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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삭유보다 더 나쁜 것

    월요일 그 전날 일찍 잤건만 아침엔 일어나기 힘든 것 억지로 참고 출장검진장소로 출발했다.  유기화합물 노출이 심한 특수인쇄회사 검진이었는데 알루미늄 작업자에 대한 유발 폐기능 검사 2건,  부서변경후 새로 발생한 알러지성 접촉피부염 의심자 1명에 대한 첩포시험, 유기화합물노출이 심한 곳에 일하면서 만성 피부질환이 3년째 계속되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피부과 컨설트 등을 냈다.  종합검진하는 사람들은 다른 병원에서 특검도 같이 한다고 해서 수검자 수는 많지 않았다.  내 보기엔 그 종합검진보다 유기화합물 특검 제대로 하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사람들은 도우미가 1:1로 붙어서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병원을 선호하니 어쩔 수 없다.  오늘 노과장한테 우리도 종검 세팅하자고 했다.  최근 인근 새로 생긴 병원들에서 화려하게 종검을 세팅해놓고 우리가 관리하는 회사들 검진을 수주해서 올해는 검진할 회사가 별로 없다.  뭐, 내가 일이 너무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내가 맡은 회사 특검 잘 하고 사후관리 잘 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라면 해야한다는 생각이지.


   몇년에 걸쳐 꾸준히 작업환경측정초과와 직업병 유소견자 판정을 냈더니 30%정도의 회사가 떨어져나갔다.  그나마 몇개 남아있던 민주노총 계열 회사들은 우리가 부실 산업보건기관이라도 올해는 특검을 거부한다고 한다.  직업병 유소견자 판정 하나 나가면 우리 과 직원들은 몇 달을 들들 볶인다. 사측에서 꼬투리 하나라도 잡아서 문제제기를 하고 또 하기 때문이다.  특검 잘 해보겠다고 노동자들 자기 휴가내서 병원에 와서 이차검사하는 게 안쓰러워 우리 과 직원들 고생시켜가며 무거운 장비 들고 다니며 열심히 검사했고 수검자 한 명 한 명 성의를 가지고 보았고 여러가지 위험부담 감수해가며 작업환경측정 초과내고 직업병 유소견자판정을 냈더니 이제와서 우리더러 부실기관이라 한다.

 

   특검 거부라는 금속노조 방침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올바른 투쟁방향인지는 모르겠다. 설사 그러다하더라도 우리를 부실기관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가 없는 언행이다.  사실 노동조합이 그렇게 예의없이 행동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산재판정에 필요할 때는 와서 웃는 얼굴로 부탁하지만 우리가 특검결과설명회라도 좀 하라고 권고하면 못 들은 척 한다.  진짜 원조 진보를 자처하는 동서남북의 활동가 산업의학 전문의들은 우리 동네에 와서 노동조합에 부실 산업보건기관 절대 믿지 말라고 속삭이는 모양이다.  그 잘난 정파간의 갈등때문에 현 집행부가 산업보건사업 못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 병원에 되도 않는 할 소리 못 할 소리 하는 꼴을 보고 참은 것은 검진결과 한 번 제대로 설명듣지 못하고 허구헌날 피만 뽑고 혈압만 재는 평범한 노동자들에 대한 도리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 한 푼 안 받고 고맙다는 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산재요양신청서를 쓰기 위해 과외의 노동을 하고 누구 하나 억울한 사람 없었으면 해서 점심시간 줄여가며 근로복지공단 자문위원 활동하는 이유는 누가 알아주길 바래서가 아니고 산업의학 전문의의로서의 마땅한 직업윤리때문이다.

 

  오늘 오후에 방문한 곳은 작년에 직업병 판정 6건을 낸 뒤로 사측한테 시달릴 대로 시달린 곳이다. 노안부장이 작업장 순회점검 안내를 해주었는데 직업성 비염 판정받고 치료받은 사람들중 두어명은 많이 좋아졌으나 여전히 세척제에 손담그고 기름묻은 손 닦는다고 세척제로 손을 씻기도 하는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 

 

  노안부장한테 올해 측정과 특검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더니 얼버무리길래 솔직하게 말했다.  어떤 훌륭한 곳에서 하든 난 상관없다.  다만 너네 목적을 위해 우리를 부실이라고 몰아부치지 말아라.  당신들이 특검거부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부실기관이라고 우리 병원 특검거부하는 것은 이해 못 한다.  이번에 특검거부하면 우리 병원은 민주노총 사업장 다 계약해지 할 것이다.  우리 병원은 이번에 특검 거부한 회사는 앞으로 다신 검진안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우린 근로복지공단 자문위원 사퇴할 것이고 민주노총 자문위원도 사퇴할 것이다.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라.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는 상부지침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내가 금속노조 쫒아다니면서 이야기 할 시간도 없고 하니 전달해달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한편 이 회사는 외국계회사인데 사측은 우리가 직업병 판정낸 뒤로 본사가 발칵 뒤집어졌다고 하면서 나더러 영문으로 된 서류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걸 부탁하면서 방실 방실 웃는 차장이 지난 번에 우리 병원에서 와서 우리과 직원들한테 한 걸 생각하니 씁쓸하다.  이 일로 그 회사 이사까지 만나는 영광을 누렸으나 기분은 점점 더 나빠질 뿐이다.

 

  내가 숨막히는 것은 현장 돌아다니면서 상담하느라 온 몸에 잔뜩 묻는 절삭유때문만은 아니다.  절삭유보다 더 나쁜 것은 현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책임지지 못할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그 잘난 진짜 원조 진보주의자들이 어디까지 책임지는 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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