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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3/04
    새로운 법(8)
    ou_topia

새로운 법

프랑크푸르트 학파 3세대 크르스토프 멘케(Christopf Menke)의 2015.11 출간된 책 <Kritik der Rechte>의 일부를 소개한다. 마르크스의 인용으로 시작해서 레닌 인용으로 끝나는 약 500 쪽 분량의 책이다.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다소 선언문 성격을 갖는, 집필 후기처럼 첨부된 마지막 부분 <Recht und Gewalt>를 번역시도해서 올린다.       

일러두기:
- () 와 [] 는 저자가 사용. {} 역자 삽입 () 한문/원문 역자 삽입
- Recht가 법(law), 권리(right), 그리고 Rechtsstaat/법치국가에서 볼 수 있듯이 법치의 의미까지 두루 포함하고 있는 관계로 Recht의 번역이 어렵다. Rechte와 같이 '권리'의 의미가 분명하면 쉬운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 Gesetz는 법규로 번역했다.
- Sicherung은 보호 혹은 안전으로 번역했다.
- 주석은 번역하지 않았다.

 

 

법과 폭력


법의 사명은 폭력의 제한이다. 폭력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의 특수한 양식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양식이다. 이와 달리 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작용을 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의 폭력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단지 평등, 즉 권리주체 또는 시민의 지위를 부정하지 않는 침해를 야기하는 작용으로 제한할 뿐이다. (달리 말해서 나를 “해칠” 수 없는 폭력을 야기하는 작용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폭력을 제한함으로써 스스로 폭력적이다. 법이 이러함은 먼저 그 수단에 있다. 폭력으로 위협하고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폭력을 적용하지) 못한다면 법은 폭력의 제한을 관철할 수 없을 것이다. 폭력은 법의 규범적인 질서와 “공생하는”, 상징적인 차원의 유기적인 차원으로의 관계를 매개하는 “기제”다. 규범적인 질서로서의 법은 자신이 일정한 합의의 표출임을 주장해야 한다. 또한 법은 규범적인 질서로서 항상 우려되는 “불합의 위협”을 맞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법은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판정하고 처벌하는 가운데 가해자에게 맞섬으로써 법은 스스로 폭력적이다. 가해자의 (反)가해다.

그러나 법은 자신의 폭력을 이런 {차단기와 같은} 도구적인 역할로 제한할 수 없다. 법은 자신의 폭력을 {반성, 반추하는} 권력이 없다. 여기에 법의 본래적인 폭력 - 폭력의 폭력 – 이 깔려있다. 법적인 폭력의 폭력은 그 비제한성과 비통제성에 있다. 왜냐하면, 법의 폭력은 반복의 강제(Wiederholungszwang {의식 밑으로 밀려난 것이 강제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법은 {과거/gewesen 에서 유래되는} 강제가 본질(Wesen)을 이루기 때문에 반복의 강제를 중단할 수 없다.  법은 - 거론된 바와 같이 - 자신을 비규범적인 것(혹은 자연적인 것)에 反정립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그러듯이 이것을 규범성의 타자로 생산하는 규범성의 형태다. 그래서 법은 - 자신을 정립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자신의 타자를 反정립하기 때문에 – 폭력적으로 자신을 자신의 타자에 대항하여 무한정 관철시켜야 한다. “{폭력 제한} 목적이 법으로 등극하는 순간 […] 폭력이 퇴위하지 않고, 오히려 그 폭력이 비로서 [폭력을] 엄밀한 의미로, 즉 직접적으로 법정립적인 폭력으로 만들기“때문에 모든 “법정립”은 […] 권력정립이다.“ 법보존의 모든 행위에 근원적인 법정립의 “반복”이 집행된다. 이런 집행의 목적은 그저 이런저런 법규(Gesetz)의 성문화나 적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법 자체”의 확증에 있다. 그 근거는 이미 법의 등극을 통치했던 논리에 깔려있다. 법의 등극은 법 외의 것 혹은 법이 아닌 것(Nichtrecht)에 대한 법의 反정립이다. 법이 스스로 법과 법이 아닌 것의 대립을 정립하기 때문에 그 대립에 갇힌 포로로 남게 된다. 그래서 법은 단지 보존하고 규범적인 논리에 따라 집행(verfahren)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권력을 언제나 반복해서, 규범성의 이편에서, 법 외의 것에 반정립해야 한다. 법은 자신의 등극 행위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법의 숙명은 저 행위를 무한정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법적 폭력은 “신화적인”(mythisch {의식의 밑에 깔려 대상화되지 않는}) 폭력이다.

이 폭력을 근대의 법은 법과 법이 아닌 것의 대립을 달리 집행함으로써 깨려고 한다. 근대의 법이 법이 아닌 것에 대한 자신의 대립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동시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침해의 폭력을 제한하는 능력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대립을 자기 성찰의 양식으로 집행할 뿐이다. 법의 자기 성찰은 법이 자신을 법이 아닌 것과의 대립을 이루는 것으로 보는 가운데 법이 아닌 것과의 대립을 법 내부의 것으로 만든 데에 있다. 이렇게 하여 법의 자기 성찰은 권리(Rechte)의 근대적인 형식을 산출한다. 근대적인 형식의 권리는 법의 근본적인 목적(Bestimmung), 즉 폭력의 제한을 폭력, 즉 폭력으로서의 법 자체 에 적용한다. 권리는 법의 법이다 (Die Rechte sind das Recht des Rechts). 권리는 법이 아닌 것(혹은 자연적인 것)을  법문화함으로써 법의 폭력을 제한한다.

이 자기성찰적인 조작(操作)이 또한 시민권/시민법(bürgerliches Recht)의 근거다. 그의 “발생사”(마르크스)다. 이 과정에서 시민법/시민권은 근대 법의 이중적인 폭력 제한을 실현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의 제한 및 법적 제한이 행사하는 폭력의 제한이다. 다른 사람 뿐만 아니라 법 자체도 침해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의 사적인 권리(Ansprüche)를 확정함으로써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은 시민법/시민권(bürgerliches Gesetz)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여기에 시민{사회}의 법치(Gesetzesherrschaft)의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 시민법/시민권의 실체적인 의미는 사적인 것의 안전이다. 안전의 의미는 폭력으로부터의 안전이다. 여기서 폭력은 평등의 법으로 정당화되지 않은 모든 (자유 재량의) 사적 공간과 (참여의) 사적 능력에 대한 개입을 의미한다. 시민법/시민권의 기본 프로그램은 사적 권리를 폭력적인 침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민법/시민권은 법의 근대적 자기성찰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시민법/시민권의 불공평이 근거한다. 그 불공평의 근거는 안전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시민법의 불공평은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는 사적 권리에 법적인 권력을 부여하는데 있다. 법은 이렇게, 다시 말해서 실증주의적으로, 근대적인 자기성찰을 이해한다. 새로운 법이 시민법/시민권의 불공평성을 폐지하기를 원한다면 - 그리고 이것이, 본 바와 같이, 시민법/시민권 형식의 부정을 요구한다면 - 그러면 새로운 법은 부르주아/시민의 기본 프로그램 자체를 공격해야 한다. 새로운 법은 { 시민법/시민권의} 전제, 그 기본 등식을 물리치고 부르주아/시민 형식을 갖춘 법(Gesetz)이 그 “실체적인 의미”(Franz Neumann) 획득하는 전제, 즉 그 기본 등식을 거부해야 한다. 그 전제는 이런 내용이다. 법의 근대적인 자기성찰 - 근대적인 법을 이루는 자기성찰 - 의 의미는 사적 권리의 {법의} 폭력으로부터의 보호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법/시민권상의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는 서러 맞물려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보호는 폭력적인 침해로부터의 보호임과 동시에 또한 시민법/시민권이 그 보호를 집행하는 방식에 의해서 변화의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다. 있는 것과 주어진 것에 개입하는 변화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다. 시민법/시민권의 안전은 폭력에 대한 추상적인  항의다. 그 안전은 폭력과 폭력 간의 차이, 즉 침해의 폭력과 변화의 폭력 간의 차이를 도외시한다. 보호가 법문화한 것의 변화를 배제하기 때문에 사적 소유의(des Eigenen) 법적 보호는 있는 것의  보호와 분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안전이라는 시민/부르주아의 기본 프로그램은 전반적으로 反정치적인 프로그램임이 확인된다. 사적 소유의 법적 보호는 그것의 변화를 금하는 것이다. 시민법/시민권은 “실제로는 지배하지 못하는 지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남아 있는 비정치적 영역들의 내용을 실질적으로(materiell) 두루 관통하고”, 그 “구성 요소들을 뒤집어(revolutionieren) 비판 아래 두는 권력을 체념하기 때문이다.

반면, 새로운 법은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적인 관통과 혁명화을 위한 권력을 원한다. 새로운 법의  대항권리(Gegenrechte)는 {새로운 법의} 변증법적 자기성찰의 집행 형식이기 때문에 사적 소유의 시민/부르주아적 보호가 주어진 것에 부여한 가상(假想)을 해체한다. 새로운 법은 주어진 것을 정당화하는 것에 개입한다. 대항권리는 {주어진 것을} 참작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킨다. 대항권리는 참작된 {주어진 것의} 분리를 야기한다. 대항권리는 참착된 {주어진} 것의 참다운 모습을 “있는 것의 추한 얼굴”로부터 해방한다. 여기서 대항권리는 폭력을 행사한다. 대항권리는 폭력적이다.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로지 폭력을 행사하는 법만이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법은 폭력으로부터, 모든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게 하는 시민/부르주아 프로그램을 포기한다. 그러나 바로 새로운 법이 변화의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법이 예속된 („신화적인”) 반복강제를 깬다. 왜냐하면 변화의 폭력으로서의 폭력은 어느 때나 항상 목적의 달성과 함께 퇴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법은 스스로 자신을 해체하는 폭력을 갖는 법이다. 폭력 행사와 함께 “바로 […] 소멸하기 시작하는”{필자 주석, 레린, 국가와 혁명} 폭력이다. 새로운 법의 폭력은 해방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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