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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28
    애국
    ou_topia

애국

“어이 동무, 자네의 방패에 [아름답게 노래하는] 황금천사를 그려 달라 하지 말고, 붉은 사자를 그리게 날 내버려 두소. 난 어쩔 수 없네, 내겐 그게 익숙해. 자 보게나. 내가 황금천사를 그린다해도 그 천사는 붉은 사자의 모습일거네.”

어는 한 존경할 만한 예술가 동지의 이 말을 이 책이 머리에 둘렀으면 한다.

(…)

이제 내가 아주 겸손해진 건가?

세간의 겸손은 항상 합당한 근거가 있다는 걸 잊지 말게. 신은 자비로워서 보통 그의 사람들이 겸손이나 이와 유사한 미덕을 수행할 때 그걸 아주 쉽게 해 준다네. 예컨대, 원수에게 일침을 가할 만한 머리(Geist)가 없는 사람이 원수를 용서하는 건 – 그런 머리가 없는게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 은총을 입어 너무 볼품없는 코를 갖게 된 사람이 여성을 유혹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쉽다네.

(…)

신에게 감사! 6월 혁명이 그토록 얼어있던 혀를 풀어 주었다. 물론, 하루 아침에 깨어 일어난 사람들이 여태 하지 못했던 말을 단숨에 털어놓으려고 한 결과 내 귀를 종종 불쾌하기까지 몽롱하게 한 아우성이 수없이 일어났다. 이럴 때마다 말해야 하는 의무(Sprechamt)를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이 날 사로잡은게 정말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예를 들어 장관직을 포기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런  요직이 공화국의 가장 높은 호민관의 수익보다 훨씬 더 짭짤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행하고 추구하는 일이 공허한 선택이고, 새로운 이상의 창고에서 우리가 대변하고 실행하고 싸우고 괴로워하기로 결단한 이상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한다. 마치 어떤 문헌학자가 그가 주해를 달면서 평생을 보낼 고전 한 권을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상을 취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이상이 우리를 취하여 노예 삼고, 우릴 채찍질하여 투기장 안으로 밀어넣어  우리가 강요된 검투사처럼  그 이상을 위해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참다운 호민관 또는 사도직은 다 이렇다. 아모스가 아마지아 왕에게 “나는 선지가가 아닐뿐만 아니라 어떤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 뽕나무 밭에서 따다 남은 열매를 줍는 양치기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이 날 양떼에서 불러 이렇게 말씀하였다. ‘가서 예언하라.’”라고 말한 것은 의기양양한1 자백이었다. 그 볼품없는 수도승이 그의 교리때문에 보름스의 제국회의에 기소되어 황제 앞에 서서, 마음의 겸손을 다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어떤 철회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이게 [이 교리가] 나의 바탕이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도우소서, 아멘!’하고 끝을 맺었던 것은 의기양양한 자백이었다. 너희들이 이런 성스러운 강제가 뭔지 알았다면, 우리를 더 이상 나무라지, 더 이상 비방하지, 더 이상 중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 우리는 주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말의 종일 뿐이다.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가 “나는 자유의 노예다.”라고 한 것은 의기양양한 고백이었다."

(하인리히 하이네, 살롱 1권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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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wehmütig 애처로운. 이건 흐름상 말이 안된다. 어원사전과 그림사전을 찾아봤더니 원래 의미는 '분노'와 관계가 있다. 1800년 즈음까지 이런 의미로 사용. 하이네가 이 서설을 쓴 건 1833년이다. 그래도 하이네는 옛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의기양양하다'란 의미가 왜 '의기소침하다'란 의미로 전복되었는지 모르겠다. 독일 혁명의 실패에 따른 독일 브루주아 비더마이어시대의 '내향성'(Innerlichkeit)과 상관이 있는걸까?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