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부.엌.에.는.늘.엄.마.가.있.었.다

.부.엌.에.는.늘.엄.마.가.있.었.다. 하루키가 내 부엌으로 들어왔다, 라는 요리책을 본다. 파락호같은 자식, 이 멜랑꼬리한 재료들의 이름은 아마 그가 좋아하는 그리스 남부 섬에서나 세계화시대를 온 몸으로 껴안은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듯. 남자들이 쓴 요리책은 애증을 불러일으킨다. 이현우나 하루키의 요리책, 구질구질하지 않다. 요리책에서 ‘폴로스포츠’ 향이 난다. 그 책들은 서점의 ‘여성’ 코너 중 한 부분인 ‘요리섹션’에 앉아있다. 귀여운 것들. 하선정이나 서정희의 요리책은 구질구질하다. 20대의 젊은 언니에게(나 말이다;;) 그들의 책은 구구절절한 감정을 맹근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만들어보아요. 남편의 생일날 만드는 특별한 요리. 스테미너를 보강해주는 요리는 무엇일까. 그녀들의 요리책에선 부엌냄새가 난다. 엄마의 ‘방’ 부엌냄새-비린내, 젓갈냄새, 김치냄새, 마늘냄새, 그리고 엄마의 손 냄새. ‘꽃보다 아름다워’에 나오는 고두심 엄마의 냄새가 난다. 유희로서의 음식, 노동으로서의 음식. 산뜻한 얼굴로 앉아있는 ‘하루키가 내 부엌으로 들어왔다’를 집어 든다. 기왕 돈쓰는 바에야 보보스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미도리가 브래지어 살 돈을 털어 요리기계를 샀을 때 나는 화가 났다. 엄마가 아팠을 때, 아빠의 아침밥을 차리기 위해 부엌에 들어갔었다. 밥을 먹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아쉬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브래지어를 하지는 않지만 부엌에게 요리기계를 선물할 만큼 마음 씀씀이가 좋지는 않다. 미도리가 부러워서 화가 났다. 엄마처럼 살지 않아야지, 라는 말은 평생을 부엌데기로 살지는 않을 거라는 다짐이었는데. 이 땅의 윤똑똑이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부엌은 게토였다. 그 곳에 빠지면 엄마처럼 된단다. 자식을 낳지 말아야지, 란 생각이 처음 든 것은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 여섯 개를 싸는 엄마가 꿀꿀해서였다. 하여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요리를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여성과 테러를 당할 여성의 수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그 노동은 남성을 위한 것이다. 떠꺼머리를 한 아들놈이던지, 옆구리에 러브핸들이 잡히는 남편이던지. 여성은 먹을 것을 탐내서는 안 된다. 가지지 못한 것은 늘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아, 골룸을 보라. 섭식장애 진단을 받은 사람들의 95%가 여성이다. 왜 여성은 자신의 굶주림에 대해서 과잉보상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분노에 사로잡혀 더 이상 어떤 음식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넓은 어깨, 밋밋한 허리, 좁은 엉덩이, 납작한 아랫배... 우리는 남성의 선천적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먹을 것을 조절해야만 한다. 남성의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와 먹을 것에 대한 욕구과잉 사이. 내면의 여성성을 밀어내고 음식을 꾸역꾸역 채운다. 그리고선 자신을 짓이긴다. ‘겨우’ 먹을 것 하나 통제 못하는 밥벌레 같은 나. 자궁이 들어있는 배는 아랫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지방층은 남성의 그것보다 두껍다. 배우지 않았던가. 속옷을 안 입었다고 등짝을 후려치던 가정선생님에게서.
자신의 몸을 능욕하기 위해서 여성은 자신이 생산한 것을 부정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먹는 일은 단순한 물리적 영양섭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랑받지 못했을 때, 용서받고자 할 때 음식은 그 대용품이 된다. 외.로.운. 것 같아, 그래서 전화기를 드는 대신 치즈케ㅤㅇㅣㅋ을 먹어. 김나인의 미니홈피에서 무단 도용했다. 사랑받고 있다는 최초의 경험은 대개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던 기억과 관련된다. 아이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으면 사탕을 준다. 화이트데이와 발렌타이데이에 사랑을 전하는 기계는 사탕과 초콜렛이다. 어느 레즈비언 영화의 끝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먹으면서 그 사람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성적욕구를 표현하면서 널, 먹고 싶어 라고 말한다. 먹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여성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티격태격 싸운다. 남성은 그럴 필요가 없다. 먹는 것 이상의 먹는 것, 그 의미도 여성에게는 노동이다. 관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서의 음식은 감정노동을 떠맡은 여성에게는 노동인 탓이다. 여보, 오늘 회사에서 피곤했지? 이것 먹고 힘내요.(박카스 선전 같군, 미안하다) 아가, 모유가 좋다던데, 분유만 먹는 아가 짠하지도 않냐? 직장 그만 둘 생각은 없는겨? 여성은 먹을 것을 만드는 사람이지 결코 먹는 사람은 될 수 없다 나는 널 먹고 싶어, 라고 말하는 여성을 난 도무지 본 적이 없다. (채식주의자인 내가 그런 말을 쓸 수 없지 않은가.) 아아, 골이 난 것뿐이에요. 더 이상 여성이 배고픈 이야기는 안 할란다. 오늘은 ‘여성이 먹는 이야기’를 한다. 나를 위해서 먹을 것을 만든다. 덧붙여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까지도 강매할 것이다. 이왕 꼴통 페미년이 되어서 한 세상 살아가겠다는데 ‘제대로’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다른 무엇을 먹는다. 채식주의자가 된 후, 여성의 정체성이 그랬듯 먹는 것도 하나의 혁명일 수 있음을 알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