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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정책토크] 복지국가와 세금 : 부자증세부터 보편증세까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20920132322
"증세 얘기하면 필패" vs "폭발적 증세운동 가능" (프레시안, 최하얀 기자, 2012-09-21 오전 10:11:37)
[2012 정책토크] 복지국가와 세금 : 부자증세부터 보편증세까지
박용대 : 한 정권이 가진 시간은 5년뿐이다. 따라서 차기 정권에서 복지를 확대함에 있어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우선되어야 할 복지 정책이란 무엇일까.
오건호 :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가 우선되어야 한다. 특히 기초생활보장제도 확대가 중요하다. 지난 2~3년간의 복지 논쟁은 '보편적 사회서비스 확충'을 중심에 놓고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복지 예산이 사회서비스 확대에만 투하되는 한계가 생겼다. 반면 장애인, 기초생활수급자 등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예산은 오히려 동결됐다. 복지, 복지 외치는 동안 가장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는 되레 축소된 셈이다.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를 확립하고 나서 전 계층을 상대로 한 보편복지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무엇보다 '무상의료'가 시급하다고 본다. 개인이 보험료를 제외한 의료비로 연 100만 원 이상을 부담하지 않는 '건강보험 하나로' 방식으로 무상의료를 전면화해야 한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국민 한 명이 평균 약 1만1000원 정도의 보험료를 더 내고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올리자는 거다. 건보가 대략 24조 원을 더 확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단 1원도 더 내지 않는 무상의료를 실현할 수 있다. 다만 24조 원을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개인이 최대 100만 원의 의료비만 부담하도록 하고 그 이상은 건보가 부담하게 하면 필요한 재원은 14조 원이 된다. 이걸 정부와 기업에 나눠서 부담하게 하자는 거다. 물론 반발이 있겠지만, 국민들이 먼저 나서서 "1만1000원 더 낸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따라올 거라고 본다.
윤홍식 : '공공부조'가 언제나 빈곤과 불평등의 해결책인 것은 아니었다. 전체 사회지출 예산의 18%를 공공부조에 쏟아 붓는 미국의 빈곤율은 예산의 1%만 공공부조에 쏟아 붓는 스웨덴보다 훨씬 높다. 한국은 보편적 소등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조건에서 오로지 공공부조에만 의지해 왔을 뿐이다. 이제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부조 정책에 한계가 보인다. 보편적 소득보장을 얘기해야 한다. 기초연금, 아동수당, 학생수당, 실업수당 등을 더 확충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용대 : 스웨덴 복지도 보편적 소득보장 우선방식인가?
윤홍식 : 그렇다. 스웨덴은 보편적 소득보장을 먼저 하고, 그래도 부족한 사람들에게만 공공부조가 투여된다. 스웨덴에서 공공부조는 잔여적 개념이다.
오건호 : 하지만 한국과 스웨덴은 복지의 토대 자체가 다르다. 보편적 소득보장을 우선하고 사각지대마다 공공부조를 집어넣기에는 상황이 너무 척박하다. 현재 조건에서 스웨덴만큼 두껍게 보편 복지를 일단 깔 수가 없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보편적 의료복지를 도입하되, 가장 고통 받는 취약 계층을 중심으로 공공부조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윤홍식 : 취약계층 지원과 보편적 소득보장이 서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 소등보장을 하면 취약계층도 혜택을 받는다. 보편적 사회서비스의 원칙은 누구나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한 방식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모범적 복지국가로 불리는 스웨덴은 세금도 서비스 이용부담도 모두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부담한다.
박용대 : 이제 재정 얘기로 넘어가 보자. 지금 나온 복지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새누리당은 약 10조~20조 사이가 필요해보이고, 시민ㆍ사회 진영의 요구대로면 25조~30조가량 필요할 거 같다. 어느 쪽으로 가든 '증세'는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해 보인다.
오건호 :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예산이 정확히 얼마인지 계산부터 해야 한다. 아직까지 이게 계산이 안 됐다. 그래서 작년에 복지 재원 논쟁이 불붙은 이후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민주당 복지 공약들을 바탕으로 계산하면 약 55조~60조 원이 필요하다. 통합진보당 공약도 마찬가지 예산이 든다. 필요한 정책을 일단 툭툭 던져만 놨다. 이 정도 예산이 필요하단 사실을 전제로 놓고 대선 레이스를 시작하지 않으면, 기획재정부가 다시 발목을 잡을 거다. 계속 도망 다니면서 돈 얘기를 안 할 수는 없다. 필요 예산을 확정해놓고, 그 다음부터 지출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재원 마련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며 청사진 그렸어야 한다. 지금은 첫 단추도 못 끼웠다.
윤홍식 : 하지만 역사적으로 복지 재원 확보를 위해 싸운 사례는 없다. 어느 나라이든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우선 '정책'들을 추진하고, 그 정책을 추진한 집단이 정권을 잡으면 재원을 마련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대선 정국에서 복지가 갑자기 수면 아래로 사라진 것은 돈 얘기를 안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복지 공약들을 정당이 받고 안 받고는 복지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대중들의 조직적 요구가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지난 4.11 총선 때는 그게 없었다. 이런 조직적 흐름 만들기 위해서는 돈 얘기가 아니라 복지에 관한 비전을 내세울 때다.
오건호 : 나는 사람들이 진짜로 궁금해 한다고 생각한다. 돈이 얼마큼 필요한지, 내 주머니에서 얼마큼 나가야 하는 건지 등을 알고 싶어 한다고 본다. 복지 국가 비전도 중요하고, 대중 조직도 물론 중요하다. 예컨대 '우리가 2017년에는 이런 모습으로 산다'란 걸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돈 얘기를 함께 해야 한다. 이렇게 전체를 패키지로 해서, 재정 로드맵도 제출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성실한 답변'이 필요하단 거다.
윤홍식 : 복지 정책의 실현 가능성은 돈에 달린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합의에 달린 것이라고 본다. 예컨대 민생치안을 위해 경찰력을 늘리겠다는 정부 계획이 나왔을 때 재원 논쟁이 붙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합의하면 돈은 딸려 온다. 게다가 선거다. 선거에서 '증세'를 아젠다로 승리한 정당이 역사적으로 있는지도 의문이다. 증세 얘기하면 선거에서 진다. 보수한테 이길 수가 없다.
오건호 : 대부분 사회복지학자들을 보면 준거모델이 항상 유럽이다. 그런데 복지 확대한 2차 대전 직후의 유럽과 현재 한국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당시 유럽은 노사조합적 시스템이 갖춰졌었고, 경제도 잘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의 유럽만큼의 진보정당, 노조가 없다. 정당과 노조 기반으로는 복지를 절대 못할 거다. 나는 한국의 복지국가 경로는 지구상의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 될 거라고 본다.
증세 논쟁하면 진다고 하셨는데, 보편 증세 과감히 터뜨려서 폭발력 만들 수 있다고 본다. 2008년 촛불과 2010년 무상급식 상황을 돌아보면, 한국에서 독특하게 생기고 있는 연성 권력자원이 있다. 기존의 제도화된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권력 자원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고 본다.
윤홍식 : 특수성은 보편성 하에 존재한다. 물론 권력 자원이 언제나 노동자ㆍ농민이란 것은 아니다.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주체는 어쨌든 필요하다. 서구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그 주체가 노동자나 좌파라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지금 여기서 재원 논쟁을 시작하면 보수진영이 던져놓은 덫에 걸려들까 우려된다.
보편적 복지는 보편증세를 통해야 가능하다. 다만 '단계'가 필요하다고는 본다. 지금 사람들이 가장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금'이다. 따라서 복지 국가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아킬레스건인 세금 제도를 공정하게 만드는 것은 굉장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부자 증세를 통해서 조세 형평성을 키우고, 지출구조 효율화를 해서 마련된 돈으로 가장 필요한 복지를 먼저 하고, 국민들이 그 복지를 체감할 때 사회적 합의 이끌면서 보편 증세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게 차기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박용대 : 재원이 확실히 부족하다는 말씀인데, 바로 보편 증세를 하면 반감이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고 보는 건가?
윤홍식 : 어차피 큰돈을 다 모아도 제대로 못 쓴다고 보는 게 적당하다. 복지는 인프라 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거 단기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장 30조~40조 원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도 시간이 든다. 이 기간 동안 충분히 사회적 합의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 지금 100조 원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공공복지 인프라가 이렇게 부족한 현실에서, 그 많은 돈은 결국 민간 없자들 배만 불리게 될 것이다.
오건호 : 지금 부자 증세도 잘못된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복지 정책들을 쫙 리스트에 계산기를 툭툭 두들겨서 증세 페이퍼 두 세장 제출하고 끝냈다. 보편 증세를 위해서는 재원 확충을 위한 정치, 즉 '증세 정치'가 필요하다. 재원은 필요한데 세금과 공공에 대한 불신이 많으므로 조세 저항이 있기 때문이다. 그간 복지 민심이 축적되어 왔다. 예컨대 2010년까지는 세금 얘기만 나오면 다들 화부터 냈다. 그런데 2010년 무상급식 논쟁을 터닝 포인트로 복지 요구가 선별에서 보편으로 돌아섰다. 이 하나로 뭉치기 어려운 양가적 감정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복지 민심을 가지고 폭발적인 보편 증세 운동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윤홍식 : 조세 저항이 과연 사라질까? 스웨덴 사람들도 "우리 낼 만큼 내고 있다. 부자들 너네 더 내라. 불공평하다"란 얘기 한다. 복지에 만족하니 "나 세금 낼래!"라고 할 사람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웨덴 등에서 조세 저항이 있음에도 복지가 지탱이 되는 것은, 세금을 내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의 세금이 복지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감내'하는 것이다.
오건호 : 스웨덴 사람들에게도 조세 저항이 있다는 사실, 그게 중요하다. 나는 한국에서 가장 왜곡된 여론이 세금에 관한 여론이다. 세금을 왜 내는지도 모르고, 세금에 대한 교육도 없었고, 세금을 얼마나 내는지도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들이 세금에 대해서 접하는 것은 "어떤 공무원이 탈세했다" 이런 자극적인 기사뿐이다. 사람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세금 내고 있는 지를 수면 위로 노출시킬 필요가 있다. 세금 폭탄이라고 자꾸 말하는데, 그 폭탄 수류탄 뽑고 던져보자는 거다.
오건호 : 민주당을 비롯하여 정치권, 너무 안이하다. 복지 공약과 그를 위해 필요한 재정들을 국민들이 궁금해 한다. 유권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답을 정치권이 내놓아야 한다.
윤홍기 : 복지는 정치다. 정치는 프레임 싸움이다. 프레임 싸움에서 이겨야 복지국가가 가능하다. 이런 부분을 대선 국면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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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페스의 <미래를 위한 경제학> 서평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921172205
자본주의에 침묵하는 환경 운동, 틀렸다! (프레시안,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 2012-09-21 오후 6:43:47)
[장석준의 '적록 서재'] 제임스 스페스의 <미래를 위한 경제학>
한국의 서점가에도 이제는 '녹색' 사조에 속하는 책들이 제법 된다. <녹색평론>이 외롭게 선구자의 지위를 점하던 시대는 이미 옛말이다. 찾아보면, 석유 고갈을 경고하는 책들도 꽤 있고, 기후 변화 관련서도 적지 않다. 또한 먹을거리에서부터 집짓기, 은퇴 후 귀농까지 녹색 생활양식으로 전환할 것을 권하는 책들도 쉽게 손에 집어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녹색' 서적들 중에 끝까지 읽었을 때 그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은 별로 없다. 항상 결론 부분이 문제다. 뭔가 천편일률의 느낌을 준다. 문제제기는 거창하고 정세 인식도 절박하기 짝이 없는데, 결론은 모두들 개인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데 머문다. 아니면, 위기론에 비해서는 태평하게만 느껴지는 파편적인 정책들의 나열로 끝나든가 말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의 <미래를 위한 경제학 : 자본주의를 넘어선 상상(The Bridge at the Edge of the World: Capitalism, the Environment and Crossing from Crisis to Sustainability>(이경아 옮김, 모티브북 펴냄)은 그 얼마 안 되는 예외들 중 하나다.
사실 이 책은 그렇게 독창적인 저서는 아니다. 생태 위기와 그 대안에 대한 기존의 여러 논의들을 종합 정리한 성격의 책이다. 따라서 생태 문제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는 퍽 도움이 되지만, 이미 이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에게는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저자의 이력 때문이다. 스페스는 어느 모로 보나 '주류'에 속하는 인물이다.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의 환경 자문 위원으로 활동한 것도 그렇고,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유엔개발계획(UNDP) 사무총장을 역임한 것도 그렇다. 환경 운동 중에서도 흔히 '환경 보호주의'로 불리는 온건한 흐름의 대표자이고, 그 안에서도 최상층 엘리트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런 저자가 쓴 책이라면, 자연히 다른 환경 관련 책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론으로 끝나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바로 이 점에 이 책의 독특함이 있다. 주류 환경 운동의 대표자가 썼는데, 그 주류 환경 운동을 비판한다. 위기의 근본적이고 거대한 원인과는 동떨어진 공학적 대안이나 도덕적 훈계로 끝나고 마는 그 구조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아니, 비판이기 이전에 반성이다. 자신이 40여 년간 참여해온 그 환경 운동에도 불구하고 왜 생태 위기는 더욱 확대되고만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다. 스페스에게 이 반성의 핵심은 이제까지 환경 운동 진영이 생태 위기를 고발하면서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말하지 않고 우회해온 한 가지 단어를 끄집어내는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다.
스페스는 책 전체에 걸쳐 생태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이며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생태 위기 극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이제까지 환경 운동이 시간을 낭비하며 변죽만 울린 것은 이 사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라도 진짜 적과 제대로 싸워야 한다고 촉구한다. "생태 위기를 해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대결하라."
자본주의와 생태계의 모순 지점 : 성장
사실 이런 주장 자체는 이미 수많은 생태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것이다. 어쩌면 스페스는 이들의 주장을 '뒤늦게' 받아들인 데 불과하다. 하지만 다름 아닌 스페스 같은 사람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게 중요하다. 스스로 체제의 '내부자'임을 자처하는 그가 '자본주의'를 생태 위기의 뿌리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했다는 게 인상적이다.
책 첫머리에서 스페스는 오늘날 지구 생태계 위기를 여덟 가지 측면으로 정리한다. 기후 혼란, 삼림 감소, 토양 유실, 담수 감소, 해양 수산 자원 감소, 유독성 오염물질, 생물 다양성 훼손, 질소로 인한 과영양화. 이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기후 혼란이다. 이에 대해서, 스페스처럼 체제 '내부자'이면서 불편한 예언자 역할을 꺼리지 않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기후학자 제임스 한센은 이렇게 지적한다.
"현재 문명은 1만 2000년 동안만 비교적 기후가 안정적인 충적세에 들어 발전했다. 지구의 기온은 북미와 유럽에서 빙하가 녹을 정도로 상승했지만, 그린란드와 남극 대륙의 빙하를 다 녹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평균 기온이 0.6도씩 급속도로 상승함으로써 지구의 기온은 충적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지구 온난화로 우리는 거대한 '정점' 직전의 낭떠러지로 내몰렸다. 우리가 낭떠러지를 건너면 그 건너편에는 지금과 완연히 '다른' 지구가 나타날 것이다. 인류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환경 말이다. (…) 우리는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기후 변화의 시작을 막을 기회를 잡기 위해 10년 안에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55~56쪽)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우리의 문명은 충적세 문명이었다. 지구 역사상 예외적으로 광범한 온대 기후대가 등장한 충적세라는 조건에 기반을 두고 우리의 문명 전체가 존립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참으로 희귀한 이 기후 균형 위에 가까스로 서 있는 꼴이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그 균형을 우리 스스로 깨뜨렸다. 인류 문명의 등장을 허용한 그 조건이 지금 인류 자신이 초래한 결과들로 인해 허물어지고 있다.
문제는 성장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인류는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성장은 지구 생태계의 모든 균형을 깨뜨릴 정도로 급속하고 거대하게 진행되고 있다. 스페스가 인용하는 경제사가 앵거스 매디슨은 이 양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제시한다.
"1000년에 지구의 인구는 고작 2억7000만 명이었다. 현재 미국의 인구보다도 적은 숫자이다. 세계 경제의 생산량은 120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800년 후에도 사람이 만든 세계는 여전히 작았다. 1820년 즈음 세계 인구는 10억 명으로 늘었지만 경제의 생산량은 6900억 달러에 불과했다. 800년 동안 1인당 소득은 1년에 겨우 200달러 정도 늘었다.
하지만 그 후부터 비약적인 성장이 시작되었다. 2000년에 인구는 50억 명이 더 늘었으며 놀랍게도 경제 생산량은 40조 달러가 넘었다.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세계 경제의 규모는 1960년 이후로 두 배로 성장했고 곧 다시 두 배로 늘어날 것이다. 세계의 경제 활동은 50년 후면 다시 네 배가 될 것이다." (27쪽)
이런 전례 없는 성장이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산업 자본주의가 등장한 1800년 무렵부터다. 이 시기를 전환점으로, "고용주들이 이윤을 내기 위해, 시장에서 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려고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경제 체제"(97쪽)인 자본주의가 인류 문명과 지구 생태계 사이의 관계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다.
개별 자본이 끊임없이 이윤을 확보하고 축적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 체제에는 지속적이고 폭발적인 확장 경향이 내재해 있다. 계속 덩치가 불어나야만 피가 돈다. 확장이 멈추는 순간, 곧 임종이다. 그래서 이 체제에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 일단 지구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낸 뒤에는 두 눈을 가린 채 성장의 질주를 계속하는 수밖에는 없다.
이 질주를 중단시켜야 한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환경 보호주의는 이 질주로부터 비롯되는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땜질 처방만을 계속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시시포스의 노동이었다. 이곳을 때우면 저곳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한 곳을 때우면 또 다른 여러 곳에서 문제가 폭발했다. 어떤 때는 땜질한 곳이 다시 터져 더 이상 손 쓸 수 없게 되었다. 생태 위기는 항상 환경 운동을 추월했다.
책 곳곳에서 우리는 이러한 환경 운동의 한계에 대한 스페스의 회한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회한은 결코 패배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 책의 목표는 운동의 한 세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대의 운동을 시작하는 데 있다. 스페스가 염원하는 새로운 운동은 자본주의적 성장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탈성장 : '정지 상태' 개념의 귀환
하지만 성장 자체에 도전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성장'은 이미 자본가들만의 깃발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도전의 후보자로 제시되는 세력들도 성장에 미련을 갖는다. 한국에서도 2007년 대선 즈음에 이른바 '진보적 성장'이 유행어가 된 적이 있다. 우파만이 아니라 좌파도 '성장'을 중심에 놓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만큼 좌파의 잠재 지지자들에게도 '성장'은 호소력 있는 긍정적인 가치다.
'탈성장'이라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적 성장에 무턱대고 동의하는 입장을 논파하려면 좀 더 분석적인 접근과 차근차근할 설득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페스도 자신의 책 상당 부분을 성장에 대한 이러한 성찰에 할애한다.
그는 우리가 '성장'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이 사실은 세 가지 서로 다른 맥락을 함축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 첫째는 생산의 성장, 즉 재화와 용역 및 정부 지출의 양적 크기의 확대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성장의 표준적 의미로서, 우리는 이를 흔히 국내 총생산(GDP) 수치로 나타내곤 한다.
두 번째는 이러한 생산의 성장에 반드시 수반되는 생물 물리학적 처리량의 성장이다. 여기에서 '처리량'이란 "자연계에서 얻어서 경제에서 사용되며 조만간 폐기물로 나타나는 모든 재료"(162쪽)를 포함한다. 처리량과 처리량의 증가는 경제 확대로 인한 생태계의 부담을 뜻한다. 현 경제에서는 GDP가 증대할수록 처리량 역시 이에 비례해 증가하게 되어 있다.
세 번째는 인간 복지의 성장이다. 이것은 사실 '성장'이라기보다는 '발전'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다. 하지만 대다수 민중은 '성장'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실은 이 의미를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GDP로는 결코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경제 복지 지수, 인간 개발 지수 등 대안적 경제 사회 지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상의 구분에 따른다면,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생산의 성장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처리량을 급증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복지의 성장과 직결되지 않는다. 스페스를 비롯해서 생태적 탈성장론자들이 이야기하는 '탈성장'은 곧 이러한 의미의 '성장'과 단절하자는 것이다.
그럼 성장 '이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이제는 인간 복지의 성장이 첫 자리에 놓여야 한다. 처리량의 증가를 최소화하면서 인간 복지의 성장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산의 성장은 종속 변수로서 조절된다. 이것을 계속 '성장'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가 절대시하는 '성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임에 분명하다. 스페스는 이렇게 말한다.
"성장을 끝내야 한다고 해서 개발까지 끝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정의하는 개발은 양적 변화, 잠재력의 실현, 구조나 체제의 몸집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질적 개선 등을 의미한다. 즉, 주어진 처리량으로 재화와 용역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여기서 질이란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172쪽)
이런 사회가 꼭 정적인 상태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 활동들 중에는 GDP 수치에 재화와 용역 증가로 잡히는 쪽보다는 잡히지 않는 쪽이 훨씬 더 많다. 생산량과 그에 비례한 처리량을 늘리지 않으면서도 혹은 완만하게만 늘리면서도 사회의 활기를 높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년간 인류가 경험한 상태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어떤 상태일 것만은 틀림없다. 몇 세대에 걸쳐 경제 활동의 유례없는 확대를 경험하고 난 뒤의 진정 국면. 고전파 정치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이 필연적 국면을 예감하고 여기에 '정지 상태(stationary state)'라는 이름을 붙였다. 벌써 150년 전에 밀은 인류가 이 정지 상태에 익숙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순히 대지로 하여금 더 많은 인구, 그렇지만 반드시 더 낫거나 더 행복하지는 않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 부와 인구의 무한한 증가를 위해 대지에서 뿌리를 뽑혀야 하는 것들 덕분에 가능한 기쁨 가운데 커다란 분량을 상실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후손들은 어차피 필연성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이 강제되기 훨씬 전에 정지 상태에 만족하게 되기를 나는 후손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바란다." (<정치경제학 원리 4 : 사회 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나남출판 펴냄))
탈성장론은 어찌 보면 이 '정지 상태'론의 귀환이라 할 수 있다. 경제 활동의 예외적인 확대는 어느 시점에서는 더 이상 바람직하기도 않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 예외 국면 이후에는 반드시 조정 국면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상 비대증에 빠진 경제 활동을 동결 혹은 축소하고 이를 전체 인간 활동 속에 다시 끼워 맞춰야 한다. 2008년 위기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인류사적 조정 국면의 조짐은 아닐까?
'정지 상태'라고 해서 우울해 할 이유는 없다. '정지'된 게 실은 파괴를 수반한 생산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과거의 모험의 '정지'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은 오히려 정지 상태를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자유의 왕국' 비슷한 가능성이 꽃필 기회로 바라보았다.
"자본과 인구의 정지 상태라고 해서 인간적 향상이 정지된 상태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도 없다. 모든 종류의 정신적 교양, 도덕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공간은 이전과 같이 넓을 것이다. 살아가는 기술을 향상할 수 있는 여지는 전과 다름없이 넓은데, 정신이 살아남는 기술에 몰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향상이 일어날 확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심지어 산업의 기술도 전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연구되어 성공을 거둘 텐데, 그것이 오로지 부의 증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 다시 말해서 노동을 절감한다고 하는 본래의 정당한 효과가 산업의 향상으로써 빚어진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일 것이다." (<정치경제학 원리 4 : 사회 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 96쪽)
'비사회주의적' 대안 사회를 향해
자본주의에게 성장 광기가 필연이라면, 경제 활동의 위상 재조정은 반드시 또 다른 구조 변화와 함께 해야만 하다. 즉, 경제 활동의 팽창을 통해 등장한 권력관계의 철폐가 동시에 이뤄져야만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의 과제로 여겨온 영역이다.
<미래를 위한 경제학>의 후반부는 바로 이 영역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기업의 소유 및 지배 구조를 논하고, 국가의 자본 통제에 대해 짚는다. 통상의 환경 서적 결론부에 비하면 좀 낯선 논의들이다. 그러나 스페스는 이제 이런 쟁점들이야말로 '녹색'의 주된 관심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과 권력의 변혁을 이야기하지 않는 '녹색'은 쉽게 자본과 권력의 먹이가 될 뿐이다.
스페스는 앞선 논의들과 마찬가지로 대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선행 논의들을 끌어와 종합을 시도한다.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현재의 자본주의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페스는 굳이 이를 '사회주의'라 부르는 것은 피한다. 오히려 '비사회주의적' 대안 사회 식으로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애써 부인하려 한다.
과거의 사회주의가 워낙 과오가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스페스가 미국 쪽 저자인 것도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스의 대안은 큰 틀에서 현대 사회주의자들의 고민과 일치한다. 가령 기업의 지배 구조를 "주주, 직원, 노조, 미래 세대, 정부, 소비자, 각종 공동체와 공급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형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253쪽)은 자본주의적 주식회사와 현실 사회주의식 국영 기업 모두의 대안으로 공감할 만한 것이다.
스페스가 특히 의존하는 것은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가르 알페로비츠가 자신의 저서 <America beyond Capitalism>에서 제시한 대안 사회 구상이다. 알페로비츠는 금융 자본주의의 광기가 휩쓸고 지나가는 와중에도 미국의 각 지역에서는 '부의 민주화'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종업원 소유제, 공공 소유제,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민간 및 공공 부문 기업 등이 묵묵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페로비츠는 이러한 대안적 기업들을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경제권으로 만들고 이를 확대한다면 '미국적 방식'의 자본주의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 전망한다. 스페스는 이러한 비전에 공감한다. 그래서 기업의 소유 및 지배 구조가 이런 식으로 바뀌어가면서 사회가 비로소 성장 강박에서 벗어날 것이라 내다본다.
이름이야 뭐든 좋다. '녹색 사회주의'라 하든, 스페스처럼 기어코 '비사회주의적'(더 정확히 말하면, '비-국가 사회주의적') 대안 사회라 하든, 상관없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인식과, 이에 따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인식과 노력 속에서 '녹색'은 반드시 '적색'의 가장 훌륭한 전통과 만나야 한다. 스페스의 '전향'은 그 살아 있는 사례이고, 그의 책은 그래서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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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책임총리제ㆍ정당책임정치'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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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 대한 ‘10가지 비판’ 반박-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테리 이글턴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2/09/12/0901000000AKR20120912095500005.HTML
이글턴 "마르크스는 획일성 아닌 다양성 추구"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2012/09/12 11:21)
전 세계적으로 경기침체가 깊어지면서 마르크스주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출판계에도 마르크스주의를 재조명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간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는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평론가이자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 랭카스터대 교수의 최신작이다.
"마르크스만큼 곡해된 사상가도 없었다"고 말하는 이글턴 교수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에 가해진 10가지 '표준적' 비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 중 하나가 '마르크스주의는 폭력적이라는 것'. 마르크스주의 하면 흔히 유혈 낭자한 혁명과 봉기가 떠오른다. 이에 대해 이글턴 교수는 "마르크스는 어떤 혁명은 평화적으로 완수될 수 있었다고 믿었고 사회 개혁에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그는 혁명은 폭력과 혼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개혁은 평화롭고 온건한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대립"이라면서 미국의 민권운동 등 "전혀 평화롭지 않은 개혁들도 많았다"고 지적한다.
이글턴 교수에 따르면 몇몇 혁명들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대표적인 사례가 벨벳 혁명. 1989년 체코의 공산정권 붕괴를 불러온 벨벳 혁명은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 혁명이었으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도 놀랄 정도로 유혈이 적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역사가 전 지구적 전쟁과 식민주의적 착취, 인종학살, 기근 등으로 점철돼 있다고 이글턴 교수는 지적한다.
또 '마르크스주의가 우리 모두를 획일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마르크스에게는 제각기 독특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유일한 정치적 목표였으며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깊은 도덕적, 정신적 확신과 온전히 양립 가능하다고 반박한다.
"마르크스는 개인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추상적인 교리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었다. 그는 완벽한 사회(유토피아)라는 개념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고 평등이란 관념을 경계했으며 우리 모두가 등에 사회보험 번호가 찍힌 작업복을 입는 미래를 꿈꾸지 않았다. 그가 보고 싶어했던 건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었다."
아일랜드계 노동자 집안에서 로마가톨릭 신자로 자란 이글턴 교수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비평과 '제도'로서의 영문학을 분석해 명성을 얻었으며 문학과 문화, 비평과 이론 등에 걸쳐 40여 권의 책을 냈다.
하지만 저자의 이름만 듣고 책이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이 책은 전작들과 달리 마르스크주의의 본질을 파헤치는 통찰력과 품위를 갖춘 대중 교양서에 가깝다. 책을 옮긴 황정아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는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가운데 근거가 없지 않은 항목들이나 마르크스 자신의 요령부득한 발언들에 대해서도 '건전한' 상식에 기대어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는 태도를 취한다"고 소개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51778.html
마르크스에 대한 ‘10가지 비판’ 반박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2.09.14 20:21)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길·1만7000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69)은 2년 전 방한 당시 자신의 새 책을 예고한 적이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뒤로 카를 마르크스(1818~1883·사진 오른쪽)의 비전이 옳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했으며,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풀이하는 내용의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최근 출간된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가 그가 예고했던 바로 그 책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비판 열 가지를 고르고, 그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특유의 유머를 섞어 조목조목 반박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동안 써냈던 난해한 문화비평 작업들과는 사뭇 결이 다른 대중교양서다.
이글턴이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들을 반박하는 것은 단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너무도 확고한 현실이 돼버린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를 바꿀 가능성마저 무력화시키고 있는 지금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이런 현실에 맞설 가장 강력한 무기, 곧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그들 손에 쥐여주는 것이 그의 목표다.
책에 언급된 표준적인 비판 열 가지는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 ‘이론적으로만 괜찮다’, ‘결정론이다’, ‘유토피아를 꿈꾼다’, ‘만사를 경제로 환원한다’, ‘세계를 물질 덩어리로만 본다’, ‘이미 사라진 노동계급에만 집착한다’, ‘폭력적인 정치 행동을 선호한다’, ‘전권을 가진 국가를 믿는다’, ‘최근의 급진적 운동에 기여한 바 없다’ 등이다. 이글턴은 현실 사회주의권 몰락과 더불어 급격히 확산된 이런 통념들이 상식적으로만 따져봐도 잘못됐다고 질타한다.
가장 포괄적인 비판이랄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를 보자.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는 한때 유용했지만,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적합하지 않다고들 한다. 이에 대해 이글턴은 자본주의 체제는 변한 것이 아니라 심화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 지구적 규모에서 자본은 전보다 더 집중돼 약탈하고 노동계급은 사실상 양적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부의 불평등도 극적으로 심화됐다.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는 주변부로 밀쳐졌지만 그 이유는 그것이 맞선 사회 질서가 더 온건하고 자애로워지기는커녕 예전보다 한층 더 무자비하고 극단적인 것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글턴은 ‘집단을 우선시하고 획일적 미래를 꿈꿨다’, ‘의식보다 물질을 더 앞세웠다’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확산된 마르크스주의 비판들을 뒤집는다. 특히 그가 이런 작업을 통해 드러내려는 마르크스의 진면목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마르크스가 ‘제각기 독특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유일한 정치적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과, 자유·시민권 등과 같은 중간계급의 성취나 가치에 적극 동조했다는 점이다. 이글턴은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된다”는 마르크스의 비전을 ‘사랑’이란 쉬운 말로 풀이하기도 한다. 적극적이고 독특한 그의 해석은 자본주의 체제가 폐기처분하려 했던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끌고올 수 있게 해주는 다리를 놓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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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금융 사회-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서평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0921153616
월급날 통장 잔고=마이너스! 당신도 당했다! (프레시안,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경제팀장, 2012-09-21 오후 6:43:04)
[프레시안 books] 제윤경·이헌욱의 <약탈적 금융 사회>
"대한민국 전체 가구 중 60퍼센트를 초과하는 가구가 빚을 안고 살아간다. 이들 가운데 74퍼센트는 원리금 상환에 부담을 느끼며, 은행에서 더 이상 빚을 낼 수 없어 제2금융권과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한마디로 빚으로 빚을 막으며 버티는 상황이다. 미봉책으로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가구들이 늘면서 금융권 연체율이 급상승하고 있다." (19쪽)
"저자들은 약탈적 금융 시스템을 그 배후로 지목한다. 외환 위기 직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하에서 약탈적 금융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금융권이 어떤 식으로 이득을 취하면서 소비자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겼는지, 그 결과 저소득층은 물론 중산층까지 우리 사회의 대부분이 금융의 노예가 되었음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리고 '빚의 노예'가 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암울한 현실을 이겨 낼 '희망'도 제시한다. 화차 보다 더 무섭다! '약탈적 금융'에 사로잡힌 현실." (출판사의 책 소개 중)
어쩌다가 대한민국은 저축 공화국(1998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저축률은 23.2퍼센트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에서 60퍼센트가 넘는 가계가 빚이 있는 '빚쟁이 공화국'으로 전락했을까요? 이 책 <약탈적 금융 사회>(제윤경·이헌욱 지음, 부키 펴냄)에 잘 나와 있는 것처럼 저축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던 것도 이제는 옛날 일이 됐습니다. 정당한 복지나 민생 대책은 외면하고 늘 빚을 더 내라는 식의 정부의 각종 대책(복지 지원 대신 서민 대출, 전월세 상한제 대신 전세 자금 대출, 반값 등록금 대신 학자금 대출, 집값 인하 대신 주택 담보 대출 유혹 등)과, 매일처럼 빚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금융 전문가, 언론 기사, 각종 광고의 홍수 덕에 우리 국민들은 빚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은 '금융 기관'이라고 불리면서 공공 기관의 대우와 존경은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사채업자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금융 자본의 실체를 생생히 드러냄과 동시에 금융 자본에 기생하는 언론들의 추악한 실태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빚에도 좋은 빚이 있다'고 부추기는 것이죠(126쪽의 <조선일보> 기사!). 몇 개 더 살펴보면, "지혜로운 빚테크"(<동아일보>), "똑똑한 빚테크 노하우"(SBS), "꽉 막힌 은행 대출 빚테크로 뚫는다"(<조선일보>), "부자들은 돈 벌기 위해 빚진다"(<부산일보>) 등 이런 식으로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빚을 권유한 데는 정부, 금융 자본, 언론 누구하나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을까요. 어느덧 가계 부채 1000조 시대. 하우스 푸어 150만 시대. 이자로만 2011년 기준으로 1년 추산 56조 원쯤을 가계가 부담하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대출 급증과 금리 상승으로 올해 가계의 이자 부담액이 56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27일 금융권 및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올해 가계 대출 이자 부담 총액은 56조2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국민총소득 1173조 원의 4.8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내수 침체가 우려된다." (<한겨레> 2011년 11월 27일자)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사회 전 계층이 빚에 눌려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세계 최악의 교육비, 주거비, 통신비 고통과 부담에 비정규직, 저임금 문제 등으로 에듀푸어, 렌트푸어, 워킹푸어까지…자살률은 1위 수준, 출산율은 세계 꼴지 수준이라는 비극적 통계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문제는 바로 대한민국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회'가 점점 더 위험해주시고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중산층의 부채는 점점 늘어만 가고 저소득층은 빚으로 빚을 갚는 악성 채무의 늪에 더 빠져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빚 때문에 자살하고 삶이 파탄 나는 가계와 개인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이 책 <약탈적 금융 사회>는 그 배경과 과정을 아주 상세히, 친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대한민국 금융 실태 보고서', '약탈적 금융 시스템에 대한 교과서'라고 규정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보다도, "1)소득 수준과 상환 능력도 따지지 않고 마구마구 빚을 권한 후에 2) 세계 최고 수준의 고리대(현행 금융 기관의 이자율은 법에 의해 무려 39퍼센트까지 보장받고 있음) 등으로 갖은 폭리를 취하고 3)불법까지 동원해 혹독하게 채권을 추심하면서 국민들을 옥죄고 궁지에 몰아넣고 4)그러고도 자기들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며 뻔뻔하게 최대의 이윤만을 추구하고 있는 대한민국 금융 시스템 전반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국민들은 빚꾸러기, 과중채무자로 전락하고, 금융 기관만 알부자가 되는 사연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약탈적 금융 시스템"이 지배하는 "약탈적 금융 사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약탈적 금융 사회>가 된 것입니다(책 제목이 정해지는 과정에서 저자들과 친분이 있던 저는 이 책의 내용을 보고 "빚쟁이 공화국"이나 "금융의 배신"을 책 제목으로 강력히 추천하였으나 결국 채택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고리대도 서슴지 않는 약탈적 대출로 가계 부채의 급증 원인을 제공한 금융권과 이를 방조한 정부가 책임지지 않으면 서민들과 중산층들의 삶은 가계 부채 해결을 위한 사회적 비용 때문에 파탄에 직면하게 될 것이므로 결국 이제라도 정부나 금융 기관이 대대적인 개혁과 전향적인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계 부채 문제는 과도한 대출과 신용 공급을 초래한 금융권에게도 큰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행법과 제도, 정책과 인식, 심지어 문제의 직접적 당사자인 금융권까지도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만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빚쟁이 공화국 문제, 가계 부채 사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임을 저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채무자의 신용 상태에 따라 신중하게 빌려줘야 할 채권자 윤리와 책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빚을 갚고 싶으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은 부채 상환을 회피하려는 사람들로 몰아붙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죠. 이 과정에서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온갖 불법 채권 추심이 난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채무자들은 심각한 인권 침해에 노출되게 되어 결국 가정이나 삶이 파괴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영화 <화차>를 보신 분들은 이러한 지적에 크게 공감할 것입니다.
부채는 실제로 채무자만의 책임으로 발생하지 않았고(특히 과도한 이자를 생각해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과도한 채무에 대한 책임은 결국 개개인의 노력과 함께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그러나 금융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빌려줄 때 당장의 이자 수입을 벌기 위해 무분별한 신용 공급을 해놓고도, 회수할 때는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채무자를 괴롭힙니다. 그렇게 금융 기관의 책임과 금융의 공공성은 온데 간 데 없어져버렸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책 <약탈적 금융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낙관적 사회 디자이너'인 두 저자는 책의 말미에, 빚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복지 및 민생 대책의 시행, 이자 폭리 근절, 채무자들도 살 수 있는 채무 조정 시스템 도입, '빚을갚고싶은사람들'(빚갚사) 활동과 같은 채무자 운동 등 여러 가지 법, 제도, 정책, 운동적 대안을 역시 친절하게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빚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이자 부담을 느끼는 모든 분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빚이 없어도 나라 전체가 온통 '돈 빌려주겠다고 난리'인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면 이 책을 보면 '아하' 하고 깨달음의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신용카드-월급날의 보람을 빼앗다"(151쪽)처럼 문단의 제목만으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도 참 많을 것입니다.
저자만 보고도 책을 사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윤경(사회적기업 에듀머니의 대표로 서민 가계 주치의 등 다양한 서민 경제 지킴이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헌욱(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으로 서민들의 교육비, 주거비, 통신비, 가계 부채와 이자 폭리 문제에 대해 끈질긴 투쟁을 해왔습니다) 두 사람만 보고 책을 사는 것도 권해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가 아는 한 서민들의 민생 문제에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실제로 서민들의 가계에서의 고통과 부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 그 두 사람의 면면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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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51775.html
요람에서 무덤까지 빚 권하는 사회 (한겨레, 장동석 출판평론가, 2012.09.14 20:19)
약탈적 금융 사회-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제윤경·이헌욱 지음/부키·1만3800원

아침나절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반가운 소식이라도 왔을까 싶어 내심 기대하지만 “1000만원 대출이 승인되었습니다”라는 해괴한 문자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믿고 1000만원을 빌려준다니 오히려 반가운 문자라고 해야 할까. 대한민국의 아침을 여는 문자들은 대개 빚 권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어디 휴대폰 문자뿐인가. 곳곳에서 빚을 권한다. 심지어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대책은 고작 ‘대출 받아 아파트 사라’는 것이었다. 말이 대출이지, 결국 빚이다.
<약탈적 금융 사회>는 가계부채 1000조원, 하우스푸어 150만명 시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밑바닥 현실을 조명한다. 빚은 이제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개인 정보를 장악했고, 시간과 라이프 스타일 등 모든 선택권을 가져가 버렸다. “친절하다 못해 귀찮을 정도로 빚으로 둘러싸인 삶을 예찬하던 금융회사들”이 이제는 돈을 회수하겠노라 얼굴빛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이를 일러 “빚의 교묘한 독재”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채무 노예 사회”다. 한때는 자유인이었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빚을 끌어안게 되었고, 이내 노예로 전락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겨우 회생한 금융기관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살려준 국민을 대놓고 협박한다. “빚은 자기 책임”이라는 가혹한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있지만 정작 오늘날 빚 권하는 사회의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약탈적 금융이 만든 ‘내 탓’ 의식을 먼저 벗어버려야 한다. 또한 “금융 소비자가 주인이 되는, 공적 통제를 받는 조직체”로 금융기관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채무 노예를 만드는 약탈자들과 공조자들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재테크 열풍을 일으키며 중산층을 무너뜨리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채무 인생의 대물림을 만든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금융’은 약탈적 대출로 서민들의 집을 빼앗았고, ‘언론’은 빚도 자산이라는 프레임을 만들며 머니 게임을 부추겼다. ‘신용카드사’는 월급날의 보람을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그런가 하면 ‘정부’는 부동산 대책에서 거푸 헛발질을 하며 하우스푸어를 양산했다. 한편 서민들의 신용회복을 돕겠다며 야심차게 시작된 ‘파산·회생·워크아웃’ 제도는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고, 제도적 허점으로 서민들의 삶을 더 옥죌 뿐이다.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지만 “99%의 채무 해방을 위해” 나아갈 길은 멀고 험하다. 먼저 가혹한 채권 회수보다 인간적인 채무 조정 등 채무 조정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개인의 힘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기에 “99%를 위한 채무자 연대”와 같은 사회운동도 필요하다. 지은이들은 “전문가의 도움과 다른 채무자와의 연대, 이것이 당장 빚에 짓눌려 겪는 고통을 해결할 가장 중요한 실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금융 복지 안전망, 곧 사회적 안전망을 형성하는 일이다. 2012년 대한민국 서민들의 희망은 “인간적인 금융”, 곧 힘겹게 노동해서 번 돈을 약탈해 가는 금융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금융 시스템”이다.
<약탈적 금융 사회>는 대한민국의 아픈 현실과 직면하게 한다. 이런 아픈 현실과 직면하여, 이제 삶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도 알려준다. “자각하고, 분노하고, 연대하고, 그리고 당당히 외쳐야 한다”는 구호와 실천은 단지 약탈적 금융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을 규정하는 모든 실체를 향해 던져야 할 말이다.
지은이들의 마지막 말이 내내 뇌리에 남는다. “한때 자유인이었던 그 시간을 되찾아 다시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야만적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야만의 세상을 다시 인간의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42038595&code=900308
[책과 삶]내가 빚의 노예가 된 이유… 이젠 ‘내 탓’만 말고 빚을 부추긴 금융권 책임도 함께 묻자 (경향, 백승찬 기자, 2012-09-14 20:38:59)
▲ 약탈적 금융사회… 제윤경·이헌욱 지음 | 부키 | 264쪽 | 1만3800원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면 온갖 욕을 먹게 마련이다. 빌릴 때부터 갚을 생각이 없었던 파렴치한은 논외로 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돈을 갚아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 빌린 돈을 갚고, 그렇게 해서 생긴 2차 빚을 갚기 위해 3차 빚을 지곤 한다. 이렇게 빚이 거듭되면 이자는 불어나고, 결국 그는 헤어날 수 없는 빚의 늪에 빠져버린다. 어느 순간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단어는 ‘포기’다. 이제 채무자는 채권자에 대한 죄의식과 삶을 망쳐버렸다는 절망감에 물들어 버린다.
그런데 잠깐 시선을 달리 해보자. 돈을 갚지 못하는 건 오직 돈 빌린 사람의 책임일까. 돈 갚을 능력이 안되는 걸 알면서도 돈을 빌려준 이에겐 책임이 없는가. 월급이 100만원인 이에게 200만원을 선뜻 빌려주는 데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는 걸까. 혹시 돈을 빌리기 위해 맡긴 담보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약탈’이라 불러도 좋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와 이헌욱 변호사는 “지금의 과도한 빚을 개인의 무책임함으로만 결론지을 수는 없다”며 “이제 ‘약탈자들’에게 책임을 묻자”고 제안한다.
신용카드나 주택담보대출이 흔하지 않고 집값도 안정적이던 시절, 사람들은 매달 들어오는 월급에 맞춰 가계를 꾸리고 미래를 계획했다. 써야할 돈과 남겨둬야할 돈을 구분했고, 그래서 빚을 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다. 저축률도 높았다. 1987년 저축률은 24.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에 올라서 2000년까지 부동의 1위였다. 초등학교에서 저축을 권장하는 표어와 포스터 짓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저축을 권하지 않는다. 대신 빚을 지라고 유혹한다. 그 결과 한국의 전체 가구 중 60% 이상이 빚을 안고 살아가고, 이들 중 74%는 원리금 상환에 부담을 느낀다. 1998년 한국의 가계부채 총액은 190조원 수준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율은 55.8%였다. 반면 2011년 가계부채는 1103조원으로 GDP 대비 90%에 달한다. 지금 1000조원대의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시한폭탄이다. 상위 계층은 집에 딸린 빚에, 저소득층은 고금리 대출에 허덕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2008년 저자에게 한 중년 부부가 상담을 받으러 찾아왔다. 월소득 400여만원인 그들은 풍요롭진 않았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이었다. 그들은 2006년쯤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집값이 미친 듯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친척,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선 모두들 집과 돈 이야기만 했다. 저축으로 돈을 모아 집을 사겠다는 생각은 ‘상식’이 아니라 ‘어리석은 고집’이라고 했다. 전세 살던 이 중년 부부도 세상의 흐름을 타기로 했다. 2억원을 대출해 집을 샀다. 그 뒤로 집값은 1억원 이상 올랐다. 아껴서 저축했던 과거의 자신이 한심하게 보였다.
그리고 2008년,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가 닥쳤다. 집값은 오르지 않았고 거래는 끊겼다. 매월 이자로만 100만원이 빠져나가고, 곧 원금 상환이 닥친다. 지금 40대인 남자는 앞으로 20년간 매월 150만원 이상을 은행에 내야 한다. 그렇게 은행에 내는 이자가 2억원이 넘는다. 빌린 돈의 2배를 갚아야 비로소 내 집이 되는 것이다.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인 제임스 스튜어트는 말한다. “친구가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사람들의 안락과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 자산 투자로 돈 버는 사람이 부러움의 시선을 받고, 일해서 돈 모으는 사람은 바보 취급 받는 세상이다. 결국 ‘나만 가난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은 평범한 중산층까지 온갖 위험한 재테크로 내몰았다. 평생 직장이 사라지고 사회안전망과 복지 제도가 미비한 사회, 재테크는 중산층이 뛰어들 수밖에 없는 도박판이었다.
중년만 빚을 지는 건 아니다. 아기는 200만원짜리 고가 유모차를 탄다. 물론 12개월 할부다. 할부가 결국 ‘빚’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부모가 “돈 없다”고 하면 아이는 “카드 있잖아”라고 답한다. 요즘 아이들은 “버는 범위 내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카드만 있으면 소비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성장한다.
‘약탈적 금융사회’를 만든 몇 명의 범인들이 있다. 먼저 금융기관. 외환위기 이후 기업대출에서 가계대출로 사업 방향을 수정한 금융기관들은 “맑은 날 우산 빌려주고 비오는 날 거둬가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초인종을 누르면 돈이 튀어나오는 광고를 내보내고, ‘우량 고객을 위한 특별 대출 상품’을 소개한다면서 저리로 돈을 빌리라고 유혹한다. 고객에게 돈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여부는 큰 고려 대상이 아니다. 돈을 못받아내면 담보로 맡겨둔 자산을 처리하면 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이러한 ‘약탈적 대출’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지만, 집값이 계속 올랐기 때문에 그 파괴력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소비자가 파산을 하든 말든,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든 말든, 금융기관은 무책임하다. 유능한 관료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게 맡겨진 서류에 충실히 사인함으로써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안내했는데,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무사유성’의 무서움을 지적한다. 금융기관의 너그러운 대출은 이러한 무사유성의 한 사례다.
언론은 약탈적 금융 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나팔수 역할을 했다. ‘가을 빚에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빚을 좋지 않게 여겨왔으나, 요즘의 언론은 빚에도 ‘좋은 빚’이 있다면서 대출을 부추겼다. 월급쟁이라도 빚을 내 투자하면 금세 강남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기사를 내보냈다. 남들 다 빚내서 투자하는데 여기 동참하지 않으면 손해가 날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손실 회피 심리’를 자극했다.
정부도 면책되지 않는다. 전세가가 폭등하면 전세 자금 대출을 확대하고, 대학 등록금이 치솟으면 학자금 대출을 확대한다. 실업률이 오르면 햇살론 같은 무담보 대출을 마련하고, 내 집 마련이 어려우면 ‘생애 첫 내 집 마련 대출’ 상품을 내놓는다. 장기적으로 복지 제도를 보완할 생각을 하지는 않고, ‘돈을 빌려 주면 될 것 아니냐’는 식으로 대응한다. “정부가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의 탐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조차 시장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면서 서민의 살림살이에 빚을 보태고 있다.”
무심코 긁은 신용카드는 어떤가. 외환 위기 이후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발급과 마케팅 기준을 완화했다. 그 결과 1999년부터 3년 만에 경제활동 인구당 카드 수는 2.5배, 사용액은 6배 증가했다. 거리에는 아름다운 여성 도우미들이 좌판을 벌인 채 카드 가입을 권했고, 어디서 돈이 생기는지 모르는 대학생들까지 몇 장의 카드를 돌려막기로 긁어댔다. 어느 택시기사는 4000원의 택시비를 결제하기 위해 9장의 카드를 꺼냈지만 모두 한도가 초과됐다는 메시지를 받은 어느 여성 고객의 사연을 저자에게 전한다. 몇 푼의 포인트 적립과 할인 혜택으로 고객을 유혹하는 카드 회사는 정작 그러한 혜택이 카드 발급 후 1년이면 사라지기 일쑤라는 사실은 좀처럼 알리지 않는다. “속았다”는 걸 안 몇몇 고객이 카드를 해지하려 들면, 그 사이 새로 나온 카드 발급을 권한다.
물론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파산, 회생, 워크아웃 등 채무자들의 고통을 경감할 몇 가지 제도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이들 제도는 이용이 까다로운데다가 채무자의 생활 보장·재활보다는 채권자의 채권 회수에 역점을 두고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저자들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우선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채무 조정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채권자에게 전화를 걸거나 찾아오고 가정과 직장에서도 망신을 당하게 만드는 채권 회수 시스템은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할 뿐이다. 미국은 개인 파산과 면책 제도가 발달해 있다. 채무자가 이를 이용하면 채권자는 부채를 돌려받지 못하기 때문에, 채권자는 채무 조정 단계에서 더욱 많은 유연성과 합리성을 발휘한다.
채무자들끼리는 뭉쳐야 한다.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여럿은 바꿀 수 있다. 최근 한국의 사회적 기업과 시민 단체에서는 ‘빚을 갚고 싶은 사람들’(빚갚사)이라는 이름의 채무자 단체를 결성했다. 채무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면서 새 출발 의지를 다지고, 약탈적 대출의 문제점도 지적한다는 취지의 단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채무자 스스로 죄의식을 떨쳐버리는 일이다. 대체 누가 나에게 빚을 권했는지, 나 같은 처지에 빠진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이 모든 것에 사회의 책임은 없는지 살펴본다면 쓸데없는 부끄러움 없이 다시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다. 고대에 노예로 태어난 이는 그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 예속돼 있었다. 그러나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스파르타쿠스는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귀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빚은 운명도 개인의 잘못만도 아니다. 비합리적인 충동과 욕망에 이끌리는 건 인간 누구나 보일 수 있는 약점이다. 약탈적 금융 기관들이 채무자에게 심어둔 ‘내 탓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저들의 ‘도덕적 해이’도 함께 물어야할 때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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