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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사노위 : 11호> 대우조선, 정규직·비정규직 모두 위태롭다!

 

대우조선, 정규직·비정규직 모두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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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탑위에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강병재가 있다

5월들어 비바람과 황사로 철탑은 하루하루가 고통과 위험 속을 견디고 있다. 강병재 동지는 15만4000볼트 고압송전탑 위에서(지난3월7일 공공농성시작) 60일째 고공농성을 통해 대우조선 1만7000 하청노동자들의 고통스런 삶을 폭로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해고한 대우조선을 규탄하고 있다. 더불어 대우조선의 모든 비정규직은 불법파견이며 대우조선은 하청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우조선노조는 사측과의 교섭도 미비한 상황에서 뾰족한 방향을 잡지도 못하고 있으며,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철탑에 음식물 정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이라도 대우조선 노조는 하나의 투쟁 주체로 자임하고 철탑 농성의 해결방법을 책임있게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명백한 노동재해, 회사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한다

하청 노동자의 노동자만이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니다. 한 정규직 노동자가 2011년 4월4일 반 생산 회의실 의식을 잃었고 결국 사망하였다. 사망 장례대책위가 조직되었지만 대우조선노조는 사망3일 이후에는 모든 지원을 끊고 사측과 유족간의 중재에만 매달려있다. 사측은 유족에게 회사의 안을 받을 것을 종용하고 반강제적으로 공탁을 걸겠다며 협박하는 상황 속에서 유족가족은 사망이후 32일 동안 출 ,퇴근 선전전, 시청 1인 시위,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측은 몸이 건강할 때, 부려먹고 회사 안에서 죽음을 맞은 노동자에 대해서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상 노동조합까지 철수한 상황에서 사측은 급할 것 없다며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현장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대우조선 사측을 보며 현장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아우성이다. 이제 더 이상 회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고통 속에 있는 조합원과 함께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필요 없다. 조합원들이 탄압과 억압으로 고통 받는데 이를 외면하는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아니다. 대우조선의 현장은 정규직, 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위험과 부당함에 신음하고 있다. 조선업이 불황이라고 엄살을 부리면서 갈수록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정규직을 줄이고, 사내하청을 양산하고 있다. 철탑에 서있는 하청노동자나, 싸늘한 죽음을 맞이한 원청의 노동자나 모두 자본의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원하청 연대는 당위가 아니라, 생존의 필요조건이다.
 
노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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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사노위 : 11호> [생활의 파문] 회사는 사장의 것이라는 자본주의 상식에 도전하자!

 

[생활의 파문] 

회사는 사장의 것이라는 자본주의 상식에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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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상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다

가상해 보자. 산길을 헤매던 실직자 A는 우연히 B를 만난다. B는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자신은 임자 없는 황무지를 알고 있고, 다행히 호미와 낫과 같은 농기구가 있으니, 함께 황무지를 개척하자고 한다. A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좋은 제안이기에 흔쾌히 응한다. 둘은 열심히 황무지를 개척하였고, 각고의 노력 끝에 곡식을 추수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곡식은 어떻게 나누는 것이 상식일까? 세월이 지나 농장에 창고도 짓고, 현대식 농기구도 장만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것일까? 아마도 독자 대부분의 대답은 반반 혹은 B에게 조금 더, 이 질문에 답은 대충 이렇게 나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상식은 틀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B의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천만에! 생각해보자. 임자없는 황무지는 시장이고, A는 노동력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이고, B는 알량한 생산 수단인 호미와 낫을 가진 자본가라면, 생산수단을 가진자가 모든 잉여가치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것을 용인하는 이 사회에서는 독자들의 상식은 틀린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B는 이미 가진 생산수단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상의 생산수단과 부를 획득하고, 심지어 생산된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그렇다면 생산수단을 B가 소유하는 것은 정당한가? 오래 전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는 수탈과 폭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수탈은 합법으로, 합법은 상식으로 강요되었다. 애초의 자본가는 이렇게 부를 축적하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회사는 사장의 것이라는 상식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미신이며, 사기다.
 
사회운영에 대한 상식은 계급에 따라 당연히 다르다.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이념을 모든 영역에서 관철하려한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이해에 기반하여 사고하면, 자본가계급이 강요하는 상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는 가장 핵심적인 자본주의 상식이며, 때문에 이것은 노동자계급에게 가장 위험한 상식이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는 애초에 반사회적이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이를 통한 잉여가치의 배타적 독점은 인류에게 크나큰 고통과 차별을 양산하고 있다. 인류의 비극은 바로 이것에 기원한다. 한 쪽에서 1달러의 돈을 벌기위해 12시간 내내 축구공을 만드는 어린 노동자가 있고,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 공으로 수백억의 축구잔치가 벌어진다. 어떤 이들은 음식물쓰레기로 골치가 아픈 반면, 어떤 이들은 하루의 일용할 양식이 없어 죽어가기도 한다. 자본은 거대화되어도 노동자는 늘 해고와 강화되는 노동강도로 인해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이것은 현상은 동정과 시혜로 해결될 수 없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회사는 사장의 것이라는 상식에 도전하고, 깨버리지 않는다면 언제나 노동자계급은 쳇바퀴 다람쥐와 같은 신세일 뿐이다. 인류공영과 호혜평등은 누구나 이야기 하지만,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이를 근본적으로 막고 있어 실현될 수 없다.
 
김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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