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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과 당파성

요그님의 [이른바 대학 보이코트에 대하여] 에 관련된 글.

 

“신학으로 유명했던 파리대학”이 “봉건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카톨릭교리 연구”만 배출하지는 않았다. 피에르 아벨라르(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와 같이 근대정신의 기초가 된 “내면성”을  12세기에 이미 사유한 사람도 배출했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아무튼 파리대학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해서 그랬지 않나 싶다.

 

예슬님에 대한 이런 저런 입장과 또 대학을 떠난/거부한 예슬님과 대학에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을 대조하는 것에는 객관성과 당파성 문제가 있지 않나 한다. 탈주관주의니 탈객관주의니 하는 포스트모던의 황사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황무지에 아직 남아있는 객관주의 잔재들 사이사이에 고삐 풀린 주관주의가 다시 난무하지 않나 싶다.

 

익히 알다시피 맑스의 사상과 사유는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구체적으로 계급지배가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분업과 분배와 함께 그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권력에 의존한다고 한다.

 

항구적인 국가권력하의 계급지배에서 계급입장을 명확하게 하여 행동에 방향성을 준다는 의미에서의 당파성이 학문에서 말하는 객관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주관은 전통적으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현실을 쳐다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주관을 행위, 즉 실천(Praxis)으로 이해한 맑스는 주관을 강 건너 불 난 곳에 갔다 놓았다. 그래서 주관은 가만 일을 수 없고 불에 타 죽든지, 불을 끄든지 할 수밖에 없다. 주관 주체는 객관 객체" 와 관계하는 가운데 스스로 변하고 객관 "객체"도 거기에 견디지 못해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예슬님과 관련된 문제는 김예슬님의 문제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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