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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25
    я́ма(구덩이) 와 моги́ла(무덤) 간의 차이 - 지식인의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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я́ма(구덩이) 와 моги́ла(무덤) 간의 차이 - 지식인의 말하기

베를린에 오면 또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유럽에서 살다가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잊지 말라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유럽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이라고 번역한 적이 있는데 뭔가 아니다)이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반드시 지하 전시장을 들려야 한다. 이 ‘걸림돌’이 이야기하는 게 뭔지 알려면.

 

지하 전시장의 핵심어는 유대인 전통에 중요한 "기억하라"(זכור/자코르)다. 만행의 흔적을 다 불태워버린(홀로코스트) 나치에 대항하는 "기억하라"다.

 

거기에 기억을 위한 걸림돌이 되는 사료(史料) 중 마음을 짓누르는 사료가 하나 있다. 12살의 소녀가 죽음을 몇 분 앞두고 급히 아빠에게 쓴 몇 줄이다. 폴란드에서 살았던 유디트 비쉬니야쯔카야(Judith Wischnjatskaja)의 마지막 흔적이다.


나치가 얼마나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지 알 수 없다. 6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들 대부분이 집단수용소에서 가스와 학살노동으로 살인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200만 명 이상은 허허벌판에서 총살되었다. [독일제국군은 반인도적인 범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200만 명을 총살하는 것이 어떻게 제국군대의 도움 없이 가능하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함부르크사회연구소가 마련한 제국군대전시회(Wehrmachtausstellung)가 보여주었다.]  총살벌판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매장될 구덩이를 파야만 했었고 발가벗은 채 총살을 기다려야 했다. 구덩이로 떨어져 진 사람들은 확인 사살되었다.

 


줄을 지어 총살을 기다려야 했다. 유디트는 이렇게 자신의 총살을 앞두고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종이를 땅에 흘렸다. 소련 적군(赤軍)의 뒤를 따르면서 다시 해방된 지역에서 나치 만행의 흔적을 찾아내고 기록하여 ‘검은 책’을 발간하려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유태인반파쇼위원회 소속 사람들이었다.

 

이 중 한 장교가 유디트가 흘린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폴란드어로 쓰인 편지를 러시아로 번역하여 타이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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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핑한 장교는 유디트가 사용한 ‘구덩이’를 그어버리고 ‘무덤’으로 고친다. 왜 그랬을까? ‘구덩이’가 유디트의 존엄성에 맞지 않아서? ‘무덤’으로 고침으로서 유디트의 존엄성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지식인이 취해야 하는 자세는? 입만 빌려주면 될까?

 

"구덩이"를 "무덤"으로 고치는 행위 마음가짐에서 "유디트 되기“를 거부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탐지된다. "유디트가 되어야"하는 게 아닐까?   

 

질 들뢰즈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이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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