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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검진에 의사가 한시간 이상 지각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전선제조회사. 행여 지각할까 서둘렀더니 회사 도착 시간 6시 27분. 검진 시작은 7시인데...쩝 너무 일찍 왔군.
이 회사 보건담당자는 안전관리자로 마음씨 착해서 살찔 겨를이 없는 빼빼마른 총각이다. 무슨 이야기만 하면 ‘아시잖아요, 어쩔 수 없는 거’하면서도 나름대로 노력하는 편. 작년에 있었던 식중독 사건으로 나에 대한 원망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다. 약 60명의 작업자들이 설사, 복통, 열 등의 증상을 호소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는 전화를 받고 중앙의 관련기관에서 일하는 선배 언니한테 자문을 구한 뒤 보건소에 신고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더니 엄청나게 망설였다. 신고 안하고 과태료 200만원의 위험을 무릅쓸 것인가, 신고하여 관계기관에 시달릴 것인가 고민한 것. 그런데 선배 언니가 보건소에 직접 전화를 해서 상황파악을 요청하는 바람에 신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보건소에서 나와서 ‘별 하는 일 없이 귀찮게 했고', 작업자들의 변검사 검체 채취를 안전관리자에게 직접 하라고 시켜서 출근하는 작업자 붙들고 검체를 받느라 생고생을 했다고 한다. 사후조치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 이상은 없었다며 투덜투덜. 내가 선배 언니한테 일르지만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데 어쩌구 저쩌구 했다. 그래도 평소 작업자들의 건강과 안전에 대해서 나름대로 성의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별로 밉지 않았다.
2. 보건관리 현황
그러나 이 회사의 건강과 안전은 별로 진전이 없다.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총무과장이란 사람은 막무가내 조폭형. 공장장은 자신의 고혈압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지만 작업환경에는 별 관심이 없다. 3교대 근무에 점심시간은 딱 30분이고, 작업중 건강상담은 안된다고 하여 우리가 못 만나는 만성 질환 요관찰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주기도 했다. 노동조합은 어찌 그리 한심한지 매달 있던 안전보건교육시간을 없애는데 찬성하여 우리가 그나마 활용할 수 있던 시간도 없어졌다. 근골격계 유해요인 조사를 한 뒤 상담을 거쳐 요양 대상을 통보하고, 작업장 개선 권고안을 주어도 아무 반응이 없다. 몇 달 동안 어깨가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았던 한 작업자가 회사측에 자기가 아프다고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도 최소한의 활동만 하고 있다. 가을에 검진이 끝나면 3주에 걸쳐 두 시간씩 검진 결과 설명회와 함께 보건교육을 하는 게 그것이다.
3. 오늘 검진
오늘은 보건담당자가 30분 늦게 와서 검진시작이 늦었다.
#1. 이제 천연기념물이 되다시피한 정규직 고연봉(?) 미화원 아주머니들은 여전히 구박받으면서 자리를 잘 보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뇨병인 분은 노력하는데도 혈당조절이 진짜 안되고 있고, 고혈압인 분은 체중조절을 해야 하는데 일이 힘들어 밥 안먹고는 못한다 하신다. 헬스클럽 다니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과연?
#2. 외주품 적재작업을 하는 입사 11년차인 남자는 어깨 통증을 호소한다. 500킬로그램에서 1톤이 되는 중량물을 살짝 미는 작업을 하루 100회 정도 하는데 제품 특성상 개선의 여지가 없는 공정이다. 그래서 어깨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작업순환을 검토해보면 어떨까 했더니 입사 15년차인 과장이 응할 리가 없다고 하며 웃는다. 하여간 내가 어깨부담경감을 위해 순환작업을 권고해 둘테니 혹시 회사에 인력문제에 대해서 건의하게 되면 참고자료로 쓰라고 했다.
#3. 재작년에 채용시 건강진단에서 소아 당뇨병이 있어 보건관리자가 채용 적합 여부를 문의해 왔던 젋은 여자의 근황은 양호하다. ‘당화혈색소는 늘 정상이예요’하고 웃는다. 소아 당뇨병은 어려운 병인데 비관하지 않고 늘 밝게 웃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4. 고혈압 가족력이 있고 혈압이 좀 높은 30대 남자는 혈압을 관리할 필요성은 느끼는데 운동은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오전 8시출근 오후 11시 퇴근,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사는데 IMF 전에 6-7명이 하던 일을 3명이 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단다.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면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2배 증가한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회사측에 인원충원을 건의해야 한다고 하자 안된단다. 자기들은 사무직이니 노조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고용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5. 입사 8개월차인 20대 청년은 만성 피로를 호소한다. 문진에서 몇가지 가능성을 배제한 뒤 직무스트레스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모호한 역할이 주된 스트레스 유발원인으로 보였다. ‘피로의 원인은 병적인 것이 아니고 직무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으며, 열심히 일하면 자기 영역을 찾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했더니 굳어진 얼굴이 좀 풀린다.
#6. 진료의뢰서를 2장 썼다. 한 사람은 가슴이 뻐근한 통증이 자주 생겨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몸이 좀 이상하면 일단 종합 검진을 받는 경향이 있다. 큰 마음 먹고 종합 검진을 받았는데 정상이고 몸은 계속 안 좋으니 괴롭다. 증상에 맞게 진료를 받으면 좋으련만. 순환기 내과 진료를 권유했다. 한 사람은 사오년 전부터 차가운 것에 노출되면 피부가 벌겋게 되고 통증을 느끼는 데 최근 심해졌다고 하여 한랭 두드러기 의심하에 일단 피부과 진료를 보도록 했다.
#7. PVC 압출 작업은 2년 연속 소음 초과, 최고 97데시벨까지 나온다. 해당 부서 작업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최근 생산속도가 빨라져 에어분사음이 더 커졌고 장비증설로 장비간 거리가 좁아진 것이 문제라고 한다. 생산성과 건강권이 충돌하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작업자들은 작업환경개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8. 노조위원장은 고혈압 관리를 잘 하고 있었다. 내년부터 100인이상 사업장은 노사협의회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대체할 수 없으니 독자적 설치, 운영하도록, 그리고 제발 보건관리자를 참여시킬 것, 소음 2년 연속 초과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처를 할 것, 노조원이든 아니든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뒤이어 사무장이 나타났는데 두 달전 발생한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걱정이 많다. 이런 저런 조언후에 없어진 안전보건교육시간을 부활시켜 달라고 주문했다. 둘 다 ‘아, 예, 그러지요’했지만 두고 볼 일이다.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효과가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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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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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직원)들의 건강을 지켜야 할 노동조합은 도대체 왜 그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