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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3
    솔직하지 않은 블로그 글쓰기(2)
    무화과
  2. 2010/04/19
    잘가 고양이야(3)
    무화과
  3. 2010/04/16
    착한 이웃이 되자
    무화과
  4. 2010/04/13
    내 노래
    무화과
  5. 2010/04/08
    세상에 쉬운 일 하나도 없다
    무화과
  6. 2010/04/05
    왜 난 고민이 없나?(1)
    무화과
  7. 2010/04/02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내 핸드폰(1)
    무화과
  8. 2010/03/30
    다짐(3)
    무화과
  9. 2010/03/24
    반성(1)
    무화과
  10. 2010/03/23
    무화과

솔직하지 않은 블로그 글쓰기

개똥이들과 놀면 정말 습관성 밤샘이 된다.

뭐 내가 좋아 새는 밤이니 누굴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내 몸이 나는 탓 할뿐이다.

 

선화 개똥이랑 얘기하면서 또 한 번 느꼈다.

오프라인에서는 있어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가

이 곳에서는 굉장히 있어보이려고 노력한다.

자기 검열을 철저하게 하고 나서 글을 쓰고

이 블로그에 들어올거라고 예상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애쓰고

솔직하고, 그래서 구질구질한 내면은 절대 쓰지 않고(따로 일기장에만 쓰고)

물론 거짓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이야기.

 

그래서 예전에 나를 이 블로그 글로만 만나다가

오프라인에서 본 사람들이 깜짝 놀랐나보다.

진지하고 차분하고 조용할 줄 알았는데,

까불까불하고 시끄럽고 장난끼 넘쳐서 깜짝 놀랐다고 그랬다.

 

근데 나는 솔직한 글쓰기 못하겠다. 내 마음 속 깊은 이야기 이곳에 못한다.

굳이 이곳에 못한다기보다는 남들에게 잘 못한다.

그냥, 이곳에 글쓰는 나도 나고, 오프라인에서 시끌벅적한 나도 나고,

이런 나와 저런 내가 만나는 어딘가에 내가 또 있는거고.

 

ps 선화가 내 혀를 뽑아버리겠다고 한다. 나는 아무 잘못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말이 틀린 것은 없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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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 고양이야

월요일 아침 출근길. 시간이 늦은 것도 아닌데 버스를 탔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데 버스를 차고 출근한 건 처음이다.

어제 하루 종일 코엑스에서 가판업무를 해서 몸이 피곤했기 때문이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리는 데 정류장 앞쪽 길가에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있다.

 

2년전인가, 아니면 그 전 해였던가,

우리집과 옆 빌라 사이를 가르는 담 밑 배수구 위에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추운 겨울밤을 외롭게 보내느라 외로운 것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가는 길이 바뻐서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모른척 지나갔다.

추운 겨울에 손을 꺼내고 싶지 않았고,사실은 죽은 고양이의 몸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

그 고양이는 몇 날 며칠 그 추운 겨울밤 그곳에 누워있었다.

눈이 내리고, 하얀 고양이를 하얀 눈이 덮고, 눈이 녹고, 다시 눈이 쌓이고...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동안, 나는 날마다 집앞 길을 걸으며

고양이에게 미안해서, 고양이가 안쓰러워서, 그런데도 애써 외면하며 다녔다.

그늘진 곳에 다져진 눈들도 다 녹은 어느 날, 문득 고양이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어디로 갔을까. 누가 치웠을까. 처음 봤을 때 좋은 곳으로 옮겨줄걸 후회가 막심했다.

 

그 기억 때문에 출근길에 만난 죽은 고양이를 외면하기 힘들었다.

아직 버스는 안오고 있다. 저 멀리를 봐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버스가 바로 오지는 않겠다.

버스 정류장 뒤 공터에서 나무 판자를 하나 주어 들어 고양이 옆으로 갔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고양이 몸에 손대고 싶지는 않아서 판자로 어떻게 들어보려고 했다.

고양이 몸과 아스팔트 사이로 판자를 쑤셔 넣는데 잘 안 들어간다.

결국 그냥 손으로 고양이를 들어 판자에 올리고 정류장 뒤 공터 외진 곳에 내려주었다.

시간은 여유가 있었는데, 삽만 있었으면 묻어주고 왔을텐데, 그러진 못하고

고양이를 들고 갔던 판자로 살며서 하늘을 가려주었다.

 

잘했단 생각이 든다.

그 고양이를 그냥 지나쳐왔으면 오늘 하루 종일 생각나서 다른 일을 못했을거고

한동안 마음에 남아있을텐데... 잘가 고양이야. 아무런 외상이 없는 걸로 봐서

어디서 뭘 잘못 먹고 그곳에 와 죽은 게 아닐까 싶던데.

고양이가 잘 쉬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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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이웃이 되자

녹색평론 111호 실린 박지원님의 글을 읽다가 '착한이웃'이라는 표현을 보았다. 묘하게 그 구절과 표현이 마음에 와 박힌다. 가난한 농촌에서 자란 글쓴이의 친구들이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찌든 도시 출신 친구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겠지만 '착한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착한 이웃이 되어야겠다. 요새 들어 어떻게 살아야할지,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생각이 많아졌었는데, 무언가 해답까지는 아니어도 중요한 힌트를 던져준 거 같다.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할 때도,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지금도, 내가 바라는 건 착한 이웃이 되는 거다.

 

이웃들의 아픈 마음을 쉽사리 넘기지 않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음, 그네들이 처한 부당한 처지를 인정하거나 납득하지 않고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볼 수 있는 지혜, 그리고 그이들의 행동에 작은 힘 보탤 수 있는 소박하고 단순한 용기, 이정도만 있으면 되지 않겠나 싶다.

 

성경에 착한 사마리아인 어쩌구 하는 구절이 있던걸로 기억하는데, 결국 예수님 말씀의 핵심도 이거 아닌가 싶다. 네 이웃에게 착한 이웃이 되어라. 착한 마음과 행동은 단순소박하게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주변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라는 거겠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가져다 주는 정도의 착한 일과는 엄연히 다르고 또 그만큼 행하기 어려운 거 같다.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는 사람을 위해 동전 한 닢 적선하는 건 쉽지만, 그런 건 착한 이웃이 아니라더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예를 들면 국가의 복지시스템이나 기업의 사회환원 같은 걸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착한 이웃이 되는 일은 강도들에게 두들겨 맞는 사람을 위해 강도들과 맞서는 일, 도저히 강도들을 쫓아낼 자신이 없다면 함께 맞아주는 일이다. 음... 생각해보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착한 이웃이 되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겠다.

 

세상에 몸과 마음이 아픈 이웃들이 너무 많은데, 나만 혼자 멀쩡하게 월급받아가며 아무 걱정없이 살아가는 거 같아 맘 편치 않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착한 이웃이 되는 일. 더 가지려 애쓰지 않고 더 나누려고 애쓰는 일. 말은 이렇게 쉽지만 일단은 말이라도 뱉어내야 남들 눈 무서워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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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래

오랫만에 걸어서 출근했다. 어젯밤 비가 온 거리는 아직 군데군데 축축하다.

최근에 알게된 논둑길로 질러오니 시간도 덜 걸리고 차도 없어서 좋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귓바퀴를 때리는 바람이 이어폰 노래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

이제 봄이라고 옷을 가볍게 입고 왔는데 살짝 후회된다.

잠시 구름사이로 햇볕이 비칠면 한조각 따스한 햇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아침 논둑길을 걸으며 마음껏 노래를 불러제낀다.

루시드폴, 오소영, 시와, 옥상달빛(최근에 한 회사 친구가 나보고 노래 취향이 줏대있다고

묘한 뉘앙스로 말했는데,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줏대있는 거 같다ㅋㅋ)

한 명이라도 듣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목청을 높여 부르지는 못했을텐데.

 

노래 부르는 걸 참 좋아한다. 노래 실력은 형편없지만, 때로는 스스로도 좋은 노래 망치는 거 같아 안타깝기도 하지만, 어쩌랴 노래부르는 것이 좋은 걸,

회사 친구들이 나보고 노래 부를 때 참 행복한 표정이라고 했는데,

참 행복하기 때문에 참 행복한 표정이 나오는거다.

기분이 좋을 때는 산뜻하고 행복한 노래를, 기분이 우울한 때는 차분하고 슬픈 노래를

아무도 없는 방이나 길을 걸으며 듣고 따라 부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노래 잘하는 게 꿈이고, 노래 잘하는 사람이랑 사는 게 꿈이지만,

뭐 노래 좀 못해도 상관없는 거 같다. 노래 잘해서 남들까지 기쁘게 해주면 좋겠지만,

노래 못하는 나는 나 혼자만 기쁘게 해줘도 된다(나 혼자만 기쁘게 해 줄수 있을 뿐이다)

내 노래가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준다면, 그게 나 자신일 지라도,

그게 노래를 들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불러서 기쁜 것이라도 어때 뭐.

그거면 충분하다. 내 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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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쉬운 일 하나도 없다

역시 걱정 했던 일들은 많은 경우 걱정대로 현실에 등장한다.

 

부당한 권력과 싸우는 건 차라리 쉽다. 물론 이기기는 힘들지만. 자세히 안보면 부당해보이지 않고 오히려 말 자체에 부당한 뉘앙스를 내제한 '권력'이라는 말과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혹은 사람)과 싸우는 것도 쉽지는 않아도 크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눈 똑바로 뜨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사람들 마음을 모으는 건 쉽지 않다. 어느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끔 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부족함 없이 노력하고도 안됐을 경우에는 겸허히 한계를 받아들이면 되겠지만, 부족함 없이 노력했다고 자평할 수 있는 선은 어디일까?

 

무슨 일을 할 때, 언제나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역시나 쉽지 않게 작용하게 된다. 마치 몸쪽 높은 스트라이크가 들어올 줄 알면서도 헛스윙하는 것처럼 그렇게 헛스윙한 기분이다. 아직 볼카운트는 스트라이크 두개만큼 기회가 있지만, 전혀 여유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맘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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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난 고민이 없나?

산울림 노래 제목 가운데 '왜 난 고민이 없나?'가 생각난다.

너무 고민 없이 살아가는 거 같아서.

 

파주로 이사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세상과 좀 격리되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사람들도 덜 만나고, 조용히 생각도 좀 하고 책도 보고 내면에 집중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그래서 티비도 컴퓨터도 안가져갔다. 확실히 세상과 격리되는 거 같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 만나서 놀 때는 뻔질나게 서울 나가서 밤새 놀고,

오히려 서울 살 때 보다 더 많이 외박하면서 놀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만 격리되어 간다는 것이다.

 

물론 애써 찾아보는 인터넷 기사와 책들 덕분에 머리가 고민을 멈춘 건 아니지만

머리로 하는 고민은 얼마나 뜬구름 잡는 부질없는 짓인지 잘 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몸으로 느끼는 고민인데,

몸은 세상의 고통과 멀어져서 월급쟁이의 안락함에 젖어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다.

세상 살아가는데 안락함이나 안정감이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내 몸이 좀더 불편해지려는 노력을 거부할 때가 바로 삶이 보수화되는 때일텐데,

이대로 가면 그런 순간이 머지않아 닥칠까봐 두렵다.

 

왜 난 고민이 없나?

불편함이 없으니까 그렇겠지. 불편한 사실들에서 몸이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

이제 아주 쉽게 뱃살이 붙을 나이다. 이제 아주 쉽게 편안함에 안주할 나이이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스스로 합리화하기 쉬운 나이다. 그렇게 될까봐 무섭다.

생각마저 삶마저 월급쟁이 근성을 가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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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내 핸드폰

어떤 일들은 막상 그 일을 접했을 때는 걷잡을 수없는 감정이 솟구치지만 생각보다 쉽게 감정은 가라앉고 잊어가게 된다. 또 어떤 일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정의 굴곡을 견딜수 없을 거 같아 억지로 외면하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고 자꾸만 생각나고, 그냥 생각나는 것도 아니라 자꾸 마음 속을 파고들어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게 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핸드폰에도 반도체가 들어가는거지? 들어갈 거 같다. 내 핸드폰 삼성애니콜이다. 작년 이맘때쯤 쓰던 핸드폰이 갑자기 망가져 급하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 016번호를 바꾸기는 싫고 공짜폰을 해야겠고 하다보니 선택할 수 있는 기종이 몇 개 없었다. 나머지는 디자인과 크기가 거의 효도폰 수준이었다. 애니콜이라 찝찝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품질은 좋자나 별 망설임없이 애니콜로 골랐다.

 

핸드폰에 반도체가 들어간다는 생각이 문득 들고나서 저 죽음의 냄새 풀풀 풍기는 삼성 핸드폰을 던져버리고만 싶다.  나도 그 죽음에 일조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 여러 생각을 해본다. 핸드폰을 바꾸고 이 기계를 삼성 본사앞에 가서 길바닥에 패댕이치고 마구 밟아서 산산조각 내 버릴까. 아직 약정기간 안끝나서 또 번호이동 하려면 위약금 십 몇만원 물어야한다는 생각도 들고. 

 

'삼성'이라는 거대하고 악랄한 권력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괜한 무력감도 들고, 삼성을 어떻게 한다는 건 둘째치고 저 피냄새 가득한 핸드폰은 어째야 할 것이며, 아무것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해도 이대로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스스로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을 피하는 것 같아서 싫고...

 

일단 삼성 제품 이제 죽을때까지 하나도 안쓸거라는 다짐, 무겁게 어렵게 해본다. 말은 쉬워도 삶은 어려운걸 알기 때문에 어렵게 다짐해본다. 그건 그거고 이 핸드폰은 어째야할까? 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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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

원래 쉽게 살이 찌는 체질이다.

대학시절에 비해 살이 많이 빠지고,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딱히 운동을 하진 않았어도, 빨빨 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 운동량이 충분해서였다.

그리고 독방에 있을 때, 억지로 줄인 밥먹는 양이 늘어나지 않아서였다.

 

어제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보니

세상에! 저기 저 허리가 대체 누구의 허리란 말인가!

피부 밑으로 가득차 보이는 저것들이 피하지방이라는 걸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니 운동량이 부족한 거고

업무에서 생기는 짜증을 먹는 것으로 푸니 간식량이 늘어났고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밥 먹는 양은 자꾸만 늘어났고

게다가 술은 또 왜 그리 많이 마시게 되는지

더군다나 밤에 배고파서 먹게되는 만두며, 가래떡이며, 맥주 한 캔이며

이러니 살이 찌는 게 당연하지.

 

나는 살 찌면 일단 몸이 찌뿌둥하고 답답하고 그래서 싫다.

움직이기 싫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지고 그래서 싫다.

안되겠다. 관리좀 해야겠다.

오늘부터는 간식 최대한 안먹고 밥먹는 양 줄이고

술은 되도록 적게 마시려고 노력하고

아무리 배고파도 밤에는 무조건 참아야지. 정 뭐하면 독한 술 한 잔 원샷하고 뻗어서 자야지.

이번에는 이 다짐들 꼭 지켜야지.

 

발바닥이 안아프면 문발초등학교 가서 뛰어도 좋을텐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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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술 많이 마시면 안좋다. 밤을 꼴딱새도 안좋다. 술마시면서 밤 새는 건 곱절로 안좋다.

몸에 안좋은 걸 짧은 기간에 반복했으니 몸이 탈 나는 게 당연하다.

 

안그래도 요새 쉽게 피곤해지고, 쉽게 컨디션이 떨어졌었는데,

이미 몸이 안좋아져 있는 상태에서 완전 확인사살을 했나보다.

 

한동안 몸을 좀 돌봐야겠다.

 

노는 모임이나 약속도 당분간은 자제해야지

부르는대로 달려가니 너무 몸이 버텨내지를 못한다.

 

술도 안마시고, 먹는 것도 신경써서 밀가루 안먹고

바깥에서 식사를 하게되더라도 속에 부담이 없는 음식을 찾아먹어야겠다.

 

빨리 회복해서 봄이 제대로 오면(봄이 오기도 전에 여름이 오겠지만)

훨훨 날아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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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진다. 마치 영혼 한 뭉텅이가 수많은 말과 함께 새어나와서 몸 안에 커다란 공 모양의 구멍이 생기고 구멍이 커지고 커지고 살갗을 뚫고 나오면 가슴부터 등짝까지 휑한 구멍이 보이는 거다. 구멍 사이로 바람이 새어들어가고, 구멍 사이로 남아있는 영혼이 자꾸 흘러나오고 구멍은 자꾸만 커져가는 상상을 해본다. '도쿄'였던가 미셸공드리가 찍은 편의 여자 주인공처럼 말이다.

 

이렇게 속이 텅 비어 갈 때는 무언가 속을 채울 게 필요하다. 처음에는 좋은 책을 보면서, 노래를 들으면서, 하다못해 술을 마시면서도 채워졌던 속이 이제는 내성이 생겼는지 무얼해도 허전하다. 구멍이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의 갯수가 정해져 있다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는 1000만 단어, 누구는 100만 문장 이런 식으로. 그래서 사람이 육체의 기능이 멈출때 죽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버렸을 때 죽는 걸지도 모른다.

근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허용된 말의 갯수를 모르고 살아간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죽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허용된 말이 남들보다 적다는 것을 모르고 남들처럼 말하다 말을 다 소비해버린 결과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이가 아주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 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것도 같다. 그분들은 말을 많이 아끼신다. 그 말을 다 쏟아버리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기때문에.

 

그래서 한마디를 할 때도 조심스러워야한다. 내 생명을 깎아먹으면서까지 해야할 말들만 해야한다. 실없는 농담으로 소중한 인생을 단축시켜서는 안된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써버렸다. 많은 경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면서.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면서.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남들보다는 더 많은 말이 나에게 허용되었다고 믿고싶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나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 조금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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