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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8

  지난 한 달간 몸이 많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약간 비관 모드. .

몸이 아프니 꼼짝도 하기 싫고 모든 일이 자신 없어지고, 내가 하는 일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 두 번째 수검자는 종업원수 20명도 안 되는 작은 기계 부품회사에서 온 사람이었다. 소음성 난청에 대해서 재검을 하러 왔다. 고지혈증, 간기능이상 등도 있어 한참 설명을 하고 나서 마지막에 물어보았다. 요즘도 세척작업이 있나요? 있긴 있는데, 초음파 세척기가 몇 달 전에 들어왔어요. 그럼 TCE는 안 쓰겠네요? 가끔 아주 불량이 났을 때는 쓰는데 거의 안 써요.  

 

  올 해 초에 어떤 30대 초반 젊은 남자가 우리 병원에 찾아왔었다. 새 일을 시작하고 나서 몸이 너무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서 걱정이 되어서 왔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그 사람이 입사하기 전에 그 일을 했던 이주 노동자가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온 몸의 피부가 벗겨지는 병을 앓다가 죽었는데, 미등록 노동자여서 모두들 쉬쉬 하고 그냥 넘어갔단다.

 

  사망한 이는 TCE에 의한 과민 증후군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잘 살아보겠다고 돈 벌러 이역만리에 와서 아픈데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했을 망자와,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억울함을 호소할 힘도 없었을 망자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 세척제는 발암성, 간독성으로 유명한 물질이면서 드물게 과민반응을 일으켜 스키븐 존슨 신드롬이라는 무서운 피부병을 유발하는데, 몇 년전부터 간혹 이런 사고가 보고되고 있다. 2년 전 쯤 우리 병원에서도 내과에서 그런 환자가 있다고 연락이 와서 환자가 일했던 작업장을 돌아보고 소변중 삼염화초산 (TCE의 대사 산물)을 검사한 적이 있다.  작업을 중단한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노출기준을 초과하는 검사결과가 나왔었다.  그 환자도 미등록 노동자였는데, 다행히 경과가 좋아서 살아남았고, 산재로 치료받았고, 치료가 끝나고 추방당했다고 들었다.

 

  찾아온 젊은 남자의 작업에 대해서 들어보니 세척장은 옥외에 있지만 삼면이 막혀 있어  환기가 잘 되지 않고, 때로 1미터 이상의 길이를 가진 제품을 세척하다보면 세척액이 뚝뚝 떨어져 몸에 묻는 일이 많다고 했다. 일주일 간격으로 교대해서 그 작업을 하고 한 번 할 때는 삼십분에서 네 시간까지 불규칙적으로 세척제에 노출이 되고 있었다. 기초적인 검사를 하고 세척제 사용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고,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작업환경을 바꾸는 게 답이라고 설명하고 나서 한숨이 나왔다. 노동조합이 있을 리 없는 소규모 사업장의, 입사한 지 일 년도 안 된 노동자가 그 역시 먹고살기가 팍팍할 영세 사업장 사장을 찾아가 이 작업이 유해하니 바꾸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외부에서 잘못 건드리면 나를 찾아온 환자의 생계가 위협을 받을 것.

 

  고민 끝에 우리 산업위생사 선생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 사업장에 가서 영업을 좀 하시라 했다. 일단 영업하는 척 하고 방문을 해서 작업장을 둘러보고 세척작업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상황 보아서 우리 병원에서 작업환경측정도 하고 검진도 하도록 유도해보시라고. 그리하여 비용을 반값으로 깍아 주고 그 회사의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검진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어찌되었나 궁금해서 하반기 측정할 때 따라가볼까 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세척작업이 초음파 세척으로 바뀌고, TCE를 거의 안 쓰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야겠다.

  몸도 꽤 좋아져서 이젠 기침과 가래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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