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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9

1945년 오늘(9.6)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주석은 이승만--;; 헷갈리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지적하는 거지만 건준의 '인공'과 이북의 '인공'은 줄임말은 같지만 다른거다. 건준의 인공은 말했다시피 조선인민공화국이고 이북의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말이지.

 

이 디렉토리를 관심있게 읽어보고 있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건들은 상호 영향을 받고 있다. 45년 9월 6일 건준이 좀 급작스레 인공을 선언한 것은 4일 전 있었던 일본 항복 조인식(45.9.2) 의 영향이 크다. 미소의 분할점령이 공식화 되자 건준 측에선 마음이 급해졌고 양측 군대가 본격적으로 조선반도 전체를 점령하기 전에 건준의 위상을 기정사실화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좀 급작스럽게 인공을 선언했는데 기정사실화는 커녕 미소양군은 기냥 썡까버렸다.(소련은 약간 다르긴 하다.) 미소양군 뿐인가? 좌에서 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파의 정치지도자들 조차 콧방귀만 뀌어버렸으니...오늘날의 관점에서 볼때 조급한 인공의 선언은 패착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공 선언 이후 건준은 착착 인민위원회로 조직을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극우반공주의자를 제외한 좌파 부터 중도우파까지 다 참여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김대중도...이거 떄문에 빨갱이 소리를 오래 듣긴 했지만.) 그러나 그 인민위원회들을 인공이 제대로 제어 할 수 있었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올시다ㅠ.ㅠ

 

물론 인공 선언은 조급했지만 그 주체인 여운형은 일제최말기에 이미 건국동맹을 조직했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로 부터 치안유지를 부탁받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직후 대중성이 있으면서도 친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국내 정치지도자는 여운형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자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컸기에 45년 8월 31일에는 건준 지부가 전국적으로 145개에 달했다고 한다.

 

하여튼 미 군정의 통제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승만이 45년 10월 16일에 미군용기를 타고 귀국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인공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아버리면서 인공은 점차로 유명무실해졌다. 비극이라기엔 좀 비장미가 떨어지고 소극이라기엔 너무 꿀꿀한 사건이다.

 

그런데.....건준은 뭐가 좋다고 이승만을 인공의 주석으로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을까? 임시정부 주석당시의 공금횡령, 조선의 미국편입 주장 논란등으로 임정라인과 사이가 클어진지가 수십년이고 골수 반공주의자라 좌익계 항일세력과도 친하지 않고 미국에서도 장인환, 전명운 의사 재판 통역 거부부터 시작된 지속된 스캔들로 악명을 떨쳤는데 말야..

 

여기서 한 에피소드를 들여다 보자.

 

해방 후 첫 여론조사는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 사이에 실시됐다. 그 결과는 당시 우익 성향의 선구회가 펴낸 잡지 《선구》12월호에 게재됐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 1위는 누구일까? 몽양 여운형이다. 2위는 이승만. 1위와 2위의 차이는 12%로 몽양이 33%의 지지를 받았다.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를 묻는 질문에도 몽양은 단연 1위였다. 그러나 정작 ‘내각이 조직될 경우 대통령감으로 적당한 인물’항목에서는 이승만이 1위를 차지했으며 여운형은 외무부장감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 이유가 뭘까? 내가 추측하기엔 이승만도 일단 항일은 항일인게 확실한데다가 큰 항일 단체 옆에서 좋던 나쁘던 항상 소란을 일으켰기에 독립투쟁의 중심인물로서 민중들에게 확고히 인식되었던게 아닐까? 게다가 초대 임정주석이기도 했을뿐더러 일본의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게 됨에 따라 미국박사, 영어능통한 이승만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는 클 수 밖에 없었던것 같고..

 

권력을 잡고자 하는 자들이여 이슈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잊혀지는 것보다야 욕먹는게 훨씬 낫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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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 라이더 이야기

미디어의 역할이 뭘까? 폭로? 고발? 뭐가 제일 중요한 역할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의제선정도 몇손가락 안엔 꼽힐꺼다. 그런면에서 이 기사는 영 꽝이다.--;;

 

라이더 연대(퀵서비스 오토바이 기사들의 모임 http://onquick.ce.ro)의 초동주체 두사람의 전화를 받고 인터뷰를 하면서 간만에 좀 찡한 걸 느꼈다. 뭐 찡하고 열받는 일들이야  많지만 내가 짐작도 하지 못한 곳에 숨겨진 진실들을 알게되서 느낀 찡함은 또 다른더라.

 

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하여튼 난 기사는 기사고 이 양반들의 조직화와 투쟁에 직접적 도움을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 또 의제화 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매명욕이 그 안에 1%도 없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내 기사 자체는 아무 반향도 없다.--;; 그리고 몇군데 다른 매체에다가 초동주체 연락처랑 상황들을 토스했는데 역시 별 무반응(한군데서 월요일날 취재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분들이 그동안 총연맹 서울본부, 서비스 연맹등등도 좀 쑤시고 다닌 모양인데 별 호응이 없는듯 하여 컨택 시킬만한 곳을 좀 알아봤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고...그냥 서울본부에만 잘 부탁한다고 전화 한 통 떄렸는데 어케 될란간 두고 봐야 알겠다. 우리 센터에 호스팅 하면 보안 문제나 고소고발 건은 걱정 안해도 된단 말을 하긴 했는데...꼭 영업 뛰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만 찝찝했고..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가 나간 후에 초동주체로 부터 감사전화를 받았다.^^ 꺽꺽 목메는 음성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데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뭐라 말해야 될지도 모를 정도로 흥분하시더라. 내가 미안할 정도로...이 때 기분은 참 좋았다. 이런 느낌 계속 갖고 가야지...

 

그 통화 이후에 '그래 내 눈엔 안보이지만 어딘가에선 라이더 연대 문제가 아젠다로 떠오르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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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오늘(9.5) 북한특사 허담, 비밀리에 서울방문하여 전두환과 회동

1985년 9월 5일 당시 북한 대남담당비서 허담과 유엔대사 한시해가 비밀리에 휴전선을 넘어와 전두환과 회동했다. 허담은 '각하(전두환)과의 평양 상봉이 이뤄지길 기대한다"는 김일성의 친서를 갖고 방문했으며 그로 부터 두달 뒤에는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박철언  청와대 보좌관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동을 가졌다.

 

알다시피 휴전 후 대북밀사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72년에는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상호방문이 있었고 그들은 각각 박정희, 김일성과 회동을 갖기도 했다. 그 결과 물이 7.4 남북공동성명이다.  뿐인가? 516 직후 내려온 비운의 밀사 황태성(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로 대구경북 10.1항쟁의 적극적 가담자, 남로당계열로 북에서 경공업성 부상을 지냄)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 뒤에도 밀사는 있었다.

 

 90년에는 당시 안기부장 서동권이 북에 밀파되어 김일성, 김정일과 연속 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남북교류협력법이 생기기전에 비밀리에 대한민국을 잠입탈출하여 김일성에 대한 극찬(주석님, 애국자운운)을 하며 고무, 찬양을 하고 한국의 정보를 알림과 동시에 대화를 합의함으로 백번 죽어 마땅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다! 그러나 molot는 국보법은 국보가 아닐뿐더러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기 떄문에 이들을 국보법으로 소급적용 처벌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런 남북 간의 비밀 회동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짚어보아야 한다.

 

먼저 516 직후 파견된 밀사 황태성은 간첩죄로 사형 당했다. 박정희와 개인적 친분이 깊었던 그는 왜 사형당했을까? 여기에서 지난  '오늘은'의 한편을 떠올리시라.(이 디렉토리를 꾸준히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의 차이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리비아 카다피의 쿠테타를 설명하면서 60년대 말 3세계에선 청년장교들에 의한 쿠테타가 대유행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그 성격은 주로 민족주의적, 반기득권(기득권은 친미세력), 사회주의가 가미된 경제체제를 핵심으로 한다. 한국의 쿠테타 또한 농촌 출신의 청년장교, 사회주의 전력이 있는 박정희 중심, 구체제에 대한 환멸등을 기본 배경으로 깔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케네디 미 행정부로 부터 상당한 의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의심 받은대로라도 하면 좀 좋으련만 박정희군부 세력은 친미만이 살길이요.를 외치고 있던 차라 황태성을 접촉하면 미국이 갈굴까 싶어서 기냥 바로 총살에 처해버린것이다.

 

72년의 남북 밀사 파견 또한 별 다르지 않다. 어느정도 장기집권과 경제성장에 자신을 얻은 남북의 독재자들은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위한 속셈으로 밀사를 파견하고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그것에 흥분했던 남북 양측의 민중들만 속은 셈이었다. 자 72년 남북공동성명 이후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의 확립, 김정일의 전면배치, 왕창 숙청하고 그 나마 남았던 제 세력의 숙청으로 이어졌고 남한에서는 10월 유신--;;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머냐고????

 

이 지점에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에 대한 기억을 각자 되짚어 보시라. 그리고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라는 개념 또한 떠올려보시라. 남한에선 북한이 독재하니까 우리도 대응하기 위해선 민족적 민주주의(우웩)을 강화해야 한다며 설레발을 떤거고 북한에선 미국의 압잽이 박정희가 독재를 하니 우리도 천리마 정신을 강화해야 하고 주체를 중심으로 뭉쳐야 된다며 민중들은 쪼게 된거다.

 

85년도 그닥 다르지 않다. 뜬금없이 대통령 자리를 꿰찬 전두환은 81년 1월 국정연설에서 조건없는 최고책임자의 상호방문을  여론타개책의 일환으로 제시했다. 북한의 반응은 썰렁했으나 83년 아웅산 테러 이후 북에 대한 국제 여론이 싸늘해지자 84년에 들어서면서 북한 또한 대화의 필요성(혹은 대화하는 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은 85년 초에 영원한 의리맨 장세동에게 정상회담 추진을 명했고 결국 그 와중에 남북한의 밀사가 상호방문을 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에는 이르지 못했으니..그 이유를 짚어도록 하자.

 

당시 안기부 문건에 따르면 남측의 정상회담 추진목표에는 북의 대남혁명전략 포기 유도 및 전쟁방지, 북의 남북한, 미국 3자회담 주장 무력화, 86년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이 포함돼 있었고 북의 회담 전제조건은 정상회담 내용은 7·4 공동성명에 근거한 통일방안 마련과  불가침 선언이 되어야 하며 그 선행조건은  군사훈련 중단(지금은 안하는 팀스피리트), 상호비방 중지 등이었다. 둘 다 한발짝도 양보 안하니 될 턱이 있다.

 

하여튼 이런 생쇼 특사 파견은 남북 양측 독재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있어왔다. 앞으론 박터지게 싸우면서 뒤로는 지들끼리 '딜'하고 말야. 그러면서 민중들은 맨날 반공궐기 대회나 미제규탄대회에 동원이나 시키고...

 

결국 00년 615에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전세계에서 이 광경을 보며 가장 배아파 한 사람은 누구? 바로 03)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전향적이긴 하지만 5억불을 싸발랐느니 하며 보수정치권에서 싸우는 꼴이라던지, 우리는 태양민족이에여~ 조선민족이여 일어나세~ 615선언만 이행하면 만고 장땡~을 외치고 있는 일부 운동세력을 보면 내 참. 멀어도 많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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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뉴스 베타 서비스 실시!!

포털들이 제각기 뉴스 서비스를 실시해 재미를 보고 있는 가운데 세계최강자(?)구글이 드디어 한국판 뉴스 서비스를 개시한다. 현재는 베타 서비스( http://news.google.co.kr/?promo=hpp-newskr)

 

미국판으로는 몇년전(정확히는 모르겠음. 일이년전일지도)부터 서비스를 개시했는데 그 알고리즘을 그대로 한국에 도입한것이다.

 

뉴스 편집이 자체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실행되고 그 개별 뉴스마다 관련뉴스들이 또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지금 확인 해보라. 일단 엄청난 정보량과 일목요연한 분류가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즉 에디터가 기사 중요도를 판단해서 편집하는게 아니라 키워드 검색으로 모아진 뉴스들의 클릭수를 중심으로 하여, 그 기사를 실은 매체의 인터넷 영향력 (예컨데 같은 내용의 기사가 조선일보와 한겨레에 떳다 치자. 한겨레 기사가 클릭수가 월등히 높다면 한겨레 기사가 위로 올라가겟지만 클릭수가 같다고 가정할땐 조선일보 기사가 위로 뜬다, 왜냐? 웹상에서의 지표와 영향력을 볼때  디지털 조선이 더 우월하기 떄문이다.) 까지 포함한 기준들이 알고리즘에 적용되어 자동 편집되는거다. 놀랍지 않은가?? ( http://news.google.co.kr/intl/ko_kr/about_google_news.html )

 

미국현지 포털들의 뉴스서비스 시장이 어떤식으로 할거되고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스킨과 디자인만 좀 가다듬으면 한국구글의 뉴스서비스는 돌풍을 일으킬 것 같다. 카인즈도 타격을 입을테고 네이버 뉴스도 큰 타격을 입겠군. 자체 기사를 생산하는 다음은 그 비중을 높이고자 애쓸것 같고..

 

구글뉴스를 한 참 들여다 보고 있는데 보면 볼 수록 기가 질린다.오리지널 판 구글 뉴스의 특징은 시시각각 뉴스 방향이 널뛰듯 한다는건데(십분전에는 보수적 기조이다가 십분후에는 또 열라 진보적 기조로 돌변) 그건 이 뉴스의 독특한 편집 시스템 떄문이다. 미국판 구글뉴스에서도 검증됐듯이 여기서 현재 여론의 추이를 캐취할 수 있다. 예컨데 캐리를 칭찬하는 기사가 부시를 칭찬하는 기사보다 상위에 여러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뜬다면 현재 캐리를 칭찬하는 뉴스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내고 있다는거다. (물론 캐리 지지율이 지금 높다는 식으로 바로 연결되는건 아니다. 하지만  눈 빠른 사람들은 연관성을 찾아내겠지)

 

뿐만 아니라 구글 뉴스 각국판을 보면 그 해당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는거다. 이런건 우리도 유용하게 써먹으면 될 듯 하다.

 

하여튼 요약하자면 다른 사이트들에서 생노가다해서 결과물을 내놓으면 구글은 그걸 지표화해서 알멩이만 뺴먹는 시스템인거다. --;; 아 위대한 google이여......ㅠ.ㅠ

 

인터넷 미디어 종사자로서(얼마나 됐다고--;;) 정말 갈 길이 멀다는게 다시금 느껴진다.

자본으로 무장한 저들의 재주는 끝간데 없이 농간을 부린다. 현장에 노트북(노트북 컴퓨터가 아니다. 말그대로 노트북-수첩, 공책)을 들고가서 기사 쓰는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아 힘빠져라~ 하지만 어딘가에 약한고리가 있겠거니...그 고리가 절대반지려니 하고 찾으러 가자구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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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오늘(9.4) 아파치족 추장 제로니모, 5년의 투쟁을 접고 애리조나주에서 투항

 1886년 9월 4일 아파치족 추장 제로니모가 5년간의 투쟁을 접고 35명의 전사들을 거느린채 아리조나주에서 넬슨 마일드 장군에게 투항했다.

 

사실 널리 알려진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인디언 전사의 이름이 아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고야플레이'(하품하는 사람)이고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죽기 6년전 네덜란드 개신교회 신자로 개종하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투항직전에 제로니모의 목에는 3,000$의 현상금이 걸려있었고(지금 화폐가치로 따지면 거의 오사마 빈 라덴 수준의 현상금이다) 제로니모는 '역마차' '아파치'등등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다. (개중에 품위있는 전사로 그린 영화도 있다만)

 

아파치 족에게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부족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심지어 아파치란 이름은 미군의 주력 공격헬기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하여튼 제로니모는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일대에서 화력과 인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어차피 제로니모가 전투를 시작하게 된 것도 미국연방 정부 때문이다. 인디언들을 서족으로 서쪽으로 몰아내던 미국의 프런티어가 결국 태평양까지 다다르게 되자 미국 연방정부는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이라는 우리 안에 가두고자 했다.

 

이에 반발한 것이 바로 아파치족이고 제로니모 인 것이다. 제로니모의 투항을 끝으로 아메리카 인디언과 미 연방정부의 집단적 충돌을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박제화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제로니모는 1909년 2월 17일 오클라호마의 실 요새에서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첨언:제로니모 자신이 구술한 자서전이 올해 한국에서도 출간된것으로 안다. 나도 북리뷰 기사만 봤을뿐 읽어보진 못했다. 출판사는 '우물이 있는 집'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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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홍대앞으로 뛴 날 밤.

유시민 사진 따위나 올릴 수 없어서 이 molot도 오늘 내 블로그에 사진으로 데뷔한다--;;

보기 힘들어도 이해해달라! 뭐 또 이해 안해주면 어쩔텐가?

 

그저께 술을 너무 많이 먹고 홀딱 벗고 잤더니 바로 어제 감기로 되돌아왔다. 이런걸 보면 참 우리 몸은 신기하다. 받은만큼 되돌려주니까...간만에 멤버들이 모인 탓인지 술자리는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하지만  편하고 뭐 그랬다.

 

사진 중독자 때문에 좀 귀찮긴 했지만 술 많이 먹으니까 안 찍더만. 멤버들 모인 술자리 아니랄까봐 막내는 지갑 잃어버리고 나머지는 우리 집에 와서 잤다. 황씨를 집에 데려오면 안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술처먹으면 온 집을 어지르고 지저분하게 해놓고 나간다는거...아니나 다를까 퇴근해서 본 집은 온통 담배꼬바리, 침뱉아논 휴지 투성이였다는거--;; 결혼해서 저런식으로 놀면 박살날건데..

 


'담배불 붙이는 molot' by evo

 

이게 어디였더라? 업소 이름은 생각이 안나지만 전자다트가 우리 옆에 있어서 신경 와방 쓰였던 기억은 남는다. 참 우연히 '익명의 지하철 대의원'도 만나서 같이 밥먹었었네...차수 변경을 몇차례 하며 가진 술자리가 남긴건 뭔가 생각해보니 별게 없구나...생사확인 외엔...

 

정현종의 시집 '나는 별 아저씨'를 보면 '담배를 보는 일곱가지 눈'이라는 시가 있다.

 

인용하면 좋겠는데 생각이 안 나누나...각자 찾아서 읽어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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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9.3) 통일 베트남 초대 대통령 호치민 영면

1969년 8월 3일 통일 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호치민(1890~1969)이 영면했다. 현실 정치인 중에 그리고 실제로 권력을 잡았던 일인자 중에 호치민 만큼 제나라 민중과 세계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 있을까? 뭐 세종대왕이 있다고???

 

호치민은 등소평 처럼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수학했다. (물론 팔자좋게 유학 간건 아니고 고학을 했지)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강화 회의가 열렸을때 피뜨거운 젊은 프랑스 공산당원 호치민은 호치민은 민족자결 원칙으로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한참 헛바람을 불어넣은 우드로 윌슨 앞으로 서한을 띄우기도 하지만 전달되지 못했다.

 

이후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스탈린, 이립삼들과 교류를 쌓으며 점차 성가를 높이게 된다. 이 와주엥 웃지못할 사건이 있었으니 호치민의 사망설이 널리 퍼지고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가 대형 오보 한 번 했다.) 심지어 1931년 모스크바에선 호치민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후 41년 고국 땅을 밟은 호치민은 그 이름도 유명한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 주석직에 오른다. 여러 과정을 거쳐 53년 마침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게 된다. 이 와중에 400킬로키터에 이르는 갱도를 둟어서 주요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갱도 전투는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된다. (김일성 또한 이에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프랑스가 물러난 후 그 자리는 미국이 메꿨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된다. 그 때부터 또 지난한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이 시작됐다. 여기서 그 지난한 투쟁의 경과를 풀 필요는 없을듯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민중의 곁에서 보낸 호치민은 68혁명당시에는 구호로 불리었다. 체와 호는 자유와 저항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아이콘이었다.(물론 일세계 특유의 오리엔턴리즘도 작용했겠지)

 

결국 호치민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그 옆에는 가족 하나 없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꿈으로써 그에게 말없는 찬사를 보냈다.

 

 68년 호치민의 전기를 쓴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쟝 라쿠튀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세계의 지도자 중에서 실제로 호치민처럼 창조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근원임과 동시에 방향을 가리키며, 사상임과 동시에 실천이며, 국가임과 동시에 혁명이며, 고난의 행자임과 동시에 정치지도자이고, 사람좋은 아저씨임과 동시에 전쟁지도자인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첨언: 호치민은 평소에 목민심서를 항상 옆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레이건한테 눈도장 찍으러 가던 전두환도 기내에서 목민심서(한문본)을 옆자리에 두고 있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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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2)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동시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미, 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발표했다.

 

이차대전의 종결 외에 이 사건은 두가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미 최고 사령부(GHQ)가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것(최고 통치자는 맥아더, 전후 일본 국민들은 맥아더를 마치 천황처럼 모셨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점령군 최고사령관을 뼛속 깊이 통치자로 인정했다는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좀 이상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 국무부의 대령 두명이 (이 중의 하나는 나중에 미 국무장관까지 오른 러스크이다.)사무실에서 지도를 보며 그은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된 점이다.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 이전에 사실 다 짜여 있긴 했지만 미 최고사령부는 천황에게 손을 대지로 안기로 결정했다. 실제 전후 일본에서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세력은 공산주의자(다른 세력들은 전부다 침략전쟁에 동의, 참여했기 때문에) 밖에 없을 뿐더러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일본도 빨간 물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의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선 천황이라는 구심점을 남겨둬야만 한다는 미국의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도 일억 총참회론 이라는 하나마나한 이론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하면서 천황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글들과 가라타니 고진의 여러 책들을 참조하라. 특히 고진의 윤리21은 분량도 작고 쉬운 것이 참 읽을 만 하다.(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일본에 대한 성공적와 대중적 인기의 급등으로 간이 배밖에 나오기 시작한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와중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그 유명한 만주 원폭 투하론이 그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좀 아는 척하는 우파들은 625때 만주에 원폭만 투하했어도 통일 된 건데 말야 하면서 헛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결국 맥아더는 하와이로 불려가서 짤리고 말고 미의회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퇴역했다. 당연히 대통령 후보가 될 줄 알았지만 역시 이차대전의 영웅이고 서민적 풍모를 지닌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자리에 올라 한국전쟁에도 휴전 드라이브를 걸었다.

 

파월이 그나마 부시 정권에서 비둘기파인것이나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쟁의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이 된 후 그 공약을 지킨걸 보면 군바리들이 총 무서운 줄 아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반도의 미소 분할 점령 과정은 다들 알겠거니 싶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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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9.1) 리비아 쿠테타 일어나 왕정 무너지다.

미안하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다. 사실 이거 몇명이나 보는지 알 수도 없고 반응도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귀찮기는 와방 귀찮은데 확 때려치울까 싶기도 하다--;; 달랑 한 열흘 했는데 이렇게 빨리 위기에 봉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집 인터넷이 갑자기 안되는지라 사무실에서 밖에 못하는 탓도 크다. 이해해달라.

 

1969년 9월 1일 리비아에서 카다피 대위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렸다. 60년대 3세계 쿠테타 열풍의 막차를 탄 것이다. 왕정을 무너뜨린 쿠테타 그리고 그냥 쿠테타가 60년대에는 참 많았다. 금방 생각나는것만 해도 터키, 이라크, 한국, 이집트, 리비아...

 

그 공통점은 한국을 제외하곤 제 나라 민중들의 지지를 받은 쿠테타였다는 것이다.(사실 516 터졌을때 좋아했다란 양반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긴 하다.) 식민지 신세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빅 브러더들은 자신들이 통제하기 쉬운 통치자를 원했기에 부패한 구 왕족들을 골라서 왕권을 쥐어주고 배후조종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왕가들은 민중들의 이해와 요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식민 종주국과 자신들의 이해에만 집중 했었고 불만은 거의 폭발 수준에 달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60년대 동시다발적 쿠테타의 배경이다.

 

60년대에 뽀개진 왕정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왕정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우디 아라비아.

 

하여튼 리비아 민중들은 쿠테타를 열렬히 환영하고 카다피 대위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뜻 받아들였다. 쿠테타 하자 말자 지 계급장에 지가 별네개씩 다는 짓거리 하는 우리나라 쿠테타 대빵들과 달리 카다피는 쿠테타 이후 이십년이 지나서야 대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지금 카다피의 공식직책은 국가원수 이다.

 

동아건설의 대수로 공사등으로 인해 우리와도 친숙한 리비아는 카다피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독자노선을 걸었고 카다피는 미국의 공적 2호라면 서러울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매일 잠자리를 바꾸기도 했다는데...

 

물론 리비아가 꾸준히 독자노선을 걸을 수 있는 바탕에는 풍부한 원유매장량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와 억압위주의 통치가 아닌 민중들의 지지에 기반한 통치가 더 큰 기반이 아닐까 한다. 미국이 섣불리 카다피를 건드리지 못한 것도 그 탓일게고....

 

마냥 멋지기만 하던 카다피도 맛이 가는 모습을 요즘은 조금씩 보이고 있다. 리비아 축구협회 회장인 카다피의 아들이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유벤투스의 이사가 되지 않나? 페루쟈에 선수로 등록하지 않나...

 

국제적으로도 리비아는 조금씩 변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의 배후로 오랫동안 경제적 제제를 받던 리비아는 이라크가 박살나는 모습을 보고 쫄았는지 모르겠는데 미국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이라크 하나로도 벅찬 미국 또한 짝짜꿍을 맞추고 있고..

 

카다피가 맨날 들고 다니는 그린 북(green book, 이슬람과 사회주의의 짬뽕)을 보면 주체사상이 생각나기도 한다.

 

요즘 나타나는 카다피의 적극적 세계화(?)가 민중들의 생존과 자유를 위한 것인지 자기 권력의 연장을 위한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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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개혁 토론회, 열린졸린당

 엊그제 국회로 직출해서 언론개혁 토론회를 취재하고 왔다. 머 뻔하고 뻔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지라 별 재미는 없었다. 뭔가 돌출발언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 햇던 거지...

 

최근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에서 참여연대, 민언련에 대한 공세의 수위가 높아져 가고 이기에 민주노동당이 민언련에 어떤 대립각을 세우지 않을까도 내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우리 당의 언론정책은 민언련등과 대동소이 합니다..........--;;' 영 재미없었다.

 

민언련 최민희사무총장은 참 명불허전이더라. 조선일보야 나도 싫어하지만 방송개혁 주장하는 것은 언론개혁에 물타기 하려는 짓이라는 둥, 뜬금없는 한나라당 공격을 비롯하야 참으로 대통령 보시기 어여쁘겠더라.

 

토론회 내내 류시민 의원은 꼴불견이었다. 싸가지 없음을 촌철살인으로 착각하는 모양인지 참 보기 뭐한 발언과 자세들이 계속 되었다. 남들 다 똑바로 앉아있는데 비스듬히 기대서 티꺼운 표정 짓고 있는것 부터 해서 남 발언할때 옆사람하고 잡담하기 등등 다양한 밉상의 자세를 온몸으로 구현했다.

 

 


 

내가 포착한 사진이다. 토론회 시작 전에 인사발언, 김재홍 의원의 모두 발언등이 있을때 고개 팍 제끼고 졸고 있더라. 기사에 써먹고 싶었지만 차마 못썼다. 이렇게 라도 써먹어야지...

개인적으로 내 블로그에 처음으로 올라오는 사진이 유시민 의원 것이라니....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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