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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

이 책을 헌책방에서 사서 책장 어딘가에 꽂아두고 읽지는 않았다. 읽을 기회를 언제로 잡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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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배하는 '바보들' vs '반역'을 꿈꾸는 사람들 (프레시안, 윤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숭실대 강사, 2009-07-04 오전 9:04:18)
[철학자의 서재]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
◀ <대중의 반역>(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프레시안  
 
대중의 출현
마키아벨리가 보았듯이, 15세기 대중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 쉽게 현혹되고 해로운 것에는 쉽게 등을 돌리는 나약한 의지의 소유자이며 자신들을 이끄는 지도자에게 쉽게 복종하지만 쉽게 배반하기도 하는 다수의 무리였다. 그래서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군주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켄타우로스가 되어야 했다.
 
때론 권모술수와 기만을, 때론 진실된 정치로 선과 악덕을 모두 시행하는 그런 강력한 존재가 바로 군주였다. 그 군주 아래 민중들은 복종하고 의지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피지배 계층이며, 신분적으로는 하층민으로서 군주의 지배 아래에서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의존적 존재이자 자유가 박탈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회는 지배자로서의 군주와 피지배자로서의 민중으로 이끌어져 왔다.
 
자유민주주의와 과학 실증주의,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라는 세 원리가 작동하는 20세기의 민중은,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피지배 계층이지만, 신분적으로는 선천적 종속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다. 그들 앞에 놓인 과제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동적 삶을 살아왔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역사적 전환을 통해 얻어낸 자유는, 그 본래적 의미와는 다르게, 주체적이고 자기-의지적인 자립으로서의 자유가 아니었다. 그들의 자유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며 그 목표가 불명확하거나 아예 목적조차 없는 혼돈의 것이었다. 더구나 그 자유를 실현시키기에 적합한 사회-정치적 여건조차 구비하지 못한, 의미만 있을 뿐 실현 불가능한 절름발이 자유였다.
 
절뚝거리지 않으려면 뭔가 붙잡아야 하는데, 그들이 붙잡은 것은 모두가 비슷한 수준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평등 혹은 평준화라는 목발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목발이란 사람의 생김새에 따라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똑같은 목발을 대량 생산해서 하나씩 꿰차고 있다. 비슷하긴 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을 같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 그것이 바로 대중 사회의 시작이다.
 
대중 사회에 대한 문명사적 분석을 통한 대중의 자기 정체성 확립과 사회·정치적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를 제시하고자 한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바로 여기, 대중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대중을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로" 풀이한다. 경제의 급격한 발달과 그로 인한 사적 재산의 소유, 그리고 교육의 확산과 그로 인한 지적 욕구의 상승은 모든 사람을 대중의 울타리에 밀어 넣었다. 여기에서 탈락하거나 배제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지적 및 사회적으로 평준화된 사회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그들이 바로 대중이다. 이들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꼴사나운 것이며, 사회의 평균적 기준에 적합하게 자신을 만들어가야 한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만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남들이 누려야 할 만큼 누려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 기준에 미달하게 된다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져 재단된 사람들처럼, 길면 잘라내야 하는 것이고 짧으면 그 길이만큼 늘려야 하는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대중이 되어야 하며, 특별한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평준화된 사람들, 특별한 능력이 없는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로 형성된 대중들은 이전에도 있어 왔다. 이제껏 그들은 역사 속에서 그저 이름 없는 다수의 무리로서 묵묵히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스스로를 지배하려고 하며,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세계는 그런 대중들로 꽉 차 있다.
 
대중의 반역
텅 비어버린 은행 잔고, 갑자기 실업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당장 1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경제적 상황은 단지 나의 무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이 나라, 그리고 이 나라가 속해 있는 전 세계의 경제적 어려움에서 기인한 총체적 난국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평균적 삶은, 지구화니 세계화니 하는 말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전 지구적인 것과 관계된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공생의 원리를 우기지 않더라도 각 개인은 전 세계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세계 내에 존재한다.
 
오르테가는 이 삶을 가능성의 집합으로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삶이란 매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란 삶의 본질적 측면을 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능성이란 한 상황에 주어진 다양한 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그 유용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라 할 것이다. 만약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가능성이 단 하나뿐이라면, 그것에 가능성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을 것이며, 그 어떠한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이미 결정된 필연적 삶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삶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각 개인의 삶은 여러 가능성 가운데 실제로 희망하는 바를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삶의 본질적 두 요소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로서의 상황과, 그 가운데 가장 유효한 것을 찾으려는 선택으로 구성된다. 상황은 각 개인의 삶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딜레마로 다가오며, 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선택하며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제 세계가 각 개인의 삶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주어진 삶의 과정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대중들은 이제 세계라는 상황 속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지배하길 원하는 것, 그것이 오르테가가 말하는 바로 대중의 반역이다.
  
자기 삶에 있어 스스로 주인이 되길 원하는 대중의 반역은 국가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이러한 대중의 행동은 평균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만족에 국한될 뿐, 좀 더 먼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가능성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이러한 대중성은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정부로 하여금 문제에 부딪쳤을 때 지금 당장 피할 수 있는 단선적 방법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도망치고 나면 저기서 부딪치고 다시 저기서 도망치면 여기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대중의 권력은 점차 막강해지지만 그 가능성과 권위는 이전에 비해 더욱 축소되고 말 것이다.
 
대중의 권력은 평균에 다다르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중산계층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절대빈곤계층으로 전락시키거나 대중 예술의 향유라는 이름으로 문화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야만인으로 취급당하곤 한다. 피부색이 같지 않거나 성적 취향이 달라도 대중의 무리 속에서는 소외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대중이라는 권력의 이름으로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으로 드러난다.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억지라도 그 안에 들어가려 해야 하며, 자기 존재를 부인해야 하며, 평균을 유지하는 규범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오르테가가 <대중의 반역>을 통해 걱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력적 행위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도덕성이다. "대중은 자기 생활 체제의 중심에서 어떤 도덕에도 매이지 않은 채 살아가길 열망한다. (…) 하지만 대중은 단지 도덕을 갖고 있지 않을 뿐이다. 여기서 도덕이란 언제나 본질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복종의 감정이고 봉사와 의무에 대한 의식이다. (…) 만일 어떤 규범에도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면, 좋든 싫든 모든 도덕을 부정한다는 규범에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부도덕이다. 도덕의 텅 빈 형태만을 보존하고 있는 부정적 도덕이다."
 
더 이상 지배당하려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배하려는 대중, 복종과 복사의 의무에 대한 의식으로서 도덕을 갖지 않으려는 대중, 어떤 규범에도 복종하지 않으려하나 부정의 규범에는 복종하려는 대중,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정말 껍데기뿐인 도덕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대중의 도덕은 무엇인가?
 
새로운 반역을 꿈꾸며
오르테가가 본 대중은 무기력하고 특별한 능력이 없는 익명의 다수였지만, 현재의 대중은 행동하는 다수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자기 삶에 있어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사회의 부조리함을 무너뜨리려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거대 무리로 변화되었다. 대중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면서 자신을 둘러싼 주변 상황에서 좀 더 나은 가능성을 실현시키고자 강한 의지를 발휘하는 존재로 나아간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추모 집회를 비롯하여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광우병 의심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운동에 참여하여 촛불을 밝혔던 대중의 모습은 "대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 축구전사들의 승전을 빌었던 응원단의 모습과 함께 세상을 바꿔보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대중의 반역은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것만이 아니라 대중의 진정성, 혹은 도덕성의 표출을 통해 더 나은 대중 사회의 건설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만들 것이다.
 
여기에 발맞춰 대중은 기존의 복종이자 봉사와 의무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껍데기 도덕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도덕은 오르테가가 말한 평균적인 인간으로서의 동일성이 아닌 대중이면서도 그 다양함을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근대 이후의 대중이 단일한 사회적 목표 아래 단일한 생산 과정에 투여된 획일화된 대중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며 이 사회를 이끌어왔다면, 이제 대중은 다양한 삶의 활동 방식과 목적을 가지고 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대중은 새로운 역사적 주체이자 정치적 주체인 다중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르테가가 대중의 출현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현대는 다중의 출현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중은 대중들과는 달리 서로 다른 특이한 관심사, 생활양식, 지향성 등을 갖고 있으나 서로가 사회적 수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언어로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는 생산자들이라 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다양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인이며, 사회와 지속적인 연대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무리이다.
 
각자 자신의 삶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대중의 힘이 필요한 공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활동하는 대중, 그들이 바로 다중인 것이다. 수동적 다수로서의 대중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자 반역을 일으켰다면, 이제 자신의 주인이자 세계의 주인으로서 새로운 반역을 꿈꿀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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