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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여행과 성숙의 대가

어슐러 K. 르 귄 읽기 2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의 한국어판과 영어 판. 이 단편집의 첫 작품 ‘셈레이의 목걸이’는 헤인 에큐먼 시리즈를 탄생시킨 짧은 전설이다. 표지 그림은 셈레이가 살던 은하 제8지역, No. 62 : 포말하우트 II의 바람말과 셈레이로 추정된다. 이 행성은 나중에 다음 작품에서 그 제목인 ‘로케넌의 세계’란 이름을 얻는다.



다르게 흐르는 시간
책을 펴면 당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른 환경의 행성을 본다. 거기는 공전과 자전의 주기가 지구와 다르기 때문에 시간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한동안 시차적응기가 필요하다. 작가가 시차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줄 때도 있지만, 미지를 탐험할 때 안내자에게 너무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시간 개념이 다르면 생각도 분명히 다를 것이란 걸 추리할 수 있다. 단지 관찰의 목적만으로 여행할 거면 그 정도만 유념해도 되겠지만, 다른 행성의 주민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 방식으로 생각하는 연습도 필요할 것이다. 권리의식이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이 모험에서 재미보다는 짜증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르 귄의 문장은 그리 쉽게 재미를 선사하진 않는다. 대신 다른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학습시켜 준다.
 
단순한 서사, 깊은 사색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자신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적과 대결하기 위해(로케넌의 세계), 생존을 위해(유배 행성), 자아를 찾아(환영의 도시), 연맹을 맺기 위해(어둠의 왼손), 위기를 극복하려고(빼앗긴 자들) 떠난다. 이들의 여행은 대단히 고단하다. 자신이 모르는 곳을 여행하기 때문이다. 그 여행을 읽는 독자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만큼 고단하다.
그런데 이 여행은 의외로 단순하다. 외계인과 결투하거나 괴물에게 쫓기거나 하는 스펙터클한 모험이 펼쳐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 여행이 흥미진진한 것은 모르는 환경을 익히며 알아가는 지적인 과정의 모험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아와 여행 속의 자아가 서로 대립하는 모험이다. 이전의 자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을 잃고, 여행 속의 자아는 뭔가를 얻어간다. 주인공의 여행은 주인공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그것을 읽는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만큼 독자도 주인공과 같은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저 관찰만 해도 상관은 없다. 어떤 소설이나 다 마찬가지 아니냐고 물으면 물론 그렇다. 그러나 다른 어떤 소설들과 차이는 그 깊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소통의 방법 찾기
독자는 여행이 시작되고 주인공과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거나,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면, 이제 새로운 동반자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의 단계로 넘어간다. 주인공과 여행의 동반자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왔다. 말은 통하지만 그 생각이 통한다고 볼 순 없다. 시차적응기 같은 한동안의 적응기가 필요하다. 그 시간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대화로는 어려워 텔레파시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텔레파시 또한 그들이 살아온 문화를 극복하진 못한다. 그래서 르 귄은 침묵을 권한다. 상대의 말을 들으려면 일단 침묵하라고 한다. 그런데 둘 다 침묵하면 어떻게 들을까? 참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여행은 계속된다. 표정과 손짓 발짓에서 상대를 차츰 알아간다. 오랜 침묵 끝에 서로의 대화는 그 전의 대화보다 좀 더 깊은 공감대를 만든다. 작은 공감대가 형성되면 이제 좀 더 빠른 진전을 경험한다. 이 소중한 경험은 큰 기쁨을 느끼게 만든다. 독자와 주인공과 동반자는 서서히 소통의 방법을 찾는다. 이 정도 되면 긴 여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맺음 할 것인지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책을 놓을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한편 각 편은 르 귄이 저작한 순서대로 보일듯 말듯 한 희미한 끈으로 연결되어있지만, 각 편은 모두 독립적이다. 그래서 어느 편으로 읽기를 시작해도 상관은 없지만, 로케넌의 세계에서 배운 여행의 기술은 유배 행성의 여행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유배행성에서 배운 여행 기술은 환영의 도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그런 식이기 때문에 저작 순으로 읽으면 여행을 따라 잡는데 힘이 적게 들고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성숙의 대가
이제 여행의 마지막 단계다. 로케넌은 적으로부터 행성을 지킨다. 유배자들은 멸족을 면하고, 젊은 왕자와 인류는 적의 지배에서 해방된다. 에큐멘의 대사는 겨울 행성과 연맹을 체결한다. 쌍둥이 행성의 물리학자는 두 행성의 유대를 형성하고 사랑하는 동반자에게 돌아간다. 좋은 결말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아주 큰 희생을 치렀거나, 희생을 감당해야 한다. 적이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여행에서 동반자와 진정한 소통을 통해 이룬 유대의 힘이다.
로케넌은 낯선 행성의 여행에서 얻은 텔레파시 능력에 힘입어, 그리고 빛보다 빠른 통신기 앤서블로 에큐멘 본부에 사격지원을 요청하자 곧바로 빛보다 빠른 무기가 적들의 기지를 파괴한다. 본부에서 그 행성으로 곧바로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이 하루 만에 그 행성으로 날아갔지만, 로케넌은 이미 죽은 지 몇 십 년이 흘렀고, 행성의 원주민들은 그곳을 로케넌의 세계라 불렀다.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이 있지만, 그보다 더 광대한 우주에서 한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인류의 유대를 위해 에큐멘의 대사들은 자신의 짧은 시간을 기꺼이 희생한다. 참 까마득하고 아스라한 시간의 이야기다.
지금은 지구의 반대편에 불과 하루면 날아갈 수 있다. 불과 500년 전에는 수년간 목숨 걸고 항해했다. 인류는 그렇게 어렵게 다른 문화와 관계를 맺으며 변화해 왔다. 꼭 좋은 방향의 변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변화는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헤인 에큐멘 시리즈의 기나긴 여행과 성숙의 대가는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에서 마법의 균형으로 표현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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