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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대괄호로 묵었다. 노숙자와 공간의 주제화에 적당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고 일종의 수행모순을 느끼기 때문이다.
공간은 텅 빈 추상적인 0이 아니라 삶이 펼쳐지는 구체적인 장이다. 그래서 공간은 항상 시간과 얽혀있다. 단지 이 얽힘이 상상력부족으로 따로따로 추상될 뿐이다.
삶의 공간적인 전개는 은유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머리에서 모슨 사람은 앎을 향해 뻗어나간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 감정론에서 시공에서 뻗어나가는 걸 두고 conatus라 한다. 그리고 뻗어나가는 것의 흐름에, 즉 에너지가 막혔는지 열렸는지에 주목하고 감정을 구분하고 정의한다.1 삶은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한 공간을 채운다. 개성(individuality)은 삶이 펼쳐진 공간에서 나타난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상실한 사람의 개성은 그의 삶이 펼쳐진 환경에 있다. 기억상실이 개성상실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벼룩시장에 흩날리는 사진, 편지, 엽서 등에 개성이 있다. 단지 독해력부족으로 그 개성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삶의 구체적인 장으로써 공간은 넉넉해야 한다. 그리고 넉넉하다. 근데 삶의 공간을 규제하고 출입방해하고 통제하여 부족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각종 법적규제와 행정조치, 건물배치 및 설계 등에 이어서 강신주류의 이데올로기담론 등이 이런 요소들이다. 그래서 삶의 공간은 또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주체화의 공간이다.
이 글 제목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노숙자의 말하기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아래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있다.
이 어려움의 극복은 실천적인 것이다. 그래서 베를린에 어떤 ‘노숙자말하기’가 있는지 소개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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