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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0/04
    09. 영치우노동자협회의 모 스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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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10/04
    08. 씬시아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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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4/10/04
    07. 영치우 학교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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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10/04
    06. NLD-LA 메솟지부를 방문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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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10/04
    05. 쉼터에서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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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10/04
    04. AAPP사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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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10/04
    "나 결혼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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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10/03
    03. 부찌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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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10/03
    02. 메솟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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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10/03
    01. 출발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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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영치우노동자협회의 모 스웨를 만나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깊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YCOWA(Yaung Chi Oo Workers Association, 영치우노동자협회)의 "모 스웨"일 것이다. 그의 경력은 상당히 이채롭다. 올해 나이 40인 그는 양곤공과대학을 다니다 급진적인 지하학생운동에 참여했고 1990년 총선거의 결과가 버마군사정부에 의해 부정되자 학생중심의 무장투쟁조직인 ABSDF(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버마총학생민주전선)에 참여해서 정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2000년 조직을 떠나 메솟에 정착했다.

 

그는 메솟일대의 200여개의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8만여명의 버마 이주노동자의 권익단체인 영치우노동자협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는

 

- 태국 민변(Law Society of Thailand)의 도움을 받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개선과 법률상담

- 씬시아클리닉마저도 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이동진료소 운영

- 실업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제공

-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노동권 교육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작년 그가 펼쳐낸 성과는 대단했다. 열악한 작업환경개선과 최저임금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Nasawat社 노동자들을 규합해 파업을 벌였고, 파업이 분쇄되고 버마이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강제추방을 당한 후 그들을 매일 20명씩 다시 메솟으로 불러서(버마의 미야와디와 메솟간에는 하루짜리 비자가 발급된다) 조사보고서와 고소장을 작성해서 마침내 Nasawat社 사장이 벌금 및 임금보전 처분을 받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라면박스 2개분의 서류를 보여주며, "그동안 손가락 하나 꿈쩍 않던 태국 노동청 녀석들이 저걸 다 검토하느라 몇일밤을 샜을 거다. 그래서 일부러 길게 쓰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작년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잠적해 있어야 했다. 메솟의 폭력배들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메솟일대 기업주들의 청부를 받았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5월들어 그가 활동을 재개하자마자 그와 그의 덴마크인 동료는 폭력배들에 의해 린치를 당했다. 메솟 시내의 야시장에서 폭력배들이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의 덴마크인 동료는 복부를 칼에 찔렸지만 그는 무사했다. 다행히 칼이 그의 허리벨트를 뚫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내게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면서 "My good and thick leather belt saved my life"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말에 같이 따라 웃어주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 알 수 없었다. 그의 덴마크인 동료가 린치를 당한 다음날, 덴마크인 동료를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해 주러갔던 다른 동료들도 린치를 당했고 이런 일은 여러번 반복됐다. 태국 경찰당국은 철저한 수사를 약속했지만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나와 함께 다니는 외국인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의 이런 얘기를 들은 후, 난 그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탈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아.. 나라는 인간은 왜 이리도 소심한지...-_-;;;)

 

이곳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상상을 초월한다. 2002년 30명의 버마이주노동자들이 사망했는데 모에 스웨는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아서 적어도 일주일에 1명은 죽는 걸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죽음의 원인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과로, 기업주들의 폭력 등으로 인한 것이지만, 작년 5월에는 6명의 버마노동자가 총에 맞아 죽은 후 타이어 더미 속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고용주에 의해 살해되었을 수도 있고, 버마군정보국의 프락치가 이주노동자로 위장하여 메솟에 잠입했다가 정체가 폭로되어 KNU(카렌민족동맹, 버마내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무장투쟁조직)에 의해 처형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단다. 이곳 메솟은 겉으로는 평온한 전쟁터나 다름없다.

 

그의 사무실에서 내게 자료들을 보여주던 그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심각한 얼굴로 어디를 빨리 가봐야겠단다. 60여명의 버마노동자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해고를 당했다며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다. 얼떨결에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메솟빈민가로 향했다.

 

양철판으로 만든 대문을 열자, 잡초가 무성한 마당한켠으로 다 쓰러져가는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에게 전화를 한 버마청년과 반갑게 악수를 했고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100% 목재로 이루어진 3평 남짓한 방에는 창문조차 없다. 나무 널빤지로 잇댄 벽의 틈 사이로 환기가 이루어지고 마침 저녁 나절이라 방은 몹시도 어두웠다. 그리고 마루 널빤지 사이로 보이는 풀들과 수많은 담배꽁초들이라니...

 

그가 방한구석에 자리를 잡자 10여명의 해고된 젊은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왔다. 버마어로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고 갑자기 모 스웨가 땅을 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놀란 줄 알았는지 그는 내게 "사장이 한번에 다 자르면 일이 커질까봐 시차를 두고 소규모 그룹을 지어 해고했단다. 그걸 듣고 사장 욕 좀 했다."고 말해준다. 20여분간 대화를 주고 받더니만 연락처를 교환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학생시절엔 급진적인 지하학생운동, 그후 이어진 정글에서의 무장투쟁, 그리고 40대엔 이주노동자운동이라니... 도대체 그의 삶은 왜 이리도 팍팍한건지. 가슴이 답답해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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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씬시아 클리닉

메솟 외곽에 위치한 씬시아 클리닉을 방문했다. 이곳은 병이 있어도 불법이주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태국병원에 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무료로 의료지원을 하는 곳이다. 이병원의 원장인 씬시아 마웅은 버마의 소수민족인 카렌족 출신으로 간호사로 일하다 난민들의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진료가방을 메고 밀림을 헤치며 난민들을 도왔던 것이 씬시아 클리닉의 시작이었다.

 

이후 여러곳으로부터의 지원을 통해 상당히 큰 규모의 병원이 만들어졌지만, 아직 전문적인 의료진이나 의약품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씬시아 마웅 원장은 매우 바쁜 분인 걸 알고 있으니 그냥 병원만 둘러복 싶다고 말하고 그냥 병원구경만 했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난민들로 인해 창궐한 말라리아, 버마 정부군이 매설한 지뢰로 인한 다리절단, 총상환자, 이주노동자들의 각종 산재로 인해 병원은 북새통이었다. 그나마 이주노동자 단속을 위해 태국경찰이 씬시아 클리닉 주변에 잠복하고 있어 이주노동자 환자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는데도 병원은 환자들이 많았다.(태국경찰은 버마이주노동자를 체포하면 최소한 200밧, 한화로 6000원 이상의 뇌물을 요구한다. 이는 몇일분의 일당을 합친 액수이다. 약자들의 등을 쳐먹는 악인은 어디에나 존재하나보다)

 

의수와 의족을 만드는 조그만 작업장도 둘러보았는데 한켠에 걸려있는 환자리스트를 보니 눈물이 울컥하고 치밀었다. 리스트에는 환자의 이름과 나이옆에 절단(지뢰), 절단(지뢰), 절단(총상)...이라고 나란히 씌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단어들은 그들이 겪은 고통과 충격에 비해 너무나도 담담히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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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영치우 학교를 가다

NLD에서 나와 부찌의 오토바이를 타고 영치우학교에 갔다. 영치우란 "새벽빛, 여명"을 뜻하는 버마말로 아이들이 버마의 희망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학교는 원래 버마이주노동자단체에서 만든 학교이지만, 현재는 교육사업에 뜻을 둔 민트 아웅과 쵸쵸 카잉 부부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버마이주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되는 이 학교는 1999년 23명의 학생들로 시작해 186명으로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현재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건물을 나누어 운영되고 있다.

 

학교는 말이 학교지 빈민촌 가운데 양철판과 나무판자로 얽어서 만든 가건물에 가깝다. 이 곳에서 일하는 선생님은 모두 여덟분으로 모두 자원활동가다. 이 중에는 전 정치범으로 옥고를 치른 후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흘러든 분도 있고, 버마에서 지하학생운동을 하다가 더 나은 활동공간을 위해 메솟으로 오신 분도 있다. 선생님은 모두 자원활동가이긴 하지만, 선생님일을 전업으로 하고 있기에 선생님들에게는 한달에 한화로 5만원 정도의 월급이 지급되고 있다.(메솟에서 4인가족의 최저생활비로 U$200이 든다고 하므로 이들에게 지급되는 돈의 액수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한 선생님이 저학년 학생들과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칠판에 쓴 글씨를 손으로 지우는 것을 보고 부찌가 왜 손을 지워요?라고 물으니 선생님이 "칠판지우개가 없거든요"라고 말하며 멋적게 웃는다. 이곳의 교장인 민트 아웅은 내년부터 미국의 한 단체로부터의 지원이 끊기게 되어 걱정이 크단다.

 

한국에서는 이곳을 지원하는 APEBC(Assistance Program of Education for Burmese Children)이라는 모임이 있다. 한국에 있는 버마이주노동자들이 한달에 5천원, 1만원씩 자신들의 월급에서 각출해서 송금해주는 모임으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그나마 얼마되지도 않는 자신의 월급에서 기부금을 낸다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이 모임에서 총무역할을 하고 있는 친구 마웅저는 일본에는 한국보다 10배나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고 있지만, 한국의 모임만 같지 못하다며 정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역동성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했다.

 

하여간 갈수록 메솟으로 유입되는 버마이주노동자들이 증가하고, 휴일도 없이 종일 일터에 매여 있어야 하는 노동자 부모가 많아질수록 영치우학교의 존재의미와 역할은 막중해진다. 태국에서, 특히 메솟과 같은 국경도시에서는 아동에 대한 불법적인 인신매매가 횡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구입된(?) 아이들은 마약밀수단의 운반책과 판매책, 성매매, 구걸과 각종범죄에 이용되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영치우 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수업모습, 양철판과 합판으로 얽어만든 학교는 위태위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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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NLD-LA 메솟지부를 방문하다

9월 27일(월)

 

부찌가 아침에 오더니 오늘은 NLD, 영치우학교, 씬시아 클리닉 3군데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미리 스케쥴을 말해준다. 부찌는 자신의 업무가 많음에도 내 스케쥴을 일일이 짜주며 나를 데리고 다닌다고 무더위에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그한테 너무 미안했다.

 

아웅산 수찌 여사의 NLD는 버마내의 본부와 구별하여 자유지역(Liberated Area)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NLD-LA메솟지부라고 부른다. 오토바이를 타고 그곳에 도착하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 놀랐다. 자신을 부의장이라고 소개한 노인이 오늘은 NLD창립 16주년 기념행사가 있는 날이라고 말해주었다. 전날 DPNS에서 많은 운동가들에게 둘러싸여 곤혹스러웠던 나는 적이 안심을 했다. 부찌와 맨 뒷줄에 앉으려고 했는데, 외국에서 온 손님이라고 맨 앞에서 둘째줄 좌석에 앉으라고 한다.(아.. 이건 아닌데...-_-;;) 주위를 둘러보니 푸른 눈의 외국인이 딱 한명 앉아 있다. 근데 가만 보니 방콕에서 메솟으로 들어올 때 함께 차를 탔던 그 사람이다. 괜히 혼자 반가웠다.

 

행사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부찌가 모든 행사진행이 버마어로 이루어지므로 내겐 틈틈이 영어로 통역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서 그조차 가만히 앉아 있었다. 먼저 당지도부의 버마 내부의 정세에 대한 연설이 있었는데, 정부 요인이 모두 장군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랬는지 들리는 건 "제네럴... 제네럴...제네럴..."뿐이었다. 각기 다른 연설자들로 이루어진 3시간 반동안의 연설... 조금 지나니 연설은 자장가로 바뀌었고 난 그 엄숙한 분위기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유일한 참석자가 되었다.(아.. 나라는 인간의 한심함이란...-_-;;)

 

이곳 메솟에서 영어가 유창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난 행사가 끝난 후에도 묵묵히 그들이 내미는 볶음밥을 먹고 혼자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또한 1세계에서 오는 방문객들이 3개월 혹은 그 이상의 자원활동을 예정으로 이곳에 오는 것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그저 하루 혹은 몇일간의 수박겉핥기식 방문이 주종을 이룬다. 그렇기에 그들 또한 나와 같은 한국인에게 그들의 상황을 열성적으로 말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암튼 NLD-LA지부의 방문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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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쉼터에서의 대화

부찌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부찌가 쉼터에 가서 좀 쉬라고 하며 오토바이로 바래다 주었고 난 3시간의 꿀맛같은 낮잠을 즐겼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오니 태툰이라는 아저씨가 혼자서 TV를 보고 있다. 그는 학생시절 지하학생조직의 지도부로 일하다 투옥되었고, 수감기간 중 계속된 고문으로 허리의 주운동신경 하나가 끊어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우리는 어눌한 영어로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는데 주로 그의 가족사와 그가 한 활동, 수감기간에 겪은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뭐냐고 묻는다.

 

- 니가 지지하는 정당이 뭐냐?

+ 응, 민주노동당이야

- 아~ 나도 그거 안다. 김대중씨가 리더 아냐? (democratic이라는 말을 듣고 오해한 듯)

+ 아니, 그건 자유주의자가 주축을 이룬 다른 당이고, 내가 지지하는 당은 이번에 국회의원이 새로 10명 나온 노동자를 위한 당이야.

- 그래? 한국에는 당이 많군. 김영삼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은 어때?

+ 그가 7-80년대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건 맞지만, 그 이후 그는 노동자와 학생들을 탄압하고 권력을 남용했어. 심지어 그 아들은 여러군데서 뇌물받아 먹다 걸려서 지금 감옥에 있지

- 그래? 어쩌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됐어?

+ 뭐.. 나도 잘 모르겠지만, 원래 권력이라는 것의 속성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 아닐까?

- 그래... 근데 노동자를 위한 당이라... 니 정치적 색채가 뭐냐?

+ 나? 흠........ democratic socialist

- socialist???

 

그가 큰 소리를 지르더니만 이내 똥씹은 표정이 된다. 그래, 난 버마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 왔던가. 48년 버마가 독립한 이후 버마체제의 근간은 사회주의였다. 또한 이후 쿠데타 세력은 북한과 같은 폐쇄적인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하며 그것을 "버마식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봉건적 통치체제일 뿐 사회주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버마의 재야인사들을 감옥에 쳐넣고 고문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호명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현재 버마의 재야세력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말은 경멸에 가까운 뉘앙스를 지니는 것 같다. 테툰씨의 반응에 놀란 나는 just like the french and german이라는 수식어를 애써 갖다붙였다. 그러자 몇 분후 나는 그와 대화를 재개할 수 있었다. 아...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독재는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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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AAPP사무실에서

AAPP사무실에는 토요일의 이른 시간임에도 상근자들이 나와 일하고 있었다. 부찌가 나에게 상근자 하나하나를 소개시켜준다. 기가 막힌 건, 소개내용이 이름과 수감된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XXX인데, OOO감옥에 △△△년간 있었지"라니... 4-5년 정도의 수감기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버마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대표적인 정치범 사진들, 현재 약 1500명 정도의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버마의 감옥들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지도, 그 수가 엄청나다]

 

[버마의 학생운동 지도자 민코나잉의 사진, 여기서 만난 대다수의 정치범들은 88년 민코나잉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부찌집의 앞마당, 뜨거운 햇볕을 막기 위해 보통 이곳 사람들은 마당에 차양을 친다]

 

오전에는 부찌가 주관하는 영어수업을 참관했다. 부찌는 버마 특유의 악센트가 심함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참 능숙했다. 그가 영어를 배운 이력은 독특한데, 함께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중 영어가 능숙한 동료로부터 영어를 배웠으며 2주에 15분간 허용되는 가족과의 면회시간에 가족에게 부탁하여 영어교과서 종이로 음식물을 포장하여 감방에 반입한 후 거기에 나온 예문을 모두 암기하고 그 종이를 먹어버렸다 한다. 정치범들에게는 어떤 책이나 신문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배운 영어는 현재 그가 활동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세계 각국 정부나 국제기구와 쉴 새 없이 버마의 상황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고 있으며, 버마에 대한 선택적 경제제제조치(버마산 티크와 보석류에 대한 target sanction)를 EU에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른 정치범들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조그만 행운조차 허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AAPP의 쉼터에 머무는 동안 함께 생활했던 다른 정치범들은 내게 그들의 수감기간까지만 말할 수 있을 뿐 여타의 상황에 대해서는 표현하지 못했다. 내가 내 방에서 쉬고 있을 때, 그들끼리 토론을 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그야말로 격론이 벌어지곤 했다. 저렇게 똑똑하고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미소만 주고 받는 현실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지...

 

따라서 이곳 메솟으로 넘어온 정치범들을 모아 부찌는 토,일요일 두차례 영어강습을 하고 있다. 메솟에 도착한 첫 날 난 이 수업을 참관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들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업분위기는 매우 진지했다. 이날의 수업교재는 동티모르의 정치지도자 구스마오와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동티모르가 독립하기 전 인도네시아 정부의 간섭과 외교적 방해공작으로 인접국가로의 방문조차 허용되지 않던 상황을 구스마오가 어떻게 극복했는가가 주요 내용이었다. 아마도 부찌는 영어강습과 정치학습을 병행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동티모르 정치지도자들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 자신들의 모습을 등치시켜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부찌의 관점과 정치적 의도에 대해 난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가 40이 넘은 정치범들이 형형한 눈빛으로 모여 앉아 영어를 배우는 모습은 내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사무실의 그늘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고양이,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일어났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성질이 못됐다.-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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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결혼해..."

근 2개월간 아무런 연락이 없던 친구녀석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잘 지냈냐는 인사말에 이어 녀석이 했던 말은 "나 결혼해.."였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농담이지?"라고 물어도 녀석은 계속 "정말이야. 나 결혼해"라고 대답한다. "정말로" 녀석은 결혼을 하는 것이다.

녀석은 모 사회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하고 있다. 신부가 될 사람도 내가 몇 번 마주쳤던 그곳의 상근자다.

녀석이 과거 내게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었던 것도 아닌데, 그가 던진 말이 내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군대가는 건 생각지도 않고 있을 때 친구가 내게 했던 "나 군대가"라는 말처럼...

그 친구가 멀리 외국으로 떠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내 마음이 심란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근 10일간 놓았던 일들 때문에 싱숭생숭 하던 차에 녀석은 내게 "한방"을 먹인 것이다. 일이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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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부찌와 만나다

1시간 정도 기다린 후 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 부찌에게 전화를 했다. 생각했던 것하고 그의 실제 목소리는 영 딴판이다. 지금 갈테니 한 10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하릴 없이 또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했다.(이곳의 주요 이동수단은 오토바이다. 심지어 택시까지도) 그는 사진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피곤하고 수척해 보였다.

 

[부찌의 모습]

 

부찌는 1964년 버마의 양곤에서 태어나 양곤대학을 다니던 1988년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2차례 8년여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 3번째 투옥을 피해 국경을 넘은 그는 1999년 이후부터 AAPP(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in burma)라는 단체의 공동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단체는 버마 국내외의 정치범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이곳 메솟지역으로 들어온 전 정치범들에게 3개월간의 숙소와 식량 등을 제공한다. 버마의 정치범들은 장기간 옥고와 고문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태국이라는 이국땅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특히 태국어와 버마어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심지어 문자마저도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언어문제는 버마의 정치범들이 메솟에서 활동하는 데 많은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

 

부찌가 AAPP사무실로 가기전 아침을 먹고 가자며 티샵(teashop)으로 가잖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렸다. 메솟은 생각보다 훨씬 작은 소읍이다. 하지만 시장에 가까이 가자 엄청난 사람들과 오토바이들이 힘차게 질주하는 모습은 역동적이었다.

 

[메솟의 AAPP사무실 근처모습]

 

 

내가 아침을 먹었던 티샵은 버마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버마인들에게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의 주인은 무슬림이라 TV에서나 보았던 서남아시아 스타일의 음식을 팔았다. 밀가루 떡을 화덕에 넣어 굽고 걸쭉한 국물을 끓이고 들어오는 손님도 많고 하여간 부산스럽다. 처음 먹어보는 이 곳 음식은 그 냄새나 맛이 내 입맛과는 잘 맞지 않는다. 밤새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달려왔기에 혀도 깔깔하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부찌가 큰 보온병의 차를 따라 내게 준다. 이곳 사람들에게 홍차는 거의 일상인 것 같다.(그들은 이 차를 그린티라고 불렀다) 부찌가 카운터에 손짓을 하자 담배 세 개비를 플라스틱컵에 담아온다. 느끼한 음식을 먹고 따뜻한 차에 묵직한 맛의 담배 한대라.. 맘에 들었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내가 묵을 게스트하우스로 갔다.(이곳은 메솟으로 넘어온 정치범들에게 3개월간의 쉼터로 쓰이는 곳이다) 이른 시간이라 거의 다 자고 있었지만, 일어나 있는 몇몇 멤버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수많은 사람들 중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 서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미소만 지으며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묵을 방에 배낭을 던져두고 AAPP사무실로 갔다.

 

[내가 묵었던 AAPP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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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메솟으로

9월 24일 금요일 저녁 8시경 방콕 돈 므앙 공항에 내렸다.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고 입국심사도 일사천리로 끝나서 시간에 여유가 있다.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택시기사에게 "North Bus Terminal"이라고 했더니 못 알아 듣는다.(내 발음이 그렇게 후지나?-_-a) 태국말로 “콘 쏫 머칫 썽”하니 그제서야 “아~오케오케”한다.

 

택시를 타고 바라본 방콕의 거리풍경은 참 을씨년스럽다. 매연으로 그을린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보는 것 같다. 터미널 앞에서 U턴을 하다가 교통경찰에게 잡혔다. 기사가 뭐라뭐라 얘기하더니 20바트(600원)짜리 지폐를 슬며시 건넨다. 그걸로 끝이었다. 태국경찰의 부패가 심하다더니 책에만 있는 내용은 아닌갑다.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뭐라뭐라 한참을 떠는다. “Maesot, I wanna go to Maesot"이라고 하니 매표소로 데려다 준다.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표 파는 아주머니가 태국말로 묻는데, 난 그저 ”the last bus to maesot, tonight"만 말했다. 아주머니가 두 번 세 번 오늘밤 맞냐, 마지막 차 맞냐, 메솟가는 거 맞냐라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그러더니 모니터 화면을 내게로 돌려서 가격과 시간을 확인하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맞다고 하자 표를 끊어주면서 승강장 번호까지 손수써서 저 뒤로 돌아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르쳐준다. 아주머니가 너무 친절히 잘 대해주길래 “당신은 너무 친절하다. 너무 고맙다”라고 큰 소리를 지르니 아주머니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태국을 가리켜 ‘미소의 나라’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버스 기다리는 데 여유가 있어 화장실에 갔는데 3바트(90원)을 내란다. 뭐 화장실 갈 때 돈 내는 거야 유럽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화장실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최소한의 비용이 드는 것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럼 그 돈마저 못 내는 노숙자들은 오줌도 싸지 말라는 것인지 갑갑했다. 더군다나 여기는 버스터미널이라는 공공장소지 않은가.

 

10시 30분에 메솟행 버스에 올랐다. VIP버스라는데 좌석도 넓고 등받이가 거의 180도 뒤로 제껴지는게 8시간의 버스여행이 그리 불편할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덮고 잘 얇은 담요며 생수 한병, 빵 2개까지 제공된다. 훌륭하다.

 

태국의 고속도로는 말이 고속도로지 남한의 국도와 다를 바 없다. 도로가 도로변의 집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오토바이도 다니고 심지어 무단횡단도 가능하다. 가는 도중 3군데의 휴게소에서 쉬었는데 우리의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곳이다. 말도 안 통하고 뭘 먹을지도 모르겠고 답답했다. 내가 탄 심야의 버스는 근 5시간을 평지만 내달렸다. 5시간 동안의 평지라... 태국은 확실히 자연의 축복을 받은 나라다.

 

새벽 5시 30분에 메솟에 도착했다. 예정시간보다 1시간을 일찍 도착한 것이어서 사방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러대의 오토바이 택시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같이 내린 승객들은 하나둘씩 마중나온 친지들 혹은 오토바이 택시기사들의 차에 실려 어디론가 흩어지는데 그 넓고 어두컴컴한 공터에 나 혼자만 남았다. 아니, 세상 모르게 퍼져 자는 삐쩍 마른 개 5마리와 손님을 싣지 못해 계속 기다리게 된 6명의 기사와 나 뿐이었다. 사방이 어두운 새벽 5시 반에 부찌에게 전화를 거는 건 예의가 아니라 싶어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시간이 왜 이리도 긴지 애꿋은 담배만 축냈다. 버마와 태국의 국경도시 메솟은 모든 것이 적막하고 평온해 보였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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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출발하기까지

이번 여행은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 늘상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나와는 가진 생각들이 너무나 달랐고 난 숨이 막혔다. 그 때부터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던 것 같은데, TV에서 우연히 버마의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인터넷을 통해 만원계라는 조그만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시아에 있는 여러 활동가들에게 계원들이 월 1만원씩 송금하는 것이 주활동인만큼 특별히 직접적으로 뛰는 것도 아니고, 그리 큰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입을 한 때에는 우리가 지원하는 활동가 부찌(Bo Kyi)가 성공회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직후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계원들은 그 일 때문에 실로 놀랄만한 열성으로 추가계비를 거두고 직장에 휴가까지 내어가며 부찌를 안내하는 일을 자원했다. 때문에 그 사업이 끝난 후 계원들은 진이 다 빠져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계원들의 관심과 열성을 다시 환기시킨다는 차원에서 계원들끼리 부찌가 활동하고 있는 메솟을 방문해 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번 추석을 D-Day로 잡았던 거다.

 

나로서는 해외여행의 경험이 전무해서인지 호기심이 일기도 했고, 내 첫 해외여행이 단순히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뭔가 의미있는 것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같이 가기로 했던 2명의 계원 중 휴가일정이 바뀐 1명이 먼저 메솟을 방문하게 되었고, 또 다른 한명은 사정상 휴가를 아예 못 가게 되어버려 나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나는 여름휴가를 추석연휴에 붙여 사용하게 해 달라고 팀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여서 그냥 예정대로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버마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강렬한 활동에의 욕구마자 없던 내가 추석에 혼자 태국여행을 가게 된 전말이다. 가기 전 한참을 망설였다. 가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하냐는 걱정에서부터, 돈도 없는데 내 인생에 무슨 해외여행이냐 그냥 편하게 집에서 쉬자는 현실과의 타협까지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가기 전 부찌에게 e-mail을 보냈는데, 그는 너무나도 간단히 “환영한다. 빨리 와라” 이랬다. -_-;; 그러니 더 아니갈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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