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하까 꼬뮨의 시작

경계를 넘어 2006/11/07 03:03
이번 와하까 민중자치투쟁의 발단이 된 것은 와하까 지역 교사들의 총파업이다.
이 총파업은 2006년 5월 22일에 시작이 되었고, 교사들은 학교에 나가는 대신 와하까 시내에 텐트를 치고 천막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이 총파업에 참여한 교사들은 7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멕시코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와하까 지부는 보통 Section 22라고 불리는데, 바로 이들이 총파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와하까 꼬뮨을 이끌고 있으며, 와하까 민중의회(APPO) 건설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20일 넘게 교사들과 교육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자 정부는 6월 14일 새벽 3시 무렵부터 경찰 헬기와 곤봉 그리고 방패로 무장한 3천여 명의 경찰(최소치임. 이보다 훨씬 많은 경찰이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됨)에 의해 유혈 진압을 당하게 된다.
마치 지난 5월 4일 대추리에 몰려든 경찰들의 폭력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경찰이 공격할 당시 천막농성이 진행되던 와하까 시 광장(the Zocalo)에는 3만여 명의 교사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6시간 넘게 계속된 경찰들의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3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데, 여성 두 명과 아이 한 명이라고 한다.
물론 멕시코 당국은 경찰의 무리하고 폭력적인 진압으로 3명이 사망했다는 사실 조차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이것이 공식적인 뉴스로 보도가 되지는 못했다.
꽤나 익숙한 풍경 아닌가?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가장 최근에만 보더라도 포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하중근 열사가 경찰이 휘두른 둔기에 뒷머리를 얻어 맞고 살해당했는데도 아직까지 이 썩어빠진 국가는 발뺌과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을 지는 경찰은 없고, 오히려 이들 남한의 경찰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서 날뛰고 있는 실정이다.
 

와하까 시 광장의 모습
Photo: D.R. 2005 Narco News
 
이 날의 비참한 유혈 진압으로 와하까 교사들이 자체 운영하고 있던 라디오 방송국 Radio Plantón도 강제로 폐쇄된다.
멕시코에서는 1994년 1월 1일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활동을 시작한 이래 진보운동에서는 대안 미디어가 가진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이것을 적극 활용해왔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99년 시애틀 투쟁을 통해 태동하여 전 세계 수 백개 지역에서 진보적이고 독립적인 언론활동을 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인디미디어(indymedia)의 정신도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에서 따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류 상업언론이 진보운동의 소식을 알려내지 않는다면 스스로 대안언론을 만들어 자신의 소식을 전파시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대안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기존 대부분의 주류언론매체에 대해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황새울 방송국 들소리에 대해 속시원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매일 열리는 촛불행사에 들소리 방송을 보기 위해 온다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멕시코 경찰은 이날 교사들의 총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쳐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이 라디오 방송국을 공격했고, 그래서 제일 처음 연행되었던 사람들도 바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와하까 교사들은 대학 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자신들의 투쟁을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며, 진실을 알리고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게 된다.
대학 방송국을 통해 발표된 라디오 뉴스에 따르면 이날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0명이라고 한다.
경찰은 장총으로 최루탄을 쏘며 진압을 시도했고, 사망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역시 80년대, 90년대 한국에서는 익숙한 장면이다.
1987년 6월 9일에는 이한열 열사가 바로 경찰이 쏜 SY-44라는 직격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목숨을 잃었으니까.
그리고 그 유명한 87년 6월 항쟁이 시작이 된 것이다.
와하까도 비슷한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던 것이다.
 
 
경찰이 침탈을 시작한 이후 경찰에 맞서 교사들과 노동자들, 학생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고 힘싸게 싸웠고, 마침내 오전 10시 이후 경찰이 폭력적인 진압을 끝내고 퇴각하게 되었다.
교사들은 곧 점심 이후부터 와하까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경찰 병력이 시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리케이트는 점점 확대되어 시내 30개 지역을 봉쇄하게 된다.
이후 이렇게 시내 곳곳에 설치된 바리케이트는 와하까 꼬뮨의 상징처럼 자리잡게 된다.
와하까 민중들은 국영 방송국과 기타 투쟁을 지속하기에 필요한 건물들을 점거하면서 그 주변 도로를 버스와 트럭 등으로 막는 바리케이트를 설치한다.
 
그리고 이날 와하까 교사들의 농성을 멕시코 연방 경찰이 나서서 유혈진압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멕시코 전역에서 지지자들이 와하까 시내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멕시코 경찰은 이미 한 달 전 아텐꼬에서 악명 높은 유혈 진압을 자행한 바 있었는데, 이날 와하까에서 벌어진 상황은 그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치 3월 6일, 3월 15일 그리고 4월 7일에 걸쳐 대추리, 도두리 황새울 벌판을 야금야금 공격하던 한국 경찰이 5월 4일 한 번에 그 폭력성을 최대로 드러낸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하여튼 이와 같은 경찰의 폭력 진압은 오히려 민중들을 결집시켜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고 만다.
 
와하까 민중들은 이런 경찰의 폭력을 계기로 몇 년간 쌓여왔던 분노를 집단적으로 표출하게 되고, 이런 분노로 들끓기 시작한 거대한 함성은 율리세스 오르티스가 수장으로 있던 와하까 주정부를 축출하고 민중들의 자치권력 즉 와하까 꼬뮨을 건설하는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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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03:03 2006/11/0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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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2006/11/07 04:23 DELETE

    Subject: 와하까 꼬뮨

    돕헤드님의 [와하까 꼬뮨의 시작] 에 관련된 글. 대추리 도두리에서 와하까에서..아텐꼬에서 어디든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날은언제 올런지-ㅅ-;
  1. 69Hz 2006/11/07 02:22 Modify/Delete Reply

    연재기대중!

  2. 넝쿨 2006/11/07 04:40 Modify/Delete Reply

    부끄럽삼-_-;;
    위치가 위치인 만큼 잘 해야할텐데... 쩝-_-;;
    그나저나 우리도 대추리도두리 입구에 철조망 못치게
    바리케이트를...;;;

  3. 디디 2006/11/07 07:54 Modify/Delete Reply

    고마워요 돕!

  4. toiless 2006/11/15 17:32 Modify/Delete Reply

    참세상 영상팀입니당... 브래드 윌 영상 올리면서, 돕헤드 블로그를 링크 걸었어요... 알려드리려고 덧글 남깁니다. 저도 연재 기대할께요..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international_media&id=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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