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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두고 간 음료수 상자가 불편한 이유

   아침에 검진하러 진찰실에 들어가니 음료수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검진하고 있는데 외래 간호사가 와서 어제 그 분이 교수님이랑 전공의 선생님 드시라고 두고 갔다고 한다.

 

   일주일전 외래 간호사가 산재상담요청이 한 건 있다 하여 전화를 해 보았더니,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하다가 요부 추간판 탈출증(허리디스크) 진단받고 수술한 뒤 산재 신청을 했는데, 노무사가 우리 병원 가서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받아오면 도움이 된다 하여 연락했다 한다. 환자는 이미 퇴사했고 작업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쓰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지만 일단 와 보시라고 했다.

 

   당일 오후에 병원에 온 환자는 흥분해서 두서없이 말하는데, 작업에 대한 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알 수 있겠냐며 한 숨만 쉰다. 입사 2년째에 반장이 될 정도로 열심히 일했고, 반장이 되어서도 한 달에 이틀 쉴까 말까 할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일만 했지 한번도 그런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신다. 한참을 묻고 또 물어보아도 답이 잘 안 나와서 난감했는데, 같이 온 분이 있다 해서 들어오시라 했다. 다행이 그분이 현장 상황을 기억해서 차분하고 조리 있게 설명을 해 주어서 작업에 대해서 좀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 정도의 진술만 가지고 근거 있게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쓰기는 어려워서 취급했던 자재의 무게, 중량물을 취급했던 동작의 자세, 운반거리 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하자, 울상을 지었다. 일단 최대한 작업내용을 자세히 기술하고 업무관련성을 주장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부각해서 진술서를 쓰도록 도와주는 것 말고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환자는 “그럼 내가 여기 와서 얻은 것이 뭐예요?” 하면서 나갔다. 두 시간 동안 작업내용을 파악하고 업무관련성을 주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내용을 정리해주느라 진을 뺐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섭섭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절박한 심정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만약 추가 정보를 가지고 오면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쓰도록 해 보겠다 하고 보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환자는 수술하느라 보름 병가를 내고 직장에 돌아가 보니 반장직위해제가 되어 있었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일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동안 회사에 충성했는데, 아프다고 반장을 그만두게 한 것에 대해서 억울함을 참을 수 없어서 화가 나서 퇴사를 했던 것이다. 아직 회사에 남아서 일하는 친구들은 있지만 누가 과연 환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하는 사진을 촬영해 줄 것인가? 지금까지 이런 일이 몇 번 있었지만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오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 때 마다 나는 내가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 환자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쓰는 게 옳은지를 두고 고민을 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업무관련성 평가서가 과연 산재심의에 도움이 되는 지에 대해서도 별로 자신은 없다.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받아간 사람들이 그 후에 어찌되었는지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걸 추적해서 확인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우리가 적어내는 것보다 심의하는 자문의의 성향이 산재여부에 대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기도 하더라. 하지만 불승인사례에 대한 조사를 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제출한 자료의 분량이 적을 수록 불승인률이 높아진다 하니, 내가 쓰는 서류가 제출하는 자료의 분량은 늘려줄테니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한다. 

 

   다시 연락이 왔고 이번엔 사진을 찍고 무게랑 거리를 쟀다는 것이다. 문제는 휴대폰으로 찍었는데 집에 컴퓨터도 없고 어떻게 사진을 꺼내는지 모른단다. 연결 잭도 없다하여 그걸 사서 그냥 가져오라고 했다. 어제 오후엔 학생들 실습이 있어서 내가 직접 만나기는 어려워 전공의 선생한테 이러저러하게 일 처리를 해 놓고 전화를 하면 와서 보겠다고 해 놓았다.

 

   실습 중간에 와서 전공의 선생이 정리한 것을 보니 처음 해 보는 것인데도 깔끔하게 잘 했더라. 이 친구는 어떤 일을 맡겨도 “예, 알겠습니다. 하다가 잘 모르면 찾아보고 물어보면서 하겠습니다”하는데, 그 태도가 참 예쁘다.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연일 출장 검진 나가면서 판정하면서 시험공부하기에도 바쁠 텐데 성의를 보여주니 고맙다.

 

   이런 일을 처리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산재보험이 좀 바뀌면 좋겠다. 아프면 먼저 의료보험에서 무상으로, 무상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본인 부담금으로 치료받고, 업무관련성 평가는 보상을 위해서보다 해당 사업장의 산재예방을 위해서 실시하고 작업장을 변화시키는 근거자료로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건 의료보험의 보장성이 충분히 높아져야 가능한 일이니, 갈 길이 멀다.  이런 제도하에서 업무관련성 평가란 시지프스의 노동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음료수 상자를 바라보면서 기분이 좋을 수 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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