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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12
    뷔히너 - 멸시에 대한 증오
    ou_topia

뷔히너 - 멸시에 대한 증오

뷔히너가 1834년 2월, 기쎈(Gießen) 체류 중, 집에 보낸 편지.

 

 

 

[…] 나는 아무도 멸시하지 않는다.  절대 지성 혹은 교양 때문에 멸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 [백치 아다다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거나 [보이체크와 같이 자신을 간추리지 못하고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은 그의 손과 맘먹기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 똑같은 형편이었다면 다 똑같이 되었을 것이고,  형편은 우리 밖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보란 듯 꺼내 보여주는 지성을 보자면 이건 잘해봤자 전적으로 인간정신 본질의 아주 미미한 면일 뿐이며, 교양도 잘해봤자 정신적 본질의 우연한 형태일 뿐이다. 내게 [외적인 것을 놓고] 멸시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이가 볼품없는 옷을 입고 있어서 그를 발로 짓밟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다. [신체적으로 허약한] 내가 어떤 사람을 짓밟는 야만행위를 절대 할 수 없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런 야만행위를 정신의 장으로 옮겨 내가 더욱 비열한 짓을 하는 거라고 비난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떤 이를  멍청하다고 이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멸시하는 건 아니다. 멍청함은 사람이 하는 일에 [널리 퍼진] 일반적인 성질이다. 그 존재는 내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존재하는 모든 걸 그 이름으로 부르고, 나에게 불편한 걸 피하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자인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만나거나 혹은 멀리하는 것은 내 맘대로의 판단에 맡겨진 일이다. 여기에 내가 오랫동안 아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해명이 있다. 나는 그 누구의 맘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지루한 일을 많이 피할 수 있었다. 나를 교만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내가 그들이 즐거워하는 일과 분주하게 일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날 교만한 자로 여긴다. 이것은 부당하다. 나는 절대 다른 사람을 똑같은 이유로 비슷한 비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날 조소자라고 부른다. 이건 맞는 말이다. 나는 자주 웃는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하여 웃지 않고, 어디까지나 단지 그가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그가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됨을 놓고 웃는다. 이때 나는 그와 운명을 같이하는 나 자신을 놓고 웃는다. 사람들은 이걸 조소라고 한다. 그들은 내가 내 자신을 광인/멍청이로 만들어 그들에게 ‘여보게’ 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광기/멍청함을 오직 그들 밖에서만 찾기 때문에, 멸시하고, 조소하고 교만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나의 조소에는 또 하나 다른 게[종] 있다. 이건 그러나 멸시에서 나온 조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증오에서 나온 조소다. 증오는, 사랑이 허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허용된다.  그리고 이런 증오를 난 멸시하는 사람을 상대로 만끽한다. 교양이라 부르는 피상적인 것, 혹은 학식이라 부르는 썩어빠진 잡동사니를 손에 쥐고서 [동포]형제들을 싸잡아서 멸시하고 이기주의의 희생양으로 삼는 사람의 수는 크다.  귀족주의는  [모든] 사람이 지니는 성령에 대한 가장 파렴치한 멸시다. 이런 귀족주의에 대항하여 나는 그  무기를 그에게로 돌린다. 교만 대 교만, 조소 대 조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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