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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25
    목가와 소유
    ou_topia

목가와 소유

목가와 [배타적] 소유

 

가축 떼들의 [딸랑딸랑 멈추지 않는] 방울소리(Geläute)가 목가적이라고?  소박하고 평화로운 정경을 자아낸다고? 내 귀에는 그렇지 않다. 감각의 선입관이란 것도 있다.

우리가 말못하는 짐승을 어떤 상황에 묶어놓는지 그 형은 더할 나위없이 심하다. 그들은 발을 뗄 때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풀을 한입 뜯을 때마다 조잡한 방울소리(Gebimmel)의 고통을 겪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진동의 고통에 몽롱해져서 뼈가 앙상한 엉덩이에 내리치는 막대기의 때림 몇개 정도는 더이상 [아예] 감지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게 아니다. 다만 우리의 감동의 근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할 뿐이다.

소의 목에, 서정시적인 이유때문에 방울을 다는 농부는 없다.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소를 계속 청각적인 끈에 묶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네다리로 걸어다니는 소유물이, 아주 먼 고산지대의 목장에 풀어 방목할지라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한 농부는 그의 소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듣게 된다. 그럴 수 있는 한 농부는 그의 소유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런 걱정이 없는 한 편한 마음으로 다른 돈벌이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방울의 딸랑거림은 농부에게 정말 평온을 선사한다.

근데 우리는 어떤가? 왜 우리도 평온해 지는가? 왜 농부의 [배타적] 소유를 안전하게 하는 장치가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는가? 왜 이런 감동이 가장 자연적인 [자연과 일치하는] 자연감정이라고 우리 스스로 믿는가? 왜 [이성의 힘을] 느슨하게 하여 소유의 향유로 이해되는 것을 [다감다정한] 매력으로 왜곡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향유하는 건 대체 뭔가? 그리고 왜 뭔가를 향유하는가? 왜 그럴까? 조잡한 방울소리를 통해서 [‘나 도망가지 않고 여기 있어’하면서 자신의 소속을] 신고하고(sich melden) [‘나 네것이야’하면서 자신의 소속을] 확인하는(sich bestätigen)건 분명 우리 각자의 소유물이 절대 아닌데도 말이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우리의 소유다. 왜?

소유자와의 연대보다 더 강력한 연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무산자조차 이 연대를 철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목가시인 혹은 세칭 자연애호가의 흉내를 내면서 향유하는 건 저기 저 산중턱에서 이리저리 조잡한 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자연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비-자연이라는 사실이다. 덧붙이자면 전혀 무소속(Fremdes)인 것 또는 주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세계로 엄습할까 주의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려 잘 길들여진 우리의 세계에 속한다는, 즉 우리의 소유라는 사실이다.

우리 각자의 소유는 아니다. 시인한다. 아니, 시인할뿐만 아니라 아주 명확하게 재차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요점이기 때문이다. 조잡한 방울소리가 농부의 귀에는 앞에서 보앗듯이 분명 서정시를 읊을만큼 [우아한] 소리로 들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실용적으로 그리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소리로 들릴뿐이다. 반면 우리의 귀에는 분명 [우아하게] 들린다. 그 이유는 우리의 향유가 소유에 대한 향유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한편으로는 ‘소유 일반’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관계가 없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희귀한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알리바이가 없다면 조잡한 방울소리가 우리의 귀에 절대 서정시를 읊을만큼 우아한 소리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의(des Ästhetischen) 우회로는 [우리의 감각을 뒤집어 놓는 것으로서] 역겨운(widerwärtig) [길이다].

나를 가득 채우는 여기 이 반감은 수년 전부터 ‘영가’를 들을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반감과 똑 같은 반감이다. 니그로 노예의 입술은 [아예] 겸손을 말하게 강요되었다. 그가 노래를 함으로써 겸손을 표현하는 한 그는 그의 소유자로부터 벗어나 도주하지 않았다. ‘영가’가 과거에 무엇보다 감미로운 걸로 여겨지고 오늘날에 와서도 아직 그렇게 여겨지는데 (심지어 노예소유[제도]를 진정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의 귀에조차 그렇게 들리고 내 귀에도 역시 그렇게 들린다. 나도 역시 아직 [이런 감정의] 상속자다.) 이건 말못하는 짐승의 조잡한 방울소리가 우리 귀에 정취가 넘치는 소리로 들리는 게 우연이 아닌 것처럼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두 경우 다 목가적인 향유가 지배 및 소유의 향유를 은폐하고 있다. 두 경우 다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는 건 두말할 나위없이 우리에 속한 것들의 의지할데 없는 [가엾은] 상황이다. 여기서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도 역시 눈시울을 적신다.

제우스 신은 노래하지 않고 치터(Zither)도 치지 않는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노래하기는 어디까지나 노예의 의무에 속한다. 이건 노예가 제우스보다 노래를 더 잘해서가 아니라 – 제우스가 가끔 사교적인 차원에서 노예가 노래를 더 잘한다고 겸손을 떨기도 하지만 – 어디까지나 지배의 향유가 오직 밑에 깔린 자의 노래를 통해서만 실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가’는 분명 감미롭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감미로움은 밑에 깔린 자의 목소리를 거친 우회로를 통해서 권력자의 귀로 회귀하는 [불가항력적인] 권력(Uebermacht)의 감미로움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저기 산중턱에 정적이 감돈다. 조잡한 방울소리를 냈던 [소들이] 이제 외양간에서 서로 배를 맞대고 서 있다. 소유[물]이 소유자의 곁에 있고, 외양간의 문은 굳게 잠겨있고, 조잡한 방울소리는 필요없게 되었다. 전원극이 막을 내렸다. 어둠이 깔리고, 뭔가 내 뒤에서 바삭거렸다. 그게 뭔지 하늘이야 알 수 있겠지만, 그게 동물인지 혹은 [뜬금없이 지나가는] 바람소린지, 암튼 우리 세계가 아닌, 우리 소유[물]이 아닌 그 무엇이 바삭거렸다. 스산한 분위기가 맴돈다.  Nachhause.     

     

(귄터 안더스, Philosophische Stenogramme, Muenchen 1965, S.23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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