인 기대를 가져오는 약속된 근거를 제공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인간사회의 종말에 대한 교회의 격종을 울리는 역활을 한다.
종말에 대한 바른 지식과 예언의 노하우를 알고 있는 크리스챤들은 세상에 대해,
세계의 종말에 대한 경고를 통해,
인간세상의 제한과 종착에 대하여 세상이 준비할수 있도록 권면하며,
모든 인간활동에 대해, 종말의 시급성을 알리고,
그 할동들이 신의 다가올 심판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세계의 종말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을 하늘의 메시지에 연결될수 있도록
가교의 역활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종말의 준비하는 공동체로,
신의 약속이 실현이 되기를 기대하며,
현재와 종말사이를 이을 중간지대에 놓여있는 구심체로,
일시와 영원을 연결하는 역활이 요청된다.
일시는 그것이 사라짐을 통해, 허무함과 무익함을 알게 하고,
일상성에 오는 한계성을 극복할 대안의 메신저로
교회는 피안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함므로써 세상에 대해 구원의 공동체로서 다리를 놓으며,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이 하늘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문으로서의 역활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현재와 종말사이에 놓여있는 영원한 기관으로,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도구와 기관으로 제 역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현재와 종말사이를 오가며,
세상의 일시성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그 심판의 다가옴을 무시하고 살아가는데에 대해, 심판의 시급성을 알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준비를 강조한다.

교회는 역사적인 공동체로 사회를 변화시킬 자신만의 거룩한 이야기와
영향력을 주는 대안을 가지고 있어,
현재의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가며, 그 시대에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여,
종말을 준비하는 사회가 될수 있도록,
부패하고 어두워 진 사회를 맑게 하며
건강하게 하는 예언자적인 역활을 통해 사회를 갱신하며,
발전시키는 역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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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신학적사고

종교적인 행위는
즉 개인의 신앙적 행위나 종교적 의례를 통한 신과의 접촉을 통한
즉각적인 개인이해나 경험에 입각한 신학과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사려깊게 연구하는 신학은

신학하는 방법이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다.
개인의 즉흥적인 이해신학과 그것을 재이해하는 신학의 차이는 신학방법의 차이이며,
신학방법의 지향하는 목적의 차이일수 있다.
신학적 방법과 목적에 따라 신학적인 접근법은 달라질수 있다.

인간세상에 신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표현하는 방법으로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에 따라,
자신의 믿음에 영감을 주고 자신의 신이해에 즉흥적이지만,
순간성에 따른 순발적인 믿음의 활달성이 따라올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적인 이해와 표현방식은 신의 포괄적인 통치와 그의 성품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은 자칫 신을 알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추구에
치우친 이해와 편견에 빠질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나 신학의 단체적인 연구나 접근을 통해
신이해나 경험을 추인받으며,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신은 초월자이면서, 세계에 편만한 존재로
인간사회에 모든 분야에 관여하며, 신의 존재와 섭리에 있어서,
신과 인생사이에 놓여있는 모든현상에 대해 신학적해석을 추구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세계에 통치하는 신의 성품이나 역활등을 이해하며,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을 따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흥적인 신학방법은 개인의 인간속에 이해되고 경험되어진 내재적이며,
인격교류적인 신경험을 표현하는 신학적인 방법으로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경험을 표현하는 개인신학의 추구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목표를 통해 신학의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로서 신학적인 표현을 추구한다.

사변적인 신학방법은 즉흥적인 경험가운데에 얻은 정보들을 분류하고, 판단하여,
그 정보들을 체계화하여 그 신학적인 체계안에서

신이해를 종합적으로 세워 갈수 있을 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그런 즉흥적인 신이해나 경험을
신중한 사고적인 이해를 통해 체계적인 신학관을 세워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이해는
경험적인 신학사고와 사변적 신학사고에 따라

서로 상호보완적인 종합적이해를 가질수 있다.
기도를 할때에나, 설교를 들을때에,

받은 평신도들의 신학형성에 주로 영향을 주는 신학방법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접촉하는 신경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이루는데 주된역활을 하게 된다.

섭리는 종합적인 신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신의 성품이나, 신의 통치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여 신의 움직이는 활동이나,
삼위일체 신의 삼위의 성부, 성자, 성령의 각자의
활동이나 역활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요청이 된다.

사변적인 신학은 사람의 신역사의 경험이나 신역사의 이해에 대한 단편적인 것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신학적인 관점을 갖게하는 것이다.
섭리는 신의 통치의 신정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의문이 제시되고 있으며,
악한 세력의 선한 인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유대인학살들에 대한 이해등도,
신이 과연 살아계시는 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며,
편견이나 일변도적인 주관적인 신이해에 머물게 하는데.
사변적인 신학사고는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게 한다.

즉흥적인 신학관점은 우리들에게 신학적인 영감이나,
실생활에 우리에게 자신의 신이해나 경험에 도움을 주어,
자신의 신의 역사나 섭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
사변적인 신학관점은 우리에게 진지한 신학추구를 통해 체계적인 신이해를 갖게하며,
신학의 종합적인 관점을 통해 신학의 자신의 신앙수립에 도움을 갖게 한다.

통합된 신학적인 개념은 신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나 이해일 뿐 아니라,
신에 대한 대응적이며, 대화적이며, 그리고 공동체적인 신학 사고과정를 통해 형성이 된다.
그 신학적인 사고의 모델은 건강하고 논쟁과 창조적인 긴장이 있는 감상을 허락하는 대화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해를 구하는 믿음을 추구하는 신학은
신학자로서 크리스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는 것과 그 메시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혹은 계획적이든, 계획적이 아니든,
매일의 셀수없는 접촉에 의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해 믿음을 배운다.
교회에서 전파되고 교회교인들의 매일의 삶에 의해 이해되는 믿음을
추구하는신학이 즉흥적신학방법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터득하는 주관적인 신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인 가정과 사회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로 자기결정을하게 된다.
크리스챤들은 믿음의 세계가 현실생활과 다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합당하게 교류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이해한다.

주관적인신학은 예배에서 다른 사람들과 문제제기 함이 없이
자기만의 신앙(신학)적인 말을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편안하게 혹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형성한다.
사변적인 신학은 주관적인 신학의 확신하는 것들을
다시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사변적인 사고는 제이의 신학적 사고과정으로
자신의 절대적인(자신에 대해서만 그렇게 생각함)

주관적 믿음에 대해 다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사고관점을 다시 객관적인 사고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변적 사고는 짐짓 하는 사고이지만,
그것은 해석의 대안적인 것으로 가능한 일치적인 것과
분명하게 확인된 믿음의 이미를 구성하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신학적으로 옳다는 것에 대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나,
신학이 깊은 신학자들에 의해 강요받는 혹은 감동되는 신학적인 시도가 아니다.
사변적인 신학적 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의 불분명할때에 시행된다.
진지하든 아니든, 주관적인신학은 실수나 혹은 잘못 알려진 내용들로 그 신학의 위기나, 논쟁을 통한 사변적인 신학사고를 통해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다.

믿음안에서의 자극(신학적인 인식)은 사려깊은 신학적사고를 요청한다.
그 자극(인식)은 의식화이다.
그 자극은 신앙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깊은 단계의 감정적인 요소들을 다룬다.
믿음의 깊이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인식되어지는 과정으로 그 자극은 흐릿한 믿음의 이해를 명료하게 하는 역활을 한다.
의식화된 믿음의 자극(인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길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한다.

주관적인 신학관점과 사변적인 신학관점의 구분은 역사(시간)를 통해 검증되며,
새롭게 하는 신학적인 확신들에 위한 힘든 첨예화된 신학검증의 가치를 통해 나누어 진다.

목회자에게 주는 도전은 믿음의 이미를 연구하는 것인데,
신학적인 사변적 사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연결되게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목회자의 설교는 첫번째 신학사고인 주관적인 신학에서 나오지만,
그러나 두번째 신학사고인 사변적인 사고의 보다 힘든 과정을 통과할 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변적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을 검증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아버지와 세상의 아빠의 이메지의 차별화에 대한 믿음의 충분한 이해를 제공한다.

크리스챤들이 믿음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믿음의 확신을 갖게하는 것의
의미하는 것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한다.

어떤 크리스챤의 믿음의 이슈도 신학자의 연구에 참여하게 한다.
즉 믿음에 대한 어느 것도 신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안에 건전한 성장을 하도록 하는 소명을 이루는데는
자신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주관적이고 기초적인 이해를 고치고,
깊게하며,확장하는 신학적인 사고 시도를 통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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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소망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루고저 하는 소망을 평소에 가지고 있다.
그 소망에 집중된 생각이 자신에게 계속적인 동기부여를 할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평소에 생활에서 나타나도록 힘쓰게 되면,
그 바라는 소원들이 이루어 질수 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생을 살아가는 처세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무런 소망없이 사는 것보다 훨씬 발전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소망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소원들을 적어보고,
그것을 이룰 과정과 단계들을 살펴보며,
자신의 현재의 생활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잡아줄 것이다.
소망에는 구체적인 생각이나 계획이 뒷받침이 없는 막연한 소원이 있으며,
자신의 생각에 이룰수 있다는 가능한 소원이 있는가 하면,
혹은 자신의 생각에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자기생각 넘어의 소원이 있을 것이다.

소망은 언제 필요한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분명한 이정표가 보이지 않을 때에,
그때에는 장래에 대한 구체적인 소망을 생각해보며,
그 생각들을 노트에 적어보며,
그것을 실현가능한 자신의 바라는 목록들로 세워보면
현재의 자신의 캄캄한 앞날에 대한 길이 보여질 것이다.

위에서 언급해듯이 소망이 주는 유익은
먼저, 자신이 해야할 일이나, 마땅히 가야 할길에 대한 이정표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아준다.
소망을 세울때에,
자신의 소망에 대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목적(인생의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줄 기본적인 카테고리등: 교사가 되는 길, 변호사가 되는 방향등)이나 시기이나,
주어진 환경에서 이룰 구체적인 목표(단계별로 세울 일시적인 성취에 대한 목록들:
어떤 교사가 될 것인지, 지역이나, 환경이나, 대상에 맞는 교사상,
어떤 계통의 변호사가 되는 단계별 성취목록 혹은 직급에 대한 목표)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아갈수 있을 것이다.

소망의 활용면에 있어서,
자신이 세운 소망을, 자신의 생각의 창고나,
기억의 보고에 골동품으로 남겨놓지 않고,
늘 자신의 생각에서 끄집어 내어,
자신의 현재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고,
과거를 살아온 삶의 족적을 살펴보는 교훈의 잣대로 삼으며,
미래를 살아갈 앞날에 대한 기대감의 방향타로 활용할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가는 모습이 인생의 삶의 특성이며,
혹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며,
그리고 자신이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기술이다.

지금 당신의 소망은 무엇이며,
평소에 가지고 있는 바라는 바대로 무엇을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당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삶에 대한 기대감이
무엇인지를 끄집어 내어 보고,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진단하며,
수정하여 새로운 앞날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이나 소망을 안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인생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
인생에게 있어, 바라는 믿음(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이 아닌 실상:실제적인 것들, 이다)은
자신의 삶에서 이룰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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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언어들

희망, 새로움, 창조, 밝음, 명랑함, 따스함, 낙관적, 초월함, 돌파력등 인생을 살아갈때에,
이 단어들을 생각해만 해도 우리의 마음이 푸듯하다.
짧은 인생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은데,
우리가 겪는 일들이 늘 부정적이고, 절망적이며,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을 통해 가치나 의미를 얻기는 커녕,
고귀한 삶의 자락에 넝마처럼 주렁주렁달려 있는 쓰레기같은 것들을
자신의 삶을 통해 남게 된다면, 우리의 사는 현실을 슬프게 한다.

그렇지만 새날을 맞이하고, 새희망에 부풀고, 새일들을 기다리며,
새사람을 맞이하려는 새마음안에 자신의 삶에 대한 소중한 것들,
사랑, 기쁨, 베풀어나눔,봉사, 감격등을 새기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우리 몸에서 산소를 받아들여,
그공기속에 있는 신선함과 생명의 기운으로 우리의 몸을 지탱하며,
우리속에서 나온 찌꺼리를 몸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생존한다.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력을 받아야
우리의 마음이 생존할수 있다.
희망, 사랑, 믿음의 단어들이 내안에 매돌며, 내안에 남아있어,
나를 힘있게 살게 하는 힘이 되도록, 좋은 양식을 찾아
내마음을 살찌우며 나갈때에,
비록 현실은 힘들고,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다가올지라도,
그안에서 자신의 마음안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통해
자신속에 부딪쳐오는 현실의 아픔이나, 실망들을
기쁨이나, 낙관으로 바꾸어 가는 인생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내 안에 어느 단어가 많이 들어오는 지,
나의 브레인에 무슨 단어들이 많이 입력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자신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생각하여,
보는 책, 듣는 음악, 나누는 대화, 청중으로 혹은 시청으로,
혹은 구경으로, 혹은 감상으로
자신의 두뇌로 들어오는 무수한 단어와 그 단어들을 들어오는 정보들이
과연 자신을 이롭게 하며,
자신의 삶을 유익하게 하며, 자신의 하는 일에 도움이되며,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안에 맴돌고 있는 단어가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 그것을 올바르고 건강한 단어들로 바꾸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할필요가 있다.
부정, 불신, 투쟁, 미움, 증오,좌절, 배신,무례함, 불손함, 불경건함, 악의, 악행등
이런 단어들의 공격적인 침투의 영향에서 벗어나기위해,
우리안에 자신이 붙잡아야 할 단어들을 매일 생산하기위해,
좋은 생각, 건전한 정신, 따스한 마음, 고마운 마음,
창조적인 태도, 건설적인 자세, 옳은 의도,
선한 생각들에 영향을 주는 유익한 정보들을 모으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이제껏 살아온 날들가운데에 많이 생각나는 단어들이 무엇이며,
가족간에 겪는 일들중에서 생각나는 단어들이 무엇이며,
대인관계에서 떠오르는 단어들이 무엇인지?
자신의 인생사전에 등록된 단어들이 어떤 단어들인지를 살펴보고,
사전수정작업을 다시해보면 어떨지...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이며,
언어의 유희에 좌우되는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신은 언어를 창조하며, 인간속에 언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신의 언어는 세상을 만들어 내었고,
인간의 언어는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낸다.
고로 언어는 인생자신에게 있어,
자신의 표현이며, 자기창조와 자기생산의 기폭제이다.

언어가 나를 살리고 나를 죽이기도 한다.
생명의 언어, 소망의 언어, 기쁨의 언어 지속되는 자신의 앞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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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생각이 자신의 자아상에 영향을 준다

아침에 일어나, 세면대에서 세수를 할때마다,
자신을 향하여, 너는 할수 있다. 괞찮은 사람이다.
너는 지금 사랑받고 있다. 누구를 사랑할수 있다.
라고 말을 하면서 자신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안에 있는 자아(자기이메지)를 향해,
격려 하는 가운데에 자신의 자아상을 건강한 자신으로 날마다 세워가면,
평소에생활하면서 갖게되는 자신에 대해
소극적인생각이 들고, 그 생각안에 부정적인 자신의 이메지를 갖고 있는 습성에서
자기를 긍정적으로 변하기를 기대할수 있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향해 아침마다
이렇게 하는 생활습성을 갖게 되면
자신의 가진 고정된 자아상에 대해 상당한 발전된 자아상으로 나갈수 있을 것이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던질것은
제한된 생각, 편협된 생각, 길들어진 생각, 부정적인 생각에 자신의 자아상이 만들어져,
그 자아상에 맞는 습관이나, 일처리나, 생활태도나,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상의 생각을 활용하여 자신에 대해 꿈을 꾸며,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향하여,
그것의 바라봄의 기대를 갖고, 성취에 대한 강한의욕을 가지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들때에,
그리고 특히 주변의 일로 인하여,
자신에 대해 너는 왜이러냐? 그리고 너는 왜 그모양이냐? 라고 생각이 들때에,
그렇데 자신에 대한 좋은 이상(긍정적인 자아상,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아상: 그러면 남들도 자신안에비쳐진 자신을 보고 내가 갖고 있는 자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됨)을 생각할수 있겠다.

그런 좋은 자아상에 대한 계속적인 자기추구(자아상을 높이는 시도)를 하여야 하는 것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계속, 일을 하거나,
사건을 겪든지, 환경에 자신이 들어가든지,
혹은 사람을 만나거나, 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자아상이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메시지에 의해 세뇌되어
자신이 과거로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따라,
자신의 자아가 그 주어진 여건들 속에서 만들어 가는 삶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기관리하는 일에 있어서, 계획관리, 시간관리, 시간관리, 일처리습관관리,
그리고 생각관리가 있을 것인데,
그 많은 생각 관리중에, 자신에 대한 자아상(이메지)관리가
자신의 삶에 가장 영향력을 미칠것이다.

자신을 레크레이션(재창조)을 하기 위해,
엔터테이먼트를 활용하는 데 있어, 취미나 오락활동을 할때에
자신이 생활하면서 겪었던 긴장(스트레스)을 푸는 것(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디프레스:불안이나 우울증현상으로 자신의 정신건강에 역작용을 함)과
자신에 대한 이메지(자아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일 경우에
자신의 모습관리나 생활태도에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그 취미나 활동중에 자신의 자아상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활동(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경우에
자신의 몸상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하는 가벼운 걷기를 할수 있는 높지 않은 산에 산보나 산행을 하는 경우)을 하는 것일 것이다.

가령 음악을 듣는다는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취미나 오락을 통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에 보탬이 되는 활동을 할때에,
그 레크레이션의 시간이나, 취미활동을 통해 자신을 발전시킬수 있을 것이다.
가령 빡빡한 생활환경의 단조로운 패턴에서 오는 자기자아상에 정체적인 현상을 지속하다보면,
그 권태로운 생활패턴에 변화를 주는 재미있는 여행을(겨울에 기차를 타고, 겨울 바다를 가서 기분을 전환하는 것이나, 무더운 여름에 경치좋은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 경우, 봄에는 가까운 교외의 시골 들녁에 가서 식물이나 초원의 푸르름을 보면서 만물이 생동하는 현상을 즐기다든지, 가을에는 숲속이나 깊은 산속에 가서 저물어 가는 단풍이나, 산의 색깔이 변화해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활을 음미하는 일등)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끝으로 자신의 자아상(이메지)관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통해서 일것이다. 그 생각의 출처나 영향의 범위를 통해 4가지 정도의 생각패턴을 생각해 볼수 있다.

첫번째는 육체적인 본능이나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고, 혹은 자녀를 멀리 떠나 보낸 어머니가 느끼는 모성애적인 생각이 있으며,
두번째는 자신의 두뇌의 이성기능에서 나오는 정신이나,
사고에 영향을 주는 생각(흔히 우리가 말하는 생각)이라 할수 있는 생각(이생각에서 주로 우리의 자아상에 계속적인 영향을 주기쉽다)이며,
세번째는 영적인세계에서 오는 생각등일 것이다.
기를 모으는 일과 도를 닦는 것, 영적인 현상을 통해 마음의 집중력을 기르는 것(이런 생각들은 방향성이나 도덕성에 있어 인간의 상대적인 한계나, 인간적인 제한에 머문다)등,

그리고 네번째는 인간의 생각속에 가장 고귀하며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과 나누는 생각이다.
이생각은 인간의 운명을 바꿀만한 권세와 능력이 있다.
가령 자신이 신을 믿고 신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기도하면,
신은 자신의 생각으로 혹은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그 범주안에서 세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인간이 그 신의 영향력아래에 있는 신의 세계에 들어가는길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을 바꿀수 있으며,
자신의 자아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자신이 신의소생이며, 신의 자녀라는 의식은 세상에 그 어떤 생각이나 의식보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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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도우려면

이세상천지에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자신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있을 것이다.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현주소일 것이다.

고마웠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자신에 대해 흐믓하게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아끼고, 나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누군가가
나의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

어린아이가 집에서 나가 골목에 있는 동네의 아이들사이에 있을때에,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며, 즐겁게 놀수 있으며,
좋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혼자 덩그러니 자신만 있고,
누구도 자신과 함께 놀아주지 않으면 심심하며,
동네를 빙빙돌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할 것이다.

명동이나 종로에 나가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어딘가로 길을 걷고 있을때에,
많은 군중들이 분주히 자신의 일들을 보기위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자신혼자만이 덩그러히 서있으면,
갈데없고,만날사람도 없으며, 시간을 보낼만한 일들도 없다면,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러울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없고,
서로가 스쳐 지나가는 자신들일때에,
사람들은 더 외로움을 타는 가 보다.
인터넷의 세계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다가,
보아도 보아도 계속되는 정보의 홍수에
사람들이 자신의 정을 붙일때가 없으며,
다만 문자와 이메지와 사운드의 교류속에서
사람들사이에 연결되는 따스한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을 때에,
사이버의 고독이라 할까 생각이 든다.

자신을 도울 지원자를 찾지 못하고,
그저 자신혼자 외로이 인생을 살아가느라 아둥바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늘을 향해,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며,
자신에 대해 도움은 커녕, 고독과 불안을 느낄때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우울증에 빠진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아무에게도 도움받지못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 대해 걱정과 불안과 절망이 밀려들때에,
사람은 자신을 있게 한 부모나,
고향이나, 혹은 자신의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노출된 자신의 나약한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자신과 함께 머리를 맛대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놀아주고, 즐겨주는 무엇이 없다면,
더 서글픈 자신의 삶의 현실일 것이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인 신이 보고 안타까워 하는 것은
인생이 고아와 같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그런데, 신은 그런 인간을 향해 도움을 주며,
나약한 존재인 인생들을 붙들어주려는 심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생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니,
살다가 지쳐 자신의 삶을 한하며, 외로움에 몸부림 친다.

내가 눈을 산을 바라보는데, 나를 도움이 어디서 오는고 생각해보니,
나를 도울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는 하늘과 땅을 지은 신이었으니,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신을 발견했을때에,
기쁨이 넘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점의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을 도울 신앞에,
자신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는 말을 되새기며,
도움과 지원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인생이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인생의 삶의 도전들(나약,실망,실패, 배신당함,사건 사고,
자신의 스캔들로 인한 설자리를 잃음, 목표미달에서 오는 좌절,
불안에서 오는 절망,알수 없는 고난,
매섭고 몰아친 고통, 엄연한 현실로 다가올 죽음 등)을 끝내 극복하고 승리하며 나갈 것은
신이 자신의 도움이며 자신을 지키는 자로 자신의 옆에 있기에, 그렇다.
인생이여, 도움을 얻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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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역사의 시간속에 여러가지 동기로 전쟁이 일어난다.
침략의 동기로 혹은 나라사이의 갈등이 동기로 아니면,
혹은 악한세력의 폐해를 막기위한 선한동기로 일어난다.
악을 제압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선한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은 세상의 악에 대한 심판적인 현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구약은 마치 하나님이 전쟁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며,
실제, 하나님은 인간사회이 악을 심판하고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셨다.

인간사회에 나타난 전쟁은 인간사회의 타락의 하나의 현상으로
여러가지 동기로 인간사회에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투쟁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며,
인간사회의 악한 횡포로서 일어나기 도하며,
양육강식의 논리로 일어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삶의 필요악으로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에 힘의 균형이 깨어지며,
질서가 무너지고, 약자가 고통을 당하며,
평화가 무너지면 정당방위의 전쟁은 일어난다.
악이 힘이 있으면 그 악이 약자를 괴롭히며,
그 약자를 희생물로,이땅에 많은 악이 만연하며,
악인의 힘이 강해져 세상전체의 평화를 깨고, 뒤엎기 때문에,
선한세력의 선한동기는 약자를 보호하며,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정당방위의 전쟁은 그 동기에 있어서, 요구총족이 있어야 한다.
전쟁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전쟁의 목적수행에 있어서
정당한 요구충족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악에 대한 선의 징계로서 나타나야 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의 악을 제압하고,
악의 세력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며,
선한 세력이 통치하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선한세력의 편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폭력사용은 사용하는 자의 동기나 방법이나,
목적에 따라 바르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폭력사용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최소한의 사용이 되어야 하며,
인간사회에 비폭력사용을 따르는 정신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의 구축에 더 힘을 쓰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갈등이나 투쟁이 일어날때에,
우선적으로 비폭력을 따르며, 비폭력의 방법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의 더 큰 폭력의 폐해가 일어나는 경우는
선한세력측에서 정당한 폭력사용을 통해,
인간사회의 악의 영향을 제압하며, 평화의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전쟁은 폭력사용의 전형적인 실례이며,
폭력의 폐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평화는 상대적인 평화주의와 절대적인 평화주의가 있는데,
상대적인 것은 악의 실재와 공존 할수 밖에 없는 제한된 선의 평화이며,
그 평화가운데에는 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며,
선과 악의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상대적인 평화의 개념은 악을 제압하기 위한 제한적인 폭력사용이 허용되어진다.
절대적인 평화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악을 다 몰아내어,
선한 세계를 이룬 상태일 것이다.

절대평화주의는 주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의 표현이나
그의 사역의 표본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것 같아,
이세상에서의 악을 이기기 위한 선한 의도로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이땅에 평화의 상징인 사랑을 실천하셨으며,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보이셨다.
평화는 선한세력이 힘이 있을 때에,
인간사회에 악의 상징인 폭력이나,
불합리한 모순핍박을 물리치고,
사람을 존중하는 선한 사회을 이루어낼수 있다.
사실 절대평화주의는 악이 이지상에서 다 사라지기전에는 이룰수 없으며,
악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지상에 선과 악의 불균형이 깨어져,
선한 세력의 통치하에서, 평화가 이루어 질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주님의 가르치심은
그가 이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오셨으며,
오히려 그가 세우시려는 하나님나라는 전투적인 정신속에서,
하나님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면서,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선을 이루는 상징으로
비폭력이나, 사랑을 내세우셨다.
그렇지만, 그의 가르침안에 있는 전반적인 하나님의 정신인 전투적이며,
영적인 전쟁이며, 악에 대한 선의 투쟁으로 이해되어진다.

주님이 이 땅에 검을 쓰는 자는 망하리라 하셨는데,
이말씀은 검을 가진자가 악을 행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 쓰일때에,
주님이 검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으며,
이말씀의 배후에는 악한 세력에 대한
선과 악의 전쟁으로서의 징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며,
어두움의 세력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이것은 또한 어두움의 세계에 대한 빛의 세계의 도전이며, 영적인 전쟁이다.

크리스챤은 절대평화주의자가 아니며,
전쟁에 대해서도, 선한세력의 정당방위의 전쟁을 부인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순과 불합리에 대해 비폭력적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입장에서,
악을 이길 선을 보여주는 사랑의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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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식과 노예근성

노예근성이라는 말은 누구나 듣기 좋아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인간다운 것을 따라 살지 못하는경우를 말하는것이다.
사람은 자유인이며, 자기주장을 하며,
자신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속에는 옛날부터 노예의지로 사는 것을 습관화하여,
자기책임이나,혹은 자기 자존감을 생각하지않고,
피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태도이다.

그러면 이태도가 어떻게 인간속에 있게되었나?
이 노예근성의 태도는 갖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들을 생각할수 있겠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의 지도이나, 혹은 권위있는 사람의 강요적인 일방적인 훈육이나,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적인 영향이나,
혹은 다양성이나 개인 자신의 개성을 무시하려는 전체 사회적인 분위기나
혹은 민족적으로 과거에 받은 식민지적인 사고태도에(책임을 가지고 있는자(정부, 사회단체, 가정의 부모)나 힘을 가진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이나, 주변환경에 대한 거부나, 혹은 무책임으로 대하는 태도) 의한 등 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그런 노예근성의 자세의 원뿌리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인한 결과로 인하여,
인간본성이 참담한 상태가 된 것이 근본적인 것인데,
인류의 시조인 두 사람이(아담:남자의 대표,하와:여자의대표) 신에게 잘못을하고 난후에,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인간 본성안에는 그 자유의지가 변하여,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때에, 노예의지 내지는 노예근성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옛날, 조선시대에, 어느 한 가정에 자녀들과 종들이 살고 있었다고 가정할 때,
그가정안에 노예와 자녀는 서로 신분이나 위치와 권위나,태도에 있어서 너무나 다를 것이다.
자녀는 자기 집안에 부모의 재산에 대해서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활용하며,
자기의 권한이나, 능력을 발휘하며, 그것을 발휘하면 할수록
그집의 부모에게서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며,
나중에는 부모의 재산이나 권한을 자신이 소유하며, 관리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노예는 주인이 주는 허락 한도내에서
자신이 빌어먹는 상태로 살며, 늘 종의 의식으로 살다보니,
모든 일에 자신이 자율적으로 할수가 없으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며,
종의 신분이라는 제한되고 구속된 자리에서
자유인으로 그 집안에서 자신의 삶을 즐길수가 없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지구라는 집에 관리인으로 혹은 책임있는 자녀로
주인의 뜻을 잘 받들어 살아가도록 하였는데,
인간들의 대적자이며, 유혹자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인간이 원래가진 자유의지의 남용된 죄로 인하여,
자기의 땅에(인생의 삶) 대한 자녀(신의 소생)의 영광된 신분이나 권한을 많이 박탈당한채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의지로 살아가게 된다.
노예의지의 사람이나 그의 삶의 철학은
무슨일에나 자신은 책임지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빌어 붙어사는 것처럼,
자신을 노예화하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인에 의한 태도나 보는 관점에 따라,
자신을 생각(판단)하고, 살아가는 경우라든지,
혹은 자신의 고유한 인간의 권리와 인간성의 권한을 포기한채로,
그저 자신이 알수 없는 인생의 미스테리와
인생의 무지와 무능의 한계내에서, 자신의 삶을 한하면서 살고,
인생들의 무거운 짐들을 스스로 혼자 감당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지는 대부분의 짐은 인간의 잘못으로 왔다:
절망, 좌절, 분노, 병고, 저주받은 인생, 실패에 따른 고통, 알수 없는 고난, 죽음 )

옛날에 어느 집에 종의 아들과 주인의 아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종의 아들은 우쭐되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잘난척하는데,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는 주인의 자손(소생)이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종의 신분이기때문에, 종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는 또한 주인의 하녀의 소생이라, 자신의 신분의 위치는
주인의 아들(소생)이면서,
자신의 권한이나, 신분에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처지이다.

그렇지만, 주인의 자유부인의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정실부인이라,
그는 아버지의 앞에서, 주인의 아들로 당당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신분이나 권한을 항상 활용하며,
주인의 집에서 늘 자신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신은 인간을 만들어서 이세상에서,
그들을 신의 소생으로 세우고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중에 자신을 신의 자녀로 여기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신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속에서, 눈치를 보며,
종의 의식으로 사는 인생들이 있다.

늘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 땅의 주인에 대해 늘 불만이다.
주인이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잘살게 하였는데,
그는 자신안에 있는 그노예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인생을 자신있게 혹은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인생으로서 자신의 신분확인이나 신분위치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분명한 자신이 주인이며, 주인의 자녀라는 자기의식을 가지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들 누구나,
자신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사에 자신있게 살지못하고, 노예의지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주인의 자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자신있게 살아가는지를 말이다.

신은 신의 소생인 인간들이 이땅에서 종의 자녀가 아니라,
이 땅의 주인의 자녀로 자신있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비록 힘든일이 있더라도,
태도만은 신의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그리고 자신있게 자신의 인생의 운명이나, 여건들을 맞이하고 살아가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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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일곱가지 사회악에 대해서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가장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살았던 인물중에 간디를 꼽을수 있겠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믿음을 고백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사적이든 혹은 공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인 활동이나 생활철학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몸에 배어
자기희생과 자기헌신을 통해
인도나라와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여, 인도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의 역활을 하였다.

그가 주장한 사회적인 악을 일곱분야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Politics without principle
원리나 원칙이 없는 정치를 두고 사회악이라 하였다.
정치는 권력과 힘을 통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와 국민을 인도하는 역활을 한다.
그래서 정치지도자가 누가되는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나, 방향이 달라질수 있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 지도자의 역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철학이 뚜렷한 것과 자기신념이나,
통치이념에 대한 분명한 원리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지도자를 따르는 국민들이 우왕좌왕하며,
사회가 혼돈에 빠질수 있으며,
무질서를 통해 국가나 사회가 발전하지 않고 퇴보하게 된다.

그러나 뚜렷한 원리와 공정한 원칙에서 출발하는 정치행위는
사회를 투명하게 하고,
또한 바른정치권력의 공정한 시행을 통해,
사회의 각분야에 좋은질서와 조화된 발전을 가져오게 한다.
인간의 정치행위와 권력은
인간사회의 전반에 걸쳐 좋은 영향을 인간사회의 모든 조직이나 활동에
건전한 생활철학이나, 모든 인간관계와 관리행위에 좋은 영향을 준다.

Wealth without work
불로소득이나 부당한 소득도 불의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일하지 않는 부도 사회에 필요악이다.
사회에 대해 공헌하지 않으며, 부를 쌓아두고,
자신만을 위하는 일도 사회적으로 거부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더 나아가, 부의 편중이 심화되면,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인 불균형이나 사회적인 계층의 갈등을 일으키고,
경제사회의 구조적인 악순환을 일으켜,
즉 부의 편중이나, 집중으로 인한 전반적인 사회의 여러계층에 대해 분배가 약화되어,
사람이 사는 여러가지 환경이나 여건들을 위협하게 된다.

그러나, 부를 쌓는 것은 부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부를 통해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부응하며,
균형있게 자신과 타인을 함께 위하는 것으로 활용이 되어져야 할 것이다.
부의 경제적인 혜택은 신앞에 사는 인간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삶의 요구와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기여하도록
부의 분배가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회구성원이 더불어,
공존공영하는사회의 구조적인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일조 할것이다.

Commerce without morality
도덕이 없는 상업행위도 또한 사회의 적이다.
자유 경제의 원리하에서 자본중심의 사회의 관심이 오로지 이윤을 극대화하고,
비지니스의 자본집중화와 이윤우선정책을 추구하기만하고,
기업의 사회의 전반적인 책임을 소홀히하는
그런 기업의 사회적인 활동은 비양심적인 처사가 되어,
사회의 발전에 저해가 될뿐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을 무시하게 된다.
예를들면, 사람들이 주로 먹는 공공의 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만드는 기업이 일정수준의 위생기준이나,
영양요소에 저해되는 요소를 사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일등이며,
또한 기업의 독점행위도 지나치게 되면,
다른 기업의 공존과 공영에 위협이 되어,
사회구성원간의 서로의 생존문제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상업행위의 이윤추구의 목표는 일차적인 목표라면,
인간사회의 질서존중과 인륜의 가치를 존중히하는 상업행위는
단지 상업자신의 일차적인 이윤극대화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확대를 통한 이차적인 경제활동의 공정한 기여를 통해,
그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인간사회의 공동유익과 발전에 기여하게 되어,
인간사회의 문명의 혜택아래 살게 하여,
인간의 삶의 행복과 윤택한 생활환경조성에 기여하게 된다.

Pleasure without conscience
인간의 쾌락추구만의 오락행위나,
문화와 예술활동의 비양심적인 행위는 인간의 성품을 건전하게 인도하지 않고,
인간성을 타락시키는 어두움의 쾌락의 도구로 인간을 전락시킨다.
인간에게 전전한 오락이 필요하고,
인간의 취미나 문화예술활동을 통한 자기표현이나, 자기발전에 기여할수 있다.
인간의 재창조(레크레이션)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인간사회의 엔터테이트멘트의 활용이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도리어 인간의 양심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인간의 고귀한 성품을 타락시켜,
범죄와 악행을 일삼는 인간군상들로 양산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래서 구조적인 개인인간의 악과 사회악을 낳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오락은 인간의 건전한사회활동이나
예술과 문화의 건강한 발전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건전한 오락이나 문화와 예술활동은
인간의 다양한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들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며,
그런 옳은 문화예술적인 표현양식의 발산을 통해
인간성의 성장이나 성숙으로 발전시키게 되어,
사회의 모든 관계나 조직속에,
풍부한 인간성이 넘치는 인간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일조하게 된다.

Education without character
사람의 인성교육을 무시하고, 단지 기능교육이나,
기술교육에 매달리는 것은 인간의 사람됨을 만들어가는 교육의 목적을 도외시하여,
비인간성의 인간들만 양성하여,
건강한 사회의 바로미터인 홍익(옳은) 인간개발에 실패하여,
인간이 사는 사회가, 밝아지지 않으며,
서로 믿고 신뢰하는 좋은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데 실패하기 쉬어진다.

반면에 교육이 향하는 목표가 인간속에 있는 좋은 덕성과 인성의 함양을 통해 이루어 진다면,
양심과 도덕성의일정한 수준을 갖춘 인간을 만들어 내는 교육을 할수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양산은 사회를 밝게하며,
사람다운 사람이 살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다음세대에 건강한 사회적인 유산과 좋은 문화를 후대에도 물려줄수 있을 것이다.

Science without humanity
인간됨을 존중하지 않고,
인간의 생명의 자유와 존엄을 중시하지 않는 과학의 추구또한 사회악을 일으키기 쉽다.
과학은 세상에 널려져 있는 감추어 있는 신의 신비와 지혜를 탐구하는 것으로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는 쪽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생명의 생존과 번영의 목적을 무시하는 과학의 추구는 인간생명을 위협하고,
인간사회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비인간적인 인간이 사는 삶의 환경이나, 사회적여건만을 조성하게 되기쉽다.
그리고 더나아가, 그런 과학의 추구가
단지 인간을 파괴하는 문명의 이기를 발견내지 발명하게 되면,
그것이 인간이 사는 사회에 위협이 되며,
그 문명이기는 인간이 사는 사회를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을 부추기며,
인간이 사는 사회의 평화를 위협한다.

반면에 생명존중의 목표아래 과학의 추구는
인간세계의 감추어진 지혜의 보고와 자산이 드러나,
사람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공헌을 하며,
인간 사회의 문명과 문화을 발전시키는
근본적인 사회의 과학발전적인 구조를 만들어가는 역활을 하게 된다.

And worship without sacrifice
희생이 없는 종교행위나 활동은 인간으로하여금,
자신이 신앞에 갖추어야 할 겸손한 태도와 책임있는 자세를 갖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런 종교적인 접근은 당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민하고 고통당하는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며,
모든 인간사회의 모든 문화나, 문명활동의 방향성에 좋은 공헌을 하지 못하며,
인간역사의 의미나 발전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교는 그 사회에서 도태되며,
당대의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희생이나, 자기변혁을 통한 종교적인 추구나 활동은
당대사람들의 당하는인간적 고통과 고민스런 문제에 대해 의미와 가치의해답을 줄수 있으며,
더나아가 종교의 영향력있는 힘으로 바람직한 인간성 발전과
당대사람들의 개인의 인간구원에 중요한 영향을 주며,
당대의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사회책임성을 통해
종교자신의 희망적 역활을 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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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인생

여러사람들중에, 인생반전의 삶이나,
역전의 용사로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긴 기간을 기다림속에 자신을 연마하며,
하루하루에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땀흘린 열심과
수고의 달콤한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경우이다.
또한 주위의 반대를 무릎쓰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경우라든지,
안되다고 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여, 자기목표에 도달하는 경우일것이다.

옛날에, 어느 집에 한 남자가 두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한 여인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다.
그녀는 제때에 남편에게 필요한 자녀들을 낳고,
자녀들을 통해 남편의 관심과 애정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 가정에 있는 다른 한 여인도 그 남자를 자신의 남편으로 삼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란 미운오리새끼 마냥,
자신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아픔속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 가정의 지붕밑에, 한남자와 두여자의 삶이란,
긴장과 질투의 시샘안에서 바람잘날없는 경쟁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자녀를 셋이나 둔 그 여인은 남부럽지않게,
집안에서 큰소리치면서 살며, 자녀없어 살아가는 그 불쌍한 여인을 무시하고,
구박하고,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아이들을 내세워 자신을 으시대며,
그녀는 불임의 그여인을 빈정대며, 불쌍한 그여인을 괴롭혔다.
그 가운데에 살고 있는 처량한 여인의 삶속에,
단지 남편의 사랑만이 유일한 낙이며, 희망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마음은 늘 이여인에게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그여인에게 쏟으면서, 그녀를 위로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행복하지 못하다.

자녀를 갖지 못하는 여인의 한은 아무나 이해할수 없듯이, 그녀는
마음대로 아이를 가질수 없는 자신의 몸을 원망해도 소용이 없다.
단지 자신의 운명이라 알고,
한 집안의 원수인 그 못된 여인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날 이 여인은 결심을 한다.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극복할 길을 찾아,
신을 만날수 있는 거룩한 장소인 성소에 나아가,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심과 더불어 그동안 쌓여있던,
한많은 여인의 울분을 쏟아내면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신에게 자신에게도, 아이를 달라고 미친듯이 구하였다.
거기에 있던 멍청한 사제가 그것을 보고,
여인에게 술취하지 않았냐고 다구친다.
그 여인은 답답한 가슴을 안고,
자신의 심정을 미친듯이 신의 가슴에 자신의 응어리를 던지며,
그 선한 신에게 자신의 절실한 소원을 아뢰고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렇게 인생자신이 지극한 정성으로 무엇을 구하면, 신은 거기에 응하는 분이다.

신은 그녀에게 귀한 옥동자를 선물로 그녀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그녀의 상처투성의 과거의 울분의 덩어리가
이제는 오히려 그 가슴깊이에서 나오는 신에 대한 고마움으로 바뀌어,
자신의 감사를 신에게 표현하지 않고는 보응할 길이 없어,
그녀는 그렇게 소중하게 구하여 얻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아들을
선뜻 신에게 평생을 신의 사역자로 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젖떼기가 무섭게 그아들을 신의 전에 갖다 바쳤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한많은 인생을 반전하는 멋진 홈런을 날리면서,
그녀는 이후에, 세아들들과 두딸들을 낳는 복을 신으로부터 받아,
다복한 인생을 살아갔다.
인생반전의 전형적인 예이며,
고진감래의 기다림속에, 행복한 유종의 미의 복을 받은 칭송받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여인으로 바뀌어 살게되었다.

야구게임에 한 팀이 계속해서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중에
마지막 공격찬스를 맞은 지는 팀이 투아웃에 이제는 이길 가망이 없는 상태에 있을때에,
그 팀의 마지막 타자가 등반하여,
역전의 홈런을 치는 장면을 보고,
관중들은 감격스런 희열을 맛보며, 야구의 묘미를 만끽한다.
인생에도 역전의 홈런을 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종종 우리주변에 일어나곤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인생이란 끝까지 경주하듯
마지막순간까지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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