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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은 실천이성에 속할 것이다 (참조: 볼프강 하우크, 실천 변증법을 위하여(für praktische Dialektik). 그러나 실천을 현실개입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성의 대상인 “관념적인 것(das Ideelle)이 그저 인간의 머릿속에서 전치(轉置).전환되고(umgesetzt) 번역된(übersetzt) 물질적인 것(das Materielle)”(MEW 23, 제2판 후기)이라면, 실천이성은 먼저 물질세계의 “모든 생성된 형식을 운동의 흐름 안에서”(“jede gewordne Form im Flusse der Bewegung”, 같은 곳) 파악하는 가운데, 단절과 연속으로 이어지는 “체계들의 차례”(“Serie der Ordnungen”, 같은 곳)를 연구하고, 영원불변하는 한 형식의 법칙이 아니라 “현상들의 변화와 발전의 법칙, 즉 한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의 이행, [상이한 혹은 모순되는 사실들을 한줄로 묶어두는] 하나의 결속체계(Ordnung des Zusammenhangs)에서 다른 결속체계로의 이행에 관한 법칙”(같은 곳)을 서술하는 이성일 것이다. 그래서 변증법을 두고 굳이 실천이성과 이론이성을 분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죽은 개”(“tote[r] Hund”, 같은 곳)의 전도된 형식의 변증법도 “현실에 부합하는 형태”(“in ihrer rationellen Gestalt”, 같은 곳)를 살리면 “[제도, 체계, 질서 등] 자리를 잡은 것에(des Bestehenden)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동시에 포함하고, 생성된 모든 형식을 운동의 흐름 속에서, 다시 말해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영원할 거라는] 형식을 또한 흘러지나가 과거로 떨어지는 그의 [한시적인 면에] 주목하면서 파악”(같은 곳)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이고 혁명적”(같은 곳)이다. 그래서 부르주아와 그 교리의 앞장에 서있는 글쟁이들은 변증법을 혐오하고 ‘질서’를 모독하는 이성으로 치부할 것이다. 마치 성육신한 하나님의 죽음을 영원불멸의 신성 모독(Ärgernis)으로 여긴 유대인이 그랬던 것처럼(고린도전서 1.23).
근데 이상하다. 최근 들어 좌파가 오히려 변증법을 더 멀리 하는 조짐이다. 부르주아는 그걸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체계들의 차례"(Serie der Ordnungen)를 단절로 대신한 좌파의 망각의 정치에 있다고 진단한다. 변증법 포기는 궁극적으로 혁명포기이며, 부르주아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변증법을 수동적으로 당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관련 일련의 현상들을 연재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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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이야 어쨌든 간에 절대자를 상실한 사유는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준이 확 떨어진다.
보토슈트라우스의 아직 아도르노의 변증법을 따르는 „Paare, Passanrten“(짝을 맺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은 보물 창고인데, 실존 사회주의 붕괴에 한방 얻어 맞고 나 자빠져 „이젠 할 수 없어도, 단번에 멍청해 지더라도 변증법을 버리고 사유해야 한다“면서 포퍼를 따르는 „Beginnlosigkeit“(시작이 없는 상태)는 횡설수설의 표본.
변증법이 절대자를 사유하는 것이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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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Bestehende (MEW 23, 27쪽)와 des Bestehenden (같은 곳 28쪽)의 번역관련:강신준은 das Bestehende를 “현존하는 것”으로 번역했는데 외연이 너무 커서 특별한 내용이 없는 좀 진부한(trivial), ‘독어 입문생’의 번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대 틀림이 없는 번역이다. 바로 그래서 – 하이, 포퍼! – 문제가 된다.
독일어 낱말을,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따르듯, 존재(Sein)에서 시작하여 의지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한 후고 베를레(Hugo Werle)의 독어 낱말집(Deutscher Wortschatz)은 bestehen, Bestand를 존재(Sein)의 하위 범주에 둔다.
존재를 현존형식(Daseinformen)과 존재질서(Seinsordnung) 구별하고, 현존형식은 다시 존재개념(Seinsbegriff)과 표상에서의 존재(das Sein in der Vorstellung)로 나눈다. Bestehen은 표상에서의 존재 범주아래 Zustand의 시간말(Zeitwort=동사)로 등장한다. Zustand와 가족관계를 이루는 말 가운데 손자뻘 정도되는 낱말로 Anordnung, Gefüge가 나열되어 있다. 배열되고 짜여진 것으로서 기구, 제도 (Institution)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Bestehen이 등장하는 맥락상으로도 (“jede Form”(모든 형식)이 Bestehen의 동격) 이게 더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근접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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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ehen을 기구, 제도, 질서 등과의 동격으로 번역해야 마르크스의 포앙테(pointe)가 제대로 파악된다. 즉 Bestehen의 총칭인 생산관계(자본주의 하에서는 배타적 소유권, ‘대리’ 민주주의 등등)가 영원불멸의 형식이 아니라 시간의 Index를 가지며 자기 소명(!)을 다하고 소멸된다는 것이 인식된다. 현존하는 우주가 언젠가는 소멸된다는 말은 허나마나한 말이고.청년 헤겔은 제도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횔더린에게 헌사한 시 ‘엘로이시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시에서 사유에 족쇄를 채우는 모든 Satzung(인간관계에서 작동하는 제반 제도)의 거부를 다짐했다고 재차 확인한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횔더린의 중재로 Institution의 긍정적인 면, 즉 그게 살아 움직이는 것의 투쟁의 결과임에 눈을 뜨게 된다. 횔더린은 다시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의 총칭으로 “nationel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나 한다. 이 표현의 번역이 어렵다. 외견상 national (민족적)과 유사하지만 ‘민족적’으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
비슷한 어려움이 자본론 제2판 후기에 등장하는 rationell의 번역에도 있다. 강신준은 ‘합리적’으로 번역하지만, 합리적은 어디까지나 rational이지 rationell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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