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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깃.덩.어.리.

.고.깃.덩.어.리. ‘ 사창가’는 식육점으로 불린다. 식육점 불빛 아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이 섹시하더냐. 나와의 동침 시 빨간 조명을 켜는 여자랑은 안 잘란다. 촌스러운 여자는 상상력이 부족할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갈보집 maisons of abattage은 직역하면 도살장이 된다. ‘사창가’의 불빛은 언제고 식육점의 조명이다. 강간당한 여성들은 “저는 제 자신이 고기 덩어리 같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한다. -체인, 소몰이 막대, 올가미, 개 목걸이, 로프 등은 동물을 통제하는 데에 쓰인다. 동물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기구가 변태 성행위에 사용되는 것이다. (변태 성행위에 사용되는 도구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마냥 변태 성행위로 모는 것은 아니다. 합의가 가능하다면 다양한 섹스체위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진정한’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경우 합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새디즘은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느낀다. 고통을 즐기는 사람의 고통은 새디스트에게 쾌락을 제공하지 못한다.) 포르노에서 여성은 암코기 덩어리처럼 비춰진다. 남성들은 유방, 다리, 질, 엉덩이 부위가 성적 흥분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 놈의 페니스가 날 달아오르게 해, 라고 말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그 남자 참 실해라는 말을 하기는 해도. 한 손아귀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유방, 탱탱한 엉덩이, 매끈한 다리. 여성의 ‘조각난 몸’이 섹시하단다. 몸만이 존재하는 여성은 고깃덩어리가 된다. 최초의 은유는 동물이었으니, 동물의 이름과 신체는 도살당한 고기의 이름 속에 부재한다. <캐롤 아담스, 프랑케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p82> 살아 숨쉬는 동물은 고기의 개념에서 부재한다. 부재지시대상은 독립된 실체로서 동물을 망각하도록 만들고, 그런 동물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애완동물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 날 저녁을 삼겹살로 먹는 사람에게 그렇다. 돼지고기 집 간판에서 웃고 있는 돼지나 치킨 체인점 박스에 붙어있는 까불대는 닭의 모습도 그렇다. 혹은 갈갈이 부위별로 나뉘어 피도 흐르지 않고, 잘 포장된 상품이 된 마트에 걸려있는 고기 덩어리들이 그렇다. 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스스로를 고깃덩어리라고 하는가, 혹은 ‘사창가’는 식육점으로 불리는가. ‘고기’라는 것은 폭력적으로 모든 것을 박탈당한 것을 의미한다. 그녀들은 얼굴과 팔과 다리가 잘라나간 ‘토르소’의 존재이다. 여성이 아니라 고깃덩어리의 묶음. 다만 여성은 자신을 고깃덩어리로 여길 수 있고 그렇게 취급당할 수 있지만 동물은 실제로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다. 산채로 학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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