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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3/23
    무화과
  2. 2010/03/17
    참 좋은 글을 만났다. (5)
    무화과
  3. 2010/03/14
    김치 잔치
    무화과
  4. 2010/03/08
    2010/03/08(3)
    무화과
  5. 2010/03/07
    커피(1)
    무화과
  6. 2010/03/02
    기다림
    무화과
  7. 2010/03/01
    2010/03/01(1)
    무화과
  8. 2010/02/22
    북인권? (3)
    무화과
  9. 2010/02/21
    오소영 공연(5)
    무화과
  10. 2010/02/18
    내 고향
    무화과

쓰잘데기 없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진다. 마치 영혼 한 뭉텅이가 수많은 말과 함께 새어나와서 몸 안에 커다란 공 모양의 구멍이 생기고 구멍이 커지고 커지고 살갗을 뚫고 나오면 가슴부터 등짝까지 휑한 구멍이 보이는 거다. 구멍 사이로 바람이 새어들어가고, 구멍 사이로 남아있는 영혼이 자꾸 흘러나오고 구멍은 자꾸만 커져가는 상상을 해본다. '도쿄'였던가 미셸공드리가 찍은 편의 여자 주인공처럼 말이다.

 

이렇게 속이 텅 비어 갈 때는 무언가 속을 채울 게 필요하다. 처음에는 좋은 책을 보면서, 노래를 들으면서, 하다못해 술을 마시면서도 채워졌던 속이 이제는 내성이 생겼는지 무얼해도 허전하다. 구멍이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의 갯수가 정해져 있다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는 1000만 단어, 누구는 100만 문장 이런 식으로. 그래서 사람이 육체의 기능이 멈출때 죽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버렸을 때 죽는 걸지도 모른다.

근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허용된 말의 갯수를 모르고 살아간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죽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허용된 말이 남들보다 적다는 것을 모르고 남들처럼 말하다 말을 다 소비해버린 결과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이가 아주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 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것도 같다. 그분들은 말을 많이 아끼신다. 그 말을 다 쏟아버리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기때문에.

 

그래서 한마디를 할 때도 조심스러워야한다. 내 생명을 깎아먹으면서까지 해야할 말들만 해야한다. 실없는 농담으로 소중한 인생을 단축시켜서는 안된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써버렸다. 많은 경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면서.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면서.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남들보다는 더 많은 말이 나에게 허용되었다고 믿고싶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나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 조금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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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글을 만났다.

박건웅 작가가 작가 후기를 보내줬다. 자기는 글솜씨가 없으니 많이 다듬어 달라는 겸손한 부탁과 함께.쭈욱 읽어봤다. 확실히 유려한 문장은 아니었다. 맘춤법 띄어쓰기야 나도 잘 못하는 거 트집잡을 생각이 없다. 비문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문단 구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량도 너무 길다. 책에 실릴 때는 아마 원문과는 많이 달라져있을거같다.

 

그런데 나는 박건웅 작가가 보내준 이 글이 딱 마음에 든다. 책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많이 달라지겠지만, '책'이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지만, 어떤 식으로 교정교열을 보더라도 지금 내 손에 있는 이 글이 가장 좋을 거 같다.

 

박건웅 작가의 솔직하고 담백한 마음이 담뿍 담겨져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 마음이, 그림의 대상이 되는 허영철 선생님에 대한 진솔한 존경심이,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려 하는 겸손한 태도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 칭찬받아 마땅할 것들을 전혀 자랑하지 않고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글솜씨로 마치 꾹꾹 눌러쓴 편지처럼 소중하게 쓴 것이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진다.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화려하게 포장한 내가 쓴 글들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금은 아직 책 작업 중이라 아직 박건웅 작가가 보내준 글을 이곳에 올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시점이 되면 꼭 내가 보관하고 두고두고 읽고 싶다.

 

역시 글은 글솜씨로 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것이며, 삶으로 쓰는 것이다.

참 좋은 마음을 만났다. 이럴 때 책만드는 일이 참 값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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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잔치

부천 집에 다녀오면서 갓김치를 가져왔는데

수경선배가 고들빼기 김치랑 달랑무 김치를 가져다줘서

원래있던 배추 김치까지 김치로만 밥상을 차려도 한 상이 된다.

 

쌉씁름하면서 톡 쏘는 갓 김치와

셔꼬부라져서 맵싸한 고들빼기 김치 

아삭아삭 시원한 달랑무

 

김치 한 번 먹고 밥 한 번 먹고 하면 밥 한 그릇이 뚝딱 해치워진다.

 

반찬들도 덩달아 맛있다.

달콩한 콩장, 새콤한 초장 찍어 먹는 상큼한 브로콜리, 오독오독 무말랭이, 봄내음 물씬 풍기는 냉이 나물

 

날마다 이렇게만 먹고 살면 행복하겠다.

갑자기 배고파진다.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우산도 없는데.

집에 가서 부침개나 부쳐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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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8

1.

어떤 노래 가사는 한 번 들으면 좀처럼 떠날 생각을 안는다.

가슴에 콱 박혀 몇번을 심장을 쥐어짜 숨막혀 켁켁 거리고 난 후에야

겨우 귀로 들을 수 있게 된다.

작년 가을에 처음 듣게 된 오소영의 '기억상실'이 그랬다.

그리고 지금, 시와1집에 실린 굿바이가 그렇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 노래 공연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던 노래인데.

그 때는 이런 느낌 없었는데.

 

2.

'잠에서 깨어난 밤이면 할 일 없어 어쩔 줄 모르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잠들기 전 늦은 밤 할 일없어 어쩔 줄 모른다.

외로워야지, 고독해야지, 생각을  하고 글을 읽고 글을 쓰게 될 거라 믿었는데

점점 술에 의존하고 싶은 생각만 든다. 긴 긴 밤을 혼자 술로 보내다니

안될말이다, 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자신이 없다.

 

3.

당장 어젯 밤만 해도 그렇다.

휴일근무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청소하고 쓰레기 분리수거해서 버리고 나니

이게 뭔가 싶었다. 회사, 퇴근하고 약속. 혹은 회사, 퇴근하고 집안일.

아, 이 무미건조한 삶. 갑자기 울컥해지고 술이 확 땡겼다. 후라이드 티킨이 땡겼다.

아마 저녁 해먹기 전이었다면 주저없이 시켜먹었을지도.

그래도 굴러다니는 광고 전단지 보면서 어느 집 치킨이 가장 싼지 보기까지 했다.

그러다 무언가 찾아볼 게 있어서 전쟁없는세상 소식지를 들춰보다가

이계삼 선생님이 <꽃섬고개 친구들>과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의 서평으로 보낸

기사를 읽게 되었다. 내가 청탁을 했었는데, 나에 대한 편지 형식으로 보내 그 글에는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에 실린 내 '채식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실려있었다.

젠장, 치킨 먹고 싶은 입맛이 뚝 떨어진다. 그 글을 보고도 치킨을 시켜먹을만큼

솔직하진 못하다, 나는.

 

4.

내일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기 위한 첫 모임을 하는데,

뭐라도 준비를 해야할텐데 하나도 안했다.

원래는 주말에 타사 노사협약들도 들춰보고 노동법도 들춰보고 할 계획이었는데.

그냥 좀 귀찮아졌다. 일단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무엇을 어디서부터 해야할지 몰라서.

뭐 처음부터 잘 알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건 좀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모르면서 예전엔 뭘 그리 아는척 떠들고 다녔나 싶어서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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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언제였더라 커피를 마시게 된 게...

짐자무시의 '커피와 담배'를 보면서(재성이랑 술먹고 봐서 중간이 졸았지만 ㅠㅠ)

나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고싶단 생각을 했던 게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걸 보면

전쟁없는세상 초창기까지 난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중학교까지는 워낙 모범생이어서 선생님과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거는 안해서 안마셨고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과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거는 신경 안썼지만

커피를 마시면 이상하게 속이 더부룩해서 안마셨다.

내가 원래 유제품과 잘 맞지 않는데, 아마도 커피에 들어있는 프림때문이려니 했다.

대학때는 IMF 직격탄을 맞은 때라서 커피숍 갈 돈은커녕 밥먹을 돈도 없었고

믹스커피는 여전히 속이 더부룩해져서 안마셨다.

 

아마도 전쟁없는세상이 서대문 아랫집에 있을 때,

신혜가 베트남 다녀오면서 선물로 커피를 줬고,  때마침 오리 동생이 커피포트를 선물해 줬고

그들의 호의를 모른채 할 수 없어 억지로 먹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냥 썼다.

뭐 맥주도 처음 마셨을 때는 썼지만 먹다보니 괜찮아졌던 것처럼 커피도 그러려니 계속 노력했다.

노력 끝에 아주 즐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씩 추운날이나 비오는 날에는 커피가

생각나고 피곤할 때 한 잔씩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는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프림이 들어간 커피나 카페라테처럼 우유가 섞인 커피는 마시지 못했다.

 

프림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게 된 거는 수감생활에서였다.

감옥 안에서 난 먹을 거에 대해 조금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초반에는 커피는커녕 과자도 손에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금씩 무뎌지고 누그러지며 군것질도 하게 되었다.

워낙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아메리카노는 마실 수 없으니까,

1회용 믹스커피라도 가끔씩 먹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몸이 적응해버렸다.

마구 좋아하지는 않아도 먹고나서 속이 더부룩해지지는 않았다.

 

출소하고 나서는 원두커피도 믹스커피도 곧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왠지 뿌듯^^)

 

그렇다고 커피를 썩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무언가에 중독되어 내가 내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게 싫었다. 커피뿐만 아니라, 담배와 같은 중독성이 짙은 것들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커피숍에 가면 마시는 정도. 혹은 사무실에서 아이들과 두런두런 둘러앉아 이야기하며 마시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새 부쩍 커피가 많이 땡긴다. 그것도 맛있는 커피가.

한 잔, 두 잔 먹던 것이 이제 중독이 되었나? 아니다. 중독이라고 말하긴 나는 아직 멀었다.

그래도 예전 같으면 혼자서는 절대 커피 안 마실텐데, 집에서 한 잔씩 내려먹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예전에는 술마시러 가고 싶을 찬스에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가고 싶기도 한다.

 

지금도 일하다 재미없으니까 혼자 커피내려서 마시며 포스팅하고 있다.

 

커피를 안마시다가 마시게 되고, 이젠 맛있는 커피를 찾게 되고

그동안 학교를 떠나고 전쟁없는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언젠가 카페라테를 즐기게 되는 날이 오면, 혹은 밀크티를 즐기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 또 무엇이 변해있을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누구와 있을까.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커피는 쓰다는 것.

 

싫어할 때도 썼고, 그냥 마셨을 때도 썼고, 맛있는 지금도 쓰고, 앞으로 커피에 대한 취향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쓸 거라는 것. 커피는 원래 쓴 맛이 나는 음료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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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며 살았던 적이 있다.

날마다 편지가 배달되는 시간만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빈 편지통, 혹은 가득차 있지만 기다렸던 편지는 오지 않는 나날들.

그러다가 기다리던 편지가 오는 날이면 뛸듯이 기뻐 철창밖으로 날아갈 것 같던 기분.

그리고 또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기다림.

어쩌면 그 당시 나에게는 편지 자체보다도 기다리는 시간이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유난히 추위가 길게 느껴지던 올 겨울, 내내 봄을 기다렸다.

아직 겨울이 빈 나무가지끝에 남아있지만 꽃샘추위가 마지막 한탕을 벼르고 있지만

그래도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기다리던 봄이 와버렸으니 난 또 무얼 기다리며 살아가나.

 

시와 1집이 드디어 나왔다, 내가 출소하고 나서 얼마 안됐을 때 1집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1집이 나왔다. 당연히 바로 샀다. 이미 공연에서 다 들어본 노래지만,

레인보우와 함께 공연할 때랑은 곡 분위기가 사뭇 달랐지만 여전히 위로가 되는 노래들.

한동안 시와1집에 파묻혀 살게 될 거 같다.

기다리던 시와1집이 나왔으니 난 또 무얼 기다리며 살아가나.

 

이제 3월. 2010년 프로야구 개막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프로야구 개막해버리면 또 무얼 기다리며 살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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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1

1.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를 못느끼겠다. 그냥 이제 나도 그 사람이 싫다.

 

2.

나를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을 내가 그리워해야할 필요를 이제는 못느끼겠다. 그냥 이제 나도 그 사람들 안보고 사는 게 좋다.

 

난생 처음으로 과거를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3.

선미는 내 이야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창언이도 내 이야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창언이에겐 미안했고 선미에겐 서운했다.

병역거부도 하고 나름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게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그래도, 솔직한 마음은 선미가 나에게 공감해주길 바랐다.

그사람들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병역거부를 하지 않았다면, 남들이 보기에 자유롭게 살지 않았다면, 선미나 창언이가 나에게

일말의 부채의식이나 미안함이 없었다면, 내가 했던 말이 불편했을까?

 

안다. 친구들이 불편했던 건 내가 병역거부를 했고 기타 등등이 아니라, 내가 했던 말이라는 걸.

그래도 아주 속좁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마치 내가 병역거부를 했고

내가 활동가로 살았었고... 이런 것들 때문이라고. 자꾸 아닌 줄 알면서 바보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주 잘못된 생각으로 내린 잘못된 결론인 줄 또렷히 알면서도

병역거부도 내 기억에서 지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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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권?

같이 사는 친구가 인권운동사랑방 후원인이다. 기특한 것ㅋㅋ

집에 사랑방 후원인 소식지가 온다. 이런 것도 있었나? 사랑방이 소식지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인권오름만 내는 줄 알았는데, 쩝.

 

궁금한 마음으로 얼른 열어보았다.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이 실려있고, 반가운 이름들도 눈에 띈다.

사랑방 활동 구조를 본다. 자유권팀, 사회권팀, 반차별팀....

그러다 북인권팀에서 눈길이 머무른다. 응? 북인권팀?

 

순간 BOOK인권팀이라고 인식했다. 석진이 BOOK인권팀이라구???

아... 젠장. 이제 정말 출판사 직원 됐나보다. 北인권을 보고 BOOK인권인 줄 알았다.

북카페, 북디자이너, 북콘서트 같은 단어들처럼...

 

왠지 기분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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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영 공연

오소영 공연을 봤다. 공연 중간에 해프닝(?)이 있었고, 원래는 스탠딩에 맞춰 설계된 무대를

맨 앞자리 의자에 앉아서 보느라 목과 허리가 고되기는 했지만, 공연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확실히 오소영은 시와와는 다른 무엇이 있다.

자신을 좋아하는 오래된 팬들은 1집에 배어있는 '정서'에 공감해주시는 분들, 이라고 오소영이 공연 중간에 말했는데, 그 말이 딱 들어맞는 거 같다. 아마 2집을 발표한 지금 오소영과는 또 다른, 딱 그 시절 그 나이의 오소영만이 가질 수 있는 방황과 혼란 같은 것들이 음악에 그대로 묻어있다.

 

나는, 20대에 제대로 방황해보지 못했다. 항상 길은 복잡하지 않았고, 그냥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제나 해야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내 앞에 놓여있었고, 대체로 나는 그 일들이 즐거웠다. 실증을 느낄 때쯤, 혹은 생각이 바뀌어 갈 때쯤이면 또 어느샌가 새로운 일들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 20대에 불만은 없지만, 지나고 보니, 그 시절에만 허용되는 '방황'을 한 번 쯤 해봤으면 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무언가 통과의례 같은 걸 못 치르고 지나온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내 또래를 좋아하지만, 그들에게 많은 부분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들 외부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홀로 사람 바글거리는 명동 한 복판에 서있는 기분이랄까.

 

오소영 1집은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뒤늦게 아쉬워하는 그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나는 오소영 1집을 들으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숨어있는, 내가 경험해보고 싶고 느껴보고 싶었던 상황과 감정이 오소영의 노래에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소영 1집이 나에게 겪어보지 못한 과거라면, 2집은 내가 살아야 할 미래다.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여성들은 30대 후반을 지나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 같다. 완벽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러면에서 아주 급진적이고 도발적이면서도 여유와 유머를 가진다고 하면 내가 받는 느낌을 어느 정도 표현한 것 같다. 오소영 2집도 그런 느낌이 든다. 1집에서의 방황과 불안함, 이런 것들을 다 극복하고 결론처럼 내려진 명쾌한 대답은 아니다. 그런 건 왠지 딱딱한 아스팔트길 느낌이 든다. 그보다는 발바닥 아프고 가끔씩 희미해지고 하는 들판에 난 풀밭 길이다. 길이지만 길이 아니기도 해서, 길을 둘러싸고 있는 풀밭들과 어울어질 수 있는 길. 방황, 불안함을 그대로 품어 안고 천천히 세상과는 다른 나만의 빠르기로 걸어가는 길. 워낙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서 남들 삶에서 배우려는 노력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내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몇몇 내 친구들과 같은 느낌을 오소영 2집에서 받았다. 롤모델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공연 보고 나와서 잊고 지내던 말이 생각났다. 한 때 나는 내 이상형은 노래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 결혼한다면, 이상은이나 이소라와 결혼할거라고^^ 그래 노래잘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야겠다. 그래서 날마다 아침에 노래 불러 달라고 해야겠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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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젊었을 때에 거닐던 고향 마을 산과 들의 모습들이 엊그제인 듯 눈에 어립니다. 살아서 단 한 번이라도 고향 땅을 밟아 보고 그 심정을 고향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픈 생각은 나이가 더해 감에 따라 더욱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허영철, 303쪽

 

악랄한 전향 공작에도 빙긋이 웃기만 하며, 교도소측에게 "망상에 걸려 있는 광신 분자", "공산주의 사상을 맹신하여 전향을 계속적으로 거부"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노혁명가가 늙그막에 친지에게 쓴 편지에서 고향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고향...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편인데, '고향'만큼은 참 나도 가지고 싶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을과 산과 들, 혹은 골목길이 있을까? 내가 살았던 동네들, 쌍문동, 방학동, 화곡동, 하단동, 화정동, 운암동, 문정동, 괴안동, 그리고 문발리... 어느 한 곳에 제대로 정 준 곳이 있었나? 나중에 몸과 마음이 상처입거나 지쳤을 때, 찾아 돌아가면 따뜻하게 맞이해줄 사람들과 풍경이 있을까?

 

대추리에서 농민들이 고향을 빼앗길 때, 이해하고 싶어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 감정들.  '고향'

 

갈수록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보험회사와 증권회사에게 미래를 의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얼마 되지도 않은) 내 돈에게 친절한 거니까. 국가도 솔직히 믿을 수 없다. 결국 내게도 필요한 건 '고향'이란 이름의 공동체라는 생각이 든다.

 

뿌리내리지 못한 삶을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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