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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생도 있구나

우리 주변에 내 팔자가 왜 이럴까 하고 자주 생각하는 경우나
그런 태도로 일관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안되도 그렇게 안될수가 있을까 하고
자신의 삶을 두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넘어져도 이마팍이 깨지고, 뒤로 넘어져도 뒤통수가 터지고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런 힘들고 고통스런 세상에 내가 왜이렇지 하고
자신의 신세타령을 하는 경험을 하는 경우도 있을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을 사는 노정의 길에서, 메몰찬 모래바람이 세차게 일어나고,
나무나 자신의 목을 축여줄 만한 오아시스가 하나도 없는 사막지역을 걸어가는 것처럼 버려지고,
찌긴 나의 인생의 발걸음이여,
하늘을쳐다보아도 쏟아날 구멍이 없어,
꽉 막힌듯한 생활의 현장에 자신의 몸을가눌길도 없어,
근심걱정에 한껏 찌들려, 살이 다 오르라 질 정도가 되어,
뼈가죽만 남은 자신의 몸뚱아리만 달랑있는 처지란, 상상하기 조차 싫은 경우일 것이다.

먼 옛날에 중동아시아에 어떤 의인(옳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던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자기관리(영성관리, 인성관리, 인간관계관리, 자녀관리,건강관리, 재정관리등)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범사에 빈틈이 없었고, 늘 남에게 유익을 끼치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봉사의 생활에도 충실하다보니,
당시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사람이 하루아침에 망해도 그렇게 망할수 있을 까 할정도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가지 재난을 한꺼번에 당하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그 사람이 집에 있었고,
그의 아들들과 딸들이 그사람의 큰 아들집에 함께모여 먹고 마시는 잔치하고 있었다.
그가 집에서 있는데, 밭에서 일하고 있었던 한 하인의 보고를 전한다.
그의 말인즉, 여러하인들이 넓은 밭에서 일을 하고,
그 옆에 황소가 밭을 갈고, 나귀들이 한가로이 먹을 것을 먹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 온 도적떼들이 들이닥쳐,
하인들을 거의 다 죽이고, 재산들을 빼앗아가 버리고, 자신만이 간신히 도망쳐 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있는데, 또 다른 하인이 달려와 보고를 한다.
맑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양들과 그 옆에 있던 하인들을 모두 불태워 죽게 되어,
자신만이 혼자 간신히 살아와 알려주는것이라고 한다.
이 보고를 들으면서, 그의 마음이 답답함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다른 소식이 들이 닥친다.

또 다른 하인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 다른 불길한 소식을 알려준다.
큰 떼의 세무리의 갈대아인들이 나타나서, 낙타들을 약탈하고, 하인들을 죽여,
자신만 또 간신히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럽고 불길한 소식을
바로 자녀들이 함께 모인 현장에서 달려온 하인이 전하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을 버티고 있는 네기둥들이 뿌리채 뽑히면서,
거기에 모여 잔지하던 자녀들이 모두가 다 하루 아침에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만 겨우 목숨을 건져 이렇게 달려와 전하는 것이란다.
웬 하늘에 청천벽력같은 재난이 그에게 불어닥쳐는가고 깊은 탄식가운데에,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내리는듯한 슬픔과 고통속에서 자신의 옷을 찟으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렇게 몇 날을 그 고통속에 있는 그에게 이제는 자신의 몸에 악창이 일어나
극심한 피부병에 걸려,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눌지를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거의 탈진 상태가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부인마저 그에게 당신이 믿고 섬기는 그 신을 향해 항의하지 않냐고,
그렇게 자신의 신실함만 지키면 되겠냐고 그에게 충동질한다.
자신을위로해주기는 커녕 옆에 있던 부인마저,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을 상하게 한다.

그런데도 그는 하늘에 계신 신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불평하지않고,
다만 자신의 처지만 한탄하고 있으니,
가히 그는 누구도 당하기 쉽지않은
그런 인생의 극심한 고난이나 고통에 대해, 굉장한 인내를 갖고 맞이하며,
그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결국에는그는 이 모든 재난을 감당하고,
나중에는 의젓이 사는 그에게 또 신으로부터 놀라운 복을 받아,
갑절의 축복속에 자녀들을 새롭게 갖고,
인생후반에 더 나은 인생을 통해, 탁월한 인생의 고난과
삶의 질고를 이기고 살았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인생들이
본받을 만한 삶의 철학을 터득한 사람이라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알수 없는 일들을 당하고,
힘든 상황하에서도 위의 사람처럼 흩트러진 자신의 삶을 추리고
인생을 맞대고 살기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도 신을 저주하다든가, 입술로 범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말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인생에 대해 저주하며,
신에 대해 모독하는 말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지 모를것이다.

위의 그 의인이 당한 일련의 고통스런 재난들은 인생들이 그 원인을 알수 없지만,
신의 책은 인생들에게, 인생의 삶의 배후에 있는 악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명히하고 있다.
그 악한존재는 그 의인의 의로운 삶을 보고 질투하여,
신앞에서 그 악한존재가 그의인의 의지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런 일련의 시련들을 잔인하게 행하여,그 인생을 괴롭혔다.
그 악한 존재가 하는 일이란 지금도, 인생들을 실컷 이용해 이 땅에 악을 자행하며,
인생들의 삶들을 파괴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하는 일들을 밥먹듯하고 있으니.
불쌍한 인생들은 알수 없는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나,
악한 존재의 활동에 대한 이해와 경각심을 갖고,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나도, 결코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거나,
하늘을 향해 모독하는 말들을 삼가고, 주어진 자신의 삶을 힘들지만, 감내하다보면,
신은 반드시 그런 인생들을 돌보며,
그에게 목마르고 갈증나는 그의 목을 축일만한 물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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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건 나 때문이야

인생을 살때에, 하늘에 대해 한점 부끄럽지 않는삶을 살아간다면
후회없는 삶을 살아갈수 있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게 살지를 못하는 것이 인생들의 모습들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흠이 있고, 약점이 있으며,
자신의 몸가짐을 모든 사람에게 가장 이상적으로 하면서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이 온전하게 살게하는 것 중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과
문제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지 않고,
나에게서 찾아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살아가다면,
하늘에 대해서나, 땅에서 사는 많은 인생들 가운데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느 일에 잘못되었을때에 가지기 쉬운 경향은 그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인데,
이 경향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할때부터 생겨난 현상이다.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의 가정은 인간역사의 최초의 가정으로
그들은 신앞에서,먹지말라고 한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신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다.
그 죄를 범한 후에 그들 가정안에 서로 너 때문이야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신의 책임을 묻는 앞에서 아담은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이
자신의 부인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부인 이브를 탓 하였고,
이브는 열매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옆에 있는 뱀이 유혹에 못이겨
그 열매를 따먹고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뱀에게 전가하였다.
그후에 인간의 심성안에 자신의 잘못을 볼 줄모르고, 남에게 탓을 돌리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 가정이 깨어지는 안타까운 모습이 주변에 많이 일어나,
가정의 이혼하는 율이 점점 올라가, 허니문을 즐겨야 하는 신혼의 가정이나,
서로 함께 충분히 알았을, 그래서 정을 나누고 자식을 둔,
오랜기간 같이 살아온 가정이나 할 것없이 가정이 깨어지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의 불화의 문제의 원인은 바로 네탓이요라는 의식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잘아는 격언중에 똥묻은 개가 지저분한 것을 붙이고 돌아다니는 다른 개를 향해 놀려대면,
놀려대는 그 개는 자신안에 더 안좋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고서
남의 허물만 자꾸 들추어 내려는 심보이다.

나의 가정도 부부간 갈등이 있었다.
갈등이 일어날때마다,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부인탓이라고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반복되는 갈등가운데에 깨달은 것은 갈등의 문제에 대해,
나 자신에게로 문제의 원인을 돌리고 자신을 먼저 살펴보게 되어,
많은 갈등이 해소되었으며, 분쟁이 있어도 쉽게 화해할수 있었다.

과거에 바로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라는 노래의 가사가
유행하는 적이 있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일상생활에 사람은 자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책망을 벗어던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 주변에 실패한 사람들과 성공한 사람들의 기질을 나누어 본다면,
이 탓하는 문제하나만 가지고도 성공적으로 사는지 아니면,
실패하며 사는지를 분간할수 있겠다.
일이 안 될때에, 조상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다 보면,
어느 덧 자신은 자신스스로 안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움 당하는 자신이 부모를 탓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탓 해본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성공하는사람들은 늘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문제들을
자신에게서 찾아보고, 그것을해결 하려고 노력하여,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게 된 것이다.

사람이 온전한 상태에서 인생자신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은 없을 까?
그것은 자신을 책망하는 것에 대해서나 혹은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데에서,
자유로와지며,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다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신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품고 있을때에, 자신에 대해서도 불만족스럽게 살아가게 된다.

내탓이요라는 말이 유행처럼, 어느 종교단체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
내 탓이요라고 여기는 자세는 자신에게서 부터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서로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에 대해, 그 나타난 문제의 책임이나,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
휠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가기가 쉽다.

거울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각기 자기가 상상하는대로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볼수 있지만,
자신만은 자신의 모습을 볼수 없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어나, 거울앞에 다가가 얼굴을 씻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때에, 바로 너구나, 하고 자신을 살펴볼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순간에 자신을바라볼때에, 자신의 외모만 보지 말고,
자신의 내면까지 바라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고자 한다면,
지나온 삶의 과거보다 점점 나아지는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가꾸어 갈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을 알려고 노력하면,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
생겨난문제의 해결을 찾아가는 것은 먼저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면,
그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갈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온전하게 사는 것은 남에게 탓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했거나,
그런 남에게 탓하는 의식으로부터 초월하고 살면 가능하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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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자아상을 갖기를

빌리는 자신의 상담한 여학생에 대해 발표를 하였다,
그 여학생은 샐리라는 중학생이다.
그녀의 부모가 이혼한 상태에서,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새로 재혼한 아빠집에도 가끔가서 지내곤한다.
그녀의 새엄마는 여러가지 일로 바쁘게 지내는 고로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다.
아빠도 그녀에게 엄격하게 대하지,
자신을 사랑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자신을 키우는 엄마는 알콜중독으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살고 있으니,
그녀는 늘 사랑에 굶주려 있으며,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감히 멀게만 느껴진다.
그녀는 자신에 깊은 열등감에 빠져, 조그만 물건에도 그녀는 애착을 갖고,
갖고 싶은 물건에 대해 집착을 하지만,
그녀가 마음대로 갖고 싶은 물건을 살수도 없는 경제형편이다.
그녀는 외모도 별로 잘생기지 않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고,
그녀는 자존감이 낮다보니, 그녀주변에는 친구도 거의 없다.
그녀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좋은 친구가 없다.

이런 아이를 상담하여 도움을 주고 싶은 빌리지만,
그 또한 무력감에서 그 여학생을 충분히 돕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안타까워 하여,
자신의 상담내용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열등감에 대해 고백을 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의사이고, 형도 의사이며, 장인도 의사인 가정인데,
그는 그사이에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으로 자신에게 쌓여 있을 때가 많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자신의 형과 사이에서
부모들은 자기보다 형을 더 인정해주는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상실감이나, 열등감에 고민을 한 적이 많다고 한다.

미국에는 이런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자라,
자신을 건강하게 돌보지 못하고,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청소년시기에 자신의 자아상을 세우는 때에,
건강한 가정의 건강한 청소년들은 올바른 자아상을 세울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분열된 자아의식나 거짓된 자아상을 갖게 되어,
올바른 판단이나, 결정을 하지 못하는 습성을 갖는 자기표현을 하기 쉬어진다.

그런 청소년들은 자아에 대한 자존감을 찾는 것을 외부에서구하지 말고,
외부의 환경에서 오는 부정적인 것을 극복할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가치관을 세울수 있는 자아에 대한 개념을 갖질 필요가 있는데,
이런 건강한 자아개념을 세우는 필요한 가치관은 일정한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일관된 인생철학의 기준을 세우는 일을 독서를 통해서
혹은 주변에 있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보면 어떨지,

나도 사춘기에는 좋은 환경이라 할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당시에 독서를 통해, 책의 선생들에게 인생의 물음에 대해 질문을 하며,
앞으로 어른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한 건강한 자아상이나, 가치관을 가지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빌리나 샐리가 겪는 열등감의 문제는 많은 경우에 주변의 사람들의 잘못된 편견이나,
의식에서 자신에게 심어진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앞에서 누구나 존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자신만이 할수 있는 일과
그일을 할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지으신 신께서
우리안에 자신의 이메지를 갖고 태어나도록 하였기에
아무리 역기능적인 가정에 있는 자신이라 할지라도,
흔들리는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있게한 신과 대면하여,
거기에서 자신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찾아,
신이 베푼 해답에 따르는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에 따라
다시 건전한 자아상을 세워,
청소년기에서 젊은이의 세계로 나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간관계의 형성에 긍정적인효과가 나타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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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와 배려가 있는 사회

이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구의 당기는 중력에 의해
자신들의 존재가 지탱하고 있듯이
인간의 거의 모든 일들이 자연의 법적인 현상이나 작용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인생들이 자신들이 중력에 의해 움직이듯,
인생들이 특별한 배려가 없이 법이 명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이란
법적 준수나 법을 위반시 처벌만 기다리는 삭막한 인간생활로 여기게 된다.
모든 것이 법이 정해준 대로 살아야 하며,
배려는 없고, 법만이 영향을 주는 삶이란 사람을 더욱 고달프게 한다.

생활하면서, 특별하게 생일을 축하하다든가, 집들이를하다든가,
결혼기념을 축하하는 것은 평범하게 살기쉬운 일상의 생활에 의미와 활력을 불어넣어주게 된다.
특별한 날들이 없고, 그저 다람쥐 체바뀌돌듯이 변화가 없거나 무의미하다못해,
권태가 일어나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삶의 에너지에 충전이 필요하다.
그 삶의 에너지는 자신을 향한 배려나 혜택을 통해 얻게 된다.

사람이 중력의 법칙대로, 자연적으로 되어진 대로 살아간다면,
결코 보다 가치있거나, 보람있는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한 아이가 자라면서 수많은 희생과정성이 깃들인 부모의 돌봄이나,
가르침의 결과로 사람이 훌륭하게 성장하게 된다.
저절로 무엇이든지 그냥되어지는 법은 없다.
거기에 정성이 들어가고,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의댓가로 자신의 출세나 성공이 이루어진다.
그런 일들 가운데에, 서로에 대한 희생과 기대감이 있고,
또한 서로를 향한 배려가 있고, 혜택이 있고, 봉사가 있고, 섬김이 있다.

만일 지구의 모든 인생들의 삶이
단지 중력에 의해 자연의 법칙대로 돌아가는 대로만 살아간다고 가정해보면,
인생들은 잠시도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는 천재지변이나,
자연의 힘에 의해 떠밀려, 존재하기도 쉽지않을 것이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홍수가 나거나,
재해가 닥쳤을때에 조금만 더 도가 넘어가면,
더 큰 재난이나, 고통스런 상황을 맞이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고비들을 넘기는것이 우연히 이루어 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그 배후에는 신의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잘못에 대해 용서나, 용납이나,
혹은 사면이나 면책을 해주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행의에 대한 심판에 의해, 인간스스로는 설수 조차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때에도 매를 들고,
법으로 아이를 바로 잡으려 하면 우리의 대하는 잣대로 자신도 완벽할수 없을 뿐아니라,
아이들을 변화시킬수 있는 교육의 효과의 길로 유도하기란 쉽지않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을 용납해주는 너그러움이 있고,
비록 실수를 했어도,그들을 받아주는 부모의 아량이 있어야,
아이들이 그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실수를 용납하면서,
계속적인 격려가운데에 바른 길을 걸어갈수 있을 것이며,
발전적인 성장을 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고,
특히 인간의 인성개발(영성, 지성, 감성)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물리적인 법칙에 의존하는 법의 테두리가 아닌 관용과 용서의 배려가운데에
사람의 잘못을 고치게 되고, 사람들 자신을 변화시키며,
그리고 나아가서 그런 연약한 것들을 극복하고
자신을 보다 나은 단계로 발전시킬수 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계에 뿐아니라,
인간의 다반사가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관계나,
비지니스세계에도 서로 잘못을 용납해주고,
그들의 실력이나 노력을 믿어주고 하는 신뢰의 관계가운데에 비지니스가 성공하고
또한 사회도 발전할 것이다.
그렇지만 느스한 법적용이나, 안일한 법위반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일 어느사회든지 사람들을 엄격하게 구속하고 다스리는 법만 있다면,
그사회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사람을 질식시킬것이다.
인간의 잘못이나, 허물을 용납하지 않은 비판과
법적인 구속만있는 전체주의사회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숨을 돌릴여유도 없고,
그런 구속적인 법규망속에서 사람들은 노예처럼 자신들을 포기하고,
배려나 혜택은 없고 의무나 맹종만 있는 험악한 상태에서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에는
서로를 향한 배려와 격려와 관용이 있는가운데에 넉넉한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살아갈수 있다.
이런 모든 인간사회의 배려나, 혜택이나, 관용등은
그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신의 용서와 배려와 신만이 줄수 있는 은혜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에는 신의 배려나, 관용에 의해,
서로를 받아줄때에 그렇게 살아갈수 있다.
사람이 물을 마시고, 공기를 마시고, 하늘의 창공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활보하고 살아갈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은혜의 배려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법적인 구속의 힘보다는
사람을 옳은 데로 이끄는 종교의 힘이 올바르게 활용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때에,
그 사회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참된 삶을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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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감정에 대해

인간의 감정은 타인이나 사물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자기 표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감정은 사람의 마음이 집중할때에 나타나는 것으로
사람이 어느 사물이나, 정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이 감정으로 표현이 된다.
그리고 감정시스템은 두뇌에서 이성적 역활이 판단하는 것에 따라,
어느 사물이나 정보에 대한 자기인식에 대한 가치를 나타내는 시스템이다.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두뇌에서 작용하는 지속적인 신경조직의 활동을 통해,
특정한 방향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개인의 성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
사람은 어릴때부터 이런 두뇌에서의 감정인식이나 표현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서의 감정에 대한 자기규칙을 세우며,
감정을 운용하게 되는 나름대로의 자기성향을 세우게 된다.
즉 어릴때부터 감정의 표현의 훈련은 어른이 되어가는과정에서,
자신의 성향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감정을 조정하는 힘을 갖게 된다.

사람의 대뇌의 시스템에서 사람의 감각으로 부터 자극 받은
정보에 대한 의미의 평가나 ,
전달된 정보와 사물에 대한 가치인식를 통해,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
이 시스템에서 사람의 사회적인 접촉(바디랭귀지), 자기인식체계, 의식, 고양된 정신활동을 통해 감정이해가 형성되어진다.
사람의 대뇌의 왼쪽뇌에서 적극적인 감정을 감지하며 관장한다.
그리고 오른 쪽 뇌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감지하며,
사람의 얼굴의 표정과 감정인식을 관장하며, 감정을 조절한다.

감정의 표현의 단계에는 처음에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나
거기에 대한 반응에 대해 “지금 주의(인식)하는 상태로”
사람의 감정이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일이나 사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지난날에 겪은 자기경험의 기억들에 위해 평가하고
(사회적인 평가들을 포함함),
또한 감정의 표현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감각으로 부터 받은 정보에 대한 자극의 요소들,
미래에 대한 기대등을 포함한다.

감정의 기초적인 감정은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표현양식으로 볼때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뉜다.
감정의 긍정적인 것은 기쁨, 놀람, 흥미, 만족등이고,
부정적인 것은 슬픔, 분노, 걱정(두려움), 증오(싫증)등이다.
긍정적인 감정들은 자신의 그 감정들을 확대하는 데에 유용하며,
부정적인 감정들은 타인과의 소통에 조절된 자기감정을 맞추는데에 작용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런 감정표현들을 반복하면서,
정신활동에 있어서 자율적인 상태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개발하게 된다.

이런 위에서 언급한 이해 아래에서,
우리가 어느 일을 할 때에 이성적으로는 괞찮다라고 생각하는 일을
우리의 감정이 싫다라고 반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감정에는 의식적인데서 온 것이 있고,
무의식적인 것으로 부터 온 것이 있어,
그런 경우에는 우리의 이성이 감지못하는
무의식에서 온 감정과 이성의 인식차이 때문이다.

감정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속적인 감정적인 상태인 무드(분위기)라는 것이다.
이 무드(분위기)라는 것은 사람의 어느 감정이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 무드가 부정적으로 발전하여 병적인 상태가 된다는 것은
어느 감정에 자신이 조절할수 없는 상태까지 가서,
그 감정에의해 자신이 조절받게 될때에 발생한다(예: 불안, 우울증 등).

울고싶을 때에 우는 것, 웃고 있을 때에 웃는것,
기뻐할때에, 기뻐하는 것, 슬퍼할때에 슬퍼하는 것,
화가 날때에 화를 내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것을 표현하는 것등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표현일 것이다.
항상 자신의 얼굴이 심각하고 감정표현에 있어 자연스럽지 못할때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생활의 희노애락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이해하고, 대화하고, 인간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일에 습관화되지 않고,
억압시키는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때 부터 감정을 억제하는 교육을 받은 탓도 있을 것이며,
감정을 표현하며 부드럽게 하기보다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웃어도 울어도 극단적인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안에 감정이 정리가 되지않아,
그 감정들이 눌려있으며, 왜곡되어있어,
감정표현이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감성지능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특히 대인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자질이다.
그 감성지수는 자아의 높은 감정인식, 안정된 감정규칙,
그리고 건강한 감정표현을 포함한다.
타인과(특히부모와의 관계)의 안정적인 인간관계의 형성에 의해 자란 경우에,
감성지수가 높으며,자신있게 감정을 표현하며,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있게 대처하게 된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할 것없이 자신을 마음 껏 표현하게 하는 것,
특히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사람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며,
자신의 의견을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솔직담백하게 혹은 담대하게 표현할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또한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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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된 조국을 바라보며

사람은 태어나서 앞을 향하여 마냥 달음질하는 삶을 살아간다.
뒤를 돌이키고 싶지만, 과거로 돌아갈수 없다.
다만 우리가 과거를 추억으로만 기억할수 있다.
지나온 나날들은 우리의 기억속에만 남아있다.
과거의 축적된 삶의 유산들이 역사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앞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과거로 부터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똑같은 실수나,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무시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한국의 현재의 상태가
구한말의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있는 듯하다는 것을 시사분석가나, 역사가들이 이야기를 한다.
북한을 중심으로 펼쳐있는 여러국가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한국의 장래가 달려있다.
현시점에서 과거의 역사에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은
과거에 나타난 현상들이 현재에도 비슷한 현상으로 재현되기에 그렇다.
그것이 걱정스럽다.

구한말에 열강의 각축의 외교무대에 대비하여 국력을 신장하고, 외교력을 높여,
우리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남의 나라의 영향이나 지배에서 벗어날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한 것이 구한말의 조선의 우리나라였다.
앞으로 우리는 확실한 미래로 생각해볼수 있는 것은
반드시 남한과 북한이 하나로 엮어지는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 준비는 정부만 국회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거기에 대비를 해야 하는데,
남북의 문화의 차이, 생활수준의 차이,
국력의 차이등을 극복하기 위한 준비를 기울여 할 것이다.

과거의 분단된 서독과 동독이 통합된 독일로 연결될때에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통일비용도 만만치 않았으며, 동서독의 문화적차이,
생활수준의 차이등을 극복하느라 여러해의 힘든 일들을 거치면서,
그들은 서서히 통일된 독일의 모습을 이루어왔다.
그런데 동서독의 여러차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의 영향력이 극복은
서로의 국민들의 의식의 차이였을 것이다.
만일 남북한이 통일이 된다면,
결코 남한 사람들이 먼나라쳐다보듯이 북한 사람들을 대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의 형제요 핏줄을 나눈 동포인것은 부인할수 없다.

반미니,친북이니, 친미니, 반북이니 하는이념의 차이는 작금의 시대에
서로 자기진영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개념들에 빠지지 말고
민족의 거시적인 안목에서 남북한 의 상태를 바라볼 것이다.
진정 한민족의 구성원으로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의식은
역사를 통해 지내온 민족의 얼을 생각하여, 둘이 하나로 연결되는 과정에,
민족의 역사로 부터 교훈을 받을 뿐 아니라,
같은 과거의 역사와 유산을 공유하는 동족으로 함께
새역사를 다시 만들어 간다는 의식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 국민들의 의식속에 그런 반쪽의식과 같은 치우친 의식에 머물러 있다면,
신이 과거에 우리 민족이 타민족에 의해 억압을 받을 때에,
해방의 복을 주신 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당시 좌우로 갈리고, 각기 제각기 진영을 생각하다가,
전체가 왜곡되고 제한되어가는 민족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민족의 일원으로서
우리민족의 장래를 염려하여,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하며,
통일된 조국의 장래를 맞이하기를 기대하며,
또한 우리에게 통일의 시간이 갑자기 다가올는지,
아니면 서서히 다가올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그때가 우리앞에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과거에 민족의 억압된 상태를 풀어주신 신에게 다시한번,
이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사,
통일된 조국을 혼란없이, 그리고 서로 고통없이 맞이할 수 있도록
신의 도움을 간구하고 싶다.

과거에 우리세대는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의 노래를 그렇게 불렀어도,
그것이 현실로 다가올 것인가의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작금의 변화나 여러가지 사태는 이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막연한 현실이 아니라,
실현된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서로의 국한된 이념논쟁이나, 불필요한 편견에 빠져,
서로의 힘과 세력을 낭비하여 국력을 손실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이여 이민족에게 신의 복으로 통일된 민족의 국가로
태어날수 있는 국민역량이 되도록 민족 한사람,
한사람에게 바른 의식과 바른 가치관의 복을 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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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자녀에 대한 애정표현의 유형과 그 영향들

부모가 자녀(특히 어린 유아기에서 형성되기 쉽다)를
대하는 애정표현을 통해, 자기표현이나,
다른사람과의 감정교류와 마음을 연결하는 방법들을 자녀들은 터득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릴때에 그것을 통해, 인간관계의 형성을 어떻게 하는지를,
즉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방법을 배우게 된다.
부모의 양육에서 나타난 자녀에 대한 애정관계표현(감정교류와 상호 자아접촉및 영향)은
크게 네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다.

먼저는 안정된 부모의 사랑을 전제로 한 지속적인 애정관계인데,
이 관계는 부모가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자녀를 돌보며,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사랑이 변치 않아,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어 자녀들이 감성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자신들을 표현할때나,
정상적인 감정교류를 통한 인간관계를 형성할때나
사회생활에서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아주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어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거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건강한 관계나 교제를 형성하게 해준다.
즉 어릴때부터 부모와의 정상적인 관계안에서 돌봄을 받은 자녀가
나중에 인간관계나 교제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건강한 대인관계를 형성할수 있다.
이런 경우의 자녀들은 부모가 그들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대인관계나, 능동적인 자신을 표현하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자녀를 더 건강한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키울수 있다.
만약 자신이 이런 부모가 아니라면
자신이 먼저 주변사람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고,
자신의 과거의 부모와의 관계를 점검해 보고 자
신을 다시 한번 재양육하는 과정을 통해, 건강한 감정적인 자신이 되어,
가까운 사람과 애정을 자주 나눌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감성적으로 바르게 표현하지 않은 경우이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가는마땅한 사랑표현을 주지않고,
자녀가 부모의 사랑과 애정의 결핍증을 갖도록 하여,
부모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그리고 자녀들의 자아개념속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한다.
그래서 그 자녀는 자라면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우기가 쉽지않다.
이런 경우는 괜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정상적인 애정관계나, 정을 표현하기를 꺼려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을 깊이 사귀지 못하는 인간 감정교류에 지장을 받기도 한다.
자신의 머리에 이성적으로는 사람을 사귀고 싶고,
사람에게 친근하게 대하고 싶은데, 자신의 감성이 따라 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상처난 경험도 있을 것이고,
따뜻한 애정을 받은 기억을 갖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표현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감정표현을 하는 것을 배우고, 주
변에 있는 사람들과 따스하고 정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여,
인간관계나 감정교류에 대해 자신감을 갖도록 할 것이다.

다음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표현에 있어서 안정적이지 않고,
불안한 관계로 형성되어, 부모의 필요를 따라 애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자녀들은 부모의 애정표현의 피해자가 되어
자녀들은 남들과의 사랑표현이나 애정관계나,
우정관계를 유지하기가 정상적으로 갖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경우의 사람은 잦은 인간관계의갈등을 겪기도 하고, 오해를 사기도 한다.
이런 자녀를 둔 부모들은 먼저 자녀에게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애정표현을 알것이다.
자녀는 주변의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건강한 관계나 교제를 갖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킬때에, 부모는 그문제가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인정하고,
먼저 자녀에게 건강한 애정이나 관심표현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는 어릴때에 부모로부터 좌절되는 감정적인 경험들이 많아서,
자신안에 감정적인 불안을 떠안고 있다고 할수 있다.
신경질적인 사람들이 특히 그들이 애정에 굶주려 있는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불만이 다른 사람에게 표출되어,
다른 사람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그로 인하여 불만과 갈등을 갖게 된다.
어린 시절의 상처들로(성적인것이나, 혹은 육체적 학대들)로 인한
억압된 감정들을 끄집어 내어 그것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해소하는데는 기억치유나, 내적치유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기억치유나, 내적치유는 억압된 감정치유에 도움이 된다.
먼저 이것을 본인스스로 하려면
내면의 자신에 대한 일기를 써본다든가?
혹은 기도나, 혹은 그것을 가지고 신(하나님)에게 나아가,
그가 베푸는 자비(사랑, 은혜)의 힘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부모와 자녀의 애정이나 사랑의 연계표현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경우이다.
이경우는 부모에게 상당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이며,
부모도 또한 정상적인 자신의 부모로 부터 애정이나 돌봄을 받은 적이 없다.
부모들은 자녀의 인격형성이나, 대인관계감정교류의 형성에 혼란만을 초래해
자녀들은 거기에서 쉽게 벗어날수 없다.
이 아이들은 이성적, 감성적표현에 있어서나,
행위표현에 있어서도 정상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자신안에서 분열적인 자아 증상을 통해,
깊은 정신적인 갈등과 정서적인 혼돈과 불안을 경험한다.
이런 경우는 대개 부모가 건강치 못한 정서생활과
비인간적인 인간관계나, 문제의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중독에 빠지기 쉽고,
정신적인 질병에 걸리기 쉬운 성향을 갖게 된다.
이런 경우는 전문적인 상담인을 찾아
부모자신과 자녀가 동시에 자아상담이나,
인격상담등 전문적인 상담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나 자녀는 인생생활에서 겪는 문제를 다른데서 찾지 말고,
자신의 자아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하고,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도록 주변사람들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하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정상적인 인간관계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주변부터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관계들을 정상적으로 할수 있도록
회복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이성과 감성이 두뇌에서, 작용하는 존재인데,
이성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데는 감성적인 요소들이 더 영향을 준다.
이 모든 사람들의 정서적인 문제에
사랑의 힘이 가장 큰 힘이며, 치료제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정서적인문제들을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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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통치하심이 의미하는 것

시편97

주님이 통치하시니 땅이 즐거워 합니다. 

온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섬들이 주님을 기뻐합니다. 

주님이 계시니, 세계가 든든하게 서있습니다. 

내일에 세상에 종말이 와도,주님이 계시니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지구가 뒤틀리고 천체가 흔들려도 우리는 요동치 않습니다. 

온우주를 창조하신 이가 계시니 혼이 빠질일이 생겨나도

나가 떨어져 자빠지지 않습니다. 

 

땅에 어두움이가득하고, 악이 횡횡하고,

정의가 땅에 떨어져 얼굴들고 살수없을정도가되더라도,

세상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이 계신주변은 마치 흑암에 둘러 쌓인 것처럼,

흔적도 없이 펑뚤린 하늘처럼 아무도 없는 적막한 하늘의 창공에서도,

주님이 보이지 않으신 것같으나, 거기에 주님의 보좌가 놓여 있으니,

그가 공평과 정의로 세상을 내려다 보고 계십니다. 

 

그의 보좌 앞에 불이 나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이

주님의 불꽃들이 적들에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발하는 빛은 전광석화와 같이 땅에 비치며,  빛에 환히드러나고,

그의 앞에서, 두려워 떠닙니다. 

옛적에 예수님 믿는 예수장이들을 잡으러 가는 길거리에서 살기등등한

바울에게 비쳐진 빛처럼, 주님의 빛은 인간의 어두움을 속속 들이 비쳐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휘황찬 빛앞에 벌거숭이가 되어 드러납니다.

 

높은 산들이 자신들의 높음을 자랑하고, 온갖 것들로 장식하며, 방어하며,

자신을 치장을 하여도, 산들을 지으신의 눈아래에서,

자신들의 높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그것은 다음과 같은 현상입니다. 

세계의 높은 산들처럼, 온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도, 세력인들도, 권력인들도,

유력인들도 주님앞에 나약한 존재로 드러나며,

그의 심판하시는 역사앞에 촛밀 녹듯이 그들의 간장이 녹아내리듯

그들의 마음이 떨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은 그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다만 육신의눈만을 가진 인간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존재는

온만물가운데에 충만히 계십니다. 

미물도,미생물도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흠숭합니다. 

 

하늘은 주님의 (옮고 바름) 선포합니다.

우리가 푸르고 맑은 하늘을 쳐다볼때에 우리는 당신의 마음을 보는 같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하늘의 푸른 창공처럼 투명하며,

밝음이 드러나듯이 옮음으로 가득차 계십니다. 

모든 인생들이 가운데에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분의 의가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의앞에 인간의 불합리도, 억울함도, 강압적임도, 인간적인 모순도

봄눈 녹듯 녹아집니다.

 

이런 놀라운 주님을 어리석은 인생들은 한갖 깍아만듯 나무토막이나,

석돌같은 존재로 만들어 그것들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자랑하는 인간의 무지가 모든 신들을 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을 지으신 창조주는 섬기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들위에 가장 으뜸이신 주님은 우상섬김들을 통해

인간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을 창조하신 신앞에 갔을때에 그들은 놀라운 어리석음에

자신들을 가눌길 없을 것입니다. 

정작 자신들을 있게 하신 창조주를 몰라보고,

평생을 어리석게 억울하게 자신의 인생을 두고 후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조주를 찾아, 발견하고, 만나서, 그를 알아보았던 사람들은 즐거워 합니다. 

주님이 계신 땅에서 주님을 만나,

그분을 통해 자신이 건짐받은 인생들은 기뻐좋아합니다. 

인생들이 겪어가는 무지, 가난, 곤란, 미망, 허망, 억울함, 황당한 고통, 몸서리치는 고통,절망, 패배,좌절, 죽음을 통해 건짐받은 인생들이 주님을 향해, 기쁨으로 노래합니다.  땅의 보호받아야 인생들이 사람들의 딸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나약한자라고 여기고

주님의 보호와 보장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다행한 일이 었는지를 주님이 온세상을 심판하는 그날에 가서야 알게 될 것을

바라보고 기뻐 좋아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높은 곳보다 높이 계신 분입니다. 

주님은 모든 신들가운데 높임을 받으십니다.  인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주님은 가장 높임을 받습니다.

인간이 다하는 온갖 정성과 찬양이 담긴 곳에서 주님은 높임을 받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고귀하고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흠송안에서

주님은 높임을 받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인생들을 주님은 보존하십니다. 

그는 주님을사랑하는 무리들의 영혼들을 영원까지 보존하시며,

그들을 괴롭히는 온갖 적들로 부터 보호하시며,

마지막에 죽음과 지옥의 저주에서 까지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빛은 의의 빛이라, 빛을 받는 이마다, 마음이 의로 가득차게 됩니다. 

주님을 기뻐합니다. 의로운 인생들은 주님의 구별되고 거룩한 이름을 두고 감사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을 의미합니다. 

그는 인생들을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함께 하시는 주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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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식에 대한 생각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을 한다.
이말은 무슨 직업이든 직업을 가진 당사자에게는 가치있는 일이며,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할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는일이 무슨 직업에 종사하는 일이든, 그일이 자신에게 맞는 일이라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중요한 일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일에 열심을 낼 것이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완성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자기완성의 한 단계나, 과정으로서의 직업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며,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무숙자에게도 자신의 직업이라 할수 있는 일이있다.
미국 노스엔젤래스 도시에서, 많은 노숙자를만난 적이 있다.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흑인 노숙자가 차유리를 닦으려고, 다가와, 열심히 차의 앞유리를 닦으면서,
우리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짧은 봉사지만, 자신이 한 일에 댓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한국에도, 아이엠에푸시대이후에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직업을 잃은 많은 노숙자들이 생겨났다.
노숙자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노숙자로서의
노하우를 갖추는 직업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 많은 직업이 있다.
천하거나, 귀하거나, 할 것없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있으며,
그일이 자신의 생존과 결부되어 직업을 유지하고 살게된다.
직업에 대한 의식은 크게 두가지태도로 생각해 볼수 있다.
그하나는 천직이라는 직업의식과,
그리고 또 하나는 잠시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몸을 담고,
그 직장의 일을 일시적으로 종사한다고 생각하는 철새 직업의식이 있다.
그렇지만 직장인들은 자신의 어느 직업에 종사하든,
자신의 의식에 따라, 그 자신의 직장에 종사하는 태도에 영향을 주고,
그 태도는 자신의 직업의 모든 부분에서, 업무의 결과의 차이로 나타난다.

경력으로서의 직업의식은 자신이 그일을 하므로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다.
어느 한가지 일에 오랫동안 종사하다보면, 그일에 익숙해지며,
그일에 대한 여러가지 일에 대해, 노하우를 터득하는 일 일것이다.
자신이 종사하는 직장에 대한 애착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숙련이나,
일의 습득이나 직업을 통한 자기 발전을 꾀할수 있다.
그런데, 직업에 종사하면서, 계속적인 갈등이나,
자기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때에는
그 직업에 몸담고 있는 기간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직장생활이 시작단계인 경우에는 다른직업을 찾아가는 것도 좋을 듯하며,
중간단계의 기간에서는 쉽게 직장을 옮기지 못할 것이므로,
나름대로 그 직장에 적응하여, 오히려 발전의 기회로 삼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은 승진에 대한 도전이나, 준비를 하는 일일 것이다.
마무리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직업을 놓고서,
다시 한번을 자신이 해야 할일을 찾아가는 기간이 필요하다.
직업을 떠나, 자신만이 할수 있고, 평소에 직장이 있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또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할 일을 찾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직업을 너무 구분하여,
노동을 하는 것이나.기술적인 도공이나, 기능공을 천시하여,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고, 천시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기술직이나, 전문기술인들이 대우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무엇이든 그분야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숙련을 갖고서 일을 하는 경우에
전문인으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요즘은 무슨 직업이든,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계속적인 자기발전의 노력을 통한 전문적인 숙련과
자신만의 할수 있는 업무의 세계의 영역을 세워 나가,
그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대우받을 것이다.

조기 은퇴하는 말은 우리모두에게는 듣고 싶지않은 말일수 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은퇴를 하면,
자신의 인생은 일과는 상관없는 그저 소비하는 인생으로만 여기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태도의 사람이 은퇴하는 순간부터 사람이 갑자기 늙어지다든지,
그리고 삶의 의미와 의욕을 잃어버려, 할 일없고 쓸모없는 인생이라고 여기게 되어,
자신을 불행한 사람을 여기게 다.
그러므로 직업을 떠나, 자신이 평생하고자 하는 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삶의 지혜일 것이다.
운동(육체적, 정신적, 영적)을 계속하다든지, 사회봉사를 한다든지,

아니면 종교적인 활동에 몰입하다든지,
자신이 직업의 세계를 떠나, 자신만이 하는 고유한 자신의 일을 세워놓고,
그일을 하면, 은퇴와 상관없이, 남은 인생의 날들을 보람있게 보낼것이다.

직업의 세계만의 영역을 초월하여,
사람은 인생이라는 직장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따라,
세상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아,
그 일을 하며, 자신의 일생을 보낸다.
자신이 그저 이세상에 태어난 것이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일이 있고,
그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 있다.
이런 사명의식을갖고 사는사람과 그런 의식이 없이 사람과는
살아가는 삶이 서로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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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성경교수법

성경을 가르칠 때에 교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학생들의 관점으로 연결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교사는 성경의 세계에 대한 건전한 이해와 자기 개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성경의 세계로 유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세계에 대한 학생들의 가지고 있는 기존 세계관을 수정하여
성경을 이해하는 세계관으로 성경을 보게 하는
성경적 창조적인 교육 방법을 추구합니다.

교사는 먼저 성경전체에 대한 주제별적인 것들과
성경파노라마적인 계시 발전에 개괄적인 이해와
그 성경적인 개념들에 대한 기본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교수에 대한 개성적인 준비는 말씀에 대한 자기의 신앙과
그리고 평소에 교사가 갖고 있는 성경 다루는 바탕이 되는 기본 개념들을 세웁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루는 교사의 태도는 교사가 전하는 내용이상으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며,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교사의 접근 방식은 중요한 가르치는 자의 메시지의 도구인 메신저로
교사가 성경책을 대하는 자신의 이해방식에 따라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고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하며
또 전혀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전달자의 매너리즘(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릇된 태도)이나
한계상황(자기도 이해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전달하는 데서
오는 교사의 미숙)에 빠집니다.

성경을 단지 학문이나 문법이나 문서로만 다루려는
학문적인 접근방법이 있는가 하면, 성경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혹은 철학적인 책으로 여겨, 관념적인 머리로만 이해하는
지식전달위주의 방법 등은 성경이 기록된 말씀의 세계에
넘어 있는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메시지를
건지지 못하는 경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말씀으로 문자 속에 있는 살아계신 말씀이신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그 속에서 그분과 교제하며 대화하여,
그 책 속에 있는 그분의 생명의 기운(성경은 성령의 사용하는 도구로
활용될 때에 메시지가 살아있는 말씀이 됨)을 경험할 때에
비로소 그 책 속에 있는 내용의 말들은
주님의 말씀으로서의 인격적인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교수법의 접근방법: 성경을 대하기 전에 성경교사와 학습자가
삶의 현장에서 이해하고 경험한 것을 나누는 단계,
배울 성경책에 대한 설명적인 단계, 그 책의 내용에 대한 이해력을 돕는 단계,
그리고 그 배운 것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게 하는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교사는 가르칠 교육에 대한 계획적인 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마스터 플랜을 갖고서 사람들을 인도하듯이,
성경교사는 자신의 가르침의 목적이나 내용과 결과에 있어서,
일관된 교안을 세울 것입니다.

가르침에는 네 가지 가르침의 단계들의 성취를 위해 각각의 목적과 방법등을 세웁니다.
서론적인 나눔의 단계에서는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과
유사한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기존이해와 경험을 나누며
그들의 갖고 있는 선입관을 교사가 이해하고,
교사는 앞으로 가르침을 받을 내용을 통해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파악하는 과정으로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아갑니다.
그 그룹의 수준에서 배워야 할 필요적인 부분들,
그리고 교사를 통해 성경에서 배울 내용에 대한 이해의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학습자들이 왜 그 내용을 배워야 하는 지를 설명해주며
실질적인 성경공부의 단계로 나가게 합니다.

학습자들이 제기했던 질문이나 필요에 대한 그 가르칠 내용에 대한 의미와
그 내용에 나와 있는 용어이해와 그 내용의 문장이나 단락 분석을 통해,
전체적 개괄적 이해를 돕는 자료들을 제공하면서,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흥미를 갖고서 자신들이 알고자 하는
몰입하도록 시청각 교재나 교사의 짧고 명료한 강의나
혹은 학습질문법이나 문장이나 문맥 설문 조사 등으로

학생들이 쉽게 성경의 내용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학생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이해했던 내용들을 정리하여
자신들이 취할 내용과 필요치 않는 것들을 분리하여,
그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거나 자신들이 갖추어야 할
이해의 관점을 갖도록 학습자들을 그룹을 통해서
혹은 개별적으로 케이스 스터디를 하거나,
자기 역할 놀이등으로 그 말씀의 가르침을 실제 적용하는 단계로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학생들의 반응들을 점검하여, 무엇이 문제이며,
혹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과정을 가지면서,
교사는 학생들의 피이드백을 통해, 다시 그 가르침의 내용들을
재차 강조하거나 학생들이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는 실제적인 실행방법이나
적용 사례 등을 구체적으로 적어보면서 정리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가르침에 대한 자기 헌신이나 결단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그래서 그 내용들이 학습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다짐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학생들을 그 가르침으로 복을 빌어 주며,
그 말씀의 살아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격려 합니다.

교사는 이제 전체적인 교수의 흐름이 단계별로 무리없이 진행되었는 지를 점검하며
무엇이 부족 하였는지와 강조한 부분들을 정리하여 다음 성경공부에 도움을 제공하는 자료로 남길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가르침의 방식은 단순 명료하게 진행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교사 자신이 그 가르침을 통해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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