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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이어서

2) Schein


 

케네스 웨스트팔은 헤겔의 <지각> 장이 위에서 언급한 흄의 <인성론> 부분을 배경으로 하고 ‚Täuschung’은 ‚Illusion’의 번역일 것이라고 한다. (Kenneth R. Westphal, Hegel, Hume und die Identitaet wahrnehmbarer Dinge, Ffm. 1998, S. 10ff.)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착각=Illusion}은 {착각=Täuschung:<=>Tausch(교환)}이 아닌 것 같다. {착각}이 교환의 의미를 가짐과 함께 {Schein}도 가상(假象)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다.


 

[물자체로] ‚있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넘어가면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와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두고 가상 혹은 사이비라고 했다. 교환에서는 뭔가 넘어가는 것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독어로 Passierschein이라고 한다. 비자도 이것과 어원을 같이 하고 있다. 'Visum'(비자)는 통과할 때 보여주는 것(‘Sichtbares'=보이는 것)으로서 Schein(=증명서)이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건너감’의 상처에 주목하고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지적하고 또 지적했듯이 - '건너감‘은 ’십볼렛‘하는 몸체를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뭘 가지고 건너왔던가? 뭐가 건너가게 해주었던가?


 

이주 노동자는 ‘노동력’만이 ‘건넘’을 허락받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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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

4. 넷째 문장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ß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 denn in der Allgemeinheit, welche das Prinzip ist, ist das Anderssein selbst unmittelbar für es, aber als das Nichtige, Aufgehobene.“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지각하는 [의식은] {착각}의 가능성도 의식하고 있다.“)


 

어? 흄과 칸트에 따르면 {착각=Illusion}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필연성에 가까운 것인데 헤겔은 가능성이라고 한다.


 

헷갈린다. 흄-칸트의 {필연성}은 헤겔의 {가능성}과 같은 것인가?


 

1) 이해 첫 접근


 

{착각}의 맛이 각기 뭔가 다르다. {착각=Illusion}의 필연성하면, 흄과 칸트에게는 뭔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나쁜} 필연성이다. 근데, {착각=Täuschung}의 가능성하면 뭔가 좋게 들린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달리 뭔가 할 수 있다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맛을 준다. 말장난 같지만 {착각=Illusion}의 필연성은 {착각=Täuschung}이 가능해야만 그런 게 아닌가? 다시 말해서 어떤 {구체적인} {착각}행위가 가능해야만 그런 게 아닌가? 그렇다면, 흄과 칸트의 필연성은 현실에서 별 볼일 없는 추상인가?

 

헤겔의 {착각=Täuschung}은 {나쁜} 필연성이 아니라 {좋은}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 필연성이라면 {착각=Täuschung}의 의미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착각=Täuschung}이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착각=Täuschung}은 긍정적인(positiv-ponere-setzen-gesetzt-정립된) 것이다. 이 정립은 우선 ‘이것’과 ‘저것(=이것이 아닌 것)’ 간의 관계인데, 어쨌든 ‘이것’과 ‘저것’을 바꾸는 행위다.

 

그래서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은 „지각하는 의식은 [이것과 저것을] 바꿔치기하는 가능성을 (혹은 이것과 저것을 바꿔치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번역 첫 시도에서 „Täuschung“을 „불량거래“로 번역한바 있다. "täuschen"(기만하다)의 어원 ”tauschen"(교환하다)에 기댄 번역이었다. 이제와서 보니 그리 틀린 번역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번역}이다. „täuschen“의 몸체에 있는 이런 'Schein'이 어떻게 다른 말의 몸체로 {번역}될 수 있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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