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지각했다. 어젯밤에 세시까지 무슨 원고 쓰다가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숙제를 다 못하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 강의, 원고 등 숙제를 무난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해야 하는데, 어쩌다보면 넘치고, 그래서 한동안 주의하다보면 또 넘친다. 데카르트는 평생 늦잠을 잤고,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서 명상에 잠기는 습관이 있었다 하는데, 나도 그런 아침을 좀 가져보면 좋겠다.

 

 

   추계학회 조찬세미나 원고는 심혈을 기울여(?) 작성하고 있다. 보수적인 산업의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제이다 보니, 신경을 더 쓰게 된다. 전에 이 주제에 대한 논문을 하나 학회에 보냈다가 게재불가 판정을 받은 뼈아픈 기억이 있어서 이번엔 누구도 근거없는 소리를 하지 않도록 근거가 풍부한 발표를 하고 싶다. 초안은 만들었는데, 여러 번 검토하고 보완해서 불후의 명작(?)을 만들고자 한다. ㅎㅎ. 그렇다고 그리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회없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니 너무들 기대는 하지 마시라.

 

 

   아침에 진찰실에 앉아있노라니 밖에서 와글와글 떠드는데 이런 이야기들이다. "맨날 담배 끊어라, 술 먹지 마라, 지금까지 그 얘기 밖에 못 들어보았어" "치료해주는 것도 아니고...." 이어 들어온 사람의 폐기능 검사소견을 보니 소기관지 폐쇄소견이 있다. 직업력을 물어보니 금연 7년차에 용접가스 및 각종 알 수 없는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있다. 검사결과를 설명해주고, 환기와 보호구 착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수검자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20인 규모의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해와서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어보는 모양. 그것도 현장이 바뀌지 않고 계속 들으면, "맨날 환기 철저히 하고 마스크 쓰라는 말만 들었어"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예방진료의 특성상 수검자들이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게 검진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

 

  한편 이 사업장 작업환경측정결과는 매우 양호하다.  작업자의 말을 들어보니 일 없을 때만 와서 측정한단다. 담당자이름을 보니 비정규직 2년차이다.  불러서 야단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자리에 없었다. 누군가를 야단치는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 피곤하지만 이럴 땐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게 내 역할이니 어쩔 수 없지

 

   그 회사에서 온 다른 이는 심전도 검사가 빠졌다고 화를 냈다. 그것이 심장병 예방에 별 효과가 없어서 빠졌다 설명을 해 주어도 기분이 나쁘시단다. 어렵게 시간 내서 대학병원까지 왔는데 어디서나 피검사 엑스레이만 한다는 게 허무하단다.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심전도인데... 챠트를 보니 영업직. 주로 운전을 해서 거래처를 돌아다니는 업무이다. 여러 가지로 보아 심장병의 고위험군으로 보인다. 심박변이도 검사(스트레스검사)를 좀 해 보는 게 좋겠다싶어 무료로 해 줄 테니 해보라는데 화를 더 내면서 나간다. 우리 병원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고 복지부에 질의하겠다고 하는데, 좀 안타깝다. 살기가 참 팍팍하신가 보다 싶다. 나야, 할 도리 다 했으니 속상할 일이 없지만 의사가 그 검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차분하게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자기 생각에 꽉 사로잡혀 있으니 좀 안타깝다.

 

 

   30대 초반 여자가 들어오는데, 직업을 보니 속셈학원강사. 목소리가 팍 쉬어있다. "제 목소리 이렇지 않았거든요". 보이스 트레이닝을 권했다. 그 치료가 무작위 임상시험에서 효과가 있다는 논문을 보았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몰라 내가 할 수는 없고(또 내가 치료까지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대개 이비인후과에서 많이 하는 치료도 아니라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쉽지 않겠지만, 수검자는 관심을 보였다. 그 밖에 서서 일하는 작업의 관리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더니 좋아한다. 공부한 보람이 있다. 올해 서서 일하는 작업 관리를 위한 가이드라인 개발 연구하면서 지식과 경험이 늘었고, 그만큼 일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재미로 사는 거지 싶다. 배우고 또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50대 여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혈압도 두 번 쟀는데 차이가 많이 나고 낮은 혈압을 기준으로 보아도 1기 고혈압에 해당한다. 본인이 관공서 같은데 가서 혼자 재보아도 가슴이 뛴단다. 추석 전에 샤워하다 가슴에 멍울이 만져졌는데 맏며느리라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 못 갔다. 그동안 유방암 걸렸을까봐 잠 못 자고 체중 빠지고, 벼르고 별러 이제야 왔다고 한다. 결과 통보가 늦어지지 않게 신경 좀 써달라고 메모를 남기는데 옆에서 유방암이 강력히 의심되니 검사결과 나오는 대로 빨리 알려 달라고 써달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어 전화를 했다. 그 검사 판독하는 이랑은 가끔 같이 밥도 먹는 사이라 부탁을 해 보았다. 아무리 친해도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게 마음 편하지 않다. 다들 계획을 세워서 정해진 대로 바쁘게 일하는데 전화해서 흐름을 깨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임상적으로 응급 판독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니.  그래도 이것때문에 누군가 일주일 잠 못자는 일을 예방할 수 있으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검진 끝나고 방에 돌아와 도시락 먹었다.  한시에 시험감독, 두시에 산재 피해자 면담이 있다. 면담은 세 시간 정도 예상이 된다. 한 곳에서 주욱 일한 게 아니라 용접사로 여기 저기 일당 받고 다니면서 일했다 하니, 노출이 질병을 일으키기에 충분한가 하는 누구나 납득할만한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진단명은 천식, 만성 폐쇄성 폐질환, 폐섬유증이다. 용접하는 이에게 흔한 병인데, 기각사유를 읽어보니 임상의사가 두 가지 의견을 썼다. 여기에 자세히 쓰긴 좀 그래서 내용은 생략. 그러나 보통 임상 의사들은 그렇게 안하는데 주치의가 문헌까지 찾아서 업무관련성이 있다고 쓸 정도로 직업병의 가능성이 높은 사안을 이유같이 않은 이유로 기각의견을 쓴 자문의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좀 황당하다. 이 건을 두 달내에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벌써 문헌고찰하고 다른 일 좀 하다 보니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제나 저제나 산재판정이 날까 기다릴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지기도 하나, 마감 순으로 일을 해도 잠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 하면서도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다. 얼른 해버려는 것 외에 답이 없다.

 

 

  원고수정은 언제 하나 약간 쫓기는 마음으로 내 방에 돌아와서 이메일을 열어보니, 반가운 소식이 와 있다. 원고마감이 일주일 연기되었단다. 사일 지연되었으니, 이틀이나(!) 남은 것이다.  오후 일정에 집중하고 나서 해도 되겠구나. 헤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