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은 성공한 사람들의 기념비다. 시나 소설 따위는 원래 무명 상태에서 쓰기 시작하는 것이지만, 이 장르는 자기 분야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만 기회가 온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도서출 판 텍스트, 2011년)와 <운동권 셀레브리티>(도서출판 텍스트, 2011년)는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성공이나 유명도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자서전이다. 두 사람의 책을 출간한 도서출판 텍스트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라는 명칭 아래 이미 열아홉 권이나 되는 보통 사람의 자서전을 냈는데, 필자들은 모두 20~30대 젊은이다. 이런 연령 사항 또한, 뒤돌아볼 세월을 가진 사람들이나 쓸 수 있는 자서전의 규약과 어긋난다면 어긋난다.

칙릿(Chick-lit)을 연상케 하는 김류미의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는 허영 가득한 강남 소녀의 욕망을 훔쳐보고 싶은 독자들의 관음증을 당장 충족해줄 듯한 제목이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은, 다른 책과 구별하게 하고 내용을 요약하고 독자를 유혹하는, 제목의 세 가지 기능 가운데 세 번째 기능을 잘 완수한 책이다. 그런데 정작 지은이의 스물여덟 해 동안의 삶은, 명품 사용설명서나 같은 읽을거리를 기대했던 독자의 시야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 달아난다. 청승맞기 짝이 없게도 지은이는 자신의 자서전 첫 구절을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지영 그림


지은이의 아버지는 강남이 개발될 때 졸부가 될 수 있었던 부동산 소유자가 아니었다. 재개발이 시작되자 구청 공무원들은 가건물이라며 지은이가 살던 집을 부수었다. 공장일 과 식당일을 했던 부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우유 값과 신문 값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절대 가난을 벗어나고 나면, 가난을 계량하는 방법도 꽤나 상대적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지은이가 얼마만큼 가난하게 자랐는지, 열거된 사항만으로는 파악할 재주가 없다. 단지 지은이가 어린 시절 월셋집에서 전셋집으로 이사하면서 다달이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놀라운 기적으로 체험하고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마음껏 사치를 누린 게 책밖에 없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그녀를 키운 것의 5할은 공공 도서관이고, 나머지는 아르바이트였다. 200여 쪽의 본문 가운데 상당한 분량이 아르바이트 체험에 할애되었는데, 지은이의 첫 아르바이트는 고등학교 시절 단과 학원에 다니면서 했던 근로장학생. 쉬는 시간에 강사가 판서해놓은 칠판을 지우면 학원비가 면제됐다. 일찌감치 시작한 아르바이트 행로는, 수능을 마친 이튿날부터 편의점에 다니는 것을 시작으로 햄버거 체인점, 전단 돌리기, 대학 매점, 도서관 근로장학생, 동대문 옷가게, 학생 과외, 노래방 카운터, 호프집을 닥치는 대로 전전했다. ‘강남거지’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몇 년간 ‘알바 인생’을 계속 살았다. 졸지에 ‘88만원 세대’의 당사자가 된 것이다.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김류미 지음도서출판 텍스트 펴냄
조약골의 <운동권 셀레브리티>는 88만원 세대의 초상을 얼핏 보여준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와는 색깔이 많이 다르다. 김류미에게 했던 식으로 분석하면, 그의 삶은 음악이 5할이고 남은 5할은 농성이다(어쩌면, 지은이는 내 말을 부인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자신의 삶은 ‘농성이 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중학교 때부터 온갖 음악을 섭렵했던 그는, 음악으로나 외양으로나 자유롭고 저항적인 헤비메탈에 심취했다. 그것이 대학 시절의 그를 그룹 밴드로 인도하게 되지만, 그의 삶을 결정 지은 원초적 풍경은 1986년, 중학교 수업 중에 목격한 건국대학교 사태다. 옥상에 봉쇄된 대학생들이 진압 경찰에게 무지막지하게 진압되는 것을 본 순간 그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아나키스트적 의문과 조우했다.

출판사 취직하고, 강정마을 간 저자들

지은이는 20대 후반인 1998년, 자신의 이름을 ‘약골’로 바꾸었다. 강한 것을 숭앙하는 국가주의· 군사주의·가부장적 문화를 거부하고, 강자가 아니라 스스로 약자가 되겠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를 해독하는 해독제로 아나키즘을 선택했다. 흔히 ‘100명의 아나키스트에게 100명의 아나키즘이 있다’고 말해질 만큼, 아나키즘 강령과 실천은 백인백색이다. 바로 이런 자기 합리화 속에서,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명사들의 비겁한 은둔과 요란한 말치장이 용인되어 왔다. 그런 명사들과 지은이를 가르는 것은 “자립과 연대를 통해 상호부조의 새로운 질서를 엮어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는 직접 행동이다. 대추리·용산·두리반에서 우리는 그가 짓고 부르는 노래 <나이키·아나키>를 들을 수 있다. 


   
<운동권 셀레브리티>조약골 지음도서출판 텍스트 펴냄
‘내 삶이 차츰 자본주의와 국가의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바로 그것이 혁명’이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모든 농성장을 자신의 집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것과 함께 그가 공들여 하는 일은 군대 반대 운동으로, 이 책에 나오는 ‘군대의 본질’이란 글은 아주 인상적이다. 그 글에서 지은이는, 남한의 군대는 모든 외국 침략으로부터 남한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예컨대 북한은 자유민주 체제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무력을 통해 제압해야 하지만, 미국이 쳐들어온다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결국 “누구로부터 남한을 지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며, 한 줌의 기득권자들을 위해 민중이 복무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의 지은이는 현재 출판사에 취직해 그 지긋지긋한 알바 인생을 끝마쳤다. 문학보다 논픽션이 체질에 맞는다는 그녀는, 자신이 거쳤던 ‘당사자 운동’의 경험을 되살려 자기 세대를 위한 담론 작업과 이들을 위한 책을 만들고 싶어한다. 한편 <운동권 셀레브리티>의 지은이는 책 말미에 쓴 대로, 현재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에 가 있다고 한다. 모쪼록 그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

무릇 자서전은, 삶의 목표를 발견하고 거기에 매진했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때문에 자서전은 자신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소명에 이르기까지의 성찰과 시행착오도 아울러 기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젊음이라는 연령적 제약은, 온전한 자서전 쓰기를 방해하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 두 권의 책은, 딱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큼 자서전으로 손색이 없다.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가 줄기차기를 고대하며, 독자들의 성원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