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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 사노위 27호>복지논쟁, 노동자계급이 간파하고 전망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피폐해지는 삶 속에서 너도 나도 복지! 복지!

상황을 모르는 외부인이 보면 한국 사회가 대단한 복지국가가 될 태세라 생각할 것이다. 그 정도로 요즘 너도 나도 복지 확충과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세제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전체 예산 중 복지예산이 해마다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며 자화자찬하고 하고 있다. 정부는 얼마 전 (사실은 무늬에 불과한) 한국판 버핏세를 도입했고, 당장 0-2세 및 5세 영유아에게 월 20만원 씩 보육비를 지원한단다. 당명을 바꾼 새누리당 정강·정책 1조가 “모든 국민이 더불어 사는 복지국가”, “보편주의와 선별주의 아우르는 평생 맞춤형 복지”로 바뀔 것이라 누가 상상을 했을까. 더욱이 당의 비전이 “국민행복국가”이고, 정부의 역할은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강한 정부”라며 기존의 ‘작은정부론’을 삭제했다. 이에 뒤질세라 민주통합당은 사업연관성이 없는 대기업 계열사 출자금에 대한 과세인 ‘재벌세’와 소득 상위 1% 계층에 대한 증세로 2017년까지 세수를 지금보타 20조원 더 늘려 복지재원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가 강력한 반발이 일자 ‘재벌세’에 대해서는 발표 다음 날 꼬리를 내렸다.

 

대안을 갈망하는 대중

복지가 애초에는 ‘논쟁’으로 시작했으나 어느새 ‘경쟁’이 되어버렸으며, 이 복지경쟁은 물가와 교육비, 전세 값은 천정부지로 솟는데, 수입은 줄어들고 빚은 갚고 갚아도 늘어만 가는 피폐해지는 삶에 지친 노동자·민중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선거에서도 드러났다. 무상급식 소동 끝에 시민운동가 출신이 시장에 당선된 사건이나 추락하는 여당의 지지도 모두 박원순이 좋아서, 야당이 좋아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싫기도 하거니와 복지 얘기하는 후보 찍으면 서민의 삶이 그래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다. 이렇듯, 지금의 복지 논쟁 혹은 경쟁은 무상급식이나 보육 등 특정 정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 위기에 봉착한 민중들이 대안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의회주의에 희생된 노동자·민중의 복지

정부나 각 정당이 어떤 복지 정책과 세제 개편안을 내놓든, 그것 자체가 얼마나 훌륭하든 부족하든,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복지 논쟁 혹은 경쟁은 복지를 집권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복지는 “포퓰리즘이네, 남유럽처럼 재정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방만한 지출이네, 좌빨 짓이네” 하다가 고용불안과 빈곤, 양극화에 지친 대중의 몰매를 맞자 뒤늦게 ‘복지’를 외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대중 사이에 반MB 정서와 복지에 대한 열망이 확산되자 이로부터 어떻게든 이득을 보려고 안간 힘을 쓰면서 ‘무상’을 남발하고 있지만, 정부여당과의 차이는 고작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정부여당이 올해 들어 오히려 공세적으로 ‘무상보육’, ‘부자증세’ 정책을 내놓자 민주통합당은 숫자만 바꿔 마치 대단한 복지정책인 양 선전하고 있다. 자신의 역사와 과거를 부정하고 내부 반발을 무마하면서까지 ’보편·무상 복지‘를 주장하여 어떻게든 정권을 탈환하고자 하는 속셈이다. 게다가 이들은 하나같이 ’복지국가‘를 얘기하면서 정책을 남발하고 있지만 정착 이 정책들을 관통하는 복지‘국가론’ - 복지를 주요 기치로 하는 국가 운영과 권력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과 토대 - 이 없어 남발된 복지 정책들이 허공을 떠돌아다니거나 기존에 가지고 있던 보수주의적 복지관과 내부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면에서 현실가능성을 놓고 보면, 보수 정당들의 복지 정책이야 말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이른 바 진보정당은 이런 의회주의 복지 게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궁극적인 목표가 ‘착한 자본주의’에 불과한 ‘사민주의 복지국가’이긴 하지만,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이 제시하는 각종 복지정책과 부자증세 등은 언뜻 보기에 그나마 척박한 삶에 숨통 트이게 할 정책인 것 같고, 그대로 시행된다면 한국도 유럽 수준의 복지국가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과 통합한 통합진보당은 물론이거니와 진보신당도 만약 반MB 전선 구축과 집권 혹은 지분 확보에 급급해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계급성을 더욱 잃고 국민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게 되면 좌경화가 아닌 우경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그토록 갈망하는 유럽의 복지 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노동자들이 싸워서 쟁취한 것이다. 정치인의 공약과 정책연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진보정당 모두 이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경험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그럴싸하게 보이던 이들의 복지정책도 민주통합당의 복지 비전과 별반 차별성을 갖지 못하면서 현실가능성이나 복지 혜택의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게임’하는, 숫자 가지고 정부 및 한나라당과 싸우는 형국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를 ‘착하게’ 만들 것인가 자본주의에 균열을 낼 것인가

복지는 양날의 칼이다.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자본주의 내 균열을 내고 노동자가 지배하는 대안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경로가 될 수도 있다. 이 두 방향을 판가름하는 것은 집권에 혈안이 되어 내뱉는 말과 주장, 숫자가 아닌 노동자·민중의 주체적인 투쟁과 사회주의이다. 물론 유럽 특히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는 우리에게 꿈만 같고, 실제로 사회민주주의가 그나마 한국의 저급한 자본주의보다 나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노동자·민중의 투쟁의 성과를 탈취하여 노조 협조주의, 노사정 합의주의로 치환시킨 ‘착한 자본주의’에 불과하다. 복지체계의 최종 목표가 ‘착한 자본주의’에 불과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인 이상, 이는 노동자·민중의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일부 사회주의자는 복지란 자본주의를 인정한 채 추구하는 작은 개량에 불과하기에 복지 주장은 개량주의적이며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량과 개량주의는 엄연히 다르다. 아무리 혁명 투사라 하더라도 정리해고 분쇄나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현실 사회에서 노동자의 기본 조건과 권리 즉 ‘개량’을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진정한 노동해방과 자본주의 철폐, 대안 세계에 대한 전망 없이 목표가 ‘개량’ 요구로 끝난다면 이는 개량주의가 된다. 복지도 마찬가지이다. 교육과 의료, 주거와 보육은 노동자·민중의 삶의 기본 조건과 권리인데, 증세 몇 %, 보육비 얼마로 끝나면 이는 착한 자본주의를 만드는 데 복무하는 것 밖에 안 된다. 지금 진행 중인 정당 - 보수든 진보든 - 간 복지 논쟁은 바로 여기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같은 증세 몇 %, 보육비 얼마라 하더라도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지면서 노동자 계급이 투쟁을 통해 이를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쟁취해낸다면, 그 몇 %와 보육비 얼마는 자본주의 체제에 균열을 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노동자·민중의 주체적 투쟁을 통해 쟁취한 권리로서 복지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복지는 우선 노동자·민중의 투쟁의 산물이다. 과연 진정한 복지를 상층 정치인들의 게임이나 의회주의 선거 전술로 얻어낼 수 있는가? 설령 얻어낸다 하더라도 지금의 정치적 힘의 관계나 계급적 역관계를 봤을 때 과연 실효성이 있겠는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복지가 시혜가 아닌 진정한 보편적인 권리가 되고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주체적인 투쟁과 물리력으로 쟁취해낸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래야지만 이른바 ‘노동연계복지’라는 기만적인 신자유주의 복지체계를 깨뜨릴 수 있으며, 노동문제에 대한 근본적 모순과 해결을 회피하고 단지 부를 재분배하는 수준으로서의 ‘노동복지’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은 ‘생산적 복지’에 맞서 직접 장애인 주체들이 투쟁에 나서 이동권 등 자본가와 정권으로부터 하나씩 양보를 얻어낸 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이 좋은 예이다.
복지 경쟁이 한창인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누구의 관점’에서 ‘누구의 양보와 희생을 대가’로 하는 ‘누구를 위한 복지’냐를 질문해야 한다.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자본가 계급과 부유층의 양보와 희생을 대가로 노동자·민중을 위한 복지를 주장해야 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을 위한, 만인의 복지’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복지에서 보편주의의 원칙이 계급적대를 무시하거나 은폐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복지의 핵심은 공공적 소유구조와 운영 그리고 사회주의

현재 복지 논쟁/경쟁은 개별 복지 수준을 약간 확대하고 이를 위한 재원을 조달하는 방안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보편이냐 선별이냐의 구도가 복지의 본질이 아니며,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에서 ‘얼마 지원’, ‘지원액 인상’, ‘몇%로 확대’ 수준의 개별 복지 정책이 도입될 리 만무하며, 설령 추진된다 하더라도 효력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지배세력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역공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복지 공급·전달 체계, 공공시설·기관에 대한 소유구조 및 운영의 문제를 함께 제기해야 개별 복지정책이 노동자·민중 삶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권리를 보장해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혹자는 실현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근본적인 소유구조나 운영까지 제기하면 너무 급진적이어서 우리 사회에선 아직 너무 이르다고. 실제 그러한가? 예를 들어, 등록금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당장 중요할 수도 있지만, 왜 우리의 목표가 ‘반값’이어야 하는가? 이미 주류 언론도 여러 차례 문제로 지적한 사학재단의 수천억 원 재산을 환수하고, 국공립대학을 대폭 확충하고, 주요 선진국 뿐 아니라 심지어 멕시코와 같은 나라도 시행하고 있는 무상 고등교육을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전세 값 억제나 지원책이 당장 필요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공공주택 보급을 대폭 확대해야 노동자·민중의 주거권이 실현되는 것 아닌가? 하물며 싱가포르도 그 정도는 하고 있지 않는가?
물론 국유화나 사회적 소유만이 답이 아니다. 어떤 국유화·사회적 소유냐가 중요하다. 위에서 예를 든 주요 선진국과 멕시코의 무상 국공립대학이나 싱가포르의 공공주택 제도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가 계급이 장악하고 있는 ‘국유화’와 ‘공공서비스’이다. 공공·복지서비스와 기관, 시설을 노동자·민중이 소유할 뿐 아니라 민주적으로 통제 및 운영하느냐가 관건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경로에 대한 고민과 실험을 ‘혁명 이후’로 유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제기하기엔 ‘아직 너무 급진적’이라고 규정은 대중의 상상력과 역동성을 간과하는 것이며, 개량주의에 안주하고픈 세력의 핑계일 뿐이다.
공공·복지 시설이나 기관에 대한 국유화나 사회적 소유를 통한 공공적 소유, 노동자·민중의 통제와 운영 구조, 노동자·민중의 주체적 투쟁을 통해 쟁취한 권리로서의 복지는 결국 사회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사회주의적 전망이 있어야 노동자·민중 즉 99%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진정한 복지를 쟁취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정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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