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책에 대한 소소한, 재미있는, 지루한, 발전하는, 구린 생각들

5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8/05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엉망진창
  2. 2005/08/03
    오래된 여행가방(1)
    엉망진창
  3. 2005/08/03
    촛불 -김귀례
    엉망진창
  4. 2005/08/03
    사람들 - 천양희(1)
    엉망진창
  5. 2005/06/17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엉망진창
  6. 2005/01/21
    강경애 <인간문제>참고자료
    엉망진창
  7. 2005/01/20
    지하련,임화. 그리고 이귀례(2)
    엉망진창
  8. 2005/01/19
    티나 모도티에 대하여(5)
    엉망진창
  9. 2005/01/16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엉망진창
  10. 2005/01/16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엉망진창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 광 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요즘엔 현대시를 공부하다보니 옛날에 봤던 시들을 하나하나 훑게된다.

그 때는 잘 몰랐던 것들인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 또다르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

나는 이제야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된 것 같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따라 자와 날카로운 펜으로 시를 조각조각 나누고

시상전개가 어떻고, 시어의 함축적 의미는 어떻고, 제재는 어떻고, 주제는 어떻더라는

단편의 지식들로 시를 봐왔다.

내가 전공을 국어를 선택한 이후부터는 더더욱 보다 좋은 분석을 하기 위해

좀 더 체계적으로 시를 해부해나갔다.

시인이 시를 세상에 내놓기 까지의 삶과 고민들은 충분히 무시한 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래된 여행가방

오래된 여행가방   -김수영

 

스물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든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끔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릴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읽다가 유독 눈에 들어오던 시다.

꽤 오랜시간을 버스에 쭈구리고 앉아있다가 문득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도 그냥 곰곰 생각해본다.

스물 넷. 난 갖고 싶고 하고 싶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혹여 세월이 훌쩍 흘러 되돌이켜볼 때 세월의 무게에 가벼워지고 문득 가슴이 저려질 추억조차 만들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지.

 

춘천행 기차를 타고 가다 지나던 조그마한 간이역이 생각났다.

언제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촛불 -김귀례

촛불

 

김귀례

 

 

나의 눈물을 위로한다고

말하지 말라

나의삶은 눈물 흘리는 데 있다

너희의 무릎을 꿇리는 데 있다

십자고상과 만다라 곁에 청순한 모습으로 서 있다고 좋아하지 말라

눈물 흘리지 않는 삶과 무릎 끓지 못하는 삶을

오래 사는 삶이라고 부러워하지 말라

작아지지 않는 삶을 박수치지 말라

나는 커갈수록 작아져야 하고

나는 아름다워질수록 눈물이 많아야 하고

나는 높아질수록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람들 - 천양희

 

사람들

 

천양희

 

논둑길 걷다 누군가 무르팍을 툭, 친다 풀잎이다 풀잎 속 풀무치다 풀무치 눈이 퍼렇다 풀 탓이다 풀물 든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에는 풀보다 더 시퍼런 칼날이 있다 풀 베듯 베이는 사람이 있다

 

세종로 지나다 누가 머리통을 텅, 친다 종각이다 종각 속 종이다 종이 울지 않는다 세상 탓이다 종치듯 세상을 치고 싶다 세상에는 종소리보다 더 소리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절필한 종소리 재창하고 싶은 날들이 있다 종소리 울리듯 절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 책을 선물받게 되면 내 손에는 거의 장자끄 상페의 책이 들려온다.

아마 상페의 책이 그렇게 심오하지도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점이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때 상대가 부담감을 느끼게 하지 않게 하는 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상페가 다루는 글의 내용이 사랑, 우정과 같은 것들이기 때문일지도...

내게는 이 두 가지 이유와 함께 불어를 전공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그의 책들을 접하게 된 까닭이 더 크지만... 

 

 내가 상페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내 블로그 제목이기도 한 "속깊은 이성친구"를 통해서였다.

상페의 책이 가진 묘미는 처음엔 5분만에 단숨에 읽어내려가지만, 나중에 심심할 때 즈음 다시 글을 읽어보면 사뭇 다른 의미들로 다가오는 것. 순간순간 스케치해 놓은 데생을 보는 것이 한 편이 시집을 두고두고 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은 상페의 책이 가진 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기분이 좋으면 멍멍하고 짖는다.

화가 났을 때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짖지.

너는 감정의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는 데 많은 한계가 있어.

네가 표현할 수 있는 뉘앙스는

별로 많지 않아. 하지만 나는

너와 달라. 기분이 좋을 때,

나는 그 좋은 기분의 미묘한 차이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어.

싱긋 거리거나 껄껄거릴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엉엉 울 수도 있어.

화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야.

나는 허허 웃는 것까지 포함해서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있어.

그 이치는 아주 복잡하고 대단히 혼란스러워.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너는 착한 개야. 그리고 내가 개를 좋아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지.

 

그런데도, 나는 이따금 네가 고양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속깊은 이성친구 중에서

 

 

지극히 소시민적인 삶, 그리고 그 안에서 느끼는 사랑, 우정, 인간관계와 같은 것들

난 상페의 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만 읽고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그가 그리는 그림 가운데 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혀지는 현실이 있다는 점이다. 아마 그게 리얼리즘의 묘미이기도 하겠지.

 

 

                           -Walk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까미유와 르네 라토처럼 나도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다. 어쩌면 난 이미 만났을지도 모른다.

몇 시간이라도 아무 말없이 앉아만 있어도, 같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른 어떤 말도 필요없는. 그런 사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강경애 <인간문제>참고자료

강경애, <인간문제> 작품의 이해와 감상

 

  항일 투쟁을 직접 다룰 수 없는 상황에서 농민 운동과 노동 쟁의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의는 크다. 작품의 전반부는 농민의 참상을, 후반부는 일제를 상대로 한 노동자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농촌의 인물을 공장으로 옮겨 옴으로서 작위성과 괴리성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작품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먼저, 첫 부분에 나오는 '원소'라는 못에 얽힌 전설의 암시성에 유의해야 한다. 옛날 이 말을에 인색한 부자 첨지가 살았는데 흉년으로 마을 사람들이 죽게 된 지경에도 모르는 체하여 사람들은 그 집을 습격하여 허기르 면했다고 한다. 며칠 수 관가에 잡혀 간 이들이 모진 형벌 끝에 죽자, 가족들이 첨지의 마당에 모여 쉬임없이 울어 마침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큰 못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작품의 창작 의도를 보여 주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작자는 마지막에서 수천 년 동안 풀지 못하는 인간 문제를 풀 인간은 누구냐고 묻고 있다.

   한편, 선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여자의 일생'형 소설로 보는 관점도 있다. 여자의 비극적 일생이 개인적 결함에 기인하는지, 아니면 시대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되는지를 검토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가난한 머슴의 딸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주인에게 짓밟혀 고향을 떠나 방적 공장의 여직공으로 일하다가 폐결핵으로 죽는 것이 선비의 일생이다. 사회 고발적 요소가 강한, 목적 문학적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공장 노동의 생생한 현장 묘사는 한국 소설의 약점이었던 소재의 빈약성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인천 부두와 방적 공장의 묘사는 탁월하다.

 

[핵심정리]

갈래: 장편 소설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시간- 일제시대

        공간- 용연읍, 서울, 인천

문체: 객관적 묘사체

경향: 사회고발적

주제: 일제 시대 농민과 노동자의 비참한 삶

 

 

[연구문제]

1. (가)[소설 첫 단락]에 제시된 배경 묘사로 미루어, 이 소설의 갈등 양상은 어떠할지 완결된 한 문장으로 답하라.

 

 

2. 이글은 작품의 서두 부분이다. '원소'에 표현된 전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지 30자(띄어쓰기 포함) 내외로 답하라.

 

 

3. 방적공장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서울서는 감독이 다섯 사람이었는데, 이곳은 감독이 삼십 명은 되는 모양이다'가 암시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30자(띄어쓰기 포함) 내외로 설명하라.

 

 

 

 

[모범답안]

1. 정덕호로 대표되는 지주(지배)계층과 농민 등의 피지배 계층 사이의 갈등이 예견된다.

2. 가난한 농민을 외면하는 지주에 대한 비판 정신

3. 노동자와 사용자(공장 감독)사이에 갈등이 높아감을 예고한다.

 

인간문제- 죽음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부도덕한 계층에 의해 농민과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문제로 봄.               

 

 

출처: 글동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지하련,임화. 그리고 이귀례

지하련과 임화, 그리고 이귀례.

 어제 티나 모도티에 대해 읽으면서, 남편의 그늘에 가리워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할 뻔한 여성 한 명이 또 생각났다. 지하련. 본명은 이현욱. 1940년대에 빛을 발하다가 월북한 작가로 비운의 여류작가로 분류되는 또 한 명의 문인이다. 지하련은 그녀의 필명보다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좌익문단의 선봉장이었던 '임화의 아내'로 더욱 유명했다. 오늘은 지하련 전집을 손에 넣게 된 까닭에 그녀의 삶과 작품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대다수의 월북 작가들에 대한 연구가 현저하게 부족한 까닭에 임화를 비롯해서 지하련에 대해 정확하게 연구된 내용이 많지 않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확인되지 않았다'가 주류적 표현이다. 그래서 지하련의 경우에도 전집에 나온 후에야 본명이 '이숙희'일 것이라는 사실과 그녀의 출생에 대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점, 하지만 부친이 사회주의자이었을 것이며, 여기에 지하련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내용 등이 첨부되어 설명될 수 있겠다. 여기에서 한 가지 전집을 읽다가 임화의 첫번째 부인(지하련은 임화가 재혼한 두번째 부인이다)인 이귀례에 대한 자료를 찾았는데, 내용이 색다른 시각이기에 덧붙여 놓는다.


      

           지하련(왼쪽),          최정희와 지하련(최정희 왼쪽, 지하련 오른쪽)'

 

  

 



지하련을 만나다.

  지하련은 "도정"이라는 작품이 가장 잘 알려진 편이다. 소설 '도정'은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1946년도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소설부문 추천작품으로 이태준의 "해방전후"와 최종 경선까지 올라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이태준은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리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치밀한 표현을 했다고 평가되는 월북작가이다.) 당시 조선문단은 좌익진영과 우익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인데, 8.15이후 임화는 김남천 등과 함께 1)봉건잔재의 청산  2)일제잔재의 소탕  3) 국수주의의 배격이란 과제 아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고 '문학가동맹'결성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좌익 문단의 헤게모니를 쥐어왔다. 물론 지하련의 '도정'을 평가하는 우익진영의 내용은 혹독했는데, 김동리가 당시 지하련의 작품에 대해 '지하련의 소설은 리얼리즘을 닮으려다가 알뜰한 인생을 잃었다고'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 문단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도정은 정치.사회소설로 장안파 공산당의 재건을 박헌영의 시각에서 희화화(戱畵化)한 줄거리를 복선에 깔고, 주인공 석재가 해방 전후에서 한갖 소시민이기를 거부하며 새 시대의 일꾼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물론 내가 지하련의 소설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도정'에 나타난 인물의 전형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그녀의 등단 초기 '결별','산길','가을'을 중심으로 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분류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도정'의 내용은 간략하게 다루려고 한다. 그럼에도 잠깐 소시민의식을 떨쳐버리려는 주인공의 표현으로 '도정'의 내용을 따오면,이렇다.

 

  괴물-공산당- 생각하면 긴 동안을 그는 이 괴물로 하여 괴로웠고, 노여웠는지도 모른다. 괴물은 무서운 것이었다. 때로 억척같고, 잔인하여 어느 곳에 따뜻한 피가 흘러 숨을 쉬고 사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러나 귀 막고 눈 막고 그대로 절망하면 그 뿐이라고 결심할 때에도 결코 이 괴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었다. 괴물은 칠같이 어두운 밤에도 단 하나의 "옳은 것"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옳다는-이 어디까지 정확한 보편적 "진리"는 나쁘다는-어디까지 애매한 윤리적인 가책과 더불어 오랜 동안 그에겐 커다란 한 개 고민이었던 것이었다."

 

 '결별','산길','가을'

 지하련의 데뷔작인 '결별'은 '백철'의 호평을 받으면서 등단에 성공했다. 이 중 두 작품(결별, 산길)은 모두 결혼한 여성이 주인공이고, '가을'은 남편의 시각에서 서술된 글인데, 연달아 읽고 나면 마치 1920-30년대 결혼한 어느 여성의 자아정체성이 점점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결별'은 주인공 '형예'가 지난 밤 남편의 시덥잖은 우쭐댐에 '딴지'를 걸면서 티격태격 싸우고는, 다음날 자유연애로 시인과 뒤늦게 결혼한 친구 '정희'를 찾아가게 된다. 정희와 이야기하는 내용과 소설 중간중간 당황스럽게 정희의 신랑과 형예가 눈이 마주친 일들은 아마도 당시 분위기상 '안해'(아내)의 태도로 보기엔 '부도덕'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이었나 보다. 형예는 정희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외롭다고 느꼈고, 이것이 자신이 더 이상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집에 돌아와 남편이 추궁하는 듯한 질문과 자신의 반기에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의 모습에, 형예는 갑자기 고독을 느끼며 드디어는 완전히 혼자인 것을 깨닫는다며 끝을 맺는다.

   

   "아-니, 넌 신랑한테 이기냐, 지냔 말이다"

  형예는, 정희의 언제나 버릇으로, 앞도 뒤도 없이 톡 잘라 내놓는 말이라든가, 어린애같은 그 표정이 우습다기보다도 어쩐지.

   '결국 끝에 가선 저희 신랑얘기를 할게다!'

 하는 생각이 들자, ....(중략)....

   "그래, 난 잘 모르니 너부터 말해보렴-"하고 정희를 본다.

   "깍쟁이 같으니, 그래 난 지는 게 좋다.

   "그럼 되우는(?) 좋아하는 게지-"

   "그래, 좋아하기도 해. 하지만 그보다도 이기고 보면 영 습쓸할 것 같고, 허전할 것 같아서    그런다,너-"

  정희는 눈썹을 째긋이 하고 아주 진실하다.

    "그럼 행복이란 널 위해서 준비됐게?"

    "아이, 남의 말을"

  하고 정희는 때리려는 시늉을 한다.

    "아니고 뭐냐, 좋아해서 지고 싶고, 지면 만족하고, 설사 그곳에 어떤 희생이 있대도 즐겨 희생하는 곳엔 고통이 없는 법 아냐?"

    "너 왜 이렇게 막 뻐기니, 무섭다 얘 관두자"

                                           -지하련, '결별' 중에서, 현역은 여우비

 

 

   '결별'에서 지하련은 자유연애에 대해 긍정적이게 표현하고 있는데, 중매로 결혼한 형예의 불안정한 결혼생활의 모습과 대비되는 정희의 행복하게 표현되는 삶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오히려 이 소설이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그려진 것이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연애관 때문이 아니라 지하련이 형예의 감정을 통해 표현하는 부부 생활에 있어서의 불만감이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속에서는 지하련의 모습이 정희에게 투영된 것 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형예의 감정과 말들이 오히려 지하련의 숨은 의도를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말이다.

 

   '산길'은 '순재'라는 여성이 남편과 자신의 친구인 연희가 자신 몰래 만나왔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인 '문주'로부터 듣게 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연희는 순재에게 먼저 만나자고 이야기를 한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 놓고 누구의 형상이 흉 없는가 한번 바라다보십시오.

     내 모양이 사뭇 고약할테니"

    연희는 여전히 같은 태도로 말한다.

    "아내란 훨씬 늙고 파렵치한 겁니다. 더 자랑을 가지세요!"

   순재는 결국 그 노염을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엔 없었으나, 말이 멎자 연희의 표정없는 얼굴이

 무엇엔지 격노하고 있는 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과연 모를 일이다. 이제 막 순재가 한 말은 순재로서 대단히 하기 어려웠던 말일뿐 아니라 또 어느 의미로 보아선 정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희와 순재의 대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은 이미 집에 돌아와있다. 연희를 만나고 온 사실을 안 남편은 기가 막히게도 이렇게 말한다.

 

 "사과 할 길 밖에 도리없다는 사람을 가지고 왜 자꾸 야단이요? 왜 따지려구만 드오. 따져서는 뭘 하자는 거요? 당신 날 사랑한다는 것 거짓말 아니요? 왜 무조건 용서할 수 없오?"

라더니 끝내는

"내가 만일 무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 덕택일거요. 하지만 이것보다도 다른 사람들 같으면 몇 달을 두고 법석을 할텐데, 우리는 단 몇 시간에 능히 화해할 수 있지 않소"

 

이런 말에 지하련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평화란 이런 데로부터 오는 것인가? 평화해야만 하는 부부 생활이란 이런 데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라고...

 

그리고 나선 '가을'에선 석재와 석재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친구인 정혜와의 관계 속에서 실은 남편의 무관심한 태도와 배려하지 않는 것이 문제임을 은연 중에 제시하며, 석재의 시각으로 소설이 진행되면서 끝에서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문제인식을 갖게 되는 내용을 끝을 맺는다.

 

 지하련의 작품에 대한 대다수의 평론이 그녀를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서술했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그녀가 임화와의 관계에서부터 겪게 되는 부부관계에서의 갈등, 그리고 이것이 그 전까지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무조건적인 순응과 인내를 '거부'하는 지하련의 삶의 태도로 평가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화와 지하련>

 

 잘생긴 외모만큼 많은 여성들의 흠모를 받았다던 '임화'와 그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을 지하련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떠돈다. 훗날 백철의 회고에서 1937년 여름, 어떤 출판기념회에서 알게 된 B라는 여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나중에 지하련으로부터 그 여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전한다. 백철은 이현욱이 현재 남편과 맞지 않아 이혼을 선언하다시피 하고 본가에 와 있다고 했는데, 어느 날 이현욱에게 B에 대한 이야길 했더니 B가 임화에게 반해있는 여자란 것을 왜 못알아차리면서 나무라듯이 일러주더란 것이다.

 

  '임화'는 배우로도 활약하면서 시와 평론을 썼던 문인이다. 시보다는 평론이 더 평가를 받는 편인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해방 전후 시기와는 달리 해방 이후 임화의 행적은 묘연한 부분이 많다. 특히 월북이후의 사망 연도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확연치가 않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임화의 전성시대는 예상보다 짧았는데, 이른 바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이 빚어진 1946년까지만 해도 자신이 '위대한 시대의 어구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7년 박세영, 이기영, 이태준 등 동료들의 발빠른 월북이 남같지 않음을 깨닫고 10월 쫓기듯 월북한다. 월북 이후 임화는 반동분자로 숙청되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153년 8월 6일 죽었다고 하거나, 그보다 2년 뒤 박헌영의 재판의 증인으로 이용되고 난 뒤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이귀례에 대하여

  임화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그의 첫번째 부인인 이귀례에 대한 내용도 약간 언급되었는데, 평소에 알려지기로는 이귀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으며 임화와 1934년 이혼했다라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더 알려진 것으로는 이귀례는 당시 동경에서 잡지 "무산자"를 주재하던 이북만의 누이동생이었고, 1930년 12월부터 동거상태로 들어갔다가 1931년 봄 귀국하면서 혜화동에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당시 도일했던 시기는 임화가 22세, 이귀례가 17살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이귀례를 탐방해 온 기자가 결혼식이 없었던 것에 대해 묻자 이귀례는

"프롤레타리아 입장에서 결혼식이란 형식적 허례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견지에서 그만두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인습상, 그리고 여자로 다소 섭섭하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러한 생각은 절대 없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중산계급 이상에서 생각할 문제겠지요.

우리는 남녀의 결합보다 동지와 동지의 굳은 악수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의 파경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는 임화가 첫째 부인을 버리고 재혼한 것으로 이해되었는데(당시 문인들 중 조혼풍습으로 부인과 이혼하고 자유연애로 신여성과 재혼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 카프 검거사건 이후 임화가 전향하자 '열성맹원'이었던 이귀례가 실망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냐는 해석도 존재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티나 모도티에 대하여

   어제 책 몇 권을 사기 위해 간만에 광화문까지 '행차'했다가, 체게바라의 평전이 불티나게 팔리는 모습을 보고는 문득 프리다칼로가 생각났다. 왜 체게바라의 평전이 잘 팔리는 모습과 프리다 칼로가 연상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체게바라의 평전을 집어들면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주인공으로서 체게바라를 연상시키는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게 나에게는 영화라는 주제로 전이되어서 프리다가 연상되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예술스포츠 코너로 발을 돌렸다. 내가 처음 집어든 책은 "프리다칼로,나혜석,까미유 끌로델"이란 책이었는데,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그늘에 가려졌던 그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었던 것 같다.
 
 프리다의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또 다시 문득 생각났던 건 '티나모도티'란 여성이었다. 티나 모도티라는 이름은 나에게 영화 속에서 프리다와 함께 춤을 추던 "애슐리 쥬드"의 모습이 전부였다. 멋들어지게 춤추는 셀마 헤이엑과 애슐리 쥬드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의 혁명적분위기에 같이 심취했고, 그녀들의 당당한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이 강하게 내 뇌리에 박혔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우연한 기회로 "티나 모도티"라는 두꺼운 책이 해냄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을 알고, 읽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프리다칼로, 나혜석, 까미유 끌로델"을 묶어 놓은 책의 의도를 보며, 여기에 한 명. "티나 모도티" 역시 추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녀의 사진집을 찾았다.
 
  
              Diego Rivera and Frida Kahlo in the May Day march
       <티나 모도티가 찍은 프리다 칼로, 리베라 디에고; 1929년 메이데이>

 

■사진을 볼 수 있는 사이트

 티나모도티   http://cinemarx.cafe24.com/tina/main.htm

 

 

 

티나 모도티
- 글:홍미선(월간 한국사진 98년 3월호) -

 

Photo of Tina taken by Weston티나 모도티는 이태리 태생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미국 서부로 이민을 떠난다. 그곳에서 재봉일부터 시작하여 연극배우, 필름배우의 직업을 가졌었고, 예술가,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화적 소양을 쌓게 된다. 그러던 중 미국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톤(Edward Weston)을 만나 연인이 되었으며, 멕시코에서 그의 조수로 일하면서 사진을 시작한다. 멕시코에서 그녀는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였고, 후에 정치적 문제로 멕시코에서 추방당하여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도피하게 된다. 러시아에 정착한 그녀는 스탈린의 비밀 경찰로 활약하며 프랑스, 스페인 등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다가 결국 멕시코의 한 택시 안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가 사진 작가로서 부각되지 못하였던 것은 다음의 여러 이유에서이다. 먼저 매력적인 여배우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였으며, 종종 그녀 자신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모델로 등장하였다. 또한 그녀는 사진의 대표적인 무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멕시코에서 활동하였다. 모도티의 정치적 경력들은 그녀를 행동주의자로 인식되게 하였으며, 그녀의 작품 또한 사회주의 성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사진의 대가인 에드워드 웨스톤의 명성에 묻혀 사진작가로서라기 보다는 웨스톤의 아름다운 연인 또는 그의 조수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그러나 모도티의 작품들은 그녀가 추구하였던 사회주의의 이상을 내용으로 하면서, 당시 사진의 국제적인 흐름이던 형식주의(Formalism)를 간결하고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어 근래에 이르러 미학적으로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대부분 1923~30년 동안 모도티가 멕시코에 거주할 때 제작되었으며, 약 250컷의 이미지가 있다. 비록 그 기간이 7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기는 멕시코에서 사회의 깊은 변화와 함께 예술의 풍성함을 맞이하였던 특별한 시기로 알려져 있다. 1920~30년대 사이 멕시코의 많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고대 인디언들의 대중적인 전통을 회복시키면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 당시 멕시코에는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문제로 추방당한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Mexican Folkways Vol.5(1929)모도티는 이렇듯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녀는 멕시코의 위대한 벽화가인 리베라(Rivera) 등의 작가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1927~30년 사이 "멕시코 민습"(Mexican Folkways : 1925~1937년간 스페인어, 영어로 발간된 계간지)의 편집인으로서 사진을 담당하였다. "멕시코 민습"은 예술가, 작가들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던 정기간행물로, 이상적인 혁명을 추구하며, 사회주의 선전을 목표로 하였다. 모도티는 멕시코인들의 모습, 고유민속 등의 사진을 기고하였으며, 작품들 중 마른 옥수수, 탄약대, 낫으로 장식된 정물 사진은 그녀의 혁명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모도티는 멕시코에서 공산주의를 접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이상을 사진 매체를 통하여 모더니즘 어법으로 성공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녀의 사진들은 인물, 정물, 노동자들, 민속예술, 거리풍경, 건축들, 꽃과 식물 등의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모도티는 사진을 '사진적 질'(Photographic Quality)에 가치가 있으며, 시대를 기록하는 가장 감동적이고도 직접적인 도구라고 생각했다. 즉 이는 모도티에게 있어서 예술이 혁명적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작업들을 마르크스주의(Marxism)의 관념에 놓았다. 그녀의 첫번째 개인전은1929년 12월 3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는데, 전시회 개막일에 "사진, 그리고 새로운 감각"이라는 연설과 함께 혁명가가 불려졌다고 한다. 전시기간 중에는 노동자들이 볼 수 있도록 관람시간이 특별히 배려되었고, 전시 마지막에는 그녀의 작품이 정치예술임을 의미하는 "멕시코 최초의 혁명적 사진전"이라는 제목의 연설이 진행되었다. 신문들은 그녀의 정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들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었고, 모도티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개인전이 끝난지 6주후 그녀가 감금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새롭게 떠오르는 대통령 후보의 반대세력에 의해 그녀는 멕시코에서 추방되어 독일로 가게 된다. 독일에서 그녀는 쾨테 콜비츠(Kothe Kollwitz), 게오르그 그로츠(Georg Grosz) 등의 유명한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신문 에이전시 회원이 되어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독일은 나치즘과 파시즘이 확산되어 더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모도티는 1930년 10월 모스크바로 다시 떠나게 된다. 그 당시 러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은 무척이나 희망적인 것이었으나, 스탈린 체제 하에 들어서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제한을 받고 정치적인 선전을 해야 했다. 모도티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이상과 화합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진을 그만두게 된다. 또한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는 멕시코에서처럼 사진찍기에 좋은 강렬한 태양빛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사진을 그만둔 후, 그녀의 멕시코 작품들은 국게적인 전시에 초대되었으며, 그 당시 한 비평가는 그녀의 사진을 "새로운 눈, 새로운 구성, 새로운 의식"이라고 평했다.

   1942년 그녀가 죽은 후 멕시코에서 소규모의 추모 전시가 열렸고, 이것을 끝으로 그녀의 작품들은 긴 휴식을 갖는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그녀의 고향, 이태리 우딘(Udine)에서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주의자 편에 가담했던 시민들을 기리는 행사가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이 과정에서 모도티의 경력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우연한 계기를 통해 알려진 그녀의 작품들은 예술계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고, 시대의 정신을 독특한 형식으로 담고 있어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귾어져 나는 오래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대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와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