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소신과 인내심

* 이 글은 뻐꾸기님의 [공친 날] 에 관련된 글입니다. 

 작업환경측정 초과를 둘러싸고 우리 과와 옥신각신 하던 사업장이 어제 결국 계약을 해지했다고 한다. 나야 계약하고 한 번도 못가보았기 때문에 특별한 아쉬움은 없지만 직접 회사측과 부딪힌 산업위생사와 우리 과장의 마음고생은 상당할 것이다. 


 그렇게 떨어져 나간 사업장을 덜컥 받는 다른 산업보건기관에 대해서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게 개인소유 병원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대학병원에서 그럴 때는 암담하다. 윤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업장은 서로 받지 않고 해당 산업보건기관을 통해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상도덕이지만 쉽지 않다.

 

 우리 과장의 입장은 단호하다. 사업장이 떨어져나가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원들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어차피 그렇게 다른 기관으로 가면 문제가 은폐될 뿐이니 차라리 우리가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밀고 당기고 하면서 개선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제 떨어져 나간 회사처럼 다국적 기업소유의  상당한 이윤을 남기는 경우에는 인내심보다 분노가 더 커지기도 한다.   

 

 오늘은 오랫동안 벼르고 별렀던 모 대기업 소속 회사를 방문했다. 여러 하청업체에 생산라인 하나씩을 할당하고 본사는 관리만 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그 곳의 작업환경은 웬만한 중소기업보다도 훨씬 더 열악한데 도대체가 접근이 불가능하다. 우리더러 와서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식이다. 산업위생사 출신의 보건관리자는 말을 어찌나 현란하게 하는지 듣다 보면 정말 보건관리가 잘 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자기는 집체교육은 절대 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때는 법을 무시하겠다는 발언을 당당히 할 수 있는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

 

 오늘은 우리 산업위생사와 작업장 순회점검을 하고 나서  지난 2년동안 숱하게 해결을 촉구했지만 반응이 없는 문제들을 다시 한번 적었다. 같은 말 자꾸 쓰려니 팔아프다고 투덜거리면서 누가 더 빨리 쓰는지 보자고 하며 웃었다.  업무보고서의 마지막에 안전보건총괄책임자 미팅을 요구했다. 한 작업장에 여러개의 하청업체가 있는 경우 안전보건을 총괄하는 책임자를 두도록 되어있는데 보통은 공장장급으로 선임이 되어 있다. 우리 간호사와 산업위생사가 그동안 보건관리상의 문제점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보건관리자가 바로 며칠전에 협력업체 보건관리 지원 시스템 구축안에 대한 결재를 받았다며 앞으로 다 잘 될 것이라고 큰 소리치길래 들어보았더니 관련 서류를 근사하게 꾸미겠다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시스템의 구축과 함께 실질적인 산업보건활동을 촉진시킬 수 있는 계획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보건관리자는 자신한테 모든 결정권이 있다고 하면서도 안전보건총괄 책임자 미팅요구에 대해서 은근히 신경쓰여 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 '그래, 반드시 인사고과에 네가 임무를 방기한 사실이 반영되도록 해주마'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정기적인 사업보고와 협의는  총괄책임자의 의식을 바꾸고 사업장의 안전보건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당신이 일하는 데도 훨씬 더 나을 것이다'라고 달랬다. 불행히도 그는 같이 가야 할 파트너인 것이다.

 

 이 회사를 방문하기 며칠전 과장과 상의를 했었다. 이렇게 형식적인 보건관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진검승부를 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몇천만원 손해보는 일에 대해서 과장이 나보다 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해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우면서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잘 설득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는다.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산업보건의 핵심 문제중 하나는 전문가들의 도덕적 해이와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조(갑과 을의 계약관계)에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산업보건을 오래하면 할 수록 체념과 무기력에 빠지게 되고 아차 하는 사이에 비윤리적인 일의 방조자 혹은 공범 혹은 주범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나처럼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해본다고 하면서 세월만 가든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일까?  사업주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돈과 법이다. 산업보건기관에 일정한 요건이 충족되면 근로감독을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작업환경초과나 특검 유소견자 발생 또는 근로감독 요청권 발동시에는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일정기간 산업보건기관을 바꿀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산업위생사 선생님은 근로감독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도 잘 안될 것이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도 전국의 근로감독관들이 과로에 시달리고 있고 이 문제는 산업보건관리 관련 모든 연구보고서에서 한 번씩 짚고 넘어가는 문제이다. 도대체 근로감독관 수는 왜 안 늘리는 것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