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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아우구스티누스-삼위일체론-1권 2/3

2.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animus)에서 이런 종류의 오류들을 씻어내려고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듯 실체(res) 대한 (verba)이라면 어떤 종류도 마다하지 않고 인용하였다. 우리들의 지성(intellectus) 이런 말을 영양분으로 삼아 강건하게 되어서 점진적으로 거룩하고 숭고한 영역을 향해 일어설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 때에주님의 날개 그늘에 나를 숨겨 주시고에서와 같이 물체에서 취한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또는내가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한다에서 있듯이 영적 피조물에서 여러 말을 옮겨와(transtulit)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로는(dici)그렇게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없는 것에서 이런저런 말을(vocabula) 억지로 끌고와(traxit) (locutiones) 만들거나 이상야릇한 (aenigmata) 엮어 짜는 법이 없다. 세번째 종류의 오류를 범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게서도 찾아볼 없고 어떤 피조물에서도 찾아 없는 것을 추정하는 자들로서 자신을 스스로 진리로부터 차단하여 공허하기 그지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성경은 피조물에서 찾아 있는 사물을 바탕으로 하여 마치 어린 아이가 즐거워하고 쫓는 것과 같은 것을 만들어, 연약한 자들의 시선을 (aspectus) 이끌어 점진적으로 각자의 도에 따라 고귀한 것은 찾고 야비한 것은 버리게 한다. 그러나 모세에게 말씀나는 있는 자다“,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등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마땅한 서술이지만(dicuntur) 피조물과 관련해서는 전혀 찾아볼 없는 서술은 성경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있다〉(esse) 물체(corpus)뿐만 아니라 (animus)에도 어떤 식이로든 서술될 있기 때문에 성경이 말을정확하게 수야 없지만어쨌든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서술로 이해되도록 분명하게 두기를 원치 않았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분에게만 불사가 있고라는 사도의 말도 마찬가지다. (anima)  모종의 방식으로 죽지 않는다고 서술되고 사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불사란 피조물은 전혀 가질 없고 오직 조물주의 속성인 불변이라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오직 분에게만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다윗 역시 똑같이 말한다. „주께서 그것들을 바꾸시면 바꿔지겠으나 주는 한결같으십니다“.

 

3. 하나님의 본질(substantia) 본질의 어떠한 변함없이 변하는 것들을 만들고, 본질의 어떠한 시간적인 움직임없이 시간적인 것들을 창조한다는 것을 통찰하고 완전히 안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우리 마음(mens) 정화(purgatio) 필수다. 그래야먄 형언할 없는 것이 형언할 없는 상태로 비춰질(videri)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정화의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우리는 믿음으로 양육되고 믿음의 인도 아래 그래도 견디고 있는 길에 올라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형언할 없는 것을 납득하기에 적합하고 용이하게(habilis) 만들져야 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sapientia) 지식(scientia)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carnalis) 세속(animalis) 속해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자면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그의 권능을 내세워 선포하지 않고 십자가에 박힌 그의 인간적인 약함을 받들어 선포한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박히신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리고 이어서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한다. 조금 가서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없어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하지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이런 말을 들으면 벌컥 화를 내고 의도적인 기쁜 나쁜 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대개 위와 같은 말을 들으면 말이 없는 사람들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그들 스스로 듣는 말을 담을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자들에겐 종종 근거(ratio)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뭔가 알려고(quaerere) 하면서 요구하는 그런 근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저들 스스로 그런 [다자가 인정하는] 근거를 규정할(sumere) 만한 힘이 없고, 우리 역시 어쩌면 그런 근거를 찾아내거나(apprehendere) [만인 앞에서] 서술할(proferre)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근거는 어디까지나 저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알기 원하는(exigere) 것이 도대체 뭔지 저들 스스로 인식하기에 너무 무딜(inhabilis) 뿐만 아니라 그러기 위해 갖춰야 자질이 전혀 없다는(minimeque idonei) 보여주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저들은 우리가 학식이 없는 것을(imperitia) 감추기 위해서 간교한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학식있는 [전문가](peritia) 되는 시기해서 악의에 행동을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격분하고 이성을 잃은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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