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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었던 이틀

뻐꾸기님의 [오랜만에 성수동에 갔더니] 에 관련된 글.

 

     소기업 노동자 면접조사가 연달아 저녁시간에 서울에서 잡히는 바람에 어제 아침에 집을 나서서 오늘 밤에 돌아왔다.  오늘 아침엔 다른 연구과제 미팅때문에 인천에 갔다가 그 뒤에 잡힌 볼 일도 보았고 다시 성수동으로 돌아와 노건연 사무실에서 사업주 조사 계획을 짜고 여기저기 연락을 하니 금새 또 면접조사할 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집에 못 가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번엔 다행히 7시부터 시작해서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금요일 밤인데 기차표를 예매하지 못해서 서서 와야 하나보다 했는데 운좋게 천안아산행 좌석을 얻을 수 있었다. 천안아산역에 내리니 마음이 어찌나 편하던지....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그니 이틀간의 피로가 좀 가신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지금까지 세 팀을 진행했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 

  첫 번째 팀은 오래된 지역노조 활동가들이었다. 요즘 좀 뜸했고 좀 지친 상태였는데 이 조사덕분에 오랜만에 얼굴들을 보았다 하니 우리가 뭔가 좀 기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두번째 팀은 어려운 싸움에서 이기고 난 생긴지 얼마 안 된 지역노조소속 사람들이었는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아름다왔고, 세번째 팀은 개수임금제가 횡횡하는 업종의 특수고용직 노동자들로  모두의 소망인 월급제 쟁취를 위해서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막 싹트기 시작한 희망이 피어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조사내용이야 연구보고서로 말하는 것이니 뭐 지금 할 말은 없고......

 

 연구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이야기지만 기억해두고 싶어 몇 자 적는다.

 

  "선생님은 한미FTA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쉬는 시간에 한 남자가 나한테 물었더랬다.  그 순간 내가 연구자로서 '중립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망설이다가  "저는 사실 전체적인 건 잘 모르고 보통 사람들의 건강에는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나쁘다고 생각해요" 하고 어물쩡 넘어가려 했는데 그는 단호하게 반대한다고 했다.  더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걸 예정된 조사시간을 의식해서 중단시키면서 미묘한 마음이 들었다. 이 팀의 참석자들중에는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서로 어디서 본 것 같다 하더니 TV에서 보았다, FTA 반대 집회에서 보았다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남자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지금 유일하게 하는 일이 쉬는 날은 집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피로를 푸는 것이라고 답했었는데 그런 그들이, 활동가도 아닌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 FTA 반대투쟁에 동참했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쉬고 있었던 주말에 그들은 거리에 있었구나.

 

  "처음에 빨간 머리띠를 묶을 때는 나도 좀 무서워서 소름이 끼쳤었죠." 어떤 여성 노동자가 말했다. 머리띠를 묶어본 기억이 아득하다.  2004년 뭄바이에서 가두행진을 할 때 누군가 나에게 머리띠를 건네주었을 때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  머리띠를 묶는 결연함...... 나에겐 없다....

 

  어제 팀과 오늘 팀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우린 이런거 처음 해봐서....그래서 좋았다"이다. 모여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토론이란 걸 하면서 즐거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언젠가 우리 모친께선 사회주의를 '밭머리에 앉아서 죙일 토론하느라 바빠서 일은 안 하는 것' 이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밭에 앉아서 토론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그려보고 억지로 이야기해야 한다면 괴롭겠지만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면 그것만큼 괜찮은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한편으론 모여 앉아서 자신들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토론같은 거 한 번도 해 본 적 없이 하루종일 일만해야 하는 사회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다. 

 

" 다같이 전기를 끌 수 있다면...." 작업장 예방체조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내 질문에 개수임금제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말을 하던 어떤 이가 반복해서 말했다. " 다같이 전기를 끌 수 있다면...."  쉬는 시간없이 분초를 다투며 옆 사람과 비슷한, 혹은 더 많은 물량을 뽑아내야 하는 공간에서 근골격계 질환 예방을 위해서 체조를 하려면 다같이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다.  다같이 전기를 끌 수 없더라도 누군가가 먼저 그 숨막히는 경쟁체계를 무시하고 예방체조를 시작한다면 어떨까? 10분에 몇 개의 물량을 손해보는 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것 같아서, 그리고 조사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가 아니라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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