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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22
    횡설수설: 청소년 보호법, 인성교육진흥법, 그리고 … 마광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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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 청소년 보호법, 인성교육진흥법, 그리고 … 마광수 (1)

  1. 무엇이 문제일까?

 

글쓰기도 게임이다. 축구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리가 목적이다. 아니 한 팀의 선수가 되어 뛰는 게 재밌다. 근데 이런 재미를 마다하고 굳이 심판이 되어 균형을 잡아보려고 애쓰는 글쓰기도 있다. 이런 글은 재미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울을 자행하면서까지, 심판의 눈을 속일 수 있다면 마라돈나의 “신의 손”을 빌려서라도 이기려고 하는 게 경기에 임하는 자의 자세다. 져도 그냥 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광수의 글과 맛이 좋다.

 

인생도 게임이다. 가장 철저하게, 인생을 게임으로 산 사람은 아마 시이저(Caesar)일 거다. 결국, 자기이름을 카이저(: Kaiser/황제), 짜르(:Царь) 등 절대통치자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균형의 편에서 보자면 루비콘 저편에서, 게임에 임하는 선수의 편에서 보자면 루비콘 이편에서 밤을 꼬박 새면서 주사위를 만지작 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동트는 새벽, 주사위를 던지고 루비콘을 넘었다. 무엇을 걸었을까? Dignitas, 자신의 명예와 존엄이었다. 로마의 힘이 닫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재앙의 근원이 될 횡(橫斷)이 가져다 줄 결과를 빤히, 그리고 총체적으로 내다보면서, 흔들리는 마음(thymos)을 가다듬고 분노에 찬 열정(thymos)으로 계산을 버리고 미래란 배에 몸을 실었다 (플루타아크, 시이저, 32). 이렇게 균형의 편을 적으로 삼아 자신의 존엄을 관철시키고 판을 새로 짲다.

 

물론, 주사위가 문제다.

 

아타의 전사자를 한자리 수까지 파악하고 보고하기에 익숙한 시이저가 계산을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전쟁의 승산을 저울질하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를 향한 충()으로 다져진 갈리치아 전쟁의 정예군이 옆에 있었다. 균형 세력은 시이저의 행동을 공화국 이념에 대조하여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했다. 반면 시이저의 눈에는 사실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상황판단(Kritik)은 자신의 행위를 이념이란 거울에 비춰보지 않고, “하나의 사실을 다른 사실과 비교하고 대질하는 것”(“Vergleichung und Konfrontierung einer Tatsache […] mit der andren Tatsache”, MEW, 2판 후기 26)이었다. 아타의 역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주사위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떨어진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던진 것이다.

 

  1. 주사위

 

헤겔과 마르크스에서 답습한 게 있다면, 1만 연속 나오는 주사위가 있는가 하면 6만 연속 나오는 주사위가 있다는 걸 거다. 신이 눈을 봉하고 공평하게 떨어지도록 만든 게 아니라 그때그때의 역관계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것. 현대과학도 시금석(Maß)이 없다는 결론에 도착했다. 현실에 충실한 철학도 일찍이 이 결론에 도착했다.

 

플라톤은 법률 마지막 부분에서 (법률 12, 968a 이하) 이런저런 법들을 토론하고 난 다음 국가를 지킬 야간회의에 관한 제반 사항을 애기한다. 야간회의는 헌법재판소쯤 된다고 할까?

 

야간회의 소집 관련 법을 만들고, 이에 따라 야간회의를 구성해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유인즉, 야간회의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관련 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거다. 뱀이 자기 꼬리를 먹어가는 식이다. 요새 말로 하면 자기준거적(自己準據的: selbstreferentiell)이기 때문이랄까? 의사소통행위론이 해결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제시하는 문제와도 유사하다. 야간회의의 소재적 규정,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갖춰야 야간회의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법률은 [주권 행사를 하는] 회의로서의(κυρίους) 야간회의의 몫이라는 것.

 

결국 가르침/배움의 문제로 회부되는데, 야간회의 구성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직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서로 동지가 되어 머리를 맞대는 식으로”(μετὰ συνουσίας), 그것도 단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번 반복해서”(πολλῆς) – 장모음 이 주는 느낌으로는 끊임없이 – 서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모임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

 

이렇게 야간회의 준비모임의 형식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나서 거기서 애기되어야 할 소재적 사항을 세가지로 구분한다. 적격자 명부작성, [인성]교육 내용, 그리고 그 시작시기 및 기간을 규정하는 것.

 

이 세가지가 다 어렵다. 적격자 명부작성과 관련해서는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교육내용의 규정과 관련해서는 그걸 스스로 찾아 정하든 아니면 그걸 찾은 사람을 제자가 되어 그러든 다 “쉽지 않다”고 하고, 교육실행 관련 규정, 즉 시간규정과 관련해서는 그걸 명시적인 법률로 제정하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한다.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그 내용에 관한 지(ἐπιστήμην)가 어렴풋이나마 그 마음 안에 생성되어야만 비로서 적시(καιρὸν)에 배우고 있는지 안 그런지 알 수 있다는 것.

 

적격자 명부작성이 어렵다는 건 명시적으로 애기되진 않지만, 매우 어려울 것 같다. 감독관 적격자의 선출은 체질(φύσιν)에 따라 행해지는데 (πρὸς τὴν τῆς φυλακῆς φύσιν) 나이, 배움과 가르침 영역에서의 잠재력, 그리고 “τρόπων ἤθεσιν καὶ ἔθεσιν”이 그 체질을 규정하는 요소들이다. 원문 인용 부분의 번역이 어렵다. 트로포스의 영역에서의 애토스와 에토스를 참작해서 선출해야 한다는 말. 근데, 셋 다 성향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셋 낱말이 갖는 기본의미에 입각하여 번역을 시도해 본다. 트로포스는 탈구성이론이 참조한 trope의 어원으로서 ‘전환’이 그 기본의미다. 윤리의 어원인 애토스는 , 목장, 일상거주지가 그 기본의미다. “익숙한, 습관적”이란 의미의 에토스는 혼자서 사는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연대하는, 동지가 되는”이란 의미가 있다. 라틴어로는 연대(solidarity)의 어원인 sodalis로 번역된다. 이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한다. 목자가 목장에서 양과 더불어 살면서 [위기시 마다] 나아가야 할 길을, 전환의 길을 체험적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시할 줄 하는 능력과 유사한 능력을 참작하여.

 

야간회의 관련 법제정의 문제를 이렇게 전개해 놓고 플라톤은 이런 아포리 상황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지는 않지만 (ἀπόρρητα), 최소한 미리 말할 수 없는 금기사항(ἀπρόρρητα)이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지?”하고 묻자 주사위도 던지는데 한번 해보자고라고 말하고 끝맺는다.

 

 

3. 인성교육 vs 자유,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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