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바닥을 다지듯 걷고 또 걷는다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5/11/05 20:50
기나긴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더이상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지쳐 아랫집으로 돌아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바닥에 앉아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대안달거리대 만들기 워크샵이 있었다.
우리가 주최한 것이 아니고 초청을 받아 간 워크샵이었는데,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에 행사 장소를 잘못 찾아가게 되었다.
홍대 근처에 있는 곳에서 워크샵 요청이 들어왔고, 따로 행사 장소 이야기를 듣지 못한 우리들은 당연히 홍대 근처에서 워크샵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침 9시 10분.
어느 때보다도 일찍 일어나 밥도 못먹고 사무실에 나와 가방 한 가득 워크샵 용품들을 챙겨넣고 홍보판때기들을 걸머지고 아랫집을 나섰다.
그런데 삐리리~ 전화가 울린다.
워크샵 장소가 홍대 앞이 아니라 낙성대라는 것이다. 
바로 낙성대로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홍대로 오기로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아무런 연락할 방법이 없었던 나와 매닉은 하는 수 없이 홍대에 가서 커다란 벽보를 붙이고, 마침 그곳에서 피자매연대를 기다리던 사람들 3명과 함께 낙성대로 향해야 했다.
이 때문에 오전 10시에 열리기도 돼있던 행사가 부득이하게 1시간 늦춰지고 우리들은 조급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잡아타고, 택시를 낚아타는 기분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잠도 설친데다가 아침도 먹지 못하고 커피도 마시지 못한 초췌한 상태에서도 낙성대 주변 산이 단풍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불타는 녹두 벌판에 새벽 빛이 흔들린다 해도
 굽이치는 저 강물 위에 아침 햇살 춤춘다 해도
 나는 눈부시지 않아라'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부를 힘이 나지 않았다.
 
의사소통의 문제는 계속 되었다.
워크샵 참가자들은 바느질 도구를 아무 것도 준비해놓지 않았다.
가위와 바늘과 실은 대안달거리대 만들기 워크샵에 오려면 기본적으로 준비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준비해달라고 미리 이야기를 했지만, 빈손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
다행히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내가 준비해 간 바늘과 실과 턱없이 부족한 가위를 나눠주고, 허비할 시간이 없어서 바로 워크샵에 돌입했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보통 2시간 이상 3시간 정도 걸리는 것을 1시간에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참가자들이 달거리대를 완성짓지 못하고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아야 했다.
 
곧이어 배가 고파왔다.
빈 속에, 설탕과 크림이 가득 들어 약간 비위가 상하는 밀크 커피를 쏟아넣었다.
연신 물을 들이키다가 겨우 정리를 하고, 간단한 인터뷰도 하고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조개도, 새우도, 고기도, 생선도 넣지 않고 맹물에 야채와 버섯과 두부만을 넣고 끓인 된장찌게를 주문했다.
식당주인은 까다로운 주문에 약간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지만 내어온 된장찌게는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난 뒤여서 이미 난 정신적으로 지쳐있었다.
곧바로 아랫집으로 달려가 복사물과 천과 가위와 달거리대와 안감이 가득한 거북이등짝을 내려놓고 기타를 들고 신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이미 시각은 예정된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차량에 탑승해 이동하면 몸은 빨리 움직일지 모르지만 빠른 이동속도에 적응이 안 된 내 마음은 연신 반항을 늘어놓는다.
좀 천천히좀 가자고.
왜 그렇게 빨리 사냐고.
연신 보채는 어린아이를 달래고 달래는 심정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게 조금만 참으라고 애써 억누르며 위기의 순간을 넘긴다.
 
새만금 갯벌을 살려달라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뭔가 일이 될 것 같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곧바로 선전물들을 설치하고, 테이블을 놓고 서명을 받고, 그레질 퍼포먼스를 하고, 피켓을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목소리를 풀지 못하고 그냥 바로 마이크도 없이 웅성웅성 왕왕거리는 역사 안에서 육성으로 노래를 하려니 힘이 더 든다.
불안불안한 내 목소리는 라까지도 올라가지 못하고, 겨우 솔 언저리만을 맴돈다.
그래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노래를 하니 힘이 살아난다.
5시까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노래를 계속 부르다보니 사람들이 이제 그만 하자고 한다.
5시가 넘어서 주섬주섬 캠페인 용품들을 챙겨서 연세대학교 잔디밭으로 이동했다.
잠시 쉬며 얘기도 하고 짧게 회의도 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쓸쓸해했다.
쓸쓸하게 살기로 했으니 쓸쓸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혼잣말을 주고 받으며, 오랜만에 천천히 땅바닥을 꾹꾹 다지듯 걷고 또 걷는다.
 
오늘은 네팔 달력으로 추석이란다.
그래서 네팔 친구들이 잔치를 벌인단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채식주의 반전평화 펑크밴드인 'Battle of Disarm'의 서울 공연도 오늘이다.
아마 지금쯤 신나는 펑크록 공연이 펼쳐지고 있을 터.
난 하루쯤 푹 쉬고 싶다.
내일 공개워크샵이 끝나고 사람들과 함께 동대문에 있는 네팔 음식점 '나마스테'에 가서 뒷풀이 저녁을 먹고 나면 다시 의정부에 달거리대 배달을 간다.
11월 7일 월요일에는 달력이 텅 비어있다.
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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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5 20:50 2005/11/0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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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돕헤드 2005/11/06 12:01 Modify/Delete Reply

    월요일에는 일단 잠을 푹 자고 난 다음에 자전거도 타고, 동네 뒷산도 가서 단풍 끝물의 정취도 느껴보고, 무엇보다 초희가 편곡한 '평화가 무엇이냐'에 보컬트랙을 녹음하려고 한다. 참참, 쌀이 완전히 떨어져서 쌀도 좀 팔아와야겠고. 음, 생각보다 할 일이 많네.

  2. 옹줴 2005/11/06 12:30 Modify/Delete Reply

    정말 수고가 많았구나. 늘 수고가 많은 생이네- 돕. 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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