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16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0/19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9)
    자일리톨
  2. 2004/10/17
    10월은 어째 더디게만 가는 것인가(5)
    자일리톨
  3. 2004/10/16
    나쁜 교육 - 페드로 알모도바르(2004)(6)
    자일리톨
  4. 2004/10/16
    남성들의 소통문화?(2)
    자일리톨
  5. 2004/10/15
    재미로 하는 성격검사(3)
    자일리톨
  6. 2004/10/07
    13. 방콕구경3(2)
    자일리톨
  7. 2004/10/07
    12. 방콕구경2
    자일리톨
  8. 2004/10/07
    11. 방콕구경1(3)
    자일리톨
  9. 2004/10/05
    10. 메솟을 떠나며(9)
    자일리톨
  10. 2004/10/05
    의미없는 규칙의 나열...
    자일리톨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지난주 지방으로 출장갈 때 차안에서 읽으려고 한겨레21을 샀다. 그 한켠에 이 책에 대한 한쪽짜리 서평이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와 영풍문고에 서서 읽어봤다. 한번 책장을 넘기니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십수년간 전선을 취재한 기자가 자신의 기자觀과 그동안의 취재기록을 엮어 펴낸 책이다. 저자는 자신을 종군기자라 칭하지 않고 전선기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종군기자란 일제가 만들어낸 軍言일체의 치욕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군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자국군의 일방적인 전과를 '실황중계'하는 것은 기자의 역할이 아니다. 진정한 전선기자의 역할은 전세계 민중을 대리하여 정치의 연장으로서 전쟁을 취재하며 그 진실을 파헤치고 감시하는 것이다. 그는 "전시언론통제는 전선기자들을 전선에 오르도록 만드는 에너지다. 그곳에 전시언론통제가 있었기 때문에 전선기자들은 사력을 다해 전선에 올랐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베트남전쟁을 전선기자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전선의 참혹함과 전쟁 뒤에 가려진 권력의 추악함을 파헤쳐 냄으로써 전쟁의 종식을 앞당기는 등 인류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권언유착은 심각해지고, 우리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전쟁을 "종군기자"들을 통해 마치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보듯 즐기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저자는 참 많은 곳을 다녔다. 16년간 그는 버마 소수민족과 학생반군들의 투쟁,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벌어진 미국의 더러운 전쟁, 파키스탄과 인도사이의 카슈미르분쟁,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아체와 동티모르의 독립투쟁, 예멘 내전, 아프가니스탄 내전,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군의 학살, 미국과 나토에 의해 날조된 코소보내전을 취재했다. 그가 전하는 전쟁의 모습은 참혹하며 전선에 들어선 인간이 느끼는 공포감까지도 잘 묘사했다. 그리고 "정치가 없는 전쟁기사는 자위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인만큼 전쟁의 참상뿐만 아니라 배후에 도사린 정치지형을 해박하게 정리한 것도 훌륭하다.

 

책의 내용중에 이스라엘군의 조준사격에 팔레스타인 어린아이들과 기자들이 차례로 고꾸라지는 상황에서 학살의 현장을 눈으로라도 보아 기억하기 위해 꿋꿋이 전선을 지켰던 기자들의 모습과, 동티모르의 위급한 상황에서 전선을 떠났다는 자책감으로 저자가 딜리의 바닷가에서 혼자 쪼그려앉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나도 괜히 콧물을 훌쩍였다. 진정 양심적인 저널리스트의 모습이란 이런 것일까?

 

*관련글 :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220.html (강유원님의 블로그)

             http://blog.jinbo.net/docu/?pid=42 (슈아님의 블로그)

             http://blog.jinbo.net/kuffs/?pid=124 (뻐꾸기님의 블로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0월은 어째 더디게만 가는 것인가

오랜 출장(?)에서 돌아와 출근을 했다. 내일 결재가 날 게 있어서 일욜에 나오기는 했다만, 일은 손에 안 잡히고 진보네에 들어와서 이짓하고 앉아 있다. 에혀... 빨리 이거 정리해야 하는데...-_-;

 

밖은 겨울과 가을날씨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연말에는 원래 일이 좀 몰린다. 젠장 이노무 군대식 밀어내기는 언제까지 이럴 건가 싶다. 내년 1월에 잡힐 실적을 금년 12월에 잡고.. 이거 완전히 눈가리고 아웅이지.

 

앞으로 남은 회사의 일정표를 바라보면 왠 계획이 이렇게 많은지. 이 계획표 짠 놈 열라 패주고 싶다. 이거 언제 다 끝내나하면서 걱정하면 걱정할수록 시간은 정말 안간다. 밖의 날씨는 정말 좋고 가보고 싶은 곳은 없어도(내가 어디 가는 거 싫어하걸랑) 만나고 싶은 사람, 보고 싶은 영화도, 보고 싶은 책들도 많다... 왠 배부른 고민?

 

어젯밤에는 새벽3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아침 7시에 후딱 일어났다. 악몽에 시달렸던게다. 땀에 흠뻑 젖어서 놀라서 일어났는데...꿈내용은 황당하다. 회사가 이전했다는 전화를 받고 출근길에 그 건물을 잘 찾아가기는 했는데 바뀐 건물은 겉에서 보기에도 완전 교도소같았다. 복도로 들어가서 지하실로 내려가니 왠 괴물아저씨(?)가 날 덮치는데 놀라 도망가다가 잠에서 깼다. 전기톱 든 폼이 텍사스전기톱 살인마가 생각나기도 하구... 젠장.. 일요일인데 잠이라도 더 자고 나올 것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쁜 교육 - 페드로 알모도바르(2004)

 

금요일에 공짜휴가 하루를 받았다. 예정된 출장기간 하루전에 일이 다 끝났는데 팀장은 그냥 하루 쉬란다. 남들 다 일하는데 하루 쉬는 건 정말 좋더라. 평일임에도 늦잠도 자보고 점심은 서대문근처에서 일하는 친구를 불러내서 먹고 혼자 영화한편 보러갔다. 코아아트홀에서 "나쁜교육"을 아직 하고 있어서 표 끊어서 들어갔는데,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거의 혼자서 띄엄띄엄 앉아 있어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알모도바르 영화는 몇개 본게 없지만(키카, 그녀에게 2편?) 본 후에 후회한 적은 없었는데 이 영화도 역시나 그렇더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인물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넘들이다. 앙헬은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형수와 바람난 옥따비오역으로 나왔던 배우고, "그녀에게"에서 봤던 등장인물들이 여럿 보인다. 신기하고도 반갑다. 특히, "그녀에게"에서 베니그노역을 맡았던 하비에르 까마라는 이 영화에서 많이도 망가지더라.

 

영화에는 남성들만 나와서 저마다의 사랑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나름대로 복잡한 스토리를 무리없이 잘 연결시켰다. 후반부의 반전도 쑈킹했고 말이다. 알모도바르를 나르시스트, 혹은 악동이라고 하는데 저 정도 재능이라면 그의 나르시즘은 귀엽게 봐 줄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겐 아직 "性"과 "예술"은 버거운 주제다.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태도가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내 현재의 생각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갈피를 잡기가 힘들다. 이 영화를 보면서 참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그런 이유에서 이 영화의 가치에 대해서 판단을 할 수는 없었다. 다만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낳게 되는 극도의 집착과, 사랑의 이기적인 속성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예전에 누가 쓴 글에서 "사랑 = 정주고 쪽파는 것"이란 표현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넘어서 버린다. 완전히...

 

암튼,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역시나" 화끈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성들의 소통문화?

* 이 글은 미갱님의 [남성, 그들만의 세계를 엿보다]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미갱님 글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다.

남성이 소통에 서툴다는 거 맞다. 그들의 대화에 자신의 솔직한 내면의 이야기가 상당부분 빠져있다는 것도 맞다. 솔직히 자신의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건 (특히나 직장동료들과 같은 관계에서는) 거의 금기에 가깝다. 직장생활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남성들... 왜 그렇게들 "쎈 척"하는지...

 

주류(?) 남성들의 세계는 나이, 직위 등의 요소에 의해 이미 짜여진 판이다. 거기에 들러붙지 않으면 "팽"당하기 쉽상이다. 대다수의 남성들은 여기에 잘 적응한다. 왜?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은 학교, 동문회, 군대에서 20여년간 이미 너무나 익숙하게 경험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적 소통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아마 "회식문화"가 아닐까? 지금은 내가 있는 팀에 기혼여성이 반수를 넘고 팀장이 그런 문화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회식을 거의 하지 않지만,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노무 회식문화 너무 싫었다. 바람직한 회식이라면 맛난 것 좀 먹으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런 저런 얘기하며 리렉스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지 않나. 남성들은 항상 "자기보다 높은 분(?)들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고, 때문에 회식은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남성의 일장연설과 그를 상찬하는 용비어천가식 대꾸로 이루어지기 일쑤다. 그리고 이런 문화에 찌든 남성은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마저도 힘들게 된다. 

 

또, 아랫사람이나 자신의 동기들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대화의 주도권은 자신이 잡아야 한다는 강박도 있다. 인정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대화의 주도권을 뺏기면 기분 되게 나빠한다. 알량한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후까시 잡는 남성들도 되게 많다. 솔직히 나도 그런 면 많다. -_-;

 

신입사원 연수 받을 때 옆에 있던 동기와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도무지 대화가 안되더라. 대화가 빙빙 도는 느낌이 들던데 일례를 들자면,

 

그놈 : 내가 대학시절에 글도 한번 써볼려고 했었는데...

나 : 그으래? 대단하네~ 소설쓰려 그랬냐?

그놈 : 응... 너 혹시 소설가 김영하씨 아냐?

나 : 들어봤던 것 같은데...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인가, <호출>이라는 단편집인가 한번 읽고 참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놈 : 근데 니네 팀장님은 잘 계시냐?

나 : ???

 

이런 식으로 얘기가 겉돌다가 밥 다 먹을 때까지 그녀석으로부터 재테크강의만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나는 재테크 얘기 듣기 싫어하지만, 그녀석은 자신있는 주제였거든. 이토록 표준적인 남성들의 대화는 일방적인 면이 많다.

 

예전에 책장에 꽂혀있는 <금성여자, 화성남자>를 스윽 들춰봤는데, 이런 책에 대한 나쁜 첫인상을 불식시켜 주더라. 남성이 고민이 있을 때 동굴로 들어간다는 것과, 여성이 남성에게 고민을 얘기했을 때 남성은 그에 대한 합리적인 최적의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정작 여성은 대화를 통해 고민을 나누며 정서적인 위안을 얻는게 주목적인데 남성은 왜 자꾸 내가 이미 해결해 준 문제를 얘기하느냐며 "돌아버린다"니... 어머니가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을 때 나한테 전화를 해서 나한테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할 때마다, 왜 자꾸 그런 얘기 하느냐며 소리나 질러댔던 나는 차~암 반성 많이 했다. 특히 서구의 남성들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는 건 참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디서나 남성은 "쎈 척"해야 하나 싶어 슬프더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재미로 하는 성격검사

이틀간 출장을 다녀왔더니 힘이 주욱 빠진다.

어디 나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다

더군다나 윗분과의 출장이었으니 더 피곤했었나보다.

 

친구 블로그에 들어갔더니 그림으로 하는 성격검사가 있네?

인간의 수천가지 성격을 어찌 9가지로 정형화시켜 구분하겠느냐마는 함 해보니 얼추 맞는다.

MBTI는 정반대의 4가지기준에 의해 2x2x2x2=16가지로 구분하는데,

이건 아무런 기준도 없이 뜬금없이 9가지 구분이라네...

 

한번 해보시라...

 

http://www.xnews.co.kr/files/psycho_242.swf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3. 방콕구경3

태국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체크아웃이 12시라 늦잠을 자려했는데 8시도 안 되서 그냥 눈이 떠졌다. 대충 씻고 짐을 다시 싸고 데스크에 짐을 맡겨두고 저녁에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말해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태국에서의 마지막 날인만큼 태국음식으로 아침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람부뜨리 거리의 노점에서 치킨카레를 먹었다.(카레는 인도음식인가...?-_-a) 우리나라 돈으로 750원에 근사하게 한끼가 해결된다니 태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쑤언 두씻"으로 갔다. 번역하면 "극락정원"정도 될라나? 암튼 출라롱콘 대왕이 서유럽을 여행한 후 돌아와 1900년부터 자신이 거주할 궁전으로 건설한 정원으로 주변에 다른 왕족들의 집들도 드문드문 있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외국인 방문객이나 현지인의 발길이 뜸해서 조용하게 걸을 수 있다고 하길래 찾아갔는데,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길을 혼자 걸을 수 있다.

 

[조용한 극락정원?]

 



하루 두번 태국 전통무용공연을 무료로 해준다는데 난 운 좋게도 시간에 딱 맞춰서 갔다. 공연은 단촐하면서도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가한 왕궁의 한구석에서 무료로 이루어진 공연인만큼 관객들은 느긋하고 진지하게 공연을 즐겼던 것 같다.

 

20세기 태국왕들이 살았다는 위만멕 궁전만 들어가서 구경을 했는데 혼자 구경하다가 3층에서 딱 걸렸다. 15분마다 중국어, 영어, 일본어 순서로 가이드가 인솔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혼자 들어올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그걸 낸들아냐? 그럼, 1층입구에 크게 써붙여 놓던가 해야지. 내가 다시 1층현관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올라와야 하느냐고 묻자, 혼자서는 이동할 수 없으니 일단 기다리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마침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이 지나간다. 거기 가서 같이 다니라고 하길래 난 중국인이 아닐뿐만 아니라 중국어를 하나도 모른다고 했는데도 일단 다니다 보면 영어가이드를 만나게 될 거라며 그냥 가란다. 이런 걸 두고 행정편의주의라고 해야하나? -_-;; 아마도 혼자서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수많은 유물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대의 단일 티크건물이라는 위만멕 궁전은 그 안의 호사스러움이 가히 유럽의 어느 왕실에 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나보다.-_-ㅋ

 

덕분에 40분동안 중국어 실컷 들으면서도 뭔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게 됐다. 대신 혼자서 개인플레이하면서 유물 밑의 설명만 대강 읽었다. 히로히토랑 찍은 사진도 있더만...

 

태국 왕실의 존재는 이 곳에서 정말 대단한가 보다. 이 정도의 재정지원에 딴지거는 인간들은 없었나 모르겠다. 일본은 자신의 국가에 아직도 천황이 있다는 것에 영국 등 서유럽국가와 역사적으로 대등하다는 (여타 아시아국가와는 구별되는) 심리적 우월감을 느낀다던데 태국도 비슷할까? 태국에서 길을 가다보면 항상 국왕과 왕비, 공주, 왕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그것도 거대한 황금빛 왕실문장장식 안에 대문짝만하게 그려놓았다.

 

[교차로의 왕실사진, 큰길 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무조건 이런 거다]

 

30년전의 젊고 매력적인 시절의 왕실가족 사진을 붙여두고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태국이 타이족 이외에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가차원에서 이들간의 통합을 위해 얼치기 선전을 하는 것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람부뜨리의 초라한 덮밥집과 허름한 이발소, 심지어 구멍가게에조차 자발적으로 왕실가족 사진을 붙여놓는다는 건 황당한 일이다.

 

태국어로 절 혹은 사원을 '왓'이라고 하는데, 내가 방콕에 입국하면서 태국관광청부스에서 얻은 방콕 관광지도에는 무수히 많은 왓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왓 사켓'의 전망대에서 본 방콕의 모습은 사원들의 붉은색 기와지붕으로 울긋불긋해 보였다. 난 그 모습에서 밤이면 붉은 십자가로 뒤덮여 마치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변하는 서울의 야경을 떠올렸다. 방콕이나 서울이나 그런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 풍경을 보니 괜히 우울했다.

 

[왓 사켓에서 바라본 방콕시가지, 붉은 지붕들은 거의 사원이다]

 

그 우울함 때문에 왓 사켓의 전망대에서 좀 잤다. 혼자 꾸벅꾸벅 졸다가 배가 고파서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뭘 좀 먹고 어디서 시간을 보내얄 것 같아서(비행기가 자정이었거든) 카오산 근처의 삔까오로 가서 푸드코트에서 대충 밥 먹고 거리의 사람구경 좀 하다가 짐 찾아서 무려 비행기이륙시간 5시간 전에 도착했다. 인제 뭘하지? -_-;;;

 

7일간이라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태국의 빈부격차는 심하다고 느껴졌다. (밥이나 국수를 기본으로 하는) 길거리음식의 값은 저렴하고 언제나 이걸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부촌에는 우리나라돈으로 3000원 이상을 주고 햄버거 하나와 콜라를 먹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싸얌의 디스커버리쎈터엔 이들이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길거리엔 요란한 소음과 매연을 내면서 달리는 오토바이와 툭툭이와 함께 도요타, 혼다, 벤츠의 물결을 볼 수 있다. 도시의 매연에 찌든 70년대 청계천과 2000년대 서울 강남의 공존. 이러한 격차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왕실에 대한 선전과 종교로 효율적이고도 자발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분위기... 이것이 7일간 내가 느낀 태국의 모습이다.

 

이번여행... 첫번째 여행치곤 좋았다. 한 10년쯤 지난 다음에 또 한번 갈 수 있으려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2. 방콕구경2

여행은 역시 혼자 다녀야 맛인가보다. 전날의 반일투어에서 벗어나 싸얌(남한으로 치면 명동)에 있는 "짐톰슨의 집"을 구경하러 갔다. 일찍 일어났더라면 "쑤언 두씻"을 보러 갔을 텐데, 일어나 보니 벌서 9시여서 싸얌으로 방향을 돌렸다. 택시를 타고 도착하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짐 톰슨의 집에 가서 보니 한 인간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더라. 짐 톰슨은 CIA의 전신인 OSS에서 일했던 인간으로 2차대전이 끝나자 태국에 눌러 앉았단다. 그 이유는 태국산 수공품 실크에 매료되어서라나? 암튼 개과천선을 했는지 어쨌는지 이 인간의 손을 통해 전통적인 수공품으로 찬밥신세를 당하던 태국산 실크는 되살아났고, 영화 "왕과 나"의 등장인물들이 걸치고 나오기도 했단다.

 

이 인간은 대학시절 건축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아유타야와 태국 각지에서 뜯어온 건축자재로 자신의 집을 치장했다. 그것도 동양의 유물과 전통을 그 나름의 오리엔탈리즘적인 눈으로 소화해내어 기이하게 재창조했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뜯어온 전당포 문짝을 자신의 복도에 붙여 놓기도 하고, 태국 전통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테라스를 내서 집의 기능성을 살리기도 했으며, 버마산 도자기를 뒤집에서 램프 스탠드로 사용하기도 했더라. 게다가 6동으로 이루어진 저택은 태국의 고서화와 비석들, 중국산 도자기, 일본산 탁자들로 가득차 있어 볼거리는 참 많았다. 이거 고마워해야하나 욕을 해야 하나.



이런 저런 설명을 들으면서 1시간 남짓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다. 가이드가 끝난 후에 짐 톰슨의 집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태국식 홍차를  한 잔 시켰다. 보기에는 걸쭉해 보이지만 마셔보니 씨원허다. 70밧(2,100원). 태국에서는 매우 비싼 편이다. 덕분에 분위기는 끝내준다. 완전 호텔라운지다. 앉아서 담배 2대를 피우고 남은 홍차를 마시며 좀 쉬었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해도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춰 상쾌하다. 방콕에서 느낀 최초의 청량감이었다. 나가는 길에 화장실엘 들렀다. 좋은 화장실이 드물고 유료화장실이 많은 이곳에서는 호텔이든 박물관이든 쇼핑센터든 들어가기만 하면 화장실에 들르는 편이 낫다. 이런 곳의 화장실은 거의 초특급 화장실(이곳 기준으로)인데다 무료이기 때문이다.

 

[짐 톰슨의 집, 정원에서 바라본 저택의 모습]


 

짐 톰슨의 집을 나와 싸얌 근처에 있는 출라롱콘 대학엘 갔다. 지척에 있는 가장 큰 대학이어서이기도 하고 원래 대학교가 싸고 경제적으로 시간 때우기도 좋지 않은가? 학교는 꽤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밖에 나다니는 학생들이 별로 없다. 날씨가 더워 다들 도서관에서 나오지를 않는건지 아니면 시험기간인가? 태국은 대학생들까지 교복을 입고 다닌다. 아래는 남색, 위는 흰색. 왠지 깔끔해 보이기는 한데 캠퍼스 전체가 경직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학생들도 우리처럼 아무데나 걸터 앉아 담배피우고 희희덕거리기 보다는 책 펴 놓고 뭔가를 하고 있다. 얘기할 때도 소곤소곤 지네들끼리만 얘기하고 말이다. 재미있는 건 학생들도 어쩔 수 없이 교복을 입긴 입되, 스탠다드형으로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사이즈를 확 줄여 쫄바지에 쫄남방, 혹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입고 다니는 학생들도 많다는 거다. 우리가 학교에서 혹은 군대에서 어떻게 해서든 주어진 룰에 파격을 가했듯이 인간의 개성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표출되는 것인가 보다.

 

반바지에 면티 한장 달랑 걸친 나를 수위아저씨들이 계속 쳐다보며 눈치를 주길래 쉬지도 못하고 출라롱콘 대학을 빠져나왔다. 근데 교문을 나서자마자 엄청 후회했다. 갑자기 해가 나타나더니

따가운 햇살을 사정없이 내리꽂는다. 마침 점심시간도 지났고 태국에 와서 너무 길거리음식만 먹고 다니는 것 같아 싸얌에 있는 유명한 해산물 음식점인 "씨파"에 갔다. 우리나라돈으로 만원 정도 주고 새우조림을 먹었는데 맛이 그럴 듯 했다. 양이 좀 적어서 그렇지...

 

[싸얌 쇼핑몰앞의 불단, 태국식 가옥의 한켠에는 항상 불단이 마련되어있어 향을 피우고 음식을 넣어 둔다. 이곳 쇼핑센터 앞도 마찬가지였다. 행인들 중 몇몇은 앞에가서 합장을 하기도 했다. 이런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밥을 먹고 싸얌스퀘어 그늘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할 게 없어서 인근의 쇼핑몰 건물로 들어갔다. 싸얌은 우리나라의 명동과 대학로를 합쳐놓은 것 같은데, 오후가 되니 학생들로 그야말로 미어터진다. 쇼핑몰 안에는 한국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값비싼 수입품들이 가득차있다. 한국에서도 쇼핑이라면 치를 떠는 내가 여기와서 쇼핑에 정을 붙일리 만무하고 돈도 없고 해서 4시쯤 BTS(태국 지상철)를 타고 선착장으로 갔다.

 

태국의 젖줄 챠오프라야, 방콕을 감싸 흐르듯 하는 이곳에는 4개의 다리밖에는 없다. 강 서안보다는 강 동안에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모두가 밀집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년중 수량이 일정해서인지 수로운송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학교를 마친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강의 상,하류를 왕복하는 모습, 게다가 강의 서안에 위치한 여러 사원들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은 그럴듯하다. 이날 싸얌관광코스 중 10밧(300원)짜리 르아두언(시내버스 배)을 탄 것이 가장 환상적이었다.

 

[챠오프라야강의 벌건 흙물]

 

[챠오프라야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


 

선착장에 내린 후 시간이 좀 남아서 숙소로 바로 오지 않고 파쑤멘 요새(왕궁 서쪽을 지키는 망루) 근처의 카페에서 노닥거렸다. 게스트하우스를 겸해서 식당과 바를 운영하는 곳인데 분위기도 깔끔하고 저렴하다. 태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데, 내가 첫여행이라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은 걸 후회했다. 15밧(450원)짜리 콜라 하나 시켜놓고 한시간을 개겼다. 베낭여행객들도 드문 드문 앉아서 혼자서들 꾸역꾸역 뭘 하고 있다.

 

[콜라하나 마시면서 노닥거린 게스트하우스, 저렴하면서도 깔끔하다]

 

카페에서 노닥거리던 중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갑작스럽게 밀려드는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파쑤멘 요새에서 걸어서 20분 걸리는 길을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우산이 있어도 이곳의 비를 막기엔 속수무책이다.(게다가 내 우산은 접이식 3단우산이었거든-_-;) 뛰어오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국수며 덮밥 가판대 아줌마 아저씨들이 장사를 접고 있다. 하긴 이 비에 국수 먹으러 오는 사람도 없을테니 장사를 일찌감치 접는 게 상책일 것 같다. 이곳의 비는 대단하다. It never rains but it pours라는 말이 태국속담에서 나온 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내가 방콕에 머문 3일동안 저녁나절에 주로 퍼붓는 것 같은데 번개가 내리치면서 그냥 양동이로 들이붓듯 내린다. 태국 건물의 지붕은 우리나라의 밀짚모자처럼 중간부분이 굉장히 높고 급경사인데 반해 처마로 내려갈 수록 거의 수평에 가깝게 퍼져있다. 아마도 우기때 빗물이 잘 흘러내리게 해서 지붕의 파손과 누수를 막고,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차양을 드리우기 위함인 것 같다. 또 한가운데 지붕이 높은 것만큼 한낮에 달궈진 지붕의 복사열을 피할 수도 있고 말이다. 특히 이곳의 넓은 처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사방에 높은 산이 없던 메솟에서는 오후 5-6시만 되면 그야말로 뜨거운 햇볕이 방안으로 거의 수평으로 들어오더라. 방안에 있는 사람은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주르륵 흐르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정원에 각종 나무들을 가득 심어놓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조화롭게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1. 방콕구경1

아침 일찍 메솟을 출발했는데 밤이 되서야 방콕에 떨어졌다. 베낭여행객들의 천국이라는 카오산 거리를 거슬러 올라와서 겨우 숙소를 찾았다. 쌩판 모르는 곳에서 뭘 처음하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 절감했다. 그리고 그냥 방에 쓰러져 잤다.

 

[방콕에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2평 남짓한 방에 침대하나만 덩그라니 있다]

 

 



아침 9시 반에 눈이 떠졌다. 오랫만에 푹 자긴 했는데 몸은 오히려 찌뿌둥하다. 그래서 람부뜨리 거리로 나가 타이마사지를 받았다. 여행매뉴얼에 짜이디 마사지가 그나마 낫다고 하길래 그곳으로 곧장 갔다. 한국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집이어서 그런지 "Are you Korean?"이라고 묻더니만 대략적인 한국말을 한 단어씩 더듬더듬(누워요, 일어나요, 돌아요 등등..)한다.

 

마사지사는 헬스클럽 주인 아저씨 같은 다부진 몸매의 태국인 청년인데 얼굴만큼은 순박하게 생겼다. 이마에 '나 착해요'라고 써붙인 것 같다고나 할까? 태국 마사지는 사원에서부터 전승된 것이라고 하는데, 병든 사람의 상태에 따라 경락에 자극을 줌으로써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됐다고 한다. 그 동기로서나 개방된 큰 홀에 매트리스를 주욱 깔아놓고 하는 환경만큼이나 건전하며 대중적이다. 다리부터 시작해서 마사지를 해주는데 동작이 거의 레슬링을 하는 것 같다. 그때마다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한 시간의 마사지가 끝나고나니 이상하게 몸이 개운하다. 하지만 내 몸이 괜찮아진만큼 마사지사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그만큼 이 직업도 힘든 일인 것이다. 한시간당 요금은 160밧(한화로 4,800원). 거기서 이 사람의 월급은 얼마나 될까? 태국 노동자의 1일 법정 최저임금이 U$3.40인 걸 감안하면 하루에 U$5.00정도 받을텐데. 미안한 마음에 거스름돈으로 받은 40밧을 "It's just for you"라고 말하며 건네주었다. 그러나 "컵쿤캅"을 연발하며 문까지 배웅해준다. 아... 이건 아닌데...-_-;;; 괜히 더 미안해지쟎아...

 

마사지를 받은 후 2시에는 왕궁, 2개의 사원을 가이드가 인솔해주는 1/2日투어를 신청했다. 아무래도 그런 곳은 설명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같이 동행할 한국 사람들이 여럿 생겼다. 나까지 모두 6명이다. 가이드는 현지인으로 니키와 리나라는 여성들이다.

 

왕궁과 왓프라깨우부터 돌기 시작했는데 태국의 사원은 기본적으로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는 것 같다. 황금스투파를 가까이서 보니 황금빛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하나씩 나란히 붙여놓았다. 이런 화려한 스투파들과 불상으로 가득찬 사원안에서 과연 해탈을 이룰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황금 왕궁을 버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로 들어갔지만 사람들은 그를 다시 황금 사원안에 에메랄드빛 옥으로 만들어 모셔놓았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에메랄드 붓다가 모셔진 사원 앞에서 왠 양키 아저씨가 우리 가이드에게 말을 건다. 말하는 것인즉, "나는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인데, 태국에는 정말 화려한 사원과 왕궁이 많다. 근데 이러한 것들을 만드는 비용은 다 누가 지불했냐? 다 사람들이 낸 세금이다. 그것도 한번만 지었느냐? 아유타야가 버마의 침공으로 불타버린 후 태국의 왕들은 자신들의 왕궁과 사원을 짓고 짓고 또 지었다. 그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만 죽어났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왕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딜가나 국왕일가의 사진이 넘쳐난다. 나는 태국인들의 왕가에 대한 태도가 이해가 안간다... 블라블라블라"

햐.. 이 양키 아저씨 말 한번 시원하게 잘 한다. 들으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끄덕했다.

 

[왕궁과 왓프라깨우, 왓은 태국어로 사원이란 의미다]

 

 

 

화려한 왕궁과 와불, 여러 스투파들을 본 후 챠오프라야 강을 배를 타고(요금이 3밧, 90원이어서 놀랬다) 건너 새벽사원으로 간다. 챠오프라야강은 열대우림의 라테라이트 토질을 가득 담고 있어서인지 시뻘건 흙물이었다. 이런 챠오프라야강이 태국의 비옥한 델타지대를 만들었겠지.

 

새벽사원은 외관상 태국의 스투파와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태국사람들도 이것을 스투파로 부르지 않고 '쁘라 프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이드에게 이 양식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물으니 크메르양식을 모방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이 강성해서 크메르지역까지 그 영향권 아래에 두었을 때 크메르 양식이 많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왕궁에 '앙코르 왓'의 축소모형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 같다. 크메르의 언어와 문자가 태국과 많이 다르냐고 묻자 상이한 언어와 문자를 쓴다고 한다.

 

[챠오프라야강을 건너면서 본 새벽사원, 태국의 스투파와 그 형태에서부터 많이 다르다]

 

주워들은 바로는 태국의 주민족인 타이족은 중국의 서남부에 살다가 송대 이후 한족들에 의해 중국 강남이 개발되자 현재의 태국으로 밀려난 것이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선주민이던 몬-크메르족은 이들에 의해 더 깊은 밀림지대인 현재의 캄보디아로 밀려났다고 한다. 또한 버마족은 몽고족의 일족으로 징기즈칸이 유라시아의 패권을 장악했을 때 몽골에 밀려 현재의 버마로 밀려갔다고도 하고...

 

그러고 보면 단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세계사적 지식은 문화의 결절지역들(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만나 통합된 하나의 역사를 이루는 것 같다. 예전에 [동서문명교류사]라는 강의를 들을 때,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국어 이상의 외국어실력이 요구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처럼 역사과정이 복합적으로 서로 얽혀있다면 3개국어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지역의 역사연구가 어려서부터 엘리트교육을 받은 일군의 서구 부르주아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우려되는 대목이다.(다른 분과학문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겠는가마는...)

 

새벽사원 구경을 마치고 투어가 끝났는 줄 알았는데 가이드가 보석가게에 들러야 한단다. 알고 보니 우리가 타고 다녔던 봉고차도 보석가게에서 무료로 대절해 준 미니버스였다. -_-; 태국의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여행상품 중에 보석가게 방문이 의무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내가 겪으니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보석가게 입구에 내려 난 보석이 필요없다며 담배한대를 피워물었다. 기분이 더럽다. 보석가게라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0. 메솟을 떠나며

원래는 밤차를 타고 늦게 메솟을 출발하려 했지만, 어젯저녁 부찌에게 아침 일찍 떠나겠노라고 말했다. 부찌는 방콕에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면 아쉽지만 그렇게 하라고 했다. 어젯밤에 그렇게 말해 놓고서 부찌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서 지낸 3일동안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힘들었다고, 나는 정말로 평범한 한국에서 온 젊은이라서 당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고 썼다. 그리고 당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과 당신이 하고 있는 활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훌륭한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썼다.

 

솔직히 3일동안의 메솟에서의 생활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곳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슬픔을 모아놓은 곳 같았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음에도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참담함이라니... 그래서인지 메솟에 있는 내내 나는 두통에 시달렸다. 마치 뒷골에 심장이 있는 것 마냥 머리가 두근거렸고, 사흘째 되던 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겠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밤차로는 메솟에서 방콕으로 가는 직행편이 있지만, 아침에는 직행편이 없어서 인근 대도시인 탁(Tak)으로 가서 방콕행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부찌가 오토바이로 터미널까지 바래다 주었다. 차를 기다리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내가 출발일정을 앞당긴 것에 뭔가 안 좋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걱정하는 눈치다. 어젯밤에 당신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면서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가 나중에 사무실에 가서 꼭 읽어보겠다며 나를 향해 웃는다. 그렇게 악수를 하고 그와 헤어졌다. 이런 전쟁터가 아닌 평화로운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았다.

 

메솟이 고원과 같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메솟에서 탁으로 나오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많다. 탁으로 가는 도중 3번의 검문을 받았다. 2번은 군인이, 1번은 경찰이 버스를 세웠다. 그들은 탑승승객 전원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나서야 출발사인을 보냈다. 그만큼 버마 난민의 유입은 태국정부로서도 골치 아픈 일인 것이다. 내 여권을 보더니 "Korean?... why..."라고 얼버무리더니만 내 여권을 돌려준다. 검문은 한국에서건 외국에서건 끔찍히 하기 싫은 경험이다.

 

탁에서 방콕으로 가는 버스에서 '청계천8가'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들어본지도 오래, 마지막으로 불러본지는 더 오래된 노래인데, 왜 갑자기 콧노래로 흥얼거렸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이라는 대목의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낸다는 것, 그렇게 살아간다는 건 정말로 위대한 것이다.

 

[탁에서 방콕으로 오는 버스안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의미없는 규칙의 나열...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의미없는 규칙들의 나열을 보게된다.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가차없는 처벌이.. 커헉-_ㅜ;

규칙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이나 의미를 누가 좀 설명을 해 준다면 좀더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텐데...

만들어졌을 때에는 의미가 있었을 규칙들이 이제는 화석처럼 남아 아무런 의미없이 지켜야 할 전범이 되었다.

 

규칙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 몇 자 적다.

 

p.s. 돌아온지 몇 일 됐다고 이 지랄이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